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우를 만났던 이진아는 공연히 짜증이 났다. 참고서를 구입한 그녀는 친구와 같이 인파들로 복잡한 동대문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시큰둥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적개심을 느껴 쏘아 붙이는 말에도 호의를 보이던 송나희의 친근한 표정이 생각할수록 오히려 화가 나게 한다. 구입해온 참고서를 책상에 펼쳐놓고 공부를 하려고 해도 오빠와 송나희의 다정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진아는 저녁식사를 하라는 진 씨 할머니의 성화도 뿌리치고 책장을 뒤적이고 있으나 머릿속에는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는다. 왠지 오빠가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만 같은 망상 때문인지 피로가 엄습했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졸음이 와서 침대 위에 벌렁 눕는다.
눈을 감고 잠속에 빠져드는 세상은 섬뜩함을 느끼는 환각의 세계였다. 아니 낯익은 악몽이었다. 요즘 들어 벗어나고 있다고 느끼던, 그녀를 집요하게 붙잡고 늘어지는 악몽이었다. 그녀는 환각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쳐도 꿈은 사슬이 되어 그녀를 점점 더 결박해 온다.
검은 그림자가 되어 다가오는 커다란 고목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고목은 하늘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이진아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뜨거움에 걸치고 있는 옷을 벗어던진다. 시커먼 고목의 가지들이 살아 움직이며 손발이 되어 발가벗은 그녀를 끌어당긴다. 그녀는 발가벗은 알몸은 온통 검은 매직이 그려져 있어 묵화의 나신처럼 안간힘을 쓴다. 고목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악마의 음성을 흘린다.
‘내게로 오라! 고통을 잊으리라!’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흐느적거린다. 바람도 없는 하공에 검은 잎사귀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나뭇가지에 옥죄이는 고통 속에 그녀는 허벅지 사이를 손바닥으로 더듬는다. 고통과 함께 희열의 쾌감이 어우러진다.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녀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강민우의 그림자가 다가오다가 멈추어 섰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강민우를 부른다.
‘오빠! 날 좀 안아줘!’
어둠속을 향해 손을 뻗치면서 눈을 떴다. 한동안 잊었던 악몽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꿈속처럼 걸친 옷을 벗어던지고 팬티 차림이었다. 현실인지 악몽인지 모르겠다. 졸고 있는 전등불 아래 벽시계의 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환각을 느낀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 책꽂이위에 놓인 성모상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이진아는 벌거벗은 알몸에 잠옷을 걸친다. 허탈함에 젖어 방문을 나서서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의 벽시계는 정상적으로 자정을 향하고 있다. 진 씨 할머니마저 잠든 집안은 고요하기만 하다. 거실을 가로 질러 강민우의 방 앞으로 다가선다. 방문을 여니 언제 들어왔는지 침대 위에는 강민우가 잠들어 있었다.
강민우의 모습을 보고나서야 이진아의 마음이 평온해진다. 누구도 그녀를 헤치려하지 않는다. 온몸을 옥죄어 오던 검은 가지들도 없고 그녀를 덮치려고 나부끼던 검은 잎사귀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오빠의 얼굴에 배시시 미소를 짓는 송나희의 얼굴이 겹쳐져 떠오른다.
문득 송나희에게 오빠를 빼앗길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강민우의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비로소 안전하게 오빠에게 안전하게 보호되었다는 안정감이 들어 스르르 잠이 든다.
이른 새벽에 강민우는 괘종시계 소리를 듣고도 눈을 뜰 수 없었다. 일찍 일어나기 위해 괘종시계를 맞추어 놓았지만 피곤해서 몸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오 국장의 작전지시에 의해 일본으로 가기위해 선발 팀원들이 공항으로 모일 것이다.
몸을 뒤척이던 강민우가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팬티 차림으로 이진아가 가슴에 안겨 있었다. 다시 악몽에 시달려 온 것이라고 생각되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잠들어 있는 그녀를 안아서 그녀의 방으로 가서 침대위에 눕힌다. 서둘러 세면을 하고 우유 한잔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강민우가 집을 나설 때까지도 이진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공항에는 입국하는 가족이나 손님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 항공기 도착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 배웅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강민우는 가까스로 출국시간에 맞추어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검색대 앞으로 빠른 걸음을 옮기던 주춤하였다. 검색대 앞으로 쏜살같이 카트를 밀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카트와 부딪쳐 충돌한 강민우는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하였다. 간신히 카트를 붙들고 상대를 바라봤다. 카트에 실렸던 가방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
상대는 가방을 다시 카트에 올려놓더니 단 한마디를 남기고 강민우 앞을 스쳐 지나간다. 수염이 텁수룩하고 베레모를 쓴 남자는 사진작가인지 아니면 사진기자로 보였다. 입국장 안에서는 도쿄행 항공기에 탑승하라는 안내 방송이 계속 들려온다. 이맛살을 찡그리며 남자를 바라본 강민우는 서둘러 검색대를 지나 입국장 안으로 들어섰다.
시부야 번화가에서 얼마 되지 않는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는 동경 조총련지부. 주소를 알리는 문패 외에 다른 간판은 없었고, 건물 자체도 일반 주택과 차이가 없다. 다른 주택과 다른 점이라면 하루에 이십 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날락거린다는 점이다. 그들 중에는 순수하게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교포들도 있었고, 정치 활동을 하는 프락치들도 있었다.
