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교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아무 것도 손
에 잡히지 않았다. 자꾸 미지의 입술 - 그녀가 낼름 하고 핥던, 엷은 핑크빛의 이미지가 떠
올라, 마침 텅 비어있던 나의 머릿속을 쉴새없이 헤집어 놓았다.
그녀의 키스는 무슨 의미였을까.
. . .
나는 방과후 교문 앞에서 독서실로 가는 승합차를 기다렸다. 독서실은 집과 꽤 멀리 떨어
져 있어 나는 독서실에서 운행하는 중형 승합차를 타고 다녔다.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부
산히 빠져나가는 어스름한 해질녘의 교문 풍경. 마치 어디론가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줄기처
럼 보인다. 그리고 나 또한 그 흐름에 휩쓸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 부우웅
승합차가 도착하고 나는 마치 기계처럼 차에 올라탔다. 몇몇 아이들이 함께 차에 올랐고
에어컨을 틀어 놓았는지 차안은 선선했다. 운전석에 앉은 20대 후반의 독서실 실장은 시종
일관 아이들에게 재미없는 농담을 던졌다. 무미건조한 일상에 지친 아이들의 기분을 풀어주
려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 귓전에 와서는 이내 의미 없는 소음이 되고 만다. 생각 해 보
면 자상한 배려인데도.. 나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뭐가 그리 좋은지 웃고 떠들어대는 아이
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련해졌다.
" 하유리! 유리야! "
" 아.. 응. "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통에 나는 잠에서 부스스 깨어났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아 눈
을 가늘게 뜨고 몇 번 깜빡인 후에야 눈앞의 얼굴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승호.. "
" 다 왔으니 이제 잠 깨. "
승호였다. 승호와 함께 차에서 내린 나는 아직 잠이 덜 깬 걸음걸이로 비틀비틀 독서실 계
단을 올랐다. 계단은 좁고, 가파르다. 긴 통로의 끝에는 엷은 불빛이 새어나온다. 뒤따라오던
승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저기.. 유리야, 내가 지난번에 말한 거.. 생각 해 봤어? "
그는 기대감에 가득 찬 눈을 빛내며 내게 물어왔다. 지난번.. 지난번에 이 녀석이 내게 무
슨 말을..
" 아.. 그, 영화 보자고 했던.. "
" 그래, 생각 해 봤어? "
나는 조금 당황했다. 분명 일주일 전쯤 녀석은 내게 영화관 초대권 두 장을 건네며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었지. 그때 좀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두 번 다시 떠올려 본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질문을 받자,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생각했다.
" .. "
녀석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오직 둘 뿐인 독서실 계단 통로에서, 그 소리
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내 귓속으로 파고든다.
그것은 마치, 쉴새없이 그의 머릿속을 휘젓고 있을 상념의 울부짖음처럼, 나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구체화된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
른 채로 나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는 승호. 귀여운 녀석이다.
" 쿡쿡.. "
" 야.. 웃지만 말고.. "
나는 승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단정한 얼굴에 스포트한 숏컷이 잘 어울린다.
" 그래, 가줄게. 언제라고 했지? "
" 정말? 진짜 같이 가는 거지!? "
거절할만한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선뜻 녀석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이고 말
았다. 그와 동시에 녀석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띄웠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승호의 모
습을 보고 나 또한 기분이 좋아져 괜스레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흥분한 승호가 너무 큰 목소리로 약속 시간과 장소를 떠들어대는 바람에 독서실 총무가 뛰
어나와 우리를 나무랐다. 총무에게 잡혀 방으로 끌려 들어가면서도 나를 향해 V 사인을 만
드는 녀석을 보고 나는 혀를 반쯤 내밀며,
" 메롱- "
하고 답해주었다.
. . .
여느 독서실들이 으레 그렇듯이. 독서실 안은 어둡고, 조용하고, 퀴퀴한 냄새가 난다. 나는
내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학교에서 읽다가 만 소설책을 펼쳤다.
