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부 - 수현과의 재회

주 5일제 근무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지 오래지만 중견 중소기업에 속하는 민혁의 회사에선 거론조차 되지 않는 금기 사항이다. 어용이라는 딱지를 겨우 면할 정도의 조잡한 인식을 가진 노조에 기대를 거는 이도 없다.
나른한 금요일 오후, 민혁은 사무실 밖 후미진 구석 자리를 찾아간다. 식후불연초면 자자손손 고자출현이라는, 철 지난 우스개 소리를 떠올리며 담배를 입에 문다. 금연구역 확대에 따라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간 큰 사원은, 일부러 찾아봐도 없다.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내는데, 언제 왔는지 송 대리가 불을 붙여 준다. 민혁은 한 모금 길게 빤다.
[이 짓도 못할 노릇이야!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빠져나와 후다닥 피워야하니…… 최 대리, 열 받는데 확 끊을까?]
[왜, 끊고 싶어? 난 빠질게! 담배마저 없다면 무슨 낙으로 회사 생활을 버텨……?]
[하긴, 이게 유일한 낙이지! 그나저나 최 대리한테 조언을 구하고 싶은데 말이야 ……]
송 대리가 타다 만 장초를 힘없이 떨어뜨리며, 발로 짓이긴다.
[송 대리, 요즘 들어 얼굴이 많이 까칠해 보이던데, 안 그래도 무슨 일 있나 물어보려던 참이었어! 뭐, 걱정거리라도 있나?]
[실은, ……]

송 대리의 양쪽 엄지손가락이 중지와 검지의 끝마디를 반복해서 주무른다. 꺼내기 힘든 말임을 암시하는, 송 대리 특유의 버릇이다.
[내 얘기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최 대리!]
[오해 아니라, 사해도 육해도 안 할게……]
송 대리의 표정이 너무 진진해 민혁은 가벼운 농담을 건넨다.
[그렇다고 장난처럼 받아들이진 말고……]
민혁의 실없는 농담을 곧잘 받아주던 평소와 달리 송 대리의 눈빛이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기조차 하다. 민혁은 뭔가 불길한 징조를 감지한다.
[………]
[지난 번 회식 이후로 변한 것 같아! 아니, 변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딴 사람이 됐어!]
[…… 누구?]
짐작되는 사람이 없지 않아, 민혁은 속으로 뜨끔 한다. 담배 연기가 눈에 들어갔는지 코끝부터 알싸하다.

[누구긴…… 선미 씨 말고 내가 관심 가지는 것 봤어?]
[그, 그렇지…… 그런데 미스 윤이 왜?]
민혁은 송 대리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건조한 음성으로 물어본다.
[나야 폭탄주 마시다가 일찍 뻗었잖아. 혹시, 그날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술 잘 마시고 다들 즐겁게 헤어졌어.]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민혁은 꽁초가 된 담배를 비벼 끄고, 적이 안심하며 다시 한 개비를 꺼내 피워 문다.
[선미 씨가 나한테 잘 해주는 게 오히려 낯설어! 그렇게 빼더니 어제는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잖아! 얼음장 같이 싸늘하던 예전의 선미 씨가 아냐! 쾌활하고, 밝은 게…… 정확히 회식 다음날, 그래…… 분명 그날 이후부터 그늘이 없어졌어!]
[쾌활하고 밝아졌다…… 어쨌거나 잘 된 거네!]

민혁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뗀다. 우연히 두 번에 걸쳐 섹스를 나눴지만, 사무실에서의 선미는 더 이상 민혁의 팬클럽 회장이 아니다. 약간은 노골적으로 접근하던 때와는 달리 오히려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민혁과 거리를 두려는 게 느껴졌다. 민혁은 선미의 그런 변화가 내심 고맙기도 했는데, 의외의 복병을 만난 셈이다.
[그야 그렇지! 그런데 회식하던 날, 최 대리가 끝까지 남아서 교통정리 했다며?]
[늘 그렇지! 그런데 뭐 잘못된 일이라도……?]
[아니, 그게 아니라…… 이틀 뒨가 출근했을 때 미스 김이랑 선미 씨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들었거든. 그런데 미스 김이 “선미 씨 그렇게 내린 뒤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나중에 택시 돌려서 노래방에 갔더니 거기도 안 왔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거야? 잃어버린 물건, 찾긴 찾았어?”라며 알쏭달쏭한 질문을 하는 거야. 선미 씨도 우물거리며 대답을 피하고, 엿들은 처지에 끼어들 수도 없고 해서 우야무야 잊고 지냈어.]

