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믿을 수 없었다. 남자친구가 아닌 남자와 잤다.
하루 밤이 지났는데도 몸 구석구석에 아직까지 어제의 뜨거웠던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두번째의 절정을 맞이한 후 같이 씻자는 지훈의 요구대로 욕실에서 다시한번…
아침이 되어 어느 정도 이성이 되돌아 오자 제일 먼저 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번이고 절정에 올랐었다. 뒤에서 짐승처럼 당하기도 했고, 지훈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하자는대로 다 해주고 말았다. 세번째 절정을 맞았을 때엔 정신마저 아득했었다. 모든 것을 지훈에게 맡긴채였다. 조금의 거부도 반항도 없이…
믿을 수 없었다. 남자친구가 아닌 남자와 느끼고 말았던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바람을 피운 건 다름 아닌 유미 자신이었다. 그리고 남자친구와 가졌던 수 많은 관계보다도 훨씬 더 느껴버리고 만 자신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남자친구와 했던 섹스보다 더 느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몸 구석구석까지 마치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 같은 교묘한 애무에 긴 시간 동안 정신없이 취해버리고 말았었다. 처음 느껴본 쾌감이었다.
‘지훈이가 싫지는 않아… 하지만…’
짐승처럼 자신을 공략해오던 지훈의 손길과 혀와 입술의 감촉이 아직 전신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침대 한켠에 앉아서 하이힐의 스트랩을 잠궜다. 카디건을 챙겨 입었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복장이었다. 면티거나 카투소에 청바지. 심플한 복장을 즐겨입던 유미었지만 어제와 오늘의 유미는 달랐다. 하이힐과 스커트를 입고 화려한 블라우스. 어제처럼 데이트를 위한 복장이었다.
‘나… 희성이를…희성이를…’
머리 속에서 남자친구의 착해 보이는 얼굴이 지워지질 않고 있었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을 하고 말았다. 창가에 서 있는 지훈의 얼굴을 차마 쳐다 볼 수 없었다.
‘나.. 희성이를 또.. 배신하고 말았어…’
술에 취해서가 아니었다. 강제로 당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얼굴을 하고 희성이를 만나야 한단 말인가. 머리를 묶으려고 리본을 들었던 손이 멈추고 말았다.
“그렇게 슬픈 얼굴 하지 마세요”
지훈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드니 역광을 배경으로 울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훈이 서 있었다.
“나.. 어제 정말 좋았단 말이에요. 유미 선배가.. 드디어 날 받아주는 것 같아서…”
“지..지훈아..”
“그랬는데… 그랬는데 선배가 그런 얼굴을 하면…”
“미…미안해.. 지훈아”
“사과하지 말아요!”
지훈은 주먹을 쥔 채 떨고 있었다.
“선배가 사과를 하면… 내가 꼭 선배를 그렇게 만든 것 같잖아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미는 아무 말 없이 지훈을 보고만 있었다.
“내 여자친구가 되지 않을래요?”
말을 마친 지훈이 무릎을 꿇고 유미를 올려다 보았다.
“내 여자친구가 되어주세요.. 부탁할게요”
“지..지훈아..”
“남자친구가 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부탁이에요… 내게도 찬스를 달라구요”
“아…안돼..”
“나..날.. 좀 더 봐 주었으면 좋겠어요. 남자친구랑 헤어져 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그저 조금만… 내게도 조금만 시
간을.. 선배의 시간을 나눠주면 안되겠어요? 누가 알기라도 한다면… 나.. 동아리에서도 찍히고 말 거에요.. 그러니까… 그냥 겉으론 이대로 있더라도… 나,,,나랑…”
“그..그럴 수… 없는 거.. 잘 알잖아”
“너..너무해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만난 순서 때문에 그것 때문에 이렇게 끝내야 하는 거라면.. 너무하지 않아요?”
“지훈아.. 그러지 마.. 나.. 더 이상…힘들게 만들지 마”
“그건… 선배 때문이잖아요”
“뭐?”
“알고 있잖아요… 내 마음.. 선배도 알고 받아준 거였잖아요”
“그건..”
