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2장
수혼은 그 사건이후 여자애들에게 무척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여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날의 미안함 마음과 현재 전문대를 준비하는 단계에서 격려 비슷하게 여자들 4명 모두에게 편지를 섰다. 여자들 모두에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사실 수혼은 편지 쓰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미팅 상대들과 대부분 만나지는 않았지만 편지는 많이 주고받았다. 수혼은 미팅이 끝나고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전화번호를 묻지 않고 주소를 물어봤다. 이상하게 생각한 여자에게 그냥 헤어지고, 주소를 알려주는 여자들에겐 편지를 섰다. 많은 여자들 중 한두 번 답을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대부분 여자들이 편지만 하고 만나자는 제안이 없는 수혼에게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존심도 상해서 수혼도 편지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가 고3 봄에 만나 여자에게는 주소를 물어보고 또 편지를 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수혼은 자신의 주소를 적지 않았다. 그냥 상대방에게 무조건 편지를 쓴 것이다. 그것은 편지라기보다는 하루하루 일기처럼 일주일에 3번이상 보냈다. 상대방이 답장을 하려고 해도 답장은 할 수 없었다. 수혼의 전화번호, 주소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수혼은 그것이 마음 편하게 생각되어 그 여자에게만은 8개월에 걸쳐서 편지를 했다. 그리고 12월 어느 날 그녀와 다시 한번 만나서, 그동안 자신의 편지를 받아 주어 고맙다고 그리고 너도 이제 3학년(미팅 당시 여자는 2학년 이였다.)이니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만 남기고 식사한번에 그녀와 안녕했다.
그녀는 황당하고 엉뚱한 수혼의 행동에 기가 막힌 듯 그냥 말없이 헤어졌다.
수혼은 그녀들에게 답장이 없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다신 편지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여자, 남자 모두 여의도로 놀려가기로 했다.
당시 여의도는 공원이 아니라 광장 이였다. 축제도하고 집회도 하는 공간이며 평소에는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등을 즐기는 장소였다.
여의도에서 모두 롤러스케이트를 탔다. 수혼은 평소 형제들과 롤라스케이트장을 자주 가서 롤러스케이트 실력이 제법 좋았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아이들은 롤라를 잘 타지 못해 수혼만 즐겁게 보냈다. 운동을 하던 은성이가 넘어지며 너무나 유연한 몸 때문에 다리를 일자로 뻗으며 넘어져 바지 가랑이가 찌어지는 소동이 있었다. 다행이 여자들 중 바느질거리(당신 여자들은 바느질거리를 가지고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를 가지고 있는 여자가 있어 화장실에서 끼워 입었다.
간단하게 먹고, 자전거를 즐기다 집에 갈 때가 된 것 같았다.
“우리 집까지 걸어가자”
“여기서 집까지 얼마나 먼데~”
“버스로 30분 걸리니까 2시간 정도만 걸어가면 집에 갈수 있어. 그리고 한강을 끼고 성산대교까지 가면 경치도 구경할 수 있어 좋지.”
수혼의 제안에 여자들은 마지못해, 남자들은 상관없다는 듯이 동의하고 여의도에서 목동까지 걸었다.
처음에는 모두 씩씩하게 잘 걷던 아이들이 점점 간격이 벌어졌다. 수혼과 은성은 운동하고 있는 중이라 그런지 가장 선두에 있고 지성, 재운, 미선이가 중간에 있었다. 그리고 성매, 지영이가 다음, 그런데 란이 보이지 않았다. 수혼은 선두로 가다가 란을 찾기 위해 다시금 뒤로 갔다. 란은 혼자 힘들게 걸어오고 있었다. 란 힘들게 걸어오는 모습이 수혼의 눈에 측은하게 보였다. 수혼은 란과 함께 걸었다.
“힘들지”
“아니 경치도 좋고, 걸을 만해, 단지 너희들처럼 내가 빨리 걸지 못해 그런 거지”
힘들어하면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란이 처음으로 예쁘게 보였다.