꼬리가 밟힌 생쥐처럼 민혁의 신경 세포들이 잔뜩 긴장한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은지에게 거짓말을 하기 위해 송 대리와 알리바이를 맞춘 것도 결정적인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제 선미 씨와 저녁 먹고 나오는 길이었어. 스카프를 두고 나왔다며 레스토랑에 다시 가는 거야. 식사 내내 제대로 말도 못 붙인 터라, 농담 삼아 “미인은 건망증이 심하다더니, 요즘 잘 잊어버리시네요!”라고 했어. 난 그냥 웃자고 한 말인데, 선미 씨가 정색을 하는 거야. 자신이 그렇게 한심한 여자로 보이냐며 눈을 치켜뜨는데, 어찌나 무안하던지…… 그래서 내가 얼떨결에 “아니, 내 말 뜻은 그게 아니라, 지난 번 회식 자리도 그렇고 해서……”라며 묵은 얘기를 꺼내고 말았어. 첫 데이트가 엉망진창이 되는 순간이었지. 그런데 웬걸, “송 대리님, 엿듣는 취미 있나보다. 완전 샌님인줄 알았는데, 보기완 다르네요.”라며 깔깔거리더니 “미안하게도 오늘은 정말 물건을 두고 나왔어요!” 하는 거야.]

에둘러 말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어법, 송 대리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선미는 민혁이 알고 있는 그대로 정공법을 택한다.
‘무창포만 아니었어도 휘말리지 않는 건데……’
민혁은 때늦은 후회를 한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 아무래도 최 대리가 그날 끝까지 교통정리 했다니까 뭐 좀 짚이는 게 있을 거 아냐?]
[그, 글쎄…… 나라고 별 수 있겠어!]
[하긴, 그렇겠지! 그런데 최 대리! 선미 씨와 다퉜어? 사무실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아!]
민혁은 내심 초조해진다.
‘송 대리는 무슨 말을 하지 않으려고 이토록 자잘한 이야기까지 끄집어내는 것일까?’
[아, 아니…… 난 잘 모르겠는데!]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만 들어가세! 참, 그날 외박한 거 은지 씨 아직도 모르지? 다른 사람도 좀 팔고 그래…… 괜히 나만 은지 씨한테 미운털 박히겠어!]
송 대리가 민혁의 어깨를 툭 치고 들어간다.

민혁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 채 송 대리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본다. 긴 이야기 끝에 던지는 의미심장한 단어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지나가는 투로 말했지만 송 대리의 저의가 석연치 않다.
모두 퇴근한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앉아 민혁은 담배를 피운다. 재떨이 대용으로 놓여 있는 일회용 컵에 꽁초 몇 개가 패잔병의 시신처럼 쌓인다. 허공을 채우고 있는 담배 연기 속에 송 대리와 선미의 모습이 겹쳐진다.
한 시간 쯤 전, 정답게 담소를 나누며 퇴근하던 두 사람의 어색한 부조화에 민혁은 피식, 쓴웃음을 짓는다. 관심을 끌기 위한, 질투를 유발하기 위한 선미의 계산된 행동인지는 몰라도 민혁은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는다. 단지 억지로 연기하는 듯한 과장된 몸짓이 안타까웠을 뿐이다.
선미가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송 대리와 맺게 될 새로운 관계에 자신이 방해되지 않기를, 민혁은 온갖 신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내 코가 석 잔데,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민혁은 화장실에 들러 컵을 버린다.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이 마치 무덤이라도 옮기는 양 거창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사무실을 나오니 막상 갈 곳이 없다. 하루 종일 은지의 손전화기는 꺼져 있는 상태다.
연락하라는 메시지를 남겼지만 민혁은 전화를 기다리지 않는다. 장례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은지의 꼬인 심사가 풀리려면 짧지 않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민혁이다.
‘제길, 못 이기는 척, 박 부장을 따라나서는 건데……’
퇴근하기 전, 민혁은 한잔 하자는 박 부장의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하고 말았다. ‘이사 대우’라는 직함을 목에 건 박 부장과 동석한다는 게 왠지 껄끄러워 친구 병문안을 핑계로 사양했던 것이다.
민혁은 무작정 도로 위를 배회한다. 테이프에선 아바의 노래 ‘The Winner Takes It All’이 흘러나온다. 승자가 전부 가진다…… 제목만 놓고 본다면 지극히 옳은 말이다.