책을 한시간 가량 읽었을 무렵, 누군가가 내 등을 툭툭 하고 두드렸다. 나는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을 빼 내고, 내 뒤의 얼굴에게 속삭였다.
" 왜그래 ? "
" 그거, 새로 산 거니? "
은정이었다. 은정이는 그녀의 굵고 퉁퉁한 손가락을 내밀어, 며칠 전 새로 구입한 내 MDP
를 신기한 듯 만지작거린다. 항상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는 그녀의 손가락은, 내 몸에 닿을
때마다 내게 심한 불쾌감을 준다. 이어폰을 빼지 않은 나머지 한쪽 귀에서는 여전히 프로그
레시브 한 락 음악이 나의 고막을 울려 대고, 나는 시큰둥하게 반응한다.
" 응.. 전에 쓰던 CDP를 누가 가져 가 버려서. "
" 그랬구나.. 하여간 도둑년들이 문제라니까. 근데 이거 비싼거 같은데.. "
그러면서 그녀는 "역시 돈 많은 집은 다르구나" 라고 말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흘긴다. 익
숙해진 시선이지만, 그래도 항상 짜증나기는 매 한가지이다.
" 응, 아빠가 그러는데, 새 모델이래. "
그녀는 거기까지 듣고는 훌쩍 자신의 육중한 몸매를 이끌고 쿵쿵거리며 제 자리로 떠난다.
그녀는 아직도 내가, 그녀가 내 CDP를 가져간 범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능청스런 년. 지금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새로운 범죄 계획이 활발히 짜여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부를 특별히 잘 해야지 하고 생각 해 본적은 없다.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항상 여자는
그저 좋은 남편 만나서 시집 잘 가면 되는 거라는 말을 들어 왔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겨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저 반에서 웬만큼은 공부 잘 한다는 소리를 들을, 그저 그런 정도의 성적. 특별히
눈에 띄는 성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간. 또는 그 이하의 - 좋은 대학을 생각하기 어려운
그런 성적도 아니고. 생각해 보면 어정쩡하기 짝이 없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영문 독
해집이나 수학 교재를 아무리 열심히 풀고 외운들, 청춘을 포기하고 - 어떤 의미에서 나도
그러하지만 - 밤낮으로 공부만 해 대는 괴물 같은 연놈들을 당해 낼 리도 없거니와, 내가
공부를 때려치우고 밤낮으로 놀아난다 해도 아빠와 엄마는 별 간섭을 하지 않을 것임은 물
론, 내가 잘 나가는 대기업 회사 중역 집의 큰딸이라는 사실 또한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공부를 하고 있다. 미친 듯이.
그래, 아주 미친 듯이. 그리 좋지도 않은 머리를 싸매고서.
보상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무엇을?
조금이나마 관심을 끌어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점점 사라져 가는 나의 존재감에 두려웠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너무 늦어버린 것일까. 내가 아무리
공부를 한답시고 발버둥을 쳐도, 유진이는 S대 경제학과를 가서 아빠 뒤를 이을 것이고, 엄
마는 사교클럽에 나가며 바람을 피울 것이고, 아빠는 원조교제를 하면서도 회사를 잘 꾸려
나갈 것이고, 내 존재 가치는 희미해 질 것이고..
. . .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깨어보니 어느 새 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나는 대충 가방을 챙겨 매고 독서실을 나섰다.
독서실 승합차도 없을 시간. 나는 아직 집으로 가는 노선의 버스가 운행되고 있을 가까운
번화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간이 이렇듯 늦은 시간에 독서실을 나오게 되는 일이 있어, 나
는 별로 당황하지는 않았다. 서울의 밤거리.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범죄와 위험이 내가 걷고
있는 평범한 밤길 앞에 도사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학교에서 저녁을 먹지 않았더니, 배가 고파졌다. 하지만 배를 채우기도 꺼려져서 결국, 편
의점 앞의 담배 자판기에서 담배 한갑만을 샀다.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이었을까 . 교복을 입
은 채로 담배를 사고 있는 나를 보고 그가 고함을 질렀다. 나는 네온사인으로 물든 서울의
밤거리로 힘껏 내달렸다.