“걸어가며 심심하니까, 심리테스트 하면서 걸어가자”
“너 그런 것도 할줄 알아”
“야 네가 안 해서 그렇지, 손금, 관상, 별자리점, 성명학, 사주, 심리테스트 모두 할 줄 알아. 저번에 네가 주역, 역경이야기 하는 것 못 들어봤어”
“그건 그냥 학문이지 점보는 거 아니잖아”
“물론 주역이나 역경이 학문이지, 하지만 역경에는 60계로 인생을 예측할 수 있는 방법도 있어, 사실 주역을 모두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면 천리를 알고 신선이 된다고 하는데 난 그런 경지는 아니고 그냥 몇 번 읽어본 정도지. 하지만 주역을 알고 점성술에 관심이 있어서 점성술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지”
“점성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주역으로 풀면 많은 것이 일맥상통하는 것이 많아. 우리가 갑신년이라, 을축년이다 하는 것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십계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라는 12계가 돌아가면서 이루어지는 거야 이것이 한바퀴 도는 것이 60년 60갑자고, 이것을 다시 1갑자라고 하지, 사람이 1갑자 60살면 장수 했다고 옛날부터 환갑잔치를 했지. 이때의 한 갑이 1갑자를 이야기 하는 거야. 사실 우리 사회가 서구 문물이 들어와 이제 많이 서구화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동양사상이 많이 지배하는 사회야”
“서양 문물? 머가 틀린데~~”
“근본적으로 유물사관이 틀려, 예를 들면 서양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0살이지, 하지만 동양에서는 태어나자마자 1살이지. 이것의 차이는 서양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야만 사물을 인정하고, 동양은 눈이 보이지 않는 것도 사물로 인정해, 똑같이 어머니 배속에 있는 태아를 서양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동양은 인정하는 거야”
“넌 어떻게 그런 고리타분한 것들을 알고 있지”
“난 고등학교 때 사춘기였어. 남들보다 사춘기가 늦었지. 2학년 때 인생이 무엇인가? 라는 명제를 가지고 그것을 풀기 위해 많이 노력했어.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어느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주지 않더군. ‘공부나 해라’, ‘크면 자연스럽게 알아’ 등등 면박을 주는 답들이거나 혹은 ‘그것은 신도 몰라 인생이란 무엇이라 단정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야’라는 무책임한 답 뿐이였지. 그래서 스스로 답을 풀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어. 2학년 1년 동안 읽은 책이 수천 권은 될 거야. 사실 내 고등학교 2학년 때 성적이 바닥이었지. 전교에서 내 밑에 있는 애들이 신기했지. 책가방에 교과서 한권 없이 온갖 철학책들만 있었을 정도야. 학교, 도서관등에서 공부를 한 적이 없어. 그때 수많은 철학책을 보았지. 성경, 불교성경, 코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인생이 무엇인가라는 답을 찾았어.
“아니 찾지 못했어. 단지 인생이란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상존하며, 최선의 선택이 있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야”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선택할 수 없는 것!”
“그래 내가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지. 형제를 선택할 수도 없어. 죽는 것을 늦출 수는 있어도 죽지 않는 선택은 할 수 없지. 또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선택할 수 있어. 지금도 내가 버스타고 갈수 있는 것을 걸어가겠다고 선택한거지. 순간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다는 것. 그것이 인생의 조그만 부분이지”
“그런데 그런 철학적인 고민에 점성술은 머야”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되었지. 미래를 먼저 알고 싶었던 거지. 지금 생각하면 자신의 미래를 먼저 아는 것만큼 재미없는 인생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그때는 관심이 많았어. 그래서 점성술을 공부했지”
“완전히 돌팔이 아냐”
“내가 고등학교 때 많은 애들의 점을 보았지. 기본적으로 사주팔자와 손금을 맞추며 보았는데 과거의 80%이상 맞더군. 미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말이야.”
“그럼 심리테스트는 말고 그럼 손금 바죠”
“걸어가면서 어떻게 손금을 보니, 그냥 심리테스트하자.”
심리테스트는 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 당시 일본의 심리학자가 쓴 책이 있었다. 대부분의 심리테스트가 서양의 것으로 동양 사람들의 심리와 다른 부분이 많았지만 일본의 심리학자가 쓴 책은 동양사상을 근거로 하였기 때문에 잘 맞는 편이였다.
수혼이 란과 함께 걸어간 것은 가장 뒤처지는 란이 측은했기 때문이다. 란도 수혼과 이야기하며 기운이 나는지 아니면 수혼의 얘기에 빠져 힘들 줄 몰라 그리는지 힘을 내서 다른 애들과 함유하게 되었다.
걷기 시작한지 2시간 정도가 되니 어느덧 양화교 인공폭포에 왔다. 그때 은성과 수혼 빼고는 모든 아이들이 지쳤다.
“야! 이제는 버스타고 가자”
“이제 30분 정도만 더 가면 되는데, 그냥 가자. 여기서 버스타면 걸어온 의미가 없잖아”
수혼은 계속 걸어가기를 주장했다. 다른 애들은 힘들고 지쳐서 버스 타고 가기를 주장했다.
“그럼 버스타고 가고 싶은 아이들은 버스타고 가!”
수혼은 아이들을 두고 혼자 걸어가 버렸다. 은성이는 바로 뒤 따라왔다. 하지만 다른 애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자기들끼리 다시 논의를 하는 것 같았다.
조금 걸어가고 뒤를 돌아보니 다른 애들은 버스 정류장으로 가고 있었다. 사실 2시간을 넘게 걸어와서 지치고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수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지만 여기까지 와서 버스 탄다는 것이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싫었다.
그런데 란은 혼자 수혼과 은성에게 걸어왔다.
“넌 버스타고 안가”
“그냥 걸어갈래.
