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 복도 벽에 부착된 명패들을 학인하며 걸어가던 강민우는 이진아 담당의사의 진찰실 문을 노크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강민우는 간호사의 안내를 받고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안경을 걸친 의사가 들어왔다. 나이가 오십대로 보이는 담당의사인 안 박사가 풍기는 분위기에 강민우는 왠지 신뢰감이 들었다. 안 박사가 밝은 불이 켜진 벽걸이에 뇌파검사 필름을 걸쳤다. 그리고 안경너머로 강민우를 쳐다보며 묻는다.
“혹시 환자가 과거에 두뇌를 손상당하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당한 경우가 있습니까?”
“네........! 그럴 수도.”
강민우는 광주사태의 긴박감과 이진아가 흑사회 조직원들에게 윤간을 당하던 상황을 떠 올린다. 그녀가 갖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강민우는 마른 침을 삼킨다. 어떤 진단이 나올지 궁금한 그는 안 박사의 입을 쳐다본다. 불빛에 들어나는 필름을 볼펜으로 가리키는 안 박사의 말이 이어간다.
“검사결과 환자의 혼절 상태는 스트레스나 충격으로 인한 뇌혈류장애 때문입니다. 뇌혈류장애는 일시적이기 때문에 치료하면 되지만, 환자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문제라고요......!?”
“보다시피 전두엽의 알파파는 감소현상이고 베타파가 증가되고 있습니다. 베타파의 증가는 고도의 스트레스 현상을 나타내고 불안과 강박감, 그리고 욕구불만을 불러 오지요. 그리고 도파민계의 과잉활동은 기능적으로 과도하게 활동하는 신경수용에 영향을 끼칩니다. 한마디로 심해지면 환자는 기억속의 충격으로 인해 피해망상과 정신 분열증을 앓게 되기도 합니다.”
“정신 분열증이라면.......!?”
“네! 심리적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한 불안, 우울 및 피해의식으로 인한 환시, 환청 등을 보이며 나아가서는 수족마비 현상이 오고 환각과 망상을 그 주요 증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자폐적이므로 외부의 현실보다는 개인의 욕구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지요. 때로는 기이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경험과 사고에 사로잡혀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음.......! 보호자의 관심과 환자 자신이 기억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의지가 필요하고, 지금은 초기 단계라서 큰 걱정은 안하셔도 되지만, 입원치료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꾸준한 치료와 약을 복용해야지요.”
“...........!”
그동안 보살펴온 이진아를 잘 알고 있는 강민우는 의사의 말에 충분히 수긍이 갔다. 의학적인 설명은 몰라도 그녀의 가슴속에 내재된 고통스러움을 예감하는 강민우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는 담당의사의 진료 결과를 받아 들여 이진아를 입원시키기로 결정했다. 병원 측의 안내를 받아 간병인에게 이진아를 간호하게 하였다.
걱정이 되는 강민우는 업무 중에도 병원에 들려 이진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이틀이 지나면서 혼절 상태였던 이진아는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으며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갔다. 표정이 밝아진 이진아는 답답하다면서 퇴원을 하겠다고 강민우를 졸랐다. 입원한지 일주일이 되던 날, 강민우는 이진아를 퇴원시켰다.
이진아는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활달한 일상생활을 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밝은 모습으로 학교와 피아노 학원, 그리고 체육관을 다니는 부지런함을 보였다. 그렇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강민우는 항상 걱정스러워 한다. 언제 다시 이진아가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사로잡혀 정신과 심리적인 질환을 앓을지 두려웠다. 그런 두려움은 최태웅 일당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약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범죄자들에 대한 증오심이기도 했다.
왕릉 안기부 사무실에서 정보근무를 나서려던 강민우는 갑자기 스피커에서 전달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회의실로 전 요원들을 집합하라는 긴급 상황이었다. 건물 내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빠른 걸음으로 요원들이 움직인다. 며칠 전에 일부 요원들은 서남아시아 지역 순방에 오른 대통령을 수행하는 팀으로 차출되었었다. 대회의실에 모인 요원들이 긴장하는 표정으로 웅성거린다. 해외 안보 담당차장이 단위에 올라 긴급 상황을 전달한다.
인도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대통령이 아웅산 국립묘지를 참배 중에 테러를 당했고, 많은 수행인원이 사망하고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아웅산 묘에서 헌화를 할 예정이었던 대통령 부부는 우연히 영빈관에서 아웅산 묘역으로의 출발이 지연되고 도착 예정5분 전에 폭발이 일어나 대통령 부부는 구사일생으로 희생을 면했다고 한다.
사건 직후 대통령은 모든 일정을 중지하고 특별기로 귀국하기에 대통령을 경호하는 특별 팀을 구성한다고 했다. 신속하게 구성된 경호팀에 강민우도 선발되었다. 긴장감 속에 실탄을 무장한 경호팀이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을 경호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청와대까지 대통령을 경호한 요원들은 광릉으로 돌아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대기하였다.
