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부-
“자, 이리 와서 앉아 봐요.”
“네......”
두 사람은 격앙되었던 감정을 가라앉힌 후 나란히 소파에 앉아 대화를 하고 있다. 강주는 녹음을 하는 듯 휴대폰을 한 옆으로 내려두고 담배를 피워 문다.
“그래...... 황부장하곤 언제부터 그렇게 부정한 사이가 됐다고?......”
“네...... 그게...... 남편이 전에 있던 직장에서 자꾸 스트레스를 받고 여러 가지로 힘이 든다고 해서 다른 직장을 알아보던 중이었어요. 그 회사 출신 선배가 이 회사 높은 자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래서......”
“남편하고 같이 인사 차 만나 뵌 적이 있었어요. 그 자리에선 금방이라도 자리를 마련해 줄 것 같이 했었는데, 며칠째 연락을 안 해줘서 제가 전화를 드려 봤더니, 자리는 금방 마련되지만 정말 각오가 돼 있다면 인천으로 이사를 오라는 거예요.”
“그건 왜죠?......”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면서...... 후배들 취직 시켜주고 나면 금방 그만 둬 버리기도 해서 곤란한 적이 많았다고...... 정말 여기서 자리를 잡고 싶으면 아예 이사 올 곳이나 알아보라면서 한 번 건너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남편이야 하루라도 빨리 그 매장을 그만두고 싶어 하니까, 제가 가서 방을 알아보기로 했는데. 어디로 배치를 해줄지 모르니까 부장님을 찾아 갔었지요.”
“왜, 남편하고 같이 안가고?......”
“취직이 될지 안 될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데 무조건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남편은 일단 계속 출근하라고 했지요.”
“그 부장이라는 사람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점장의 아내는 익히 자기도 알고 있을 내용을 재차 확인하듯 물어오는 강주가 의아한지 고개를 들어 바라보고는 다시 대답을 이어간다.
“황경수 부장이요.”
“그래서요?......”
“제가 하기에 따라서 취직은 물론이고 앞으로 진급도 보장해 준다고 해서...... 그만......”
“그만...... 뭐요?......”
“그만 여관에 따라가게 됐어요.”
“그래서 거기서 황경수 부장하고 관계를 맺은 겁니까?”
“네......”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네...... 하지만 그때 한 번뿐이었어요. 믿어 주세요.”
이어서 강주는 핸드폰을 조작하며 점장의 아내에게 자세를 요구해 몇 장의 사진을 촬영한다. 기가 막힐 일이지만 이미 강주의 의도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처해 있으니 부끄러운 곳을 노출한 채 촬영에 응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미 강주에게는 일종의 컬렉션에 불과한 일이지만 상류층 인간들을 접해 보니, 그들의 작태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아 언제 어떻게 보복을 당할지 몰라 모든 일에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할 일이다.
“음...... 걱정 말아요. 공개할 건 아니니까...... 다만 아까 내가 본 바로는 아직도 당신을 백 퍼센트 신용하기가 어려워서 그럴 뿐이니까...... 내가 작업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행위를 한다면 그 길로 신세 망치는 겁니다. 알았어요?”
“네, 네...... 절대 안 그럴 거예요. 이젠 전화도 안 할게요. 그 서류도 보긴 봤지만 뭐가 뭔지 몰라서 아무 말도 못해줬어요, 진짜예요.”
“자, 그럼 됐습니다. 당신이나 남편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해줄 테니까 지금부터는 다 잊어버리고 남편 내조나 잘 해요. 자, 내 명함을 주고 갈 테니까 혹시라도 연락할 일 있으면 하시고......”
“네...... 이사님. 그러면 비밀은 지켜 주시는 거죠?”
강주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려오고 점장의 아내는 그래도 불안한지 마당까지 내려 와 배웅을 한다.
이제 황부장은 강주에게 확실히 덜미를 잡힌 셈이다. 거래처와의 계약을 체결 당시부터 조작해 뒷거래로 배를 채워온 사실을 포착했으니 계약을 재조정한 뒤 그 돈을 회수하고 점장들의 점두코너 수익만 잘 관리하면 당장이라도 적자기조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차차 교육훈련을 통해 조정해 나간다면 이 회사를 건지는 것도 썩 힘이 들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한결 가벼운 기분으로 차를 몰아 용현동 본사로 향한다.
모르면 몰라도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이 어사출도를 할 때의 기분이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차를 몰아가자 곧 전화가 울려 다시 길가에 주차를 하고 전화를 받는다.
“네......”
“아! 이사님, 저 본점 점장입니다.”
“아! 네...... 저도 지금 집에서 금방 나왔습니다.”
“네...... 그게 좀 이상한 게......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어젯밤에 이사님을 만난 걸 알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이사님 명함을 황부장에게 뺏기고 말았습니다. 이걸...... 어떻게 하죠?”
“음...... 뭐, 괜찮습니다. 이젠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바로 작업 해 버릴 거니까...... 점장님은 근무나 잘 하고 계세요.”
“네, 네...... 알았습니다. 절대 제가 일부러 알려 준 건 아닙니다. 이사님.”
“허허허...... 네, 알았다니까요.”
재삼 당부하는 점장의 말에서 샐러리맨의 비애가 느껴져 측은해지기까지 한다. 이 사람 역시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자신에게 허락된 조그만 공간의 일상 속에서만 허덕이고 있을 뿐이다. 자신 역시 수하직원의 부인인 여진이와 관계를 맺고 있어 혼란스럽긴 하지만, 그것과 일자리를 빌미로 몸을 요구하는 황부장의 경우는 다르다고 애써 치부해 버린다.
이렇게 강주도 자신의 몸뚱이를 전혀 다른 시장으로 던져놓고 보니 비로소 시야가 밝아지는 모양이다. 손 안에 있는 것,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것이 전부를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철이 들어 철을 안다든 것은 절기를 안다는 것이고, 곧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성인이 되어 간다는 뜻일 게다. 회장을 만나 인천으로 건너오게 되고 이곳에서 경험하는 낯 선 상황들이 타산지석이 되어 부쩍 강주의 키를 자라게 하는 모양이다.
“흐음...... 그러면 조만간 다시 전화가 오겠지.”
황부장이 명함을 받아갔다면 금방 전화가 올 터이니 아예 운전석 의자를 뒤로 재끼고 누워 버린다. 그간 즐겨왔던 많은 여자들도 누군가의 딸이며, 누군가의 부인이었을 것이니 지금의 강주를 가장 자극하는 문제는 민희와 혜숙이의 문제일 것이다. 내 가족의 범주 안에 있는 여자들이 누군가의 사타구니 밑에서 헐떡여야 하는 이유가 단지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이유라면 더 이상 용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창을 열고 담배를 피워 물자 곧 전화가 울린다.
“네, 최......”
“호호호...... 안녕하세요? 이사님...... 저 아시겠어요?”
“네?......”
“왜...... 전에 회장 언니하고 같이 만났었잖아요? 그날 저녁에 이사님은 경주 차를 타고 가시고......”
“아...... 그러면......”
“네, 제가 회장 언니 차를 운전해서 갔잖아요. 저, 이미경이에요.”
“아! 네...... 이여사...... 그런데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어머! 전화번호뿐이겠어요? 지금 인천에 와 계신 것도 다 아는데...... 호호호...... 저는 무역 일을 보시는 줄 알았더니 유통 쪽을 보신다면서요?”
자신의 행적을 빤히 들여다보듯 알고 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에 강주는 기가 막힐 뿐이다.
“허허...... 참...... 기가 막히네요. 이여사 안테나가 상당히 고감도인 모양입니다. 어떻게 그리 잘 아십니까? 하하하......”
“한 번 시간 좀 내주세요. 지금 좀 만날까요?”
“아! 지금은 제가 업무 중이라서 좀 어려운데......”
“어머! 이사님이 시간에 쫓길 일이 어디 있어요? 천천히 하셔도 되잖아요? 그러지 마시고 지금 좀 만나요.”
“어허...... 참...... 제가 나중에 전화를 드릴 테니까...... 정 그러면 볼 일 좀 보고 점심시간 쯤 만납시다.”
“아이 참...... 그래요. 그럼 그 전에 한 말씀만 드릴게요. 저...... 유통에 황부장 아시죠? 그 양반이 제 남편이거든요. 그렇게 아시고 나중에 다시 자세한 말씀 드릴게요. 이따가 만나요.”
“네?......”
