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 지프차를 주차한 강민우는 빠르게 현관을 들어섰다. 거실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이진아의 방문이 열려 있었다. 이진아의 방에서 진씨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반지와 테이프에 관해 확인하고 싶은 심정으로 방으로 들어가니 이진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 옆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진씨 할머니는 물수건으로 이진아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어디서 이렇게 다쳤어. 아가야!”
“건드리지 마! 아프니까! 그냥 놔두란 말예요.”
침대에 누운 이진아가 앙팡지게 쏘아붙인다. 할머니는 그래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차며 이진아의 얼굴을 닦아준다. 강민우는 우려 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는 느낌에 긴 한숨을 내쉰다. 테이프와 반지에 대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인기척을 느끼고 진씨 할머니가 뒤돌아보며 근심어린 말을 흘린다.
“아! 글쎄, 진아가 어디서 다쳤는지 엉망이 돼서 들어왔어.”
“다쳤다고요........!?”
강민우가 이진아가 누운 침대로 다가갔다. 올려다보는 이진아의 턱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고 입술이 부르트고 퉁퉁 부어 있었다. 강민우와 시선이 마주친 이진아가 벽을 향해 돌아눕는다. 강민우가 다가가서 이진아의 얼굴 상태를 다시 확인하려고 어깨를 잡아 당겼다. 이진아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웅크렸다. 강민우가 그녀의 교복상의를 젖히고 어깨를 살폈다. 강민우가 눈살을 찌푸린다. 그녀의 어깨와 팔에는 온통 멍이 든 자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스커트 밑으로 들어난 허벅지에도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었다.
“가자! 병원에. 어디 뼈라도 다친 거 아냐?”
“싫어! 괜찮아.”
이진아는 톡 쏘아 붙이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모든 상황으로 보아 강민우는 박민철의 사망과 이진아가 관련되었다는 확신을 한다. 어차피 벌어진 일을 수습할 수 도리밖에 없고, 이진아가 많이 다치지는 않았는지 염려스럽다. 어린 시절 같으면 몰라도, 그렇다고 이진아의 옷을 벗겨 상처를 확인할 수도 없다.
“정말 괜찮은 거야?”
“괜찮다니까! 그냥 내버려 둬.”
이진아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지만 두려웠다. 지순영이 강간당하는 현장에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진정시키지 못했지만, 이미 죽었으리라고 판단하는 남자의 모습이 떠올려지며 두려움으로 몸이 떨린다. 더욱이나 항상 자신을 생각하는 강민우를 대하기가 면목이 없었다.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진씨 할머니가 혀를 차며 방에서 나간다.
강민우는 슬며시 침대에 걸터앉는다. 이진아와 박민철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했다. 어차피 알아야 될 일이기에 솔직히 말하게 하고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한다. 강민우는 호주머니에서 이진아의 반지와 테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이진아의 손을 당겨 반지와 테이프를 쥐어 주었다. 이진아가 손에 쥐어주는 물건을 보고 흠칫 놀란다.
“괜찮아. 그놈은 사망했어. 내가 쫓던 업무와도 관계있는 놈이야.”
“.........!?”
“내가 알아야, 방도를 강구하지. 어떻게 된 일이지?”
“.........”
이진아는 대답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녀는 반지를 떨어트린 것을 모르고 있었다. 강민구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면목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알게 된 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해진다. 혼자만이 감당하기에는 두려운 상황이고, 그녀가 믿고 의논을 할 상대는 오직 강민구 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을 떠서 손에 쥔 반지와 테이프를 만지작거린다.
“말해 봐. 괜찮아.”
“그놈이 순영이를.......”
“순영이가 누구야?”
“.......학교 친구.”
“순영이를 왜.....?”
“순영이를.......”
“.........!?”
“강간했단 말이야.”
“강간.......!?”
“..........”
이진아는 조심스럽게 한마디씩 흘린다. 강민우는 이진아가 흥분하고 분노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도 현장을 목격하고 자신의 아픈 추억을 떠올려 이성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진아를 탓할 수만은 없는 사건 현장을 떠올린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연약한 여고생인 이진아가 어떻게 그렇게도 잔인한 행위를 할 수 있는지 놀랄 뿐이다. 그러나 누구를 탓 할 것인가! 이진아를 그렇게 만든 사회가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 주어진 인생이 있다. 타인에 의한 고통스러운 추억일지라도 벗어나는 것은 그녀가 풀어야할 과제일 것이다. 강민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이진아의 어깨를 다독여 준다.
“정말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겠어?”
“........”
이진아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던 강민우가 침대에서 일어선다. 침대가 흔들리는 것을 느낀 이진아가 벌떡 일어나서 강민우에게 매달린다. 연민을 느낀 강민우는 매달리는 이진아를 내려다본다. 그녀는 시선을 외면하고 강민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나.......! 안아 줘.”
“걱정하지 마.......!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해.”
