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회 조직원들의 숙식을 민한건설의 민한구 사장에게 부탁했고, 송화 송마담에게 가서 흑사회 조직원들에게 술을 사주라는 대화 내용! 볼펜으로 좌판을 두들기는 강민우는 광주에 다시 한 번 내려 가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컴퓨터 앞에서 일어선 강민우는 거실로 나갔다. 주방에 있던 진씨 할머니가 화채를 만들어 가지고 나온다.
“애기야! 어디 있니? 화채 먹어라.”
“........!”
진씨 할머니는 이진아를 애기라고 호칭한다. 강민우가 소파에 앉고 진씨 할머니가 소파 앞의 탁자위에 화채가 담긴 그릇을 내려놓는다. 이북에서 월남하여 풍파를 겪으며 혼자 살아온 진씨 할머니는 이제 식구나 다름없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멕시코에서 열린 청소년 축구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한 성과를 자축하고 있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던 이진아가 반바지 차림으로 건넌방에서 깡충거리며 튀어나온다. 그리고 한동안 탁자에 놓인 화채를 한동안 내려다본다. 화채를 먹어야 되는지 망설이면서 포크를 들어 화채의 과일을 찍어 먹는 강민우를 쳐다본다. 그리고 강민우 무릎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수저로 화채를 떠먹기 시작한다. 그녀를 보고 있던 진씨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흐른다.
“애구! 오라버니 다치겠다.”
“하하.........! 할머니도 앉아서 드세요.”
“난 따로 있어요. 어여들 들어요.”
강민우는 이진아의 돌출 행동에 습관이 돼서 그저 너털웃음을 흘릴 뿐이다. 관절이 안 좋다는 진씨 할머니가 다리를 절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강민우는 진씨 할머니에게 이진아와의 관계를 말하지도 않았다. 진씨 할머니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다만 강민우는 부모형제가 없어 외사촌동생을 데리고 있다고 했을 뿐이다.
진씨 할머니가 작은 그릇을 가지고 와서 화채를 옮겨 담아 이진아에게 주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다. 화채 그릇을 들고 국물을 마신 이진아가 종알거린다.
“오빠! 나, 체르니 50번 친다.”
“오! 그래.”
“그리고 태권도 2단 승단 합격했어.”
“대단한데. 열심히 해.”
“그런데 나, 태권도 그만하고, 합기도 배울래.”
“그냥 계속하지........”
“싫어! 합기도 배울래.”
“진아가 좋을 대로 해.”
“그리고.......! 자동차 운전면허 딸 거야.”
“욕심도 많네. 진아가 하고 싶다면 해야지.”
피아노에 대해서 잘 모르기에 강민우는 체르니50번을 친다는 이진아의 실력을 잘 모른다. 건성으로 대답하지만 태권도 2단에 승단했다는 말이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합기도와 운전면허를 따고 싶다는 이진아가 일상생활에 적극적인 것 같아 흐뭇한 생각이 든다. 강민우의 무릎을 깔고 앉은 이진아 자신도 자랑스러운지 엉덩이를 들썩인다.
화채속의 과일을 포크로 찍어 먹던 강민우는 급히 숨을 들이킨다. 이진아의 엉덩이가 자신의 하복부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강민우는 긴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그녀의 목덜미와 깊이 파인 티셔츠 사이 매끄러운 살갗에서 풍기는 싱그러움에 취할 것 같다. ‘음~!’ 강민우는 운동복 속의 남성이 자신도 모르게 불끈거리는 것을 의식한다.
당혹스런 강민우가 그녀를 슬며시 밀어내고 일어나 옆에 있는 흔들의자에 옮겨 앉는다. 소파로 밀려나 앉은 이진아가 강민우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웃음을 흘리고 일어나더니 몸을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강민우를 바라보고 앙증맞은 몸짓을 하던 그녀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며 강민우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다리를 벌리고 강민우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는다.
“나, 춤 잘 추지?”
“음.......! 음, 그래.”
얼굴이 맞닿을 듯이 가까이서 생글거리는 깜찍한 이진아의 표정에 강민우는 당혹스러워 한다. 다리를 벌리고 있는 이진아의 허벅지 사이와 강민우의 하복부가 잇닿아 있었다. 강민우는 이진아의 허벅지 사이에 잇닿아 전해오는 감촉을 느낀다. 바지속의 남성이 꿈틀거리며 그녀의 벌어진 허벅지 사이를 쿡쿡 찌르는 것만 같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강민우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강민우의 일그러진 표정을 빤히 바라보는 이진아는 여전히 생글거린다. 도리어 몸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주저앉으며 바짝 다가앉는다. 이진아는 왠지 강민우가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강민우는 피붙이보다 귀중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언제나 너그럽게 받아주는 그가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면, 자신도 알지 못할 희열을 느낀다.
