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넌방에서 이진아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피아노 소리가 멈추어지고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던 강민우가 고개를 들어 건넌방 입구를 바라본다.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방을 나오는 이진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짧은 반바지차림으로 방에서 나온 이진아가 오디오 스위치를 누르더니 소파로 다가와 강민우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오디오에서는 오페라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요즘 와서 지진아가 즐겨듣는 ‘나부코’ 합창곡이다. 나부코는 성서에 나오는 느부가넷살왕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느부가넷살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유대인들을 굴복시키고, 그와 그의 두 딸과 유다인 들과 둘째 딸의 유다인 애인사이에서 일어나는 얘기를 다루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압정 하에 있었던 밀라노 사람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던 오페라인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이진아가 피아노에 취미를 붙이고 음악을 즐겨 듣기 시작한 것을 강민우는 다행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유별나게 이진아가 나부코를 좋아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오디오를 켜놓고 이진아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흔들다가 강민우의 무릎을 베고 벌렁 눕는다. 이진아는 이제 어엿한 여고생으로 이학년이 되었다. 아직도 앳되어 보이는 미모이지만, 아담한 몸매가 점점 성숙해가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행동은 변함없다. 그녀는 강민우의 팔을 당겨 자신의 목을 감싸게 한다.
강민우는 이진아의 스스럼없는 행동을 받아드리는데 익숙해졌고, 피붙이 보다 더한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소녀티를 벗고 성숙해질수록 내심 난처해지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이진아에게서 성숙한 여자의 체취가 풍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진아는 여전히 강민우에게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보인다.
이진아는 혼자 있는 시간을 싫어한다. 그렇다고 이진아를 보살피고만 있을 수없는 강민우였다. 정보 보안업무를 다루는 안기부 요원의 근무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늦은 밤에 때로는 잠이 들었다가도 호출을 받으면 부여받은 업무를 수행해야한다. 한가한 시간도 있지만 돌발적인 작전으로 며칠을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요즘에 강민우는 국방부 군수물자 조달에 대한 비리 의혹을 수사하는 작전에 참여하고 있다. 국방부에서는 신형헬기를 수입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었다. 그런데 수입절차 과정에서 수입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비리의혹이 들어났다. 안기부에서는 오래전부터 은밀히 조사하고 있던 사건인데, 단서가 포착되어 ‘점프’라는 작전 업무에 들어 간 것이다.
특히, 신형헬기프로젝트와 관련되어 있는 로비스트 앨리스 킴이라는 여자를 통하여 군사정보가 빠져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CIA에서도 중요인물로 감시하고 있는 앨리스 킴은 미국국적을 가진 한국인2세의 국제 로비스트였다. 강민우의 관심을 끈 것은 광주에 머물고 있는 앨리스 킴이 홍콩의 삼합회 흑사회와 밀수에도 관련되어있다는 정보였다. 강민우는 겸사겸사해서 최태웅을 비롯한 흑사회 조직에 대한 정보를 탐문해 보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 떨어져 있기를 싫어하는 이진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업무상 집으로 귀가하지 못하거나 늦을 경우에 그때마다 이해를 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이진아는 강민우에게 의지하려는 집착을 한다. 강민우가 집에 있는 시간이면 어린아이처럼 졸졸 쫓아다니며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한다.
이진아에게 강민우는 부모형제를 대신해서 단 하나의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다. 강민우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이진아가 올려다본다. 그녀가 팔을 두르고 있는 강민우의 목에 걸린 가느다란 목걸이 줄이 흔들린다. 목걸이에는 페넌트 대신 반지가 걸려 있다.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강민우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마지막 숨을 거두던 어머니의 참혹한 모습을 떠올린다. 신문을 접어놓은 강민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아야! 내가 무슨 일하고 있는지 알지?”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라며, 안기부 다니잖아.”
“며칠간 집을 비워야 하는데, 어쩌지?”
“또......!? 싫어!”
한마디로 거절한 이진아가 치켜 뜬 눈을 하얗게 흘긴다. 그리고 손에 들고 빨고 있던 막대사탕을 불쑥 강민우의 입속으로 집어넣어 준다. 성숙해가는 여고생이건만 아직도 이진아의 어린아이 같은 투정은 여전하다. 강민우는 그녀가 입에 넣어준 사탕을 물고 한숨을 내쉰다. 강짜를 부리는 이진아의 모습에 지치기도 하지만, 사랑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진아가 맹목적으로 투정만 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진아는 내심 치욕적인 기억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강민우는 자신이 작성하고 있는 노트나 컴퓨터파일을 이진아가 몇 번인가 뒤적이는 것을 목격했다. 강민우가 작성하고 있는 노트나 컴퓨터 파일은 최태웅과 남경식, 그리고 흑사회에 관해 수집한 정보들이다. 이진아가 그들에 관한 정보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강민우는 이진아의 뺨을 어루만지며 이해를 시키려 했다.
“우리가 왜 만나게 되었는지 알고 있지?”
“........!?”
“진아나, 나도, 그 놈들을 잊을 수 없잖아!?”
“........”
“그놈들 찾으러 다니는 거니까. 이해를 해야지.”
“그럼.......또, 나 혼자 어떡해?”
