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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립스틱* - 14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19:24 1,324회 0건
골목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는 다르게 갈수록 골목은 밝아진다. 좌우로 길게 이어진 집들에서는 분홍빛 조명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이마가 닿을 정도로 머리 위에 걸린 간판들은 맥주와 양주를 판다고 아우성친다. 간판 아래에는 분홍 조명을 받은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껌을 씹으며 이따금 지나치는 남자들을 유혹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앞가슴이 터지도록 작은 블라우스의 단추 하나만 끼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무도회장에라도 온 듯이 앞가슴과 허벅지가 훤히 들어 낸 원피스를 걸친 여자, 몸에 착 달라붙은 티셔츠와 반바지를 걸친 여자들이 패션쇼에라도 나온 듯이 서성거린다. 그녀들 중에서 유난히 화장을 짙게 한 여인이 강민우에게 다가온다.

“어, 오빠! 왜 이제 왔어? 빨리 들어와.”
“..........!?”

강민우는 걸음을 멈추고 호들갑을 떠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뚝뚝하기보다 석고상처럼 표정을 굳히고 잠시 응시한다. 그때 다른 여인이 준비된 애교가 가득한 표정으로 뒤따라오는 문경환의 팔을 붙들고 잡아당긴다. 문경환은 강민우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궁금하여 바라보고 있다. 강민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화장을 짙게 한 여인을 노려본다. 찬바람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강민우의 표정을 본 여인이 슬그머니 팔을 놓으며 욕설을 흘린다.

“썅, 사람 무안하게 만드네.......”
“.........”

강민우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문경환의 팔을 붙잡았던 여자도 눈치를 살피며 물러선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문경환은 답답함을 느낀다. 호객하는 여인들이 끝이 없는 길이 계속 이어진다. 경험이 없는 문경환은 어차피 무작정 팀장을 따라 갈 수밖에 없지만 낯선 광경에 지겨움을 느낀다. 다른 골목으로 빠지는 길이라고 볼 수 없다.

문득 문경환은 유리창 문이 붉은 커튼으로 가려진 집과 구멍가게 옆으로 빠져 나가는 골목을 발견한다. 제발 팀장이 바라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 여자들의 거리를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강민우가 구멍가게 옆의 골목으로 방향을 튼다. 그런데 웬일인지 담장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강민우가 문경환을 잡아끈다.

“차에 가서 기다릴래.......!? 아니, 자네는 여기서 좀 기다리고 있어.”
“팀, 팀장님........!?”

문경환은 차라리 지프차로 되돌아가서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여자의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이미 강민우는 어둠속을 향해 질주해 가고 있었다.

강민우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골목의 어둠속을 응시하고, 한 여자를 강제로 끌고 가는 두 사나이의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동시에, 여자를 납치해서 사창가에 팔아넘긴다는 자신이 스크랩하고 있던 사건 기사를 떠올렸다. 이곳에서는 흔한 일인지 누구도 그 장면을 신경 쓰지 않는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여자는 직업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골목길을 바람처럼 달려 나간 강민우는 순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멈춰 섰다. 꽤 넓은 공터가 보이고 그곳에는 또 다른 구멍가게와 세탁소, 그리고 여인숙이 보인다. 사나이들이 여자를 끌고 허름한 여인숙 간판이 걸린 이층집의 외벽에 걸린 철제 계단을 오른다. 철제 계단을 오르는 구둣발자국 소리와 끌려가는 여자의 외침이 들려도 누구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바로 옆 건물의 분홍색 커튼이 달린 유리문이 열리고, 커튼 사이로 원피스와 한복을 입은 여자들이 보인다. 마치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여자들의 얼굴 표정이 똑같다. 유리문을 열리고 나타난 것은 살집이 많은 중년여인이다. 여인은 철제 계단을 올려다본 여인이 치마를 추켜올리며 밖으로 나온다.

“어디서 시끄러운 물건을 갖고 온 거야!?”
“영계니까, 누님은 값이나 잘 쳐주쇼!”