강민우는 그녀의 정신적인 타격으로 고통스러워하고,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받아 드리는 것에 습관이 되어 있다. 어쩌면 그녀의 돌출행동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진씨 할머니가 힐끔 거리고 그들을 바라본다. 소리 없이 크게 숨을 들이 마신 강민우가 이진아를 밀어내고 일어선다. 강민우에게서 밀려난 이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왜!? 어디가려고?”
“화장실........”
강민우는 시간이 갈수록 이진아에게 흘러나오는 여자의 체취가 강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점점 변해가고 있는 것을 모르는지. 알고 있어도 강민우가 모두 이해하고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오랜 시간을 같이 생활해온 강민우를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세면장으로 들어간 강민우는 심호흡을 한다.
정부종합청사의 9층 소 회의실에는 안기부 해외안보 담당 권익수 차장과 CIA 극동지역 담당 책임자 딘미첼이 마주하고 앉아 회의를 하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 가량 서로의 주관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안기부 직원과 CIA 담당직원이 보좌하고 있다. 그들은 영어로 직접 대화하기도 하고 통역으로 의사 전달을 하였다. 대화가 중단되고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딘미첼은 거드름을 피우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한국 측 안기부가 나설 일이 아니었소. 우리 CIA가 해결할 일을 왜 이렇게 만든 거요?”
“그건 CIA에서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잠복해 있던 CIA 요원이 동양인이 아닌 미국인이기에 흑사회에 노출당한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도청은 안기부가 했습니다. 도청당하고 있는 것을 흑사회가 안 것입니다.”
“도청보다는 이미 흑사회는 CIA 요원이 접근한 것을 먼저 알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CIA 요청이 없으면, 한국 측에서는 앨리스 킴과 흑사회에 접근하지 마시오.”
“그건 국가 간의 안보 문제로 예민한 사항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측에서 흑사회에 접근하기 전에 우리에게 허락을 받기 바랍니다.”
“그러지 말고, 상호의 프레지던트는 우정이 견고해지길 바랍니다. 우리도 적극 협조할 테니 상호협조 합시다.”
권 차장의 말에 딘미첼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미국 정부는 무기 조제회사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다. 딘미첼의 본래 목적은 한국 측에 헬기 공급을 위한 우위권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그러기에 시코르스키를 선정해서 직접 거래했으면 문제가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건 흑사회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하여튼 앞으로 CIA의 의견을 존중하십시오.”
“.........!?”
권익수 차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딘미첼 CIA 극동지역 담당 책임자가 한마디 흘리며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시코르스키는 미국의 헬기 제조회사이다. 딘미첼은 서슴없이 자국의 기업 제품을 구입하지 않은 것을 노골적으로 불쾌하게 여겼다.
딘미첼이 불쑥 권익수 차장에게 악수를 청한다. 권 차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며 딘미첼의 손을 잡아 악수를 한다. 딘미첼은 뒤도 안돌아보고 보좌관을 대동하여 회의 장소를 벗어난다.
국방부에서 추진하던 신형헬기구입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미국 측의 달갑지 않은 시선은 한국정부를 곤경에 빠트렸다. 사회와 정국도 데모와 민심으로 혼란하였다. 예산문제와 비리의혹으로 국방의원들의 반대로 정부에서는 군수물자 조달에도 난항을 거듭한다.
로비스트 앨리스 킴은 국외로 자취를 감추었고, 조달청의 김도식은 체포되어 구속 수사를 받았으나 범죄 사실을 극구 부정하였다. 그렇다고 김도식의 비리를 증명할만한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공직자로서 부도덕한 사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김도식은 면직을 당하였다.
안기부의 지하 사격장에는 요원들이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헤드셋과 보안경을 쓰고 사격연습을 하고 있는 요원은 모두 세 명이다. 그들 중에는 송나희의 모습도 보인다. 전산요원들도 의무적으로 사격연습을 해야만 한다. 표적지를 향해 총구를 겨냥하던 송나희의 시선이 옆에서 사격연습을 하는 요원의 표적지를 향한다.
송나희의 시선이 향한 표적지에는 둔탁한 음향들과 함께 중앙과녁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권총 탄알이 명중된다. 그녀의 옆에서 사격을 하고 있는 사람은 강민우이다. 송나희는 뒤늦게 표적지를 겨냥하여 나머지 탄환 두발을 소비한다. 한발은 중앙을 벗어나고 한발은 정확히 표적지의 중앙 과녁을 꿰뚫는다. 요원들은 각자 자신의 표적지를 거두어 들여 확인을 한다. 사격장을 나온 요원들은 사무요원에게 표적지를 반납한다.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강민우가 송나희에게 넌지시 말한다.
“커피 한잔 할래요?”
“네.......!?”