" 후우- "
검회색의 담배 연기가 별빛 한 점 없는 까만 밤하늘 위로 흩어져 간다. 담배를 피며 길을
걷다 보니, 문득 미지 생각이 났다. 나는 담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모금을 깊숙이 빨
고는 이내 바닥에 던져 버렸다. 미지 때문일까. 갑자기 담배를 핀다는 일이 한없이 무의미
해 진다. 나는 어느새 휘황찬란한 불야성의 한 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길게 펼쳐진 유흥가의
한 복판에서 집을 향해 걷고있는 교복 입은 여학생이라.
" 거기 가는 학생- "
거나하게 취한 듯, 흐트러진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 올 법도 하다. 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아저씨가 용돈 줄까? "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듯 한 그 중년의 남성은 막무가내로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다 싶
더니 자신의 가슴팍으로 나를 끌어안으려 한다. 확 풍겨오는 술 냄새가 불쾌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그와 마주섰다. 그래, 원조교제를 하겠다는 작자의 잘난 얼굴이나 한번 볼까.
하고.
" .. "
" .. "
나는 잠자코 그의 두 눈을 쏘아보았다. 나를 잠시 훑어보던 그의 눈이 어느 순간 확 하고
커진다. 술이 확 깨 버린 듯 도 한 그의 놀라워하는 표정. 실로 재미있다. 그는 나를 바라보
며 무언가 입을 떼려 우물거리더니,
" 저.. 아빠? "
하고 내가 먼저 입을 떼자,
" 아, 아니다! 난 아니야! "
하고 당황한 듯 소리치며 어디론지 달려 가 버린다. 순간 온갖 느낌이 복합되어 내 온 몸
을, 머릿속을 뚫고 지나간다. 슬픔, 더러움, 불쾌감, 외로움, 부끄러움.... 나는 천천히 그가 달
려간 방향으로 나의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든다.
" 병신.. "
어쩐 일일까.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이 순간 내 볼을 따뜻하게 적셔
오는 것은.
오랜만이다. 이런 느낌.
에 잡히지 않았다. 자꾸 미지의 입술 - 그녀가 낼름 하고 핥던, 엷은 핑크빛의 이미지가 떠
올라, 마침 텅 비어있던 나의 머릿속을 쉴새없이 헤집어 놓았다.
그녀의 키스는 무슨 의미였을까.
. . .
나는 방과후 교문 앞에서 독서실로 가는 승합차를 기다렸다. 독서실은 집과 꽤 멀리 떨어
져 있어 나는 독서실에서 운행하는 중형 승합차를 타고 다녔다.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부
산히 빠져나가는 어스름한 해질녘의 교문 풍경. 마치 어디론가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줄기처
럼 보인다. 그리고 나 또한 그 흐름에 휩쓸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 부우웅
승합차가 도착하고 나는 마치 기계처럼 차에 올라탔다. 몇몇 아이들이 함께 차에 올랐고
에어컨을 틀어 놓았는지 차안은 선선했다. 운전석에 앉은 20대 후반의 독서실 실장은 시종
일관 아이들에게 재미없는 농담을 던졌다. 무미건조한 일상에 지친 아이들의 기분을 풀어주
려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 귓전에 와서는 이내 의미 없는 소음이 되고 만다. 생각 해 보
면 자상한 배려인데도.. 나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뭐가 그리 좋은지 웃고 떠들어대는 아이
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련해졌다.
" 하유리! 유리야! "
" 아.. 응. "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통에 나는 잠에서 부스스 깨어났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아 눈
을 가늘게 뜨고 몇 번 깜빡인 후에야 눈앞의 얼굴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승호.. "
" 다 왔으니 이제 잠 깨. "
승호였다. 승호와 함께 차에서 내린 나는 아직 잠이 덜 깬 걸음걸이로 비틀비틀 독서실 계
단을 올랐다. 계단은 좁고, 가파르다. 긴 통로의 끝에는 엷은 불빛이 새어나온다. 뒤따라오던
승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저기.. 유리야, 내가 지난번에 말한 거.. 생각 해 봤어? "
그는 기대감에 가득 찬 눈을 빛내며 내게 물어왔다. 지난번.. 지난번에 이 녀석이 내게 무
슨 말을..