사나이들이 되돌아보기에 강민우는 전신주 뒤에 몸을 숨긴다. 여자를 납치해서 사고파는 조직이 분명하다. 사나이들이 여자를 실신시켰는지 여자의 외치는 소리가 멎었다.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던 강민우가 발자국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다. 기다리라고 했던 문경환이 땅바닥에 엎드리듯이 다가오고 있다. 강민우는 다시 고개를 들고 사나이들과 살려달라고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도 아랑곳하지 않는 공터를 있는 사람들을 살핀다.

여인숙 맞은편에는 리어카에 카바이드등을 밝히고 있는 상인, 사창가를 찾는 취객을 대상으로 호객 행위를 하는 여인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가다가 돌부리를 차는 남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전기공사 차량이 한 대가 서 있었다.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던 강민우는 늦은 저녁에 전봇대에 매달린 전기공사 직원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무도 관심을 같지 않는 사나이들은 축 늘어진 여자를 끌고 철제 계단을 오른다. 중년여인이 다시 내려와 분홍 커튼이 걸린 유리문을 열고 사라졌다. 철제계단 끝에는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정신을 잃는 여자를 부축한 사내들은 철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잠시 후 철문 빗장이 열리는 금속성 소리가 울리고 흐린 불빛이 새어 나왔다.

불빛을 등지고 중년여인의 모습이 들어났다. 사나이들과 실신한 여자, 그리고 중년여인을 삼키고 철문이 닫힌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감방 문 닫히는 소리처럼 음산하다. 강민우의 등 뒤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문경환은 궁금하기만 하다. 강민우가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간섭할 일이 아니잖아요?”
“아닐 수도 있고, 간첩일 수도 있고.......”

강민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철제 계단으로 오르던 이층으로 들어가려하지만, 철문은 안으로 잠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래층으로 들어가거나 또 다란 통로를 찾아봐야 한다. 강민우는 날렵하게 공터를 지나 철제 계단 밑으로 몸을 숨긴다. 게단 밑의 작은 공간을 통해 또 다른 골목이 보인다.

작은 공간을 비집고 나가니 여인숙의 뒤편이고 축대를 사이로 두고 다른 건물의 지붕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다. 여인숙 뒤편을 올려다보니 흐린 불빛이 새어 나오는 이층 유리 창문이 보인다. 반대편 지붕으로 올라가면 이층 창문이 마주 보일 것 같다. 반대편 지붕은 축대 위에 올라서서 오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자고 생각한다. 강민우는 등 뒤까지 다가와서 의아스런 눈빛을 하고 있는 문경환을 돌아본다.

“자넨 여기를 지켜.”
“.........!?”

기다리라고 했지만 따라온 문경환은 지키라고 명령하는 강민우의 말이 얼떨떨하다. 그러나 묻지 말고 자신의 판단을 믿으라던 강민우의 말이 떠오른다.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도주하는 놈들을 막는 것이 우선이고 사태 추이를 보고 판단해야한다. 차가운 말을 뱉은 강민우는 훌쩍 가볍게 담장위로 몸을 날린다. 아뿔싸! 항상 변수는 도사린다. 발을 디딘 담장의 불럭이 힘없이 무너진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는 반대편의 시커먼 공간의 담장 아래는 녹 쓴 철판들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그를 노리고 있다. 그곳으로 떨어지면 요란한 소리가 날 것이고 모든 것이 낭패다.

추락하던 강민우는 담장을 붙들고 날렵하게 회전을 하며 다시 튀어 오른다. 두 번 실수는 없다. 담장을 발로 디디는 순간 다시 점프를 하여 맞은편 추녀 끝의 어두운 공간으로 손을 뻗친다. 강민우의 순간적인 판단이 맞았다. 지붕 밑의 버팀목이 손에 잡힌다. 버팀목을 잡고 지붕위로 오른다. 그런데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린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어서 움직이기조차 힘들다. 금방이라도 깨져서 밑으로 추락할 것만 같다. 슬레이트 지붕 사이에는 버팀목이 있을 것이고 못 박힌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인숙 이층 창문을 부수고 들어가려면 도약을 할 거리가 필요하다.