국내외 언론과 매스컴은 아웅산 국립묘지 폭발사건에 대해 북한의 관여 설, 한국내의 반정부 세력의 범행 설. 미얀마 국내의 카렌족 등 소수 민족반군 세력에 의한 테러 설, 게릴라전을 계속한 미얀마공산당 관련설, 나아가서는 정권의 자작극 설 등의 억측이 난무한 가운데 버마 정부에 의한 정확한 사건 조사가 진행되었다. 정부는 즉각 당일 오후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하고, 군과 경찰에 "특별 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또한 이번 사건은 대통령의 암살을 노린 북한의 소행이라 단정하고 발표했다.
아웅산 사건을 수사한 미얀마 정부가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미얀마 정부는 용의자 두 명을 체포하고 한 명을 사살했다고 했다. 세 명 모두 한국인 이며 이번 사건의 진범 이라고 단정해서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의 국적은 발표하지 않았고 북한 공작원의 범행이라고 단정하며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외교 단절 조치로서 가장 강력한 북한의 국가 승인을 취소했다.
아웅산 테러 사건의 순직자 장례식이 거행되고, 유가족들의 애타게 통곡하는 장면의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애잔함을 금치 못한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우리나라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국회에서 연설했다. 미국 대통령은 방한기간 중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최전방의 미군 기지를 방문하여 남북대결 현장을 목격했고 한-미공동성명을 통해 한국의 안보가 미국의 이익에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테러에 대한 국가방위와 안보를 중요시하고 비공개로 안기부 내에 국가대테러정보기관인 NTIS를 조직을 했다. 중앙정보부시절의 NDSS의 부활이고 안기부 행동대원을 중심으로 예전의 방첩대와 경찰특공대 중에 베테랑요원들이 선발되었다. 이미 경험이 풍부한 강민우도 NTIS에 선발되어 한 달간 비밀리에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하얀 백설로 뒤덮인 도시에는 큼직한 눈송이가 내리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거리에는 환한 미소를 지은 청춘 남녀들의 행렬이 지나간다. 줄지어 있는 상가마다 울긋불긋한 꼬마전등이 깜박이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진열되어 있어 더욱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특히 백화점 안팎은 혼자하기 이를 데 없다.
젊은 여성 의류 전문 메이커 코너를 오고가는 인파속에 강민우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옷을 갈아입는 박스를 쳐다보고 있다. 거울이 달린 박스의 문이 열리고 무릎위로 들어나는 체크무늬 원피스에 하얀 양털이 달린 재킷을 걸친 이진아의 모습이 나타난다. 풋풋함과 앙증스러움이 돋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강민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제복을 걸친 종업원이 그녀의 재킷 칼라를 고쳐주며 칭송을 한다.
“어머! 손님을 위한 디자인 같아요. 너무 예쁘셔서.”
“........!?”
거울을 향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본 이진아가 강민우를 향해 돌아선다. 그리고 보조개를 드리운 자잘한 미소를 띠면서 허리를 비틀어 애교를 부린다. 강민우는 이진아에게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강민우는 그녀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종업원에게 그녀가 입고 왔던 옷을 쇼핑백에 넣어 달라고 했다.
의상 코너를 돌아 나오면서 이진아는 수시로 상점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이진아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강민우의 팔짱을 끼고 깡충거리는 발걸음을 옮긴다. 의상 코너를 돌아 액세서리 보석 코너 앞을 지나던 강민우가 걸음을 멈춘다. 그는 쇼윈도 안에 투명한 큐빅과 사파이어로 제작된 목걸이와 반지 세트를 바라보았다. 목걸이에는 반짝이는 사파이어가 박힌 페넌트가 달려 있었다. 강민우가 목걸이를 가리키며 종업원에게 말한다.
“저거 꺼내주실래요?”
“아! 네. 값은 비싸지만, 호주에서 수입한 것입니다.”
목걸이를 꺼내 보이는 종업원은 아울러 목걸이 제품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사파이어는 진실, 성스러운 덕, 천국을 명상함, 정숙함을 의미한다는 부가 설명을 하며 이진아의 가슴 앞에 들어 보인다. 이진아는 자신에게는 넘쳐 보이는 목걸이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여종업원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이진아를 바라보며 상품을 적극 권장했다.
“손님이 예쁘셔서 잘 어울리네요.”
“그거 주세요.”
두말 하지 않고 강민우는 종업원이 제시하는 금액을 신용카드로 지불한다. 그리고 포장박스를 쇼핑백에 넣고 반지를 이진아에게 끼워준다. 목걸이를 걸어주는 강민우를 올려다보는 이진아의 눈망울에 습기가 어려 반짝인다. 강민우는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튕긴다.
이진아가 인형들이 있는 코너 앞에서 머뭇거렸다. 쇼 케이스 안에는 여자 인형들이 각각 다른 이름표를 달고 진열되어 있었다. 이진아가 여자 인형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깜찍한 모습의 외국소녀 모습의 인형이었다.
“이름이 애리이네. 애리! 오빠! 나 이거 갖고 싶어.”
“꼭 진아 같구나.”
