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늉대문-
새벽을 가르는 그 소리에 나의 아침은 시작되곤 했다. 어머님께서는 다구 치시는 음성으로 나에게 그릇을 들고 뛰어나가라고 하시면서 손에는 십 원 짜리 지폐를 몇 장 쥐어 주신다. 나는 대문을 열고 오싹한 아침의 한기를 느끼면서 골목 길을 돌아 나오는 그 종소리를 기다린다. 어김없이 저 멀리 에서는 등 지게에서 김을 무럭무럭 피워대면서 종을 울리며 터벅터벅 걸어오는 두부장수의 모습이 보이고…나는 거스름 돈에 대한 개념도 없이 어머님께서 쥐어 주신대로 돈을 내밀고 지게를 내린 뒤에 포장을 걷고서 김이 모락모락한 두부를 성성 썰어서 그릇에 담아주면 나는 부리나케 집안으로 뛰어 간다. 가끔 잔 돈을 잊어 먹고 들어 오는 통에 아저씨께서 대문을 두드리시면서 잔돈을 챙겨가라고 소리치실 때가 여러 번…내 어린 시절의 그 아침은 그렇게 두부장수의 그 쨍그렁 대는 종소리로 시작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지금처럼 옷을 챙겨 입고 나가지 않았던 탓에 집안에서 감기를 달고 사는 적이 많았다. 형님과 누님도 위로 셋 씩 이나 있었지만 도무지 그런 심부름은 내 차지에서 다른 사람으로 돌려 질 줄을 몰랐다. 학교를 가기 전에 내가 하는 유일한 심부름은 그런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난 밥과 반찬 찌끄래기를 모아 문간방의 아궁이에 우리집을 지키는지, 아니면 우리가 지켜주는 건지 구분이 모호한 우리 복순이의 아침거리를 위해 잡기에도 더러운 냄비에 섞어서 끓여주는 일이 그 것이었다. 뜨거운 것을 먹으면 이빨이 빠진다고 하시는 할아버지의 엄명으로 보글보글 끓고 나면 마당 수돗가의 툇돌에 내려다 놓고 김이 다 빠질 때까지 그 역겨운 밥 찌끄래기 냄새를 맡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굉장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항상 막내이기에 겪어야 했던 잔 심부름의 괴로움은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가지 즐거운 것은 아침이면 새벽같이 책가방을 챙겨 교복을 입고서 튀어나가는 형과 누나의 모습을 즐기면서 바라다 볼 수 있었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나도 학교는 가야 되지만 그들을 모두 배웅하면서 느즈막한 아침을 먹을 수 있던 탓에 나는 국민학교, 그러니까 지금은 초등학교로 불리 우던 시절도 그런 대로 괜찮다는 생각을 한적이 많았다. 우리 집은 형님이 두분, 누님이 한분, 그리고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 당시 월남에서 일을 하시던 아버지 이렇게 일곱 식구가 한 가족 이었다. 1년에 두 번 정도 10일의 휴가를 받아서 귀국하시던 아버님은 나의 크나 큰 자랑이기도 했다. 아버님은 귀국 시에는 그 당시 아이들은 구경도 못하던 장난감들을 사가지고 오시는 통에 한동안 동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다녔던 기억에 나는 아버지가 그 토록 오랫동안 집 안을 비우셔도 아랑 곳 하질 않았다. 어머님께서는 아버님이 월남에 계실 때에는 할아버지의 수발에 온종일 바쁘게 허덕이셨고, 우글대는 우리 남매들로 인해서 화장 한번 제대로 해보신 적이 없었다. 집안은 재래식 한옥으로 방이 네 개에 부엌이 하나, 안방의 뒤편과 부엌 사이에 연결된 찬물만 나오는 세탁실 겸, 목욕실, 그리고 밤마다 형들이 귀신 소리를 내며 볼일을 보는 나를 놀려 대던 푸세식 화장실이 우리 집의 구조였다. 형들과 나는 문간방에, 누님은 마루 왼 쪽 방에, 그리고 할아버님은 마루 오른쪽의 안방에, 어머님은 혼자서 부엌을 사이에 두고 있는 아래 쪽 방을 쓰셨다. 아랫 쪽 방은 안방, 부엌 다음으로 연결되어 있고, 마당의 한가운데에 있는 지하실 겸 장독대 옆이라서 여름에는 열어 놓은 장독으로 인해서 장 냄새가 진동을 하기에 누구도 자려 하질 않아서 어머님께서 마지 못해 선택하신 방이었다. 지금처럼 전자레인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보일러가 지글지글한 시절도 아니었기에 어머니는 밤이 늦도록 방마다 연탄을 가시느라 잠을 제대로 주무시질 못했고, 내일의 반찬 마련이며, 밥지을 준비에 부엌은 언제나 제일 나중에 불이 꺼지곤 했다. 밤중에 화장실에 갈라치면 밤이 늦도록 잠이 없으신 할아버지의 수발과 자리끼 마련에 몇 번이고 깨시는 것을 졸린 눈으로 바라보던 때가 많았다. 1.4후퇴 때에 아버님만을 데리고 월남하신 할아버님의 삶은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부분이 많았었다. 그러기에 온 가족은 할아버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지내는 편이었고... 나이가 드셨고, 자식이 있으셨음에도 아버님은 할아버님 곁에서는 무릎을 반드시 꿇고서 말씀을 들었고, 그에 따라 우리들도 할아버지의 엄명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철칙과도 같았다. 그것을 어길 시에는 여지없이 남녀의 구분 없이 빤쓰 바람에 그 지겹도록 차가왔던 수돗가의 툇돌에 올라서서 빰빠라를 해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할아버님은 매일 인왕산을 밥 먹듯이 다니셨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들에게 주말이면 그 배꼽바위까지 어머니를 제외한 우리 4남매를 끌고 기어이 올라가실 정도로 근력과 정력이 넘치는 분이셨다. 아버님은 그와 반대로 매우 유순한 분이셨고, 할아버님의 강권에 그저 웃음으로 답하시는 분으로 나의 어린 기억에는 남아있었다. 아버님께서 귀국하시면 잠은 언제 주무시는지 밤이 늦도록 안방에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로 온 집안은 잔칫집 같은 분위기 였었다. 아버님께서 월남으로 복귀하시는 날은 김포비행장에 나갔다 돌아오는 모든 식구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고 어머님은 밤이 늦도록 부엌에서 무언가를 부산하게 덜그럭 거리셨다. 그 날은 내가 배가 아파서 보통 때 보다 일찍 조퇴를 하고 집에 온 날로 기억된다. 나는 일찍 오는 날이면 의례 형님들의 책상을 뒤지는 것이 취미 였는데 그 날은 그럴 기력도 없이 얼굴이 하얗게 되어 집에 와서는 곧바로 방에 누워 버렸다. 어머님께서는 약국에 갔다 오셔서 내게 활명수와 훼스탈을 먹여 주셨고, 나는 곧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를 잤을까? 나는 심한 복통과 배변감으로 잠을 깼다. 온 몸은 흥건히 땀이 솟아 있었고, 나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참으며 방문을 가까스로 열고 변소로 가기 위해 문간방의 툇마루에 앉았다. 그런데 건너편으로 보이는 부엌 옆의 어머님 방에 할아버님의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변소로 들어갔다. 평소처럼 변소의 문을 열고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아픈 배를 조금 면해 볼 요량으로 나는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그때 였다. 나는 내가 잘 못 들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어머님의 끊어지는 듯한 비명 같은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명 보다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울음을 짜내는 듯한 흐느낌에 더하여 간간히 아버님, 아버님하고 외치는 어머님의 목소리는 분명코 할아버지에게 혼이 나고 있는 듯한 목소리 였다. 나는 내가 허약하게 배가 아파서 일찍 온 것이 할아버님의 심사를 건드려 어머님이 혼이 나는 줄로 만 알았다. 평소에 몸이 아프다고 하면 배때기에 기름이 껴서 그렇다는 둥, 몇 끼 굶어야 제 정신을 차린 다는 둥 하시면서 우리들을 몰아 부치시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애들을 허약하게 키워서 무슨 짝에 써먹겠느냐고 어머님과 아버님을 혼 내시기가 다반사 였던 할아버님의 역정으로 또다시 어머님이 혼이 나시는 것이 아닌 가 해서 나는 보던 볼 일을 얼결에 멈추고 바지도 치켜 입는 둥 마는 둥 하며 방안으로 돌아왔다. 나는 방 문을 빼꼼히 열고 어머님 방의 동태를 살폈다. 할아버님은 어머님을 심하게 혼내시는 것 같았다. 철썩 철썩 하면서 종아리 치는 소리도 섞여서 나던 때에 나는 일찍 온 것을 진심으로 후회 했다. 어머님은 그 아픔이 대단 하셨는지 아버님, 아버님하시는 비명 같은 부르짖음에 더하여 어윽, 어윽 하는 구역질 같은 소리도 같이 내셨었다. 나는 정말 일이 크게 나지 싶었다. 어린 마음에 나는 방문을 다시 닫고는 어서 빨리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손아귀에서 풀려나기 만을 기도했다. 얼마 않있어 방에서 나는 소리는 조용해 지고 붉게 상기된 얼굴로 할아버님께서 방안에서 나오셨다. 곧바로 안방으로 들어 가시고 한참을 있다가 어머님께서 나오셨는데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모으시면서 나오시는 것으로 보아 할아버님에게 머리채까지 쥐어 잡히신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곧바로 내 방으로 걸어 오시었다. 나는 자리에 짐짓 누워있는 것처럼 누웠지만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이불을 덮진 못했다.
