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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2:47 2,533회 0건
진이 1부

전에 쓰던 글인데...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 모티브를 주실 분께선 아래

의 메일로 연락해 주세요. 지금까지 올린 잡문 중에 완성이 된 것은 "그녀의 선택"뿐인

데... 나머지 글들은 천천히 완성하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이 1부

들길을 따라 냇가에까지 내려가던 난 이상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하도 기가 막혀 뭐라

고 할 수도 없어서 잠시동안 그걸 보고 말았다. 동네 아이들인 듯한 낯익은 예닐곱의 아

이들이 한 여자아이를 윤간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녀석들은 여자아이의 위에서 식식거

리는 동료를 히죽거리며 보기도 하고 여자아이의 속으로 들어가 있는 남자아이의 몸을

자세히 보려는 듯 모래판에 엎드리기도 했다. 참을 수 없어 막 고함을 지르려는 찰나에

그 밑에 깔려 얌전히 있던 여자아이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그 여자아이의 눈은 위에서

식식거리는 사내아이를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 무심한 눈이었다.

"히힛...했다."

한 녀석이 부르르 떨더니 여자아이의 몸에서 엉금 엉금 기어 내려와 모래판에 퍼져 버

리자 다른 녀석이 바지를 내리고 조그만 고추를 곧추세우고 여자아이의 몸에 엎드렸다.

나와 마주친 여자아이의 눈이 마치 참견하지 말고 그냥 놔두라는 듯 했다. 어째 해야 할

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내가 본 두 번째 녀석이 부르르 엉덩이를 떨었다. 불과 열에서 열

서넛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요즘에야 열 두어살이면 바람을 피우는 아이들도 있

다곤 하지만 그래도 이런 건 너무한다 싶었다. 여자아이의 눈과 한번 더 마주쳤을때는

다른 한 녀석이 올라간 후였다. 무심해 보이던 눈에 무언가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생겼

다. 방해하지 말라는 단호한 의지같은 것이기도 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갈대숲

사이로 보이는 장면에서 등을 돌렸다. 담배를 꺼내 물고 한 개피를 다 피우고 나자 낄낄

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내아이들이 왁자지껄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녀석들

은 메뚜기 떼가 풀 위를 날아가듯이 껑충거리며 무리를 지어 달아나고 있었다. 그래도

그 애들보다는 나이가 든 사람으로서 부끄러웠다. 여자애는 사내아이들에게 당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다리를 벌린 채 누워 있었다. 허연 액체가 다리사이에서 흐르고 있었고

엉덩이 사이의 모래가 끈끈하게 젖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며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는데 그 애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씨도 해요?"

이게 무슨 말일까? 혼란스럽다. 의아한 내게 그 여자아이는 손을 내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애들은 오백원인데 아저씨는 크니까 이천원이야."

손에 돌돌 말아 쥔 팬티와 오백원짜리 동전 네 개. 그리고 천원짜리 지폐.

"괜찮아?"

"응! 괜찮아. 맨 날 하는 건데 뭐! 빨랑 해요."

여자아이는 상체를 반쯤 일으키며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티 하나 없는 웃음. 그 웃

음을 보며 내가 미쳤지 싶다.

"일어날 수 있겠어?"

"?"

여자애는 이상하단 눈으로 날 보더니 씨익 다시 웃는다.

"닦고 하자고?"

씩씩하게 벌떡 일어나더니 알몸으로 물가로 걸어간다. 그 아이 몸에는 맞지 않을 듯한

어른용 원피스 하나가 땟국에 절은 채로 누웠던 자리에 깔려 있었다. 여자아이가 대강

씻고 올라와서 다시 누울 준비를 한다.

"됐어. 난 안해."

"왜? 좋은 건데...."

"너 집이 어디야?"

"집?"

"그래. 집. "

"없어."

"부모님은?"

"그런 거 없어. 난 고아야. 할머니랑 살았는데 죽었어."

"그럼 어디서 잠을 자?"

"잠 자는 곳? 그런 건 알아서 뭐하려고?"

"너 돌봐 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

"....."

"일어나. 나랑 가자."

"....."

"빨랑 일어나."

여자애는 내가 가자는 말을 다른 의미로 들었는지 순순히 일어나 바닥에 깔려 있던 원

피스를 주섬주섬 입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팬티를 띠뚝거리며 발에다 꿰고 올렸

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가랑이에선 아까 그 녀석들의 것일 허연 액체가 주르르 흘

러내렸다.

"아이....또 나오네...닦았는데...."

뭐라고 말 할 수 없는 기분으로 앞장을 선 내 뒤를 여자애는 순순히 따라왔다. 거처로

얻은 폐가로 가는 동안 내내 여자애는 내 몇 발자국 뒤를 따랐다. 2년 전까지 사람이 살

았다는 집을 얻어서 얼기설기 고쳐놓아서 우물에서는 수도시설까지 되어 있었다. 가지

고 들어온 살림살이 중 절반 가량은 아직 짐을 풀지 않아서 윗방에 처박혀 있었고 안방

에는 당장 필요한 것들만 대강 정리가 되어 있었다. 여자아이는 거침없이 방으로 들어

가려 했다.

