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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0:05 811회 0건
-겨울 길목-

난 일 때문에 그 번화가를 지나다가, 문득 눈에 띄는 이름의 카페를 발견하고, 갸우뚱 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겨울 길목?’

젊은 아그들로 북적대는 그 곳을, 이런 넥타이 차림의 얼빵한 아쟈씨가 가로질러 간다는 상상도 괴기스러웠지만, 난 그곳을 기어이 들어가 보기로 했다. 요즈음 채광을 중요시하는 카페들과 달리, 그곳은 지하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고 있어서,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더위를 식힐 겸, 지하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은 무거운 육중함이 느껴졌지만, 생각보담은 쉽게 열렸다.

‘어?’

난 그곳에 들어서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벗어 든 양복의 상의를 팔에 걸치고, 셔츠소매를 서너 번 접어 올렸던 팔이 미안할 정도로, 실내는 추위에 가까운 냉기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하게 했던 것은 실내를 메우고 있을 줄 알았던 젊은 아그들은 없고, 나 같은 노땅들 만이, 그것도 혼자들끼리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혼자 오셨어요?’

혀 덜 떨어진 맹맹이 소리로 일관하는 어린 여자애들 목소리와 달리, 정확한 표준어의 낭랑한 음성…..실내는 아주 이상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스텐드 바를 연상 시키는 벽을 상대로 모든 사람이 앉아 있는 그런 모습들….. 있어야 할 테이블들은 없고, 사람들의 정면인 벽에는 개개인을 위한 LCD화면이 벽에 박혀져 있었고, 그들은 아무에게도 방해 받질 않은 채, 저마다 헤드폰을 끼고, 그 화면에 넋들을 놓고…..이건 뭐 PC방도 아니고 설랑…..쩝……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대낮 이었지만, 홀로 맥주를 기울이는 여자,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물끄러미 넋을 놓고 있는 그런 분위기…..난 순간 멍하니 입구에서 방향을 상실한 채, 서 있었다.

‘여기 뭐 하는 곳 이에요? 카페 맞아요?’

‘네. 좀 썰렁하죠? 전기료가 문제되긴 하는데, 워낙 저희 카페 이름이 그렇다 보니….여름이라서 그렇지, 겨울엔 따뜻해요. 어디 앉으시겠어요? 혼자 오신 것 같은데, 제가 안내 할게요.’

그녀는 나와 별로 차이가 나질 않는 연배가 얼굴에서 보이고 있었고, 길게 내려뜨린 생머리가 보기 좋았다.

‘뭘로 하시겠어요? 따뜻한 커피 어떠세요? 나중에 필요하시면 술도 괜찮구요.’

‘시원한 맥주나 주시죠.’

나도 치기를 부리고는 있었다. 그러나, 카페 안의 사람들은 남들에게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모두 자신들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처럼, 메뉴도 제각각 인 것같이 보이고 있었다. 맥주가 나왔지만, 난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금새 깨달았다. 이미 자리에 앉기도 전에 땀방울은 사라지고 없었으며, 도리어 싸늘한 기운에, 벗어 들었던 양복 상의를 주어 입어야 할 판이었다.

‘왜 이렇게 추워요?’

‘호호…저희 카페 이름이 겨울 길목 이잖아요? 들어 오시면서 보셔 놓고도……’

‘그래도 그렇지. 한 여름에……’

나는 양복 상의를 다시 들쳐 입고, 어느새 초겨울의 거리에서처럼 양복의 깃마저 세우고 있었다.

‘저희 카페는 추억을 위한 분들을 위한 장소에요. 앞에 보이는 것은 텃취 스크린 이구요.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화면에 나오는 대로 눌러 주시면 원하시는 동영상을 보실 수 있어요. 아님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 두셔도 무방하구요. 소리는 그 옆에 놓여진 헤드폰을 사용하시면 되요.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동영상이라는 말에 나는 귀가 번뜩 해졌다.

‘흐흐흐…그렇다면, 빠구리도?’