“휴게실에서 봐요.”
“네!”
안기부의 한적한 휴게실이라고 하지만 여유롭기만 하다. 이따금 가슴에 명찰을 붙인 방문객이나 요원들이 들리는 곳이다. 명찰을 달지 않았으면 서로의 신원에 대해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다. 검은색의 정장을 한 젊은 여자 요원이 창문을 내다보면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휴게실 문이 열리고 송나희가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여자 요원이 뒤돌아본다. 창문에 섰던 여자 요원이 송나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녀는 송나희를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는 전산실 신입요원 유서연이었다. 휴게실 안을 둘러본 송나희가 미소를 띠어 보이면서 유서연에게 다가선다.
“서연인 영점 사격했니?”
“난 아직. 언니는?”
“나, 지금하고 오는 거야.”
“오늘 며칠이지!? 아! 나도 해야겠네.”
“서연인 언제 비번이니?”
“나, 지난주에 엄마한테 다녀오느라고 비번 써먹었어. 언니는?”
강민우가 먼저 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송나희는 창문을 등지고 돌아서서 출입문을 주시했다. 뒤늦게 유서연의 질문이 생각나서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난 지난달도 그냥 넘겼어. 너하고 같이 바람 쏘이러 갈까 했더니. 어머니는 어디 계시는데?”
“대구에.”
“대구가 원래 고향이니?”
“아니.......! 고향은 인천인데, 혼자 사시던 엄마가 재혼해서 대구로 갔어.”
그때 휴게실 문이 열리고 강민우가 들어섰다. 송나희에게 손을 들어 보이려던 강민우가 유서연을 발견하고 민망스러워 들었던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유서연이 안면이 있는 강민우를 향해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했다. 강민우도 고개를 까닥여 답례를 하고 주춤거리다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었다. 강민우를 만나러 왔던 송나희도 유서연을 의식하였다.
“형제들도 어머니하고 있니?”
“아니, 형제들은 없어.”
커피를 뽑아든 강민우가 창가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녀들에게서 한발자국 떨어져 창 문밖을 내다보고 섰다. 송나희를 힐끗 쳐다본 강민우는 유서연이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녀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송나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유서연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무남독녀면 외롭기는 해도 사랑 받겠구나.”
“사랑!? 아무래도, 엄마가 재혼을 잘못했나봐. 엄마가 불쌍해.”
유서연이 어눌한 표정을 지었다. 유서연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젊어서 남편을 잃은 그녀의 어머니는 음식점과 술집을 하면서 그녀를 보살피고 살다가 뒤늦게 남자를 만나서 재혼한 것이다. 갑자기 유서연이 우울해지는 것 같아 송나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어머니가 어디 아프신가!?”
“구속받고 사는 것 같아서. 그 남자 덕분에 안기부에 입사했지만.”
“구속!? 그 분이 안기부에 계시니?”
“아니, 그 남자가 소개해준 권익수 차장 추천서로.”
“권 차장!? 음.......! 어머니가 재혼한 남자가 뭐하시는 분인데, 권 차장님이 추천서를?”
안기부 요원들은 정계에서 숨은 실력자라는 것 이외는 권익수 차장 신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만큼 베일에 쌓여있어 안기부 요원들이 두려워하는 간부였다. 떨어져서 서 있는 강민우가 유서연의 암울한 표정을 힐끔 바라봤다.
“나도 몰라! 항상 집과 창고에서 물건들을 쌓아 두었다가 실어 나르니까. 유통업을 하는 걸로 알아.”
“그런데 왜, 어머니를 구속해?”
“내가 자주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그 남자가 엄마를 바깥출입도 하지 못하게 하고 술 마시면 주사도 심하고, 때로는 구타를 한다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바람까지 피우더니 요즘에는 공공연하게 다른 여자와 살림차려놓고 드나드는 것 같데, 속상해 죽겠어, 언니.”
“진짜 속상하겠다. 괜한 걸 물어봤나보다.......!”
송나희가 애잔한 눈빛을 했다. 유서연이 하이힐 끝으로 바닥을 긁적거렸다. 그리고 우울했던 유서연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생글거리는 미소를 띠었다. 오히려 정색을 하며 송나희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그런데, 언니는 사귀는 남자 없어? 비번 날, 애인하고 데이트하지.”
“애인........!? 있어 보이니?”
“글쎄.......! 있어 보이기도 하고.”
“꼭, 남자가 있어야 되는 거니?”
“그런 건 아니지만.......언니는 남자에게 관심이 없나봐.”
“그런 건만은 아니고........”
송나희는 공연히 강민우를 힐끔 쳐다보며 어색해진다. 유서연도 강민우를 의식하며 송나희의 팔에 손을 얹는다.