"안돼 옷 벗고 여기 와서 씻어...비누랑 여기 이 타올로 때도 밀고..."

"에이..귀찮게..."

여자아이는 투덜대면서 벽이 무너져 거적을 둘러친 세면장으로 들어갔다. 물을 끼얹는

소리가 나더니 좀 이어서 무슨 만화영화의 주제가인 듯한 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

렸다. 방과 붙어있는 부엌에서 식사준비를 하는데 여자애가 들어섰다.

"그게 닦은 거야? 물만 바른 거지?"

"얼마나 더 닦으라구..."

"따라와 내가 씻어주는 게 낫겠다. 아예 옷을 벗은 채 나체로 활보하는 여자애를 데리고

들어가 구석구석에 붙은 때까지 말끔히 닦아내었다. 마른 체구였지만 벌써 여자의 상징

이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약간 볼록해진 가슴과 다리사이의 솜털이 조금 거뭇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너 몇 살이야?"

"열 한 살.. 이름은 진이."

"진이? 성은?"

"성은 은이고 이름은 진."

"다리 벌려."

다리를 벌리게 하고 수도에서 나오는 호스를 가랑이에 대고 물을 틀었다.

"뭐 하는 거야? 아씨..."

"가만있어."

"아...이..씨..."

낯모르는 아이를 데려와 발가벗기고 이러고 있는 걸 동네사람들이 본다면 어떤 소동이

벌어질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등골이 오싹했다. 누가 본다면 진짜로 심각한 일이 생길

게 뻔했다. 변명이 통하지도 않는...

"잠깐 기다려.."

티와 면으로 된 반바지 하나를 찾아 입혔다. 티는 마치 코트를 입은 것처럼 보였고 반바

지는 흘러내려 무릎에 걸쳤다.

"아....이..."

"투정부리지 말고 손으로 여길 쥐어. 방에 가서 허리띠 줄게."

"그냥 내 옷 입을래."

"저걸 어떻게 입어. 안돼 빨아야지."

세제를 푼 물에 옷가지들을 던져 놓고 고약한 냄새 때문에 도리질을 하면서 밥상을 차

렸다. 라면과 봉지김치. 참치캔과 장조림캔, 찬밥이 전부인 상을 보고 여자애는 군말없

이 전부 먹어치웠다.

"더 주리? "

"됐어. 꺼억..잘 먹었다."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해놓고 방으로 돌아오자 그새 곤하게 잠이 들어있다. 윗목에 여

분의 침낭을 깔고 그리고 옮겨놓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내일 전용선이 가설되고 몇 가

지 기계가 더 오면 완벽한 나만의 공간이 될 곳이 바로 이 폐가였다. 사실 이 시골에서

어찌 보면 너무 튀는 모습이겠지만 나와는 조금 인연이 있는 이 동네라면 별 일은 없을

것이다. 불법 복제 씨디의 원본을 만드는 것이 바로 내 직업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돈

주고 사야하는 프로그램들의 복사방지장치를 깨고 아무나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내

작업인 것이다. 주로 한 밤중에 혼자서 작업을 하는 탓에 도회지의 시끌벅적함과 술친

구들의 방해를 견디다 못해 이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현재까지 못 깬 프로그램의 리스

트를 확인하고 그 중 인터넷에 패치파일이 떠 있을 만한 프로그램의 리스트를 뽑아내는

것으로 오늘의 일과는 종이다. 찌릭거리며 리스트를 인쇄하는 프린터 소리가 오늘따라

귀에 거슬린다. 소음이 가장 적게 나고 빠른 모델로 샀는데도 이 곳이 조용한 탓인지 아

무래도 시끄럽게 들린다. 인쇄가 끝난 문서를 손에 들고 방바닥의 침낭으로 기어들어

대강 훑어보다가 잠이 들었다.

"아저씨 일어나요."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동그란 눈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누구야?"

"나야. 밥 먹고 자."

"밥?"

"응. 내가 했어. 일어나."

방 한쪽에 밥상이 놓여 있었다.

"니가 밥을 했어? 어? 그래도 잘 찾아 했네"

"조그만 게 기특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하다. 반찬으로 올려놓은 통조림 중 부엌

에 있던 건 참치와 장조림뿐이고 깻잎장아찌나 훈제닭 같은 건 박스 안에 넣어져서 윗

방에 있었는데..."

아무래도 녀석이 집안을 좀 뒤진 모양이다.

"먹을 걸 좀 얻어갈까 했는데 부엌엔 별로 없어서 웃방엘 보니 좀 있대."

녀석은 천연덕스럽게 내 생각을 읽은 듯 말을 했다.

"잘 했네. 너 시집가도 되겠다."

"그러까? 나 아저씨 색시해도 돼?"

"뭐어? 농담이야 임마. 누구 맞아죽는 꼴 볼려고 그래. 밥이나 먹자."

밥상을 물리고 설거지를 하려고 부엌에 나와보니 가스버너가 아닌 전주인이 놓고간 석

유풍로에 밥을 한 흔적이 역력했다. 매캐한 석유연기와 시커멓게 그을은 냄비.

"이게 켜지긴 하디?"

"석유병에 조금 남아 있어서 그걸로 살렸어."