그러나, 아무도 그런 영상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한 여름 인데도, 실내는 크리스마스 츄리가 호화롭게 장식되어 번쩍이고 있었으며, 벽난로에서는 흔들거리는 마른 장작의 불꽃조차 일렁이는 것이 보이는 이상한 카페……난 주위를 둘러 보다가 내 옆자리에서 혼자 맥주를 들이키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한 여인을 바라다 보게 되었다. 차리고 있는 모습이나, 옆에 내려 놓은 가방과 탁자 위의 원서들이 그녀의 직업을 말해 주고 있었으며, 이런 카페의 구석에서 시간이나 쪼개고 있을 것 같지 않은, 빡빡한 일정이 그 가방에서 묻어나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는 화면을 간간히 보면서, 헤드폰을 낀 채로 물끄러미 화면을 응시한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어두운 실내였으면서도 확실히 내 눈을 어지럽히는 그녀의 눈물….그녀는 그것을 닦을 틈도 없이, 그저 그렇게 흘러 내려 보내야 할 것처럼 닦으려고 하지도 않고 있었다. 나는 혹여 라도, 자신의 감상을 방해한다는 눈총을 받을까 싶어, 바로 면벽을 하고 말았다. 내가 화면을 보고 정면을 향하자, 자동으로 LCD는 켜졌다. 들고 있는 맥주잔이 너무 차가워 손끝이 얼얼해지는 것도 같았다. 내가 누르지도 않았지만, 화면은 눈이 펑펑 내리는 길거리와 인파를 보여주고 있었다. 멀리 다리가 보이는 것도 같았고….그리고, 조용히 헤드폰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하얗게 눈이 오던 날,
그 날을 잊을 수 없어.
아무도 없는 우리 둘만의 시간들.
처음으로 가졌던 그 느낌을….
수줍어하던 그 느낌, 소곤대던 작은 입술
그리움 속에 묻어두긴 너무나도, 사랑스런 모습인걸.
모든 것들이 변해 가듯이
너와 함께 했던 순간들도,
오래된 사진처럼 기억 속에 묻혀버리고
희미하게 하나 둘씩 아주 천천히 바래져만 가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리메이크 엘범의 그 노래들….. 인기 가수고, 어쩌고 간에, 난 그 노래를 끄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 이외에도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노래는 너무도 많았다. 내가 싫어하는 곡을 그것도 베스트 넘버인 것처럼 어찌 그리 기가 막히게 골랐는지….그저 멍해지는 머릿속과 함께, 나는 그 눈이 펑펑 내리는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할 말을, 모든 것을 잊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멈출 수 없는 시간들,
아쉬워했던 우리들
이제는 서로 다른 곳에 서있는 걸….
이미 너무나 먼 곳에
모든 것들이 변해 가듯이
너와 함께 했던 순간들도,
오래된 사진처럼 기억 속에 묻혀버리고
희미하게 하나 둘씩, 아주 천천히 바래져만 가네…….’

노래는 두 번 정도를 계속 이어 나가면서, 내 앞에 놓여진 술잔을 비우게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에 들려 있는 담배…..그래, 난 그 날을 잊지 못하는 거야. 난 그 눈이 펑펑 내리는 다리 위의 두 사람을 보면서,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정말 오래된 사진처럼, 천천히 나의 기억 속에서 바래져만 가는 것들을, 난 오늘 이 카페에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잊었다고 자신하던 그녀를 말이다. 바쁜 삶 속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도, 냄새도, 살결의 부드러움도, 내 주머니에 같이 포개어져, 내 손과 같이 추위에 떨던 그 손길마저도 잊고 지냈던 것을, 이 카페는 어떻게 알았을까? 난 지금이 한 여름이라는 사실도 잊어가면서, 한여름에도 스웨터에 털모자를 둘러쓰고, 내내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어가며, 카드를 만든다는 사람들처럼, 겨울의 길목에 서서 방황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너무 춥다. 우리 어디 들어가자. 형아!’