‘현수야, 좀 어떠니? 열나냐?’
방문을 여시면서 어머니는 이불 위에 누워 있는 나를 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아니오. 나 다 들었어요. 엄마, 할아버지 한테 혼났지? 나 땜에…’
‘…아..아..니. 현수 문이 아니고 엄마가 잘 못 해서 그렇지 뭐…’
그 날 저녁,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도 할아버지와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낮에 그렇게까지 엄마를 혼내시고도 할아버지는 아무런 대꾸가 없으셨다. 어머님은 예전과 다름없이 아랫목에 묻어 두었던 가장 따뜻한 진지를 할아버지에게 올렸고, 할아버지께서는 화난 표정도 없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을 드셨다. 그 날 밤에 나는 편치 않은 속으로 모두 잠이 든 후에도 화장실을 갈지 말지 고민 할 정도로 배가 않 좋았다. 밤중에 변소에 가려면 형들을 깨워야 했는데, 너무 깊이 잠이 든 형들은 깰 줄을 몰랐다. 늦도록 부엌과 모든 방에 연탄을 갈고 계시던 어머님은 내가 화장실을 가려고 문을 열려고 할 때, 부엌문을 닫으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부엌을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부엌 안에서 문을 닫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엌 안의 불을 끄시고는 안방과 연결된 세탁실의 불을 켜시는 것이 부엌 유리창을 통해서 비쳐 보였다. 세탁실 안에서는 한동안 어른 거리는 그림자가 보이더니만 이내 세탁실의 불이 꺼졌는데도 어머니는 나오실 줄을 몰랐다. 나는 어머니가 세탁실에서 피곤해서 잠이 드셨나 싶어서 방문을 조금 열고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만일 어머님께서 잠이 드셨다면 내가 가서 깨울 참이었기 때문 이었다. 곧 이어서 안방의 불이 다시 켜지고 두런두런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얘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서야 어머님이 할아버님 수발을 들러 세탁실을 통해 안방으로 들어가신 것을 알았다. 덜컥 가슴이 내려 앉은 것은 이때 부터다. 낮의 일도 있고 해서 또다시 할아버지께서 어머님을 혼내 시려는 가보다 하는 두려움에 나는 배가 아프면서도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문 만을 열고 바깥의 소리에 촉각을 곤두 세울 뿐이었다. 나는 또다시 안방에서 자그마하게 들려오는 종아리 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이 밤이 다 되도록 할아버지는 어머님을 불러다 놓고 낮에 못 다하신 벌을 내리시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한없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이마를 쪼개놓는 듯한 찬 바람이 창호지 문틈 사이로 나의 전신을 얼어 붙게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작게나마 열린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낮에 보다는 줄어든 소리 였지만 역시나 어머님은 할아버님의 회초리가 견디기 힘 드신지 내내 아버님, 아버님 하는 절절대는 자근거림과 어후, 어후 하는 흐느낌 비슷한 통곡을 흘리고 계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낮에도 모자라 엄마를 밤중에까지 불러 세워서 종아리를 치실 건 또 무엔가 말이다. 나는 배아픈 것도 모두 잊고서 그냥 방문을 닫고 자리에 누웠다. 형들을 깨워서 이 상황을 알리고도 싶었지만 춥다면서 잠결에 나를 툭툭 차는 형들을 깨웠다가는 밤중에 자지 않고 왠 소란 이냐면서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실 것은 뻔 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또다시 어머님만 종아리를 맞으실 것이 자명했기 때문 이었다. 할아버지는 파쇼이자, 집안의 독불장군 그 자체 였다. 나는 잠을 이루기 어려 웠지만 밤이 늦도록 저렇게 아파하시는 어머님의 종아리를 쳐대시는 할아버지는 더더욱 용서하기가 힘든 밤이었다. 나는 또다시 아침에 눈을 뜨고 어머님과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폈지만 두 분은 아무런 표식도 표정에 남아 있질 않았다. 나는 속으로 어른들은 그렇게 때리고 맞으면서도 아침이 되면 천연덕 스럽게 모든 것을 정리해 버리는 심사가 의심스럽기 까지 했다. 이 후로 나는 그 일들을 그만 잊어버리고 또다시 잔심부름의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고뿔로 며칠 누워계시던 저녁이었다. 어머니께서는 형제들에게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니 일찍 잠자리에 들어가라고 당부하셔서 모든 형제들은 밥 먹고 숙제하고 책보 챙기기 무섭게 잠자리에 들었다. 재미있는 구봉서 씨와 배삼룡, 이기동 아저씨가 나오는 코메디도 못보고 잠자리에 들어서 인지 나는 애초부터 심통이 나 있었다. 형들과 누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기 바빴고, 나는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하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 차에 나는 저녁을 급하게 먹은 터라 목이 말랐다. 나는 떠다 놓은 물이 없음으로 해서 부엌에 물을 가지러 가기로 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온 집안의 불은 꺼져 있고 안방 만이 불이 밝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께서 할아버지 병 수발을 들고 계시는 듯 싶었다. 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릴까 살금살금 부엌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문이 닫혀 있어서 그 드르륵 하는 도르레문 여는 소리로 인해 사람들을 깨울 수도 있었으려니와 오늘은 왠지 부엌 문이 대문짝 만하게 열려 있었다. 하늘이 도왔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 갔다. 부엌의 아궁이 위에는 큰 턱이 있었는데 그 턱은 부엌 위와 안방에서 연결 된 다락방이 있는 위치였다. 그 당시 우리집에는 그 아궁이 벽과 안방의 사이에 조그만 쪽문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숭늉대문 이라고 불렀었다. 식사를 마치고 부엌에 나가신 어머님께서 숭늉을 내오는 구멍이 바로 그 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문은 사람 머리하나 들어갈 정도의 작은, 나무로 된 미닫이 문 이었는데 여간 편리하지가 않았다. 미처 못 내온 반찬이나 야참을 들고 들어오지 않고도 그 문으로 건네 받는 편리함은 이용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나는 그 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무심코 지나 치려다가 무슨 사탕을 빠는 듯한 소리에 흠칫 놀라 서고 말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가까이 그 문틈 사이로 방안을 살펴 보기로 했다. 방안의 모습이 보이고 문 옆으로 할아버지가 길게 누워계시고 문 옆으로 치워진 이불로 인해서 잘은 보이질 않았지만 어머님께서, 누워 계신 할아버지의 아랫도리쯤 되는 곳에서 무엇을 드시고 계시는 것 같았다. 머리가 상하로 움직이고 있는데, 어찌나 정확한 박자로 움직이고 있던지 내 머리가 상하로 따라 움직일 정도 였다. 이불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할아버지의 솥뚜껑만한 큰 손이 어머니의 머릿카락을 움켜 쥐시는 것이 보였다. 아이고 또 때리 실려고 그러나? 나는 이번에는 제대로 할아버지의 만행을 봐 둔 다음에 아버지가 오시면 바로 일러 드려야지 라고 생각하고 주먹을 꼭 쥐었다. 그때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 앉을 뻔 했다.