"하하..촌놈. 일루 와 봐. 여기 가스버너 있잖아. 이렇게 돌리면 착하고 불이 켜진단 말

씀이야."

"와 좋다. 끄을음도 없고...."

"응. 근데 이게 가스라서 잘못하면 펑하고 터져. 그러니까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가스는 어떻게 채워?"

"이걸 열고 요걸 요렇게 한 다음 이걸 바꾸어 넣으면 돼."

"쉽네. 에이...그걸 모르고..."

진이는 아까부터 내가 컴퓨터를 만지는 걸 보면서 자기도 해보고 싶은 듯 궁금해 죽겠

는 눈치다. 하지만 이건 내 밥줄이기에 쉽사리 넘겨 줄 수는 없었다. 눈치를 주어도 꿈

쩍도 하지 않고 무선 키보드와 마우스로 작업에만 집중하는 내 옆에 바싹 다가온 진이

는 마침내 크게 하품을 하고는 옆으로 스르륵 기울어진다.

"왜? 심심해?"

"응. 나...그거 해보면 안돼?"

"안 돼. 여기 있는 기계들은 건들면 절대로 안 돼. 이건 내 밥줄이니까.."

"아 심심해. 나도 잘 할 수 있는데.."

"나중에 내가 알려줄게. 어쨋든 지금은 절대로 만지면 안돼 약속!"

"알았어. 에이...그럼 나 볼만한 거 뭐 없어?"

"책?"

"응. 만화책이나 동화책."

"만화책은 지금은 없는데....어쩌지?"

"에이...그럼 나 갈게."

"어딜 가려고...."

"그냥...나가서 애들하고 놀려고.."

"안 돼. 너 또 그 짓하려고..."

"뭐 어때? 내가 아저씨 색시도 아닌데...."

"뭐? 기가 막혀서...얌마. 그건 나쁜 짓이야."

"나쁜 짓? 그런 말하는 어른은 아무도 없던데... 다들 그거 좋아하는데... 우리 동네 아저

씨들 나랑 다 했어. 돈도 주고..."

"뭐? 뭐야! 동네 아저씨들이 전부?"

"거짓말하는 거 아냐. 윗말 정식이네는 할아버지도 나랑 했는데...정식이 아버지도 하고

.... 정식이도 하고..."

"이....이런.."

"어제 아저씨 처음 봤을 때 하던 애가 정식이야. 그 자식 아버지껀 정말 크다구...이만

해."

"제엔장"

"그러니까 아저씨도 나랑 해. 아저씬 돈 안 받을게. 잠 자는 거 하고 밥만 얻어 먹을게."

"이 자식이 말이면 다 하는 줄 아나. 그만 두지 못할래! 그건 그런게 아냐 임마. 그건 나

쁜 짓이란 말야."

"뭐가 나빠. 아저씨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먼저 돈주며 하자고 했는데...."

"돈 받고 하는 건 나쁜 거야. 그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란 말야."

"뭐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야. 아저씬 이상해. 정식이 아버지랑 정식이네 옆집 미주엄마

랑 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하는 거야? 정식이 아버지랑 미주엄마랑은 부부도

아닌데?"

"이..이런 시양놈의 새끼덜..."

복장이 터져 미칠 지경이다.

"야. 맘대로 해. 나가서 돈을 받고 하던 말던 상관 안 할테니 너 가서 맘대로 살아. 다신

이 집에 얼씬도 하지 말고...나가 버려."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때 누가 찾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 이장이라면서 어제 찾아왔던

아저씨가 쭈삣거리며 마당에 서 있었다. 택배 배달원 두 사람이 어깨에 멨던 짐을 마루

에 내려놓았다.

"길을 알려 주러 왔어. 아침은 했는가?"

"네. 고맙습니다. 어른께선 진지 드셨어요?"

"응. 난 벌써 했네. 그나저나 쟤가 여긴 웬일이여?"

"진이요? 방금 밥을 같이 먹었거든요."

"허헛. 쟤가 그래도 할머니 살아 계실 때는 밥술이라도 굶지는 않았는디....에잉 쯧쯧"

혀를 차는 이장의 표정에서 "너도 별 수 없는 놈이구나."하는 경멸의 표정을 읽을 수 있

었다. 아마도 나 역시도 자기네와 같이 그렇고 그런 목적으로 진이를 데려다 밥을 먹였

을 거란 생각을 하겠지. 아마 어쩌면 이 마을 남자들은 모두가 다 공범이 아닐까? 진이

말대로라면 전부 다 했다는데 그건 자기들끼리도 다 알고 있는 걸까?

"근디 이건 다 뭐랴? 뭔 짐이 이렇게 많어. 총각 혼자 사는디?"

"컴퓨터 부품들이에요."

"컴퓨터? 우리 집 애들도 컴퓨터 사달라고 난린디....컴퓨터 잘 하남?"

"조금 배웠거든요."

"컴퓨터 비싸지? 요새는 얼마나 줘야 사나?"

"한 이백만원 정도는 줘야 괜찮은 거 살겁니다."

"이백이면...아이구..비싸다."

마지막 짐을 내리던 택배 배달원이 그 소리를 듣고 한마디 한다.

"아 이백이 뭘 비싸요. 이장님이면 그 정도는 눈 딱감고 자식 교육에 투자 하셔야죠."