강민우는 종업원에게 이진아가 끌어안는 인형 값을 지불했다. 백화점을 나오면서 이진아는 강민우의 허리에 착 달라붙어 걸음을 옮긴다. 번잡한 거리에는 제각각의 차림으로 오가는 여자들이 더 많았다. 인파속에서 고개를 젖히며 활짝 웃는 여인을 향해 시선이 갔다. 그를 올려다보던 이진아가 뽀로통한 목소리를 흘린다.
“오빤.......! 진아가 있잖아! 왜, 다른 여자를 봐!?”
“하하~! 보기는.......!? 그냥 아무런 의미 없어.”
“진아가 오빠 여자 아냐? 내가 싫어?”
“아니........! 진아가 좋지.”
이진아의 돌발적으로 흘리는 말에 강민우는 별다른 의미를 두고 싶지 않지만, 대답하기 혼란스러운 질문이었다. 다만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순간, 강민우는 송나희를 떠올린다. 요즘 이따금 식사를 같이 하기도 하지만, 같은 기관에 근무하면서도 송나희와 대화를 할 시간의 여유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감추어진 내면의 감정을 들어내 보일 듯 하는 송나희의 표정이 은연중에 강민우의 마음에 깃들어 있다.
토끼뜀을 하며 강민우의 팔짱을 낀 이진아가 올려다보며 자잘한 미소를 짓는다. 시선을 마주한 강민우도 사랑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함박 눈송이가 떨어지는 밤하늘에 불꽃의 축포가 터진다. 문득 걸음을 멈춘 이진아가 강민우 앞을 막고 다가선다. 그리고 강민우 목에 팔을 두르고 빤히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강민우의 입술에 입술을 포갠다.
강민우는 돌발적인 입맞춤에 당황하여 급히 숨을 들이 마신다. 그러나 이내 이진아에게서 흘러나오는 싱그러운 체취에 도취한다. 그녀의 허리를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입술을 마주한다. 강민우는 그녀의 입술을 탐닉하며 순간적인 열정에 묻힌다. 이진아는 가벼운 입맞춤으로 자신의 애정을 표시하고 싶었다.
그런데 강민우의 강렬한 키스를 받고 이진아는 느껴보지 못한 짜릿한 감정에 휘말린다. 자신의 입술이 강민우의 입속으로 흡입된 상태에서 그녀가 눈동자를 크게 뜨고 올려다본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한다. 강민우는 지금까지 이진아를 여동생처럼 애정으로 보살폈다.
이진아에게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체취를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여동생이기에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여자로 인식해서 진한 키스를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강민우는 몽롱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의식한다. 놀라는 듯이 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강민우는 그때서야 자신도 알지 못하는 열정에 빠진 것을 느낀다. 강민우는 자신을 탓하며 그녀를 풀어 놓는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힌 이진아가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흘린다. 그리고 그녀는 강민우의 손을 잡아끌면서 뛰어간다. 거리를 누비는 인파 속으로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한해를 보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마음은 다사다난했던 사건들을 잊으려한다. 다만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 속에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으로 가득하다. 신정 연휴가 지나고 강민우는 전산실의 정기춘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정기춘이 전산실 요원들과의 술좌석에 강민우를 부른 것이다. 다른 요원들은 취해서 가고 유서연과 송나희만이 남아 있었다. 이미 소주병 여러 개를 비운상태에서 정기춘이 잔을 들어서 마시기를 권한다.
“자! 올 한해는 건강들하고, 대박나기를 바라면서 한잔하자고. 그런데 둘 사이는 잘 안 되는 거야?”
“어머! 송 선배님하고 언니하고 연애중예요!? 그래서 송 선배님 온 거예요?”
“하하~! 무슨 소리야! 저 사람이 취해서 하는 말이지.”
강민우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흘린다. 취기어린 눈빛으로 정기춘은 강민우와 송나희를 손가락질 하며 짓궂은 표정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리 술을 마셔서 얼굴이 발그스름해진 송나희가 다소곳이 앉았다가 더욱 얼굴을 붉히며 눈웃음을 짓는다. 강민우는 멋쩍은 표정으로 송나희를 곁눈질하여 바라본다. 유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정말이야? 언니!”
“아냐, 얘는! 정 선배님이 술 취해서 하는 말을.”
송나희는 강하게 부정하면서 외면을 했다. 은연중에 강민우를 마음에 담고 있던 유서연은 송나희의 표정을 살폈다. 유서연의 마음을 더욱 부채질 한 것은 뚫어지게 바라보던 정기춘이 또 다시 하는 말이었다.
“애들도 아니고 중개가 필요한가?”
“잘됐네! 언니 축하해.”
“얘는 술좌석에서 공연히 하는 말을.......”
송나희가 정기춘에게 눈을 흘긴다. 송나희와 강민우 사이를 확인하고 싶었던 유서연은 정기춘의 짓궂은 말이 더욱 알쏭달쏭하였다. 유서연은 공연한 질투심으로 송나희의 표정을 살폈다. 입장이 난처해진 강민우가 정기춘을 윽박지른다.