리상철은 주방을 지나는 복도와 연결된 작은 방에서 벽에 기대 두 다리를 뻗고 있었다. 삭발한 정수리에서부터 뒷목까지 이르는 긴 상처를 봐서는 위협적인 분위를 풍기는 사내였다. 리상철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른 손 검지에 반달모양의 쇳조각이 하나 걸려 있었다. 권총 방아쇠 부위만 따로 빼내어 검지에 걸친 것이다.
인간의 눈 같지 않고 특이한 눈매였다. 화가 난 것처럼 미간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은 눈썹, 눈꺼풀 역시 눈썹과 평행이 되어 눈초리까지 직선을 짙게 그리고 있었다. 반면에 아래쪽 눈꺼풀은 크게 반원을 그린 모습이다. 처음 보는 사람은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고 착각할 눈매였다.
방문이 열리고 나이든 노인이 녹차를 들고 나타났다.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노인이 리상철의 눈치를 살폈다.
“내래 불안해서 못 견디겠쑤다. 언제까지 여기에 계실 겁네까? 아새끼들이 자꾸 캐물어서 난감합네다.”
“뭐 어카란 말이네?”
리상철은 노인이 건네는 찻잔을 거칠게 낚아챘다. 뜨거운 찻물의 절반이 밖으로 튀어 나갔고, 일부는 노인의 손과 리상철의 손을 적셨다.
“그 종간나 새끼들이 다른 곳은 위험하다면서 여기에서 접선하자 하는데 어카갔어.”
노인은 뜨거운 것을 참으면서 슬쩍 자신의 손등을 살폈다. 붉게 부어오른 부위가 따끔거렸다. 반면 리상철의 손등에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화상을 입었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지도 모른다. 리상철의 손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붉었다.
“대체 누굽네까? 정보를 준다는 놈이.”
노인은 쓰라린 손등에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리상철은 일본과 북조선을 왕래하며 비밀 업무를 수행하는 테러리스트였다. 그의 이름은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명단에도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며칠을 버티며 외부인을 기다리는 리상철은 조총련 지부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좌 동무가 여기 있다는 것이 발각되면 곤란하지 않습네까?”
“어떤 놈이 고발할까 봐, 걱정인 거네?”
“여긴 조총련 지부에서 가장 많은 실적을 올리고 있는 중요한 지부입네다. 지부를 잃는 다는 것은 위대한 인민해방군의 커다란 손실입니다.”
“알았으니 걱정 말라우.”
벼르고 있다가 말하는지 노인의 단호한 말을 리상철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한마디로 잘라 버린다. 이상철이 다시 뭔가 말하려다가 나뭇가지가 부딪기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앳된 청년이 문 틈새로 슬그머니 고개를 빼 내밀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카라.”
청년의 안내로 방 안에 들어온 사람은 20대 중반의 여자였다. 검은 색 정장 차림에 중앙 가르마에 단정하게 묶은 헤어스타일이 고지삭한 느낌을 준다. 사무직이나 공무원에 적합한 외모였다. 리상철은 두툼한 봉투를 꺼내 여자의 앞에 던졌다.
“받으라우. 내래 시간이 없으니 빨리 얘기 끝내야 안카써?”
여자는 말이 없이 핸드백을 열었다. 핸드백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내 리상철에게 내 밀었다. 그리고 내용을 훑어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리상철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내일 마츠다세이코 공연장에서 뵙자고 합니다. 라커룸에서 달러와 물건을 교환한답니다.”
“뭐이 어드레!? 와 하필이면 에미나이 공연장. 내가 그깟 공연 구경하러 왔습네. 그리고 이 간나새끼들은 누구입네?”
“KCIA(안기부) 수사 팀원들입니다.”
“이 간나 새끼들이 지금 와있다고?”
“네. 오늘 입국했습니다.”
“무슨 일로?”
“우리 정보가 흘러 들어간 모양입니다. 그럼 전달은 끝난 것으로 알고 가보겠습니다.”
“아직 아니야.”
여자가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리상철은 손에 쥔 종이들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머리의 상처 때문인지 리상철의 미소는 험악해 보였다. 나지막한 목소리지만 강압적인 말투에 여자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았다. 이제까지 짓고 잇던 무표정이 조금은 지워지고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다.
“또 할 말이 뭐죠?”
“동무의 정보가 사실인지가 중요하다는 거 말이디.”
“거짓 정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진짜라는 증거가 없디 안카써? 함정인디도 모르잖카서.”
여자는 입술을 꾹 다물어 보인 채 리상철을 노려보았다. 잠시 서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노려보았다. 여자는 리상철의 눈빛에 질린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핸드백에 손을 넣었다. 여자가 꺼낸 것은 신분증명서였다. 여자는 증명서의 사진과 자신의 얼굴을 대조하기 쉽도록 리상철 앞에 바짝 다가앉았다.
“저는 주일 대사관의 주대창 서기관 밑에서 일하는 최숙향입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그쪽 루트로 제 신분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돈 때문에 배신할 여자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내 믿어 보갔어.”
여자는 노인과 리상철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리상철은 웃음을 터트렸다. 노인은 내내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웃지 마시라요. 저간나 에미나이를 믿습니까? 우리 조총련 지부가 알려지면 어카갔습네까? 더욱이나 대좌 동무는 남조선이 경계하는 요원입네다.”
“염려마라우. 알아봤자 그 새끼들이 뭘 어카갔어.”
“어쨌든 KCIA(안기부)가 와 있다니 조심하시라우요.”