강민우는 가슴속을 파고드는 이진아를 껴안아준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내려다 바라본다. 그녀의 눈가에 고여 있는 눈물이 반짝인다. 강민우는 그녀의 등을 도닥여주고 침대에 눕힌다. 방을 나서려던 강민우는 다시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이진아의 방에서 나온 강민우는 자신의 방으로 가서 스프레이파스와 멘소래담 크림을 들고 나온다. 주방으로 가서 진씨 할머니에게 이진아의 멍든 몸에 발라주라고 하면서 크림과 파스를 건네준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고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지쳐 보인다. 태양이 내리 쪼이는 거리의 한산함에 비해 대형 텔레비전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주시하는 텔레비전 화면에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참가했던 선수단이 귀국하는 공항이 보인다. LA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올림픽 참가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참가국 중 종합성적 10위를 기록했다는 아나운서의 감격하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손에든 부채와 신문지로 땀을 식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저물어가는 햇살아래 이진아는 땀방울을 흘리면서도 합기도 수련에 열심이다. 검은 도복을 걸친 그녀는 빠른 발을 놀리며 손에 쥔 막대기로 허수아비의 어깨와 목을 격파한다. 치고 빠지고 몸을 회전시키며 현란하게 막대기를 휘두르며 합기도에서 연마한 기술을 수련한다. 그리고 발끝을 하늘로 치켜 올라가 나무 끝까지 잇닿는다. 한 바퀴 지면을 굴러 나무 등거리를 밟고 가볍게 공증으로 떠올라 회전을 하며 허수아비를 타격한다. 다시 한 번 회전을 하며 수도를 내리친다.
이진아는 박민철에게 당하고 있던 위험한 순간을 떠올린다. 그녀의 턱에는 아직도 희미한 멍 자국이 보인다. 사망한 박민철을 넘어트릴 수 있었던 것은 요행스럽게 철제 지렛대 덕분이다. 아직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다고 느끼는 자신 스스로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당하고 싶지 않은 오기의 기합소리와 함께 땅을 차고 올라 돌려차기를 한다. 연거푸 돌려차기를 하던 그녀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땅바닥에 뒹군다.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
“..........!?”
뒤를 올려다본 이진아는 강민우의 자잘한 눈빛을 의식한다. 언제 와서 보고 있었는지 강민우가 그녀에게로 다가온다. 강민우가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 자세를 바로 잡게 한다. 그녀가 자세를 잡고 예리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순간 강민우가 그녀의 오금을 슬쩍 걷어찬다. 그녀는 여지없이 균형을 잃고 털썩하고 땅바닥에 눕는다. 강민우가 다시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발뒤꿈치를 툭툭 찬다.
“여기에 힘을 주면 다음 동작을 하기도 어렵고 쉽게 균형을 잃어버리잖아. 힘을 빼고 몸을 부드럽게.”
“........!”
이진아가 자연스러운 몸가짐으로 앞뒤로 움직여 본다. 강민우가 그녀의 상체를 바로 잡아 준다. 긴장을 하면서도 그녀는 편한 자세로 두 손을 올리고 몸을 흔들어 보인다. 강민우가 발끝으로 그녀의 오금을 툭툭 쳐본다. 그녀는 종전처럼 균형을 잃지 않고 가볍게 강민우의 발끝을 피한다.
“그래! 자세는 부드럽고 빠르게, 공격을 할 때는 단번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도록 일격에, 그러나 한 동작 한 동작을 끊지 말고 연속적으로 방심하지 말고.”
“........”
요즘에 와서 강민우는 이따금 그녀의 무술 연마에 조언을 해 준다. 어차피 그녀에게 필요하다면 최선의 도움을 주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박민철 사건 이후 이진아가 무술에 대한 집념이 더욱 강해진 것을 느낀다. 이진아는 매서운 눈빛으로 상대의 급소를 향해 주먹을 뻗으며 회전을 한다. 강민우는 빙그르르 회전을 한 이진아가 하늘을 꿰뚫을 듯이 발끝을 치켜 올리는 동작을 바라본다.
“상대의 능력에 따라 언제 제압당할지 몰라. 성급하게 하지 말고.”
“.........!”
이진아의 날렵한 연속 동작을 바라보던 강민우는 슬며시 몸을 돌린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그는 이진아의 기합소리를 듣고 집 뒤의 공터로 왔던 것이다. 강민우의 머리위에 빗방울이 하나 떨어진다. 그는 수련을 하고 있는 이진아를 다시 돌아보고 현관으로 들어선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후드득 하며 굵어진다. 그리고 태양이 떠올랐던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고 빗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빗줄기 속에서 몸을 날리는 이진아의 찰랑거리는 머리에서 빗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는 폭우로 변했다. 폭우는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준이 동반한 집중호우였다. 5일 동안 계속된 태풍으로 전국은 유례에 없는 재산피해와 사상자를 만들었다. 서울과 경기, 강원 일대와 한강유역에 대홍수가 발생했다. 매스컴에서는 피해 상황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애타는 목소리가 전달된다.