“쓸데없는 소리 마! 난 국가에 받친 몸이야.”
“국가........!? 나 자신이 행복해야, 국가도 있는 거지. 미스 송! 안 그래?”
“글쎄요.......!? 정 선배님은 낙천적이시네요.”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지.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사는 게 좋지. 난 언젠가는 이 직업 때려 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정기춘의 푸념을 듣는 송나희는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음식점 안이 갑자기 시끄러워진다. 그들의 뒤편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끼리 언성을 높이더니 의자가 쓰러지고 싸움이 벌어진다. 술 마시던 사람들끼리 삿대질을 하더니 엉키어 몸싸움을 한다. 주인과 종업원들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말린다. 보고 있던 정기춘이 웃음을 흘리며 일어선다.
“하~! 왜 싸우고들 난리야! 민우야! 난 간다. 둘이 잘 해봐.”
“저도 이만 갈래요.”
정기춘이 일어서고 유서연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민우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왜 가려고!? 술 몇 잔 안마셨는데, 불러 놓고 가는 법이 어디 있어.”
“하하~! 일차 계산했으니 나머지 술값은 자네가.......! 알았지?”
“취하긴 취했군.......!”
휘적거리며 일어서는 정기춘을 보고 강민우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송나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유서연이 강민우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음식점을 나간다. 뒤이어 바바리코트를 걸친 정기춘이 비틀거리며 음식점 입구를 나선다. 싸움을 하던 손님들이 밖으로 나가고 음식점 안이 조용해진다. 머쓱해진 강민우는 나머지 술잔을 비웠다. 송나희가 나머지 술을 마시고 빈잔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강민우가 일어선다.
“우리도 가죠?”
“네........!?”
카운터로 다가선 강민우가 나머지 술값을 지불하고 음식점을 나선다. 훈훈한 음식점을 나서니 더욱 쌀쌀한 겨울의 밤바람이 옷깃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멀리 정기춘과 유서연이 걸어가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음식점을 나선 강민우는 술기운이 더 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정기춘처럼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다.
술을 마시자는 정기춘의 말에 강민우는 지프차를 광릉에 두고 왔다. 대로변에서서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어 세운다. 강민우는 가까이 다가서는 택시 문을 열고 뒤를 돌아본다. 갈색 모피가 달린 점퍼를 입고 서 있는 송나희에게 손짓을 한다.
“가다가 내려줄게, 타요!”
“........!”
강민우가 먼저 뒷좌석에 올라타고 이어서 송나희가 택시에 오른다. 강민우가 운전사에게 일단 방이동으로 가자고 한다. 송나희는 문득 강민우가 지프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던 날을 떠 올린다. 시트에 끼인 머리카락을 빼주려는 것도 모르고 키스를 하려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순간을 떠 올리며 ‘큭~!’하고 웃음을 흘린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강민우가 쳐다본다.
“왜......!? 내가 뭐 이상한 가?”
“아뇨! 그냥........”
“미스 송은 언제까지 이 직업에 종사 할 거지?”
“나도 모르겠어요. 이따금 조용하게 쉬고 싶기도 하고.......! 선배님은?”
“과수원이나 목장을 하며 조용하게 지내고 싶어도, 개인적으로 할 일이.......”
“아! 저도 목장 같은 일을 하고 싶어요.”
“미스 송도 그런가......!?”
“음.......! 언젠가는 안기부를 그만 두겠네요?”
“아마도 살아 있다면.......”
“그렇게 말하니까, 비관적으로 들려요.”
“영원히 사는 목숨이 아니니까.........”
“어느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세요?”
“행복.......!? 글쎄 굳이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미스 송은?”
“하기야.......! 행복을 느끼지 못한 시절이 행복한 거래요.”
“여자의 행복은 뭐지?”
“글쎄요!? 사람들은 남편 잘 만나서 안락한 가정생활을 하는 것이라는데, 저는 왠지........”
“.......!?”
“왠지........!? 자신이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 미스 송 같으면 얼마든지 사랑 받을 텐데.”
“선배님이 그렇게 봐주니까, 다행이네요. 난 한번........ 실패했잖아요.”
“실패라고 생각하면 또 다른 시작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세요.......!? 선배님은 어떤 여자가 이상형예요?”
“이상형!? 글쎄 생각해 볼 여유가 없어서........미스 송 같은 여자라면. 하하~!”
“호호~! 그런 농담, 여자들한테 하면 여자들이 상처 받거나, 바람둥이로 오해받아요.”
“하하.......! 정말인데.”
“피 잇~!”
강민우의 농담 속에 진심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는 송나희는 쑥스러웠다. 차창으로 흐르는 도로의 가로등, 오색으로 흐르는 네온사인, 잠시도 멈추지 않는 간판의 불빛 명암 때문에 송나희의 얼굴은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강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는 송나희의 손가락 사이로 다섯 손가락을 모두 깍지를 껴서 순간적으로 힘을 주었다.
“앗! 아파요.”