"자식 교육이고 뭐고 이 동네야 뭐 버는게 있어야지. 이 동넨 순 헛거여."

"자 다 내렸습니다. 여기 인수증에 사인하시고...."

이장은 한 시간 남짓 앉아서 이 동네 돌아가는 사정도 얘기하고 컴퓨터에 대해서 이것

저것 묻기도 하다가 돌아갔다. 이장의 얘기로 대강 들은 바에 의하면 진이의 할아버지

가 오십년쯤 전에 훌쩍 이 동네로 흘러들어 머슴살이를 하며 조금씩 땅을 사서 밥술이

나 먹을 만큼 되었단다. 그리고 슬하에 독자는 서울로 나가서 대학도 나오고 꽤 큰 기업

에 다니며 서울 여자랑 결혼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여자도 손이 귀한 집이라

무남독녀여서 처갓집이라고 해봐야 다 합쳐서 한 식구밖에 안 되었단다. 신혼이 지나

중년에 접어들도록 아이가 없던 두사람이 결혼 십년이 지나서 아이를 하나 가졌는데 그

아이가 진이였다. 동네 사람들은 아마 남편의 아이가 아닐 거라고 수군댔고 결국 그 소

리가 시골에 남은 두사람의 부모, 진이의 할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진이가 두

살 되던 해 술김에 진이의 출생문제를 가지고 농찌거리를 하던 이웃집 사내 하나가 진

이 할아버지 작대기에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생겼다. 사고소식을 듣고 시골로 달려오

던 진이 아버지의 자동차가 사고가 나서 세상을 달리해 버렸다. 진이 할아버지는 외아

들 독자의 사고소식을 듣고 경찰서 유치장에서 혼절을 하고는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한꺼번에 부자의 초상을 치르게 된 진이 할머니는 반실성을 해 버렸다. 장례가 끝나고

삼우제까지 다 지낸 뒤 진이 어머니는 진이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사라져 버렸다. 개가

를 하기 위해 진이를 버렸을 거라는 것이 이장의 짐작이었다.

"그 할머니야 입버릇으로 진이 엄마가 돈을 벌어서 보냈다고 하지만 그걸 누가 믿어. 할

마씨가 어디 가서 조금씩 벌어오는 걸로 입히고 멕이고 하는 거 보면 척이지 뭐. 그 여

자가 암만해도 씨를 준 놈한티 간게라.....쟤도 지 에미 닮아서 곱다지만 여자 얼굴 고와

봐야 뒤웅박 팔자라네."

"그럼 진이 엄마가 죽은 건 아니란 말씀이네요."

"죽진 않았을 거여. 허긴 죽은 거나 진배없지 뭐. 쟤 가스나한틴 죽은 게 낫겠지. 이런

얘긴 좀 뭣하지만 저 아이 행여 자네가 맡을 생각은 말어. 컴퓨터도 잘 한다니 배운 것

도 있는 사람이 실수하랴마는 자네같은 사람이 이 산고랑에 들어온다는 걸 가지고도 삐

딱하게 보는 사람이 많아서 내가 무마를 시켰는디 게다가 저런 아이까지 거느리면 구설

수가 많을게여."

"구설수라뇨?"

"자네도 좀 있어보면 알게 되겄지. 하여간 내 말 명심하게. 저것이 요물이여. 저 아이 데

리고 있다가는 경치는 수가 생길지도 몰러. 그럼 나 이만 가네."

더 캐묻지 않아도 이장이 무얼 말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에 한 경고가 도대체 무

얼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택배로 온 물건을 정리하기도 전에 전화국에서 전용선

을 가설하러 왔다. 삼십분만에 작업을 마친 직원들이 가고 나서 진이를 데리고 읍내엘

가기로 했다.

"앞으로 그런 짓 않는다고 약속하면 읍내에 데리고 갈게. 어쩔래?"

"내가 거짓으로 약속하면 어쩔건데...."

"다신 안 볼거담마."

"약속할게."

"정말이야. 앞으로 무얼 주던, 무슨 얘길 하던 간에 그러면 절대로 안돼."

"알았어. 약속"

오토바이의 뒤꽁무니에 탄 진이가 신이 나서 만화영화주제가를 부른다. 너무 튀지 않는

색깔로 진이의 옷을 몇벌 사고 중고용품 가게에 들려서 냉장고와 에어컨등 가전용품을

몇 개 사고 나서 한가하게 시골 읍내의 어딘가 뒤틀린 듯한 모습을 구경하며 돌아 다녔

다. 현대와 근대가 묘하게 공존하는 곳이 바로 읍내의 장터였다. 한쪽에 들어선 상가의

번쩍이는 쇼왼도우와 반대쪽의 좌판에 초라하게 앉아 있는 지친 시골 여인네들. 먼지가

뽀얀 그네들의 앞에는 호박 몇 개, 감자 몇 개, 파 서너 단이 고작이었다.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를 이용한 범죄자인 내 입장에서는 슬그머니 미안해지는 광경이었다. 서울의 삐

까번쩍한 오피스텔을 마다하고 이런 지치고 힘든 농부들 틈에 끼여서 도시의 때만 잔뜩

벗겨놓고 달아날 내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 지난 날이 얼마나 편안한

삶이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쩌다 만지기 시작한 컴퓨터에 미쳐서 살아온 몇 년

