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한 달여를 더 댄스 교습소에 다니면서 춤을 배우고 나니, 웬만한 춤은 다 마스터를
한다.
그 동안 두세 차례 더 카바레에 가서 직접 현장경험을 하기도 하고..
춤 선생이 자신보고 본격적으로 춤을 더 배워서 프로로 나설 생각이 없느냐고 의사타진을
해왔지만, 그냥 취미생활 삼아 배우는 춤인데 싶어서 거절했다.
예전과 달리 하루 하루를 바쁘게 살아간다. 사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내가 회사에 나가 일을 하고 돈을 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번 돈의 일부를 내 취미생활을
위해 쓸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뿌듯하고 좋을 수가 없다.
항상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남편이 회사 다니면서 점점 예전의 버릇이 나온다는
것이다.
회사 일 마치고 곧장 집으로 오지 않고 회사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들어 오는
횟수가 점점 잦아진다.
술에 잔뜩 취해서 집에 들어 오면 나에게 할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상스런 말을 함부로
하는데다가 조금이라도 대꾸를 할라치면 손찌검이 날라온다.
그래도 그 동안 회사 다니며 나름대로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옛날에 사업을 할 때 하던 행사를 그대로 하는 것이다.
그때와 달라진 점은 전에는 아가씨를 옆에 끼고 고급 술을 마셨다면, 지금은 선술집이나
식당 같은 데서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 자신의 처지를 아는 지…
그렇다 하더라도 쥐꼬리만한 월급에 술값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얼마나 될까?
한동안 월급봉투 채로 갖다 주더니 이젠 자기가 쓸 돈을 제하고 준다.
그렇다고 왜 이것밖에 안 주느냐고 따지기도 그렇고.. 별 말없이 주는 대로 받는다.
회사 다니면서 사람이 좀 달라지길래 앞으로 소원했던 부부 사이가 좀 좋아지려나 했더니
정말 남편과 나 사이는 건너올 수 없는 강을 건너와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나에겐 나의 회사 생활이 있고 내가 즐기는 취미생활이 있으니 크게 개의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회사에서 오후 세시쯤 옥자에게서 전화가 온다.
옥자를 못 만난 지가 일주일이 다 되어가니 지금쯤 전화가 올 때가 됐다.
“현숙이니? 나야.”
“응.. 옥자구나.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 웬일? 오늘 회사 마치고 별일 없지?”
“내가 회사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것 말고 무슨 일이 있겠니?”
“그 동안 댄스 배운 거 오늘 실습 좀 하자.”
“알았어.”
“나중에 회사 마치고 미옥이 식당으로 와.”
안 그래도 카바레 가고 싶어서 좀이 쑤시던 참인데..
회사 일 마치고 바로 미옥이 식당으로 간다.
오늘은 남편이 오후반이라 집에 저녁 열 시 반에 들어오니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 시간까지는 놀다 가도 문제가 없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옥자가 먼저 와서 미옥이랑 둘이 수다를 떨고 있다.
옥자가 성격이 활달해서 그런지 자신보다는 미옥이랑 더욱 친하게 지낸다.
“현숙이 왔구나? 우선 식사부터 하자. 미옥아. 아구탕하고 밥 좀 내와.”
“알았어.”
잠시 후, 미옥이가 아구탕하고 식사 삼인 분을 내온다.
내가 미옥이에게 묻는다.
“너도 식사 하려고?”
“그래야 니네들이랑 같이 카바레에 가지.”
“너.. 그러다간 식당 말아 먹겠다. 염불보다 젯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미옥이가 상관없다는 듯 말한다.
“돈 벌어서 뭐해? 무덤까지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니고.. 밥이나 먹자.”
셋이서 같이 식사를 한다.
미옥이가 말한다.
“야! 그 동안 춤 추고 싶어서 몸살이 다 나는 줄 알았다.”
옥자가 빙글거리며 미옥이에게 말한다.
“큰 일 났네. 큰 일 났어.. 이 여편네 춤 바람 났으니..”
“그 놈의 잘난 서방은 맨날 술만 마시고 다니는 데다가 제 할 일도 제대로 못하지..
도대체 사는 재미가 있어야지. 그래도 춤이라도 춰야 스트레스가 풀릴 것 아냐?”