흠칫 놀라는 송나희가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나 이내 곱게 눈을 흘긴다. 그녀는 첫사랑 이후 다른 남자에게 정겨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자신 스스로에게 놀라워했다. 강민우가 그녀의 옆모습을 슬그머니 훔쳐보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송나희의 표정. 미소와 함께 들어나는 보조개가 매력적이고 정겨워 보였다.-------
“혹시 환자가 과거에 두뇌를 손상당하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당한 경우가 있습니까?”
“네........! 그럴 수도.”
강민우는 광주사태의 긴박감과 이진아가 흑사회 조직원들에게 윤간을 당하던 상황을 떠 올린다. 그녀가 갖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강민우는 마른 침을 삼킨다. 어떤 진단이 나올지 궁금한 그는 안 박사의 입을 쳐다본다. 불빛에 들어나는 필름을 볼펜으로 가리키는 안 박사의 말이 이어간다.
“검사결과 환자의 혼절 상태는 스트레스나 충격으로 인한 뇌혈류장애 때문입니다. 뇌혈류장애는 일시적이기 때문에 치료하면 되지만, 환자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문제라고요......!?”
“보다시피 전두엽의 알파파는 감소현상이고 베타파가 증가되고 있습니다. 베타파의 증가는 고도의 스트레스 현상을 나타내고 불안과 강박감, 그리고 욕구불만을 불러 오지요. 그리고 도파민계의 과잉활동은 기능적으로 과도하게 활동하는 신경수용에 영향을 끼칩니다. 한마디로 심해지면 환자는 기억속의 충격으로 인해 피해망상과 정신 분열증을 앓게 되기도 합니다.”
“정신 분열증이라면.......!?”
“네! 심리적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한 불안, 우울 및 피해의식으로 인한 환시, 환청 등을 보이며 나아가서는 수족마비 현상이 오고 환각과 망상을 그 주요 증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자폐적이므로 외부의 현실보다는 개인의 욕구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지요. 때로는 기이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경험과 사고에 사로잡혀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음.......! 보호자의 관심과 환자 자신이 기억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의지가 필요하고, 지금은 초기 단계라서 큰 걱정은 안하셔도 되지만, 입원치료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꾸준한 치료와 약을 복용해야지요.”
“...........!”
그동안 보살펴온 이진아를 잘 알고 있는 강민우는 의사의 말에 충분히 수긍이 갔다. 의학적인 설명은 몰라도 그녀의 가슴속에 내재된 고통스러움을 예감하는 강민우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는 담당의사의 진료 결과를 받아 들여 이진아를 입원시키기로 결정했다. 병원 측의 안내를 받아 간병인에게 이진아를 간호하게 하였다.
걱정이 되는 강민우는 업무 중에도 병원에 들려 이진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이틀이 지나면서 혼절 상태였던 이진아는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으며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갔다. 표정이 밝아진 이진아는 답답하다면서 퇴원을 하겠다고 강민우를 졸랐다. 입원한지 일주일이 되던 날, 강민우는 이진아를 퇴원시켰다.
이진아는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활달한 일상생활을 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밝은 모습으로 학교와 피아노 학원, 그리고 체육관을 다니는 부지런함을 보였다. 그렇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강민우는 항상 걱정스러워 한다. 언제 다시 이진아가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사로잡혀 정신과 심리적인 질환을 앓을지 두려웠다. 그런 두려움은 최태웅 일당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약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범죄자들에 대한 증오심이기도 했다.
왕릉 안기부 사무실에서 정보근무를 나서려던 강민우는 갑자기 스피커에서 전달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회의실로 전 요원들을 집합하라는 긴급 상황이었다. 건물 내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빠른 걸음으로 요원들이 움직인다. 며칠 전에 일부 요원들은 서남아시아 지역 순방에 오른 대통령을 수행하는 팀으로 차출되었었다. 대회의실에 모인 요원들이 긴장하는 표정으로 웅성거린다. 해외 안보 담당차장이 단위에 올라 긴급 상황을 전달한다.
인도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대통령이 아웅산 국립묘지를 참배 중에 테러를 당했고, 많은 수행인원이 사망하고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아웅산 묘에서 헌화를 할 예정이었던 대통령 부부는 우연히 영빈관에서 아웅산 묘역으로의 출발이 지연되고 도착 예정5분 전에 폭발이 일어나 대통령 부부는 구사일생으로 희생을 면했다고 한다.
사건 직후 대통령은 모든 일정을 중지하고 특별기로 귀국하기에 대통령을 경호하는 특별 팀을 구성한다고 했다. 신속하게 구성된 경호팀에 강민우도 선발되었다. 긴장감 속에 실탄을 무장한 경호팀이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을 경호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청와대까지 대통령을 경호한 요원들은 광릉으로 돌아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대기하였다.
국내외 언론과 매스컴은 아웅산 국립묘지 폭발사건에 대해 북한의 관여 설, 한국내의 반정부 세력의 범행 설. 미얀마 국내의 카렌족 등 소수 민족반군 세력에 의한 테러 설, 게릴라전을 계속한 미얀마공산당 관련설, 나아가서는 정권의 자작극 설 등의 억측이 난무한 가운데 버마 정부에 의한 정확한 사건 조사가 진행되었다. 정부는 즉각 당일 오후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하고, 군과 경찰에 "특별 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또한 이번 사건은 대통령의 암살을 노린 북한의 소행이라 단정하고 발표했다.