그 때 그녀는 나를 그렇게 불렀었지. 형! 선머슴 같았던 그녀의 손은 겨울 내내 차가웠고, 외투의 내 주머니 속에는 언제고 그녀의 손이 들어와, 내 손의 온기를 같이 즐기곤 했었다. 어디고 갈 데가 마땅칠 않았던 길거리의 황량함도, 매서운 날씨의 혹독함도 두 사람의 사이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그 당시…..그녀와 나는 어두침침한 카페의 등불 밑에서 뜨거운 커피를 나누어 마시곤 했다. 내가 연기를 빠끔거리며, 허공으로 도너츠를 만들어 날리는 것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다며, 켁켁 거리는 기침을 해대던 그녀….화면이 자연스럽게 바뀌고 있었다. 눈이 쏟아지는 사이에서 손을 흔들고 서 있는 어느 여인의 모습…..그렇게 한참을 서있었던 모양이다. 머리 위와 어깨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가고, 점점, 그녀의 흔드는 손이 쏟아지는 함박눈 사이로 교차지는 그 아스라함….

‘….눈이 와요, 난 그녀가 보여요.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뻐요
내리는 눈 속에 그녀가 웃어요, 나도 따라 웃어요.
내리는 눈 속에 그녀가 웃어요, 나도 따라 웃어요.’

난 이유도 없이 그 화면으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그 쏟아지는 눈 속에 혹시라도 그녀의 모습이 더 자세히 보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분명히 그 화면의 여인은 웃고 있었다. 마치 나를 향해 웃으며, 반기는 듯한 그 모습으로 말이다. 내 입가에 배시시 번지는 미소들….난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었다. 추운 겨울, 그녀가 나를 향해 달려 오고 있는 듯한 그 반가움에 나는 화면에 대고, 보사노바의 리듬에 맞추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따라 걷던 그 거리, 하얀 거리마다
눈꽃처럼 그녀가 빛나죠
눈이 와요, 난 그녀를 보냈죠. 그 모습이 여전히 고와요
내리는 눈 속에 그녀가 울어요. 나도 따라 울어요.
내리는 눈 속에 그녀가 울어요. 나도 따라 울어요.’

그 날처럼 그녀는 다시 울고 있었다. 내 곁을 떠나는 그녀의 아련한 이별의 실루엣이 겹쳐져,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상념에 빠져들면서 새로운 이별의 감흥에 젖고 있었다. 이제 지난 일인데, 이젠 잊을 만도 한데….그 날의 눈은 지겹게도 두 사람의 가슴을 시리게 만든 무엇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와 마지막 밤을 보낸 것은, 그녀와 다시는 만나서는 안 된다는 서로의 약속을 확인한 것 뿐인데……그 날, 그녀는 별들의 고향의 경아처럼, 흔들리는 네온사인의 불빛 너머로, 눈을 맞으며, 사라져 갔다. 내 옆자리의 여인이 나를 보며, 어둠 속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속절없이 울고 있는, 나의 어깨가 들먹이고 있는 것을, 알아 챈 모양이다.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보고 싶어진다. 눈 속에 파묻히는 아련한 실루엣이 아닌 그녀의 밝게 웃던 그 모습을……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그대 없는 밤은 너무 쓸쓸해.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잖아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나약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봐.
그대가 내겐 전부였었는데,
음….오…..’

그 날 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던 그 음악이 다시 내 귓가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녀는 내 앞에서 천천히 일어나 옷을 벗었다. 몇 번이고, 나는 그녀의 그런 용기를 막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창 밖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으며, 그 커다란 창문으로 세상은 가만히 그녀의 나신을 지켜보고 있었고, 나 또한 그녀의 살빛에 온 시선을 빼앗겨, 몸 조차 떨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 방안의 불을 밝히고, 하나하나 나의 기억 속에 자신을 심어가려는 것처럼, 얼굴이 천천히 보이고, 그 올려다 보이는 얼굴 위로 그녀의 행복한 웃음과 눈물이 같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난 또렷이 보이는 그녀의 얼굴로 인해,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내 손과 팔을 통해 전해지던 그녀의 뜨겁던 그 느낌…..