어둠에 쌓인 지붕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그리고 못이 박힌 위치를 찾아 살얼음을 걷듯이 걸어간다. 이제 여인숙 유리 창문으로 도약할 적당한 위치가 되었다. 어둠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문경환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강민우는 몸을 시계추처럼 뒤로 젖힌다. ‘간다!’ 강민우는 여인숙 유리 창문으로 몸을 날린다. ‘와장창!’ 유리창과 창문이 한꺼번에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강민우의 몸은 이층 방안으로 굴러 떨어져 한 바퀴 구른다. 동시에 겨드랑이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소리친다.

“꼼짝 마!”
“뭐, 뭐야........!?”

방안에는 벌거벗은 상체를 들어낸 중년 남자가 반항하는 여자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있었다. 중년남자는 손님들에게 첫 선을 보일 여자를 강제로 추행중이다. 중년남자는 조직의 부수 이고 조직원들이 납치해온 여자에게 신고를 받으려는 것이다. 납치당해온 여자들의 신고식은 폭력배에게 몸을 받치는 일이다. 그러나 자진해서 폭력배들에게 몸을 주는 여자는 없고 강간을 당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민우는 이런 경우에 상대가 설마라고 여기는 방법으로 먼저 제압을 한다. 중년남자를 향해 겨냥한 권총의 방아쇠를 여지없이 당긴다. 안기부 요원은 평상시는 실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NTIS" 팀의 팀장이고 사건이 해결되면 누구도 실탄 사용한 것을 탓하는 사람은 없다. 소음기가 장착된 총구에서 발사된 탄알이 정확히 중년남자의 다리에 관통되었다.

“아이쿠! 이런 제기랄.......! 너무 하네.......”
“주둥아리 닥쳐! 나머지 다리까지 병신 되기 전에.......”
“사, 살려만........”
“.........”

중년남자는 피가 솟구치는 다리를 붙들고 침대 아래로 뒹군다. 강간을 당하려던 여자는 황급히 찢겨진 블라우스를 당겨 선정적으로 들어난 젖가슴을 감춘다. 그리고 겁에 질린 눈빛으로 침대구석에 덜덜 떨며 웅크린다. 강민우는 방문을 열고 나가서 형광등이 껌벅거리는 어둠침침한 복도에 들어섰다. 두 군데의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한쪽 방문의 작은 유리창으로 넘겨다보니 전쟁터로 끌려가는 패잔병처럼 얼굴빛 어두운 여자들이 있다.

다른 쪽 방에는 기절해서 쓰러져 있는 여인을 둘러싸고 철제 계단을 올라온 사나이 두 명과 중년 여인이 무슨 대화인가 하고 있었다. 강민우는 복도 끝으로 다가가 철문 빗장을 조심스럽게 푼다. 그렇지만 이가 갈리도록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신호로 하여 철제 계단 밑에 있던 문경환이 부리나케 뛰어 올라온다. 방안에 있던 사나이와 중년여인이 예기치 않은 소리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나온다.

“무슨 소리야.......!?”
“뭐야.........!?”

순간 강민우가 고개를 내미는 사나이의 팔을 잡아당기며 번개같이 명치끝을 올려 찬다. 신음소리마저 들이마신 사나이는 철문으로 뛰어 들어오는 문경환의 발밑에 나뒹군다. 뒤따라 방을 나서던 사나이는 사태를 짐작하고, 나이프를 꺼내 강민우를 향해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어디긴.......”

나이프의 날카로운 칼끝이 강민우의 턱 밑을 겨냥하여 들어온다. 전혀 피할 생각이 없는 표정으로 버티고 서있던 강민우가 빠른 몸놀림으로 슬쩍 비켜선다. 그리고 달려드는 사나이의 눈앞으로 팔을 뻗는다. 사나이는 번개처럼 눈앞으로 다가오는 주먹을 피하기 바쁘다. 달려들다가 상체를 뒤로 젖히며 주먹을 피한다. 강민우가 상대의 동작을 예견하고 뻗친 주먹이다. 상체의 균형이 뒤로 젖혀진 사나이의 오금을 슬쩍 걷어 올린다. 사나이는 사지를 펴고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진다.