아웅산 사건을 수사한 미얀마 정부가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미얀마 정부는 용의자 두 명을 체포하고 한 명을 사살했다고 했다. 세 명 모두 한국인 이며 이번 사건의 진범 이라고 단정해서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의 국적은 발표하지 않았고 북한 공작원의 범행이라고 단정하며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외교 단절 조치로서 가장 강력한 북한의 국가 승인을 취소했다.
아웅산 테러 사건의 순직자 장례식이 거행되고, 유가족들의 애타게 통곡하는 장면의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애잔함을 금치 못한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우리나라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국회에서 연설했다. 미국 대통령은 방한기간 중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최전방의 미군 기지를 방문하여 남북대결 현장을 목격했고 한-미공동성명을 통해 한국의 안보가 미국의 이익에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테러에 대한 국가방위와 안보를 중요시하고 비공개로 안기부 내에 국가대테러정보기관인 NTIS를 조직을 했다. 중앙정보부시절의 NDSS의 부활이고 안기부 행동대원을 중심으로 예전의 방첩대와 경찰특공대 중에 베테랑요원들이 선발되었다. 이미 경험이 풍부한 강민우도 NTIS에 선발되어 한 달간 비밀리에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하얀 백설로 뒤덮인 도시에는 큼직한 눈송이가 내리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거리에는 환한 미소를 지은 청춘 남녀들의 행렬이 지나간다. 줄지어 있는 상가마다 울긋불긋한 꼬마전등이 깜박이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진열되어 있어 더욱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특히 백화점 안팎은 혼자하기 이를 데 없다.
젊은 여성 의류 전문 메이커 코너를 오고가는 인파속에 강민우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옷을 갈아입는 박스를 쳐다보고 있다. 거울이 달린 박스의 문이 열리고 무릎위로 들어나는 체크무늬 원피스에 하얀 양털이 달린 재킷을 걸친 이진아의 모습이 나타난다. 풋풋함과 앙증스러움이 돋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강민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제복을 걸친 종업원이 그녀의 재킷 칼라를 고쳐주며 칭송을 한다.
“어머! 손님을 위한 디자인 같아요. 너무 예쁘셔서.”
“........!?”
거울을 향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본 이진아가 강민우를 향해 돌아선다. 그리고 보조개를 드리운 자잘한 미소를 띠면서 허리를 비틀어 애교를 부린다. 강민우는 이진아에게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강민우는 그녀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종업원에게 그녀가 입고 왔던 옷을 쇼핑백에 넣어 달라고 했다.
의상 코너를 돌아 나오면서 이진아는 수시로 상점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이진아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강민우의 팔짱을 끼고 깡충거리는 발걸음을 옮긴다. 의상 코너를 돌아 액세서리 보석 코너 앞을 지나던 강민우가 걸음을 멈춘다. 그는 쇼윈도 안에 투명한 큐빅과 사파이어로 제작된 목걸이와 반지 세트를 바라보았다. 목걸이에는 반짝이는 사파이어가 박힌 페넌트가 달려 있었다. 강민우가 목걸이를 가리키며 종업원에게 말한다.
“저거 꺼내주실래요?”
“아! 네. 값은 비싸지만, 호주에서 수입한 것입니다.”
목걸이를 꺼내 보이는 종업원은 아울러 목걸이 제품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사파이어는 진실, 성스러운 덕, 천국을 명상함, 정숙함을 의미한다는 부가 설명을 하며 이진아의 가슴 앞에 들어 보인다. 이진아는 자신에게는 넘쳐 보이는 목걸이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여종업원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이진아를 바라보며 상품을 적극 권장했다.
“손님이 예쁘셔서 잘 어울리네요.”
“그거 주세요.”
두말 하지 않고 강민우는 종업원이 제시하는 금액을 신용카드로 지불한다. 그리고 포장박스를 쇼핑백에 넣고 반지를 이진아에게 끼워준다. 목걸이를 걸어주는 강민우를 올려다보는 이진아의 눈망울에 습기가 어려 반짝인다. 강민우는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튕긴다.
이진아가 인형들이 있는 코너 앞에서 머뭇거렸다. 쇼 케이스 안에는 여자 인형들이 각각 다른 이름표를 달고 진열되어 있었다. 이진아가 여자 인형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깜찍한 모습의 외국소녀 모습의 인형이었다.
“이름이 애리이네. 애리! 오빠! 나 이거 갖고 싶어.”
“꼭 진아 같구나.”
강민우는 종업원에게 이진아가 끌어안는 인형 값을 지불했다. 백화점을 나오면서 이진아는 강민우의 허리에 착 달라붙어 걸음을 옮긴다. 번잡한 거리에는 제각각의 차림으로 오가는 여자들이 더 많았다. 인파속에서 고개를 젖히며 활짝 웃는 여인을 향해 시선이 갔다. 그를 올려다보던 이진아가 뽀로통한 목소리를 흘린다.