‘….제발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그대 없는 밤은 너무 싫어, 우우우….
돌이킬 수 없는 그대 마음, 우우우….
이제 와서 다시 어쩌려나
슬픈 마음도, 이젠 소용없네.’

그녀와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질 못했다. 사랑한다는 말도 사치스럽던 그 밤. 겨울은 상처투성이의 두 젊은이를 보듬기에 너무도 바빴던가 보다. 방의 창문으로 먼지처럼 쏟아져 내리는 눈을 등에 지고, 그녀는 나를 위해 몸을 열어갔다. 다시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 보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그것이 마지막 나눌 수 있는 서로의 마음이란 것을 아마도 예전부터 알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화면의 여인이 계속해서 껴 안고 있는 남자의 머리를 가슴께로 이끈다. 그녀의 풍성했던 가슴의 뭉클거림이 두통처럼 나의 뇌리를 압박해 들어오고, 입 안에서 헤엄치던 그녀의 유두가 까칠하게 혓바늘처럼 느껴지는 그 사실감…. 그녀가 살아 돌아오고 있는 듯싶다.

‘형, 어째서 우리들이 듣는 음악은 죄다 슬프기만 한 거지?’

‘글쎄. 그렇게 되지 말라는 예시 같은 게 아닐까?’

‘아님,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적어도 그때 두 사람은 그 의미를 알아야만 했다. 그저 스피커로 흘러 나오는 유선방송의 대중가요였다고 할지라도, 두 사람의 주위를 맴돌기에 그 노래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의미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그녀는 마지막 밤, 그렇게도 울면서도 나와 섞이는 그녀의 살이 나와 한치라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내 등을 손톱으로 파 들어갔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 지도록 그녀는 나의 몸에서 지울 수 없는 기억의 조각들을 집어 들고, 난 그녀의 살 속에 나의 흉터들을 박음질 해 넣었다. 아픔은 살갗으로 전해지는 것 일뿐,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던 그녀….시트에 점점이 떨구어지던 그녀의 핏자욱 같던 눈물과 그녀의 흔적들….그녀는 눈 속에서 비틀거리며, 사라져 갔다. 잘 걷지도 못하면서…..그녀의 꿈틀거림이, 내 몸에 갇혀 울부짖으면서도, 절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라면서 내 머리를 붙들고, 미친 듯이 입을 맞추던 그녀의 한숨이, 이제는 귓가에서도 느껴지는 것 같다.

‘….기억해줘.
널 위해 준비한 오늘 이별이 힘들었던 걸 잊지마.
네 가슴에 기대어 자던 많은 날, 안녕.
예전처럼 그대로 너에게 돌아오라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달라진 나를 기대한다면 이제 그만 끝내.
내가 잘 못한 거니?
너무 사랑한 거니? 미안해….
네가 나의 마음 알겠니?
미워하지마, 이해해 줘.’

그녀와 나 사이에 놓여있던 것이 무엇인가 헤아려 본적이 많았던 그런 날들….서로가 서로를 원한다는 것이 의미를 잃어가면서, 두 사람의 사이에는 섹스의 가교가 자연스럽게 놓여지던 우울함. 그녀의 섹스는 언제나 두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서도, 돌아서야만 하는 괴리 속에서 언제나 맴을 돌았다. 끊임없이 이별을 준비하고, 속절없이 해후를 기뻐하는 그 악순환 속에서 기어이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건너갈 다리가 사라져 감을 바보같이 모르고 있었다. 난 그녀의 기억 속에서 손을, 아니 몸을 틀어 빼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두 사람을 향한 그리움의 앙금이 된다는 것을 난 나중에서야 알았다. 뿌옇게 인생의 투명도를 흐려 놓는 그런…..

‘너 때론 이유 없이 나를 괴롭게 해.
늘 확인하려 했지만,
어떻게도 변함없는 너의 얼굴,
지쳐 외면하고도 싶었어.
더 이상 널 잡을 수 없기에,
끊는 전화라도 걸어보고 싶지만,
달라진 것 없는 너라면 해서는 안돼.
내가 잘 못한 거니?
너무 사랑한 거니? 미안해….
네가 나의 마음 알겠니?
미워하지마, 이해해 줘.’