" 아.. 그, 영화 보자고 했던.. "
" 그래, 생각 해 봤어? "
나는 조금 당황했다. 분명 일주일 전쯤 녀석은 내게 영화관 초대권 두 장을 건네며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었지. 그때 좀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두 번 다시 떠올려 본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질문을 받자,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생각했다.
" .. "
녀석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오직 둘 뿐인 독서실 계단 통로에서, 그 소리
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내 귓속으로 파고든다.
그것은 마치, 쉴새없이 그의 머릿속을 휘젓고 있을 상념의 울부짖음처럼, 나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구체화된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
른 채로 나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는 승호. 귀여운 녀석이다.
" 쿡쿡.. "
" 야.. 웃지만 말고.. "
나는 승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단정한 얼굴에 스포트한 숏컷이 잘 어울린다.
" 그래, 가줄게. 언제라고 했지? "
" 정말? 진짜 같이 가는 거지!? "
거절할만한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선뜻 녀석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이고 말
았다. 그와 동시에 녀석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띄웠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승호의 모
습을 보고 나 또한 기분이 좋아져 괜스레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흥분한 승호가 너무 큰 목소리로 약속 시간과 장소를 떠들어대는 바람에 독서실 총무가 뛰
어나와 우리를 나무랐다. 총무에게 잡혀 방으로 끌려 들어가면서도 나를 향해 V 사인을 만
드는 녀석을 보고 나는 혀를 반쯤 내밀며,
" 메롱- "
하고 답해주었다.
. . .
여느 독서실들이 으레 그렇듯이. 독서실 안은 어둡고, 조용하고, 퀴퀴한 냄새가 난다. 나는
내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학교에서 읽다가 만 소설책을 펼쳤다.
책을 한시간 가량 읽었을 무렵, 누군가가 내 등을 툭툭 하고 두드렸다. 나는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을 빼 내고, 내 뒤의 얼굴에게 속삭였다.
" 왜그래 ? "
" 그거, 새로 산 거니? "
은정이었다. 은정이는 그녀의 굵고 퉁퉁한 손가락을 내밀어, 며칠 전 새로 구입한 내 MDP
를 신기한 듯 만지작거린다. 항상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는 그녀의 손가락은, 내 몸에 닿을
때마다 내게 심한 불쾌감을 준다. 이어폰을 빼지 않은 나머지 한쪽 귀에서는 여전히 프로그
레시브 한 락 음악이 나의 고막을 울려 대고, 나는 시큰둥하게 반응한다.
" 응.. 전에 쓰던 CDP를 누가 가져 가 버려서. "
" 그랬구나.. 하여간 도둑년들이 문제라니까. 근데 이거 비싼거 같은데.. "
그러면서 그녀는 "역시 돈 많은 집은 다르구나" 라고 말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흘긴다. 익
숙해진 시선이지만, 그래도 항상 짜증나기는 매 한가지이다.
" 응, 아빠가 그러는데, 새 모델이래. "
그녀는 거기까지 듣고는 훌쩍 자신의 육중한 몸매를 이끌고 쿵쿵거리며 제 자리로 떠난다.
그녀는 아직도 내가, 그녀가 내 CDP를 가져간 범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능청스런 년. 지금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새로운 범죄 계획이 활발히 짜여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부를 특별히 잘 해야지 하고 생각 해 본적은 없다.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항상 여자는
그저 좋은 남편 만나서 시집 잘 가면 되는 거라는 말을 들어 왔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겨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저 반에서 웬만큼은 공부 잘 한다는 소리를 들을, 그저 그런 정도의 성적. 특별히
눈에 띄는 성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간. 또는 그 이하의 - 좋은 대학을 생각하기 어려운
그런 성적도 아니고. 생각해 보면 어정쩡하기 짝이 없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영문 독
해집이나 수학 교재를 아무리 열심히 풀고 외운들, 청춘을 포기하고 - 어떤 의미에서 나도
그러하지만 - 밤낮으로 공부만 해 대는 괴물 같은 연놈들을 당해 낼 리도 없거니와, 내가
공부를 때려치우고 밤낮으로 놀아난다 해도 아빠와 엄마는 별 간섭을 하지 않을 것임은 물
론, 내가 잘 나가는 대기업 회사 중역 집의 큰딸이라는 사실 또한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공부를 하고 있다. 미친 듯이.
