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떠 보니 어제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가을 비 탓으로 하늘이 낮게 깔리고 처마 끝에선 또로록 떨어지는 낙수물 소리가 유리창을 통해 들렸다.
가뜩이나 짧다 싶은 가을엔 한차례 비만 내려도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게 혹시 이미 겨울이 시작 되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동네 산책 대신 대문 밖에 비니루에 싸여서 뒹굴고 있는 조간신문을 집어 들었다.
눈에 들어오는 표제글들은 어제도 그제도 또 그그저께도 그래왔듯이 오늘도 판박이를 문지른 것 처럼 똑같이 정치인들에 대한 얘기로 채워졌다.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도 살아가는 매일의 의미는 하늘의 별 보다 더 많은 사연으로 각자의 가슴속에 조용히 뭍혀 아무도 모르게 보석처럼 간직되련만 아무런 소득없이 일년을 똑같은 소리와 똑같은 몸짓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다지도 많은 지면이 장식되는지 모르겠다.
집어든 신문을 대충 넘기며 아랫배에 큰 힘을 주었다.
"뿡~" 하며 예상 했던 것 보다 큰 방귀 소리가 터져나오며 뱃속의 가스가 제거된 행복감에 엉덩이를 나도 모르게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행복이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볼 것도 없는 신문을 집어 들었던 실망감을 방귀 소리로 바꿔 버리는 일이야 말로 하루의 행복을 약속하는 스스로의 작은 노력의 결과라 할 것이다.
식탁앞에 아이들이 앉아 조반을 먹는다.
맛있는 된장을 넣어 만든 시금치국이 밥 한그릇을 게눈 감추듯 뚝딱 비우게 했다.
밤새도록 잠을 설친 탓에 운전대를 잡으면 졸음운전을 하게 될 것 같아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과 이리저리 치대며 쏠리고 쓸리며 빠른 속도록 지하철은 달리고 있다.
비좁아 터진 공간 때문에 사방팔방에서 밀고 밀리는 부침 속에 나를 던지고 목적지까지 적어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발등은 밟히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 소박함이 나를 오히려 기쁘게 했다.
"아야!"
물컹하면서도 작은 물체라는 느낌이 들어 밀려서 허공에 떠 있던 발을 내려놓다 말고 얼른 들어올렸건만 작은 아픔조차도 인내하지 못하고 냅다 소리를 지르는 아가씨가 있었다.
누가 밟았는지 알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혼잡함 속에서 설마 나를 지목하여 소리를 지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당사자로서 미안한 마음에 간단한 사과의 말을 하고 싶었다.
"미안, 떠 밀려서요."
"뭔 사람이 조심성도 없어요?. 됐어요!"
이 혼잡 속에서 발을 조금 밟혔다고 사과하는 사람에게 면박을 주는 그 아가씨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뭘봐요? 기분나빠." 신경질을 내며 몸을 틀어 틈바구니 속을 삐집고 다른 쪽으로 가버린다.
함께 뒤엉켜 있던 많은 사람들은 일상화된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무실 커튼을 열었다.
이른 아침까지 비를 뿌리던 하늘은 물청소를 한 듯 시야범위를 멀리까지 열어준다.
미스김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진한 커피 한잔을 타왔다.
열린 커튼 사이로 여러개의 봉우리를 연결한 듯 큰 산이 눈에 들어왔다.
단풍 깊은 산이 사각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니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했다.
"오늘 저희 부서에 신입사원 배치되는 것 아시죠?" 찻잔을 내밀려 미스김이 말했다.
"응, 이번 직원은 만능탈랜트를 보내준다했으니까 기대가 큰 걸."
"구관이 명관인건 아시죠?" 미스김이 뽀로뚱해지며 말은 던졌다.
"하하, 강물은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것도 아셔야 해."
커피 향기 특히 진한 커피 향기는 민지를 생각나게 한다.
미국을 오가며 영화사업을 하는 탓에 민지는 항상 진한 커피를 마셨다.
연예계일을 관장하면서 자유분망하게 살아온 민지는 혹시라도 내가 자신의 남자 편력을 문제 삼아 마음 상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 차례나 자신은 누구의 소유가 아닌 완전한 자유인임을 강조하곤 했었다.
민지가 만나야 할 사람은 대부분 남자였다.