그녀는 그 눈 속에서 나를 향해, 만날 수 있는 거지, 이게 끝은 아니지 라는 말을 아마도 백 번은 넘게 소리쳤던 것 같다. 난 그 말에 번번히 아니야, 우린 끝이야. 여기서 그만이야……우리가 들었던 그 많은 노래들처럼, 우린 처음부터 어긋났던 거야 라고 말이다. 어째서 잊고 살 수 있었을까? 그런 일이 있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난 삶에 찌들려 있었나 싶다.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쉴 수만 있어도 좋겠다 라며, 그녀를 껴안고 잠이 들었던 그 날이 바로 어제 인 것만 같은데….

‘이건 도무지, 원….’

난 카운터로 가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왜? 별로 즐겁지 않으셨나 봐요?’

‘쫌 물어 봅시다. 대체 저게 무어요?’

‘그건, 말씀 드리기 그런데…..혹시 멀티 엔딩 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그렇소만, 그거, 요즈음 외국에서 연구해서 상용화 하려는 거 아니우? 청취자의 의도나 취향에 따라 영화의 결말이 다양하게 달라지는 거 아니요?’

‘네, 맞아요. 인터렉티브 접근방식이라고 하기도 하죠. 지금까지 보신 게 그런 거에요.’

‘아니, 내가 내 취향이나 심리상태를 얘기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저렇듯 짜 맞추듯이 나를 따라잡느냐 이거죠.’

그녀는 카운터 밑에서 무얼 꺼내 보였다. 한 손아귀에 들어가는 무선 키보드 겸용 마우스 였다.

‘손님이 들어오시는 순간부터 자리에 앉으시기 전까지, 전 계속해서 손님의 신상에 대한 정보를 넣고 있었어요. 우리끼리의 약어이지만 말이죠.’

‘우리라니?’

‘이건 저희가 상용화에 앞서서 초기 버전으로 만들어 본 것을 시험하는 중이죠. 이른바, 3F라고 부르는데….’

‘3F라….’

‘Forbidden, Forgotten but Forever를 줄인 건데, 그냥 3F라고 부르죠. 손님의 키, 보이고 있는 몸무게, 안경의 착용유무, 형태, 가늠되는 돗수, 옷의 색깔, 스타일, 넥타이의 상태와 색감, 들고 있는 소지품, 예를 들어, 가방, 손목시계, 반지, 목걸이, 우산 등등의 것들…..이 외에도 많죠. 이런 것들을 손님이 들어오시는 순간부터, 계단을 내려오시는 것을 카메라로 보면서 입력해 나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가까이 보고 나서는, 보다 상세한 정보를 코드로 날리죠. 땀을 얼마나 흘리는가, 무엇을 주의 깊게 살피는가에 대한 것을 말이죠. 자리에 앉으시고 나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안으셨겠지만, 정면에는 고감도 카메라가 양쪽으로 장착되어 있습니다. 그 카메라를 통해서 선생님의 표정과 안면근육의 움직임, 화면의 어떤 부분을 보려 하는지, 정확히 좌표로 산출되는 동공의 각도와 방향, 초점의지 등이 낱낱이, 순식간에 계산되죠. 그와 동시에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시스템은, 님이 관심 있어하는 장면과, 그 시절 즈음에 님이 좋아하셨을 만한 취향의 음악을 선별해서 관심을 유도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추억 속으로의 여행이지요.’

‘아니, 손님이 모르모트도 아니고…..’

‘저희들은 손님들의 추억 속에 숨쉬고 있는 어떠한 것도 알 수 없지요. 그저, 보다 정확하게 손님의 심리상태와 맞아 떨어지는 영상과 음악을 매치 시키기 위해서 애쓸 뿐이고요. 아시겠지만, DVD의 부록에 다른 결말이 담겨 있다거나 하는 것은 현재의 매체가 안고 있는 한계 때문이지, 기술이 모자란 것은 아닙니다. 이제 DVD의 저장용량에 열 배 정도 되는 블루레이 타입이 나와서 지금 시세로 비싸기는 해도, 저희들의 일이 훨씬 손쉬워 졌어요. 저희들의 정확도는 거의 87프로에 육박하고 있죠. 추억으로의 접근과 87프로의 결과…..놀라운 수치 아닌가요?’