민혁은 평소처럼 혼자서 술이나 마시려던 생각을 접는다. 분명 자작하기에 충분한 여건이 구비됐지만, 강간으로 이어졌던 자작의 여파가 뒷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민혁은 영화관으로 차를 몬다. 예매하지 않은 터라 민혁은 스피커 아래 제일 구석진 자리에 배정된다. 맨 정신으로 구겨지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한다. 대작 영화답게 두 시간 남짓 스펙터클한 영상이 펼쳐진다. 기관총이 난무하고, 형제끼리 치고받고 싸운다. 가끔씩 관객들이 훌쩍인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북진하는 장면도, 온 산을 가득 메운 채 밀려드는 중공군도,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한 전투기 격추 씬도 영화관 밖에서 기억나기는 한다. 그러나 형님 댁으로 귀가한 민혁에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국산 영화라는 점이다. 자막을 읽어야한다는 부담감이 없기 때문이다.
민혁은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곧장 부엌으로 향한다. 거실 소파에는 세 살 배기 조카와 형수가 잠들어 있다. 민혁의 뒷바라지를 위해 차일피일 미루다 결혼 7년 만에 태어난 늦둥이 조카다.

민혁은 조심스럽게 냉장고 문을 연다. 알맞게 썰어놓은 과일과 식빵, 우유가 눈에 띈다. 거의 먹지 않는 야참이지만, 꼬박꼬박 챙겨두는 형수가 내심 고맙고 미안하다. 거실을 지나쳐 막 방문 손잡이를 돌리는데, 잠에서 덜 깬 푸석푸석한 목소리가 뒷덜미에 전해진다.
[도련님! 언제 오셨어요? 저녁은……?]
먹었다고 하기도, 안 먹었다고 하기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다. 민혁은 씽긋 웃으며 쟁반을 보여준다.
[먹었는데, 또 배가 고프네요. 위장이나 좀 속일까 하고……]
민혁이 만류해보지만, 몸집 푸짐한 형수가 사람 좋은 인상 그대로 저녁을 차려준다. 손맛도 좋아 김치찌개가 구수하고 얼큰하다.
[형수님! 형님이 안 보이네요. 오랜만에 같이 술추렴이나 할까 했더니……]
[오늘부터 출장이라네요. 하여간 뭔 회사가 허구한 날 출장인지……]
민혁은 늦은 저녁으로 밥 한 공기를 비워낸다. 간단히 샤워까지 마치고 나니 벽시계가 11시를 알린다.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 은지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군!’

섭섭한 마음도 잠깐, 민혁은 옷걸이에 걸어둔 바지 주머니를 뒤진다. 영화를 보느라 손전화기를 꺼두었던 탓이다. 민혁은 서둘러 손전화기를 켠다. 기다렸다는 듯이 캐치콜과 문자 메시지가 쏟아진다.
‘수현이예요! 30분 후에 대구행 비행기를 탑니다! 공항에 내리면 다시 연락할게요.’
‘조금 전 도착했는데, 계속 연락이 안 되네요. 막무가내로 찾아와 결례를 범합니다. 꼭 좀 뵙고 싶어요!’
‘우선 제가 머물 곳으로 갑니다. 지난번에 묵었던 그 호텔이 적당할 것 같네요.’
‘여기 지리를 몰라 선뜻 움직이기 겁나네요. 저는 507호에 있어요. 늦더라도 괜찮으니 연락 주세요!’
수현의 마지막 메시지는 10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작성된 것이다. 민혁은 손전화기에 찍힌 발신자 번호를 꾹꾹 누른다.
[강수현 씨, 최민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 전화하려던 참이에요. 민혁 씨,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아, 네…… 저 역시 한 번 뵙고 싶었어요. 드릴 말씀도 있고……]
민혁은 수현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향한다.