대답 없이 누워있던 이진아가 발딱 일어나 앉아 강민우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이진아도 치욕적인 과거를 떠올리기 싫지만, 고통을 안겼던 놈들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하다. 그러기에 놈들을 추적하는 강민우를 붙잡고 싶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다. 강민우와 이진아는 서로 사무친 원한에 대한 마음을 이해하는 동질감일 수밖에 없다.
“낮에 살림 거들어주는 진 씨 할머니에게 부탁해 놨어. 아주 우리 집에 와서 생활하시라고. 어차피 할머니도 단칸방에서 혼자 살고 계시잖아.”
“그럼.......! 빨리 오고, 전화 자주 해야 돼?”
“음, 알았어. 학교 빠지면 안 돼!”
“응..........”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 이진아의 표정은 불안해 보였다. 강민우를 올려다본 이진아가 강민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는다. 안타까운 마음에 강민우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얼굴을 묻었던 그녀가 다시 강민우의 무릎을 베고 반듯이 눕는다. 그리고 강민우의 팔을 당겨 가슴위에 얹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종알거린다.
“나, 혼자 있기 정말 싫은데........”
“........!?”
강민우는 푸념을 하는 이진아를 내려다본다. 제법 부풀어 오른 젖가슴, 헐렁한 반바지 사이로 들어나는 매끈하게 윤기 흐르는 그녀의 피부를 내려다보던 강민우가 시선을 돌렸다. 강민우는 나이가 서른인 혈기가 왕성한 남자이다. 강민우나 이진아는 같은 고통과 아픔을 겪었고, 그 쓰라린 추억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강민우가 나이 어린 소녀, 이진아를 애잔하게 느껴 어린애기 다루듯 목욕까지도 해주면서 돌보았던 것은 단순히 동질감 때문이었다.
애틋하고 가련하게만 보였던 이진아가 숙성하면서 여자의 체취를 느끼게 하는 것은 본능일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이성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지우려고 강민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원에서 강아지 짓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로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 이진아가 외로워 보여서 강민우가 미군에게 구입해 준 그레이트피레니즈 종의 밍키라는 이름의 강아지였다. 강민우는 이진아의 머리 밑에 쿠션을 베어주고 일어났다. 그녀도 따라서 벌떡 일어난다.
“어디 가는 거야!?”
“밍키가 왜 짖지.......!”
강민우는 주춤하다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은행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만약을 대비하여 강민우는 이진아를 위해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거실로 나와 의아스런 눈빛으로 보는 그녀에게 신용카드를 건네주었다. 신용카드를 받아들고 어리둥절하던 이진아의 눈빛이 반짝인다. 거실 문을 열고나서니 이진아도 깡충거리며 뒤따른다. 강민우가 집에 있으면 이진아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한다. 밍키는 철책 대문 사이로 들여다보고 있는 시커먼 동네 개를 향해 짖고 있었다.
뒤따라 나온 이진아가 돌멩이를 집어 들고 철책사이로 보이는 개를 향해 던진다. 정통으로 돌에 맞은 검둥개가 깨갱거리며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고 도망간다. 강민우는 연약하게 보이는 이진아의 또 다른 잔인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린다. 하얀 털이 북슬북슬하게 자란 밍키가 꼬리를 흔든다. 이진아가 쪼그리고 안자 밍키를 껴안는다.
“밍키야! 검둥이 또 오면 내가 혼내줄게.”
“그러지 마! 검둥이가 밍키하고 친구 되고 싶은 게지.”
“싫어!”
“........!?”
강민우는 밍키를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는 이진아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아픈 상처를 잊어버리고 아름답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다. 강민우는 천천히 정원을 지나 집 뒤로 돌아갔다. 이진아도 강민우의 팔을 잡고 뒤따라간다. 산 밑의 공간에는 운동기구들과 굵은 나무둥치에 각목을 열십자로 묶어 짚으로 엮은 허수아비가 있다. 강민우가 시간 날 때마다 무술과 몸을 단련하는 곳이다.
운동복 상의를 나뭇가지에 걸고 러닝셔츠 차림이 된 강민우가 팔굽혀펴기를 한 후 허수아비 앞에 선다. 기본형으로 몸에 정기를 불어넣고 특공무술을 시연한다. 몸을 날려 허수아비의 급소를 치고 역회전을 하며 발로차고 공중돌기를 하여 허수아비의 명치를 격파한다. 강민우의 무술은 태권도를 기본으로 하는 특공무술로 스포츠라기보다는 살수에 가깝다.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이진아가 강민우의 앞을 가로막고 선다.
“나도 할래!”
“..........!?”
강민우의 앞을 가로막고 선 이진아가 기합소리와 함께 기마자세를 취한다. 이어서 태권도 고려품세를 시연하는 이진아를 보고 강민우는 흐뭇한 미소를 흘린다. 이진아가 태권도를 시작한지 5개월이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삼 개월이 지났을 때 승단심사를 보고 검은 띠를 획득했다고 하기에 축하를 해주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의 태권도 시련을 하는 동작을 보고 강민우는 대견스럽게 생각한다. 의외로 이진아의 몸은 유연하고 날렵해 보인다. 웅크리고 앉아 혼자만의 침묵 속에 빠진 이진아의 모습과는 다르게 강인해 보인다. 피아노에 소질 있는 연약한 모습의 이진아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환한 표정으로 강민우가 박수를 쳤다.
“오 호! 진아, 대단한데.......”