“오빤.......! 진아가 있잖아! 왜, 다른 여자를 봐!?”
“하하~! 보기는.......!? 그냥 아무런 의미 없어.”
“진아가 오빠 여자 아냐? 내가 싫어?”
“아니........! 진아가 좋지.”
이진아의 돌발적으로 흘리는 말에 강민우는 별다른 의미를 두고 싶지 않지만, 대답하기 혼란스러운 질문이었다. 다만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순간, 강민우는 송나희를 떠올린다. 요즘 이따금 식사를 같이 하기도 하지만, 같은 기관에 근무하면서도 송나희와 대화를 할 시간의 여유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감추어진 내면의 감정을 들어내 보일 듯 하는 송나희의 표정이 은연중에 강민우의 마음에 깃들어 있다.
토끼뜀을 하며 강민우의 팔짱을 낀 이진아가 올려다보며 자잘한 미소를 짓는다. 시선을 마주한 강민우도 사랑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함박 눈송이가 떨어지는 밤하늘에 불꽃의 축포가 터진다. 문득 걸음을 멈춘 이진아가 강민우 앞을 막고 다가선다. 그리고 강민우 목에 팔을 두르고 빤히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강민우의 입술에 입술을 포갠다.
강민우는 돌발적인 입맞춤에 당황하여 급히 숨을 들이 마신다. 그러나 이내 이진아에게서 흘러나오는 싱그러운 체취에 도취한다. 그녀의 허리를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입술을 마주한다. 강민우는 그녀의 입술을 탐닉하며 순간적인 열정에 묻힌다. 이진아는 가벼운 입맞춤으로 자신의 애정을 표시하고 싶었다.
그런데 강민우의 강렬한 키스를 받고 이진아는 느껴보지 못한 짜릿한 감정에 휘말린다. 자신의 입술이 강민우의 입속으로 흡입된 상태에서 그녀가 눈동자를 크게 뜨고 올려다본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한다. 강민우는 지금까지 이진아를 여동생처럼 애정으로 보살폈다.
이진아에게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체취를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여동생이기에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여자로 인식해서 진한 키스를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강민우는 몽롱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의식한다. 놀라는 듯이 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강민우는 그때서야 자신도 알지 못하는 열정에 빠진 것을 느낀다. 강민우는 자신을 탓하며 그녀를 풀어 놓는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힌 이진아가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흘린다. 그리고 그녀는 강민우의 손을 잡아끌면서 뛰어간다. 거리를 누비는 인파 속으로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한해를 보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마음은 다사다난했던 사건들을 잊으려한다. 다만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 속에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으로 가득하다. 신정 연휴가 지나고 강민우는 전산실의 정기춘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정기춘이 전산실 요원들과의 술좌석에 강민우를 부른 것이다. 다른 요원들은 취해서 가고 유서연과 송나희만이 남아 있었다. 이미 소주병 여러 개를 비운상태에서 정기춘이 잔을 들어서 마시기를 권한다.
“자! 올 한해는 건강들하고, 대박나기를 바라면서 한잔하자고. 그런데 둘 사이는 잘 안 되는 거야?”
“어머! 송 선배님하고 언니하고 연애중예요!? 그래서 송 선배님 온 거예요?”
“하하~! 무슨 소리야! 저 사람이 취해서 하는 말이지.”
강민우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흘린다. 취기어린 눈빛으로 정기춘은 강민우와 송나희를 손가락질 하며 짓궂은 표정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리 술을 마셔서 얼굴이 발그스름해진 송나희가 다소곳이 앉았다가 더욱 얼굴을 붉히며 눈웃음을 짓는다. 강민우는 멋쩍은 표정으로 송나희를 곁눈질하여 바라본다. 유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정말이야? 언니!”
“아냐, 얘는! 정 선배님이 술 취해서 하는 말을.”
송나희는 강하게 부정하면서 외면을 했다. 은연중에 강민우를 마음에 담고 있던 유서연은 송나희의 표정을 살폈다. 유서연의 마음을 더욱 부채질 한 것은 뚫어지게 바라보던 정기춘이 또 다시 하는 말이었다.
“애들도 아니고 중개가 필요한가?”
“잘됐네! 언니 축하해.”
“얘는 술좌석에서 공연히 하는 말을.......”
송나희가 정기춘에게 눈을 흘긴다. 송나희와 강민우 사이를 확인하고 싶었던 유서연은 정기춘의 짓궂은 말이 더욱 알쏭달쏭하였다. 유서연은 공연한 질투심으로 송나희의 표정을 살폈다. 입장이 난처해진 강민우가 정기춘을 윽박지른다.
“쓸데없는 소리 마! 난 국가에 받친 몸이야.”
“국가........!? 나 자신이 행복해야, 국가도 있는 거지. 미스 송! 안 그래?”