도깨비 소굴이 따로 없다. 어이도 없고 기가 막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뭔가 잔뜩 뭉쳐 있는 실타래를 들고 실마리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느낌이 바로 이럴 것이다. 회장에게 들은 바로는 그녀를 추종하는 그녀의 패거리들을 잘 사귀어 보라고 했었는데, 민희야 그런 관계를 알 리 없는 처지였으니 그렇다지만, 이 여자가 황부장의 부인이라면 그런 것을 회장이 모를 리도 없는 일인데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민희를 통해서 그녀들 간에 뭔가 이해관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는 터에 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서는 섣불리 황부장을 두들기기도 마땅치 않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또 다시 전화가 울린다. 번호를 보니 이번에는 회장의 전화다. 모든 것은 이 여자로부터 연출 된 것일 수도 있으니 정작 알아야 할 이 여자의 속셈을 알 수 없어 답답한 노릇이다. 도무지 혼란스러워 그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보는 수밖에 없게 되어 버렸다.
“네, 최이사입니다.”
“네, 이사님. 저예요.”
“네, 회장님. 좋은 아침이지요.”
“어머! 이사님...... 역시 인사도 세련된 인사예요...... 지금 인천이시라면서요? 요즘 시간을 자주 내시네요? 저 쪽 회사에는 괜찮아요?”
역시나 줄줄이 정보가 흘러 회장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황부장도 사안이 결코 간단치 않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마누라나 회장을 앞세워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하물며 회장은 더욱이 알아서는 안 될 입장일 텐데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는 것에 대해 강주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네...... 며칠 돌아 볼 생각을 하고 아예 휴가를 내서 왔습니다.”
“어머! 아유...... 죄송해서 어떻게 해요. 애인한테 혼나시겠다. 호호호......”
“뭐,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습니까?”
“네, 괜찮으시면 지금 좀 뵐까요? 제가 송도 쪽으로 가서 전화 드릴게요.”
“네...... 그러시죠. 저도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유원지 안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가끔 움직이는 직원들 뿐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강주의 속마음은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묘한 심정이다. 정작 회장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일에 이제는 뭔가 해답을 찾아간다는 기쁨도 잠시, 모든 걸 보류한 상태에서 회장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한다.
“쉽게 찾으셨네요?”
“참 나...... 수원에서 왔다고 아주 촌놈 취급을 하십니다. 그려......”
강주의 대꾸에서 볼 멘 심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회장이 아닐 테니 그저 강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인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회장의 저 미소에 아랫도리에 불끈 힘이 들어갔겠지만, 구미호처럼 속을 알 수 없는 회장에게 적잖은 회의를 느끼는 터라 역시 터울을 좁힐 수 없는 무지렁이 강주의 반응이 신통치 않다.
“이사님, 숙제는 좀 하셨나요?”
“허허...... 아직 다 만나 보지도 못했는데 무슨 숙제를 합니까? 언제 자리 좀 만들어 보시죠.”
“호호호...... 안 그래도 조금 있다가 같이 점심 먹자고 했어요. 기다려 보세요.”
“그러세요? 그래...... 참, 보자고 하신 이유는요?”
“아이, 뭐가 그리 급해요? 이사님은 어쩔 때 보면 너무 전투적으로 사시는 것 같아요. 좀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주변도 돌아보면서 하세요.”
주변을 돌아보라는 회장의 말이 왠지 귀에 거슬린다. 당장이라도 이유를 묻고 싶지만 또 핀잔만 들을 테니 눌러 참으며 회장을 따라 나서고, 회장은 강주의 팔짱을 끼고 보트장을 따라 물가로 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물을 보며 한가로이 산책을 하러 나온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머릿속으로는 바둑을 두는 기사들처럼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설전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걷는 길에 벤치가 보이자 약속이나 한 듯 자연스레 그쪽으로 방향이 정해지고 막상 앉으려 하니 의자가 썩 깨끗하질 않아 회장을 바라보게 된다.
“그냥 앉아요. 괜찮아요.”
“아! 그러면 제 무릎에 살짝 걸치세요.”
그냥 앉으려는 회장의 허리를 잡아챈다. 강주 입장에서는 불편한 기분에 그냥 그녀에게 끌려 다니기 싫다는 은연중의 표시일지 모르겠다.
“어머!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호호호......”
강주는 벤치 모서리에 앉아 다리를 벌려 한 쪽 무릎을 내어주고 회장은 주변을 슬쩍 돌아보곤 강주의 어깨를 짚으며 그 위로 엉덩이를 걸친다.
“그래...... 이사님이 매장을 돌아보니 느낌이 어떠세요?”
“뭐, 답답하죠. 시설도 그렇고, 직원들도 기강이 많이 해이하고...... 심지어는 가격표가 잘못 붙어있거나 아예 없는 것도 부지기수에다가...... 구석구석 먼지투성이고...... 전반적으로 그림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시죠?”
“일단 본사에 들어가서 조직도를 살펴보고 조직 자체의 문제인지 매장 단위의 문제인지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황부장이란 사람도 좀 알아보고요.”
“황부장에게 문제가 있던가요?”
“......”
강주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는다. 황부장이 명함을 받아 간 직후에 그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오고, 연이어 회장에게서 연락이 와서 만나자고 하니 이들의 관계를 정확히 알기까지는 나름대로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다. 이것이야 말로 회장에게 배운 스타일이니 일단은 속을 감춰 보지만, 강주가 가부간에 아무 대답도 없다는 건 일부 긍정하는 입장이니 회장으로선 더 들을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 황부장 안사람이 미경이라고...... 이사님도 전에 한 번 본 기억이 있지요?”
“네, 안 그래도 회장님 만나기 전에 전화가 왔더군요.”
“그래요, 제게도 전화가 왔었어요. 이사님께 전화를 했더니 쌀쌀맞게 끊어 버리셨다면서요? 호호호...... 그런데 제가 그 말을 듣고 보니 왜 그런지 은근히 기분이 좋더라고요. 호호호......”
“허허허...... 참 나......”
“민희나 경주도 자기들한테 전화가 안 온다고 하던데......”
경주한테야 전화를 한 적이 없지만 민희는 사정이 다름에도 회장이 저리 말하는 걸 보면 민희도 강주와의 속사정을 회장에게 털어놓지는 않은 모양이다.
“네...... 뭐, 별로 볼일도 없는데......”
“호호호...... 그래도 가끔씩 만나 보세요. 다 이사님께 도움이 될 거라니까요. 안 그래도 미경이는 오늘 보기로 했으니까...... 아유, 계집애...... 무슨 일인지 바짝 몸이 달아 가지고...... 황부장이 이사님에게 뭔가 대단히 크게 책잡힐 일이라도 저지른 모양이지요? 호호호......”
“회장님은 그게 뭔지 궁금하지도 않으신 모양입니다? 묻지도 않으시는 걸 보면......”
회장은 강주의 질문에 대답도 않고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는다.
“제가 사업을 꾸려 나가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고 했지요? 국방부의 높은 사람들...... 국회의원이다. 시장이다. 군수다...... 나름대로 한다하는 인간들, 사업을 위해서 그렇게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모두가 다 하나같이 그렇고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상류층 사람들의 맹점을 이용하기 시작한 거죠. 이이제이 아시죠?”
“아! 그렇다면?......”
“그래요. 내 도움이 필요해서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도와줘서 내 사람으로 만들어 두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을 내세우는 거죠. 이 클럽 저 클럽 모임이 많이 있지만 그 사람들 모두 어떤 필요에 의해서 교제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알아두면 상대방에게 나중에라도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 사람들도 싫어하진 않거든요.”
“네...... 일전에 말씀하셨지요.”
“처음엔 우연히 그렇게 됐어요. 납품심사를 하던 국방부 대령이었는데, 실무진 심사는 통과했는데도 너무 끈끈하게 굴어서 거리를 두다가 결국 거래를 실패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다른 일로 우연히 그 부인하고 친분을 맺게 되고...... 그 여자가 바로 그 장교부인이라는 걸 알게 되고서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다른 거래를 할 때 그 거래처 사장한테 소개를 해줘 버렸지요. 호호호...... 그랬는데 그게 글쎄 접대로 받아들여지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터득을 하게 됐지요.”
“허허허...... 참....... 네...... 그랬군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하우가 쌓이더라고요. 전에 헤어질 때, 나 부축해서 내려간 동생 기억나지요? 운전했던 애...... 그 애가 바로 그 황부장 부인이에요. 호호호...... 황부장이 남편에게 신세를 지기도 많이 졌지만 나름대로 고생도 제법 했어요.”
“......”