참 힘들게 지금까지 걸어온 것도 대단한데, 다른 애들과 다르게 참을성이 대단했다. 1시간의 롤러스케이트, 2시간의 자전거, 그리고 2시간 넘게 걸어온 길, 아무리 놀자고 한 짓이지만 힘든 것은 사실이다. 걸어오며 란은 참 힘들어했다. 다리에 쥐가 나는지 가끔 스트레칭을 병행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수혼의 생각에 란은 가장먼저 버스를 타자고 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란이 끝까지 걸어가지고 수혼에게 다가왔을 때, 처음으로 수혼의 마음속에 란에 대한 작은 울림이 있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수혼의 생일이 엇다. 수혼의 남자친구들은 특별이 생일이라고 잔치를 하거나 행사를 하는 것은 없었다. 사실 남자들끼리 행사를 한다는 것도 웃기고 그동안 학교가 틀리고 학교생활에 바빠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해서 행사 같은 것을 한 적은 없는데.
여자애들과 있고 해서 간단한 잔치를 했다.
처음 만났던 바보에 가서 생일 케이크도 사고 선물도 받았다. 바보에서 간단하게 한잔씩하고 수혼이 집에 와서 여자들에게 받은 선물을 뜯어보니 미선이와 란의 선물 속에 편지가 들어있었다.
수혼은 마음속으로 미선을 좋아했다. 서구적인 마스크에 좀 쌀쌀한 성격이지만 까만 피부가 매력적이고 또 처음과는 다르게 지금은 남자들에게 싹싹해 졌다. 또한 가끔 얼굴에 나타나는 어둠은 남자들에게 보호해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한다.
수혼은 바로 미선에게 정성스럽게 답장을 했다. 란의 편지는 한강에서 대화한 인생에 대한 내용이 많아 평소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에 대한 것을 정리해서 답장을 했다. 미선에게 쓰는 편지는 쓰고 다듬는 과정을 거치며 내용이 많지 않았지만 란에게 쓰는 편지는 그냥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상당히 많아졌다.
수혼의 답장에 다시 미선과 란 모두에게 다시 편지가 왔다. 미선은 전후기대학을 모두 떨어지고 있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고민하고 있는 내용이 많았다. 란의 편지는 다시금 철학적인 내용으로 되어있었다.
미선은 약간 악필 이였다. 디자인이 예쁜 편지지에 미선의 글씨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악필 이였다. 반대로 란의 글씨는 귀엽고 예쁜 글씨였다. 란의 편지를 받고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수혼이 편지를 쓰면서 내용이 많아져서 편지지가 4장이나 되었는데 답장을 보니 똑같이 4장이였다.
우리가 이곳 독서실이란 같은 공간에서 만나지 어느덧 1달이 넘네, 처음 널 보았을 때 조금은 쌀쌀한 말투와 행동에 차가운 여자인줄만 알았다. 1달을 같이 보내며 널 보니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중략)
인생을 살다보면 많은 일들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당장 대학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 그것을 실패했다고 고민하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 지금을 생각하면 그때 왜 그렇게 고민했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대학은 인생을 살아가며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해. 인생의 한 부분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인생 자체가 될 수는 없어.
대학이 인생을 설계하는데 큰 축이 될 거라는 것은 알아. 하지만 꼭 대학 졸업을 전제로 인생을 설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내가 상고로 진학하고 대학을 포기했던 이유는 인생을 설계하며 남들처럼 혹은 남들이 설계한 인생대로 살기 싫었던 이유가 많아.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야. 남들이 날 대신해서 살아줄 순 없어. 자신의 삶에서 과연 대학이 필요한 것인지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혹시 대학 말고 다른 길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번쯤은 해보기 바라.
미선의 편지는 수혼 자신의 생각이 많이 들어간 내용 이였다. 지금 자신 또한 전문대로 진학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지만 대학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고 확실한 목표를 설정하고 공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란에게 편지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5장을 꽤 체운 편지를 했다. 미선과 란에게 다시 답장이 왔는데 미선에게는 충고 고맙다는 내용이고, 란은 다시 똑같이 5장의 편지를 해왔다.
그 후 수혼은 미선과 란 모두에게 편지도하고 친하게 지내며 독서실 생활을 했다. 전문대 시험이 가까울 무렴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서로서로 누가 누굴 좋아하는지 눈치가 있었다.
수혼의 생각에 재운이는 수혼과 마찬가지로 미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또한 은성은 성매 좋아하는 눈치였고, 지성은 란과 자주 어울리는 것이 둘 사이에는 이미 상당히 이성적으로 접근된 상태 같았다. 단지 지영이는 남자들 중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수혼은 미선과 편지를 주고받고 있는데 재운은 그런 것 같지도 않아 미선을 잘하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란과는 계속 철학적인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수혼이 몇 번 시험해 본 결과 란은 수혼과 향상 똑같은 불량으로 답장을 했다. 5장이면 5장, 6장이면 6장, 그래서 한번은 10장이 넘는 장문의 편지를 해보았지만 란은 똑같이 10장이 넘는 장문으로 답장을 해 왔다.
전문대 시험보기 며칠 전 집에 있는데, 성매에게 열락이 왔다. 지금 바보에 있으니 나오라는 것이었다. 바보는 우리들의 아지트로 자주 만나던 곳이라 또 뭉쳤나 생각하고 바보에 들어갔다.