미옥이나 나나 남편 술 마시러 다니는 것은 매한가지인가 보다.
식사를 마치고 셋이서 식당을 나와 택시를 타고 전에 춤 배울 때 실습차 갔던
그 카바레로 간다.
카바레 안으로 들어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이 곳에 와 있는 여자들은 대부분 유부녀들일 것이다.
집에서 남편이나 애들 뒷바라지는 하지 않고 지금 시간에 여기 오는 것을 보면
나 말고도 문제가 있는 가정들이 많은가 보다.
물론 순수하게 운동 삼아 오는 여자들도 있을진 모르겠지만..
우선 홀의 가장자리에 있는 의자에 앉아 춤을 추고 있는 쌍쌍들을 구경한다.
여기선 남자가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나가서 춤을 출수가 없으니 기다릴 수밖에 없다.
춤을 배우면서 서너 번 카바레에 오다 보니, 지금은 별로 주눅이 들지 않고
여기 카바레 분위기에 동화가 되는 것 같다.
한 곡이 끝나고 들어오는 사람, 나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데 누군가 한 남자가 내 앞에
서더니 손을 내민다.
얼굴을 올려다 보니 전에 여기 왔을 때 같이 블루스를 췄던 그 남자다.
자신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한 동안 보이지 않아 궁금했는데 오늘에야 보게 되네요? 반갑습니다.”
“저도요..”
그 남자의 손을 잡고 홀로 나간다.
흘러 나오는 음악이 지루박이다.
남자가 리드하는 대로 스텝을 밟아 나간다.
어쩌다 뭍에 나왔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거칠 것이 없다.
남자 역시 춤에 능수능란한 듯 아주 매끄럽게 자신을 리드해 간다.
그렇게 몰두를 해가며 춤을 추다 보니, 어느 새 음악이 블루스로 바뀐다.
좀 아쉬운 마음을 접고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남자가 다시 자신에게
손을 내민다.
다시 그 남자의 손을 잡는다.
지루박은 경쾌한 운동이라면 블루스는 운동이 끝난 뒤 숨쉬기 운동을 하듯
편안한 마음으로 몸을 음악에 맡긴다.
자신의 등을 받치고 있는 남자의 오른 손.. 자신과 손을 맞댄 남자의 왼손..
남자의 허리께로 돌아간 내 왼손에서 새삼 남자가 느껴진다.
음악에 맞취 턴을 하며 자연스럽게 몸과 몸이 마주치다 보니 온몸에서 남자의 체취가
느껴지고 몸이 짜릿해져 옴을 느낀다.
한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 것 같다.
결혼 초부터 팔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남편 때문에
남자에 대해서는 포기를 하고 살았는데..
지금 이런 기분은 무엇인가?
몽롱한 가운데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 보니 아주 춤을 잘 추시네요. 전엔 처음이라 그런지 몸이 좀 굳어 있었는데
오늘은 아주 부드럽고 좋아요.”
“아.. 예..”
“왜 한 동안 안 왔어요? 많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 바쁘다 보니..”
그러는 사이 블루스 음악이 끝난다.
이번에도 역시 남자가 내 손을 다시 잡는다.
그렇게 세 번 정도 춤을 더 추고 홀 가장자리로 나온다.
이 남자가 리드를 잘해서 그런지 다섯번을 연속해서 춤을 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춤을
췄나 보다.
오랜만의 운동이라 그런지 숨이 좀 차는 것 같다.
남자가 나를 따라오면서 말한다.
“목도 마른데 음료수 한잔 할래요?”
나의 대답을 들어 보지도 않고 자판기로 가서 스포츠 음료를 두 개 빼가지고 와서 권한다.
“잘 마실게요.”
음료를 마시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옥자와 미옥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홀로 나가서 춤을 추고 있는 모양이다.
남자가 내 옆에서 음료수를 마시면서 말을 한다.
“실례인줄 모르겠지만, 뭘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뭘요?”
“혹시.. 결혼했어요?”
“제가 처녀로 보여요?”
“글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전 유부녀예요. 그것도 애가 둘이나 있는..”
“그래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왜요? 실망했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렇게 안 보여서..”
새삼 남자의 얼굴을 쳐다본다.
남자의 얼굴이 잘 생겼다기 보다 넉넉한 듯한.. 선량한 이웃집 아저씨 같다고나 할까..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혹시 늑대가 아닌가 봤어요.”