“음...... 뭐, 자세한 말을 들어 보진 않았지만 대단한 일 아니면 그냥 모른 척 해주세요. 어차피 이제 이사님이 바로 잡으면 그뿐이잖아요? 지금 미경이가 내 일을 많이 도와주고 있는데, 그 애를 봐서라도...... 오늘 미경이 만나 보시고, 이사님도 나중에 그 애가 부탁해오면 황부장 어디 취직이라도 시켜주려고 애써줄 것 아니에요? 다...... 그렇게 서로 돕고 돕는 거예요. 그러니 상대방이 굳이 싫다고 하지 않는 한 부담 없이 만나도 괜찮아요. 제비족이나 꽃뱀도 아니니 서로에게 안전하고요. 그 아이들에게 흔들리지 말라는 건 그렇게 마음의 빚을 많이 만들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오히려 가벼운 부탁 정도는 들어줘도 괜찮지 않겠어요? 이젠 그 쪽에서 오히려 이사님께 빚을 지는 셈이니까 이사님은 손해 볼 것도 없잖아요. 호호호......”
뭔가 황부장보다는 황부장 부인인 미경이가 더 쓰임새가 있는 모양이다. 강주는 민희 생각에 몹시 불쾌하기도 하지만, 특히나 회장에게는 속을 감춰야 할 것 같아서 일단 털어 버리기로 한다. 어차피 재원이야 회장의 말대로 다시 회수하면 그뿐이니 이 기회에 황부장만 확실히 장악하는 선에서 멈추기로 내심 마음을 먹고 슬며시 회장을 부축하는 손에 힘을 가해 허리를 더듬어 본다.
“하긴 그렇군요. 역시 제가 과외 선생님은 제대로 모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오히려 제 입장을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회장님.”
“호호호...... 어머! 비행기 태우셔도 포상 가불은 안 된답니다. 이사님. 우선은 숙제부터 하시라니까요.”
“허허허...... 회장님도 참...... 아휴...... 그래도 그 남편들이 알면...... 참 나......”
“호호호...... 꼭 그렇지도 않지요. 어차피 남자들도 클럽 모임에 나올 때는 그런 저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 부인들 그런 줄 전혀 모르고 있진 않을 걸요. 다만 현재의 사회적 지위와 바라보는 희망, 목적, 뭐...... 이런 것들 때문에 그저 모른 척, 못 본 척 하고 지낼 수도 있지 않겠어요? 서로 돈 보고 집안끼리 하는 결혼...... 그래도 남녀 간의 일이니 처음에야 물론 죽고 못 사는 것처럼 사랑하기도 하죠. 그렇지만 그게 어디 오래 가나요? 곧 시선을 밖으로 돌리게 되고 사회적 체면에 이혼할 수는 없으니 목표를 향해 가면서 서로가 방해받지 않고 암묵적으로 즐기는 거죠.”
“허허...... 참...... 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마 모르면 몰라도 우리 남편도 최이사님 곱게 보진 않을 걸요.”
“네?...... 절...... 왜요? 제가 뭘 어쨌다고......”
“호호호...... 우리 남편 제의는 거절하고 제 부탁은 들어주셨잖아요. 황부장이 알았으니 지금쯤은 소식이 들어갔을 텐데...... 또, 유통 사무실에는 나오지도 않고 저만 이렇게 밖에서 따로 만나고 계시고...... 그러니 벌써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않겠어요? 호호호......”
“아! 그럴 수도 있나요? 야...... 이거 조금 억울한데요. 앞으로 사장님 뵐 생각을 하니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요. 하하하......”
“호호호...... 이사님,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걱정하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아마 누구도 바보처럼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왜냐면 자기만 공개적으로 바보가 되고 전혀 얻을 것도 없거든요. 그랬다가는 오히려 사회적으로 고립당하기 십상이죠.”
“하하하......”
강주는 허리를 꺾어가며 큰 소리로 웃어 대고 회장은 눈이 동그래져 강주를 바라본다.
“갑자기 왜 그렇게 웃어요?”
“네?...... 네. 문득 우스운 생각이 들어서요.”
“무슨 생각이요?”
“하하하...... 상류층 사람들이요?...... 그 모임에 나온다는 남자들 말입니다. 서로가 얼굴들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겠어요? 다 동서지간일지도 모르니...... 하하하......”
“어머! 호호호......”
강주는 다리가 불편한지 양다리를 모아 회장을 다시 앉히곤 슬그머니 회장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린다. 회장도 모른 척 강주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한 손을 내어준다. 회장의 입장에선 나름의 공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제의를 묵묵히 따라주는 강주에 대한 포상일 수도 있겠다. 강주는 회장이 민희의 남편과 잠자리를 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 후라서 슬그머니 회장을 도발해 보기로 한다.
“아무리 운동을 해서 몸매유지를 하고, 수술을 해서 얼굴 주름을 펴도 손은 어떻게 안 되더라고요. 내 손 주름이 많이 졌죠?”
강주는 천천히 손을 잡아당겨 입을 맞춰주며 웃는다.
“어머! 호호호...... 아유...... 이사님. 지금 프러포즈하시는 거예요?”
“네...... 회장님. 잠깐만이요.”
회장을 번쩍 안아들어 자신의 무릎에 고쳐 앉히고 허리를 꼭 끌어안는다. 벤치에 엉덩이를 조금만 걸치고 뒤로 기대니 마치 골반 위에 앉힌 형국이다.
“어머나! 아유...... 이사님...... 왜 이래요?”
“잠깐만요. 회장님,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강주는 다시 허리를 세워 버둥대는 회장을 힘으로 제압해 꼭 끌어안고 회장도 곧 몸의 힘을 빼고는 강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부드럽게 머리칼을 넘겨준다. 회장의 가슴은 강주의 얼굴을 압박해 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진한 향기를 코로 넘겨주고 매미날개처럼 얇게 비치는 회장의 옷은 부드러운 피부감촉을 그대로 강주에게 전달해준다. 나이를 잊게 해 주는 회장의 가는 허리는 풍만한 엉덩이 위에서 잔뜩 꺾여 있다.
“아...... 좋다...... 하하하......”
“아유...... 이사님. 이제 그만 내려줘...... 힘들어.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조금만 더요. 조금만...... 보긴 누가 본다고 그래요? 아무도 없는데......”
한참동안 강주의 손은 부드럽게 회장의 무릎을 오가며 쓰다듬고 회장은 그런 강주의 목을 양팔로 꼭 끌어안고 모른 척 시선을 물가로 보내고 있다.
“어머! 호호호......”
“왜요?”
“아유...... 이게 뭐야? 이사님도 참......호호호......”
회장은 여전히 강주의 목을 감은 채 갑자기 자지러질듯 웃으며 몸을 움찔거리고 이유를 알게 된 강주도 어색하게 따라 웃는다.
“아하...... 죄송해요. 회장님. 나도 모르게 그만......내려드릴게요.”
“아니야. 호호호...... 그냥 이대로 있어. 괜찮아.”
“네?...... 네.”
“소개해준 동생들로 양이 안차나 봐? 호호호......”
회장은 짓궂게 웃으며 엉덩이를 흔들어 강주를 더욱 자극한다.
“아...... 아...... 회장님......”
“호호호......”
강주는 회장의 노골적인 추파에 더 이상 부끄러울 것도 없어 마음껏 기운을 뽐내고, 회장은 모른 척 엉덩이를 맡긴 채 한동안 물가만 바라본다.
“아...... 이사님, 이제 나 내려 줘. 미경이 만나러 가야지.”
“네, 잠깐만요.”
“어머나...... 어떻게 해. 걸을 수 있겠어? 호호호......”
“아유, 회장님도 참...... 좀 가려줘요. 제가 뒤에서 걸을게요.”
“그래, 잘 따라 와야 해.”
가려주다가 이내 깡충거리며 피해 달아나 강주를 곤란하게 하는 모습이 마치 유원지에 놀러 온 어린아이같이 즐거워 보이고 강주는 어쨌거나 회장에게 한 발 다가간 느낌이어서 오늘의 만남에 나름의 수확은 있는 셈이다.
근처의 비치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가니 미경이가 반가운 듯 일어서 손을 흔든다. 황부장의 부인이라니까 오히려 자극적으로 정복욕이 일어나 다시 한 번 눈길을 보낸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이사님.”
“그래요, 잘 지냈어요?”
“이것들은 이사님만 모시고 오면 안면을 바꾼다니까......”
“어머! 언니는...... 호호호...... 말씀들 많이 나누셨어요?”