바보의 한 쪽 테이블에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4명의 여자들이 모두 나와 있는데 남자들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수혼은 다른 남자들보다 빨리 나오는 편이 아니었다. 그날도 전화를 받고 1시간이나 늦게 나갔다. 다른 남자들이 먼저 도착해서 놀고 있겠지 생각하고 늦게 나왔는데 한명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애들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앉아”
“어 그런데 다른 놈들이 왜 한명도 없내.”
“너만 불렸어. 다른 남자들은 오지 않아”
성매의 쌀쌀한 대답이 들렸다. 성매가 비록 남자 같은 성격이지만 이렇게 차갑게 말하는 경우는 없었다. 자리에 앉아 여자들을 보자 성매와 지영의 눈에는 싸늘한 감이 있었고, 미선과 란의 눈빛에는 혼란스러운 감이 있었다.
“너 누구 좋아하니”
“무슨 소리야”
“미선이와 란 중 누굴 좋아하는 거야”
지영의 차가운 말에 수혼은 분위기가 왜 이렇지 혼란스러웠다.
“왜 물어보는데”
“네가 미선과 란 둘 모두에게 편지를 하고 있어서 그래”
“편지야 그냥 할 수 있는 거야냐”
“그래 그럼 넌 누굴 좋아해서 그런 거 아냐”
수혼은 자신의 마음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싫었다. 또한 누굴 좋아한다고 자신이 밝힐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편지 한 거야.”
“너희들 들었지. 수혼이 누굴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지영이가 추궁하던 미선과 란을 한번씩 보았다. 그때가지 둘 모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야~야. 나도 마음 없네. 나도 수혼처럼 그냥 편지를 한거지 다른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미선이의 차가운 말이 들렸다. 미선은 조금은 체념한 듯한 눈빛이지만 목소리만은 평소대로 내고 있었다.
“나 먼저 간다”
미선은 다른 이들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레스토랑에서 나가 버렸다.
“성매야 우리들도 가자.”
지영의 말에 성매도 지영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조수혼 똑바로 해”
성매는 한마디 남기고 지영이와 함께 나가 버렸다.
란과 둘만 남게 된 수혼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왜 여자들이 자기만 불려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수혼의 생각에 자신은 미선에게만 마음을 전했다. 란에게도 편지를 했지만 란은 지성이와 친하며 애인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왜 이래”
“여자들끼리 토론이 있었어. 네가 나와 미선이 모두에게 추파를 던진다고 널 비판했지”
“내가~~~. 그래서”
“그래서 여자들이 널 불려서 확실한 것을 듣고 싫어했어. 너 하나 때문에 여자들 의 상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지”
“너희들이 날 도마에 올려놓고 칼질을 해구만. 당사자의 의견도 들어보지 않고 먼저 칼질부터 하고 참 어의가 없네.
“네가 태도를 확실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무슨 태도를 말하는 거야. 처음부터 4명 모두에게 편지했어. 그리고 나중에 답장이 온 것이 너와 미선이야 그래서 답장을 한거야. 다른 애들은 답장이 없어 답장을 쓰지 않고 둘에게는 답장이 와서 답장을 한거야.”
“여자애들은 그렇게 생각 안해. 네가 두 사람 모두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서 토론이 벌어진 거야. 그리고 토론과정에서 이러다 우리들 의 상할 것 같다고 너의 의견을 물어보자고 한거야. 널 생선마냥 도마에 올리고 칼질한 것은 아니야”
“알았어. 너희가 날 칼질 하든 말든 상관안해. 근데 다른 애들 모두 가는데 넌 왜 남아있냐”
“네가 오해할 것 같아서. 오해를 풀어주려고”
“오해는 무슨 오해, 너희들 의견 충분히 숙지해어. 앞으로 너희들 오해하지 않게 편지 같은 거 하지 않을까. 우리 그만 가자”
“야~”
란은 일어서기 싫다는 듯이 수혼을 바라보았지만 수혼은 그 자리를 빨리 피하고 싶었다.
란과는 바보 앞에서 헤이지고 혼자 수혼은 독서실로 향했다.
(안돼는 구나. 네가 잠깐 미선를 마음에 둔 것이 바보지. 내가 언제부터 여자 관심 있었다고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군. 어쩌면 잘 된 거야. 오늘 미선이 태도를 보니 다시는 나와 상종하지 않을 것 같으니 빨리 정리할 수 있겠군)
수혼은 미선과 어떻게 해보자는 마음을 접었다. 자존심 강한 미선이가 오늘 같은 일이 있는데 자신과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 같았다.
(지금부터 1인칭 시점으로 하겠다. 30년을 넘게 살면서도 아직까지도 여자의 심리를 모르겠다. 주인공인 남자인 수혼의 입장에서만 쓰기로 하겠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미선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면, 미선을 잡을 있었을 것이다. 당시 미선은 내가 마음에 없어 포기한 것이 아니라 란과 자신을 비교하는 자신이 없고 나와 그렇게 깊은 사이도 아니고 해서 바로 포기해 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지성과 란이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것은 서로 관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지성에게 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란이 지성과 대화를 한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 남녀간에 가장 이상적인 연결은 지성과 란, 성매와 은성, 나와 미선 이였다.
난 당시 란이 작한 동생 같은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란이 날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조금도 눈치체지 못하고 있었다.