동안 나름대로 벼라별 고생을 다했다고 자위해 보지만 어쨋건 그건 농부들의 고단한 삶

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편안함이었다. 좋아서 하는 일이고 조그마한 재능이지만 인정을

받기 위해 악을 쓴 세월은 고단하기보다는 차라리 즐거운 일이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풀리지 않을 것 같던 락과 각종 트릭, 함정을 피해서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포장

된 소프트웨어가 내 손에 갈갈이 헤쳐지고 공씨디값에 약간의 수고비를 더한 액수로 컴

퓨터매니아들에게 건네지는 순간의 희열이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물론 전문업자들

에게 원판을 건넬 때마다 내 손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건 내

나름대로의 노하우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남의 소프트웨어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일에 대해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아니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편하게 돈을

벌기 위해 남의 수고를 가로채는 도둑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얘기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굳이 해커 십계명을 들먹이지 않아도 현재의

소프트웨어값이 정당한 수준을 넘어 너무 비싸다는 것은 조금만 관심있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자신이 직접 PC를 조립한다고 하더라도 OS와 워드프로세서 팩키지, 게임 몇

개와 그외에 멀티미디어 PC를 위한 전문 프로그램 두어 개면 웬만큼 잘 꾸민 하드웨어

값보다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게 정품 소프트웨어의 함정이다. 비싸면 안 쓰면

되고 어디에나 쓸만한 쉐어웨어가 널려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겠지만 공짜로 얻을 수 있

는 프로그램엔 한계가 있다는 것쯤은 상식이질 않는가? 수없이 많은 프로그램을 깨면

서 소프트웨어 회사들에 피해를 끼쳤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피해보다 더 많은

이익을 유저들에게 주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쪽에 자리잡은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 그냥.... 배 고프지 않니?"

"조금..."

"뭐 맛있는 거 없나 찾아보자."

진이가 선택한 것은 피자와 햄버거였다. TV에서만 보던 것들, 하지만 현실은 익숙하지

않은 진이에겐 고역이었다.

"시기만 하고 에이..."

"음 그럼 다른 거로 먹어. 어디 보자. 닭고기 좋아하니? 치킨."

"응. 나 치킨 좋아해."

치킨은 먹어 보았다고 했다. 할머니가 사주었을리는 없을 테고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보면 누군가가 진이를 농락하기 위한 미끼로 사용했거나 남의 집에서 한조각 얻어

먹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어! 그전에 이장 아저씨네서 먹은 것보다 백 배는 맛있어."

"그래 많이 먹어."

"아저씨 돈 많아?"

"응."

"뭐 하는데? 누가 그러는데 아저씨는 고시공부하러 온 학생이라고도 하고 사고치고 도

망 온 사람이라고도 하던데 어느게 진짜야?"

"글세? 둘 다 맞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한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음. 내 자신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남들이 알면 죄가 될 수도 있지. 하지만 난 좋은

일을 한다고 믿으니까 죄 지은 사람도 아냐. 그리고 공부하는 것도 맞아. 공부도 할 겸

해서 온 거니까 그것도 맞지만 학생은 아니니까 틀리기도 하지."

"어려워!"

"그래. 나도 어렵다. 하지만 그런 소린 누가 물어도 하면 안 돼. 공부하러 온 학생이라고

했으니까 진이도 그렇게만 말해야 돼."

"응. 약속!"

"좋았어."

"아저씨네 집 부잔가 봐?"

"왜?"

"저 오토바이 굉장히 비싼 거라며... 근수 아저씨가 그러는데 아저씨 오토바이가 그랜저

보다 비싼 거라며?"

"허헛. 참....내가 오토바이를 좋아해서 몇 년 동안 뼈 빠지게 고생해가며 모은 돈으로

큰 맘 먹고 산 거야. 우리 집도 그렇게 잘 살진 못해."

"잘 살지 못해도 우리 집이 있었으면 좋겠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진이는 가슴이 메이는 듯 잠시 입을 쉬다가 다시 먹기 시작했

다.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 몇 번 먹을 만한 양을 사서 들려주고 그만 먹도록 했다.

"우리 저기 가서 넌 주스 마시고 난 커피 마시고 가자."

"나도 커피."

"안 돼. 너 밤에 잠 못 자."

"헤. 알았어. 오렌지 주스."

"그건 시기만 한데...."

"그래도..."

"그래. 이따가 오렌지랑 파인애플주스랑 사 가지고 가자. 냉장고도 올 테니까..."

"헤헷....근데 나 아저씨네 집에 가도 돼?"

"뭐? 바보야. 이제 아저씨네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야."

"우리 집?"

"아까 너 "우리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며....앞으론 내 집이 아니라 네 집도 되는 거야. 알

았어?"

"지...진짜야?"

"그래 임마! 아...난 꼬마가 우는 거 질색이니까. 거기까지..."

"그으래....알았어. 고마워요 아저씨."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덜컥 말은 내뱉고 말았는데 몇 달 후면 떠나야 한다는 생각

을 왜 못했을까? 만약 잡히기라도 한다면.... 진이는 다시 고아가 되어야 하는데.... 갑자

기 마음이 무거워진다. 혹시 내 마음에도 악마가 자리잡은 건 아닐까?