“그래...... 하지만 그 회사 정리하고, 안 하고는 모두 여기 최이사님에게 달려 있으니까 네 신랑한테도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해. 내가 너까지 미워질까 봐 아직 자세한 이야기는 물어 보지도 않았지만...... 음...... 이사님......”
회장은 갑자기 말을 중단한 채 강주를 바라보고 덩달아 미경이도 긴장한 모습이다.
“안 물어 보신다면서 갑자기 맘이 바뀌셨습니까? 허허......”
“아니...... 그게 아니고...... 살릴 수 있겠어요? 솔직한 말씀을 듣고 싶어요.”
“물론입니다. 그것도 단 시일에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단시일에요?”
“허허...... 여기 미경씨 앞에서 이런 말을 하자니 조금 미안한데...... 어차피 문제 삼지 않기로 했으니까, 지금 잘못 되어 있는 사안들 조금만 개선하고 직원들 재교육 시키면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제 폐쇄는 생각 안할 테니까 잘 협조해서 꼭 좀 살려 보세요.”
“아니?...... 회장님, 아직도 그 말씀이세요?”
“호호호...... 알았다니까요. 아유...... 참, 이사님은 무슨 말을 못하게 해...... 자, 어디 밥이라도 먹으러 가지요?”
“어머! 언니 잠깐만...... 그이 온다고 전화 왔었거든요.”
“어머! 황부장이?......”
“네, 마음이 많이 쓰이나 봐요.”
“호호호...... 황부장이 아주 임자 제대로 만난 모양이구나. 호호호......”
“제가 요 앞에 좀 나가서 찾아볼게요. 여길 못 찾나?......”
미경이 나가고 공교롭게 잠시 후 황부장이 들어서고 회장을 보고는 쭈뼛거리며 자리를 찾아 앉는다. 새로 온 이사가 강주라는 것은 이미 아는 표정이지만 강주는 일부러 눈길을 마주치지 않는다. 회장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싸늘한 눈초리로 황부장을 노려보며 찬바람을 풀풀 날리고 그 모습을 본 강주는 회장의 시뮬레이션 액션에 기가 막혀 웃음이 터질 지경이다.
“회장님, 면목 없게 되었습니다.”
“......”
“저기...... 회장님. 여기 부장님하고 둘이 좀 의논을 할 테니까 자리를 좀 옮기겠습니다.”
“아니에요. 이사님...... 말씀 나누세요. 제가 나가 있지요.”
강주는 기왕 문제 삼지 않기로 한 부분은 넘어가더라도 그로 인해 본점 점장이나 그 부인, 기타 이 일로 괜히 피해를 볼 수도 있는 김과장 등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기 위해 회장이 들을 수 없도록 자리를 따로 앉기를 요구하고, 회장은 마침 들어오는 미경이를 데리고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그래...... 부인에게 이미 말씀을 들으셨을 테니 긴 말은 하지 맙시다. 제가 오후에 본사로 들어 갈 테니까 브리핑이나 잘 해 주세요. 앞으로 잘 해 볼 생각이시면 협조해 주시고요. 그리고 뭐...... 하실 말씀 있으시면 꼭 회사 업무가 아니더라도 이 기회에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황부장도 전혀 생각이 없진 않았을 테니 넌지시 말을 던져 대화를 유도해 낸다.
“하하하...... 아, 이거 참...... 지난번에 오셨을 때 진작 말씀을 해 주시지 않고...... 사장님께서도 섭섭해 하시던데...... 네, 앞으로 잘 해 봅시다. 제가 이래 뵈도 이 회사 창립멤버 아닙니까? 필요한 브리핑은 제가 다 해 드리겠습니다. 허허허...... 그리고 그동안 제가 그...... 몇 푼 안 되는 거지만 점두 행사수입은 좀 손을 대 왔습니다. 이젠 그대로 보고 할 테니 우리 다 잊어 버리고 앞으로는 윈윈 하는 걸로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아직도 분위기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점장 부인의 말이 사실인지 거래처 계약에 대해서 손 댄 것이 이미 들통 났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자기 마누라와 회장이 공유하는 것에 대한 무게가 얼마나 큰지 강주가 알 바 아니지만, 사장까지 들먹여 가며 실세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바보 같은 소리에 강주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
“윈윈?...... 허허허...... 이것 봐요. 황부장...... 당신 정말 신세 망치고 싶어?”
“어어...... 뭐, 뭐요?”
비록 소리죽여 말 하지만 느닷없는 반말에 황부장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다.
“당신이 점장 마누라한테 전화로 뭔가 보고를 받긴 받은 모양인데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가 그 서류를 보고 뭘 알아서 얘기를 제대로 해 줬겠나? 그냥 뭔가 있나 보다 싶어서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전화질로 구조신호를 보낸 모양인데, 당신 정말 뜨거운 맛 좀 봐야 되겠어...... 당신 때문에 수십, 수백 명이 대신 밥을 굶으면 안 되지 않겠어?”
“어......”
점장 부인에 대해서 거론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회장이 앉은 테이블의 눈치를 살핀다.
“보아하니 당신, 취직을 빌미로 여자들 제법 건드려 온 모양이지. 회장이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그룹 이사회에 참석해서 당신 까발리겠어. 비록 회장이 대주주지만 다른 이사들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을 걸...... 게다가 당신 본점점장 부인에게 어떻게 했어?”
강주는 휴대폰을 꺼내 녹음기를 작동시킨다. 휴대폰에선 아침에 점장 부인과 나눈 대화가 흘러나오고 황부장은 이제 얼굴빛이 아예 푸르스름하게 변해 버린다.
“내가 이 여자를 들쑤셔서라도 당신 강간으로 고소하게 만들 거야. 나...... 이 여자 약점도 잡고 있거든......”
다시 한 번 휴대폰으로 사진을 보여준다. 황부장은 연이은 강주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눈동자만 바쁘게 굴리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당신 거래처 계약을 리베이트로 돌려서 당신 통장으로 거액을 착복하고 있다는 증거도 모두 확보한 상태야. 이건 회장이 봐주고 안 봐주고를 떠나서 무조건 형사구속 감이야. 어디...... 당신 한 번 죽어 봐.”
강주는 더 이상 대화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저...... 이사님. 이사님......”
강주는 목소리를 낮춰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회장 쪽에서야 들릴 리가 없지만 조용한 목소리로 공갈을 치니 소름 끼치도록 더욱 무서운 협박으로 들려오고 강주가 거래처 계약에 관한 얘기까지 꺼내자 황부장은 서둘러 강주의 팔을 잡으며 사정을 한다.
“저, 제가 잘못했습니다. 시간 좀 주십시오. 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씨바......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내가 어제 이미 거래처 계약서 전부 확인을 끝낸 상태야. 거래처 간부들 불러들여서 최초 계약된 날짜부터 결재해 준 금액을 따져보면 십 원짜리 동전 하나도 빼낼 수 없도록 답이 나오게 돼 있어. 어제 대충만 계산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던데...... 당신 집이 어디야?”
“네, 네...... 본사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딴 소리 하지 말고 내일 아파트 등기필증 가지고 나와.”
“네?...... 아유, 이사님...... 제가 그동안 해 먹은 거 다 합쳐도 그만큼은 안 됩니다. 이사님......”
강주는 다시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며 말을 잇는다. 미소 짓는 강주의 얼굴이 이 순간 황부장에게는 악귀나찰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 끝까지 해 보자는 거야? 이거 내가 점장한테 들려주면 당신 어디서 칼 맞을지 몰라. 순순히 말 듣고 앞으로나 열심히 하면 다시 집 찾도록 해 줄 거고, 하는 게 시원치 않으면 영영 집은 날려 버릴 거야. 알았어? 당신, 아까 나보고 뭐라고 했어? 뭐?...... 윈윈?...... 그 역은 기차 안 다닌지 오래 됐어. 그 역은 제로섬 다음 역이야. 당신이 완전히 항복했는지 내가 아직 신용하지를 못하겠어. 그렇게 하겠어? 아니면 내 맘대로 할까?”
“아, 네, 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이사 가라고 하지는 않겠어. 권리만 넘기고 일단 계속 살아도 좋아. 하는 것 봐서 당신이 확실히 내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다시 돌려 줄 수도 있으니까 너무 인상 쓰지 말고...... 알았어?”
“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는 이사님만 믿겠습니다.”
“자, 그럼 마누라 앞인데 인상 펴고 밥 먹으러 갑시다.”
황부장은 회장 말마따나 임자 제대로 만난 격이다. 물론 두 사람이 생각하는 입장은 전혀 다르겠지만 어쨌든 황부장은 허둥지둥 강주의 뒤를 쫓고 있다.