“이제 방구석에 처박혀 있기도 힘들구만, 바람 좀 쏘이고 오갔어.”
리상철이 일어나면서 들고 있던 종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종이를 주워 올리며 리상철이 노인을 향해 히죽 웃었다. 노인은 순간 리상철의 표정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잔인하고도 차갑게 보이는 눈빛 때문이다. 리상철은 허리 뒤춤에 끼워 두었던 권총을 어루만지며 방문을 열고 나선다.
오사카 이타미 공항에서 도쿄로 향하는 도로로 승용차들이 달리고 있다. 흰색 오픈카 한 대가 승용차 대열 속에 끼어 달리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선글라스를 착용한 강민우가 있었다. 일본 현지 정보원들이 오사카 공항에 준비해놓은 승용차였다. 승용차는 산중턱으로 향하는 오르막길로 굽어진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쾌청한 날씨에 멀리 오쿠타마 호수가 보이기 시작한다. 조수석에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롱부츠에 프렌치 코트를 걸친 송나희가 앉아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호수의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핸들을 잡고 있는 강민우가 그녀를 힐끔 쳐다본다.
"잠시 쉬었다가 갈까?"
"좋아요."
도로변의 넓은 공터에는 쉼터가 있었고,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주차된 차량들이 보였다. 강민우는 천천히 쉼터의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시켰다. 승용차에서 내린 그들은 절벽위에 세워진 난간으로 다가갔다.
멀리 보이는 오쿠타마 호수의 물결이 기울어져가는 석양을 반사하며 반짝거리며 흘러간다. 색 바랜 단풍들이 어우러진 산 사이에 잔잔한 물결을 이룬 오쿠타마 호수의 정경이 보인다. 호수의 맑은 물결이 기울어져가는 석양을 반사하며 반짝거린다. 어디선가 잔잔한 음악의 선율이 흘러오는 것만 같다.
"나희씨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지?"
"글쎄요!? 행복해지고 싶었던 순간들이 돌이켜 보면 가슴 아팠으니까요. 민우씨는 그런 순간이 있었어요?"
"한 번도 그런 기억이 없는 것 같아서.......!?"
"누군가 그랬잖아요. 행복에 대해 반문하고 싶은 순간이 행복한 것이라고요."
"그럴까......!? 그럼 지금 내가 행복한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나희씨가 있으니까."
"농담이죠?"
"아닌데."
"호호~! 매너적인 말은 싫어요."
“정말인데.”
관광객을 위해 설치된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망원경으로 오쿠타마 호수를 바라보던 송나희가 미소를 띠며 강민우를 쳐다본다. 그녀의 눈동자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강민우가 난간에 피어있는 들꽃을 꺾어 송나희의 귓가에 꽂아주며 싱긋이 웃음을 지었다.
“예쁜데.”
“지금 계절에 무슨 꽃이죠?”
“나희 꽃.”
“피 잇~! 날 놀리고 싶어요?”
“하하~! 꽃보다 아름다운 여자 이름인데.”
“못 됐어. 정말 놀릴 거예요!?”
송나희는 눈을 흘기며 강민우의 어깨를 가볍게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렇지만 강민우가 살짝 피하며 짓궂은 웃음을 흘린다. 그녀가 다시 그에게 다가서며 주먹을 휘두른다. 쫓고 쫓기면서 그들은 망원경 사이를 맴돌았다. 송나희는 멈추어선 강민우의 어깨를 가볍게 주먹으로 두들겼다.
강민우가 멈추어 선 것은 허리에 찬 햄 무전기의 호출음 때문이었다. 송나희와 시선을 마주친 그가 무전기의 버튼을 눌렀다. 일본에 임시 설치된 상황실로부터 보내온 신호임을 알고 응답을 했다.
“네, 비트 원입니다.”
이어서 무전기에서 전희재 과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희재 과장은 도쿄에 설치된 임시 상황실을 지휘하고 있었다.
“비트 상황실이다. 마츠다세이코 공연에 참석하는 대상을 알아냈다. 특별히 공연을 지원하는 기업이나 후원자는 없었고 매일 스포츠에서 취재 사진기자가 이미 일본에 도착했다는 정보이다. 사진기자가 소유한 장비 속에 우리가 찾는 물품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지원팀이 도착하면 즉시 다음 작전을 지시 할 것이다.”
“네, 알았습니다.”
“앨리스 킴의 위치를 알아냈고, 현지 팀이 프린스 호텔의 앨리스 킴을 감시중이다. 현지 감시팀의 현장으로 합류하도록 하라.”
“비트 원, 송나희 요원과 현장으로 갑니다.”
무전 통화를 끝낸 강민우는 다소 흥분한 표정이었다. 강민우는 광주 ‘점프’ 작전 당시 보았던 앨리스 킴의 모습을 떠올렸다. 앨리스 킴의 이름을 반복하면서 주차된 승용차로 향해간다. 송나희를 태운 강민우의 승용차가 쉼터를 빠져나가 도쿄를 향하는 대로를 질주해 나간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도쿄 시내의 프린스 호텔. 호텔의 룸 안에는 헤드셋을 쓴 사내들이 컴퓨터 모니터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도청을 하고 있는 안기부 소속의 일본 주재원들이다. 모니터 안에는 도청을 하고 있는 객실 룸이 나타나 있었다. 거실과 침실, 그리고 화장실 등 요소마다 설치된 비밀 CCTV가 작동되고 있었다.