구호의연금을 구호품을 모집하는 방송이 연일 계속되었다. 서울의 수재민들은 `인재`라고 주장, 국가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북한에서도 수재물자를 보내준다고 제의했다.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의 여파로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정부는 북측의 제의를 전격 수용했다.
태풍으로 인한 수해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 갈 무렵, 대통령은 우리나라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히로히또 일본 황제는 공식만찬석상에서 양국 간의 과거에 대해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사과발언을 했다. 매스컴은 양국 정상 간의 회담은 과거의 청산 위에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정립해나가려는 두 나라 정부의 우호적인 자세를 대변하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부 언론은 일제강정으로 끌려갔던 위안부와 노역자 문제를 거론하며 석연치 않게 표현하기도 한다.
왕릉의 안기부 전산실 한쪽 벽에는 대형 모니터의 영상들이 펼쳐져 있고, 전산요원들은 각자의 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하고 있다. 적지 않은 요원들이 근무하고 있지만, 좌판을 두드리는 소리와 이따금 전화와 무전기로 통화하는 요원들의 목소리만 들릴 뿐 조용하기만 하다.
얼굴이 낯익은 요원들 사이에는 헤드셋을 쓴 정기춘과 송나희의 모습도 보인다. 전산실 문이 슬며시 열리고 서류철을 든 강민우가 들어온다. 잠시 주춤거리던 그는 발소리를 죽여 걸어간다. 실내에 있는 요원들의 테이블 사이를 빠져 걸어간다.
송나희의 등 뒤를 향해가면서 그는 주위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재빠르게 그녀의 테이블 위에 쪽지를 떨어트리고 지나간다. 헤드셋을 쓰고 좌판을 두들기던 송나희는 테이블 위에 떨어진 쪽지를 집어 들고 뒤를 돌아본다. 정기춘에게 다가가는 강민우의 뒷모습을 보고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강민우는 태연스럽게 정기춘의 어깨를 툭 쳤다.
“요즘 바쁜가 봐?”
“어.......!?”
정기춘이 헤드셋을 벗으며 뒤돌아 봤다. 강민우가 손에든 서류철을 들어 보이며 빙긋이 웃는다.
“요즘 보기 힘들어. 바쁜 모양이야?”
“아니 별로. 그런데 웬일이야?”
“전산 자료가 필요해서. 수고해.”
“음. 술 한 잔 해야지.”
“그러지.......”
“........!?”
강민우는 필요한 자료를 얻었다는 표정으로 뒤돌아서서 전산실 입구를 향한다. 정기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산실을 나가는 강민우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헤드셋을 다시 쓰며 송나희가 있는 테이블을 바라본다. 송나희는 강민우가 건네준 간단한 쪽지 내용을 읽으며 미소를 잃지 않는다.
왕릉의 안기부 옥상에서 바라보이는 남쪽으로는 나무 숲 위로 발전해가는 도시가 보인다. 반면에 북쪽으로는 우거진 숲과 흘러간 역사를 대변하는 왕릉이 보인다. 강민우는 한쪽 다리를 옥상 난간위에 걸치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바지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툭툭 치다가 뚜껑을 열어본다. 하트 모양의 페넌트가 달린 진주 목걸이였다.
얼마 전에 백화점 앞을 지나다가 송나희에게 주려고 구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송나희를 만나 몇 번인가 목걸이를 건네주려고 하였으나 쑥스러워 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꼭 그녀에게 목걸이를 주려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송나희를 기다리는 그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보았다.
강민우는 공연히 긴장하며 초조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느껴 쓴 웃음을 짓는다. 옥탑을 나오는 송나희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강민우는 얼른 손에 든 상자를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카키색의 점퍼와 타이트한 카키색 바지를 걸친 그녀가 뒤로 묶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다가온다. 밝은 미소를 띠고 다가온 그녀가 강민우를 바라본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바쁜데 오라고 했나봐.”
“별로요. 식사는 했어요?”
“한 술 떠먹었지. 나희씨는......?”
“정 선배님하고 간단히 먹었어요. 그런데 웬일이세요?”
“다름이 아니고.......”
강민우는 바지 주머니 안에든 목걸이 상자를 만지며 주춤거린다. 그를 바라보는 송나희의 눈동자가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막상 그녀를 마주하고 보니 목걸이를 건네줄 용기가 없어 어색한 표정을 한다. 정이 깃들어 보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엉뚱한 질문을 했다.
“요즘.......! 전산실에는 별일 없나?”
“왜요? 무슨 정보라도 필요하세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런데 민우씨의 정보A팀은 무슨 업무를 담당하세요?”
“음.......! NTIS에 대해 들어봤어?”
엉뚱한 질문을 했다가 강민우는 도리어 안기부 요원들도 잘 모르는 자신의 신분을 밝혀야 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조금도 의심치 않는 송나희에게는 신분을 밝혀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NTIS라는 말에 송나희는 눈동자를 크게 떴다,
“네. 우리 안기부 내의 비밀조직이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어요.”