‘음…음….에미나이, 쉴 줄을 모르누만 기레…고롬 그래야디…’
어머니는 정말 쉴 줄 모르고 고갯짓을 하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아프신데 어머니는 무슨 일을 저렇게 쉼 없이 하고 계시는 걸까? 곧 이어 할아버지의 소리가 또 들려왔다.
‘거저, 오이… 거저… 둑갔구만….어드러케 생겨 먹은 거이, 니쁜 짓만 골라 하누만…아후후…’
할아버지는 어디가 아프신지 긴 한숨과 함께 아픈 비명 같은 것을 지르셨다. 나는 속으로 엄마 잘한다 라고 외쳤다. 평소에 혼나시던 것을 이번에 할아버지 아픈 통에 다 갚으시라고 힘찬 응원을 보내기까지 했다. 얼마 않 있어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아래춤 에서 얼굴을 일으키셨는데 입이랑 온 얼굴에 눈물이랑 콧물이 범벅이 되신 모습 이셨다. 그렇게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우신 것 같았는데도 표정은 할아버지 때문인지 웃고 계셨다. 두 손으로 게다가 그 콧물을 쓱쓱 얼굴에 펴 바르시면서 맛까지 보시는 것이었다. 내가 코딱지를 후비다가 물까지 딸려 나오는 왕건이가 걸려 나올 때 한동안 그것을 먹다가 어머니께 호된 꾸지람을 들었던 적이 있어서 인지 오늘 밤의 어머니의 행동은 나를 혼내시던 것 과는 사뭇 양상이 달랐다. 엄마는 콧물을 좋아하시나? 나는 살금 살금 부엌을 빠져 나와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모를 일이었다. 고뿔이 걸리면 아랫도리에 대고 사정없이 울어 제끼면 낫는 구나라고 나는 그 당시 생각했었다.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새 반년이 지나고, 월남에서 아버지가 돌아 오셨다. 그 당시 서울에서는 구경도 하기 힘든 휴대형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갖가지 선물로 우리들은 정신이 없었다. 그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SONY라고 되어 있었는데 스위치를 잘 못 돌리면 그 당시 들으면 붙잡혀 간다는 이북방송까지 잡히는 신기한 라디오 였었다. 한동안 식구들끼리의 화기애애한 시간이 지나고 모두들 방으로 돌아갔다. 서로가 받아 든 선물로 인해서 일찍 잠이 들 줄 을 몰랐고, 나 또한 그 당시 TV의 외화시리즈로 유명했던 나폴레옹 0011이라는 첩보원이 들고 다니는 모형 권총을 받았기에 기분은 정말 하늘을 나는 듯이 기뻤다. 모두 잠이 들었지만 나는 오랜만에 받아 든 장난감을 이불 속에서 만지고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을 놀다가 이불 안에서 후덥증에 이불을 걷어 차고서 일어났는데 창호지 문 밖으로 아직도 안방의 불이 켜 있고 세 분이 얘기를 나누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불현듯 이 밤이 아니고서는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구타문제를 꺼내 놓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기를 내어 그 총을 손에 쥔 채로, 첩보원과도 같은 비장한 심정으로 방문을 나섰다. 안방으로 가려다가 나는 부엌이 열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일단은 방 안의 분위기를 살핀 뒤에 말을 꺼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저번 처럼 숭늉대문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조그만 틈 사이로 안방의 모습이 보였는데 바깥에서 보기에는 밝은 불빛처럼 보였지만 방안은 작은 미등 하나 만이 켜져 있었다. 마치 촛불을 켜 놓은 것처럼 방안에 있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어머니의 그림자가 유령의 너울거림 처럼 천장으로, 벽으로 일렁이고 있는 것이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어머니께서 작은 자지러짐으로 웃고 계신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안방에 계신 세 분 모두 옷을 홀랑 벗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목욕탕에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엄마의 커다란 젖이 흔들거리며 중앙에 보였는데 어머니는 그 당시 기어가듯이 엎드려 계신 것 같았다. 아래로 늘어져 보기에도 탐스런 엄마의 젖은 앞뒤로 철렁철렁 흔들리고 있었는데 나는 내가 어렸을 적 아버지의 등위에서 말을 타던 때가 연상되었다. 어머니의 뒤에는 아버지께서 옷을 벗은 채로, 엄마의 엉덩이에 허리를 척척 소리가 나게 부딪히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엄마의 얼굴을 할아버지의 벌거벗은 아랫도리에 바짝 다가가게 해서 또다시 두 손으로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계셨다. 나는 속으로, 아니, 이제는 아버지 앞에서도 엄마를 혼내시나? 라고 혼자 분이 솟아 올랐다. 아마도 할아버지께서는 분이 뻗쳐서 두 분을 홀랑 벗겨놓고 패대기를 치실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광경을 보는 내 잠지가 이상스럽게도 지랄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또 왠 일 이야? 잠옷 위로 불뚝하게 서버린 내 꼬추를 나는 생전 처음 내려다 보았다. 나는 그때까지 남자와 여자가 엉켜서 하는 짓은 키스가 전부인 줄 알고 있었고, 형들의 책상을 뒤질 때마다 그 당시 우후죽순처럼 발매되던 성인 만화들을 보면서도 내용이 이해가 되질 않던 나이였었다. 연산군,수호지, 이름도 욀 수 없었던 작가들의 만화들, 김일성의 여자들, 그리고 여자들의 벗은 몸매가 조잡한 흑백 사진으로 들어가 있던 사건과 실화, 아리랑 같은 성인 전용 잡지들이 있었음에도 항상 나는 남녀간의 섹스가 표현되는 장면에서 아리송한 기호와 은유적인 표현으로 스리슬쩍 넘어가는 그 진의를 이해하기는 정말 격차가 존재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당시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와의 섹스를 목전에 두고도 이해하지 못했음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그 보기 드문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목도 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무릎을 타고 앉아서 서있는 아버지의 아랫도리에도 쪽쪽 소리를 내면서 사탕 빨기를 계속했고, 계속해서 신기한 모습들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할아버지를 바닥에 누이고 어머니는 그 위에 엎드리기까지 했다. 할아버지가 무섭지도 않은지, 가슴팍을 마구 쓰다 듬으면서 어머니의 뒤에서 예전에도 들었었던 그 철썩거리는 소리를 내는 아버지를 힐끔 힐끔 뒤돌아 보면서 어머니는 그 큰 젖을 앞뒤로 흔들거리면서 좋아 좋아를 반복 하셨다. 무엇이 좋은지 알 수는 없어도 방안에 있는 세 분 모두, 화가 나있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때, 세 사람의 아랫도리에 왠 시커먼 털들이 그리도 많이 나있는 가가 궁금하기 만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뒤에 서서 아버지의 위에 엎어져 있는 어머니의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다 싶었다. 저 현장을 아버지 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입에서 색다른 말들이 튀어 나왔다. 항상 우리들에게 온전한 말만을 하라고 가르치셨던 어머니이신데 그 때는 사뭇 달랐다.