“자, 이리 와서 앉아 봐요.”
“네......”
두 사람은 격앙되었던 감정을 가라앉힌 후 나란히 소파에 앉아 대화를 하고 있다. 강주는 녹음을 하는 듯 휴대폰을 한 옆으로 내려두고 담배를 피워 문다.
“그래...... 황부장하곤 언제부터 그렇게 부정한 사이가 됐다고?......”
“네...... 그게...... 남편이 전에 있던 직장에서 자꾸 스트레스를 받고 여러 가지로 힘이 든다고 해서 다른 직장을 알아보던 중이었어요. 그 회사 출신 선배가 이 회사 높은 자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래서......”
“남편하고 같이 인사 차 만나 뵌 적이 있었어요. 그 자리에선 금방이라도 자리를 마련해 줄 것 같이 했었는데, 며칠째 연락을 안 해줘서 제가 전화를 드려 봤더니, 자리는 금방 마련되지만 정말 각오가 돼 있다면 인천으로 이사를 오라는 거예요.”
“그건 왜죠?......”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면서...... 후배들 취직 시켜주고 나면 금방 그만 둬 버리기도 해서 곤란한 적이 많았다고...... 정말 여기서 자리를 잡고 싶으면 아예 이사 올 곳이나 알아보라면서 한 번 건너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남편이야 하루라도 빨리 그 매장을 그만두고 싶어 하니까, 제가 가서 방을 알아보기로 했는데. 어디로 배치를 해줄지 모르니까 부장님을 찾아 갔었지요.”
“왜, 남편하고 같이 안가고?......”
“취직이 될지 안 될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데 무조건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남편은 일단 계속 출근하라고 했지요.”
“그 부장이라는 사람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점장의 아내는 익히 자기도 알고 있을 내용을 재차 확인하듯 물어오는 강주가 의아한지 고개를 들어 바라보고는 다시 대답을 이어간다.
“황경수 부장이요.”
“그래서요?......”
“제가 하기에 따라서 취직은 물론이고 앞으로 진급도 보장해 준다고 해서...... 그만......”
“그만...... 뭐요?......”
“그만 여관에 따라가게 됐어요.”
“그래서 거기서 황경수 부장하고 관계를 맺은 겁니까?”
“네......”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네...... 하지만 그때 한 번뿐이었어요. 믿어 주세요.”
이어서 강주는 핸드폰을 조작하며 점장의 아내에게 자세를 요구해 몇 장의 사진을 촬영한다. 기가 막힐 일이지만 이미 강주의 의도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처해 있으니 부끄러운 곳을 노출한 채 촬영에 응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미 강주에게는 일종의 컬렉션에 불과한 일이지만 상류층 인간들을 접해 보니, 그들의 작태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아 언제 어떻게 보복을 당할지 몰라 모든 일에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할 일이다.
“음...... 걱정 말아요. 공개할 건 아니니까...... 다만 아까 내가 본 바로는 아직도 당신을 백 퍼센트 신용하기가 어려워서 그럴 뿐이니까...... 내가 작업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행위를 한다면 그 길로 신세 망치는 겁니다. 알았어요?”
“네, 네...... 절대 안 그럴 거예요. 이젠 전화도 안 할게요. 그 서류도 보긴 봤지만 뭐가 뭔지 몰라서 아무 말도 못해줬어요, 진짜예요.”
“자, 그럼 됐습니다. 당신이나 남편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해줄 테니까 지금부터는 다 잊어버리고 남편 내조나 잘 해요. 자, 내 명함을 주고 갈 테니까 혹시라도 연락할 일 있으면 하시고......”
“네...... 이사님. 그러면 비밀은 지켜 주시는 거죠?”
강주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려오고 점장의 아내는 그래도 불안한지 마당까지 내려 와 배웅을 한다.
이제 황부장은 강주에게 확실히 덜미를 잡힌 셈이다. 거래처와의 계약을 체결 당시부터 조작해 뒷거래로 배를 채워온 사실을 포착했으니 계약을 재조정한 뒤 그 돈을 회수하고 점장들의 점두코너 수익만 잘 관리하면 당장이라도 적자기조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차차 교육훈련을 통해 조정해 나간다면 이 회사를 건지는 것도 썩 힘이 들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한결 가벼운 기분으로 차를 몰아 용현동 본사로 향한다.
모르면 몰라도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이 어사출도를 할 때의 기분이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차를 몰아가자 곧 전화가 울려 다시 길가에 주차를 하고 전화를 받는다.
“네......”
“아! 이사님, 저 본점 점장입니다.”
“아! 네...... 저도 지금 집에서 금방 나왔습니다.”
“네...... 그게 좀 이상한 게......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어젯밤에 이사님을 만난 걸 알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이사님 명함을 황부장에게 뺏기고 말았습니다. 이걸...... 어떻게 하죠?”
“음...... 뭐, 괜찮습니다. 이젠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바로 작업 해 버릴 거니까...... 점장님은 근무나 잘 하고 계세요.”
“네, 네...... 알았습니다. 절대 제가 일부러 알려 준 건 아닙니다. 이사님.”
“허허허...... 네, 알았다니까요.”
재삼 당부하는 점장의 말에서 샐러리맨의 비애가 느껴져 측은해지기까지 한다. 이 사람 역시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자신에게 허락된 조그만 공간의 일상 속에서만 허덕이고 있을 뿐이다. 자신 역시 수하직원의 부인인 여진이와 관계를 맺고 있어 혼란스럽긴 하지만, 그것과 일자리를 빌미로 몸을 요구하는 황부장의 경우는 다르다고 애써 치부해 버린다.
이렇게 강주도 자신의 몸뚱이를 전혀 다른 시장으로 던져놓고 보니 비로소 시야가 밝아지는 모양이다. 손 안에 있는 것,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것이 전부를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철이 들어 철을 안다든 것은 절기를 안다는 것이고, 곧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성인이 되어 간다는 뜻일 게다. 회장을 만나 인천으로 건너오게 되고 이곳에서 경험하는 낯 선 상황들이 타산지석이 되어 부쩍 강주의 키를 자라게 하는 모양이다.
“흐음...... 그러면 조만간 다시 전화가 오겠지.”
황부장이 명함을 받아갔다면 금방 전화가 올 터이니 아예 운전석 의자를 뒤로 재끼고 누워 버린다. 그간 즐겨왔던 많은 여자들도 누군가의 딸이며, 누군가의 부인이었을 것이니 지금의 강주를 가장 자극하는 문제는 민희와 혜숙이의 문제일 것이다. 내 가족의 범주 안에 있는 여자들이 누군가의 사타구니 밑에서 헐떡여야 하는 이유가 단지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이유라면 더 이상 용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창을 열고 담배를 피워 물자 곧 전화가 울린다.
“네, 최......”
“호호호...... 안녕하세요? 이사님...... 저 아시겠어요?”
“네?......”
“왜...... 전에 회장 언니하고 같이 만났었잖아요? 그날 저녁에 이사님은 경주 차를 타고 가시고......”
“아...... 그러면......”
“네, 제가 회장 언니 차를 운전해서 갔잖아요. 저, 이미경이에요.”
“아! 네...... 이여사...... 그런데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어머! 전화번호뿐이겠어요? 지금 인천에 와 계신 것도 다 아는데...... 호호호...... 저는 무역 일을 보시는 줄 알았더니 유통 쪽을 보신다면서요?”
자신의 행적을 빤히 들여다보듯 알고 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에 강주는 기가 막힐 뿐이다.
“허허...... 참...... 기가 막히네요. 이여사 안테나가 상당히 고감도인 모양입니다. 어떻게 그리 잘 아십니까? 하하하......”
“한 번 시간 좀 내주세요. 지금 좀 만날까요?”
“아! 지금은 제가 업무 중이라서 좀 어려운데......”
“어머! 이사님이 시간에 쫓길 일이 어디 있어요? 천천히 하셔도 되잖아요? 그러지 마시고 지금 좀 만나요.”
“어허...... 참...... 제가 나중에 전화를 드릴 테니까...... 정 그러면 볼 일 좀 보고 점심시간 쯤 만납시다.”
“아이 참...... 그래요. 그럼 그 전에 한 말씀만 드릴게요. 저...... 유통에 황부장 아시죠? 그 양반이 제 남편이거든요. 그렇게 아시고 나중에 다시 자세한 말씀 드릴게요. 이따가 만나요.”
“네?......”