민지가 원했든 상대가 원했든 육체적 관계를 갖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녀의 자유를 구속할 어떤 법률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지 않았다.
결코 질투하거나 분개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여보, 당신의 애를 낳고 싶어요." 민지가 가슴에 얼굴을 뭍고 부끄러운 듯 말했다.
"활동에 지장있지 않아?"
"다음달에 미국 남자랑 결혼식 올릴껀데, 당신 씨를 받고 싶단 말야."
"뭐? 그 남자가 이해한데?"
"나를 좋아해서 결혼하는거라 애 문제는 관계없다 그러더라."
"결혼을 앞두고 일부러 남의 씨로 애를 만든 사실을 알면 그 사람 기분이 좋을까?"
"결혼식 올린 다음 부터만 철저한 부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결혼식 전에 있었던 일은 시비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지 뭐."
"민지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원한다면 그 사람 애를 낳는게 좋겠다."
"징그러. 난 당신 애를 갖고 시집가서 낳고 더 이상은 안낳을꺼거든."
"그 사람의 존재는 그럼 뭐야?"
"결혼이지.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거.
같은 일을 하니까 서로 이해의 폭도 넓고 그래서 돕고 사는 그런거지 뭐."
"결혼 속에는 출산이 기본적으로 포함된거 아냐?"
"어휴, 당신은 너무 고리타분 하다니까.
그 사람은 나를 원해서 결혼하는거지 결코 애를 낳기 위해 결혼하는게 아니라니까."
"모르겠다. 진보된 성향으로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민지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가끔씩 행복하다는 편지가 왔다.
검은 머리카락과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눈섭이 짙은 얼굴을 한 어린아이와 함께 웃으며 찍은 사진도 포함된 적이 있었다.
누구의 아이라는 말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의 사진을 뜯어져라 쳐다봤지만 나를 닮지 않았다는 점만 발견될 뿐이었다.
민지는 미국에서 살면서도 서울 사무실은 일년에 몇번씩 방문했지만 나를 찾는 일은없었다.
한번 마음주고 결혼한 코쟁이 만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로운 생활은 모두 정리한 것 같았다.
그런 민지로부터 자유와 책임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명제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일 속에 뭍혀 살며 민지를 잊어 버렸다.
민지로부터 편지가 끊어진지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의도적으로 잊던 무감각으로 인해 잊던 나는 민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행동 철학은 가슴 속에 분간할 수 없는 형태로 한점이 되어 내가 해내야 할 더 많은 일들을 결정할 때 더 많은 절제를 실천할 수 있는 단초로만 작용될 뿐이었다.
부고.
거래처 영화사로부터 민지가 자동차 여행도중 사고로 사망했다는 부고를 들었다.
부부가 함께 사망했는지 어린아이도 함께 였는지 더 이상 밝혀진 바 없이 민지의 부고만 내게 통보됐다. 민지의 서울사무소 직원들과 함께 서운해 하며 그녀의 눈부신 활약상을 수도 없이 듣거나 늘어 놓으며 그녀를 잊고 살았던 많은 날들을 한꺼번에 날려 보내고 있다.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고 싶었지만 연고도 없는 낯선 이방인이 그 앞에 통곡하면 죽은 사람에 대한 모욕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민지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내 곁을 영원히 떠났다.
아니, 오히려 저 하늘 밝게 빛나는 별이 되어 영원히 내 곁에 머물고 있다.
흐린 날에도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은 민지가 나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며 뿜어내는 열기라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 불빛의 의미는 민지와 민지를 잊고 살았던 나만의 비밀이기 때문에.
인사과 김주임이 신입사원 서류를 건네고 갔다.
무심히 서류를 넘겼다.
여자. 석사 재원. 삼개국어 능통. 취미 골프.
입사를 위해 예쁘게 찍었을 이력서에 붙은 사진에 눈길이 멈췄다.
"어, 이 여자는?" 회심의 미소가 떠 오른다.
"허허, 세상 참 좁군. 아침 지하철에서 민망을 떨던 아가씨잖아?"
미스김이 신입사원을 쇼파에 앉혔다.
조심스럽게 두리번 거리며 앞으로 함께 일할 동료들을 파악하느라 눈동자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부장님, 신입사원 왔어요." 미스김이 내 방문 넘어로 소리를 꿱 질러댔다.
"그래, 내 방으로 들여보네." 창문 너머로 미스김에게 말했다.