수혼은 그 사건이후 여자애들에게 무척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여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날의 미안함 마음과 현재 전문대를 준비하는 단계에서 격려 비슷하게 여자들 4명 모두에게 편지를 섰다. 여자들 모두에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사실 수혼은 편지 쓰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미팅 상대들과 대부분 만나지는 않았지만 편지는 많이 주고받았다. 수혼은 미팅이 끝나고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전화번호를 묻지 않고 주소를 물어봤다. 이상하게 생각한 여자에게 그냥 헤어지고, 주소를 알려주는 여자들에겐 편지를 섰다. 많은 여자들 중 한두 번 답을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대부분 여자들이 편지만 하고 만나자는 제안이 없는 수혼에게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존심도 상해서 수혼도 편지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가 고3 봄에 만나 여자에게는 주소를 물어보고 또 편지를 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수혼은 자신의 주소를 적지 않았다. 그냥 상대방에게 무조건 편지를 쓴 것이다. 그것은 편지라기보다는 하루하루 일기처럼 일주일에 3번이상 보냈다. 상대방이 답장을 하려고 해도 답장은 할 수 없었다. 수혼의 전화번호, 주소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수혼은 그것이 마음 편하게 생각되어 그 여자에게만은 8개월에 걸쳐서 편지를 했다. 그리고 12월 어느 날 그녀와 다시 한번 만나서, 그동안 자신의 편지를 받아 주어 고맙다고 그리고 너도 이제 3학년(미팅 당시 여자는 2학년 이였다.)이니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만 남기고 식사한번에 그녀와 안녕했다.
그녀는 황당하고 엉뚱한 수혼의 행동에 기가 막힌 듯 그냥 말없이 헤어졌다.
수혼은 그녀들에게 답장이 없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다신 편지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여자, 남자 모두 여의도로 놀려가기로 했다.
당시 여의도는 공원이 아니라 광장 이였다. 축제도하고 집회도 하는 공간이며 평소에는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등을 즐기는 장소였다.
여의도에서 모두 롤러스케이트를 탔다. 수혼은 평소 형제들과 롤라스케이트장을 자주 가서 롤러스케이트 실력이 제법 좋았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아이들은 롤라를 잘 타지 못해 수혼만 즐겁게 보냈다. 운동을 하던 은성이가 넘어지며 너무나 유연한 몸 때문에 다리를 일자로 뻗으며 넘어져 바지 가랑이가 찌어지는 소동이 있었다. 다행이 여자들 중 바느질거리(당신 여자들은 바느질거리를 가지고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를 가지고 있는 여자가 있어 화장실에서 끼워 입었다.
간단하게 먹고, 자전거를 즐기다 집에 갈 때가 된 것 같았다.
“우리 집까지 걸어가자”
“여기서 집까지 얼마나 먼데~”
“버스로 30분 걸리니까 2시간 정도만 걸어가면 집에 갈수 있어. 그리고 한강을 끼고 성산대교까지 가면 경치도 구경할 수 있어 좋지.”
수혼의 제안에 여자들은 마지못해, 남자들은 상관없다는 듯이 동의하고 여의도에서 목동까지 걸었다.
처음에는 모두 씩씩하게 잘 걷던 아이들이 점점 간격이 벌어졌다. 수혼과 은성은 운동하고 있는 중이라 그런지 가장 선두에 있고 지성, 재운, 미선이가 중간에 있었다. 그리고 성매, 지영이가 다음, 그런데 란이 보이지 않았다. 수혼은 선두로 가다가 란을 찾기 위해 다시금 뒤로 갔다. 란은 혼자 힘들게 걸어오고 있었다. 란 힘들게 걸어오는 모습이 수혼의 눈에 측은하게 보였다. 수혼은 란과 함께 걸었다.
“힘들지”
“아니 경치도 좋고, 걸을 만해, 단지 너희들처럼 내가 빨리 걸지 못해 그런 거지”
힘들어하면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란이 처음으로 예쁘게 보였다.