객실 룸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모니터는 정지된 화면 같았다. 다소 지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요원들 뒤에는 강민우와 송나희의 모습도 보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객실 문이 열렸다. 요원들이 바짝 다가앉아 모니터를 주시한다. 이국적인 마스크를 지닌 여자와 한국남자가 들어섰다.
그들은 안기부 요원들이 감시중인 인물들이다. 여자는 미국계 혼혈아 남선미, 일명 앨리스 킴이고, 남자는 주일대사관의 주대창 제1서기관이었다.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노란 눈을 가진 앨리스 킴이 코트를 벗고 남자에게 안긴다. 가벼운 키스를 교환한 남자가 소파에 가서 앉고, 여자는 싱크대를 향해 돌아선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그럴까?”
여자가 커피포트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커피 잔을 꺼낸다. 곧 이어서 여자가 커피를 탄 잔을 들고 남자 옆에 와서 앉았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어깨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남자는 커피보다 여자에게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그러나 여자는 다른 마음인지 커피 잔을 들고 눈웃음을 치며 남자를 바라본다.
“물건은 틀림없이 도착하는 거지요?”
“이미 도착했어. 매일 스포츠 신문 사진기자인데, 같이 물건 인수자를 만나면 돼.”
“인수자가 누구예요?”
“이상철 대좌. 라커룸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 사람, 위험하지 않아요? 무사히 대금을 인수 받을 수 있을 가요?”
“염려 마! 국제 테러리스트로 이름이 올라있지만, 이런 일은 틀림없으니.”
“아무래도 지원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염려 말래도! 우리는 달러 가방만 챙기면 돼. 하와이 항공여권도 준비돼 있고, 나는 엘리즈만 있으면.........”
말끝을 흐린 남자가 앨리스 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국적인 마스크를 지닌 여자는 눈웃음을 치며 남자의 가슴에 안긴다. 남자가 여자의 입술을 찾았다. 두 사람이 처음보다는 긴 시간을 농도 깊은 키스를 했다. 여자가 일어나면서 남자의 손을 잡아서 이끌었다. 요원들이 주시하는 모니터 화면에서 두 남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곧 이어서 침대를 향하고 있는 CCTV 카메라 모니터 화면에 그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들이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을 벗고 침대로 올라간다. 침대 스탠드 불빛에 들어난 남자가 여자가 걸친 팬티마저 벗겨낸다. 염색을 한 듯이 약간 붉은색의 음모와 치부까지 들어낸 여자의 벌거벗은 알몸이 그대로 모니터 화면에 들어나 보였다. 혼혈인인 여자의 머리 색갈처럼 여인의 음모도 황금색으로 윤기가 흐른다.
요원들은 열심히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요원들 중 한명의 시선이 송나희를 향했다. 실내에 있는 요원들 중 유일한 여자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송나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적나라한 남녀의 정사장면에 그녀라고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한 마음가짐을 갖도록 훈련으로 단련된 그녀였다. 다만 그녀는 힐끔 강민우의 표정을 살필 뿐이다.
남자의 손길이 여자의 젖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등을 돌리고 있는 남자의 머리를 껴안은 여자의 둔부가 흐느적거렸다. 남자의 혀와 손길이 여자의 알몸을 더듬고 다니며 애무를 한다. 여자는 남자의 행위에 따라 격정적인 표정을 하기도 하면서 남자에게 매달린다. 남자는 가끔 동작을 멈추고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곤 했다. 벌거벗은 그들의 알몸이 클로즈업된다.
남자는 여자의 표정을 즐기는 듯했다. 송나희가 보기에는 여자의 몸짓이 정말 흥분해 못 이겨서라기보다는 조금은 가식적인 동작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아주 능숙하게 남자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얼굴에 핏줄이 돋아난 남자가 발기된 자지를 여자의 보지속으로 밀어 넣고 엉덩이를 내리 누른다. 신음을 흘리는 여자가 허리를 들어 올린다. 이제는 남자의 허리를 껴안은 여자가 허리와 둔부를 들어 올리며 남자를 공략하고 있었다.
남자는 무척 만족한 듯했다. 여자의 땀이 베인 이마를 손으로 쓸어주기도 하며, 여자가 거친 숨을 흘리며 잠간 행위를 멈추면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을 하였다. 마치 짐승이 엉겨 붙어 교미를 하고 있는 것처럼 노골적인 정사 장면이었다. 남자는 가끔 고개를 숙여 여자의 입술에 키스를 하기도 하고 젖가슴에 타액을 적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다리를 들어 올리면서 남자를 끌어당기곤 한다. 입술을 벌리고 매달리는 여자의 표정, 숨 가쁜 호흡, 여자의 허리를 들어 올리는 남자의 손길, 한동안 정사를 벌이던 그들이 지쳤는지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앨리스 킴의 몸 위에서 떨어져 내려간 주대창 서기관은 아쉬운지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른다. 벌거벗은 두남자의 알몸이 정면으로 모니터 화면에 들어나 보였다. 앨리스 킴이 주 서기관에게 무슨 말인지 귓속말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른 CCTV 카메라 모니터 화면에 앨리스 킴이 욕실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왔다. 곧 이어서 교대로 주 서기관이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나왔다.