“언니는 아직 젊잖아. 요즘 들어 더 예뻐지고, 몸매도 이십대 초반 같잖아. 언니 눈이 높아서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나봐 ”
“너는 사귀고 있는 남자가 마음에 드니?”
“호호~! 글쎄........!”
유서연은 송나희의 질문에 언 듯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여러 남자를 상대해 보았고, 지금도 데이트를 하고 있지만, 믿음이 가는 남자가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어머니가 여러 남자에게 상처를 받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튕기듯이 유서연이 한 걸음 물러섰다.
“언니! 나, 얼른 가서 사격하고 올게.”
송나희의 물음을 얼버무린 유서연은 생글거리면서 휴게실을 나간다. 유서연이 나가고 휴게실 안에는 송나희와 강민우만이 남았다. 그때서야 강민우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송나희 곁으로 다가섰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받아든 송나희가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홍조를 띠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미스 송은?”
“바빠서, 늦게 먹었어요.”
“요즘, 전산실에 일이 많아요?”
“요즘 방송국에서 이산가족 찾기가 한창이잖아요. 자료 요청이 들어와서요.”
“아! 전산실에서 그런 일도 하나!”
홍조를 띠우는 송나희의 볼에 보조개가 드리워졌다. 송나희는 양손으로 종이컵을 쥐고 한 모금 마셨다. 강민우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남경식이 말했던 광주의 민한 건설 민한구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 전산실에 근무하는 정기춘이나 송나희의 도움이 필요했었다. 국내기업 중에는 중앙정보부나 안전기획부의 협력기업이 다분히 있었다. 중정시절에 관련이 있던 민한건설이 아직도 안기부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는 상태이다.
그렇다고 강민우가 단순히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서 송나희를 만나자고 한 것만은 아니었다. 송나희에게 이성적인 감정도 느끼고 있었다. 강민우는 어떤 말로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할지 망설였다. 송나희도 강민우에게 관심과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위층에서 신경 쓰나 봐요.”
“아~!”
강민우가 커피를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송나희는 지금까지 주로 점퍼차림의 강민우 모습을 봐왔다. 말끔하게 양복을 걸친 강민우의 핸섬한 모습에 또 다른 감정에 젖는다. 강민우도 검은 정장에 흰 셔츠를 걸친 송나희의 자태에 매력을 느꼈다. 시선을 마주한 그들은 서로 호감이 깃든 미소를 교환한다. 송나희의 눈치를 살피던 강민우가 넌지시 물었다.
“혹시, 정보문서 중에 광주지역 기업체에 대한 자료가 있어요?”
“무슨 기업인데요?”
“민한건설이라고 중정시절에는 협력업체인 모양인데.......”
“민한건설.......!? 어디서 듣던 이름인데, 왜요!?”
“음.......! 사실은 개인적인 일인데.”
“무슨.......!?”
“돌아가신 어머님과 관련된 것인데.......”
“그럼, 선배님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과 관련이.......!?”
“흠.......! 사적인 일을 미스 송한테 부탁해도 되는건지.......”
“염려마세요! 지금 필요하세요?”
“그럴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여기 있을 건가요?”
“옥상에서 기다릴게요.”
“그럼.......!”
잠시 망설이던 송나희가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넣는다. 그녀는 자신을 지프차로 집까지 태워주던 날을 떠올렸다. 강민우의 입술이 다가와서 키스라도 할 것 같아 당혹스러웠던 순간을 떠올리고 얼굴을 붉혔다. 그때 만약 그가 키스를 했다하여도 그녀는 받아 주었을 것 같았다. 혼자 생각에 쑥스러운 그녀는 돌아서서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강민우가 말한 민한건설을 읊조리던 송나희는 문득 떠오르는 정보가 생각났다. 걷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던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옥상으로 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던 강민우와 부딪친 것이다. 서로 부둥켜안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잠시지만 엉겁결에 서로의 허리를 껴안고 있었다. 송나희는 휴게실 안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당황스런 표정으로 강민우에게서 한발 뒤로 물러선 송나희가 말을 더듬었다.
“새, 생각이 나서요.”
“뭔데.......!?”
“광주지부에서 올라온 정보 중에. 고정간첩과 접선 용의자 리스트가 있는데 민한이라는 기업체 이름을 본 것 같아요.”
“음.......!? 그래요. 하여튼 기다려도 되죠?”
“네!”
“그리고, 혹시 중정시절 요원들 신상정보를 알 수 있나요?”
“누군데요?”
“최태웅이나........ 남경식.”
“최태웅......! 남경식!? 알아볼게요.”
“...........”