“걸어가며 심심하니까, 심리테스트 하면서 걸어가자”
“너 그런 것도 할줄 알아”
“야 네가 안 해서 그렇지, 손금, 관상, 별자리점, 성명학, 사주, 심리테스트 모두 할 줄 알아. 저번에 네가 주역, 역경이야기 하는 것 못 들어봤어”
“그건 그냥 학문이지 점보는 거 아니잖아”
“물론 주역이나 역경이 학문이지, 하지만 역경에는 60계로 인생을 예측할 수 있는 방법도 있어, 사실 주역을 모두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면 천리를 알고 신선이 된다고 하는데 난 그런 경지는 아니고 그냥 몇 번 읽어본 정도지. 하지만 주역을 알고 점성술에 관심이 있어서 점성술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지”
“점성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주역으로 풀면 많은 것이 일맥상통하는 것이 많아. 우리가 갑신년이라, 을축년이다 하는 것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십계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라는 12계가 돌아가면서 이루어지는 거야 이것이 한바퀴 도는 것이 60년 60갑자고, 이것을 다시 1갑자라고 하지, 사람이 1갑자 60살면 장수 했다고 옛날부터 환갑잔치를 했지. 이때의 한 갑이 1갑자를 이야기 하는 거야. 사실 우리 사회가 서구 문물이 들어와 이제 많이 서구화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동양사상이 많이 지배하는 사회야”
“서양 문물? 머가 틀린데~~”
“근본적으로 유물사관이 틀려, 예를 들면 서양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0살이지, 하지만 동양에서는 태어나자마자 1살이지. 이것의 차이는 서양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야만 사물을 인정하고, 동양은 눈이 보이지 않는 것도 사물로 인정해, 똑같이 어머니 배속에 있는 태아를 서양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동양은 인정하는 거야”
“넌 어떻게 그런 고리타분한 것들을 알고 있지”
“난 고등학교 때 사춘기였어. 남들보다 사춘기가 늦었지. 2학년 때 인생이 무엇인가? 라는 명제를 가지고 그것을 풀기 위해 많이 노력했어.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어느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주지 않더군. ‘공부나 해라’, ‘크면 자연스럽게 알아’ 등등 면박을 주는 답들이거나 혹은 ‘그것은 신도 몰라 인생이란 무엇이라 단정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야’라는 무책임한 답 뿐이였지. 그래서 스스로 답을 풀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어. 2학년 1년 동안 읽은 책이 수천 권은 될 거야. 사실 내 고등학교 2학년 때 성적이 바닥이었지. 전교에서 내 밑에 있는 애들이 신기했지. 책가방에 교과서 한권 없이 온갖 철학책들만 있었을 정도야. 학교, 도서관등에서 공부를 한 적이 없어. 그때 수많은 철학책을 보았지. 성경, 불교성경, 코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인생이 무엇인가라는 답을 찾았어.
“아니 찾지 못했어. 단지 인생이란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상존하며, 최선의 선택이 있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야”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선택할 수 없는 것!”
“그래 내가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지. 형제를 선택할 수도 없어. 죽는 것을 늦출 수는 있어도 죽지 않는 선택은 할 수 없지. 또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선택할 수 있어. 지금도 내가 버스타고 갈수 있는 것을 걸어가겠다고 선택한거지. 순간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다는 것. 그것이 인생의 조그만 부분이지”
“그런데 그런 철학적인 고민에 점성술은 머야”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되었지. 미래를 먼저 알고 싶었던 거지. 지금 생각하면 자신의 미래를 먼저 아는 것만큼 재미없는 인생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그때는 관심이 많았어. 그래서 점성술을 공부했지”
“완전히 돌팔이 아냐”
“내가 고등학교 때 많은 애들의 점을 보았지. 기본적으로 사주팔자와 손금을 맞추며 보았는데 과거의 80%이상 맞더군. 미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말이야.”
“그럼 심리테스트는 말고 그럼 손금 바죠”
“걸어가면서 어떻게 손금을 보니, 그냥 심리테스트하자.”
심리테스트는 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 당시 일본의 심리학자가 쓴 책이 있었다. 대부분의 심리테스트가 서양의 것으로 동양 사람들의 심리와 다른 부분이 많았지만 일본의 심리학자가 쓴 책은 동양사상을 근거로 하였기 때문에 잘 맞는 편이였다.
수혼이 란과 함께 걸어간 것은 가장 뒤처지는 란이 측은했기 때문이다. 란도 수혼과 이야기하며 기운이 나는지 아니면 수혼의 얘기에 빠져 힘들 줄 몰라 그리는지 힘을 내서 다른 애들과 함유하게 되었다.
걷기 시작한지 2시간 정도가 되니 어느덧 양화교 인공폭포에 왔다. 그때 은성과 수혼 빼고는 모든 아이들이 지쳤다.
“야! 이제는 버스타고 가자”
“이제 30분 정도만 더 가면 되는데, 그냥 가자. 여기서 버스타면 걸어온 의미가 없잖아”
수혼은 계속 걸어가기를 주장했다. 다른 애들은 힘들고 지쳐서 버스 타고 가기를 주장했다.
“그럼 버스타고 가고 싶은 아이들은 버스타고 가!”
수혼은 아이들을 두고 혼자 걸어가 버렸다. 은성이는 바로 뒤 따라왔다. 하지만 다른 애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자기들끼리 다시 논의를 하는 것 같았다.
조금 걸어가고 뒤를 돌아보니 다른 애들은 버스 정류장으로 가고 있었다. 사실 2시간을 넘게 걸어와서 지치고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수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지만 여기까지 와서 버스 탄다는 것이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싫었다.
그런데 란은 혼자 수혼과 은성에게 걸어왔다.
“넌 버스타고 안가”
“그냥 걸어갈래.