샤워를 마친 그들은 옷을 걸쳐 입고 서로를 포옹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 본 주 서기관이 객실 룸을 나섰다. 앨리스 킴도 뒤따라 객실을 나갔다. 객실에 설치된 CCTV 모니터들은 영사기가 멈춘 것처럼 정적에 쌓였다. 마치 한편의 에로 비디오가 끝난 것 같았다. 송나희는 남자 요원들과 같이 모니터를 주시할 수 없어서 소파에 앉아 잡지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이진아는 저녁식사를 하라는 진 씨 할머니의 성화도 뿌리치고 책장을 뒤적이고 있으나 머릿속에는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는다. 왠지 오빠가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만 같은 망상 때문인지 피로가 엄습했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졸음이 와서 침대 위에 벌렁 눕는다.
눈을 감고 잠속에 빠져드는 세상은 섬뜩함을 느끼는 환각의 세계였다. 아니 낯익은 악몽이었다. 요즘 들어 벗어나고 있다고 느끼던, 그녀를 집요하게 붙잡고 늘어지는 악몽이었다. 그녀는 환각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쳐도 꿈은 사슬이 되어 그녀를 점점 더 결박해 온다.
검은 그림자가 되어 다가오는 커다란 고목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고목은 하늘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이진아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뜨거움에 걸치고 있는 옷을 벗어던진다. 시커먼 고목의 가지들이 살아 움직이며 손발이 되어 발가벗은 그녀를 끌어당긴다. 그녀는 발가벗은 알몸은 온통 검은 매직이 그려져 있어 묵화의 나신처럼 안간힘을 쓴다. 고목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악마의 음성을 흘린다.
‘내게로 오라! 고통을 잊으리라!’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흐느적거린다. 바람도 없는 하공에 검은 잎사귀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나뭇가지에 옥죄이는 고통 속에 그녀는 허벅지 사이를 손바닥으로 더듬는다. 고통과 함께 희열의 쾌감이 어우러진다.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녀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강민우의 그림자가 다가오다가 멈추어 섰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강민우를 부른다.
‘오빠! 날 좀 안아줘!’
어둠속을 향해 손을 뻗치면서 눈을 떴다. 한동안 잊었던 악몽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꿈속처럼 걸친 옷을 벗어던지고 팬티 차림이었다. 현실인지 악몽인지 모르겠다. 졸고 있는 전등불 아래 벽시계의 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환각을 느낀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 책꽂이위에 놓인 성모상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이진아는 벌거벗은 알몸에 잠옷을 걸친다. 허탈함에 젖어 방문을 나서서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의 벽시계는 정상적으로 자정을 향하고 있다. 진 씨 할머니마저 잠든 집안은 고요하기만 하다. 거실을 가로 질러 강민우의 방 앞으로 다가선다. 방문을 여니 언제 들어왔는지 침대 위에는 강민우가 잠들어 있었다.
강민우의 모습을 보고나서야 이진아의 마음이 평온해진다. 누구도 그녀를 헤치려하지 않는다. 온몸을 옥죄어 오던 검은 가지들도 없고 그녀를 덮치려고 나부끼던 검은 잎사귀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오빠의 얼굴에 배시시 미소를 짓는 송나희의 얼굴이 겹쳐져 떠오른다.
문득 송나희에게 오빠를 빼앗길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강민우의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비로소 안전하게 오빠에게 안전하게 보호되었다는 안정감이 들어 스르르 잠이 든다.
이른 새벽에 강민우는 괘종시계 소리를 듣고도 눈을 뜰 수 없었다. 일찍 일어나기 위해 괘종시계를 맞추어 놓았지만 피곤해서 몸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오 국장의 작전지시에 의해 일본으로 가기위해 선발 팀원들이 공항으로 모일 것이다.
몸을 뒤척이던 강민우가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팬티 차림으로 이진아가 가슴에 안겨 있었다. 다시 악몽에 시달려 온 것이라고 생각되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잠들어 있는 그녀를 안아서 그녀의 방으로 가서 침대위에 눕힌다. 서둘러 세면을 하고 우유 한잔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강민우가 집을 나설 때까지도 이진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공항에는 입국하는 가족이나 손님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 항공기 도착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 배웅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강민우는 가까스로 출국시간에 맞추어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검색대 앞으로 빠른 걸음을 옮기던 주춤하였다. 검색대 앞으로 쏜살같이 카트를 밀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카트와 부딪쳐 충돌한 강민우는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하였다. 간신히 카트를 붙들고 상대를 바라봤다. 카트에 실렸던 가방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
상대는 가방을 다시 카트에 올려놓더니 단 한마디를 남기고 강민우 앞을 스쳐 지나간다. 수염이 텁수룩하고 베레모를 쓴 남자는 사진작가인지 아니면 사진기자로 보였다. 입국장 안에서는 도쿄행 항공기에 탑승하라는 안내 방송이 계속 들려온다. 이맛살을 찡그리며 남자를 바라본 강민우는 서둘러 검색대를 지나 입국장 안으로 들어섰다.
시부야 번화가에서 얼마 되지 않는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는 동경 조총련지부. 주소를 알리는 문패 외에 다른 간판은 없었고, 건물 자체도 일반 주택과 차이가 없다. 다른 주택과 다른 점이라면 하루에 이십 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날락거린다는 점이다. 그들 중에는 순수하게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교포들도 있었고, 정치 활동을 하는 프락치들도 있었다.
리상철은 주방을 지나는 복도와 연결된 작은 방에서 벽에 기대 두 다리를 뻗고 있었다. 삭발한 정수리에서부터 뒷목까지 이르는 긴 상처를 봐서는 위협적인 분위를 풍기는 사내였다. 리상철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른 손 검지에 반달모양의 쇳조각이 하나 걸려 있었다. 권총 방아쇠 부위만 따로 빼내어 검지에 걸친 것이다.