“피 잇~! 놀리는 거지?”
혀를 날름내보인 이진아가 대련자세를 하고 허수아비의 어깨를 내려친다. 허수아비를 내려치는 품세로 보아 격파도 가능해보인다. 이진아의 또 다른 모습을 강민우는 대견스럽게 생각한다. 이진아는 강민우가 알게 모르게 태권도를 단련하였다. 우울하고 침체될 때는 피아노를 치거나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태권도 시련으로 땀을 흘리면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한동안 허수아비를 상대로 대련을 하던 이진아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돌아선다. 강민우가 활짝 웃으며 다시 박수를 친다. 미소가 깃든 이진아의 얼굴에 미소와 함께 보조개가 깃들어 보인다. 산등선으로 넘어가는 석양빛이 이진아의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반짝거리게 한다.
거리의 가로수는 짙은 녹색으로 변해가고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더워지고 있다. 강민우는 점퍼차림으로 광주사태의 중심지였던 금남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귀에는 소형 레시버가 꽂혀 있었다. 백화점을 향해 걸어가던 그가 레시버를 손으로 누르며 재빠르게 층계를 오른다. 그의 귀에 꽂은 레시버는 안기부 요원들 간의 통신장비였다.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호출음을 듣고 점퍼 깃에 붙은 단추를 입가로 당겼다. 단추로 위장한 통신 마이크였다.
“여기는 점프대, 점프 넷 응답하라!”
“여기는 점프 넷, 듣고 있다.”
“점프 넷의 위치는?”
“백화점에 들어가는 장미를 추적 중.”
“장미 접선 왕벌이 백화점 커피숍에 나타남. 커피숍에 점프 두 명 대기 중. 점프 넷은 십구 시에 카페로 합류할 것.”
“점프 넷! 접수받음.”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던 강민우는 백화점을 되돌아 나왔다. 장미는 작전대상인 로비스트 앨리스 킴이고 왕벌은 아마도 작전 리스트 선상에 있는 군수품 관련 고위층일 것이다. 다른 요원이 왕벌을 추적하는 임무를 인계받을 것이니 강민우는 카페라는 합류지점으로 가야한다. 카페는 도청을 전담하는 전산팀의 숙소를 말한다.
강민우는 안기부의 NDSS 시절에 엘리트급 행동대원이었다. 정보담당 팀장인 그에게 전산팀을 지휘하라는 지시였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시간은 아직 넉넉하다. 그는 여러 번 광주에 들려 최태웅과 강문식을 탐문을 했었지만 소득이 없었다. 합류할 시간동안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 볼 생각이다.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강민우가 도착한 곳은 과거 속에 묻힌 자신의 옛집이다.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담장너머로 보이는 정원에는 화려한 꽃들이 과거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집 주위를 돌아보던 그의 발걸음이 골목길을 벗어나 야산으로 향한다. 그의 발걸음은 불에 그슬린 천주교 성당 앞에 멈추어 섰다. 처참했던 흔적대신 성당 뒤의 작은 무덤들만이 과거의 참상을 되돌리게 한다.
폐허가 된 고아원 주변을 돌아보던 강민우는 골목길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그는 광주에 몇 번인가 와서 둘러보았던 건물을 떠올린다. 오늘은 이진아를 구출했던 건물 주인을 만나 볼 생각이다. 대로변의 높은 빌딩사이의 5층 건물 앞에 섰다. 과거를 지우듯이 말끔하게 변해있는 건물에는 ‘태성’이라는 모텔 간판이 세워져 있다. 지하층으로 향하는 입구에는 술집 간판이 보인다. 강민우가 모텔로 들어서니 긴 통로 옆의 작은 창구가 열리며 돋보기안경을 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의 얼굴이 들어난다.
“주무시고 가시게요!?”
“건물주인 되십니까?”
“그런데요. 왜 그러시오?”
“확인 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강민우는 안주머니에서 안기부요원 신분증을 꺼내 노인에게 보여 주었다. 신분증을 본 노인이 의아스런 표정을 하고 방문을 열어준다.
“뭘 알아보시게요?”
강민우가 들어선 방안에는 소파와 탁자, 창구에 붙은 책상만이 보인다. 노인은 치고 있던 화투와 담요를 걷어낸다. 노인과 탁자를 마주하고 앉은 강민우가 물었다.
“다른 일에 종사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를테면 공직이라던 지.......”
“나는 오랫동안 이 건물에서 나오는 돈으로 먹고 살았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고. 얼마동안 이 건물을 소유하고 계셨습니까?”
“벌써 십오 년째 되지요.”
“광주사태, 당시에도 여기 사셨겠네요?”
“그렇지요. 광주시민은 누구나 겪은 고통이니까요.”
“그럼, 혹시 5, 18 당일을 기억하십니까?”
“음........! 잊을 수가 없지요. 피로 얼룩진 시민군과 총을 난사하는 군인들, 전쟁터 같은 광주를 떠나야 하는 가도 생각했지요.”
“그 당시, 지하실을 누가 사용했는지도 기억하시고요?”
“아! 물론요. 당구장과 술집으로 세를 줬다가 한동안 비어 있었지요. 그 전날인가.......!며칠만 사용한다기에 빌려 주었었지요. 중앙정보부 신분증을 보여주기에 겁도 났지만, 일주일만 사용한다면서 적지 않은 선금을 내놓기에 승낙했지요.”