그래, 아주 미친 듯이. 그리 좋지도 않은 머리를 싸매고서.
보상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무엇을?
조금이나마 관심을 끌어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점점 사라져 가는 나의 존재감에 두려웠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너무 늦어버린 것일까. 내가 아무리
공부를 한답시고 발버둥을 쳐도, 유진이는 S대 경제학과를 가서 아빠 뒤를 이을 것이고, 엄
마는 사교클럽에 나가며 바람을 피울 것이고, 아빠는 원조교제를 하면서도 회사를 잘 꾸려
나갈 것이고, 내 존재 가치는 희미해 질 것이고..
. . .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깨어보니 어느 새 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나는 대충 가방을 챙겨 매고 독서실을 나섰다.
독서실 승합차도 없을 시간. 나는 아직 집으로 가는 노선의 버스가 운행되고 있을 가까운
번화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간이 이렇듯 늦은 시간에 독서실을 나오게 되는 일이 있어, 나
는 별로 당황하지는 않았다. 서울의 밤거리.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범죄와 위험이 내가 걷고
있는 평범한 밤길 앞에 도사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학교에서 저녁을 먹지 않았더니, 배가 고파졌다. 하지만 배를 채우기도 꺼려져서 결국, 편
의점 앞의 담배 자판기에서 담배 한갑만을 샀다.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이었을까 . 교복을 입
은 채로 담배를 사고 있는 나를 보고 그가 고함을 질렀다. 나는 네온사인으로 물든 서울의
밤거리로 힘껏 내달렸다.
" 후우- "
검회색의 담배 연기가 별빛 한 점 없는 까만 밤하늘 위로 흩어져 간다. 담배를 피며 길을
걷다 보니, 문득 미지 생각이 났다. 나는 담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모금을 깊숙이 빨
고는 이내 바닥에 던져 버렸다. 미지 때문일까. 갑자기 담배를 핀다는 일이 한없이 무의미
해 진다. 나는 어느새 휘황찬란한 불야성의 한 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길게 펼쳐진 유흥가의
한 복판에서 집을 향해 걷고있는 교복 입은 여학생이라.
" 거기 가는 학생- "
거나하게 취한 듯, 흐트러진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 올 법도 하다. 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아저씨가 용돈 줄까? "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듯 한 그 중년의 남성은 막무가내로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다 싶
더니 자신의 가슴팍으로 나를 끌어안으려 한다. 확 풍겨오는 술 냄새가 불쾌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그와 마주섰다. 그래, 원조교제를 하겠다는 작자의 잘난 얼굴이나 한번 볼까.
하고.
" .. "
" .. "
나는 잠자코 그의 두 눈을 쏘아보았다. 나를 잠시 훑어보던 그의 눈이 어느 순간 확 하고
커진다. 술이 확 깨 버린 듯 도 한 그의 놀라워하는 표정. 실로 재미있다. 그는 나를 바라보
며 무언가 입을 떼려 우물거리더니,
" 저.. 아빠? "
하고 내가 먼저 입을 떼자,
" 아, 아니다! 난 아니야! "
하고 당황한 듯 소리치며 어디론지 달려 가 버린다. 순간 온갖 느낌이 복합되어 내 온 몸
을, 머릿속을 뚫고 지나간다. 슬픔, 더러움, 불쾌감, 외로움, 부끄러움.... 나는 천천히 그가 달
려간 방향으로 나의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든다.
" 병신.. "
어쩐 일일까.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이 순간 내 볼을 따뜻하게 적셔
오는 것은.
오랜만이다. 이런 느낌.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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