“내가 맡고 있는 팀이 NTIS조직의 행동대원 팀이야.”
“아~ 아! 그랬군요. 주로 무슨 업무를 하시는데요?”
“어떻게 보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할까! 비상상황에 따라 움직이지. 지금은 고정간첩 색출 작전 중이지.”
“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내가 그 작전의 파일 기록을 담당하고 있는데, 요즘 누군가 작전 파일들을 접근해서 빼내는 사람이 있어요. 전 실장님에게 보고했는데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왠지 찜찜해서.......
“그래.......!”
강민우는 송나희의 말에 긴장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작전 중에 용의자들이 사라지거나 침투 요원들이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누군가에 의해 작전기밀이 새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난처한 입장이었다. 그는 작전지휘권 책임자에게 보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민우는 우물쭈물하며 송나희의 표정을 살핀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인데요?”
“다름이 아니고.......”
“네.......!?”
“이걸.......”
주머니 속에든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강민우는 얼굴을 붉힌다. 송나희는 얼굴을 붉히는 강민우의 표정이 수줍은 소년 같았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고 소리를 내어 웃는다. 망설이던 강민우가 그녀의 손을 잡아 상자를 건네준다.
“이걸 주려고.......!”
“뭔데요!?”
의아스러운 표정을 한 송나희가 강민우가 건네주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다이아몬드가 영롱하게 빛을 뿜어내는 페넌트가 달린 진주 목걸이였다. 그녀로서는 처음 받아 보는 값진 물건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강민우는 벌써 옥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힐끔 돌아보는 강민우는 부끄러워하는 소년처럼 어줍은 표정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송나희는 기쁨으로 가득한 미소를 짓는다.
옥상에서 내려온 강민우는 자신의 사무실에 들려 전화를 하고 건물의 지하로 향하는 층계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하층의 국장실들이 있는 싸늘한 통로를 걸어갔다. 그는 숫자만 적혀있는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문안으로부터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침을 꿀꺽 삼키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대형모니터와 값비싼 응접세트가 있었다. 책상을 등 뒤로 하고 있던 의자가 빙그르 돌려지고 사무실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진 얼굴에 며칠 수염을 깍지 않은 듯이 덥수룩한 중년남자는 NTIS를 총지휘하는 오민국 국장이었다. 오민국은 미정보국 CIA 한국지부장을 지낸바 있고, 특전사 정보참모로도 있었던 정보의 귀재였다. 강민우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깍듯이 인사를 한다. 송나희의 말을 듣고 강민우가 오 국장에게 전화를 해서 보고사항이 있다고 미리 면담을 신청해놓은 것이다. 오 국장이 책상 앞으로 다가서는 강민우를 느긋하게 바라본다.
“음! 그래. 급히, 보고 할 것이 있다고.”
“네.”
“말해 봐.”
“저희 팀이 번번이 작전에 실패를 하는데, NTIS의 작전상황이 노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출 되고 있다고!? 전산실장에게 그런 보고가 없었는데.”
“전산실장님이 알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음.......!?”
오 국장은 잠시 머리를 짚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일어서더니 주위를 맴돌며 걷는다. 그리고 강민우를 마주보고 선다.
“어떻게 노출된다고 생각하나?”
“전산실 요원이 누군가 작전 파일에 수시로 접근하여 복사해 가는 것을 알고 전산실장에게 보고 했답니다.”
“그것을 확인한 요원이 누군데?”
“전산실의 송나희입니다.”
“아........! 경찰 특공대 출신으로 행동요원으로 있다가 전산실로 옮긴 여자요원!?”
“네.”
오민국 국장은 정보통의 귀재답게 안기부요원들의 신상마저도 꿰뚫고 있었다. 강민우는 언젠가 조직안의 적이 더 무섭고 악랄하다는 오 국장의 말을 떠 올린다. 오 국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시 책상 주위를 맴돌았다. 마치 자신의 걸음을 헤아리듯이 걸어서 정확히 두 바퀴를 걸은 후, 강민우 앞에 멈추어 섰다.
“그렇지 않아도 국방부에서 은밀한 부탁을 받고 고심 중이야.”
“무슨.......!?”
“국방부 전산망의 군사기밀이 북한 공작원들에게 빠져 나가고 있는데, 기밀 파일에 접근하는 전산망을 확인하니 불행하게도 우리 안기부라는 가야. 안기부 조직 내에 불순세력이 있다고 봐. 그 중에 의심이 가는 인물 중에 하나가 마스터키를 갖은 최재인이지. 불순세력을 제거하려면 보안유지가 필요한 팀을 조직해야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요.......!? 제가 그런 능력이 있는지........”
“자네의 능력이면 충분해. 내가 조만간에 마땅한 요원들과 자네를 부를 것이네.”
“네.”
“당분간 동태를 살펴서 보고하도록 해.”
“네!”