참 힘들게 지금까지 걸어온 것도 대단한데, 다른 애들과 다르게 참을성이 대단했다. 1시간의 롤러스케이트, 2시간의 자전거, 그리고 2시간 넘게 걸어온 길, 아무리 놀자고 한 짓이지만 힘든 것은 사실이다. 걸어오며 란은 참 힘들어했다. 다리에 쥐가 나는지 가끔 스트레칭을 병행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수혼의 생각에 란은 가장먼저 버스를 타자고 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란이 끝까지 걸어가지고 수혼에게 다가왔을 때, 처음으로 수혼의 마음속에 란에 대한 작은 울림이 있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수혼의 생일이 엇다. 수혼의 남자친구들은 특별이 생일이라고 잔치를 하거나 행사를 하는 것은 없었다. 사실 남자들끼리 행사를 한다는 것도 웃기고 그동안 학교가 틀리고 학교생활에 바빠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해서 행사 같은 것을 한 적은 없는데.
여자애들과 있고 해서 간단한 잔치를 했다.
처음 만났던 바보에 가서 생일 케이크도 사고 선물도 받았다. 바보에서 간단하게 한잔씩하고 수혼이 집에 와서 여자들에게 받은 선물을 뜯어보니 미선이와 란의 선물 속에 편지가 들어있었다.
수혼은 마음속으로 미선을 좋아했다. 서구적인 마스크에 좀 쌀쌀한 성격이지만 까만 피부가 매력적이고 또 처음과는 다르게 지금은 남자들에게 싹싹해 졌다. 또한 가끔 얼굴에 나타나는 어둠은 남자들에게 보호해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한다.
수혼은 바로 미선에게 정성스럽게 답장을 했다. 란의 편지는 한강에서 대화한 인생에 대한 내용이 많아 평소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에 대한 것을 정리해서 답장을 했다. 미선에게 쓰는 편지는 쓰고 다듬는 과정을 거치며 내용이 많지 않았지만 란에게 쓰는 편지는 그냥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상당히 많아졌다.
수혼의 답장에 다시 미선과 란 모두에게 다시 편지가 왔다. 미선은 전후기대학을 모두 떨어지고 있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고민하고 있는 내용이 많았다. 란의 편지는 다시금 철학적인 내용으로 되어있었다.
미선은 약간 악필 이였다. 디자인이 예쁜 편지지에 미선의 글씨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악필 이였다. 반대로 란의 글씨는 귀엽고 예쁜 글씨였다. 란의 편지를 받고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수혼이 편지를 쓰면서 내용이 많아져서 편지지가 4장이나 되었는데 답장을 보니 똑같이 4장이였다.
우리가 이곳 독서실이란 같은 공간에서 만나지 어느덧 1달이 넘네, 처음 널 보았을 때 조금은 쌀쌀한 말투와 행동에 차가운 여자인줄만 알았다. 1달을 같이 보내며 널 보니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중략)
인생을 살다보면 많은 일들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당장 대학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 그것을 실패했다고 고민하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 지금을 생각하면 그때 왜 그렇게 고민했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대학은 인생을 살아가며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해. 인생의 한 부분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인생 자체가 될 수는 없어.
대학이 인생을 설계하는데 큰 축이 될 거라는 것은 알아. 하지만 꼭 대학 졸업을 전제로 인생을 설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내가 상고로 진학하고 대학을 포기했던 이유는 인생을 설계하며 남들처럼 혹은 남들이 설계한 인생대로 살기 싫었던 이유가 많아.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야. 남들이 날 대신해서 살아줄 순 없어. 자신의 삶에서 과연 대학이 필요한 것인지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혹시 대학 말고 다른 길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번쯤은 해보기 바라.
미선의 편지는 수혼 자신의 생각이 많이 들어간 내용 이였다. 지금 자신 또한 전문대로 진학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지만 대학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고 확실한 목표를 설정하고 공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란에게 편지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5장을 꽤 체운 편지를 했다. 미선과 란에게 다시 답장이 왔는데 미선에게는 충고 고맙다는 내용이고, 란은 다시 똑같이 5장의 편지를 해왔다.
그 후 수혼은 미선과 란 모두에게 편지도하고 친하게 지내며 독서실 생활을 했다. 전문대 시험이 가까울 무렴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서로서로 누가 누굴 좋아하는지 눈치가 있었다.
수혼의 생각에 재운이는 수혼과 마찬가지로 미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또한 은성은 성매 좋아하는 눈치였고, 지성은 란과 자주 어울리는 것이 둘 사이에는 이미 상당히 이성적으로 접근된 상태 같았다. 단지 지영이는 남자들 중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수혼은 미선과 편지를 주고받고 있는데 재운은 그런 것 같지도 않아 미선을 잘하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란과는 계속 철학적인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수혼이 몇 번 시험해 본 결과 란은 수혼과 향상 똑같은 불량으로 답장을 했다. 5장이면 5장, 6장이면 6장, 그래서 한번은 10장이 넘는 장문의 편지를 해보았지만 란은 똑같이 10장이 넘는 장문으로 답장을 해 왔다.
전문대 시험보기 며칠 전 집에 있는데, 성매에게 열락이 왔다. 지금 바보에 있으니 나오라는 것이었다. 바보는 우리들의 아지트로 자주 만나던 곳이라 또 뭉쳤나 생각하고 바보에 들어갔다.