로비나 라운지,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는 민혁의 제안을 수현이 완강하게 거부한다. 보는 눈이 많다는 이유로 호실로 직접 찾아올 것을 당부한다.
두어 번의 노크 뒤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수현이 문을 열어준다. 민혁은 가벼운 목례로 긴장된 만남의 첫 단추를 연다. 운전하는 동안 수없이 뇌까렸던 말들이 쏙 들어간다. 수현의 권유에 따라 소파에 앉기까지 민혁은 바닥으로 향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모자를 벗으며 수현이 먼저 입술을 움직인다.
[가까운 곳에 계셨나 봐요. 빨리 오셨네요! …… 이곳까지 오시라고 해서 죄송해요. 아나운서라는 직업상 아무래도 주변의 이목을 의식하게 되거든요.]
[아니,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죄송하죠! 염치가 없어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입이 열 개라 한들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민혁은 고해성사를 하는 심정으로 사죄한다.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정황 논리상 자신은 파렴치한 강간범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수현이 다시 찾아왔다는 점이 그 사실을 확연히 증명한다.
[죄인…… 아니에요! 왜 민혁 씨가 죄인이에요? 더 이상 그런 말씀 마세요!]
뺨이라도 한 대 후려갈기면 마음의 짐이 그나마 덜어질 것 같은데, 수현은 오히려 민혁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긴다.
[민혁 씨, 그날 저는 비로소 여자가 됐어요! 민혁 씨가, 절 여자로 태어나게 했어요. 고마워요, 민혁 씨!]
수현이 힘주어 민혁을 꼭 끌어안는다. 그럴수록 민혁은 쇠망치를 맞은 듯 어리둥절해진다. 강간인데, 완력으로 한 여자를 강제로 범했는데, 어째서 고맙다고 하는지…… 너무 아이러니한 상황이 민혁의 혼을 쏙 뺀다. 수현의 품에 붙박여 있는 민혁의 정수리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민혁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감정을 전한다.
[수현 씨! 저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은 저를 오해하고 있어요. 고맙다니, 그런 말씀이 ……]
민혁은 어렵사리 꺼낸 자신의 말을 마치지 못한다. 수현의 입술이 민혁의 입술에 포개졌기 때문이다. 혀를 삼킬 듯한 긴 키스 뒤에 수현의 촉촉한 입술이 헐떡이기 시작한다.
[아무, 아무 말도 마세요! 오해라고 해도 좋아요. 최민혁, 당신을……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의, 당신만을 위한 여자이고 싶어요!]
[읍, 으읍…… 흐으읍…]
민혁은 자신의 무릎에 걸터앉아 또 다시 입술을 비벼대는 수현의 애정공세를 제어하지 못 한다. 천정에 매달린 불빛이 어지럽게 흩어진다. 경찰을 대동해도 모자랄 판국에 온 몸으로 사랑한다 말하는 여자를 거역하기가 가혹하다.
[민혁 씨, 당신을 알기 전에 남자란 악몽이었어요! 당신에게 안긴 이후 사납던 제 꿈자리가 평온해졌어요. 당신을 만나, 민혁 씨를 알게 돼 기뻐요.]
어처구니없는 수현의 말을 들으며, 민혁은 서서히 고개를 든다. 기쁘다는 말 그대로 수현이 방긋 웃고 있다. 민혁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던 수현의 손길이 아래로 향한다. 서툴게 셔츠 자락을 여미더니 바지 단추와 지퍼까지 재빠르게 개방한다. 팬티를 젖힌 수현의 입술이 민혁의 좆 대궁을 집어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