‘아버님, 더요, 더, 더 때려 주세요. 이이가 이렇게 와서 아버님이랑 같이 하고 싶어서 저 미치는 줄 알았어요. 아버님, 제발 더 쑤셔주세요. 아아….씨발..씨발…’
나는 할아버지가 고집불통 이라서 어머니를 혼 내시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 이었다. 어머니가 저렇게 매를 자초하시다니… 게다가 쌍스러운 욕까지…나는 그 당시 어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맞다 맞다가 정신이 돌아버린 줄로만 알았다. 나이 어린 나였기에 엄마가 저렇게 정신이 나가면 내일 아침 밥은 누가 해주나 하는 걱정만을 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도 덩달아 한 말씀 이셨다.
‘나 없는 사이에 아버님 수발 잘 들랬 더니 맨날 이렇게 쑤시고만 있었지? 오냐, 오늘 내가 거덜 내 줄게.’
나의 걱정은 천근이나 되 버렸다. 이제는 아버지까지 엄마를 붙들고 혼을 내는 형상이었다. 곧 이어 세 사람은 서로가 비명에 가까운 억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모두 쓰러지고….그런데 이상한 것은 누워버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일어나 앉으시더니 두 남자의 고추를 양 손으로 쥐고 웃으면서 내려다 보시는 것이었다.
‘아버님, 건강하셔야 되요. 맨 처음에 이이가 아버님과 같이 자라고 했을 때, 저는 이이가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아니 시아버지와 어떻게 잠자리를 하라고 하는 건지….그런데, 이 사람이 보여주는 북에 두고 오셨다던 시어머니 젊으셨을 적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저 랑 너무 흡사 해서요. 저는 그 때 알았죠. 이제는 갈 수 없고, 볼 수 도 없는 어머님을 아버님이 밤마다 사무치게 그리워 하신 다는 것을요. 아마 다른 집들은 이해하지 못 할 거에요. 이 이의 효성에 그만 저도 허락 했는데 이제는 제가 오히려 아버님 걱정을 더 해요. 건강이 예전만 못하셔서 말이죠. 예전에 큰애 가질 때만 해도 하루에 서너 번은 문제 없으셨는데 얼마 전에 고뿔 걸리셨을 때는 제가 빨아야 세울 수 있어서 얼마나 걱정 했다구요. 아버님, 건강 하셔야 되요.’
나는 그 때의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질 않고 기억하고 있다. 내가 섹스를 알게 되었을 때 즈음, 나는 그 당시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와의 섹스가 우리들 모르게 이어져 왔음을 알게 되었고, 형들과 누님에게 말을 안했지만 모두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입 밖으로 토설은 않 했을 지언정 알고 들은 있는 것 같았다. 나의 그 당시 상식으로 부자간의 섹스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는 여겼지만 할아버지의 그리움을 달래드리기 위해 어머님을 통해 잠자리를 보아 드렸던 아버님의 효심에 나는 더 점수를 주었던 것 같다. 월남이 패망하기 1년 전쯤, 아버지께서는 귀국을 하셨다. 그러나, 다시 또 불어 닥친 중동 바람에 아버님은 다시 출국하셨고, 한동안 할아버님과 어머님의 섹스는 계속 되었다. 그 사이 형들과 누님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가질 때 즈음, 할아버지께서는 몸져 누우시면서 기약도 없이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오늘 내일 한다는 급전에 아버님께서 귀국하시고 집안은 초상집과 같은 분위기 였다. 병원에 계셨던 할아버님을 집으로 모셔와 안방에 뉘였는데 건강하시던 할아버님의 얼굴은 몰라보게 수척하게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간간히 헛소리를 하시면서 사람을 몰라 보시던 어느 저녁, 온 가족이 둘러 모인 가운데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다. 모두 눈시울이 벌겋게 되어 금방 울음이라도 쏟아질 듯한 기세였고, 무릎을 꿇고서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계시는 아버님과 어머님은 벌써부터 울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목이 마르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물을 떠오라고 하셨다. 나는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물을 뜨는 사이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임종하시는 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숭늉대문을 열려다가 그만 두었다. 여느 때와 다르게 낭랑한 할아버지의 음성으로 인해 설마 지금 돌아가시 겠느냐는 안심이 들어서 였다. 나는 어렸을 때 처럼 문 틈 사이로 안방을 살폈다.
‘…에미나이래 울기는, 거져 갈때되믄 가는 기야. 님자, 어캐 거기 가 앉아있네?’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가슴팍을 내젖다가는 이내 어머니의 이제는 쳐질 대로 쳐졌지만 그래도 풍성한 젖을 손에 말아 쥐셨다. 어머님을 님자로 부르시는 것이 정신이 혼미 하신 모양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야윈 손으로 젖을 붙들고 있는 할아버님의 손을 받치고 있었다.
‘님자, 나 기래도 아무 후회 없서야. 울지들 말라우. 기카고, 막내 현수나 잘 부탁하가서. 남쪽에 내려와 가 게지구 건진 내 핏줄 아니간?’
나는 들고 있던 물 그릇을 놓칠 뻔 했다. 그때서야 나는 어째서 형님과 누님보다 내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났었는지를 깨달은 것이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고 부엌에서 안방으로 오는 사이에 나는 목이 아플 정도로 메어버려서 도저히 할아버지를 부를 수 조차 없었다. 방문을 열었을 때, 할아버님께서는 어머님의 젖을 쥐고 계신 손목의 힘을 놓고 계셨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내 손의 물 한 모금을 들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아버님 보다도 더욱 서럽게 우셨고, 그 모습으로 인해 장례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더 큰 슬픔과 설움을 맛 보아야 했다. 이번 겨울 임진각에 오랜 만에 온 가족이 모여서 망향대 에서 북쪽에 차례를 올릴 때에 어머님께서는 눈물을 글썽 거리시면서 읖조리셨다.
‘아버님, 좋은 곳에서 편히 눈 감으세요. 어머님도 그만 그리워 하시구요.’