“하하하! 제가 늑대처럼 보여요?”
“남자는 다 늑대라고 그러잖아요?”
“잡아 먹힐까 싶어 겁나요?”
“전 맛도 없어요.”
“맛이 있는지 없는지 먹어봐야 알죠.”
“뭐예요?”
“하하하! 아니.. 아니 농담이에요.”
오늘은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처음 보는(아니.. 두 번째 보지만,) 남자에게 이런 농담을 다하고..
이 남자가 편하게 느껴져서 그런가?
남자가 나에게 묻는다.
“춤을 더 추실 건가요?”
“글쎄요..”
마음이야 더 추고 싶지만 이 남자에게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아 그렇게 말을
얼버무린다.
“그럼.. 제가 에스코트해도 괜찮을까요?”
“예?”
“그렇게 놀라실 필요는 없고, 목도 마른데 우리 나가서 시원하게 맥주 한잔 어때요?
운동한 뒤의 맥주 한잔은 죽이죠.”
나에게 데이트 신청하는 건가?
“같이 온 일행도 있고.. 좀 곤란한데요.”
“일행들은 먼저 간 게 아닌가요?”
“글쎄요.. 보이진 않은데..”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 홀을 살펴봐도 미옥이와 옥자는 보이지 않는다.
정말 이 남자 말대로 먼저 가버렸나? 나에게 이야길 하지 않고 먼저 가지는 않을 텐데..
“일행들이 보여요?”
“아니 보이지 않네요.”
“먼저 간 게 맞나 봅니다.”
“이상하네.. 그럴 애들이 아닌데..”
“우리 두 사람 재미있게 놀라고 먼저 간 게 아닐까요?”
“설마…”
아무리 홀을 둘러봐도 보이질 않는다.
할 수 없이 카바레를 나오는데 남자가 같이 나와 옆에서 따라오며 말을 붙인다.
“괜찮으시겠죠?”
“여자들을 이렇게 꼬셔요?”
“믿고 안 믿고는 자유시겠지만 저도 여자 분에게 이렇게 말하기는 처음입니다.”
정말일가? 이 남자 말이…
피식 실소가 나온다. 나도 참…
아까 춤을 추고 난 뒤 남자가 자신에게 음료를 사주면서 말을 붙일 때 딱 자르지 못하고
이렇게 빈틈을 보일까?
혹시 이 남자에게 은근히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일까?
남자가 내 옆을 따라 걸으면서 말을 한다.
“왜 웃어요?”
“그냥.. 혼자 생각에…”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왜 그 쪽을 딱 자르지 못하고 빈틈을 보일까 하고 생각했어요.. 미련이 있는 것처럼..”
“혹시 제게 마음이 있는 것 아니에요?”
“뭐라고요?”
“하하하! 농담이에요. 저기로 가서 목 좀 축이죠.”
남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생맥주 집이 보인다.
그럴까? 예전에 남편은 여자를 집으로 데려 오기까지 했는데, 나만 의리를 지킬 필요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남자와 맥주 한잔 하는 거야 뭐 어떠랴?
“그럼.. 간단하게 맥주 한잔만 하고 가죠..”
못 이기는 체하고 남자를 따라 생맥주 집으로 들어간다.
조금 구석진 자리에 남자가 자리를 잡고 앉고 나도 맞은 편 자리에 앉는다.
남자가 아가씨를 부르더니 맥주를 시킨다.
“여기 병 맥주 세 병하고 야채 샐러드 좀 줘요.”
잠시 후 맥주와 안주가 나오고 남자가 내 잔에 맥주를 따른다.
나도 맥주병을 받아 남자의 잔에 맥주를 따른다.
남편말고는 남자의 잔에 술을 처음 따르나 보다.
남자가 그라스를 들어 올리며 건배를 청한다.
“자. 같이 시원하게 한잔하죠.”
“그래요.”
남자는 한번에 맥주를 다 비우고 나는 반쯤 마시고 잔을 내려 놓는다.
그리고, 남자의 빈 맥주잔에 다시 술을 따라준다.
남자가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전 박 진수라고 합니다. 그 쪽은?”
“정 현숙이라고 해요.”
“현숙씨가 처음 카바레에 왔을 때 참 인상이 좋았어요.”