고개를 끄덕인 송나희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서 입구로 향한다. 최태웅과 남경식의 이름을 읊조리며 걸음을 옮기는 송나희는 강민우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의식한다. 강민우는 걸음을 옮기는 송나희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스커트 위로 들어나는 송나희의 자태가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강민우는 옅은 미소를 흘린다. 강민우를 의식한 송나희는 공연히 손을 뒤로하여 둔부를 가리고 바쁘게 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 나선다.---------------
“애기야! 어디 있니? 화채 먹어라.”
“........!”
진씨 할머니는 이진아를 애기라고 호칭한다. 강민우가 소파에 앉고 진씨 할머니가 소파 앞의 탁자위에 화채가 담긴 그릇을 내려놓는다. 이북에서 월남하여 풍파를 겪으며 혼자 살아온 진씨 할머니는 이제 식구나 다름없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멕시코에서 열린 청소년 축구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한 성과를 자축하고 있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던 이진아가 반바지 차림으로 건넌방에서 깡충거리며 튀어나온다. 그리고 한동안 탁자에 놓인 화채를 한동안 내려다본다. 화채를 먹어야 되는지 망설이면서 포크를 들어 화채의 과일을 찍어 먹는 강민우를 쳐다본다. 그리고 강민우 무릎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수저로 화채를 떠먹기 시작한다. 그녀를 보고 있던 진씨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흐른다.
“애구! 오라버니 다치겠다.”
“하하.........! 할머니도 앉아서 드세요.”
“난 따로 있어요. 어여들 들어요.”
강민우는 이진아의 돌출 행동에 습관이 돼서 그저 너털웃음을 흘릴 뿐이다. 관절이 안 좋다는 진씨 할머니가 다리를 절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강민우는 진씨 할머니에게 이진아와의 관계를 말하지도 않았다. 진씨 할머니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다만 강민우는 부모형제가 없어 외사촌동생을 데리고 있다고 했을 뿐이다.
진씨 할머니가 작은 그릇을 가지고 와서 화채를 옮겨 담아 이진아에게 주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다. 화채 그릇을 들고 국물을 마신 이진아가 종알거린다.
“오빠! 나, 체르니 50번 친다.”
“오! 그래.”
“그리고 태권도 2단 승단 합격했어.”
“대단한데. 열심히 해.”
“그런데 나, 태권도 그만하고, 합기도 배울래.”
“그냥 계속하지........”
“싫어! 합기도 배울래.”
“진아가 좋을 대로 해.”
“그리고.......! 자동차 운전면허 딸 거야.”
“욕심도 많네. 진아가 하고 싶다면 해야지.”
피아노에 대해서 잘 모르기에 강민우는 체르니50번을 친다는 이진아의 실력을 잘 모른다. 건성으로 대답하지만 태권도 2단에 승단했다는 말이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합기도와 운전면허를 따고 싶다는 이진아가 일상생활에 적극적인 것 같아 흐뭇한 생각이 든다. 강민우의 무릎을 깔고 앉은 이진아 자신도 자랑스러운지 엉덩이를 들썩인다.
화채속의 과일을 포크로 찍어 먹던 강민우는 급히 숨을 들이킨다. 이진아의 엉덩이가 자신의 하복부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강민우는 긴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그녀의 목덜미와 깊이 파인 티셔츠 사이 매끄러운 살갗에서 풍기는 싱그러움에 취할 것 같다. ‘음~!’ 강민우는 운동복 속의 남성이 자신도 모르게 불끈거리는 것을 의식한다.
당혹스런 강민우가 그녀를 슬며시 밀어내고 일어나 옆에 있는 흔들의자에 옮겨 앉는다. 소파로 밀려나 앉은 이진아가 강민우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웃음을 흘리고 일어나더니 몸을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강민우를 바라보고 앙증맞은 몸짓을 하던 그녀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며 강민우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다리를 벌리고 강민우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는다.
“나, 춤 잘 추지?”
“음.......! 음, 그래.”
얼굴이 맞닿을 듯이 가까이서 생글거리는 깜찍한 이진아의 표정에 강민우는 당혹스러워 한다. 다리를 벌리고 있는 이진아의 허벅지 사이와 강민우의 하복부가 잇닿아 있었다. 강민우는 이진아의 허벅지 사이에 잇닿아 전해오는 감촉을 느낀다. 바지속의 남성이 꿈틀거리며 그녀의 벌어진 허벅지 사이를 쿡쿡 찌르는 것만 같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강민우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강민우의 일그러진 표정을 빤히 바라보는 이진아는 여전히 생글거린다. 도리어 몸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주저앉으며 바짝 다가앉는다. 이진아는 왠지 강민우가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강민우는 피붙이보다 귀중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언제나 너그럽게 받아주는 그가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면, 자신도 알지 못할 희열을 느낀다.