“핫~!”
“..........”

뒷머리를 바닥에 부딪친 사나이는 현기증으로 동공이 풀린다. 강민우는 바닥에 쓰러진 사나이의 목을 밟고 돌아본다. 문경환이 자신의 발밑에 쓰러진 사나이를 공깃돌 놀리듯이 멱살을 잡고 집어던지고 있다. 철제 계단을 오르는 구둣발자국 소리가 요란하다. 자신도 한몫했으니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 마음으로 문경환이 강민우를 쳐다본다. 그러나 다음 행동을 어찌해야할지 묻는 표정이다. 강민우가 철제 계단으로 향하는 열려진 철문을 손으로 가리킨다.

문경환이 철문을 돌아보고, 강민우는 재빨리 중년 남자가 있던 방으로 들어간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던 사나이는 저항을 해도 소용없다는 사태를 파악하고 저항을 포기 한 상태이다. 그런데 무자비 하게 방아쇠를 당기던 남자가 다시 총구를 겨냥하고 들어오는 것에 기겁을 한다. 강민우는 대뜸 중년남자의 가슴을 걷어찬다.

“난 성질이 급해. 남경식을 알고 있지? 남기춘이라고도 하지.”
“모, 몰라.........”

“최태웅은?”
“그런 이름 들어 본적도 없어. 정말이야. 권총 좀 치워줘! 그러다가 오발이라도 하면........”
“그럼 곽춘호는?”

강민우는 중년남자의 팔을 밟고 힘을 준다. 강민우는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중년남자에게 최태웅과 관련된 이름들을 하나씩 물어본다. 층계를 오르던 구둣발자국 소리가 철문 입구까지 들어온 소리가 난다. 방을 나온 강민우의 시선이 구둣발자국 소리를 내며 철문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남자들을 향한다. 그들 중에는 전기공사 직원, 리어카상인, 호객행위를 하던 여인의 대상이 되었던 남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들 사이를 헤치고 눈매가 날카로운 남자가 앞으로 나선다.

“하~! 민우? 요즘 자주 만나네.”
“음~! 조 반장.”

씁쓸한 표정을 하는 남자는 강민우와 친분이 두터운 시경의 강력반 반장 조병문 경감이었다. 강민우를 두 번씩이나 사건현장에서 만난 조 경감은 마치 먹으려던 음식을 빼앗긴 사람처럼 입맛을 다신다. 강민우는 이미 형사들이 잠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 경감과 강민우가 악수를 하는 사이에 형사들은 사나이들과 중년여인에게 수갑을 채우고 있다. 강민우는 조 경감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철문으로 향한다.

“미안해. 시간이 없어서, 다음에 봐.”
“막걸리라도 같이 하지........”

조 경감은 손을 흔들며 철문을 나서는 강민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왠지 쫓고 있던 사냥감을 놓친 심정이다. 강민우를 따라 철제 계단을 내려오는 문경환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빠른 걸음으로 문경환은 강민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다. 강력반이 잠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강민우를 존경스런 눈빛으로 쳐다본다. 강민우는 문경환이 궁금해 하는 이유를 알면서도 태연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대형 모니터들이 걸려 있는 안기부 전산실, 각자 개인 컴퓨터를 마주하고 업무에 열중인 요원들도 있고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요원들도 있다. 전산실로 통하는 전산실장실에서는 최재인 실장이 책상 앞에 앉아 있고, 최재인 실장 옆에는 정기춘이 부동자세로 서있었다. 그들은 이따금 유리창 너머의 전산실을 힐끔거리며 작은 목소리를 주고받는다.

“아무래도 위험하니 접선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정보 A팀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A팀이.......!? 그럼, NTIS가?”

“네.”
“음......! 마스터에게 보고하고 지시 받아야 되겠네.”