"진이야. 너 학교 갈래?"

"학교? 싫어."

"싫어? 학교에 가면 네 또래들도 많고 친구도 생길텐데?"

"학교가면...또......."

"앗차~! 이런 정신 빠진 놈 같으니라고...."

무심코 던진 말에 진이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짐 정리를 끝낸 윗방을 진이방으로 정해

서 같이 산지 일주일이 지났다. 낮엔 자거나 산책을 하기도 하면서 유유자적하게 보내

고 밤에는 꼬박 새워가며 컴퓨터를 끌어안고 사는 내 리듬에 맞춰서 진이의 신체리듬도

조금씩 변해 가는 듯 밤에는 하는 일도 없으면서 잠을 못 자고 책을 뒤적이는 게 안스러

워서 해본 말이었는데 그것이 진이의 마음에 또 상처를 주고 만 것이다. 처음 다짐에 다

짐을 해 둔 것이 단단히 머리에 박혀 있는 듯 진이는 이제 자신 스스로도 그것이 부끄러

운 짓이며 해서는 안 될 행위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짐짓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좋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가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공부를 하긴 해야 하는데....음 그렇지.

TV에서 교육방송하니까 너 밤에 심심하다고 투정부리지 말고 그거보고 공부하면 되겠

다."

"난 공부 싫은데...."

"그래도 해야만 하는 게 공부야. 너 컴퓨터 만지고 싶다고 했지. 공부 못 한 사람이 컴퓨

터 잘 하는 거 보질 못했다."

"그럼 오빠도 공부 잘 했겠네."

어느새 진이의 나를 부르는 호칭이 아저씨에서 오빠로 변해 있었다.

"평균이상은 했어. 반에서 십등 안에는 들었다구..."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래. 진이도 잘 할거야. 공부 시작하면 틈틈이 컴퓨터도 가르쳐 줄게."

"정말이야?"

"응. 약속!"

약속을 해야 마음이 놓이는 아이! 진이는 그날 저녁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며칠동

안 방에 틀어박혀 끙끙거리던 프로그램의 하드키를 해체하고 난 다음날 낮에 진이가 자

는 걸 보고 밖으로 나왔다. 그다지 높지 않은 뒷산에라도 올라갈 생각이었다.

"어이. 이봐 이 사람아. 나좀 보세."

이장이다.

"예 어르신 안녕하셨어요?"

"흠.. 자네 날 좀 따라오게...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러니...."

사랑방에 들어서자 뜻밖에도 막걸리가 놓인 소반이 차려져 있었다. 맛깔나게 익은 김치

와 잉어찜이 상에 놓여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막 자네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잘 됐네."

"전화를 하시지 그러셨어요."

"전화는 무슨 몇 발짝이나 된다구.... 자 한잔 하게.."

"제가 먼저 올리겠습니다."

"괜찮아. 격식은 무슨..."

한참동안 이런 저런 얘기로 말을 돌리는 품이 노회한 이장이라도 하기 힘든 얘기가 있

는 모양이다. 아마 진이 얘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얘기를 꺼낸다.

"저 내가 이런 얘기하긴 좀 그렇지만 자네..... 그 머리 좀 자르면 안 되겠는가?"

"네?"

"동네의 풍기가 문란해진다고 사람들이 말이 많아. 테레비 보니께 요새는 남자들이 머

길러서 치렁치렁하게 묶고 다니는 게 유행인가 보드만....여긴 서울이 아니라 시골여.

그것도 충청도 산골짝이지."

"예! 조심스럽긴 합니다만....제가 지금 공부 중이어서.....어르신 죄송합니다."

"공부? 징크슨가 뭔가여? 그 머리 기른게?"

"예!"

"허! 그럼 무슨 공부를 하는겨? 듣자니 컴퓨터랑 인쇄기에다 베라별 걸 다 가져왔다고

하던디...."

"예. 제가 컴퓨터 프로그래머거든요. 서울에선 복잡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요. 조용

한 시골에선 생각이 잘 될 것 같아서 온 겁니다."

"그 얘긴 저번에 들은 것 같네! 그래도 말여. 촌사람들이라는 게 유난스러운 데가 있어

서 몇 몇 사람은 자네를 의심하고 있어!"

"의심이라뇨?"

"요새 컴퓨터로 은행을 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 자네가 컴퓨터를 연방 실어다 부

친 데다가 낮에는 자고 밤에는 한 밤 내내 꼬박 불이 켜져 있으니 말여. 어떤 사람이 들

어본께 전신기 치는 소리마냥 톡톡톡 소리가 난다고 간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

"가....간첩이요?"

"허헛! 이런 시골구석에 뭐 염탐 헐 것이 있다고 간첩이 올 거냐고 내가 말렸네만 아닌

게 아니라 무지랭이 농투성이들이 보면 이상하기도 하지."

"허허헛! 이거 제가 언제 어르신들 약주라도 대접하면서 해명을 해야겠네요. 이거야 원

!"

"그렇지. 사람이 인지상정이란게 있는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네."

"그럼 언제쯤이 좋을까요?"