‘난 믿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3F란 말도 그렇고…’

‘그렇게 말씀하시니 알려드릴 수밖에 없네요. 사람의 추억 속에 묻혀버린 것들은 대개 남에게 얘기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지요. 애써 지워 버리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그 안에서 괴로워 하는 자신을 잊기 위해서 무언가에 매달리고….그러다, 지쳐 갑니다. 그것에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휩싸여, 잊혀지는 것 같아도, 결코 없어지질 않죠.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면서도 말이죠. 저희가 그래서 연구결과를 대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이름을 3F로 한 것도 그런 사람들의 고통을 대변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쳐다보고 있는다고 해도,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의 추억과 비밀에 대한 다큐도 아닌, 그렇고 그런 장면들 이지만, 손님들은 그 안에서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때론 눈물도, 때로는 기쁨을 되찾기도 하구요. 그것이 타부 이건, 아니건 간에…..’

그녀는 그 낭랑한 음성으로 블루레이가 상용화 되고 저렴해지면, 한 영화에 따른, 다양한 결말의 버전이 한 매체 안에 숨쉬고 있으면서, 나만의 맞춤 영화가 된다는 설명을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 영상과 음악들은 확실히 나의 과거를 일깨우는 힘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디테일을 배제하고, 영상미를 통해 사람의 추억에 접근해서, 과거를 스토리로 만들어 간다는 그 기법을 알고 나니, 조금은 두려움이 가시고 있었다.

‘그럼, 이 카페에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독방 같은 것도 있습니까?’

‘……음 있기야 있죠. 이렇게 다 말씀 드렸으니, 어쩔 수가 없네요. 카메라가 손님의 상반신이기는 하지만, 얼굴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시니까 드리는 말씀 입니다만, 독방은 이 곳 홀과 달리, 손님의 얼굴이나, 그 외의 정보가 저희의 기록에 남는대도 사용해 보시겠어요?’

‘그러죠. 뭐 별 차이야 없겠지만, 임의로 사용만 안 하신다면야….’

‘절대 그럴 리는 없죠. 안심하세요, 그건….’

난 그녀를 따라 크리스마스 츄리 뒤로 이어진 암실 같은 독방으로 안내 되었다. 그저 한 사람이 앉아 있을 정도의 공간에 바깥과 같이 LCD화면이 보이고, 고양이 눈알처럼 화면의 상단 부위에는 카메라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 의자에 앉아, 화면을 정면으로 대했다. 그 좁은 토굴 같은 방의 조명이 차츰 어두워 지면서, 내 앞에는 훼이드 인이 되는 것처럼 영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주 빠른 속도의, 그것도 아까의 영상과 접목되는 듯한 그런 분위기로….

‘형, 우리 저거 타자.’

‘나 높은데 올라가면 토할 것 같은데…..’

그러나, 영상 속의 놀이공원 풍경은 바로 그 놀이기구에서 신기하게 멈추어 있었다. 두 사람이 기구에 들어가고 덜럭대는 흔들거림이 보이고 있었고, 얼굴이 확실치는 않았지만, 여자는 남자의 앉아 있는 바지 사이로 들러 붙고 있었다.

‘형, 허리 들어 봐.’

‘누가 보면 어쩌려구?’

‘누가 보긴, 내가 보고 있지.’

그 흔들거리는 고공의 공포도, 울컥거림도 그녀의 흡인력에는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끊임없이 쭉쭉 대며, 벗겨놓은 남자의 아랫도리에서 도리질을 쳐대는 그녀의 생머리…..

‘아흑…..아흑..그만..나 쌀 것 같다!’

‘웁웁..음음…싸…어서 싸!...이제 아래로 내려가면 그만이야. 여기서..웁웁웁..웁웁…쭙쭙….’