이제는 모두가 시집 장가가서 그 집을 팔고 두 분은 가까운 조그만 전원주택으로 이사 하셨고 형제들은 저마다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제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나가지만 가슴 속에는 이산 가족으로서 살아야 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슬픔과 설움, 그리고 그 안에서 꿋꿋하게 두 남자를 지켜왔던 어머님의 희생에 대해서 말 못할 만추의 회한 같은 것을 안고 살아간다. 지금이야 미쳤다고 할 사람이 많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숭늉대문을 통해 보고 들었던 어머님의 그 말씀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누구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손가락 질 할 수 없다는 쓰라린 이산가족 으로서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끝-
새벽을 가르는 그 소리에 나의 아침은 시작되곤 했다. 어머님께서는 다구 치시는 음성으로 나에게 그릇을 들고 뛰어나가라고 하시면서 손에는 십 원 짜리 지폐를 몇 장 쥐어 주신다. 나는 대문을 열고 오싹한 아침의 한기를 느끼면서 골목 길을 돌아 나오는 그 종소리를 기다린다. 어김없이 저 멀리 에서는 등 지게에서 김을 무럭무럭 피워대면서 종을 울리며 터벅터벅 걸어오는 두부장수의 모습이 보이고…나는 거스름 돈에 대한 개념도 없이 어머님께서 쥐어 주신대로 돈을 내밀고 지게를 내린 뒤에 포장을 걷고서 김이 모락모락한 두부를 성성 썰어서 그릇에 담아주면 나는 부리나케 집안으로 뛰어 간다. 가끔 잔 돈을 잊어 먹고 들어 오는 통에 아저씨께서 대문을 두드리시면서 잔돈을 챙겨가라고 소리치실 때가 여러 번…내 어린 시절의 그 아침은 그렇게 두부장수의 그 쨍그렁 대는 종소리로 시작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지금처럼 옷을 챙겨 입고 나가지 않았던 탓에 집안에서 감기를 달고 사는 적이 많았다. 형님과 누님도 위로 셋 씩 이나 있었지만 도무지 그런 심부름은 내 차지에서 다른 사람으로 돌려 질 줄을 몰랐다. 학교를 가기 전에 내가 하는 유일한 심부름은 그런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난 밥과 반찬 찌끄래기를 모아 문간방의 아궁이에 우리집을 지키는지, 아니면 우리가 지켜주는 건지 구분이 모호한 우리 복순이의 아침거리를 위해 잡기에도 더러운 냄비에 섞어서 끓여주는 일이 그 것이었다. 뜨거운 것을 먹으면 이빨이 빠진다고 하시는 할아버지의 엄명으로 보글보글 끓고 나면 마당 수돗가의 툇돌에 내려다 놓고 김이 다 빠질 때까지 그 역겨운 밥 찌끄래기 냄새를 맡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굉장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항상 막내이기에 겪어야 했던 잔 심부름의 괴로움은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가지 즐거운 것은 아침이면 새벽같이 책가방을 챙겨 교복을 입고서 튀어나가는 형과 누나의 모습을 즐기면서 바라다 볼 수 있었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나도 학교는 가야 되지만 그들을 모두 배웅하면서 느즈막한 아침을 먹을 수 있던 탓에 나는 국민학교, 그러니까 지금은 초등학교로 불리 우던 시절도 그런 대로 괜찮다는 생각을 한적이 많았다. 우리 집은 형님이 두분, 누님이 한분, 그리고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 당시 월남에서 일을 하시던 아버지 이렇게 일곱 식구가 한 가족 이었다. 1년에 두 번 정도 10일의 휴가를 받아서 귀국하시던 아버님은 나의 크나 큰 자랑이기도 했다. 아버님은 귀국 시에는 그 당시 아이들은 구경도 못하던 장난감들을 사가지고 오시는 통에 한동안 동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다녔던 기억에 나는 아버지가 그 토록 오랫동안 집 안을 비우셔도 아랑 곳 하질 않았다. 어머님께서는 아버님이 월남에 계실 때에는 할아버지의 수발에 온종일 바쁘게 허덕이셨고, 우글대는 우리 남매들로 인해서 화장 한번 제대로 해보신 적이 없었다. 집안은 재래식 한옥으로 방이 네 개에 부엌이 하나, 안방의 뒤편과 부엌 사이에 연결된 찬물만 나오는 세탁실 겸, 목욕실, 그리고 밤마다 형들이 귀신 소리를 내며 볼일을 보는 나를 놀려 대던 푸세식 화장실이 우리 집의 구조였다. 형들과 나는 문간방에, 누님은 마루 왼 쪽 방에, 그리고 할아버님은 마루 오른쪽의 안방에, 어머님은 혼자서 부엌을 사이에 두고 있는 아래 쪽 방을 쓰셨다. 아랫 쪽 방은 안방, 부엌 다음으로 연결되어 있고, 마당의 한가운데에 있는 지하실 겸 장독대 옆이라서 여름에는 열어 놓은 장독으로 인해서 장 냄새가 진동을 하기에 누구도 자려 하질 않아서 어머님께서 마지 못해 선택하신 방이었다. 지금처럼 전자레인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보일러가 지글지글한 시절도 아니었기에 어머니는 밤이 늦도록 방마다 연탄을 가시느라 잠을 제대로 주무시질 못했고, 내일의 반찬 마련이며, 밥지을 준비에 부엌은 언제나 제일 나중에 불이 꺼지곤 했다. 밤중에 화장실에 갈라치면 밤이 늦도록 잠이 없으신 할아버지의 수발과 자리끼 마련에 몇 번이고 깨시는 것을 졸린 눈으로 바라보던 때가 많았다. 1.4후퇴 때에 아버님만을 데리고 월남하신 할아버님의 삶은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부분이 많았었다. 그러기에 온 가족은 할아버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지내는 편이었고... 나이가 드셨고, 자식이 있으셨음에도 아버님은 할아버님 곁에서는 무릎을 반드시 꿇고서 말씀을 들었고, 그에 따라 우리들도 할아버지의 엄명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철칙과도 같았다. 그것을 어길 시에는 여지없이 남녀의 구분 없이 빤쓰 바람에 그 지겹도록 차가왔던 수돗가의 툇돌에 올라서서 빰빠라를 해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할아버님은 매일 인왕산을 밥 먹듯이 다니셨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들에게 주말이면 그 배꼽바위까지 어머니를 제외한 우리 4남매를 끌고 기어이 올라가실 정도로 근력과 정력이 넘치는 분이셨다. 아버님은 그와 반대로 매우 유순한 분이셨고, 할아버님의 강권에 그저 웃음으로 답하시는 분으로 나의 어린 기억에는 남아있었다. 아버님께서 귀국하시면 잠은 언제 주무시는지 밤이 늦도록 안방에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로 온 집안은 잔칫집 같은 분위기 였었다. 아버님께서 월남으로 복귀하시는 날은 김포비행장에 나갔다 돌아오는 모든 식구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고 어머님은 밤이 늦도록 부엌에서 무언가를 부산하게 덜그럭 거리셨다. 그 날은 내가 배가 아파서 보통 때 보다 일찍 조퇴를 하고 집에 온 날로 기억된다. 나는 일찍 오는 날이면 의례 형님들의 책상을 뒤지는 것이 취미 였는데 그 날은 그럴 기력도 없이 얼굴이 하얗게 되어 집에 와서는 곧바로 방에 누워 버렸다. 어머님께서는 약국에 갔다 오셔서 내게 활명수와 훼스탈을 먹여 주셨고, 나는 곧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를 잤을까? 나는 심한 복통과 배변감으로 잠을 깼다. 온 몸은 흥건히 땀이 솟아 있었고, 나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참으며 방문을 가까스로 열고 변소로 가기 위해 문간방의 툇마루에 앉았다. 그런데 건너편으로 보이는 부엌 옆의 어머님 방에 할아버님의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변소로 들어갔다. 평소처럼 변소의 문을 열고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아픈 배를 조금 면해 볼 요량으로 나는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그때 였다. 나는 내가 잘 못 들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어머님의 끊어지는 듯한 비명 같은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명 보다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울음을 짜내는 듯한 흐느낌에 더하여 간간히 아버님, 아버님하고 외치는 어머님의 목소리는 분명코 할아버지에게 혼이 나고 있는 듯한 목소리 였다. 나는 내가 허약하게 배가 아파서 일찍 온 것이 할아버님의 심사를 건드려 어머님이 혼이 나는 줄로 만 알았다. 평소에 몸이 아프다고 하면 배때기에 기름이 껴서 그렇다는 둥, 몇 끼 굶어야 제 정신을 차린 다는 둥 하시면서 우리들을 몰아 부치시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애들을 허약하게 키워서 무슨 짝에 써먹겠느냐고 어머님과 아버님을 혼 내시기가 다반사 였던 할아버님의 역정으로 또다시 어머님이 혼이 나시는 것이 아닌 가 해서 나는 보던 볼 일을 얼결에 멈추고 바지도 치켜 입는 둥 마는 둥 하며 방안으로 돌아왔다. 나는 방 문을 빼꼼히 열고 어머님 방의 동태를 살폈다. 할아버님은 어머님을 심하게 혼내시는 것 같았다. 철썩 철썩 하면서 종아리 치는 소리도 섞여서 나던 때에 나는 일찍 온 것을 진심으로 후회 했다. 어머님은 그 아픔이 대단 하셨는지 아버님, 아버님하시는 비명 같은 부르짖음에 더하여 어윽, 어윽 하는 구역질 같은 소리도 같이 내셨었다. 나는 정말 일이 크게 나지 싶었다. 어린 마음에 나는 방문을 다시 닫고는 어서 빨리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손아귀에서 풀려나기 만을 기도했다. 얼마 않있어 방에서 나는 소리는 조용해 지고 붉게 상기된 얼굴로 할아버님께서 방안에서 나오셨다. 곧바로 안방으로 들어 가시고 한참을 있다가 어머님께서 나오셨는데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모으시면서 나오시는 것으로 보아 할아버님에게 머리채까지 쥐어 잡히신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곧바로 내 방으로 걸어 오시었다. 나는 자리에 짐짓 누워있는 것처럼 누웠지만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이불을 덮진 못했다.