긴장한 표정을 짓는 송기춘이 유리창 너머의 전산실의 동태를 살핀다. 그러나 누구도 전산실장실을 주시하는 요원들은 없었다. 각자의 업무에 열중이거나 잡담을 하는 요원들 중에는 송나희의 모습도 보인다. 헤드셋을 쓰고 앉아 컴퓨터를 마주하고 있던 송나희는 파일들을 검색하다가 멈춘다. 강민우가 맡은 고정간첩 색출 작전에 관한 파일이었다. 매일같이 보고되는 서류들을 파일로 작성하고 교정하는 것이 그녀의 업무 중에 하나였다.

서류를 넘기면서 파일을 작성하려던 그녀는 멈칫하였다. 요즘 와서 누군가 고정간첩 색출 작전에 관한 파일을 검색한 흔적이 보였던 것을 무심하게 넘겼었다. 요원들 간에 정보 교환하기 위해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도 또 검색한 흔적이 보인다. 좌판을 두드려 파일에 접근했던 사람을 찾았다. 그런데 접근한 흔적은 있는데 접근자를 알 수 있는 아이디어와 암호가 삭제되어 있었다. 다시 좌판을 두드렸다. 파일에 접근해서 검색했을 뿐만 아니라, 파일을 복사한 흔적도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송나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원들의 테이블들 사이를 가로질러 전산실장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전산실장 문이 열리고 왠지 긴장해 보이는 송기춘이 나왔다. 송나희를 본 송기춘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 지나쳐갔다. 송기춘의 뒷모습을 바라보서 송나희는 전산실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유리창 너머로 등을 지고 서 있던 전실장이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전산실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보고 드릴 것이 있는데요.”
“음, 말해봐. 뭔데?”

“요즘 누군가 정보 A팀의 정보파일에 접근한 흔적이 있어서요.”
“흠.......! 그래!? 작전 업무상 필요해서 그랬던 것이겠지.”
“그뿐만 아니라, 파일도 여러 번 복사 해갔던데요.”
“그럴 수도....... 있겠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가서 일봐.”

송나희는 주춤거리다가 돌아서서 전산실장실을 나온다.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생각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실장은 과묵하면서도 꼼꼼한 성격이다. 작은 일에도 예민한 전 실장이 보고사항을 한마디로 묵살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보고를 받는 전실장의 미묘한 표정 변화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공연한 보고를 했다는 생각에 휴게실로 가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유리창 밖을 내다본다.

경기도 광주군 동부읍내의 중심가, 초여름의 날씨가 되어 사람들은 가로수 밑으로 지나다니고 있다. 학교 수업을 끝내고 학원으로 가던 이진아는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려다가 걸음을 멈춘다. 길 건너에 세워진 고급 외제승용차를 바라보던 그녀는 전신주 뒤에 몸을 숨긴다. 그녀가 주시하는 것은 고급승용차가 아니라, 승용차 앞에서 승강이를 하는 중년남자와 여학생이다.

여학생은 중년남자에게 잡힌 손목을 뿌리치려하고, 중년남자는 여학생을 강제로 승용차에 태우려하는 광경이다. 여학생이 걸친 교복을 보아 같은 학교의 여학생이기에, 안면이 있는 같은 학년의 지순영이라는 학생이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진아는 자신도 모르게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며칠 전에 교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사건이 있었다. 한 여학생이 자살을 했는데, 이름 모를 남자에게 끌려가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진아가 망설이는 상에 승강이를 하던 중년남자가 지순영의 복부를 무릎으로 가격하여 실신시키더니 승용차에 태워 출발한다. 당황한 이진아는 어찌할 바를 몰라 주춤거렸다. 신고를 하러 파출소까지 가려면 너무나 먼 거리이고 그 사이에 승용차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녀는 모토로라 삐삐를 꺼내들고 강민우를 떠올린다. 하지만 근무 중일 것이고 설사 호출을 받고 빠른 시간에 올지 보장할 수도 없다.