남자의 두 다리가 앞으로 주욱 펴지고, 여자의 머리가 천천히 속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입맛을 다시며, 키득대면서, 기구의 문을 열고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그러나, 그 사이에 그런 장면은 원래부터 없었다. 다시 또 바뀌어지는 화면과 음악들…..나는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가슴이 벅차 오르는 흥분을 아울러 느껴야만 했다.

‘형, 어서…어서….’

‘그래도 돼?’

‘내 이 표정을 사진으로 박아 줄 테니, 꼭 갖고 다녀, 알았지? 형, 박는 거 좋아 하잖수?’

여자는 스티커 사진을 찍는 것을 티라도 내는 것처럼, 형형색색의 가발을 둘러쓰고, 카메라에 한 가득 하도록 얼굴을 들이댔다.

‘어서….좀..어서…내 얼굴이 사실처럼 보이게…빨리 안 하면, 취소 된다구…으극….윽윽윽’

‘이래도 되는 거야?’

‘내 얼굴이 얼마나 행복한지, 꼭 이렇게 찍고 싶었어…억억..윽윽..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가…..어쩔수가…….’

그 좁은 스티커 사진기의 포장 안에서 남자는 여자의 뒤에 서서, 음란한 몸짓으로 여자의 뒤를 까발기고 있었다. 화면에 비치는 우스꽝스런 가발 사이로 보이는 풀린 눈과 입가로 흘려지는 미소들…..여자는 행복에 겨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어서…더더….어서 빨리..윽윽….그래…이거야, 아! 미쳐 버리겠네……’

‘번쩍!’

후레쉬가 터지면서 여자의 일그러져 가는 얼굴과 반쯤 감은 눈빛 사이로 음란함이 땀처럼 번지고 있는 스티커 사진….두 사람의 연인은 손에든 스티커 사진을 내려다 보면서, 장막을 걷고, 밖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어 나왔다. 정말 화면에는 아무일 없이 스티커 사진을 찍는 연인들의 한가로운 모습 뿐이었는데….

‘형, 같이 목욕하자. 오늘이 마지막 인데…..’

다시 장면은 창 밖으로 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는 장면이 되고 있었다. 남자는 마지못해 여자의 옷을 벗겨주고, 두 사람은 욕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알몸인 채로 껴안고 입술을 비벼대기에 바빴다.

‘형, 이렇게 내가 가면, 이 하늘 아래에서 다신 볼 수 없는 거유?’

‘아니, 세상이 넓다고 해도 만날 수는 있어. 내가 가면 되고, 아니면, 네가 와도 되고…..’

‘그 한 달에 한번, 얼굴 보는 것도 미워하는 것들, 다 뒤져 버리라고 그래……’

‘얼굴만 보는 게……. 아니었잖아?’

‘그건 그래. 형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늘은……. 내 모든 걸 가져가 버려.’

‘지금까지 넌 전부 내꺼 아니었니?’

그러나, 그 의미를 그나 그녀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 손은 얼음장 같은데, 네 몸은 그렇질 않아…..아 따듯하다!’

그녀의 엉덩이위로 다리를 들어 올리면서 그녀의 보지를 남겨둔 채로, 타고 들어가는 곳은 언제나 피해가는 오솔길처럼 여기던 그녀의 항문 이었다.

‘아….아파…아파……윽윽…..그래도 괜찮아! 아, 형…형, 나 똥 쌀 거 같아…..윽윽…아! 보지가 근질거려….아파…아파….죽을 것 처럼…..윽윽….악! 죽을 것 같아.’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남자가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오자, 그녀는 변기에 다가가지도 못하고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허연 정액이 묻은 냄새 나는 물건을 바로 바닥에 부려 놓았다. 그걸 손으로 찍어 여자의 코 앞에 들이대는 남자의 모습….그 두 사람은 이별을 앞둔 사람들처럼 보이질 않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저질 일본 포르노의 한 장면이 비추어지고 있었지만, 나는 하나도 더럽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날 잊지마…절대로…..우리,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날이 오면, 다시 만나는 거야.’