인간의 눈 같지 않고 특이한 눈매였다. 화가 난 것처럼 미간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은 눈썹, 눈꺼풀 역시 눈썹과 평행이 되어 눈초리까지 직선을 짙게 그리고 있었다. 반면에 아래쪽 눈꺼풀은 크게 반원을 그린 모습이다. 처음 보는 사람은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고 착각할 눈매였다.
방문이 열리고 나이든 노인이 녹차를 들고 나타났다.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노인이 리상철의 눈치를 살폈다.
“내래 불안해서 못 견디겠쑤다. 언제까지 여기에 계실 겁네까? 아새끼들이 자꾸 캐물어서 난감합네다.”
“뭐 어카란 말이네?”
리상철은 노인이 건네는 찻잔을 거칠게 낚아챘다. 뜨거운 찻물의 절반이 밖으로 튀어 나갔고, 일부는 노인의 손과 리상철의 손을 적셨다.
“그 종간나 새끼들이 다른 곳은 위험하다면서 여기에서 접선하자 하는데 어카갔어.”
노인은 뜨거운 것을 참으면서 슬쩍 자신의 손등을 살폈다. 붉게 부어오른 부위가 따끔거렸다. 반면 리상철의 손등에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화상을 입었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지도 모른다. 리상철의 손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붉었다.
“대체 누굽네까? 정보를 준다는 놈이.”
노인은 쓰라린 손등에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리상철은 일본과 북조선을 왕래하며 비밀 업무를 수행하는 테러리스트였다. 그의 이름은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명단에도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며칠을 버티며 외부인을 기다리는 리상철은 조총련 지부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좌 동무가 여기 있다는 것이 발각되면 곤란하지 않습네까?”
“어떤 놈이 고발할까 봐, 걱정인 거네?”
“여긴 조총련 지부에서 가장 많은 실적을 올리고 있는 중요한 지부입네다. 지부를 잃는 다는 것은 위대한 인민해방군의 커다란 손실입니다.”
“알았으니 걱정 말라우.”
벼르고 있다가 말하는지 노인의 단호한 말을 리상철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한마디로 잘라 버린다. 이상철이 다시 뭔가 말하려다가 나뭇가지가 부딪기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앳된 청년이 문 틈새로 슬그머니 고개를 빼 내밀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카라.”
청년의 안내로 방 안에 들어온 사람은 20대 중반의 여자였다. 검은 색 정장 차림에 중앙 가르마에 단정하게 묶은 헤어스타일이 고지삭한 느낌을 준다. 사무직이나 공무원에 적합한 외모였다. 리상철은 두툼한 봉투를 꺼내 여자의 앞에 던졌다.
“받으라우. 내래 시간이 없으니 빨리 얘기 끝내야 안카써?”
여자는 말이 없이 핸드백을 열었다. 핸드백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내 리상철에게 내 밀었다. 그리고 내용을 훑어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리상철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내일 마츠다세이코 공연장에서 뵙자고 합니다. 라커룸에서 달러와 물건을 교환한답니다.”
“뭐이 어드레!? 와 하필이면 에미나이 공연장. 내가 그깟 공연 구경하러 왔습네. 그리고 이 간나새끼들은 누구입네?”
“KCIA(안기부) 수사 팀원들입니다.”
“이 간나 새끼들이 지금 와있다고?”
“네. 오늘 입국했습니다.”
“무슨 일로?”
“우리 정보가 흘러 들어간 모양입니다. 그럼 전달은 끝난 것으로 알고 가보겠습니다.”
“아직 아니야.”
여자가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리상철은 손에 쥔 종이들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머리의 상처 때문인지 리상철의 미소는 험악해 보였다. 나지막한 목소리지만 강압적인 말투에 여자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았다. 이제까지 짓고 잇던 무표정이 조금은 지워지고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다.
“또 할 말이 뭐죠?”
“동무의 정보가 사실인지가 중요하다는 거 말이디.”
“거짓 정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진짜라는 증거가 없디 안카써? 함정인디도 모르잖카서.”
여자는 입술을 꾹 다물어 보인 채 리상철을 노려보았다. 잠시 서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노려보았다. 여자는 리상철의 눈빛에 질린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핸드백에 손을 넣었다. 여자가 꺼낸 것은 신분증명서였다. 여자는 증명서의 사진과 자신의 얼굴을 대조하기 쉽도록 리상철 앞에 바짝 다가앉았다.
“저는 주일 대사관의 주대창 서기관 밑에서 일하는 최숙향입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그쪽 루트로 제 신분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돈 때문에 배신할 여자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내 믿어 보갔어.”
여자는 노인과 리상철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리상철은 웃음을 터트렸다. 노인은 내내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웃지 마시라요. 저간나 에미나이를 믿습니까? 우리 조총련 지부가 알려지면 어카갔습네까? 더욱이나 대좌 동무는 남조선이 경계하는 요원입네다.”
“염려마라우. 알아봤자 그 새끼들이 뭘 어카갔어.”
“어쨌든 KCIA(안기부)가 와 있다니 조심하시라우요.”
“이제 방구석에 처박혀 있기도 힘들구만, 바람 좀 쏘이고 오갔어.”