“평소에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던가요?”
“아뇨!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요.”
“이름을 기억할 수 있나요?”
“신분증을 잠깐 보여주는데, 눈이 어두워서.......! 일주일 사용한다더니 이틀 사용했나.......!? 하여튼 그 이후 나타나지도 안더라고요.”
“얼굴을 보면 기억하실 수 있나요?”
“차가운 인상에 눈초리가 무서워서 기억나지요, 아! 그러고 보니 작년 겨울인가!? 맞아, 크리스마스 다음날이었지. 우리 모텔에서 하룻밤 자고 간 적이 있었어요.”
“확실한가요?”
“그 사람 인상이 남 달라서 기억해요.”
“모텔에서 묵고 간 날, 특이한 점이 없었나요?”
“특이한........! 것이라면, 남자와 혼혈아처럼 생긴 여자가 같이 왔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여자는 나이가 어리고 무척 앳되어 보이기도하고, 술집여자 같기도 했고.......”
“세 사람이 같은 방을........!?”
“아니, 방은 각자 하나씩 사용했지요. 그런데 중앙정보부 직원이라는 사람은 밤에 나갔는지 아침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후에....... 다시 오지는 않았습니까?”
“그 후에는 본 기억이 없는데요.”
강민우는 골똘히 생각했다. 노인이 말하는 인상착의로 봐서는 남경식이 분명하다. 눈매가 매서운 남경식의 얼굴이 떠오른다. 광주사태이후 종적을 감춘 남경식이 무슨 일로 광주에 나타났었는지 알 수 가 없었다. 최태웅과 남경식의 흔적을 쫓을수록 미로 속을 헤매는 것만 같다. 강민우는 몇 가지 질문을 더하고 모텔을 나왔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려앉는 광주 시내에는 상점 간판과 쇼윈도에는 불빛들이 휘황찬란하다. 강민우는 용봉동 번화가 지나 인접한 고급 주택가 골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 주위를 살피던 강민우는 인쇄소 간판이 달린 3층 건물로 들어섰다. 3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 복도 끝의 사무실문 앞에서 인터폰 벨을 눌렀다. 곧이어 인터폰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누구십니까?”
“점프 넷.”
짤막한 강민우의 대답에 이어서 문이 열린다. 강민우는 빨려 들어가듯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준 남자는 같은 팀의 요원인 홍성식이었다. 점퍼를 걸치고 있는 홍성식은 특전사에서 전역한 젊은 신출내기직원이다. 사무실 안에는 모니터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었다.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던 양복을 걸친 남자가 뒤돌아보며 손을 흔든다.
“아! 왔어? 저녁식사는 했고?”
“응, 너는?”
“미스터 홍하고 옆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했지. 미스터 홍! 커피 한잔 마시지?”
“네! 선배님.”
홍성식이 고개를 꾸벅하고 돌아서서 커피포트가 올려져 있는 휴대용가스레인지 스위치를 튼다. 헤드셋을 쓰고 있는 요원은 강민우와 같이 NDSS에 있던 정기춘이다. NDSS 시절부터 같이 활동하던 정기춘은 뛰어난 전산요원이고, 강민우와 나이가 동갑이어서 절친한 사이였다. 강민우가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정기춘 옆에 다가가 앉았다.
모니터 화면에 나타나는 곳은 호화 빌라의 현관, 거실과 침실, 그리고 주방, 화장실 등이었다. 창문으로 스며 들어오는 불빛 외에는 어둠이 깔린 실내의 광경이다. 단독주택이 아니어서 현관으로 들어오는 다른 가구사람들 모습만 이따금 보이고, 집안을 비치는 모니터에는 정적 속의 고정된 화면만 보인다.
홍성식이 커피를 타가지고 탁자위에 잔을 놀려 놓는다. 몇 모금 마시다가 내려놓은 커피가 식어가고 한 시간이 지나도 모니터 화면은 변동이 없었다.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잡음 외에는 침묵이 흐른다. 시간이 지겹고 노곤함에 졸음이 오기에 강민우는 식은 커피를 들이마셨다. 정기춘도 졸음이 오는지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기대고 하품을 한다. 하품을 하던 정기춘이 불쑥 모니터 앞으로 다가 앉는다.
“왔다! 장미.”
“........!?”
장미라면 앨리스 킴이라는 로비스트 여인이다. 모니터에 나타난 여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강민우는 앨리스 킴의 실물을 처음 본다. 나이는 삼십 가까운 것 같은데, 나이보다 무척 앳되어 보이는 여자이다. 혼혈이지만 동양적인 귀여운 미모를 지니고 있다. 강민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잡지에서 보았던 모델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거실로 들어선 여자가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밝은 전등 불빛아래 나타난 넓은 거실과 방안에는 호화스러운 고급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엘리스 킴을 따라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 안경 낀 중년남자의 모습이 들어났다. 정기춘이 혼잣말을 한다.
“어! 김도식 아냐!?”
“김도식........!? 누구야?”
“조달청 군수물자 담당 과장........”
“........!?”