“그냥 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아니에요?”
“설마 그럴리가요? 뭐랄까.. 여자로써 아름답다기 보다 전체적으로 정감이 간다고나 할까..”
“여자보고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건 실례가 아닌가요?”
“하하하!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전 좋은 말을 한다고 하는 건데..
절 처음 보았을 때 인상이 어땠어요?”
“글쎄요..”
“현숙씨는 댄스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키도 여자치고는 작은 편이 아니고, 몸매도
균형이 잡힌 게 운동신경도 발달한 것 같고..
아까 같이 춤을 출 때 정말 오랜만에 춤에 몰두를 한 것 같습니다.”
“진수씨는 춤을 아주 잘 추시는 것 같던데.. 오랫동안 춤을 추셨어요?”
“댄스를 접한 게 조금 오래 됐어요. 한 팔년 됐나?
한때는 댄스에 완전히 미쳤던 적도 있었지요. 아예 전문적으로 이 길로 나설까 하고
생각도 했으니까..”
“지금 나이가 몇인데요?”
“몇 살 정도로 보여요?”
“음.. 사십대 초나 중반정도..”
“사십 셋이에요.”
“나하고는 십년 차이네요?”
“그럼 현숙씨가 서른 셋이에요?”
“나이가 더 들어 보여요?”
“아.. 아닙니다. 오히려 더 어리게 보여요.”
서로 몇 잔씩을 주고 받고 하며 마시다 보니 맥주 세 병이 바닥이 난다.
“현숙씨 술을 잘 마시네요? 한잔 더 할까요?”
“아니.. 됐어요. 그만 일어서요.”
“그러죠.”
그렇게 진수씨와 생각지도 않은 첫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외간남자와 같이 술을 마시고 서로 이야기도 하며 내 마음을 조금
열었나 보다.
오늘까지 두 번이나 서로 손을 잡고 몸을 맞대고 댄스를 춰서 그런지 이 남자를
조금 가깝게 느끼는가 모르겠다.
그 동안 남편하고 살면서 너무 억눌리고 당하면서 살다 보니 남자란 건 내 인생에
아무 의미도 없는 줄 알았는데, 진수씨와 같이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에는
조금 설레이는 마음이 있었나 보다.
한다.
그 동안 두세 차례 더 카바레에 가서 직접 현장경험을 하기도 하고..
춤 선생이 자신보고 본격적으로 춤을 더 배워서 프로로 나설 생각이 없느냐고 의사타진을
해왔지만, 그냥 취미생활 삼아 배우는 춤인데 싶어서 거절했다.
예전과 달리 하루 하루를 바쁘게 살아간다. 사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내가 회사에 나가 일을 하고 돈을 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번 돈의 일부를 내 취미생활을
위해 쓸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뿌듯하고 좋을 수가 없다.
항상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남편이 회사 다니면서 점점 예전의 버릇이 나온다는
것이다.
회사 일 마치고 곧장 집으로 오지 않고 회사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들어 오는
횟수가 점점 잦아진다.
술에 잔뜩 취해서 집에 들어 오면 나에게 할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상스런 말을 함부로
하는데다가 조금이라도 대꾸를 할라치면 손찌검이 날라온다.
그래도 그 동안 회사 다니며 나름대로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옛날에 사업을 할 때 하던 행사를 그대로 하는 것이다.
그때와 달라진 점은 전에는 아가씨를 옆에 끼고 고급 술을 마셨다면, 지금은 선술집이나
식당 같은 데서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 자신의 처지를 아는 지…
그렇다 하더라도 쥐꼬리만한 월급에 술값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얼마나 될까?
한동안 월급봉투 채로 갖다 주더니 이젠 자기가 쓸 돈을 제하고 준다.
그렇다고 왜 이것밖에 안 주느냐고 따지기도 그렇고.. 별 말없이 주는 대로 받는다.
회사 다니면서 사람이 좀 달라지길래 앞으로 소원했던 부부 사이가 좀 좋아지려나 했더니
정말 남편과 나 사이는 건너올 수 없는 강을 건너와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나에겐 나의 회사 생활이 있고 내가 즐기는 취미생활이 있으니 크게 개의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회사에서 오후 세시쯤 옥자에게서 전화가 온다.
옥자를 못 만난 지가 일주일이 다 되어가니 지금쯤 전화가 올 때가 됐다.