"어허 이 사람 단김에 쇠뿔을 뺄려고 하네. 그건 차차 하기로 하고.... 자네 집은 어딘가

?"

"예산입니다."

"예산이면 여기서 지척인디...어째 집으로 안 들어가고 여기로 왔나?"

"집에서야 공부가 되나요."

"하긴 그려. 우리 아이들도 집에서는 공부하라면 죽어라고 달아나더니 그래도 셋째년이

대학에 들어가서 한시름 놨지 허허. 그래 자네 대학은 어디 나왔는가?"

"대학 못 나왔습니다."

"응? 뭐어....대학을 못 갔다구? 이런 쯧 쯧!!"

"형편이 좋지 않아서 가지 못했습니다."

"공부를 못해서 못 간 건 아니구?"

"뭐 그런 것도 있겠죠.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흠. 뭐 후회해 봐야 늦었지! 그래 대학 안 나오고도 컴퓨터 뭐시긴가 할 수 있는거여?"

"컴퓨터는 대학과는 별 상관이 없거든요. 오히려 대학 안 나온 사람이 잘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허허. 고얀....죽어라고 공부해서 겨우 대학에 들어간 사람보다 대학 못 들어간 사람이

낫다는 그런 경우가 있단 말여?"

"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미국의 유명한 컴퓨터회사 사장들은 거의 대학을 졸업하지 못

한 사람들입니다."

"흠...컴퓨터란게 요상한 물건인개벼. 암튼 자네 월수입은 얼마나 되나?"

"수입요? 예~! 일정한 월수입은 없고 일에 따라서 보수를 받기도 하고 프로그램을 판

돈의 일부를 인센티브....아니 인세로 받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총액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얘긴디...예를 들면 년수입...월수입은 없다니께

..."

"대략 ...."음! 이거 곤란한데"...작년에 한 오천만원쯤 벌었나 봅니다."

"뭐어! 오..오천만원...하이구야. 그럼 월로 따지면 4백이 넘네!"

"그렇게 되나요? 계산을 안해 봐서..."

"그 프로뭐신가 한지는 얼마나 됐나? 자네.."

"한 오년 됩니다. 처음 3년 공부하고 작년부터 조금씩 자리가 잡혀가더군요."

"몇 년 안에 재벌되겄네. 그나저나 결혼 아직 안 했지?"

"예. 아직 못했습니다."

"허참. 장허네. 대학도 못 나오고서는 똥 빠지게 공부해서 대학 나오고 잘 나간단 회사

다니는 사람덜 서너곱을 받으니....허허.."

"프로그램 하나 잘 짜면 돈이 되지만 나가는 것도 만만치 않아서 막상 남는건 별로 없습

니다."

"그기사 많이 벌면 많이 나가것지. 그래도 그게 어디여. 허어 참...자네 나이가 몇인가?"

"스물 아홉입니다."

"꽉 찻네. 꽉 찼어. 애인은 있는가?"

"그런 거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매일 이런 생활이어서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흠...."

이장은 한동안 묵묵히 막걸리잔을 들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무슨 이유

에선지 인상을 찡그렸다 폈다 하면서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이장의 관상

을 살펴보고 있었다. 젊었을 적에 돈 깨나 뿌리고 다녔을 성싶은 얼굴이었다. 치마폭에

는 물론이고 주먹질로도 했을 듯 한 게 코가 왼쪽으로 휘고 오른 눈썹을 상처자국이 반

분하고 있었다. 허우대도 좋은 편이고 시골집으로는 크진 않지만 안팎으로 깔끔하게 치

워진 것이 식구들 깨나 닥달할 것 같아 보였다.

"자네 그 아이말여. 진이! 계속 데리고 있을 건가?"

"글쎄요.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젊은 사람이 정의감도 좋고 불쌍헌 아이 거둬 멕이고 공부 가르치는 것도 복 받을 일이

네만 동네 이목도 생각해야 할 것이야."

"네! 조심하고 있습니다."

"내가 걱정이 돼서 엊그제 저녁에 한번 가 봤네. 천방지축 들로 산으로 도둑괭이모양 쏘

다니던 계집애가 모양새도 단정해지고 차분히 공부를 하고 있더군. 테레비에 미쳐 있는

줄 알았는디 자세히 보니께 교육방송이더만. 솔직히 맘은 안 놓이지만 자네의 높은 뜻

을 본 걸로 믿고 돌아서 왔네 그려."

"고맙습니다 어르신"

"고맙긴.....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고마워 할 건 동네 사람들인디...에잉 쯧쯧!"

"무슨 문제라도...?"

"문제 정도가 아닐세! 자네가 그 아이를 끼고 살림을 한다고 수군대기까지 하네. 원! 사

람들이 자기들 뱃속 검은 건 생각않고 남 뱃속 검은 것만 챙기려 하다니...."

"검다니요?"

"그런 게 있네. 암튼 행동 조심하게. 뭐 자네가 머리는 자르지 못하겠다고 하니 더 말은

않겠네만 동네에서 책잡힐 일은 아예 하질 말게. 그리고 가급적 낮에 사람들 일하고 있

는 앞일랑은 지나가지 말게. 논이나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멀리서라도 인사 꼭 하

고 돌아서 지나가게. 촌사람들이란 것이 하루 하루가 고단하다 보니 신세 편한 사람 꼴

을 보질 못하는 벱이라서 괜히 불쾌한 소릴 듣기 쉽상이니 말여."