도깨비 소굴이 따로 없다. 어이도 없고 기가 막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뭔가 잔뜩 뭉쳐 있는 실타래를 들고 실마리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느낌이 바로 이럴 것이다. 회장에게 들은 바로는 그녀를 추종하는 그녀의 패거리들을 잘 사귀어 보라고 했었는데, 민희야 그런 관계를 알 리 없는 처지였으니 그렇다지만, 이 여자가 황부장의 부인이라면 그런 것을 회장이 모를 리도 없는 일인데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민희를 통해서 그녀들 간에 뭔가 이해관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는 터에 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서는 섣불리 황부장을 두들기기도 마땅치 않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또 다시 전화가 울린다. 번호를 보니 이번에는 회장의 전화다. 모든 것은 이 여자로부터 연출 된 것일 수도 있으니 정작 알아야 할 이 여자의 속셈을 알 수 없어 답답한 노릇이다. 도무지 혼란스러워 그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보는 수밖에 없게 되어 버렸다.
“네, 최이사입니다.”
“네, 이사님. 저예요.”
“네, 회장님. 좋은 아침이지요.”
“어머! 이사님...... 역시 인사도 세련된 인사예요...... 지금 인천이시라면서요? 요즘 시간을 자주 내시네요? 저 쪽 회사에는 괜찮아요?”
역시나 줄줄이 정보가 흘러 회장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황부장도 사안이 결코 간단치 않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마누라나 회장을 앞세워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하물며 회장은 더욱이 알아서는 안 될 입장일 텐데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는 것에 대해 강주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네...... 며칠 돌아 볼 생각을 하고 아예 휴가를 내서 왔습니다.”
“어머! 아유...... 죄송해서 어떻게 해요. 애인한테 혼나시겠다. 호호호......”
“뭐,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습니까?”
“네, 괜찮으시면 지금 좀 뵐까요? 제가 송도 쪽으로 가서 전화 드릴게요.”
“네...... 그러시죠. 저도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유원지 안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가끔 움직이는 직원들 뿐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강주의 속마음은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묘한 심정이다. 정작 회장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일에 이제는 뭔가 해답을 찾아간다는 기쁨도 잠시, 모든 걸 보류한 상태에서 회장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한다.
“쉽게 찾으셨네요?”
“참 나...... 수원에서 왔다고 아주 촌놈 취급을 하십니다. 그려......”
강주의 대꾸에서 볼 멘 심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회장이 아닐 테니 그저 강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인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회장의 저 미소에 아랫도리에 불끈 힘이 들어갔겠지만, 구미호처럼 속을 알 수 없는 회장에게 적잖은 회의를 느끼는 터라 역시 터울을 좁힐 수 없는 무지렁이 강주의 반응이 신통치 않다.
“이사님, 숙제는 좀 하셨나요?”
“허허...... 아직 다 만나 보지도 못했는데 무슨 숙제를 합니까? 언제 자리 좀 만들어 보시죠.”
“호호호...... 안 그래도 조금 있다가 같이 점심 먹자고 했어요. 기다려 보세요.”
“그러세요? 그래...... 참, 보자고 하신 이유는요?”
“아이, 뭐가 그리 급해요? 이사님은 어쩔 때 보면 너무 전투적으로 사시는 것 같아요. 좀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주변도 돌아보면서 하세요.”
주변을 돌아보라는 회장의 말이 왠지 귀에 거슬린다. 당장이라도 이유를 묻고 싶지만 또 핀잔만 들을 테니 눌러 참으며 회장을 따라 나서고, 회장은 강주의 팔짱을 끼고 보트장을 따라 물가로 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물을 보며 한가로이 산책을 하러 나온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머릿속으로는 바둑을 두는 기사들처럼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설전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걷는 길에 벤치가 보이자 약속이나 한 듯 자연스레 그쪽으로 방향이 정해지고 막상 앉으려 하니 의자가 썩 깨끗하질 않아 회장을 바라보게 된다.
“그냥 앉아요. 괜찮아요.”
“아! 그러면 제 무릎에 살짝 걸치세요.”
그냥 앉으려는 회장의 허리를 잡아챈다. 강주 입장에서는 불편한 기분에 그냥 그녀에게 끌려 다니기 싫다는 은연중의 표시일지 모르겠다.
“어머!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호호호......”
강주는 벤치 모서리에 앉아 다리를 벌려 한 쪽 무릎을 내어주고 회장은 주변을 슬쩍 돌아보곤 강주의 어깨를 짚으며 그 위로 엉덩이를 걸친다.
“그래...... 이사님이 매장을 돌아보니 느낌이 어떠세요?”
“뭐, 답답하죠. 시설도 그렇고, 직원들도 기강이 많이 해이하고...... 심지어는 가격표가 잘못 붙어있거나 아예 없는 것도 부지기수에다가...... 구석구석 먼지투성이고...... 전반적으로 그림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시죠?”
“일단 본사에 들어가서 조직도를 살펴보고 조직 자체의 문제인지 매장 단위의 문제인지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황부장이란 사람도 좀 알아보고요.”
“황부장에게 문제가 있던가요?”
“......”
강주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는다. 황부장이 명함을 받아 간 직후에 그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오고, 연이어 회장에게서 연락이 와서 만나자고 하니 이들의 관계를 정확히 알기까지는 나름대로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다. 이것이야 말로 회장에게 배운 스타일이니 일단은 속을 감춰 보지만, 강주가 가부간에 아무 대답도 없다는 건 일부 긍정하는 입장이니 회장으로선 더 들을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 황부장 안사람이 미경이라고...... 이사님도 전에 한 번 본 기억이 있지요?”
“네, 안 그래도 회장님 만나기 전에 전화가 왔더군요.”
“그래요, 제게도 전화가 왔었어요. 이사님께 전화를 했더니 쌀쌀맞게 끊어 버리셨다면서요? 호호호...... 그런데 제가 그 말을 듣고 보니 왜 그런지 은근히 기분이 좋더라고요. 호호호......”
“허허허...... 참 나......”
“민희나 경주도 자기들한테 전화가 안 온다고 하던데......”
경주한테야 전화를 한 적이 없지만 민희는 사정이 다름에도 회장이 저리 말하는 걸 보면 민희도 강주와의 속사정을 회장에게 털어놓지는 않은 모양이다.
“네...... 뭐, 별로 볼일도 없는데......”
“호호호...... 그래도 가끔씩 만나 보세요. 다 이사님께 도움이 될 거라니까요. 안 그래도 미경이는 오늘 보기로 했으니까...... 아유, 계집애...... 무슨 일인지 바짝 몸이 달아 가지고...... 황부장이 이사님에게 뭔가 대단히 크게 책잡힐 일이라도 저지른 모양이지요? 호호호......”
“회장님은 그게 뭔지 궁금하지도 않으신 모양입니다? 묻지도 않으시는 걸 보면......”
회장은 강주의 질문에 대답도 않고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는다.
“제가 사업을 꾸려 나가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고 했지요? 국방부의 높은 사람들...... 국회의원이다. 시장이다. 군수다...... 나름대로 한다하는 인간들, 사업을 위해서 그렇게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모두가 다 하나같이 그렇고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상류층 사람들의 맹점을 이용하기 시작한 거죠. 이이제이 아시죠?”
“아! 그렇다면?......”
“그래요. 내 도움이 필요해서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도와줘서 내 사람으로 만들어 두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을 내세우는 거죠. 이 클럽 저 클럽 모임이 많이 있지만 그 사람들 모두 어떤 필요에 의해서 교제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알아두면 상대방에게 나중에라도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 사람들도 싫어하진 않거든요.”
“네...... 일전에 말씀하셨지요.”
“처음엔 우연히 그렇게 됐어요. 납품심사를 하던 국방부 대령이었는데, 실무진 심사는 통과했는데도 너무 끈끈하게 굴어서 거리를 두다가 결국 거래를 실패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다른 일로 우연히 그 부인하고 친분을 맺게 되고...... 그 여자가 바로 그 장교부인이라는 걸 알게 되고서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다른 거래를 할 때 그 거래처 사장한테 소개를 해줘 버렸지요. 호호호...... 그랬는데 그게 글쎄 접대로 받아들여지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터득을 하게 됐지요.”
“허허허...... 참....... 네...... 그랬군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하우가 쌓이더라고요. 전에 헤어질 때, 나 부축해서 내려간 동생 기억나지요? 운전했던 애...... 그 애가 바로 그 황부장 부인이에요. 호호호...... 황부장이 남편에게 신세를 지기도 많이 졌지만 나름대로 고생도 제법 했어요.”
“......”