리상철이 일어나면서 들고 있던 종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종이를 주워 올리며 리상철이 노인을 향해 히죽 웃었다. 노인은 순간 리상철의 표정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잔인하고도 차갑게 보이는 눈빛 때문이다. 리상철은 허리 뒤춤에 끼워 두었던 권총을 어루만지며 방문을 열고 나선다.
오사카 이타미 공항에서 도쿄로 향하는 도로로 승용차들이 달리고 있다. 흰색 오픈카 한 대가 승용차 대열 속에 끼어 달리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선글라스를 착용한 강민우가 있었다. 일본 현지 정보원들이 오사카 공항에 준비해놓은 승용차였다. 승용차는 산중턱으로 향하는 오르막길로 굽어진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쾌청한 날씨에 멀리 오쿠타마 호수가 보이기 시작한다. 조수석에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롱부츠에 프렌치 코트를 걸친 송나희가 앉아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호수의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핸들을 잡고 있는 강민우가 그녀를 힐끔 쳐다본다.
"잠시 쉬었다가 갈까?"
"좋아요."
도로변의 넓은 공터에는 쉼터가 있었고,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주차된 차량들이 보였다. 강민우는 천천히 쉼터의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시켰다. 승용차에서 내린 그들은 절벽위에 세워진 난간으로 다가갔다.
멀리 보이는 오쿠타마 호수의 물결이 기울어져가는 석양을 반사하며 반짝거리며 흘러간다. 색 바랜 단풍들이 어우러진 산 사이에 잔잔한 물결을 이룬 오쿠타마 호수의 정경이 보인다. 호수의 맑은 물결이 기울어져가는 석양을 반사하며 반짝거린다. 어디선가 잔잔한 음악의 선율이 흘러오는 것만 같다.
"나희씨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지?"
"글쎄요!? 행복해지고 싶었던 순간들이 돌이켜 보면 가슴 아팠으니까요. 민우씨는 그런 순간이 있었어요?"
"한 번도 그런 기억이 없는 것 같아서.......!?"
"누군가 그랬잖아요. 행복에 대해 반문하고 싶은 순간이 행복한 것이라고요."
"그럴까......!? 그럼 지금 내가 행복한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나희씨가 있으니까."
"농담이죠?"
"아닌데."
"호호~! 매너적인 말은 싫어요."
“정말인데.”
관광객을 위해 설치된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망원경으로 오쿠타마 호수를 바라보던 송나희가 미소를 띠며 강민우를 쳐다본다. 그녀의 눈동자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강민우가 난간에 피어있는 들꽃을 꺾어 송나희의 귓가에 꽂아주며 싱긋이 웃음을 지었다.
“예쁜데.”
“지금 계절에 무슨 꽃이죠?”
“나희 꽃.”
“피 잇~! 날 놀리고 싶어요?”
“하하~! 꽃보다 아름다운 여자 이름인데.”
“못 됐어. 정말 놀릴 거예요!?”
송나희는 눈을 흘기며 강민우의 어깨를 가볍게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렇지만 강민우가 살짝 피하며 짓궂은 웃음을 흘린다. 그녀가 다시 그에게 다가서며 주먹을 휘두른다. 쫓고 쫓기면서 그들은 망원경 사이를 맴돌았다. 송나희는 멈추어선 강민우의 어깨를 가볍게 주먹으로 두들겼다.
강민우가 멈추어 선 것은 허리에 찬 햄 무전기의 호출음 때문이었다. 송나희와 시선을 마주친 그가 무전기의 버튼을 눌렀다. 일본에 임시 설치된 상황실로부터 보내온 신호임을 알고 응답을 했다.
“네, 비트 원입니다.”
이어서 무전기에서 전희재 과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희재 과장은 도쿄에 설치된 임시 상황실을 지휘하고 있었다.
“비트 상황실이다. 마츠다세이코 공연에 참석하는 대상을 알아냈다. 특별히 공연을 지원하는 기업이나 후원자는 없었고 매일 스포츠에서 취재 사진기자가 이미 일본에 도착했다는 정보이다. 사진기자가 소유한 장비 속에 우리가 찾는 물품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지원팀이 도착하면 즉시 다음 작전을 지시 할 것이다.”
“네, 알았습니다.”
“앨리스 킴의 위치를 알아냈고, 현지 팀이 프린스 호텔의 앨리스 킴을 감시중이다. 현지 감시팀의 현장으로 합류하도록 하라.”
“비트 원, 송나희 요원과 현장으로 갑니다.”
무전 통화를 끝낸 강민우는 다소 흥분한 표정이었다. 강민우는 광주 ‘점프’ 작전 당시 보았던 앨리스 킴의 모습을 떠올렸다. 앨리스 킴의 이름을 반복하면서 주차된 승용차로 향해간다. 송나희를 태운 강민우의 승용차가 쉼터를 빠져나가 도쿄를 향하는 대로를 질주해 나간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도쿄 시내의 프린스 호텔. 호텔의 룸 안에는 헤드셋을 쓴 사내들이 컴퓨터 모니터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도청을 하고 있는 안기부 소속의 일본 주재원들이다. 모니터 안에는 도청을 하고 있는 객실 룸이 나타나 있었다. 거실과 침실, 그리고 화장실 등 요소마다 설치된 비밀 CCTV가 작동되고 있었다.
객실 룸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모니터는 정지된 화면 같았다. 다소 지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요원들 뒤에는 강민우와 송나희의 모습도 보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객실 문이 열렸다. 요원들이 바짝 다가앉아 모니터를 주시한다. 이국적인 마스크를 지닌 여자와 한국남자가 들어섰다.