이진아는 무작정 길을 건너 승용차 뒤를 따라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뒤쫓아 가는데 다행히도 승용차는 멀리 가지 않았다. 사거리를 지나 광주 쪽으로 꺾어지는 한적한 도로의 주차장 안으로 승용차가 들어갔다. 영업을 하지 않는지 주차장 안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폐기직전 차량 한 대만 보인다.

입구 옆으로는 조립식 판넬로 지은 사무실이 보이고, 한쪽으로는 건축자재더미가 보인다. 주차장으로 들어선 승용차가 사무실 입구에 정차하고 중년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려선다. 이진아는 재빨리 낡은 주차장 간판이 걸린 기둥 뒤에 몸을 숨긴다.

점퍼를 걸친 사십대 가량으로 보이는 중년남자는 승용차에서 내려 조수석 뒷문을 연다. 기절했던 지순영이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저항을 하는 지순영을 중년남자가 승용차에서 끌어내렸다. 중년남자는 지순영의 목을 팔로 감아서 끌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이진아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외진 곳이라 거리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진아는 조심스럽게 조립식사무실로 다가갔다. 머리위로 뚫린 창문으로 발돋움하여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준비된 것처럼 중년남자가 책상 서랍에서 밧줄을 꺼내 들었다. 지순영의 팔을 뒤로 젖혀 밧줄로 손을 묶어 의자에 앉히며 씨근덕거린다.

“너, 전번에 돈도 받았잖아! 왜 고집 피는 거야?”
“돈, 도루 드릴게, 살려주세요.”

“왜 그래!? 네 엄마 병원비도 해야 한다면서, 매달 생활비를 준다고 하잖아!”
“싫어요, 이건! 제발 살려주세요.”

손이 뒤로 묶인 채 의자에 앉혀진 지순영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중년남자를 향해 애원한다. 그녀의 벌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앞가슴과 브래지어가 들어나 보인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중년남자의 눈빛이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 같다. 남자가 돌아 서더니 사무실 문의 손잡이를 돌려 잠근다.

“누가 죽인데!? 말만 잘 들으면, 서로 좋은 거 아냐!?”
“제발, 보내주세요. 네!?”

“이게 말로 안 되겠구먼.......”
“아 악~!”

중년남자가 지순영의 뺨을 후려친다. 뺨을 얻어맞은 지순영은 비명을 터트린다. 중년남자의 후려치는 손바닥에 지순영의 얼굴이 힘없이 획 돌아간다. 입에서 피를 흘리는 지순영의 얼굴빛이 하얗게 변한다. 공포를 느끼는 지순영의 손발이 덜덜 떨린다. 잘못하면 맞아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를 노려보던 중년남자는 사정없이 지순영의 교복 상의를 잡아 당겨 찢는다. 찢겨진 교복 상의가 벗겨 던지니 하얀 브래지어를 하고 있는 그녀의 상체가 들어난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주둥이 닥쳐! 말을 잘 듣지, 그래.”

이어서 중년남자는 지순영의 앞가슴으로 손을 뻗쳐 브래지어마저 잡아 당겨 벗긴다. 뽀얀 살결의 젖가슴이 들어났다. 남자의 손길이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른다. 남자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지순영은 젖가슴을 주무르는 남자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흥분이 되는지 남자가 자신의 사타구니를 문지른다. 지순영이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지른다.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이년이........!?”

남자의 손바닥이 다시 지순영의 뺨을 후려쳤다. 머리가 획 돌아간 지순영이 숨을 들이마시며 신음을 흘린다. 남자는 의자에 걸린 타월로 지순영의 입을 틀어막고 재갈을 물렸다. 재갈이 물려진 지순영은 덫에 걸린 사슴처럼 ‘우우~!’하는 신음만 흘린다. 창문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진아는 어찌해야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지순영을 어떻게 하든지 구하고 싶지만 사무실 문이 안에서 잠겨있어 안절부절못한다. 안으로 들어 갈 곳은 유리 창문뿐이다. 창문을 밀어 보니 꼼짝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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