“현숙이니? 나야.”
“응.. 옥자구나.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 웬일? 오늘 회사 마치고 별일 없지?”
“내가 회사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것 말고 무슨 일이 있겠니?”
“그 동안 댄스 배운 거 오늘 실습 좀 하자.”
“알았어.”
“나중에 회사 마치고 미옥이 식당으로 와.”
안 그래도 카바레 가고 싶어서 좀이 쑤시던 참인데..
회사 일 마치고 바로 미옥이 식당으로 간다.
오늘은 남편이 오후반이라 집에 저녁 열 시 반에 들어오니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 시간까지는 놀다 가도 문제가 없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옥자가 먼저 와서 미옥이랑 둘이 수다를 떨고 있다.
옥자가 성격이 활달해서 그런지 자신보다는 미옥이랑 더욱 친하게 지낸다.
“현숙이 왔구나? 우선 식사부터 하자. 미옥아. 아구탕하고 밥 좀 내와.”
“알았어.”
잠시 후, 미옥이가 아구탕하고 식사 삼인 분을 내온다.
내가 미옥이에게 묻는다.
“너도 식사 하려고?”
“그래야 니네들이랑 같이 카바레에 가지.”
“너.. 그러다간 식당 말아 먹겠다. 염불보다 젯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미옥이가 상관없다는 듯 말한다.
“돈 벌어서 뭐해? 무덤까지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니고.. 밥이나 먹자.”
셋이서 같이 식사를 한다.
미옥이가 말한다.
“야! 그 동안 춤 추고 싶어서 몸살이 다 나는 줄 알았다.”
옥자가 빙글거리며 미옥이에게 말한다.
“큰 일 났네. 큰 일 났어.. 이 여편네 춤 바람 났으니..”
“그 놈의 잘난 서방은 맨날 술만 마시고 다니는 데다가 제 할 일도 제대로 못하지..
도대체 사는 재미가 있어야지. 그래도 춤이라도 춰야 스트레스가 풀릴 것 아냐?”
미옥이나 나나 남편 술 마시러 다니는 것은 매한가지인가 보다.
식사를 마치고 셋이서 식당을 나와 택시를 타고 전에 춤 배울 때 실습차 갔던
그 카바레로 간다.
카바레 안으로 들어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이 곳에 와 있는 여자들은 대부분 유부녀들일 것이다.
집에서 남편이나 애들 뒷바라지는 하지 않고 지금 시간에 여기 오는 것을 보면
나 말고도 문제가 있는 가정들이 많은가 보다.
물론 순수하게 운동 삼아 오는 여자들도 있을진 모르겠지만..
우선 홀의 가장자리에 있는 의자에 앉아 춤을 추고 있는 쌍쌍들을 구경한다.
여기선 남자가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나가서 춤을 출수가 없으니 기다릴 수밖에 없다.
춤을 배우면서 서너 번 카바레에 오다 보니, 지금은 별로 주눅이 들지 않고
여기 카바레 분위기에 동화가 되는 것 같다.
한 곡이 끝나고 들어오는 사람, 나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데 누군가 한 남자가 내 앞에
서더니 손을 내민다.
얼굴을 올려다 보니 전에 여기 왔을 때 같이 블루스를 췄던 그 남자다.
자신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한 동안 보이지 않아 궁금했는데 오늘에야 보게 되네요? 반갑습니다.”
“저도요..”
그 남자의 손을 잡고 홀로 나간다.
흘러 나오는 음악이 지루박이다.
남자가 리드하는 대로 스텝을 밟아 나간다.
어쩌다 뭍에 나왔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거칠 것이 없다.
남자 역시 춤에 능수능란한 듯 아주 매끄럽게 자신을 리드해 간다.
그렇게 몰두를 해가며 춤을 추다 보니, 어느 새 음악이 블루스로 바뀐다.
좀 아쉬운 마음을 접고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남자가 다시 자신에게
손을 내민다.
다시 그 남자의 손을 잡는다.
지루박은 경쾌한 운동이라면 블루스는 운동이 끝난 뒤 숨쉬기 운동을 하듯
편안한 마음으로 몸을 음악에 맡긴다.
자신의 등을 받치고 있는 남자의 오른 손.. 자신과 손을 맞댄 남자의 왼손..