강민우는 그녀의 정신적인 타격으로 고통스러워하고,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받아 드리는 것에 습관이 되어 있다. 어쩌면 그녀의 돌출행동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진씨 할머니가 힐끔 거리고 그들을 바라본다. 소리 없이 크게 숨을 들이 마신 강민우가 이진아를 밀어내고 일어선다. 강민우에게서 밀려난 이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왜!? 어디가려고?”
“화장실........”
강민우는 시간이 갈수록 이진아에게 흘러나오는 여자의 체취가 강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점점 변해가고 있는 것을 모르는지. 알고 있어도 강민우가 모두 이해하고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오랜 시간을 같이 생활해온 강민우를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세면장으로 들어간 강민우는 심호흡을 한다.
정부종합청사의 9층 소 회의실에는 안기부 해외안보 담당 권익수 차장과 CIA 극동지역 담당 책임자 딘미첼이 마주하고 앉아 회의를 하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 가량 서로의 주관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안기부 직원과 CIA 담당직원이 보좌하고 있다. 그들은 영어로 직접 대화하기도 하고 통역으로 의사 전달을 하였다. 대화가 중단되고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딘미첼은 거드름을 피우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한국 측 안기부가 나설 일이 아니었소. 우리 CIA가 해결할 일을 왜 이렇게 만든 거요?”
“그건 CIA에서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잠복해 있던 CIA 요원이 동양인이 아닌 미국인이기에 흑사회에 노출당한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도청은 안기부가 했습니다. 도청당하고 있는 것을 흑사회가 안 것입니다.”
“도청보다는 이미 흑사회는 CIA 요원이 접근한 것을 먼저 알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CIA 요청이 없으면, 한국 측에서는 앨리스 킴과 흑사회에 접근하지 마시오.”
“그건 국가 간의 안보 문제로 예민한 사항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측에서 흑사회에 접근하기 전에 우리에게 허락을 받기 바랍니다.”
“그러지 말고, 상호의 프레지던트는 우정이 견고해지길 바랍니다. 우리도 적극 협조할 테니 상호협조 합시다.”
권 차장의 말에 딘미첼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미국 정부는 무기 조제회사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다. 딘미첼의 본래 목적은 한국 측에 헬기 공급을 위한 우위권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그러기에 시코르스키를 선정해서 직접 거래했으면 문제가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건 흑사회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하여튼 앞으로 CIA의 의견을 존중하십시오.”
“.........!?”
권익수 차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딘미첼 CIA 극동지역 담당 책임자가 한마디 흘리며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시코르스키는 미국의 헬기 제조회사이다. 딘미첼은 서슴없이 자국의 기업 제품을 구입하지 않은 것을 노골적으로 불쾌하게 여겼다.
딘미첼이 불쑥 권익수 차장에게 악수를 청한다. 권 차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며 딘미첼의 손을 잡아 악수를 한다. 딘미첼은 뒤도 안돌아보고 보좌관을 대동하여 회의 장소를 벗어난다.
국방부에서 추진하던 신형헬기구입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미국 측의 달갑지 않은 시선은 한국정부를 곤경에 빠트렸다. 사회와 정국도 데모와 민심으로 혼란하였다. 예산문제와 비리의혹으로 국방의원들의 반대로 정부에서는 군수물자 조달에도 난항을 거듭한다.
로비스트 앨리스 킴은 국외로 자취를 감추었고, 조달청의 김도식은 체포되어 구속 수사를 받았으나 범죄 사실을 극구 부정하였다. 그렇다고 김도식의 비리를 증명할만한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공직자로서 부도덕한 사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김도식은 면직을 당하였다.
안기부의 지하 사격장에는 요원들이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헤드셋과 보안경을 쓰고 사격연습을 하고 있는 요원은 모두 세 명이다. 그들 중에는 송나희의 모습도 보인다. 전산요원들도 의무적으로 사격연습을 해야만 한다. 표적지를 향해 총구를 겨냥하던 송나희의 시선이 옆에서 사격연습을 하는 요원의 표적지를 향한다.
송나희의 시선이 향한 표적지에는 둔탁한 음향들과 함께 중앙과녁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권총 탄알이 명중된다. 그녀의 옆에서 사격을 하고 있는 사람은 강민우이다. 송나희는 뒤늦게 표적지를 겨냥하여 나머지 탄환 두발을 소비한다. 한발은 중앙을 벗어나고 한발은 정확히 표적지의 중앙 과녁을 꿰뚫는다. 요원들은 각자 자신의 표적지를 거두어 들여 확인을 한다. 사격장을 나온 요원들은 사무요원에게 표적지를 반납한다.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강민우가 송나희에게 넌지시 말한다.
“커피 한잔 할래요?”
“네.......!?”
“휴게실에서 봐요.”
“네!”