‘현수야, 좀 어떠니? 열나냐?’
방문을 여시면서 어머니는 이불 위에 누워 있는 나를 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아니오. 나 다 들었어요. 엄마, 할아버지 한테 혼났지? 나 땜에…’
‘…아..아..니. 현수 문이 아니고 엄마가 잘 못 해서 그렇지 뭐…’
그 날 저녁,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도 할아버지와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낮에 그렇게까지 엄마를 혼내시고도 할아버지는 아무런 대꾸가 없으셨다. 어머님은 예전과 다름없이 아랫목에 묻어 두었던 가장 따뜻한 진지를 할아버지에게 올렸고, 할아버지께서는 화난 표정도 없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을 드셨다. 그 날 밤에 나는 편치 않은 속으로 모두 잠이 든 후에도 화장실을 갈지 말지 고민 할 정도로 배가 않 좋았다. 밤중에 변소에 가려면 형들을 깨워야 했는데, 너무 깊이 잠이 든 형들은 깰 줄을 몰랐다. 늦도록 부엌과 모든 방에 연탄을 갈고 계시던 어머님은 내가 화장실을 가려고 문을 열려고 할 때, 부엌문을 닫으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부엌을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부엌 안에서 문을 닫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엌 안의 불을 끄시고는 안방과 연결된 세탁실의 불을 켜시는 것이 부엌 유리창을 통해서 비쳐 보였다. 세탁실 안에서는 한동안 어른 거리는 그림자가 보이더니만 이내 세탁실의 불이 꺼졌는데도 어머니는 나오실 줄을 몰랐다. 나는 어머니가 세탁실에서 피곤해서 잠이 드셨나 싶어서 방문을 조금 열고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만일 어머님께서 잠이 드셨다면 내가 가서 깨울 참이었기 때문 이었다. 곧 이어서 안방의 불이 다시 켜지고 두런두런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얘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서야 어머님이 할아버님 수발을 들러 세탁실을 통해 안방으로 들어가신 것을 알았다. 덜컥 가슴이 내려 앉은 것은 이때 부터다. 낮의 일도 있고 해서 또다시 할아버지께서 어머님을 혼내 시려는 가보다 하는 두려움에 나는 배가 아프면서도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문 만을 열고 바깥의 소리에 촉각을 곤두 세울 뿐이었다. 나는 또다시 안방에서 자그마하게 들려오는 종아리 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이 밤이 다 되도록 할아버지는 어머님을 불러다 놓고 낮에 못 다하신 벌을 내리시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한없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이마를 쪼개놓는 듯한 찬 바람이 창호지 문틈 사이로 나의 전신을 얼어 붙게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작게나마 열린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낮에 보다는 줄어든 소리 였지만 역시나 어머님은 할아버님의 회초리가 견디기 힘 드신지 내내 아버님, 아버님 하는 절절대는 자근거림과 어후, 어후 하는 흐느낌 비슷한 통곡을 흘리고 계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낮에도 모자라 엄마를 밤중에까지 불러 세워서 종아리를 치실 건 또 무엔가 말이다. 나는 배아픈 것도 모두 잊고서 그냥 방문을 닫고 자리에 누웠다. 형들을 깨워서 이 상황을 알리고도 싶었지만 춥다면서 잠결에 나를 툭툭 차는 형들을 깨웠다가는 밤중에 자지 않고 왠 소란 이냐면서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실 것은 뻔 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또다시 어머님만 종아리를 맞으실 것이 자명했기 때문 이었다. 할아버지는 파쇼이자, 집안의 독불장군 그 자체 였다. 나는 잠을 이루기 어려 웠지만 밤이 늦도록 저렇게 아파하시는 어머님의 종아리를 쳐대시는 할아버지는 더더욱 용서하기가 힘든 밤이었다. 나는 또다시 아침에 눈을 뜨고 어머님과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폈지만 두 분은 아무런 표식도 표정에 남아 있질 않았다. 나는 속으로 어른들은 그렇게 때리고 맞으면서도 아침이 되면 천연덕 스럽게 모든 것을 정리해 버리는 심사가 의심스럽기 까지 했다. 이 후로 나는 그 일들을 그만 잊어버리고 또다시 잔심부름의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고뿔로 며칠 누워계시던 저녁이었다. 어머니께서는 형제들에게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니 일찍 잠자리에 들어가라고 당부하셔서 모든 형제들은 밥 먹고 숙제하고 책보 챙기기 무섭게 잠자리에 들었다. 재미있는 구봉서 씨와 배삼룡, 이기동 아저씨가 나오는 코메디도 못보고 잠자리에 들어서 인지 나는 애초부터 심통이 나 있었다. 형들과 누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기 바빴고, 나는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하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 차에 나는 저녁을 급하게 먹은 터라 목이 말랐다. 나는 떠다 놓은 물이 없음으로 해서 부엌에 물을 가지러 가기로 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온 집안의 불은 꺼져 있고 안방 만이 불이 밝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께서 할아버지 병 수발을 들고 계시는 듯 싶었다. 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릴까 살금살금 부엌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문이 닫혀 있어서 그 드르륵 하는 도르레문 여는 소리로 인해 사람들을 깨울 수도 있었으려니와 오늘은 왠지 부엌 문이 대문짝 만하게 열려 있었다. 하늘이 도왔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 갔다. 부엌의 아궁이 위에는 큰 턱이 있었는데 그 턱은 부엌 위와 안방에서 연결 된 다락방이 있는 위치였다. 그 당시 우리집에는 그 아궁이 벽과 안방의 사이에 조그만 쪽문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숭늉대문 이라고 불렀었다. 식사를 마치고 부엌에 나가신 어머님께서 숭늉을 내오는 구멍이 바로 그 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문은 사람 머리하나 들어갈 정도의 작은, 나무로 된 미닫이 문 이었는데 여간 편리하지가 않았다. 미처 못 내온 반찬이나 야참을 들고 들어오지 않고도 그 문으로 건네 받는 편리함은 이용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나는 그 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무심코 지나 치려다가 무슨 사탕을 빠는 듯한 소리에 흠칫 놀라 서고 말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가까이 그 문틈 사이로 방안을 살펴 보기로 했다. 방안의 모습이 보이고 문 옆으로 할아버지가 길게 누워계시고 문 옆으로 치워진 이불로 인해서 잘은 보이질 않았지만 어머님께서, 누워 계신 할아버지의 아랫도리쯤 되는 곳에서 무엇을 드시고 계시는 것 같았다. 머리가 상하로 움직이고 있는데, 어찌나 정확한 박자로 움직이고 있던지 내 머리가 상하로 따라 움직일 정도 였다. 이불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할아버지의 솥뚜껑만한 큰 손이 어머니의 머릿카락을 움켜 쥐시는 것이 보였다. 아이고 또 때리 실려고 그러나? 나는 이번에는 제대로 할아버지의 만행을 봐 둔 다음에 아버지가 오시면 바로 일러 드려야지 라고 생각하고 주먹을 꼭 쥐었다. 그때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 앉을 뻔 했다.