“한달만이라도 좋아요. 아니 일주일만이라도 좋아요. 내게도.. 기회를 줄 수 없나요? 만약.. 그래도.. 선배가 날 선택하지 않는다면… 두번 다시 선배한테 이러지 않을게요.. 약속할게요"
지훈이 유미의 손을 잡았다.
“제발 부탁이에요. 어제… 나 정말 좋았단 말이에요. 날… 그렇게 느껴줘서 기뻤단 말이에요. 이런 느낌.. 나 처음이라구요”
부드러운 따스함과 강한 의지가 지훈의 손으로부터 느껴졌다. 어제밤 내내 느꼈던 지훈의 남성미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몸안에 갈무리 되었던 불씨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훈이가.. 싫은 것은 아니야..’
지훈이 잡은 손을 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문을 나설 때 지훈이 가볍게 입맞춤을 해 왔다.
“나 선배.. 절대 포기 안해요…”
집으로 돌아와 밤새 꺼두었던 휴대폰의 전원을 넣었다. 짐작한대로 희성이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몇번이고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오늘 늦네.. 언제 들어와?”
“회식이야? 많이 늦네.. 너무 많이 마시지 마”
“괜찮아? 시간 나면 전화 한번 줘”
“얘기할 게 있어. 집에서 기다릴게”
‘그 동안.. 난,,,’
평소의 차림으로 갈아입고 복잡한 기분으로 희성의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오는 거야?”
언제나와 같은 착한 얼굴이었다. 눈은 빨개져 있었다. 틀림없이 한숨도 자지 않고 기다렸을 것이다. 그래도 희성은
“피곤할텐데..미안.. 오라고 해서” 라며 말을 꺼냈다. 연락도 없이 날을 새고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는데도 유미를 의심하는 태도는 조금도 없었다. 희성은 웃는 얼굴이었다.
‘희성아..’
가슴이 메어져 왔다. 어제밤의 행위를 가슴 깊은 곳으로 숨겨야 했다.
“응.. 좀 많이 마셔서….” 억지로 밝은 얼굴로 대답을 했다.
“응.. 아직 좀 안좋아 보이네.. 너무 무리하면 안돼..”
고개를 숙이자니 더욱 미안해지는 것 같아서 그의 얼굴을 마주 보기로 했다.
“응.. 아직 좀 그러네.. 왜 어제… 우리 동아리… 준우승이었잖아. 그거 기념 파티. 전화 못해서 미안. 올해로 은퇴니까.. 분위기에 취해서 좀 마셔 버렸나 봐 … 후배네 집에서 잤어”
“대회.. 좀 아쉬웠지?”
그렇게 대답하는 희성이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랬다. 대회날.. 그 때 난 지훈이와…. 그리고 그걸 희성이가…
말문이 막힌 채 희성이 타준 찻잔을 들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저기…”
두사람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아 미안.. 얘기해봐”
“아..아냐.. 할 이야기 있다며…?”
희성의 목소리로 보아서 헤어지자는 얘기라던가 어제 일로 추궁하려는 류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내용이 짐작도 가질 않았다.
“저기… 대회 날..말인데…”
목소리가 가라 앉았다. 희성은 더 얘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찻잔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미안해 희성아.. 나…”
더 이상 얘기하게끔 하지 않으려는 듯이 희성의 얘기가 이어졌다.
“미안! 나.. 바보같이 피하고만 있었지?”
“아냐.. 미안한 건 오히려 나지…”
테이블에서 고개를 숙인 유미를 향해 부드러운 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있지? 내가 봐 버린 거…”
조금 고개를 들었던 유미가 끄덕이는 듯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좀 놀랐어. 유미가.. 그럴 줄은 정말 몰랐거든.. 그런데 지혜가 그러더라고”
의외의 이름이 희성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 이번엔 유미가 희성을 바라 보았다.
“그 자식.. 다리가 걱정이 되어서 거길 갔던 거라고. 그자식이 오바 해서 갑자기 안은 거라고.. 말야. 진정시키려고 그랬던 거라며… 그 다음에 정식으로 뭐라고 그랬다고 하더라고.. 큰 시합이었으니까… 유미 답다고 생각했어”
“지혜가… 그랬어?”