남자의 허리께로 돌아간 내 왼손에서 새삼 남자가 느껴진다.
음악에 맞취 턴을 하며 자연스럽게 몸과 몸이 마주치다 보니 온몸에서 남자의 체취가
느껴지고 몸이 짜릿해져 옴을 느낀다.
한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 것 같다.
결혼 초부터 팔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남편 때문에
남자에 대해서는 포기를 하고 살았는데..
지금 이런 기분은 무엇인가?
몽롱한 가운데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 보니 아주 춤을 잘 추시네요. 전엔 처음이라 그런지 몸이 좀 굳어 있었는데
오늘은 아주 부드럽고 좋아요.”
“아.. 예..”
“왜 한 동안 안 왔어요? 많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 바쁘다 보니..”
그러는 사이 블루스 음악이 끝난다.
이번에도 역시 남자가 내 손을 다시 잡는다.
그렇게 세 번 정도 춤을 더 추고 홀 가장자리로 나온다.
이 남자가 리드를 잘해서 그런지 다섯번을 연속해서 춤을 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춤을
췄나 보다.
오랜만의 운동이라 그런지 숨이 좀 차는 것 같다.
남자가 나를 따라오면서 말한다.
“목도 마른데 음료수 한잔 할래요?”
나의 대답을 들어 보지도 않고 자판기로 가서 스포츠 음료를 두 개 빼가지고 와서 권한다.
“잘 마실게요.”
음료를 마시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옥자와 미옥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홀로 나가서 춤을 추고 있는 모양이다.
남자가 내 옆에서 음료수를 마시면서 말을 한다.
“실례인줄 모르겠지만, 뭘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뭘요?”
“혹시.. 결혼했어요?”
“제가 처녀로 보여요?”
“글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전 유부녀예요. 그것도 애가 둘이나 있는..”
“그래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왜요? 실망했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렇게 안 보여서..”
새삼 남자의 얼굴을 쳐다본다.
남자의 얼굴이 잘 생겼다기 보다 넉넉한 듯한.. 선량한 이웃집 아저씨 같다고나 할까..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혹시 늑대가 아닌가 봤어요.”
“하하하! 제가 늑대처럼 보여요?”
“남자는 다 늑대라고 그러잖아요?”
“잡아 먹힐까 싶어 겁나요?”
“전 맛도 없어요.”
“맛이 있는지 없는지 먹어봐야 알죠.”
“뭐예요?”
“하하하! 아니.. 아니 농담이에요.”
오늘은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처음 보는(아니.. 두 번째 보지만,) 남자에게 이런 농담을 다하고..
이 남자가 편하게 느껴져서 그런가?
남자가 나에게 묻는다.
“춤을 더 추실 건가요?”
“글쎄요..”
마음이야 더 추고 싶지만 이 남자에게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아 그렇게 말을
얼버무린다.
“그럼.. 제가 에스코트해도 괜찮을까요?”
“예?”
“그렇게 놀라실 필요는 없고, 목도 마른데 우리 나가서 시원하게 맥주 한잔 어때요?
운동한 뒤의 맥주 한잔은 죽이죠.”
나에게 데이트 신청하는 건가?
“같이 온 일행도 있고.. 좀 곤란한데요.”
“일행들은 먼저 간 게 아닌가요?”
“글쎄요.. 보이진 않은데..”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 홀을 살펴봐도 미옥이와 옥자는 보이지 않는다.
정말 이 남자 말대로 먼저 가버렸나? 나에게 이야길 하지 않고 먼저 가지는 않을 텐데..
“일행들이 보여요?”
“아니 보이지 않네요.”
“먼저 간 게 맞나 봅니다.”
“이상하네.. 그럴 애들이 아닌데..”
“우리 두 사람 재미있게 놀라고 먼저 간 게 아닐까요?”
“설마…”
아무리 홀을 둘러봐도 보이질 않는다.
할 수 없이 카바레를 나오는데 남자가 같이 나와 옆에서 따라오며 말을 붙인다.
“괜찮으시겠죠?”
“여자들을 이렇게 꼬셔요?”
“믿고 안 믿고는 자유시겠지만 저도 여자 분에게 이렇게 말하기는 처음입니다.”