“음...... 뭐, 자세한 말을 들어 보진 않았지만 대단한 일 아니면 그냥 모른 척 해주세요. 어차피 이제 이사님이 바로 잡으면 그뿐이잖아요? 지금 미경이가 내 일을 많이 도와주고 있는데, 그 애를 봐서라도...... 오늘 미경이 만나 보시고, 이사님도 나중에 그 애가 부탁해오면 황부장 어디 취직이라도 시켜주려고 애써줄 것 아니에요? 다...... 그렇게 서로 돕고 돕는 거예요. 그러니 상대방이 굳이 싫다고 하지 않는 한 부담 없이 만나도 괜찮아요. 제비족이나 꽃뱀도 아니니 서로에게 안전하고요. 그 아이들에게 흔들리지 말라는 건 그렇게 마음의 빚을 많이 만들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오히려 가벼운 부탁 정도는 들어줘도 괜찮지 않겠어요? 이젠 그 쪽에서 오히려 이사님께 빚을 지는 셈이니까 이사님은 손해 볼 것도 없잖아요. 호호호......”
뭔가 황부장보다는 황부장 부인인 미경이가 더 쓰임새가 있는 모양이다. 강주는 민희 생각에 몹시 불쾌하기도 하지만, 특히나 회장에게는 속을 감춰야 할 것 같아서 일단 털어 버리기로 한다. 어차피 재원이야 회장의 말대로 다시 회수하면 그뿐이니 이 기회에 황부장만 확실히 장악하는 선에서 멈추기로 내심 마음을 먹고 슬며시 회장을 부축하는 손에 힘을 가해 허리를 더듬어 본다.
“하긴 그렇군요. 역시 제가 과외 선생님은 제대로 모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오히려 제 입장을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회장님.”
“호호호...... 어머! 비행기 태우셔도 포상 가불은 안 된답니다. 이사님. 우선은 숙제부터 하시라니까요.”
“허허허...... 회장님도 참...... 아휴...... 그래도 그 남편들이 알면...... 참 나......”
“호호호...... 꼭 그렇지도 않지요. 어차피 남자들도 클럽 모임에 나올 때는 그런 저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 부인들 그런 줄 전혀 모르고 있진 않을 걸요. 다만 현재의 사회적 지위와 바라보는 희망, 목적, 뭐...... 이런 것들 때문에 그저 모른 척, 못 본 척 하고 지낼 수도 있지 않겠어요? 서로 돈 보고 집안끼리 하는 결혼...... 그래도 남녀 간의 일이니 처음에야 물론 죽고 못 사는 것처럼 사랑하기도 하죠. 그렇지만 그게 어디 오래 가나요? 곧 시선을 밖으로 돌리게 되고 사회적 체면에 이혼할 수는 없으니 목표를 향해 가면서 서로가 방해받지 않고 암묵적으로 즐기는 거죠.”
“허허...... 참...... 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마 모르면 몰라도 우리 남편도 최이사님 곱게 보진 않을 걸요.”
“네?...... 절...... 왜요? 제가 뭘 어쨌다고......”
“호호호...... 우리 남편 제의는 거절하고 제 부탁은 들어주셨잖아요. 황부장이 알았으니 지금쯤은 소식이 들어갔을 텐데...... 또, 유통 사무실에는 나오지도 않고 저만 이렇게 밖에서 따로 만나고 계시고...... 그러니 벌써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않겠어요? 호호호......”
“아! 그럴 수도 있나요? 야...... 이거 조금 억울한데요. 앞으로 사장님 뵐 생각을 하니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요. 하하하......”
“호호호...... 이사님,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걱정하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아마 누구도 바보처럼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왜냐면 자기만 공개적으로 바보가 되고 전혀 얻을 것도 없거든요. 그랬다가는 오히려 사회적으로 고립당하기 십상이죠.”
“하하하......”
강주는 허리를 꺾어가며 큰 소리로 웃어 대고 회장은 눈이 동그래져 강주를 바라본다.
“갑자기 왜 그렇게 웃어요?”
“네?...... 네. 문득 우스운 생각이 들어서요.”
“무슨 생각이요?”
“하하하...... 상류층 사람들이요?...... 그 모임에 나온다는 남자들 말입니다. 서로가 얼굴들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겠어요? 다 동서지간일지도 모르니...... 하하하......”
“어머! 호호호......”
강주는 다리가 불편한지 양다리를 모아 회장을 다시 앉히곤 슬그머니 회장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린다. 회장도 모른 척 강주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한 손을 내어준다. 회장의 입장에선 나름의 공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제의를 묵묵히 따라주는 강주에 대한 포상일 수도 있겠다. 강주는 회장이 민희의 남편과 잠자리를 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 후라서 슬그머니 회장을 도발해 보기로 한다.
“아무리 운동을 해서 몸매유지를 하고, 수술을 해서 얼굴 주름을 펴도 손은 어떻게 안 되더라고요. 내 손 주름이 많이 졌죠?”
강주는 천천히 손을 잡아당겨 입을 맞춰주며 웃는다.
“어머! 호호호...... 아유...... 이사님. 지금 프러포즈하시는 거예요?”
“네...... 회장님. 잠깐만이요.”
회장을 번쩍 안아들어 자신의 무릎에 고쳐 앉히고 허리를 꼭 끌어안는다. 벤치에 엉덩이를 조금만 걸치고 뒤로 기대니 마치 골반 위에 앉힌 형국이다.
“어머나! 아유...... 이사님...... 왜 이래요?”
“잠깐만요. 회장님,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강주는 다시 허리를 세워 버둥대는 회장을 힘으로 제압해 꼭 끌어안고 회장도 곧 몸의 힘을 빼고는 강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부드럽게 머리칼을 넘겨준다. 회장의 가슴은 강주의 얼굴을 압박해 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진한 향기를 코로 넘겨주고 매미날개처럼 얇게 비치는 회장의 옷은 부드러운 피부감촉을 그대로 강주에게 전달해준다. 나이를 잊게 해 주는 회장의 가는 허리는 풍만한 엉덩이 위에서 잔뜩 꺾여 있다.
“아...... 좋다...... 하하하......”
“아유...... 이사님. 이제 그만 내려줘...... 힘들어.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조금만 더요. 조금만...... 보긴 누가 본다고 그래요? 아무도 없는데......”
한참동안 강주의 손은 부드럽게 회장의 무릎을 오가며 쓰다듬고 회장은 그런 강주의 목을 양팔로 꼭 끌어안고 모른 척 시선을 물가로 보내고 있다.
“어머! 호호호......”
“왜요?”
“아유...... 이게 뭐야? 이사님도 참......호호호......”
회장은 여전히 강주의 목을 감은 채 갑자기 자지러질듯 웃으며 몸을 움찔거리고 이유를 알게 된 강주도 어색하게 따라 웃는다.
“아하...... 죄송해요. 회장님. 나도 모르게 그만......내려드릴게요.”
“아니야. 호호호...... 그냥 이대로 있어. 괜찮아.”
“네?...... 네.”
“소개해준 동생들로 양이 안차나 봐? 호호호......”
회장은 짓궂게 웃으며 엉덩이를 흔들어 강주를 더욱 자극한다.
“아...... 아...... 회장님......”
“호호호......”
강주는 회장의 노골적인 추파에 더 이상 부끄러울 것도 없어 마음껏 기운을 뽐내고, 회장은 모른 척 엉덩이를 맡긴 채 한동안 물가만 바라본다.
“아...... 이사님, 이제 나 내려 줘. 미경이 만나러 가야지.”
“네, 잠깐만요.”
“어머나...... 어떻게 해. 걸을 수 있겠어? 호호호......”
“아유, 회장님도 참...... 좀 가려줘요. 제가 뒤에서 걸을게요.”
“그래, 잘 따라 와야 해.”
가려주다가 이내 깡충거리며 피해 달아나 강주를 곤란하게 하는 모습이 마치 유원지에 놀러 온 어린아이같이 즐거워 보이고 강주는 어쨌거나 회장에게 한 발 다가간 느낌이어서 오늘의 만남에 나름의 수확은 있는 셈이다.
근처의 비치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가니 미경이가 반가운 듯 일어서 손을 흔든다. 황부장의 부인이라니까 오히려 자극적으로 정복욕이 일어나 다시 한 번 눈길을 보낸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이사님.”
“그래요, 잘 지냈어요?”
“이것들은 이사님만 모시고 오면 안면을 바꾼다니까......”
“어머! 언니는...... 호호호...... 말씀들 많이 나누셨어요?”