“응 나랑 유미 사이.. 걱정 많이 하더라고. 걔가 그랬어. 유미를 믿지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덕분에 잔소리를 좀 들었지 뭐야. 사랑하는 사람 의심하는 거 아니라고. 유미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냐고 말야”
여자친구를 의심했던 자신이 한심했던 터에 지혜의 그런 말을 철썩같이 믿고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꼭 이말 하려고… 유미.. 믿고 있다고. 지금까지 믿어 왔었듯이 말야. 언젠가 유미가 말했었잖아”
너무나도 의외의 전개에 불쑥 말이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럼… 어제 지혜랑 데이트는…?”
“그런 것 까지 얘기했단 말야..? 자식 참.. 응 데이트 신청은 받긴 했는데… 아! 미안! 나도 그러려고 했었는데.. 일요일 아침에 지혜가 그러더라고. 날 더 이상 속일 수가 없다고.. 그러면서 전부 이야기 해준 거야…”
‘그런… 그,,럼… 난… 내가… 한 짓은…’
“그래서 말야. 다음에 놀이공원 가자. 왜 지난번에도 얘기했잖아. 가고 싶다고. 김교수한테 부탁하면 하루 정도 어떻게 될 거야”
터져나올 것 같은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도저히 얘기할 수 없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깊은 죄책감만이 밀려들었다. 현기증이 일 것만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선 유미가 희성이 쪽으로 다가가 뒤에서 그를 안았다.
지켜야만 했다.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거짓말이 더 나았다.
“고마워 희성아.. 고마워…. 나… 놀이공원 기대하고 있을게”
그렇게 애기하는 말과는 달리 희성이가 보지 않는 곳에서, 희성의 등 뒤에 서 있는 유미의 얼굴이 어두워져 있었다. 연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곧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희성아… 나… 놓으면 안돼….. 알았지?
“그럼..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미안해.. 괜히 의심해서…”
더 이상 유미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있는 힘껏 남자친구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고 간신히 그를 붙들고 있는 수 밖에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남자친구가 아닌 남자와 잤다.
하루 밤이 지났는데도 몸 구석구석에 아직까지 어제의 뜨거웠던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두번째의 절정을 맞이한 후 같이 씻자는 지훈의 요구대로 욕실에서 다시한번…
아침이 되어 어느 정도 이성이 되돌아 오자 제일 먼저 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번이고 절정에 올랐었다. 뒤에서 짐승처럼 당하기도 했고, 지훈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하자는대로 다 해주고 말았다. 세번째 절정을 맞았을 때엔 정신마저 아득했었다. 모든 것을 지훈에게 맡긴채였다. 조금의 거부도 반항도 없이…
믿을 수 없었다. 남자친구가 아닌 남자와 느끼고 말았던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바람을 피운 건 다름 아닌 유미 자신이었다. 그리고 남자친구와 가졌던 수 많은 관계보다도 훨씬 더 느껴버리고 만 자신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남자친구와 했던 섹스보다 더 느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몸 구석구석까지 마치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 같은 교묘한 애무에 긴 시간 동안 정신없이 취해버리고 말았었다. 처음 느껴본 쾌감이었다.
‘지훈이가 싫지는 않아… 하지만…’
짐승처럼 자신을 공략해오던 지훈의 손길과 혀와 입술의 감촉이 아직 전신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침대 한켠에 앉아서 하이힐의 스트랩을 잠궜다. 카디건을 챙겨 입었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복장이었다. 면티거나 카투소에 청바지. 심플한 복장을 즐겨입던 유미었지만 어제와 오늘의 유미는 달랐다. 하이힐과 스커트를 입고 화려한 블라우스. 어제처럼 데이트를 위한 복장이었다.
‘나… 희성이를…희성이를…’
머리 속에서 남자친구의 착해 보이는 얼굴이 지워지질 않고 있었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을 하고 말았다. 창가에 서 있는 지훈의 얼굴을 차마 쳐다 볼 수 없었다.
‘나.. 희성이를 또.. 배신하고 말았어…’
술에 취해서가 아니었다. 강제로 당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얼굴을 하고 희성이를 만나야 한단 말인가. 머리를 묶으려고 리본을 들었던 손이 멈추고 말았다.
“그렇게 슬픈 얼굴 하지 마세요”
지훈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드니 역광을 배경으로 울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훈이 서 있었다.