강민우는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전산부서에 근무하는 정기춘은 이미 조사된 사건 관련 자료를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사건관련이 예상되는 인물들을 알고 있었다. 앨리스 킴이 눈웃음을 치며 김도식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고 침실로 들어간다. 화면을 응시하던 강민우가 탁자위에 놓인 헤드셋을 착용했다.-------
오디오에서는 오페라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요즘 와서 지진아가 즐겨듣는 ‘나부코’ 합창곡이다. 나부코는 성서에 나오는 느부가넷살왕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느부가넷살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유대인들을 굴복시키고, 그와 그의 두 딸과 유다인 들과 둘째 딸의 유다인 애인사이에서 일어나는 얘기를 다루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압정 하에 있었던 밀라노 사람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던 오페라인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이진아가 피아노에 취미를 붙이고 음악을 즐겨 듣기 시작한 것을 강민우는 다행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유별나게 이진아가 나부코를 좋아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오디오를 켜놓고 이진아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흔들다가 강민우의 무릎을 베고 벌렁 눕는다. 이진아는 이제 어엿한 여고생으로 이학년이 되었다. 아직도 앳되어 보이는 미모이지만, 아담한 몸매가 점점 성숙해가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행동은 변함없다. 그녀는 강민우의 팔을 당겨 자신의 목을 감싸게 한다.
강민우는 이진아의 스스럼없는 행동을 받아드리는데 익숙해졌고, 피붙이 보다 더한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소녀티를 벗고 성숙해질수록 내심 난처해지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이진아에게서 성숙한 여자의 체취가 풍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진아는 여전히 강민우에게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보인다.
이진아는 혼자 있는 시간을 싫어한다. 그렇다고 이진아를 보살피고만 있을 수없는 강민우였다. 정보 보안업무를 다루는 안기부 요원의 근무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늦은 밤에 때로는 잠이 들었다가도 호출을 받으면 부여받은 업무를 수행해야한다. 한가한 시간도 있지만 돌발적인 작전으로 며칠을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요즘에 강민우는 국방부 군수물자 조달에 대한 비리 의혹을 수사하는 작전에 참여하고 있다. 국방부에서는 신형헬기를 수입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었다. 그런데 수입절차 과정에서 수입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비리의혹이 들어났다. 안기부에서는 오래전부터 은밀히 조사하고 있던 사건인데, 단서가 포착되어 ‘점프’라는 작전 업무에 들어 간 것이다.
특히, 신형헬기프로젝트와 관련되어 있는 로비스트 앨리스 킴이라는 여자를 통하여 군사정보가 빠져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CIA에서도 중요인물로 감시하고 있는 앨리스 킴은 미국국적을 가진 한국인2세의 국제 로비스트였다. 강민우의 관심을 끈 것은 광주에 머물고 있는 앨리스 킴이 홍콩의 삼합회 흑사회와 밀수에도 관련되어있다는 정보였다. 강민우는 겸사겸사해서 최태웅을 비롯한 흑사회 조직에 대한 정보를 탐문해 보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 떨어져 있기를 싫어하는 이진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업무상 집으로 귀가하지 못하거나 늦을 경우에 그때마다 이해를 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이진아는 강민우에게 의지하려는 집착을 한다. 강민우가 집에 있는 시간이면 어린아이처럼 졸졸 쫓아다니며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한다.
이진아에게 강민우는 부모형제를 대신해서 단 하나의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다. 강민우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이진아가 올려다본다. 그녀가 팔을 두르고 있는 강민우의 목에 걸린 가느다란 목걸이 줄이 흔들린다. 목걸이에는 페넌트 대신 반지가 걸려 있다.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강민우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마지막 숨을 거두던 어머니의 참혹한 모습을 떠올린다. 신문을 접어놓은 강민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아야! 내가 무슨 일하고 있는지 알지?”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라며, 안기부 다니잖아.”
“며칠간 집을 비워야 하는데, 어쩌지?”
“또......!? 싫어!”
한마디로 거절한 이진아가 치켜 뜬 눈을 하얗게 흘긴다. 그리고 손에 들고 빨고 있던 막대사탕을 불쑥 강민우의 입속으로 집어넣어 준다. 성숙해가는 여고생이건만 아직도 이진아의 어린아이 같은 투정은 여전하다. 강민우는 그녀가 입에 넣어준 사탕을 물고 한숨을 내쉰다. 강짜를 부리는 이진아의 모습에 지치기도 하지만, 사랑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진아가 맹목적으로 투정만 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진아는 내심 치욕적인 기억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강민우는 자신이 작성하고 있는 노트나 컴퓨터파일을 이진아가 몇 번인가 뒤적이는 것을 목격했다. 강민우가 작성하고 있는 노트나 컴퓨터 파일은 최태웅과 남경식, 그리고 흑사회에 관해 수집한 정보들이다. 이진아가 그들에 관한 정보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강민우는 이진아의 뺨을 어루만지며 이해를 시키려 했다.
“우리가 왜 만나게 되었는지 알고 있지?”
“........!?”
“진아나, 나도, 그 놈들을 잊을 수 없잖아!?”
“........”
“그놈들 찾으러 다니는 거니까. 이해를 해야지.”
“그럼.......또, 나 혼자 어떡해?”
대답 없이 누워있던 이진아가 발딱 일어나 앉아 강민우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이진아도 치욕적인 과거를 떠올리기 싫지만, 고통을 안겼던 놈들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하다. 그러기에 놈들을 추적하는 강민우를 붙잡고 싶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다. 강민우와 이진아는 서로 사무친 원한에 대한 마음을 이해하는 동질감일 수밖에 없다.