‘음…음….에미나이, 쉴 줄을 모르누만 기레…고롬 그래야디…’
어머니는 정말 쉴 줄 모르고 고갯짓을 하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아프신데 어머니는 무슨 일을 저렇게 쉼 없이 하고 계시는 걸까? 곧 이어 할아버지의 소리가 또 들려왔다.
‘거저, 오이… 거저… 둑갔구만….어드러케 생겨 먹은 거이, 니쁜 짓만 골라 하누만…아후후…’
할아버지는 어디가 아프신지 긴 한숨과 함께 아픈 비명 같은 것을 지르셨다. 나는 속으로 엄마 잘한다 라고 외쳤다. 평소에 혼나시던 것을 이번에 할아버지 아픈 통에 다 갚으시라고 힘찬 응원을 보내기까지 했다. 얼마 않 있어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아래춤 에서 얼굴을 일으키셨는데 입이랑 온 얼굴에 눈물이랑 콧물이 범벅이 되신 모습 이셨다. 그렇게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우신 것 같았는데도 표정은 할아버지 때문인지 웃고 계셨다. 두 손으로 게다가 그 콧물을 쓱쓱 얼굴에 펴 바르시면서 맛까지 보시는 것이었다. 내가 코딱지를 후비다가 물까지 딸려 나오는 왕건이가 걸려 나올 때 한동안 그것을 먹다가 어머니께 호된 꾸지람을 들었던 적이 있어서 인지 오늘 밤의 어머니의 행동은 나를 혼내시던 것 과는 사뭇 양상이 달랐다. 엄마는 콧물을 좋아하시나? 나는 살금 살금 부엌을 빠져 나와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모를 일이었다. 고뿔이 걸리면 아랫도리에 대고 사정없이 울어 제끼면 낫는 구나라고 나는 그 당시 생각했었다.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새 반년이 지나고, 월남에서 아버지가 돌아 오셨다. 그 당시 서울에서는 구경도 하기 힘든 휴대형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갖가지 선물로 우리들은 정신이 없었다. 그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SONY라고 되어 있었는데 스위치를 잘 못 돌리면 그 당시 들으면 붙잡혀 간다는 이북방송까지 잡히는 신기한 라디오 였었다. 한동안 식구들끼리의 화기애애한 시간이 지나고 모두들 방으로 돌아갔다. 서로가 받아 든 선물로 인해서 일찍 잠이 들 줄 을 몰랐고, 나 또한 그 당시 TV의 외화시리즈로 유명했던 나폴레옹 0011이라는 첩보원이 들고 다니는 모형 권총을 받았기에 기분은 정말 하늘을 나는 듯이 기뻤다. 모두 잠이 들었지만 나는 오랜만에 받아 든 장난감을 이불 속에서 만지고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을 놀다가 이불 안에서 후덥증에 이불을 걷어 차고서 일어났는데 창호지 문 밖으로 아직도 안방의 불이 켜 있고 세 분이 얘기를 나누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불현듯 이 밤이 아니고서는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구타문제를 꺼내 놓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기를 내어 그 총을 손에 쥔 채로, 첩보원과도 같은 비장한 심정으로 방문을 나섰다. 안방으로 가려다가 나는 부엌이 열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일단은 방 안의 분위기를 살핀 뒤에 말을 꺼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저번 처럼 숭늉대문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조그만 틈 사이로 안방의 모습이 보였는데 바깥에서 보기에는 밝은 불빛처럼 보였지만 방안은 작은 미등 하나 만이 켜져 있었다. 마치 촛불을 켜 놓은 것처럼 방안에 있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어머니의 그림자가 유령의 너울거림 처럼 천장으로, 벽으로 일렁이고 있는 것이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어머니께서 작은 자지러짐으로 웃고 계신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안방에 계신 세 분 모두 옷을 홀랑 벗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목욕탕에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엄마의 커다란 젖이 흔들거리며 중앙에 보였는데 어머니는 그 당시 기어가듯이 엎드려 계신 것 같았다. 아래로 늘어져 보기에도 탐스런 엄마의 젖은 앞뒤로 철렁철렁 흔들리고 있었는데 나는 내가 어렸을 적 아버지의 등위에서 말을 타던 때가 연상되었다. 어머니의 뒤에는 아버지께서 옷을 벗은 채로, 엄마의 엉덩이에 허리를 척척 소리가 나게 부딪히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엄마의 얼굴을 할아버지의 벌거벗은 아랫도리에 바짝 다가가게 해서 또다시 두 손으로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계셨다. 나는 속으로, 아니, 이제는 아버지 앞에서도 엄마를 혼내시나? 라고 혼자 분이 솟아 올랐다. 아마도 할아버지께서는 분이 뻗쳐서 두 분을 홀랑 벗겨놓고 패대기를 치실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광경을 보는 내 잠지가 이상스럽게도 지랄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또 왠 일 이야? 잠옷 위로 불뚝하게 서버린 내 꼬추를 나는 생전 처음 내려다 보았다. 나는 그때까지 남자와 여자가 엉켜서 하는 짓은 키스가 전부인 줄 알고 있었고, 형들의 책상을 뒤질 때마다 그 당시 우후죽순처럼 발매되던 성인 만화들을 보면서도 내용이 이해가 되질 않던 나이였었다. 연산군,수호지, 이름도 욀 수 없었던 작가들의 만화들, 김일성의 여자들, 그리고 여자들의 벗은 몸매가 조잡한 흑백 사진으로 들어가 있던 사건과 실화, 아리랑 같은 성인 전용 잡지들이 있었음에도 항상 나는 남녀간의 섹스가 표현되는 장면에서 아리송한 기호와 은유적인 표현으로 스리슬쩍 넘어가는 그 진의를 이해하기는 정말 격차가 존재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당시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와의 섹스를 목전에 두고도 이해하지 못했음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그 보기 드문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목도 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무릎을 타고 앉아서 서있는 아버지의 아랫도리에도 쪽쪽 소리를 내면서 사탕 빨기를 계속했고, 계속해서 신기한 모습들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할아버지를 바닥에 누이고 어머니는 그 위에 엎드리기까지 했다. 할아버지가 무섭지도 않은지, 가슴팍을 마구 쓰다 듬으면서 어머니의 뒤에서 예전에도 들었었던 그 철썩거리는 소리를 내는 아버지를 힐끔 힐끔 뒤돌아 보면서 어머니는 그 큰 젖을 앞뒤로 흔들거리면서 좋아 좋아를 반복 하셨다. 무엇이 좋은지 알 수는 없어도 방안에 있는 세 분 모두, 화가 나있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때, 세 사람의 아랫도리에 왠 시커먼 털들이 그리도 많이 나있는 가가 궁금하기 만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뒤에 서서 아버지의 위에 엎어져 있는 어머니의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다 싶었다. 저 현장을 아버지 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입에서 색다른 말들이 튀어 나왔다. 항상 우리들에게 온전한 말만을 하라고 가르치셨던 어머니이신데 그 때는 사뭇 달랐다.