안기부의 한적한 휴게실이라고 하지만 여유롭기만 하다. 이따금 가슴에 명찰을 붙인 방문객이나 요원들이 들리는 곳이다. 명찰을 달지 않았으면 서로의 신원에 대해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다. 검은색의 정장을 한 젊은 여자 요원이 창문을 내다보면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휴게실 문이 열리고 송나희가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여자 요원이 뒤돌아본다. 창문에 섰던 여자 요원이 송나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녀는 송나희를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는 전산실 신입요원 유서연이었다. 휴게실 안을 둘러본 송나희가 미소를 띠어 보이면서 유서연에게 다가선다.
“서연인 영점 사격했니?”
“난 아직. 언니는?”
“나, 지금하고 오는 거야.”
“오늘 며칠이지!? 아! 나도 해야겠네.”
“서연인 언제 비번이니?”
“나, 지난주에 엄마한테 다녀오느라고 비번 써먹었어. 언니는?”
강민우가 먼저 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송나희는 창문을 등지고 돌아서서 출입문을 주시했다. 뒤늦게 유서연의 질문이 생각나서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난 지난달도 그냥 넘겼어. 너하고 같이 바람 쏘이러 갈까 했더니. 어머니는 어디 계시는데?”
“대구에.”
“대구가 원래 고향이니?”
“아니.......! 고향은 인천인데, 혼자 사시던 엄마가 재혼해서 대구로 갔어.”
그때 휴게실 문이 열리고 강민우가 들어섰다. 송나희에게 손을 들어 보이려던 강민우가 유서연을 발견하고 민망스러워 들었던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유서연이 안면이 있는 강민우를 향해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했다. 강민우도 고개를 까닥여 답례를 하고 주춤거리다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었다. 강민우를 만나러 왔던 송나희도 유서연을 의식하였다.
“형제들도 어머니하고 있니?”
“아니, 형제들은 없어.”
커피를 뽑아든 강민우가 창가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녀들에게서 한발자국 떨어져 창 문밖을 내다보고 섰다. 송나희를 힐끗 쳐다본 강민우는 유서연이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녀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송나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유서연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무남독녀면 외롭기는 해도 사랑 받겠구나.”
“사랑!? 아무래도, 엄마가 재혼을 잘못했나봐. 엄마가 불쌍해.”
유서연이 어눌한 표정을 지었다. 유서연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젊어서 남편을 잃은 그녀의 어머니는 음식점과 술집을 하면서 그녀를 보살피고 살다가 뒤늦게 남자를 만나서 재혼한 것이다. 갑자기 유서연이 우울해지는 것 같아 송나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어머니가 어디 아프신가!?”
“구속받고 사는 것 같아서. 그 남자 덕분에 안기부에 입사했지만.”
“구속!? 그 분이 안기부에 계시니?”
“아니, 그 남자가 소개해준 권익수 차장 추천서로.”
“권 차장!? 음.......! 어머니가 재혼한 남자가 뭐하시는 분인데, 권 차장님이 추천서를?”
안기부 요원들은 정계에서 숨은 실력자라는 것 이외는 권익수 차장 신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만큼 베일에 쌓여있어 안기부 요원들이 두려워하는 간부였다. 떨어져서 서 있는 강민우가 유서연의 암울한 표정을 힐끔 바라봤다.
“나도 몰라! 항상 집과 창고에서 물건들을 쌓아 두었다가 실어 나르니까. 유통업을 하는 걸로 알아.”
“그런데 왜, 어머니를 구속해?”
“내가 자주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그 남자가 엄마를 바깥출입도 하지 못하게 하고 술 마시면 주사도 심하고, 때로는 구타를 한다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바람까지 피우더니 요즘에는 공공연하게 다른 여자와 살림차려놓고 드나드는 것 같데, 속상해 죽겠어, 언니.”
“진짜 속상하겠다. 괜한 걸 물어봤나보다.......!”
송나희가 애잔한 눈빛을 했다. 유서연이 하이힐 끝으로 바닥을 긁적거렸다. 그리고 우울했던 유서연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생글거리는 미소를 띠었다. 오히려 정색을 하며 송나희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그런데, 언니는 사귀는 남자 없어? 비번 날, 애인하고 데이트하지.”
“애인........!? 있어 보이니?”
“글쎄.......! 있어 보이기도 하고.”
“꼭, 남자가 있어야 되는 거니?”
“그런 건 아니지만.......언니는 남자에게 관심이 없나봐.”
“그런 건만은 아니고........”
송나희는 공연히 강민우를 힐끔 쳐다보며 어색해진다. 유서연도 강민우를 의식하며 송나희의 팔에 손을 얹는다.
“언니는 아직 젊잖아. 요즘 들어 더 예뻐지고, 몸매도 이십대 초반 같잖아. 언니 눈이 높아서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나봐 ”
“너는 사귀고 있는 남자가 마음에 드니?”
“호호~! 글쎄........!”