강민우는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처럼 엄숙한 분위기를 느꼈다. 오 국장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국장실을 나온다. 스산한 통로를 걸어가면서 보이지 않는 적들이 숨어서 기다리는 느낌이 들었다. 커피라도 마실 생각으로 휴게실로 들어가니 유리 창 밖에는 후드득 거리며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어디서 이렇게 다쳤어. 아가야!”
“건드리지 마! 아프니까! 그냥 놔두란 말예요.”
침대에 누운 이진아가 앙팡지게 쏘아붙인다. 할머니는 그래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차며 이진아의 얼굴을 닦아준다. 강민우는 우려 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는 느낌에 긴 한숨을 내쉰다. 테이프와 반지에 대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인기척을 느끼고 진씨 할머니가 뒤돌아보며 근심어린 말을 흘린다.
“아! 글쎄, 진아가 어디서 다쳤는지 엉망이 돼서 들어왔어.”
“다쳤다고요........!?”
강민우가 이진아가 누운 침대로 다가갔다. 올려다보는 이진아의 턱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고 입술이 부르트고 퉁퉁 부어 있었다. 강민우와 시선이 마주친 이진아가 벽을 향해 돌아눕는다. 강민우가 다가가서 이진아의 얼굴 상태를 다시 확인하려고 어깨를 잡아 당겼다. 이진아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웅크렸다. 강민우가 그녀의 교복상의를 젖히고 어깨를 살폈다. 강민우가 눈살을 찌푸린다. 그녀의 어깨와 팔에는 온통 멍이 든 자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스커트 밑으로 들어난 허벅지에도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었다.
“가자! 병원에. 어디 뼈라도 다친 거 아냐?”
“싫어! 괜찮아.”
이진아는 톡 쏘아 붙이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모든 상황으로 보아 강민우는 박민철의 사망과 이진아가 관련되었다는 확신을 한다. 어차피 벌어진 일을 수습할 수 도리밖에 없고, 이진아가 많이 다치지는 않았는지 염려스럽다. 어린 시절 같으면 몰라도, 그렇다고 이진아의 옷을 벗겨 상처를 확인할 수도 없다.
“정말 괜찮은 거야?”
“괜찮다니까! 그냥 내버려 둬.”
이진아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지만 두려웠다. 지순영이 강간당하는 현장에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진정시키지 못했지만, 이미 죽었으리라고 판단하는 남자의 모습이 떠올려지며 두려움으로 몸이 떨린다. 더욱이나 항상 자신을 생각하는 강민우를 대하기가 면목이 없었다.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진씨 할머니가 혀를 차며 방에서 나간다.
강민우는 슬며시 침대에 걸터앉는다. 이진아와 박민철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했다. 어차피 알아야 될 일이기에 솔직히 말하게 하고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한다. 강민우는 호주머니에서 이진아의 반지와 테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이진아의 손을 당겨 반지와 테이프를 쥐어 주었다. 이진아가 손에 쥐어주는 물건을 보고 흠칫 놀란다.
“괜찮아. 그놈은 사망했어. 내가 쫓던 업무와도 관계있는 놈이야.”
“.........!?”
“내가 알아야, 방도를 강구하지. 어떻게 된 일이지?”
“.........”
이진아는 대답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녀는 반지를 떨어트린 것을 모르고 있었다. 강민구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면목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알게 된 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해진다. 혼자만이 감당하기에는 두려운 상황이고, 그녀가 믿고 의논을 할 상대는 오직 강민구 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을 떠서 손에 쥔 반지와 테이프를 만지작거린다.
“말해 봐. 괜찮아.”
“그놈이 순영이를.......”
“순영이가 누구야?”
“.......학교 친구.”
“순영이를 왜.....?”
“순영이를.......”
“.........!?”
“강간했단 말이야.”
“강간.......!?”
“..........”
이진아는 조심스럽게 한마디씩 흘린다. 강민우는 이진아가 흥분하고 분노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도 현장을 목격하고 자신의 아픈 추억을 떠올려 이성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진아를 탓할 수만은 없는 사건 현장을 떠올린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연약한 여고생인 이진아가 어떻게 그렇게도 잔인한 행위를 할 수 있는지 놀랄 뿐이다. 그러나 누구를 탓 할 것인가! 이진아를 그렇게 만든 사회가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 주어진 인생이 있다. 타인에 의한 고통스러운 추억일지라도 벗어나는 것은 그녀가 풀어야할 과제일 것이다. 강민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이진아의 어깨를 다독여 준다.
“정말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겠어?”
“........”
이진아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던 강민우가 침대에서 일어선다. 침대가 흔들리는 것을 느낀 이진아가 벌떡 일어나서 강민우에게 매달린다. 연민을 느낀 강민우는 매달리는 이진아를 내려다본다. 그녀는 시선을 외면하고 강민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나.......! 안아 줘.”
“걱정하지 마.......!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해.”