“그래...... 하지만 그 회사 정리하고, 안 하고는 모두 여기 최이사님에게 달려 있으니까 네 신랑한테도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해. 내가 너까지 미워질까 봐 아직 자세한 이야기는 물어 보지도 않았지만...... 음...... 이사님......”
회장은 갑자기 말을 중단한 채 강주를 바라보고 덩달아 미경이도 긴장한 모습이다.
“안 물어 보신다면서 갑자기 맘이 바뀌셨습니까? 허허......”
“아니...... 그게 아니고...... 살릴 수 있겠어요? 솔직한 말씀을 듣고 싶어요.”
“물론입니다. 그것도 단 시일에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단시일에요?”
“허허...... 여기 미경씨 앞에서 이런 말을 하자니 조금 미안한데...... 어차피 문제 삼지 않기로 했으니까, 지금 잘못 되어 있는 사안들 조금만 개선하고 직원들 재교육 시키면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제 폐쇄는 생각 안할 테니까 잘 협조해서 꼭 좀 살려 보세요.”
“아니?...... 회장님, 아직도 그 말씀이세요?”
“호호호...... 알았다니까요. 아유...... 참, 이사님은 무슨 말을 못하게 해...... 자, 어디 밥이라도 먹으러 가지요?”
“어머! 언니 잠깐만...... 그이 온다고 전화 왔었거든요.”
“어머! 황부장이?......”
“네, 마음이 많이 쓰이나 봐요.”
“호호호...... 황부장이 아주 임자 제대로 만난 모양이구나. 호호호......”
“제가 요 앞에 좀 나가서 찾아볼게요. 여길 못 찾나?......”
미경이 나가고 공교롭게 잠시 후 황부장이 들어서고 회장을 보고는 쭈뼛거리며 자리를 찾아 앉는다. 새로 온 이사가 강주라는 것은 이미 아는 표정이지만 강주는 일부러 눈길을 마주치지 않는다. 회장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싸늘한 눈초리로 황부장을 노려보며 찬바람을 풀풀 날리고 그 모습을 본 강주는 회장의 시뮬레이션 액션에 기가 막혀 웃음이 터질 지경이다.
“회장님, 면목 없게 되었습니다.”
“......”
“저기...... 회장님. 여기 부장님하고 둘이 좀 의논을 할 테니까 자리를 좀 옮기겠습니다.”
“아니에요. 이사님...... 말씀 나누세요. 제가 나가 있지요.”
강주는 기왕 문제 삼지 않기로 한 부분은 넘어가더라도 그로 인해 본점 점장이나 그 부인, 기타 이 일로 괜히 피해를 볼 수도 있는 김과장 등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기 위해 회장이 들을 수 없도록 자리를 따로 앉기를 요구하고, 회장은 마침 들어오는 미경이를 데리고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그래...... 부인에게 이미 말씀을 들으셨을 테니 긴 말은 하지 맙시다. 제가 오후에 본사로 들어 갈 테니까 브리핑이나 잘 해 주세요. 앞으로 잘 해 볼 생각이시면 협조해 주시고요. 그리고 뭐...... 하실 말씀 있으시면 꼭 회사 업무가 아니더라도 이 기회에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황부장도 전혀 생각이 없진 않았을 테니 넌지시 말을 던져 대화를 유도해 낸다.
“하하하...... 아, 이거 참...... 지난번에 오셨을 때 진작 말씀을 해 주시지 않고...... 사장님께서도 섭섭해 하시던데...... 네, 앞으로 잘 해 봅시다. 제가 이래 뵈도 이 회사 창립멤버 아닙니까? 필요한 브리핑은 제가 다 해 드리겠습니다. 허허허...... 그리고 그동안 제가 그...... 몇 푼 안 되는 거지만 점두 행사수입은 좀 손을 대 왔습니다. 이젠 그대로 보고 할 테니 우리 다 잊어 버리고 앞으로는 윈윈 하는 걸로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아직도 분위기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점장 부인의 말이 사실인지 거래처 계약에 대해서 손 댄 것이 이미 들통 났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자기 마누라와 회장이 공유하는 것에 대한 무게가 얼마나 큰지 강주가 알 바 아니지만, 사장까지 들먹여 가며 실세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바보 같은 소리에 강주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
“윈윈?...... 허허허...... 이것 봐요. 황부장...... 당신 정말 신세 망치고 싶어?”
“어어...... 뭐, 뭐요?”
비록 소리죽여 말 하지만 느닷없는 반말에 황부장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다.
“당신이 점장 마누라한테 전화로 뭔가 보고를 받긴 받은 모양인데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가 그 서류를 보고 뭘 알아서 얘기를 제대로 해 줬겠나? 그냥 뭔가 있나 보다 싶어서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전화질로 구조신호를 보낸 모양인데, 당신 정말 뜨거운 맛 좀 봐야 되겠어...... 당신 때문에 수십, 수백 명이 대신 밥을 굶으면 안 되지 않겠어?”
“어......”
점장 부인에 대해서 거론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회장이 앉은 테이블의 눈치를 살핀다.
“보아하니 당신, 취직을 빌미로 여자들 제법 건드려 온 모양이지. 회장이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그룹 이사회에 참석해서 당신 까발리겠어. 비록 회장이 대주주지만 다른 이사들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을 걸...... 게다가 당신 본점점장 부인에게 어떻게 했어?”
강주는 휴대폰을 꺼내 녹음기를 작동시킨다. 휴대폰에선 아침에 점장 부인과 나눈 대화가 흘러나오고 황부장은 이제 얼굴빛이 아예 푸르스름하게 변해 버린다.
“내가 이 여자를 들쑤셔서라도 당신 강간으로 고소하게 만들 거야. 나...... 이 여자 약점도 잡고 있거든......”
다시 한 번 휴대폰으로 사진을 보여준다. 황부장은 연이은 강주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눈동자만 바쁘게 굴리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당신 거래처 계약을 리베이트로 돌려서 당신 통장으로 거액을 착복하고 있다는 증거도 모두 확보한 상태야. 이건 회장이 봐주고 안 봐주고를 떠나서 무조건 형사구속 감이야. 어디...... 당신 한 번 죽어 봐.”
강주는 더 이상 대화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저...... 이사님. 이사님......”
강주는 목소리를 낮춰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회장 쪽에서야 들릴 리가 없지만 조용한 목소리로 공갈을 치니 소름 끼치도록 더욱 무서운 협박으로 들려오고 강주가 거래처 계약에 관한 얘기까지 꺼내자 황부장은 서둘러 강주의 팔을 잡으며 사정을 한다.
“저, 제가 잘못했습니다. 시간 좀 주십시오. 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씨바......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내가 어제 이미 거래처 계약서 전부 확인을 끝낸 상태야. 거래처 간부들 불러들여서 최초 계약된 날짜부터 결재해 준 금액을 따져보면 십 원짜리 동전 하나도 빼낼 수 없도록 답이 나오게 돼 있어. 어제 대충만 계산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던데...... 당신 집이 어디야?”
“네, 네...... 본사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딴 소리 하지 말고 내일 아파트 등기필증 가지고 나와.”
“네?...... 아유, 이사님...... 제가 그동안 해 먹은 거 다 합쳐도 그만큼은 안 됩니다. 이사님......”
강주는 다시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며 말을 잇는다. 미소 짓는 강주의 얼굴이 이 순간 황부장에게는 악귀나찰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 끝까지 해 보자는 거야? 이거 내가 점장한테 들려주면 당신 어디서 칼 맞을지 몰라. 순순히 말 듣고 앞으로나 열심히 하면 다시 집 찾도록 해 줄 거고, 하는 게 시원치 않으면 영영 집은 날려 버릴 거야. 알았어? 당신, 아까 나보고 뭐라고 했어? 뭐?...... 윈윈?...... 그 역은 기차 안 다닌지 오래 됐어. 그 역은 제로섬 다음 역이야. 당신이 완전히 항복했는지 내가 아직 신용하지를 못하겠어. 그렇게 하겠어? 아니면 내 맘대로 할까?”
“아, 네, 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이사 가라고 하지는 않겠어. 권리만 넘기고 일단 계속 살아도 좋아. 하는 것 봐서 당신이 확실히 내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다시 돌려 줄 수도 있으니까 너무 인상 쓰지 말고...... 알았어?”
“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는 이사님만 믿겠습니다.”
“자, 그럼 마누라 앞인데 인상 펴고 밥 먹으러 갑시다.”
황부장은 회장 말마따나 임자 제대로 만난 격이다. 물론 두 사람이 생각하는 입장은 전혀 다르겠지만 어쨌든 황부장은 허둥지둥 강주의 뒤를 쫓고 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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