‘아버님, 더요, 더, 더 때려 주세요. 이이가 이렇게 와서 아버님이랑 같이 하고 싶어서 저 미치는 줄 알았어요. 아버님, 제발 더 쑤셔주세요. 아아….씨발..씨발…’
나는 할아버지가 고집불통 이라서 어머니를 혼 내시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 이었다. 어머니가 저렇게 매를 자초하시다니… 게다가 쌍스러운 욕까지…나는 그 당시 어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맞다 맞다가 정신이 돌아버린 줄로만 알았다. 나이 어린 나였기에 엄마가 저렇게 정신이 나가면 내일 아침 밥은 누가 해주나 하는 걱정만을 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도 덩달아 한 말씀 이셨다.
‘나 없는 사이에 아버님 수발 잘 들랬 더니 맨날 이렇게 쑤시고만 있었지? 오냐, 오늘 내가 거덜 내 줄게.’
나의 걱정은 천근이나 되 버렸다. 이제는 아버지까지 엄마를 붙들고 혼을 내는 형상이었다. 곧 이어 세 사람은 서로가 비명에 가까운 억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모두 쓰러지고….그런데 이상한 것은 누워버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일어나 앉으시더니 두 남자의 고추를 양 손으로 쥐고 웃으면서 내려다 보시는 것이었다.
‘아버님, 건강하셔야 되요. 맨 처음에 이이가 아버님과 같이 자라고 했을 때, 저는 이이가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아니 시아버지와 어떻게 잠자리를 하라고 하는 건지….그런데, 이 사람이 보여주는 북에 두고 오셨다던 시어머니 젊으셨을 적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저 랑 너무 흡사 해서요. 저는 그 때 알았죠. 이제는 갈 수 없고, 볼 수 도 없는 어머님을 아버님이 밤마다 사무치게 그리워 하신 다는 것을요. 아마 다른 집들은 이해하지 못 할 거에요. 이 이의 효성에 그만 저도 허락 했는데 이제는 제가 오히려 아버님 걱정을 더 해요. 건강이 예전만 못하셔서 말이죠. 예전에 큰애 가질 때만 해도 하루에 서너 번은 문제 없으셨는데 얼마 전에 고뿔 걸리셨을 때는 제가 빨아야 세울 수 있어서 얼마나 걱정 했다구요. 아버님, 건강 하셔야 되요.’
나는 그 때의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질 않고 기억하고 있다. 내가 섹스를 알게 되었을 때 즈음, 나는 그 당시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와의 섹스가 우리들 모르게 이어져 왔음을 알게 되었고, 형들과 누님에게 말을 안했지만 모두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입 밖으로 토설은 않 했을 지언정 알고 들은 있는 것 같았다. 나의 그 당시 상식으로 부자간의 섹스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는 여겼지만 할아버지의 그리움을 달래드리기 위해 어머님을 통해 잠자리를 보아 드렸던 아버님의 효심에 나는 더 점수를 주었던 것 같다. 월남이 패망하기 1년 전쯤, 아버지께서는 귀국을 하셨다. 그러나, 다시 또 불어 닥친 중동 바람에 아버님은 다시 출국하셨고, 한동안 할아버님과 어머님의 섹스는 계속 되었다. 그 사이 형들과 누님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가질 때 즈음, 할아버지께서는 몸져 누우시면서 기약도 없이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오늘 내일 한다는 급전에 아버님께서 귀국하시고 집안은 초상집과 같은 분위기 였다. 병원에 계셨던 할아버님을 집으로 모셔와 안방에 뉘였는데 건강하시던 할아버님의 얼굴은 몰라보게 수척하게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간간히 헛소리를 하시면서 사람을 몰라 보시던 어느 저녁, 온 가족이 둘러 모인 가운데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다. 모두 눈시울이 벌겋게 되어 금방 울음이라도 쏟아질 듯한 기세였고, 무릎을 꿇고서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계시는 아버님과 어머님은 벌써부터 울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목이 마르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물을 떠오라고 하셨다. 나는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물을 뜨는 사이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임종하시는 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숭늉대문을 열려다가 그만 두었다. 여느 때와 다르게 낭랑한 할아버지의 음성으로 인해 설마 지금 돌아가시 겠느냐는 안심이 들어서 였다. 나는 어렸을 때 처럼 문 틈 사이로 안방을 살폈다.
‘…에미나이래 울기는, 거져 갈때되믄 가는 기야. 님자, 어캐 거기 가 앉아있네?’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가슴팍을 내젖다가는 이내 어머니의 이제는 쳐질 대로 쳐졌지만 그래도 풍성한 젖을 손에 말아 쥐셨다. 어머님을 님자로 부르시는 것이 정신이 혼미 하신 모양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야윈 손으로 젖을 붙들고 있는 할아버님의 손을 받치고 있었다.
‘님자, 나 기래도 아무 후회 없서야. 울지들 말라우. 기카고, 막내 현수나 잘 부탁하가서. 남쪽에 내려와 가 게지구 건진 내 핏줄 아니간?’
나는 들고 있던 물 그릇을 놓칠 뻔 했다. 그때서야 나는 어째서 형님과 누님보다 내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났었는지를 깨달은 것이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고 부엌에서 안방으로 오는 사이에 나는 목이 아플 정도로 메어버려서 도저히 할아버지를 부를 수 조차 없었다. 방문을 열었을 때, 할아버님께서는 어머님의 젖을 쥐고 계신 손목의 힘을 놓고 계셨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내 손의 물 한 모금을 들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아버님 보다도 더욱 서럽게 우셨고, 그 모습으로 인해 장례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더 큰 슬픔과 설움을 맛 보아야 했다. 이번 겨울 임진각에 오랜 만에 온 가족이 모여서 망향대 에서 북쪽에 차례를 올릴 때에 어머님께서는 눈물을 글썽 거리시면서 읖조리셨다.
‘아버님, 좋은 곳에서 편히 눈 감으세요. 어머님도 그만 그리워 하시구요.’
이제는 모두가 시집 장가가서 그 집을 팔고 두 분은 가까운 조그만 전원주택으로 이사 하셨고 형제들은 저마다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제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나가지만 가슴 속에는 이산 가족으로서 살아야 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슬픔과 설움, 그리고 그 안에서 꿋꿋하게 두 남자를 지켜왔던 어머님의 희생에 대해서 말 못할 만추의 회한 같은 것을 안고 살아간다. 지금이야 미쳤다고 할 사람이 많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숭늉대문을 통해 보고 들었던 어머님의 그 말씀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누구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손가락 질 할 수 없다는 쓰라린 이산가족 으로서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끝-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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