강민우는 가슴속을 파고드는 이진아를 껴안아준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내려다 바라본다. 그녀의 눈가에 고여 있는 눈물이 반짝인다. 강민우는 그녀의 등을 도닥여주고 침대에 눕힌다. 방을 나서려던 강민우는 다시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이진아의 방에서 나온 강민우는 자신의 방으로 가서 스프레이파스와 멘소래담 크림을 들고 나온다. 주방으로 가서 진씨 할머니에게 이진아의 멍든 몸에 발라주라고 하면서 크림과 파스를 건네준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고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지쳐 보인다. 태양이 내리 쪼이는 거리의 한산함에 비해 대형 텔레비전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주시하는 텔레비전 화면에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참가했던 선수단이 귀국하는 공항이 보인다. LA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올림픽 참가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참가국 중 종합성적 10위를 기록했다는 아나운서의 감격하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손에든 부채와 신문지로 땀을 식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저물어가는 햇살아래 이진아는 땀방울을 흘리면서도 합기도 수련에 열심이다. 검은 도복을 걸친 그녀는 빠른 발을 놀리며 손에 쥔 막대기로 허수아비의 어깨와 목을 격파한다. 치고 빠지고 몸을 회전시키며 현란하게 막대기를 휘두르며 합기도에서 연마한 기술을 수련한다. 그리고 발끝을 하늘로 치켜 올라가 나무 끝까지 잇닿는다. 한 바퀴 지면을 굴러 나무 등거리를 밟고 가볍게 공증으로 떠올라 회전을 하며 허수아비를 타격한다. 다시 한 번 회전을 하며 수도를 내리친다.
이진아는 박민철에게 당하고 있던 위험한 순간을 떠올린다. 그녀의 턱에는 아직도 희미한 멍 자국이 보인다. 사망한 박민철을 넘어트릴 수 있었던 것은 요행스럽게 철제 지렛대 덕분이다. 아직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다고 느끼는 자신 스스로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당하고 싶지 않은 오기의 기합소리와 함께 땅을 차고 올라 돌려차기를 한다. 연거푸 돌려차기를 하던 그녀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땅바닥에 뒹군다.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
“..........!?”
뒤를 올려다본 이진아는 강민우의 자잘한 눈빛을 의식한다. 언제 와서 보고 있었는지 강민우가 그녀에게로 다가온다. 강민우가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 자세를 바로 잡게 한다. 그녀가 자세를 잡고 예리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순간 강민우가 그녀의 오금을 슬쩍 걷어찬다. 그녀는 여지없이 균형을 잃고 털썩하고 땅바닥에 눕는다. 강민우가 다시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발뒤꿈치를 툭툭 찬다.
“여기에 힘을 주면 다음 동작을 하기도 어렵고 쉽게 균형을 잃어버리잖아. 힘을 빼고 몸을 부드럽게.”
“........!”
이진아가 자연스러운 몸가짐으로 앞뒤로 움직여 본다. 강민우가 그녀의 상체를 바로 잡아 준다. 긴장을 하면서도 그녀는 편한 자세로 두 손을 올리고 몸을 흔들어 보인다. 강민우가 발끝으로 그녀의 오금을 툭툭 쳐본다. 그녀는 종전처럼 균형을 잃지 않고 가볍게 강민우의 발끝을 피한다.
“그래! 자세는 부드럽고 빠르게, 공격을 할 때는 단번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도록 일격에, 그러나 한 동작 한 동작을 끊지 말고 연속적으로 방심하지 말고.”
“........”
요즘에 와서 강민우는 이따금 그녀의 무술 연마에 조언을 해 준다. 어차피 그녀에게 필요하다면 최선의 도움을 주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박민철 사건 이후 이진아가 무술에 대한 집념이 더욱 강해진 것을 느낀다. 이진아는 매서운 눈빛으로 상대의 급소를 향해 주먹을 뻗으며 회전을 한다. 강민우는 빙그르르 회전을 한 이진아가 하늘을 꿰뚫을 듯이 발끝을 치켜 올리는 동작을 바라본다.
“상대의 능력에 따라 언제 제압당할지 몰라. 성급하게 하지 말고.”
“.........!”
이진아의 날렵한 연속 동작을 바라보던 강민우는 슬며시 몸을 돌린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그는 이진아의 기합소리를 듣고 집 뒤의 공터로 왔던 것이다. 강민우의 머리위에 빗방울이 하나 떨어진다. 그는 수련을 하고 있는 이진아를 다시 돌아보고 현관으로 들어선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후드득 하며 굵어진다. 그리고 태양이 떠올랐던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고 빗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빗줄기 속에서 몸을 날리는 이진아의 찰랑거리는 머리에서 빗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는 폭우로 변했다. 폭우는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준이 동반한 집중호우였다. 5일 동안 계속된 태풍으로 전국은 유례에 없는 재산피해와 사상자를 만들었다. 서울과 경기, 강원 일대와 한강유역에 대홍수가 발생했다. 매스컴에서는 피해 상황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애타는 목소리가 전달된다.
구호의연금을 구호품을 모집하는 방송이 연일 계속되었다. 서울의 수재민들은 `인재`라고 주장, 국가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북한에서도 수재물자를 보내준다고 제의했다.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의 여파로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정부는 북측의 제의를 전격 수용했다.