미스김이 삐끔 문을 열더니 신입사원 등을 떠밀 듯이 들여 보내고 방문을 닫았다.
나는 등 받이 의자를 뒤로 돌리고 창밖을 계속 보고 있었다.
"저, 부장님. 여기루 발령받은 신입사원 김미애입니다."
뒤로 돌아앉은 내가 자세를 바로 잡기를 기다리다 지쳤는지 스스로 내 등뒤에다 자기 소개를 하고 만다.
"집이 부잔가?" 등을 아직 돌리지 않은 상태에서 신입사원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정식직원으로 뽑힌건가?"
"네, 그렇습니다."
"인사부 애들은 뭘 보고 사람을 뽑는거야?" 언성을 높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네?" 신입사원은 깜짝 놀라 뒷걸음 치듯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휙 돌아서며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마주쳤다.
"부장이 인사 받을 준비도 안됐는데도 인사부터 하지않나,
어 얼굴이 낯 익은데?
뭐야, 아침에 지하철에서 발 밟혔다고 난리친 아가씨잖아?"
순간 신입사원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됐어. 아침 일은 모르는 사람끼리는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고객을 상대하는 자리에서 일하려면 빠른 시간내 성질 고쳐!
일어나서 의자에 앉아봐."
신입사원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회의용 탁자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죄송해요. 부장님인지도 모르고 아침에 성질을 부렸네요."
"세상은 넓고 좁습니다. 모두 좋은 일로만 만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서로에게 좋은 일만 기억되도록 노력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한 법이에요.
오늘 일은 두 사람만 아는 일이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맙시다.
중요한 것은 그 성질이 고객들에게도 적용된다면 회사로선 큰 손실을 입게 됩니다.
주위 선배들의 조언을 많이 받아 들이고 습관이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세요."
"부장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일은 김과장이 정해서 시키게 될 테니까 지금 이순간부터는 밝은 마음으로 신입사원 답게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기존 질서에 익숙하기 전에 눈에 띄는 개선점이 있으면 수시로 내게 말해요. 민감한 코는 냄새에 익숙해져 버리면 아무 쓸모 없는 법이니까."
"네, 아침일을 용서해 주신다니 감사드립니다."
김미애는 이렇게 난감하게 신입사원의 첫발을 내 딪었다.
가뜩이나 짧다 싶은 가을엔 한차례 비만 내려도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게 혹시 이미 겨울이 시작 되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동네 산책 대신 대문 밖에 비니루에 싸여서 뒹굴고 있는 조간신문을 집어 들었다.
눈에 들어오는 표제글들은 어제도 그제도 또 그그저께도 그래왔듯이 오늘도 판박이를 문지른 것 처럼 똑같이 정치인들에 대한 얘기로 채워졌다.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도 살아가는 매일의 의미는 하늘의 별 보다 더 많은 사연으로 각자의 가슴속에 조용히 뭍혀 아무도 모르게 보석처럼 간직되련만 아무런 소득없이 일년을 똑같은 소리와 똑같은 몸짓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다지도 많은 지면이 장식되는지 모르겠다.
집어든 신문을 대충 넘기며 아랫배에 큰 힘을 주었다.
"뿡~" 하며 예상 했던 것 보다 큰 방귀 소리가 터져나오며 뱃속의 가스가 제거된 행복감에 엉덩이를 나도 모르게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행복이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볼 것도 없는 신문을 집어 들었던 실망감을 방귀 소리로 바꿔 버리는 일이야 말로 하루의 행복을 약속하는 스스로의 작은 노력의 결과라 할 것이다.
식탁앞에 아이들이 앉아 조반을 먹는다.
맛있는 된장을 넣어 만든 시금치국이 밥 한그릇을 게눈 감추듯 뚝딱 비우게 했다.
밤새도록 잠을 설친 탓에 운전대를 잡으면 졸음운전을 하게 될 것 같아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과 이리저리 치대며 쏠리고 쓸리며 빠른 속도록 지하철은 달리고 있다.
비좁아 터진 공간 때문에 사방팔방에서 밀고 밀리는 부침 속에 나를 던지고 목적지까지 적어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발등은 밟히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 소박함이 나를 오히려 기쁘게 했다.
"아야!"
물컹하면서도 작은 물체라는 느낌이 들어 밀려서 허공에 떠 있던 발을 내려놓다 말고 얼른 들어올렸건만 작은 아픔조차도 인내하지 못하고 냅다 소리를 지르는 아가씨가 있었다.