정말일가? 이 남자 말이…
피식 실소가 나온다. 나도 참…
아까 춤을 추고 난 뒤 남자가 자신에게 음료를 사주면서 말을 붙일 때 딱 자르지 못하고
이렇게 빈틈을 보일까?
혹시 이 남자에게 은근히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일까?
남자가 내 옆을 따라 걸으면서 말을 한다.
“왜 웃어요?”
“그냥.. 혼자 생각에…”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왜 그 쪽을 딱 자르지 못하고 빈틈을 보일까 하고 생각했어요.. 미련이 있는 것처럼..”
“혹시 제게 마음이 있는 것 아니에요?”
“뭐라고요?”
“하하하! 농담이에요. 저기로 가서 목 좀 축이죠.”
남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생맥주 집이 보인다.
그럴까? 예전에 남편은 여자를 집으로 데려 오기까지 했는데, 나만 의리를 지킬 필요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남자와 맥주 한잔 하는 거야 뭐 어떠랴?
“그럼.. 간단하게 맥주 한잔만 하고 가죠..”
못 이기는 체하고 남자를 따라 생맥주 집으로 들어간다.
조금 구석진 자리에 남자가 자리를 잡고 앉고 나도 맞은 편 자리에 앉는다.
남자가 아가씨를 부르더니 맥주를 시킨다.
“여기 병 맥주 세 병하고 야채 샐러드 좀 줘요.”
잠시 후 맥주와 안주가 나오고 남자가 내 잔에 맥주를 따른다.
나도 맥주병을 받아 남자의 잔에 맥주를 따른다.
남편말고는 남자의 잔에 술을 처음 따르나 보다.
남자가 그라스를 들어 올리며 건배를 청한다.
“자. 같이 시원하게 한잔하죠.”
“그래요.”
남자는 한번에 맥주를 다 비우고 나는 반쯤 마시고 잔을 내려 놓는다.
그리고, 남자의 빈 맥주잔에 다시 술을 따라준다.
남자가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전 박 진수라고 합니다. 그 쪽은?”
“정 현숙이라고 해요.”
“현숙씨가 처음 카바레에 왔을 때 참 인상이 좋았어요.”
“그냥 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아니에요?”
“설마 그럴리가요? 뭐랄까.. 여자로써 아름답다기 보다 전체적으로 정감이 간다고나 할까..”
“여자보고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건 실례가 아닌가요?”
“하하하!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전 좋은 말을 한다고 하는 건데..
절 처음 보았을 때 인상이 어땠어요?”
“글쎄요..”
“현숙씨는 댄스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키도 여자치고는 작은 편이 아니고, 몸매도
균형이 잡힌 게 운동신경도 발달한 것 같고..
아까 같이 춤을 출 때 정말 오랜만에 춤에 몰두를 한 것 같습니다.”
“진수씨는 춤을 아주 잘 추시는 것 같던데.. 오랫동안 춤을 추셨어요?”
“댄스를 접한 게 조금 오래 됐어요. 한 팔년 됐나?
한때는 댄스에 완전히 미쳤던 적도 있었지요. 아예 전문적으로 이 길로 나설까 하고
생각도 했으니까..”
“지금 나이가 몇인데요?”
“몇 살 정도로 보여요?”
“음.. 사십대 초나 중반정도..”
“사십 셋이에요.”
“나하고는 십년 차이네요?”
“그럼 현숙씨가 서른 셋이에요?”
“나이가 더 들어 보여요?”
“아.. 아닙니다. 오히려 더 어리게 보여요.”
서로 몇 잔씩을 주고 받고 하며 마시다 보니 맥주 세 병이 바닥이 난다.
“현숙씨 술을 잘 마시네요? 한잔 더 할까요?”
“아니.. 됐어요. 그만 일어서요.”
“그러죠.”
그렇게 진수씨와 생각지도 않은 첫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외간남자와 같이 술을 마시고 서로 이야기도 하며 내 마음을 조금
열었나 보다.
오늘까지 두 번이나 서로 손을 잡고 몸을 맞대고 댄스를 춰서 그런지 이 남자를
조금 가깝게 느끼는가 모르겠다.
그 동안 남편하고 살면서 너무 억눌리고 당하면서 살다 보니 남자란 건 내 인생에
아무 의미도 없는 줄 알았는데, 진수씨와 같이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에는
조금 설레이는 마음이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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