바보의 한 쪽 테이블에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4명의 여자들이 모두 나와 있는데 남자들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수혼은 다른 남자들보다 빨리 나오는 편이 아니었다. 그날도 전화를 받고 1시간이나 늦게 나갔다. 다른 남자들이 먼저 도착해서 놀고 있겠지 생각하고 늦게 나왔는데 한명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애들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앉아”
“어 그런데 다른 놈들이 왜 한명도 없내.”
“너만 불렸어. 다른 남자들은 오지 않아”
성매의 쌀쌀한 대답이 들렸다. 성매가 비록 남자 같은 성격이지만 이렇게 차갑게 말하는 경우는 없었다. 자리에 앉아 여자들을 보자 성매와 지영의 눈에는 싸늘한 감이 있었고, 미선과 란의 눈빛에는 혼란스러운 감이 있었다.
“너 누구 좋아하니”
“무슨 소리야”
“미선이와 란 중 누굴 좋아하는 거야”
지영의 차가운 말에 수혼은 분위기가 왜 이렇지 혼란스러웠다.
“왜 물어보는데”
“네가 미선과 란 둘 모두에게 편지를 하고 있어서 그래”
“편지야 그냥 할 수 있는 거야냐”
“그래 그럼 넌 누굴 좋아해서 그런 거 아냐”
수혼은 자신의 마음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싫었다. 또한 누굴 좋아한다고 자신이 밝힐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편지 한 거야.”
“너희들 들었지. 수혼이 누굴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지영이가 추궁하던 미선과 란을 한번씩 보았다. 그때가지 둘 모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야~야. 나도 마음 없네. 나도 수혼처럼 그냥 편지를 한거지 다른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미선이의 차가운 말이 들렸다. 미선은 조금은 체념한 듯한 눈빛이지만 목소리만은 평소대로 내고 있었다.
“나 먼저 간다”
미선은 다른 이들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레스토랑에서 나가 버렸다.
“성매야 우리들도 가자.”
지영의 말에 성매도 지영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조수혼 똑바로 해”
성매는 한마디 남기고 지영이와 함께 나가 버렸다.
란과 둘만 남게 된 수혼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왜 여자들이 자기만 불려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수혼의 생각에 자신은 미선에게만 마음을 전했다. 란에게도 편지를 했지만 란은 지성이와 친하며 애인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왜 이래”
“여자들끼리 토론이 있었어. 네가 나와 미선이 모두에게 추파를 던진다고 널 비판했지”
“내가~~~. 그래서”
“그래서 여자들이 널 불려서 확실한 것을 듣고 싫어했어. 너 하나 때문에 여자들 의 상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지”
“너희들이 날 도마에 올려놓고 칼질을 해구만. 당사자의 의견도 들어보지 않고 먼저 칼질부터 하고 참 어의가 없네.
“네가 태도를 확실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무슨 태도를 말하는 거야. 처음부터 4명 모두에게 편지했어. 그리고 나중에 답장이 온 것이 너와 미선이야 그래서 답장을 한거야. 다른 애들은 답장이 없어 답장을 쓰지 않고 둘에게는 답장이 와서 답장을 한거야.”
“여자애들은 그렇게 생각 안해. 네가 두 사람 모두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서 토론이 벌어진 거야. 그리고 토론과정에서 이러다 우리들 의 상할 것 같다고 너의 의견을 물어보자고 한거야. 널 생선마냥 도마에 올리고 칼질한 것은 아니야”
“알았어. 너희가 날 칼질 하든 말든 상관안해. 근데 다른 애들 모두 가는데 넌 왜 남아있냐”
“네가 오해할 것 같아서. 오해를 풀어주려고”
“오해는 무슨 오해, 너희들 의견 충분히 숙지해어. 앞으로 너희들 오해하지 않게 편지 같은 거 하지 않을까. 우리 그만 가자”
“야~”
란은 일어서기 싫다는 듯이 수혼을 바라보았지만 수혼은 그 자리를 빨리 피하고 싶었다.
란과는 바보 앞에서 헤이지고 혼자 수혼은 독서실로 향했다.
(안돼는 구나. 네가 잠깐 미선를 마음에 둔 것이 바보지. 내가 언제부터 여자 관심 있었다고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군. 어쩌면 잘 된 거야. 오늘 미선이 태도를 보니 다시는 나와 상종하지 않을 것 같으니 빨리 정리할 수 있겠군)
수혼은 미선과 어떻게 해보자는 마음을 접었다. 자존심 강한 미선이가 오늘 같은 일이 있는데 자신과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 같았다.
(지금부터 1인칭 시점으로 하겠다. 30년을 넘게 살면서도 아직까지도 여자의 심리를 모르겠다. 주인공인 남자인 수혼의 입장에서만 쓰기로 하겠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미선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면, 미선을 잡을 있었을 것이다. 당시 미선은 내가 마음에 없어 포기한 것이 아니라 란과 자신을 비교하는 자신이 없고 나와 그렇게 깊은 사이도 아니고 해서 바로 포기해 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지성과 란이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것은 서로 관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지성에게 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란이 지성과 대화를 한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 남녀간에 가장 이상적인 연결은 지성과 란, 성매와 은성, 나와 미선 이였다.
난 당시 란이 작한 동생 같은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란이 날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조금도 눈치체지 못하고 있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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