"예! 조심하겠습니다."

"그래. 내 이렇게 얘길 해 보니 자네 보기보단 대견해 보이네. 암튼 동네 사람들 구설수

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제발 몸조심하게."

속에서 열불이 나고 따귀라도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가증스런 이중성이었지만 내 자신

의 안전을 위해서는 이장만이라도 내 편이 되어주어야 했으므로 참기로 했다. 이 동네

에서 몇 개월이라도 살면서 내 일을 무사히 끝마치려면 이장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

했다. 술기운이 얼근해진 이장은 자기 딸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면소재지의 사무실에 경리로 나간다는 넷째딸의 고등학교 졸업식때 찍은 사진속의 다

섯자매는 전부 미인들이었다. 미인들이라고 칭찬을 했더니 마냥 기분이 좋아진 이장은

자신의 부인을 꼬여내던 어린시절의 얘기까지 해가며 좋아했다. 이장 집에 있던 내내

진이의 이장집에서 먹었다는 치킨이 무슨 명목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결

국 얼근해진 채 집에 돌아온건 저녁놀이 서산에 걸릴 무렵이었다.

진이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우리 은공주 일찍 일어났네."

"으응. 깨우지도 않고 혼자서 돌아다니다가....술마셨구나 오빠?"

"응 조금...."

"조금이 아닌데....어휴 술냄새. 술마시면 일 못하잖아."

"괜찮아. 하나 끝냈으니까 오늘 내일은 쉴거야."

"음 그럼 내일 읍내에 놀러 가자."

"내일은 오빠가 일이 있어서 어딜 좀 갔다 와야 하거든."

"무슨 일인데..."

"사람을 만나야 돼."

"여자?"

"아니 남자."

"나말고 다른 여자 만나면 안돼~!"

"얌마 니가 무슨 여자야. 꼬마지..."

"나도 여자야. 이거 왜 이러셔 흥~!"

"하하..그래 너 여자 해라. 꼬마 쨔샤."

마루에 벌렁 누워 석양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나보다. 깜깜한 어둠이었다. 방안으로

들어갔는데 진이가 보이지 않았다. TV랑 불도 켜놓은 채로였다. 화장실엘 갔나보다 생

각했는데 담장 구석에 있는 화장실에 전등도 켜져 있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아서 얼

른 후래쉬를 찾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진아. 어딨니? 진아"

뒷산으로 오르는 언덕까지 왔을 때 무언가 거북한 음향이 들렸다. 몹시 답답한 뒤척임

같은 소리였다. 소리나는 곳을 후래쉬로 비추니 한 남자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

다. 그 밑에는 진이가 깔려 있었다. 남자의 두툼한 손바닥이 진이의 입을 막고 있었고

버둥거리는 팔다리를 몸으로 덮쳐 누르고 있었다.

"이런 "

더럽게 됐다는 듯 눈을 손으로 가리며 남자가 상체를 일으키자 진이가 데구르르 굴러서

빠져나왔다.

"오빠"

"너 빨리 집으로 가."

"같이 가. 난 괜찮아!"

"저 새끼 아는 새끼니?"

"...."

"아는 새끼냐구?"

"그...은수 아저씨."

"근수?"

"응"

"집에 가 있어."

"무서워 오빠 싸우지 마."

"빨리 안 가면 너도 혼난다. 빨리 가"

진이가 쭈삣거리다 집쪽으로 달려간다.

"에이 썅..."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침을 찌익 뱉았다.

"야 후래쉬 치워 자식아."

"이런 개같은 새끼를 봤나."

"야 좆 까지마 자식아. 니는 뭐 좆 안 달렸냐. 원래 니 껏도 아니고 저 계집애는 동네 돌

림이얌마. 끼고 산다고 니껀줄 아냐 자식아."

"너 죽어 봐야 맛을 알겠구나."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잔등에 찔러넣고 온 목검을 빼들었다.

"어. 이런 시팔"

놈이 무언가 집을 것을 찾다가 없자 당황하는 눈치였다. 덩치도 나보다 크고 농사일로

단련된 팔뚝이 제법 힘을 쓸 것 같았다. 후래쉬 불빛을 갑자기 얼굴로 올렸다. 눈이 부

신 녀석의 손이 얼굴로 올라가는 순간 후래쉬를 던지며 허리께를 후리며 들어갔다. 묵

직하게 걸린 느낌이 갈비뼈 한 두 대는 나갔다고 느껴졌다.

"으악"

비명과 함께 녀석이 주저앉았다. 대상단으로 양쪽 어깨죽지를 번갈아 내리쳤다. 이미

기절했는지 움찔하고 만다. 풀숲에 널부러진 녀석의 머리통을 겨냥했으나 내리칠 수는

없었다. 무방비 상태로 목검에 머리통을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 발로 살짝 밀어 자쳐놓

고 보니 녀석의 앞 지퍼가 열려 있고 초라하게 쪼그라든 물건이 후래쉬 불빛에 드러났

다. 드러내 놓은 물건의 대가리를 목검으로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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