‘그런 날이 올까?’

‘올거야. 반드시……우리가 이렇게 한 달에 한번밖에 만날 수 없게 만든 사람들이 모두 죽어 없어지면…..’

‘그 사람들이 죽어 없어지고 나면…… 우리가 그 자리를 대신 메우는 게 아닐까?’

‘형…..아무 말 말고…어서..….눈이 와도 너무 오네……’

그녀는 침대에서 그를 일어나지도 못하게 했다. 빨고, 세우고, 올라타고….그들의 시이소오 같은 섹스를 다 보기에는 시간이 모자라 다는 듯이 화면에는 밤이 새벽으로 달려가는 시침과 분침의 빠른 회전이 모든 것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화면에 남은 두 사람의 나신….그녀는 남자의 몸에 감겨 미동이 없다.

‘이제 나 가야 돼.’

‘알아…..’

‘한번만 더….응?’

‘그래, 한번만이다. 약속이야? 오빠가 해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그 두 사람은 퍽이나 지쳐 보였다. 밤을 지새우며, 전신을 휘두른 것도 모자라, 다시 불을 붙여가는 두 사람 이었지만, 그의 몸에 깔려 울부짖는 그녀의 비명은 역시나 행복한 절규가 분명했다.

‘절대로, 절대로 날 잊으면 안돼. 우리 다시 만나야 돼. 기억해…약속해…윽윽윽윽……악!’

그래, 그랬지! 기억해 달라고, 잊지 말아달라고 한 말……난 그제서야, 그 말을 일부러 마음속에 감추고 살아온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화면이 자동으로 꺼지고, 실내의 불은 영화가 끝난 극장 안처럼 희뿌연 조명이 들어왔다. 난 방문을 열고 카운터로 나가 돈을 지불했다. 너무 급작스럽게 많이 울어서 인지,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괜찮았죠?’

‘네.’

‘여동생 분을 무척 사랑 하셨나 봐요? 근데 어디 먼 곳으로 이민 가셨나 보죠?’

‘아니, 그걸 어떻게?’

‘3F잖아요? Forbidden, Forgotten but Forever……잘 아시면서……흔히 있는 일이죠. 이혼과 함께 두 가정으로 각기 갈라진 남매의 얘기들….거기에다 가깝기 그지없는 둘의 관계를 걱정하던 한 쪽 가정의 돌연한 이민…..그렇게 분석은 마무리 되어 있는데……, 어디 보자, 이후로 찾아가실 것 같은 심리 상태가 77퍼센트…….. 기대 되네요……건투를 빕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난 못 가.
바보처럼 울고 있는 너의 곁에….
상처만 주는 나를 왜 모르고 기다리니?
떠나가란 말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런 내가 미워질 만큼…..
울고 싶다. 네게 무릎 꿇고,
모두 없던 일이 될 수 있다면….
미칠 듯 사랑했던 기억이, 추억들이,
너를 찾고 있지만,
더 이상 사랑이란 변명에 너를 가둘 순 없어.
이러면 안되지만
죽을 만큼 보고 싶다.
죽을 만큼 잊고 싶다.’

마지막 장면과 함께 헤드폰에서 흘러 나오던 그 음악이 귓가를 쟁쟁하게 울려댄다. 다시는 그 노래를 듣지도 말아야지!....... 그렇지만, 난 아까 카페를 들어오기 전, 아내 몰래 구입한 왕복 비행기표를 기어이 찢어내 버리지는 못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씁쓸하게 하늘을 올려다 본다.

‘울고 싶다, 울고 싶다.
이런 내가 미워질 만큼…..
믿고 싶다. 옳은 길이라고,
너를 위해 떠나야만 한다고…..
미칠 듯 사랑했던 기억이, 추억들이,
너를 찾고 있지만,
더 이상 사랑이란 변명에 너를 가둘 순 없어.
이러면 안되지만,
죽을 만큼 보고 싶다,
죽을 만큼 잊고 싶다.’

……얼마나 변해 있을까?
…..다만 혜진이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잠시라도 같이 숨을 쉴 수만 있다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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