태풍으로 인한 수해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 갈 무렵, 대통령은 우리나라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히로히또 일본 황제는 공식만찬석상에서 양국 간의 과거에 대해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사과발언을 했다. 매스컴은 양국 정상 간의 회담은 과거의 청산 위에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정립해나가려는 두 나라 정부의 우호적인 자세를 대변하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부 언론은 일제강정으로 끌려갔던 위안부와 노역자 문제를 거론하며 석연치 않게 표현하기도 한다.
왕릉의 안기부 전산실 한쪽 벽에는 대형 모니터의 영상들이 펼쳐져 있고, 전산요원들은 각자의 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하고 있다. 적지 않은 요원들이 근무하고 있지만, 좌판을 두드리는 소리와 이따금 전화와 무전기로 통화하는 요원들의 목소리만 들릴 뿐 조용하기만 하다.
얼굴이 낯익은 요원들 사이에는 헤드셋을 쓴 정기춘과 송나희의 모습도 보인다. 전산실 문이 슬며시 열리고 서류철을 든 강민우가 들어온다. 잠시 주춤거리던 그는 발소리를 죽여 걸어간다. 실내에 있는 요원들의 테이블 사이를 빠져 걸어간다.
송나희의 등 뒤를 향해가면서 그는 주위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재빠르게 그녀의 테이블 위에 쪽지를 떨어트리고 지나간다. 헤드셋을 쓰고 좌판을 두들기던 송나희는 테이블 위에 떨어진 쪽지를 집어 들고 뒤를 돌아본다. 정기춘에게 다가가는 강민우의 뒷모습을 보고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강민우는 태연스럽게 정기춘의 어깨를 툭 쳤다.
“요즘 바쁜가 봐?”
“어.......!?”
정기춘이 헤드셋을 벗으며 뒤돌아 봤다. 강민우가 손에든 서류철을 들어 보이며 빙긋이 웃는다.
“요즘 보기 힘들어. 바쁜 모양이야?”
“아니 별로. 그런데 웬일이야?”
“전산 자료가 필요해서. 수고해.”
“음. 술 한 잔 해야지.”
“그러지.......”
“........!?”
강민우는 필요한 자료를 얻었다는 표정으로 뒤돌아서서 전산실 입구를 향한다. 정기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산실을 나가는 강민우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헤드셋을 다시 쓰며 송나희가 있는 테이블을 바라본다. 송나희는 강민우가 건네준 간단한 쪽지 내용을 읽으며 미소를 잃지 않는다.
왕릉의 안기부 옥상에서 바라보이는 남쪽으로는 나무 숲 위로 발전해가는 도시가 보인다. 반면에 북쪽으로는 우거진 숲과 흘러간 역사를 대변하는 왕릉이 보인다. 강민우는 한쪽 다리를 옥상 난간위에 걸치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바지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툭툭 치다가 뚜껑을 열어본다. 하트 모양의 페넌트가 달린 진주 목걸이였다.
얼마 전에 백화점 앞을 지나다가 송나희에게 주려고 구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송나희를 만나 몇 번인가 목걸이를 건네주려고 하였으나 쑥스러워 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꼭 그녀에게 목걸이를 주려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송나희를 기다리는 그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보았다.
강민우는 공연히 긴장하며 초조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느껴 쓴 웃음을 짓는다. 옥탑을 나오는 송나희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강민우는 얼른 손에 든 상자를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카키색의 점퍼와 타이트한 카키색 바지를 걸친 그녀가 뒤로 묶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다가온다. 밝은 미소를 띠고 다가온 그녀가 강민우를 바라본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바쁜데 오라고 했나봐.”
“별로요. 식사는 했어요?”
“한 술 떠먹었지. 나희씨는......?”
“정 선배님하고 간단히 먹었어요. 그런데 웬일이세요?”
“다름이 아니고.......”
강민우는 바지 주머니 안에든 목걸이 상자를 만지며 주춤거린다. 그를 바라보는 송나희의 눈동자가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막상 그녀를 마주하고 보니 목걸이를 건네줄 용기가 없어 어색한 표정을 한다. 정이 깃들어 보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엉뚱한 질문을 했다.
“요즘.......! 전산실에는 별일 없나?”
“왜요? 무슨 정보라도 필요하세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런데 민우씨의 정보A팀은 무슨 업무를 담당하세요?”
“음.......! NTIS에 대해 들어봤어?”
엉뚱한 질문을 했다가 강민우는 도리어 안기부 요원들도 잘 모르는 자신의 신분을 밝혀야 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조금도 의심치 않는 송나희에게는 신분을 밝혀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NTIS라는 말에 송나희는 눈동자를 크게 떴다,
“네. 우리 안기부 내의 비밀조직이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어요.”
“내가 맡고 있는 팀이 NTIS조직의 행동대원 팀이야.”
“아~ 아! 그랬군요. 주로 무슨 업무를 하시는데요?”