누가 밟았는지 알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혼잡함 속에서 설마 나를 지목하여 소리를 지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당사자로서 미안한 마음에 간단한 사과의 말을 하고 싶었다.
"미안, 떠 밀려서요."
"뭔 사람이 조심성도 없어요?. 됐어요!"
이 혼잡 속에서 발을 조금 밟혔다고 사과하는 사람에게 면박을 주는 그 아가씨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뭘봐요? 기분나빠." 신경질을 내며 몸을 틀어 틈바구니 속을 삐집고 다른 쪽으로 가버린다.
함께 뒤엉켜 있던 많은 사람들은 일상화된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무실 커튼을 열었다.
이른 아침까지 비를 뿌리던 하늘은 물청소를 한 듯 시야범위를 멀리까지 열어준다.
미스김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진한 커피 한잔을 타왔다.
열린 커튼 사이로 여러개의 봉우리를 연결한 듯 큰 산이 눈에 들어왔다.
단풍 깊은 산이 사각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니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했다.
"오늘 저희 부서에 신입사원 배치되는 것 아시죠?" 찻잔을 내밀려 미스김이 말했다.
"응, 이번 직원은 만능탈랜트를 보내준다했으니까 기대가 큰 걸."
"구관이 명관인건 아시죠?" 미스김이 뽀로뚱해지며 말은 던졌다.
"하하, 강물은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것도 아셔야 해."
커피 향기 특히 진한 커피 향기는 민지를 생각나게 한다.
미국을 오가며 영화사업을 하는 탓에 민지는 항상 진한 커피를 마셨다.
연예계일을 관장하면서 자유분망하게 살아온 민지는 혹시라도 내가 자신의 남자 편력을 문제 삼아 마음 상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 차례나 자신은 누구의 소유가 아닌 완전한 자유인임을 강조하곤 했었다.
민지가 만나야 할 사람은 대부분 남자였다.
민지가 원했든 상대가 원했든 육체적 관계를 갖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녀의 자유를 구속할 어떤 법률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지 않았다.
결코 질투하거나 분개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여보, 당신의 애를 낳고 싶어요." 민지가 가슴에 얼굴을 뭍고 부끄러운 듯 말했다.
"활동에 지장있지 않아?"
"다음달에 미국 남자랑 결혼식 올릴껀데, 당신 씨를 받고 싶단 말야."
"뭐? 그 남자가 이해한데?"
"나를 좋아해서 결혼하는거라 애 문제는 관계없다 그러더라."
"결혼을 앞두고 일부러 남의 씨로 애를 만든 사실을 알면 그 사람 기분이 좋을까?"
"결혼식 올린 다음 부터만 철저한 부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결혼식 전에 있었던 일은 시비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지 뭐."
"민지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원한다면 그 사람 애를 낳는게 좋겠다."
"징그러. 난 당신 애를 갖고 시집가서 낳고 더 이상은 안낳을꺼거든."
"그 사람의 존재는 그럼 뭐야?"
"결혼이지.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거.
같은 일을 하니까 서로 이해의 폭도 넓고 그래서 돕고 사는 그런거지 뭐."
"결혼 속에는 출산이 기본적으로 포함된거 아냐?"
"어휴, 당신은 너무 고리타분 하다니까.
그 사람은 나를 원해서 결혼하는거지 결코 애를 낳기 위해 결혼하는게 아니라니까."
"모르겠다. 진보된 성향으로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민지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가끔씩 행복하다는 편지가 왔다.
검은 머리카락과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눈섭이 짙은 얼굴을 한 어린아이와 함께 웃으며 찍은 사진도 포함된 적이 있었다.
누구의 아이라는 말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의 사진을 뜯어져라 쳐다봤지만 나를 닮지 않았다는 점만 발견될 뿐이었다.
민지는 미국에서 살면서도 서울 사무실은 일년에 몇번씩 방문했지만 나를 찾는 일은없었다.
한번 마음주고 결혼한 코쟁이 만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로운 생활은 모두 정리한 것 같았다.
그런 민지로부터 자유와 책임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명제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일 속에 뭍혀 살며 민지를 잊어 버렸다.