“낮에 살림 거들어주는 진 씨 할머니에게 부탁해 놨어. 아주 우리 집에 와서 생활하시라고. 어차피 할머니도 단칸방에서 혼자 살고 계시잖아.”
“그럼.......! 빨리 오고, 전화 자주 해야 돼?”
“음, 알았어. 학교 빠지면 안 돼!”
“응..........”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 이진아의 표정은 불안해 보였다. 강민우를 올려다본 이진아가 강민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는다. 안타까운 마음에 강민우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얼굴을 묻었던 그녀가 다시 강민우의 무릎을 베고 반듯이 눕는다. 그리고 강민우의 팔을 당겨 가슴위에 얹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종알거린다.
“나, 혼자 있기 정말 싫은데........”
“........!?”
강민우는 푸념을 하는 이진아를 내려다본다. 제법 부풀어 오른 젖가슴, 헐렁한 반바지 사이로 들어나는 매끈하게 윤기 흐르는 그녀의 피부를 내려다보던 강민우가 시선을 돌렸다. 강민우는 나이가 서른인 혈기가 왕성한 남자이다. 강민우나 이진아는 같은 고통과 아픔을 겪었고, 그 쓰라린 추억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강민우가 나이 어린 소녀, 이진아를 애잔하게 느껴 어린애기 다루듯 목욕까지도 해주면서 돌보았던 것은 단순히 동질감 때문이었다.
애틋하고 가련하게만 보였던 이진아가 숙성하면서 여자의 체취를 느끼게 하는 것은 본능일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이성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지우려고 강민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원에서 강아지 짓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로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 이진아가 외로워 보여서 강민우가 미군에게 구입해 준 그레이트피레니즈 종의 밍키라는 이름의 강아지였다. 강민우는 이진아의 머리 밑에 쿠션을 베어주고 일어났다. 그녀도 따라서 벌떡 일어난다.
“어디 가는 거야!?”
“밍키가 왜 짖지.......!”
강민우는 주춤하다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은행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만약을 대비하여 강민우는 이진아를 위해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거실로 나와 의아스런 눈빛으로 보는 그녀에게 신용카드를 건네주었다. 신용카드를 받아들고 어리둥절하던 이진아의 눈빛이 반짝인다. 거실 문을 열고나서니 이진아도 깡충거리며 뒤따른다. 강민우가 집에 있으면 이진아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한다. 밍키는 철책 대문 사이로 들여다보고 있는 시커먼 동네 개를 향해 짖고 있었다.
뒤따라 나온 이진아가 돌멩이를 집어 들고 철책사이로 보이는 개를 향해 던진다. 정통으로 돌에 맞은 검둥개가 깨갱거리며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고 도망간다. 강민우는 연약하게 보이는 이진아의 또 다른 잔인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린다. 하얀 털이 북슬북슬하게 자란 밍키가 꼬리를 흔든다. 이진아가 쪼그리고 안자 밍키를 껴안는다.
“밍키야! 검둥이 또 오면 내가 혼내줄게.”
“그러지 마! 검둥이가 밍키하고 친구 되고 싶은 게지.”
“싫어!”
“........!?”
강민우는 밍키를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는 이진아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아픈 상처를 잊어버리고 아름답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다. 강민우는 천천히 정원을 지나 집 뒤로 돌아갔다. 이진아도 강민우의 팔을 잡고 뒤따라간다. 산 밑의 공간에는 운동기구들과 굵은 나무둥치에 각목을 열십자로 묶어 짚으로 엮은 허수아비가 있다. 강민우가 시간 날 때마다 무술과 몸을 단련하는 곳이다.
운동복 상의를 나뭇가지에 걸고 러닝셔츠 차림이 된 강민우가 팔굽혀펴기를 한 후 허수아비 앞에 선다. 기본형으로 몸에 정기를 불어넣고 특공무술을 시연한다. 몸을 날려 허수아비의 급소를 치고 역회전을 하며 발로차고 공중돌기를 하여 허수아비의 명치를 격파한다. 강민우의 무술은 태권도를 기본으로 하는 특공무술로 스포츠라기보다는 살수에 가깝다.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이진아가 강민우의 앞을 가로막고 선다.
“나도 할래!”
“..........!?”
강민우의 앞을 가로막고 선 이진아가 기합소리와 함께 기마자세를 취한다. 이어서 태권도 고려품세를 시연하는 이진아를 보고 강민우는 흐뭇한 미소를 흘린다. 이진아가 태권도를 시작한지 5개월이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삼 개월이 지났을 때 승단심사를 보고 검은 띠를 획득했다고 하기에 축하를 해주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의 태권도 시련을 하는 동작을 보고 강민우는 대견스럽게 생각한다. 의외로 이진아의 몸은 유연하고 날렵해 보인다. 웅크리고 앉아 혼자만의 침묵 속에 빠진 이진아의 모습과는 다르게 강인해 보인다. 피아노에 소질 있는 연약한 모습의 이진아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환한 표정으로 강민우가 박수를 쳤다.
“오 호! 진아, 대단한데.......”
“피 잇~! 놀리는 거지?”