“어떻게 보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할까! 비상상황에 따라 움직이지. 지금은 고정간첩 색출 작전 중이지.”
“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내가 그 작전의 파일 기록을 담당하고 있는데, 요즘 누군가 작전 파일들을 접근해서 빼내는 사람이 있어요. 전 실장님에게 보고했는데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왠지 찜찜해서.......
“그래.......!”
강민우는 송나희의 말에 긴장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작전 중에 용의자들이 사라지거나 침투 요원들이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누군가에 의해 작전기밀이 새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난처한 입장이었다. 그는 작전지휘권 책임자에게 보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민우는 우물쭈물하며 송나희의 표정을 살핀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인데요?”
“다름이 아니고.......”
“네.......!?”
“이걸.......”
주머니 속에든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강민우는 얼굴을 붉힌다. 송나희는 얼굴을 붉히는 강민우의 표정이 수줍은 소년 같았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고 소리를 내어 웃는다. 망설이던 강민우가 그녀의 손을 잡아 상자를 건네준다.
“이걸 주려고.......!”
“뭔데요!?”
의아스러운 표정을 한 송나희가 강민우가 건네주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다이아몬드가 영롱하게 빛을 뿜어내는 페넌트가 달린 진주 목걸이였다. 그녀로서는 처음 받아 보는 값진 물건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강민우는 벌써 옥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힐끔 돌아보는 강민우는 부끄러워하는 소년처럼 어줍은 표정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송나희는 기쁨으로 가득한 미소를 짓는다.
옥상에서 내려온 강민우는 자신의 사무실에 들려 전화를 하고 건물의 지하로 향하는 층계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하층의 국장실들이 있는 싸늘한 통로를 걸어갔다. 그는 숫자만 적혀있는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문안으로부터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침을 꿀꺽 삼키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대형모니터와 값비싼 응접세트가 있었다. 책상을 등 뒤로 하고 있던 의자가 빙그르 돌려지고 사무실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진 얼굴에 며칠 수염을 깍지 않은 듯이 덥수룩한 중년남자는 NTIS를 총지휘하는 오민국 국장이었다. 오민국은 미정보국 CIA 한국지부장을 지낸바 있고, 특전사 정보참모로도 있었던 정보의 귀재였다. 강민우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깍듯이 인사를 한다. 송나희의 말을 듣고 강민우가 오 국장에게 전화를 해서 보고사항이 있다고 미리 면담을 신청해놓은 것이다. 오 국장이 책상 앞으로 다가서는 강민우를 느긋하게 바라본다.
“음! 그래. 급히, 보고 할 것이 있다고.”
“네.”
“말해 봐.”
“저희 팀이 번번이 작전에 실패를 하는데, NTIS의 작전상황이 노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출 되고 있다고!? 전산실장에게 그런 보고가 없었는데.”
“전산실장님이 알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음.......!?”
오 국장은 잠시 머리를 짚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일어서더니 주위를 맴돌며 걷는다. 그리고 강민우를 마주보고 선다.
“어떻게 노출된다고 생각하나?”
“전산실 요원이 누군가 작전 파일에 수시로 접근하여 복사해 가는 것을 알고 전산실장에게 보고 했답니다.”
“그것을 확인한 요원이 누군데?”
“전산실의 송나희입니다.”
“아........! 경찰 특공대 출신으로 행동요원으로 있다가 전산실로 옮긴 여자요원!?”
“네.”
오민국 국장은 정보통의 귀재답게 안기부요원들의 신상마저도 꿰뚫고 있었다. 강민우는 언젠가 조직안의 적이 더 무섭고 악랄하다는 오 국장의 말을 떠 올린다. 오 국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시 책상 주위를 맴돌았다. 마치 자신의 걸음을 헤아리듯이 걸어서 정확히 두 바퀴를 걸은 후, 강민우 앞에 멈추어 섰다.
“그렇지 않아도 국방부에서 은밀한 부탁을 받고 고심 중이야.”
“무슨.......!?”
“국방부 전산망의 군사기밀이 북한 공작원들에게 빠져 나가고 있는데, 기밀 파일에 접근하는 전산망을 확인하니 불행하게도 우리 안기부라는 가야. 안기부 조직 내에 불순세력이 있다고 봐. 그 중에 의심이 가는 인물 중에 하나가 마스터키를 갖은 최재인이지. 불순세력을 제거하려면 보안유지가 필요한 팀을 조직해야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요.......!? 제가 그런 능력이 있는지........”
“자네의 능력이면 충분해. 내가 조만간에 마땅한 요원들과 자네를 부를 것이네.”
“네.”
“당분간 동태를 살펴서 보고하도록 해.”
“네!”
강민우는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처럼 엄숙한 분위기를 느꼈다. 오 국장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국장실을 나온다. 스산한 통로를 걸어가면서 보이지 않는 적들이 숨어서 기다리는 느낌이 들었다. 커피라도 마실 생각으로 휴게실로 들어가니 유리 창 밖에는 후드득 거리며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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