유서연은 송나희의 질문에 언 듯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여러 남자를 상대해 보았고, 지금도 데이트를 하고 있지만, 믿음이 가는 남자가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어머니가 여러 남자에게 상처를 받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튕기듯이 유서연이 한 걸음 물러섰다.
“언니! 나, 얼른 가서 사격하고 올게.”
송나희의 물음을 얼버무린 유서연은 생글거리면서 휴게실을 나간다. 유서연이 나가고 휴게실 안에는 송나희와 강민우만이 남았다. 그때서야 강민우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송나희 곁으로 다가섰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받아든 송나희가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홍조를 띠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미스 송은?”
“바빠서, 늦게 먹었어요.”
“요즘, 전산실에 일이 많아요?”
“요즘 방송국에서 이산가족 찾기가 한창이잖아요. 자료 요청이 들어와서요.”
“아! 전산실에서 그런 일도 하나!”
홍조를 띠우는 송나희의 볼에 보조개가 드리워졌다. 송나희는 양손으로 종이컵을 쥐고 한 모금 마셨다. 강민우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남경식이 말했던 광주의 민한 건설 민한구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 전산실에 근무하는 정기춘이나 송나희의 도움이 필요했었다. 국내기업 중에는 중앙정보부나 안전기획부의 협력기업이 다분히 있었다. 중정시절에 관련이 있던 민한건설이 아직도 안기부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는 상태이다.
그렇다고 강민우가 단순히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서 송나희를 만나자고 한 것만은 아니었다. 송나희에게 이성적인 감정도 느끼고 있었다. 강민우는 어떤 말로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할지 망설였다. 송나희도 강민우에게 관심과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위층에서 신경 쓰나 봐요.”
“아~!”
강민우가 커피를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송나희는 지금까지 주로 점퍼차림의 강민우 모습을 봐왔다. 말끔하게 양복을 걸친 강민우의 핸섬한 모습에 또 다른 감정에 젖는다. 강민우도 검은 정장에 흰 셔츠를 걸친 송나희의 자태에 매력을 느꼈다. 시선을 마주한 그들은 서로 호감이 깃든 미소를 교환한다. 송나희의 눈치를 살피던 강민우가 넌지시 물었다.
“혹시, 정보문서 중에 광주지역 기업체에 대한 자료가 있어요?”
“무슨 기업인데요?”
“민한건설이라고 중정시절에는 협력업체인 모양인데.......”
“민한건설.......!? 어디서 듣던 이름인데, 왜요!?”
“음.......! 사실은 개인적인 일인데.”
“무슨.......!?”
“돌아가신 어머님과 관련된 것인데.......”
“그럼, 선배님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과 관련이.......!?”
“흠.......! 사적인 일을 미스 송한테 부탁해도 되는건지.......”
“염려마세요! 지금 필요하세요?”
“그럴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여기 있을 건가요?”
“옥상에서 기다릴게요.”
“그럼.......!”
잠시 망설이던 송나희가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넣는다. 그녀는 자신을 지프차로 집까지 태워주던 날을 떠올렸다. 강민우의 입술이 다가와서 키스라도 할 것 같아 당혹스러웠던 순간을 떠올리고 얼굴을 붉혔다. 그때 만약 그가 키스를 했다하여도 그녀는 받아 주었을 것 같았다. 혼자 생각에 쑥스러운 그녀는 돌아서서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강민우가 말한 민한건설을 읊조리던 송나희는 문득 떠오르는 정보가 생각났다. 걷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던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옥상으로 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던 강민우와 부딪친 것이다. 서로 부둥켜안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잠시지만 엉겁결에 서로의 허리를 껴안고 있었다. 송나희는 휴게실 안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당황스런 표정으로 강민우에게서 한발 뒤로 물러선 송나희가 말을 더듬었다.
“새, 생각이 나서요.”
“뭔데.......!?”
“광주지부에서 올라온 정보 중에. 고정간첩과 접선 용의자 리스트가 있는데 민한이라는 기업체 이름을 본 것 같아요.”
“음.......!? 그래요. 하여튼 기다려도 되죠?”
“네!”
“그리고, 혹시 중정시절 요원들 신상정보를 알 수 있나요?”
“누군데요?”
“최태웅이나........ 남경식.”
“최태웅......! 남경식!? 알아볼게요.”
“...........”
고개를 끄덕인 송나희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서 입구로 향한다. 최태웅과 남경식의 이름을 읊조리며 걸음을 옮기는 송나희는 강민우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의식한다. 강민우는 걸음을 옮기는 송나희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스커트 위로 들어나는 송나희의 자태가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강민우는 옅은 미소를 흘린다. 강민우를 의식한 송나희는 공연히 손을 뒤로하여 둔부를 가리고 바쁘게 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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