혀를 날름내보인 이진아가 대련자세를 하고 허수아비의 어깨를 내려친다. 허수아비를 내려치는 품세로 보아 격파도 가능해보인다. 이진아의 또 다른 모습을 강민우는 대견스럽게 생각한다. 이진아는 강민우가 알게 모르게 태권도를 단련하였다. 우울하고 침체될 때는 피아노를 치거나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태권도 시련으로 땀을 흘리면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한동안 허수아비를 상대로 대련을 하던 이진아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돌아선다. 강민우가 활짝 웃으며 다시 박수를 친다. 미소가 깃든 이진아의 얼굴에 미소와 함께 보조개가 깃들어 보인다. 산등선으로 넘어가는 석양빛이 이진아의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반짝거리게 한다.
거리의 가로수는 짙은 녹색으로 변해가고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더워지고 있다. 강민우는 점퍼차림으로 광주사태의 중심지였던 금남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귀에는 소형 레시버가 꽂혀 있었다. 백화점을 향해 걸어가던 그가 레시버를 손으로 누르며 재빠르게 층계를 오른다. 그의 귀에 꽂은 레시버는 안기부 요원들 간의 통신장비였다.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호출음을 듣고 점퍼 깃에 붙은 단추를 입가로 당겼다. 단추로 위장한 통신 마이크였다.
“여기는 점프대, 점프 넷 응답하라!”
“여기는 점프 넷, 듣고 있다.”
“점프 넷의 위치는?”
“백화점에 들어가는 장미를 추적 중.”
“장미 접선 왕벌이 백화점 커피숍에 나타남. 커피숍에 점프 두 명 대기 중. 점프 넷은 십구 시에 카페로 합류할 것.”
“점프 넷! 접수받음.”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던 강민우는 백화점을 되돌아 나왔다. 장미는 작전대상인 로비스트 앨리스 킴이고 왕벌은 아마도 작전 리스트 선상에 있는 군수품 관련 고위층일 것이다. 다른 요원이 왕벌을 추적하는 임무를 인계받을 것이니 강민우는 카페라는 합류지점으로 가야한다. 카페는 도청을 전담하는 전산팀의 숙소를 말한다.
강민우는 안기부의 NDSS 시절에 엘리트급 행동대원이었다. 정보담당 팀장인 그에게 전산팀을 지휘하라는 지시였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시간은 아직 넉넉하다. 그는 여러 번 광주에 들려 최태웅과 강문식을 탐문을 했었지만 소득이 없었다. 합류할 시간동안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 볼 생각이다.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강민우가 도착한 곳은 과거 속에 묻힌 자신의 옛집이다.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담장너머로 보이는 정원에는 화려한 꽃들이 과거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집 주위를 돌아보던 그의 발걸음이 골목길을 벗어나 야산으로 향한다. 그의 발걸음은 불에 그슬린 천주교 성당 앞에 멈추어 섰다. 처참했던 흔적대신 성당 뒤의 작은 무덤들만이 과거의 참상을 되돌리게 한다.
폐허가 된 고아원 주변을 돌아보던 강민우는 골목길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그는 광주에 몇 번인가 와서 둘러보았던 건물을 떠올린다. 오늘은 이진아를 구출했던 건물 주인을 만나 볼 생각이다. 대로변의 높은 빌딩사이의 5층 건물 앞에 섰다. 과거를 지우듯이 말끔하게 변해있는 건물에는 ‘태성’이라는 모텔 간판이 세워져 있다. 지하층으로 향하는 입구에는 술집 간판이 보인다. 강민우가 모텔로 들어서니 긴 통로 옆의 작은 창구가 열리며 돋보기안경을 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의 얼굴이 들어난다.
“주무시고 가시게요!?”
“건물주인 되십니까?”
“그런데요. 왜 그러시오?”
“확인 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강민우는 안주머니에서 안기부요원 신분증을 꺼내 노인에게 보여 주었다. 신분증을 본 노인이 의아스런 표정을 하고 방문을 열어준다.
“뭘 알아보시게요?”
강민우가 들어선 방안에는 소파와 탁자, 창구에 붙은 책상만이 보인다. 노인은 치고 있던 화투와 담요를 걷어낸다. 노인과 탁자를 마주하고 앉은 강민우가 물었다.
“다른 일에 종사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를테면 공직이라던 지.......”
“나는 오랫동안 이 건물에서 나오는 돈으로 먹고 살았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고. 얼마동안 이 건물을 소유하고 계셨습니까?”
“벌써 십오 년째 되지요.”
“광주사태, 당시에도 여기 사셨겠네요?”
“그렇지요. 광주시민은 누구나 겪은 고통이니까요.”
“그럼, 혹시 5, 18 당일을 기억하십니까?”
“음........! 잊을 수가 없지요. 피로 얼룩진 시민군과 총을 난사하는 군인들, 전쟁터 같은 광주를 떠나야 하는 가도 생각했지요.”
“그 당시, 지하실을 누가 사용했는지도 기억하시고요?”
“아! 물론요. 당구장과 술집으로 세를 줬다가 한동안 비어 있었지요. 그 전날인가.......!며칠만 사용한다기에 빌려 주었었지요. 중앙정보부 신분증을 보여주기에 겁도 났지만, 일주일만 사용한다면서 적지 않은 선금을 내놓기에 승낙했지요.”
“평소에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던가요?”
“아뇨!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요.”