그들은 안기부 요원들이 감시중인 인물들이다. 여자는 미국계 혼혈아 남선미, 일명 앨리스 킴이고, 남자는 주일대사관의 주대창 제1서기관이었다.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노란 눈을 가진 앨리스 킴이 코트를 벗고 남자에게 안긴다. 가벼운 키스를 교환한 남자가 소파에 가서 앉고, 여자는 싱크대를 향해 돌아선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그럴까?”
여자가 커피포트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커피 잔을 꺼낸다. 곧 이어서 여자가 커피를 탄 잔을 들고 남자 옆에 와서 앉았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어깨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남자는 커피보다 여자에게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그러나 여자는 다른 마음인지 커피 잔을 들고 눈웃음을 치며 남자를 바라본다.
“물건은 틀림없이 도착하는 거지요?”
“이미 도착했어. 매일 스포츠 신문 사진기자인데, 같이 물건 인수자를 만나면 돼.”
“인수자가 누구예요?”
“이상철 대좌. 라커룸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 사람, 위험하지 않아요? 무사히 대금을 인수 받을 수 있을 가요?”
“염려 마! 국제 테러리스트로 이름이 올라있지만, 이런 일은 틀림없으니.”
“아무래도 지원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염려 말래도! 우리는 달러 가방만 챙기면 돼. 하와이 항공여권도 준비돼 있고, 나는 엘리즈만 있으면.........”
말끝을 흐린 남자가 앨리스 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국적인 마스크를 지닌 여자는 눈웃음을 치며 남자의 가슴에 안긴다. 남자가 여자의 입술을 찾았다. 두 사람이 처음보다는 긴 시간을 농도 깊은 키스를 했다. 여자가 일어나면서 남자의 손을 잡아서 이끌었다. 요원들이 주시하는 모니터 화면에서 두 남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곧 이어서 침대를 향하고 있는 CCTV 카메라 모니터 화면에 그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들이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을 벗고 침대로 올라간다. 침대 스탠드 불빛에 들어난 남자가 여자가 걸친 팬티마저 벗겨낸다. 염색을 한 듯이 약간 붉은색의 음모와 치부까지 들어낸 여자의 벌거벗은 알몸이 그대로 모니터 화면에 들어나 보였다. 혼혈인인 여자의 머리 색갈처럼 여인의 음모도 황금색으로 윤기가 흐른다.
요원들은 열심히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요원들 중 한명의 시선이 송나희를 향했다. 실내에 있는 요원들 중 유일한 여자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송나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적나라한 남녀의 정사장면에 그녀라고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한 마음가짐을 갖도록 훈련으로 단련된 그녀였다. 다만 그녀는 힐끔 강민우의 표정을 살필 뿐이다.
남자의 손길이 여자의 젖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등을 돌리고 있는 남자의 머리를 껴안은 여자의 둔부가 흐느적거렸다. 남자의 혀와 손길이 여자의 알몸을 더듬고 다니며 애무를 한다. 여자는 남자의 행위에 따라 격정적인 표정을 하기도 하면서 남자에게 매달린다. 남자는 가끔 동작을 멈추고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곤 했다. 벌거벗은 그들의 알몸이 클로즈업된다.
남자는 여자의 표정을 즐기는 듯했다. 송나희가 보기에는 여자의 몸짓이 정말 흥분해 못 이겨서라기보다는 조금은 가식적인 동작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아주 능숙하게 남자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얼굴에 핏줄이 돋아난 남자가 발기된 자지를 여자의 보지속으로 밀어 넣고 엉덩이를 내리 누른다. 신음을 흘리는 여자가 허리를 들어 올린다. 이제는 남자의 허리를 껴안은 여자가 허리와 둔부를 들어 올리며 남자를 공략하고 있었다.
남자는 무척 만족한 듯했다. 여자의 땀이 베인 이마를 손으로 쓸어주기도 하며, 여자가 거친 숨을 흘리며 잠간 행위를 멈추면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을 하였다. 마치 짐승이 엉겨 붙어 교미를 하고 있는 것처럼 노골적인 정사 장면이었다. 남자는 가끔 고개를 숙여 여자의 입술에 키스를 하기도 하고 젖가슴에 타액을 적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다리를 들어 올리면서 남자를 끌어당기곤 한다. 입술을 벌리고 매달리는 여자의 표정, 숨 가쁜 호흡, 여자의 허리를 들어 올리는 남자의 손길, 한동안 정사를 벌이던 그들이 지쳤는지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앨리스 킴의 몸 위에서 떨어져 내려간 주대창 서기관은 아쉬운지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른다. 벌거벗은 두남자의 알몸이 정면으로 모니터 화면에 들어나 보였다. 앨리스 킴이 주 서기관에게 무슨 말인지 귓속말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른 CCTV 카메라 모니터 화면에 앨리스 킴이 욕실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왔다. 곧 이어서 교대로 주 서기관이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나왔다.
샤워를 마친 그들은 옷을 걸쳐 입고 서로를 포옹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 본 주 서기관이 객실 룸을 나섰다. 앨리스 킴도 뒤따라 객실을 나갔다. 객실에 설치된 CCTV 모니터들은 영사기가 멈춘 것처럼 정적에 쌓였다. 마치 한편의 에로 비디오가 끝난 것 같았다. 송나희는 남자 요원들과 같이 모니터를 주시할 수 없어서 소파에 앉아 잡지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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