“글쎄요.......!? 정 선배님은 낙천적이시네요.”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지.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사는 게 좋지. 난 언젠가는 이 직업 때려 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정기춘의 푸념을 듣는 송나희는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음식점 안이 갑자기 시끄러워진다. 그들의 뒤편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끼리 언성을 높이더니 의자가 쓰러지고 싸움이 벌어진다. 술 마시던 사람들끼리 삿대질을 하더니 엉키어 몸싸움을 한다. 주인과 종업원들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말린다. 보고 있던 정기춘이 웃음을 흘리며 일어선다.
“하~! 왜 싸우고들 난리야! 민우야! 난 간다. 둘이 잘 해봐.”
“저도 이만 갈래요.”
정기춘이 일어서고 유서연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민우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왜 가려고!? 술 몇 잔 안마셨는데, 불러 놓고 가는 법이 어디 있어.”
“하하~! 일차 계산했으니 나머지 술값은 자네가.......! 알았지?”
“취하긴 취했군.......!”
휘적거리며 일어서는 정기춘을 보고 강민우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송나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유서연이 강민우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음식점을 나간다. 뒤이어 바바리코트를 걸친 정기춘이 비틀거리며 음식점 입구를 나선다. 싸움을 하던 손님들이 밖으로 나가고 음식점 안이 조용해진다. 머쓱해진 강민우는 나머지 술잔을 비웠다. 송나희가 나머지 술을 마시고 빈잔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강민우가 일어선다.
“우리도 가죠?”
“네........!?”
카운터로 다가선 강민우가 나머지 술값을 지불하고 음식점을 나선다. 훈훈한 음식점을 나서니 더욱 쌀쌀한 겨울의 밤바람이 옷깃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멀리 정기춘과 유서연이 걸어가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음식점을 나선 강민우는 술기운이 더 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정기춘처럼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다.
술을 마시자는 정기춘의 말에 강민우는 지프차를 광릉에 두고 왔다. 대로변에서서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어 세운다. 강민우는 가까이 다가서는 택시 문을 열고 뒤를 돌아본다. 갈색 모피가 달린 점퍼를 입고 서 있는 송나희에게 손짓을 한다.
“가다가 내려줄게, 타요!”
“........!”
강민우가 먼저 뒷좌석에 올라타고 이어서 송나희가 택시에 오른다. 강민우가 운전사에게 일단 방이동으로 가자고 한다. 송나희는 문득 강민우가 지프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던 날을 떠 올린다. 시트에 끼인 머리카락을 빼주려는 것도 모르고 키스를 하려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순간을 떠 올리며 ‘큭~!’하고 웃음을 흘린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강민우가 쳐다본다.
“왜......!? 내가 뭐 이상한 가?”
“아뇨! 그냥........”
“미스 송은 언제까지 이 직업에 종사 할 거지?”
“나도 모르겠어요. 이따금 조용하게 쉬고 싶기도 하고.......! 선배님은?”
“과수원이나 목장을 하며 조용하게 지내고 싶어도, 개인적으로 할 일이.......”
“아! 저도 목장 같은 일을 하고 싶어요.”
“미스 송도 그런가......!?”
“음.......! 언젠가는 안기부를 그만 두겠네요?”
“아마도 살아 있다면.......”
“그렇게 말하니까, 비관적으로 들려요.”
“영원히 사는 목숨이 아니니까.........”
“어느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세요?”
“행복.......!? 글쎄 굳이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미스 송은?”
“하기야.......! 행복을 느끼지 못한 시절이 행복한 거래요.”
“여자의 행복은 뭐지?”
“글쎄요!? 사람들은 남편 잘 만나서 안락한 가정생활을 하는 것이라는데, 저는 왠지........”
“.......!?”
“왠지........!? 자신이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 미스 송 같으면 얼마든지 사랑 받을 텐데.”
“선배님이 그렇게 봐주니까, 다행이네요. 난 한번........ 실패했잖아요.”
“실패라고 생각하면 또 다른 시작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세요.......!? 선배님은 어떤 여자가 이상형예요?”
“이상형!? 글쎄 생각해 볼 여유가 없어서........미스 송 같은 여자라면. 하하~!”
“호호~! 그런 농담, 여자들한테 하면 여자들이 상처 받거나, 바람둥이로 오해받아요.”
“하하.......! 정말인데.”
“피 잇~!”
강민우의 농담 속에 진심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는 송나희는 쑥스러웠다. 차창으로 흐르는 도로의 가로등, 오색으로 흐르는 네온사인, 잠시도 멈추지 않는 간판의 불빛 명암 때문에 송나희의 얼굴은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강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는 송나희의 손가락 사이로 다섯 손가락을 모두 깍지를 껴서 순간적으로 힘을 주었다.
“앗! 아파요.”
흠칫 놀라는 송나희가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나 이내 곱게 눈을 흘긴다. 그녀는 첫사랑 이후 다른 남자에게 정겨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자신 스스로에게 놀라워했다. 강민우가 그녀의 옆모습을 슬그머니 훔쳐보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송나희의 표정. 미소와 함께 들어나는 보조개가 매력적이고 정겨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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