민지로부터 편지가 끊어진지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의도적으로 잊던 무감각으로 인해 잊던 나는 민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행동 철학은 가슴 속에 분간할 수 없는 형태로 한점이 되어 내가 해내야 할 더 많은 일들을 결정할 때 더 많은 절제를 실천할 수 있는 단초로만 작용될 뿐이었다.
부고.
거래처 영화사로부터 민지가 자동차 여행도중 사고로 사망했다는 부고를 들었다.
부부가 함께 사망했는지 어린아이도 함께 였는지 더 이상 밝혀진 바 없이 민지의 부고만 내게 통보됐다. 민지의 서울사무소 직원들과 함께 서운해 하며 그녀의 눈부신 활약상을 수도 없이 듣거나 늘어 놓으며 그녀를 잊고 살았던 많은 날들을 한꺼번에 날려 보내고 있다.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고 싶었지만 연고도 없는 낯선 이방인이 그 앞에 통곡하면 죽은 사람에 대한 모욕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민지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내 곁을 영원히 떠났다.
아니, 오히려 저 하늘 밝게 빛나는 별이 되어 영원히 내 곁에 머물고 있다.
흐린 날에도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은 민지가 나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며 뿜어내는 열기라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 불빛의 의미는 민지와 민지를 잊고 살았던 나만의 비밀이기 때문에.
인사과 김주임이 신입사원 서류를 건네고 갔다.
무심히 서류를 넘겼다.
여자. 석사 재원. 삼개국어 능통. 취미 골프.
입사를 위해 예쁘게 찍었을 이력서에 붙은 사진에 눈길이 멈췄다.
"어, 이 여자는?" 회심의 미소가 떠 오른다.
"허허, 세상 참 좁군. 아침 지하철에서 민망을 떨던 아가씨잖아?"
미스김이 신입사원을 쇼파에 앉혔다.
조심스럽게 두리번 거리며 앞으로 함께 일할 동료들을 파악하느라 눈동자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부장님, 신입사원 왔어요." 미스김이 내 방문 넘어로 소리를 꿱 질러댔다.
"그래, 내 방으로 들여보네." 창문 너머로 미스김에게 말했다.
미스김이 삐끔 문을 열더니 신입사원 등을 떠밀 듯이 들여 보내고 방문을 닫았다.
나는 등 받이 의자를 뒤로 돌리고 창밖을 계속 보고 있었다.
"저, 부장님. 여기루 발령받은 신입사원 김미애입니다."
뒤로 돌아앉은 내가 자세를 바로 잡기를 기다리다 지쳤는지 스스로 내 등뒤에다 자기 소개를 하고 만다.
"집이 부잔가?" 등을 아직 돌리지 않은 상태에서 신입사원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정식직원으로 뽑힌건가?"
"네, 그렇습니다."
"인사부 애들은 뭘 보고 사람을 뽑는거야?" 언성을 높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네?" 신입사원은 깜짝 놀라 뒷걸음 치듯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휙 돌아서며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마주쳤다.
"부장이 인사 받을 준비도 안됐는데도 인사부터 하지않나,
어 얼굴이 낯 익은데?
뭐야, 아침에 지하철에서 발 밟혔다고 난리친 아가씨잖아?"
순간 신입사원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됐어. 아침 일은 모르는 사람끼리는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고객을 상대하는 자리에서 일하려면 빠른 시간내 성질 고쳐!
일어나서 의자에 앉아봐."
신입사원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회의용 탁자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죄송해요. 부장님인지도 모르고 아침에 성질을 부렸네요."
"세상은 넓고 좁습니다. 모두 좋은 일로만 만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서로에게 좋은 일만 기억되도록 노력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한 법이에요.
오늘 일은 두 사람만 아는 일이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맙시다.
중요한 것은 그 성질이 고객들에게도 적용된다면 회사로선 큰 손실을 입게 됩니다.
주위 선배들의 조언을 많이 받아 들이고 습관이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세요."
"부장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일은 김과장이 정해서 시키게 될 테니까 지금 이순간부터는 밝은 마음으로 신입사원 답게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기존 질서에 익숙하기 전에 눈에 띄는 개선점이 있으면 수시로 내게 말해요. 민감한 코는 냄새에 익숙해져 버리면 아무 쓸모 없는 법이니까."
"네, 아침일을 용서해 주신다니 감사드립니다."
김미애는 이렇게 난감하게 신입사원의 첫발을 내 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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