“이름을 기억할 수 있나요?”
“신분증을 잠깐 보여주는데, 눈이 어두워서.......! 일주일 사용한다더니 이틀 사용했나.......!? 하여튼 그 이후 나타나지도 안더라고요.”
“얼굴을 보면 기억하실 수 있나요?”
“차가운 인상에 눈초리가 무서워서 기억나지요, 아! 그러고 보니 작년 겨울인가!? 맞아, 크리스마스 다음날이었지. 우리 모텔에서 하룻밤 자고 간 적이 있었어요.”
“확실한가요?”
“그 사람 인상이 남 달라서 기억해요.”
“모텔에서 묵고 간 날, 특이한 점이 없었나요?”
“특이한........! 것이라면, 남자와 혼혈아처럼 생긴 여자가 같이 왔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여자는 나이가 어리고 무척 앳되어 보이기도하고, 술집여자 같기도 했고.......”
“세 사람이 같은 방을........!?”
“아니, 방은 각자 하나씩 사용했지요. 그런데 중앙정보부 직원이라는 사람은 밤에 나갔는지 아침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후에....... 다시 오지는 않았습니까?”
“그 후에는 본 기억이 없는데요.”
강민우는 골똘히 생각했다. 노인이 말하는 인상착의로 봐서는 남경식이 분명하다. 눈매가 매서운 남경식의 얼굴이 떠오른다. 광주사태이후 종적을 감춘 남경식이 무슨 일로 광주에 나타났었는지 알 수 가 없었다. 최태웅과 남경식의 흔적을 쫓을수록 미로 속을 헤매는 것만 같다. 강민우는 몇 가지 질문을 더하고 모텔을 나왔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려앉는 광주 시내에는 상점 간판과 쇼윈도에는 불빛들이 휘황찬란하다. 강민우는 용봉동 번화가 지나 인접한 고급 주택가 골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 주위를 살피던 강민우는 인쇄소 간판이 달린 3층 건물로 들어섰다. 3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 복도 끝의 사무실문 앞에서 인터폰 벨을 눌렀다. 곧이어 인터폰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누구십니까?”
“점프 넷.”
짤막한 강민우의 대답에 이어서 문이 열린다. 강민우는 빨려 들어가듯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준 남자는 같은 팀의 요원인 홍성식이었다. 점퍼를 걸치고 있는 홍성식은 특전사에서 전역한 젊은 신출내기직원이다. 사무실 안에는 모니터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었다.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던 양복을 걸친 남자가 뒤돌아보며 손을 흔든다.
“아! 왔어? 저녁식사는 했고?”
“응, 너는?”
“미스터 홍하고 옆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했지. 미스터 홍! 커피 한잔 마시지?”
“네! 선배님.”
홍성식이 고개를 꾸벅하고 돌아서서 커피포트가 올려져 있는 휴대용가스레인지 스위치를 튼다. 헤드셋을 쓰고 있는 요원은 강민우와 같이 NDSS에 있던 정기춘이다. NDSS 시절부터 같이 활동하던 정기춘은 뛰어난 전산요원이고, 강민우와 나이가 동갑이어서 절친한 사이였다. 강민우가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정기춘 옆에 다가가 앉았다.
모니터 화면에 나타나는 곳은 호화 빌라의 현관, 거실과 침실, 그리고 주방, 화장실 등이었다. 창문으로 스며 들어오는 불빛 외에는 어둠이 깔린 실내의 광경이다. 단독주택이 아니어서 현관으로 들어오는 다른 가구사람들 모습만 이따금 보이고, 집안을 비치는 모니터에는 정적 속의 고정된 화면만 보인다.
홍성식이 커피를 타가지고 탁자위에 잔을 놀려 놓는다. 몇 모금 마시다가 내려놓은 커피가 식어가고 한 시간이 지나도 모니터 화면은 변동이 없었다.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잡음 외에는 침묵이 흐른다. 시간이 지겹고 노곤함에 졸음이 오기에 강민우는 식은 커피를 들이마셨다. 정기춘도 졸음이 오는지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기대고 하품을 한다. 하품을 하던 정기춘이 불쑥 모니터 앞으로 다가 앉는다.
“왔다! 장미.”
“........!?”
장미라면 앨리스 킴이라는 로비스트 여인이다. 모니터에 나타난 여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강민우는 앨리스 킴의 실물을 처음 본다. 나이는 삼십 가까운 것 같은데, 나이보다 무척 앳되어 보이는 여자이다. 혼혈이지만 동양적인 귀여운 미모를 지니고 있다. 강민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잡지에서 보았던 모델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거실로 들어선 여자가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밝은 전등 불빛아래 나타난 넓은 거실과 방안에는 호화스러운 고급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엘리스 킴을 따라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 안경 낀 중년남자의 모습이 들어났다. 정기춘이 혼잣말을 한다.
“어! 김도식 아냐!?”
“김도식........!? 누구야?”
“조달청 군수물자 담당 과장........”
“........!?”
강민우는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전산부서에 근무하는 정기춘은 이미 조사된 사건 관련 자료를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사건관련이 예상되는 인물들을 알고 있었다. 앨리스 킴이 눈웃음을 치며 김도식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고 침실로 들어간다. 화면을 응시하던 강민우가 탁자위에 놓인 헤드셋을 착용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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