“나.. 어제 정말 좋았단 말이에요. 유미 선배가.. 드디어 날 받아주는 것 같아서…”
“지..지훈아..”
“그랬는데… 그랬는데 선배가 그런 얼굴을 하면…”
“미…미안해.. 지훈아”
“사과하지 말아요!”
지훈은 주먹을 쥔 채 떨고 있었다.
“선배가 사과를 하면… 내가 꼭 선배를 그렇게 만든 것 같잖아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미는 아무 말 없이 지훈을 보고만 있었다.
“내 여자친구가 되지 않을래요?”
말을 마친 지훈이 무릎을 꿇고 유미를 올려다 보았다.
“내 여자친구가 되어주세요.. 부탁할게요”
“지..지훈아..”
“남자친구가 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부탁이에요… 내게도 찬스를 달라구요”
“아…안돼..”
“나..날.. 좀 더 봐 주었으면 좋겠어요. 남자친구랑 헤어져 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그저 조금만… 내게도 조금만 시
간을.. 선배의 시간을 나눠주면 안되겠어요? 누가 알기라도 한다면… 나.. 동아리에서도 찍히고 말 거에요.. 그러니까… 그냥 겉으론 이대로 있더라도… 나,,,나랑…”
“그..그럴 수… 없는 거.. 잘 알잖아”
“너..너무해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만난 순서 때문에 그것 때문에 이렇게 끝내야 하는 거라면.. 너무하지 않아요?”
“지훈아.. 그러지 마.. 나.. 더 이상…힘들게 만들지 마”
“그건… 선배 때문이잖아요”
“뭐?”
“알고 있잖아요… 내 마음.. 선배도 알고 받아준 거였잖아요”
“그건..”
“한달만이라도 좋아요. 아니 일주일만이라도 좋아요. 내게도.. 기회를 줄 수 없나요? 만약.. 그래도.. 선배가 날 선택하지 않는다면… 두번 다시 선배한테 이러지 않을게요.. 약속할게요"
지훈이 유미의 손을 잡았다.
“제발 부탁이에요. 어제… 나 정말 좋았단 말이에요. 날… 그렇게 느껴줘서 기뻤단 말이에요. 이런 느낌.. 나 처음이라구요”
부드러운 따스함과 강한 의지가 지훈의 손으로부터 느껴졌다. 어제밤 내내 느꼈던 지훈의 남성미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몸안에 갈무리 되었던 불씨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훈이가.. 싫은 것은 아니야..’
지훈이 잡은 손을 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문을 나설 때 지훈이 가볍게 입맞춤을 해 왔다.
“나 선배.. 절대 포기 안해요…”
집으로 돌아와 밤새 꺼두었던 휴대폰의 전원을 넣었다. 짐작한대로 희성이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몇번이고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오늘 늦네.. 언제 들어와?”
“회식이야? 많이 늦네.. 너무 많이 마시지 마”
“괜찮아? 시간 나면 전화 한번 줘”
“얘기할 게 있어. 집에서 기다릴게”
‘그 동안.. 난,,,’
평소의 차림으로 갈아입고 복잡한 기분으로 희성의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오는 거야?”
언제나와 같은 착한 얼굴이었다. 눈은 빨개져 있었다. 틀림없이 한숨도 자지 않고 기다렸을 것이다. 그래도 희성은
“피곤할텐데..미안.. 오라고 해서” 라며 말을 꺼냈다. 연락도 없이 날을 새고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는데도 유미를 의심하는 태도는 조금도 없었다. 희성은 웃는 얼굴이었다.
‘희성아..’
가슴이 메어져 왔다. 어제밤의 행위를 가슴 깊은 곳으로 숨겨야 했다.
“응.. 좀 많이 마셔서….” 억지로 밝은 얼굴로 대답을 했다.
“응.. 아직 좀 안좋아 보이네.. 너무 무리하면 안돼..”
고개를 숙이자니 더욱 미안해지는 것 같아서 그의 얼굴을 마주 보기로 했다.
“응.. 아직 좀 그러네.. 왜 어제… 우리 동아리… 준우승이었잖아. 그거 기념 파티. 전화 못해서 미안. 올해로 은퇴니까.. 분위기에 취해서 좀 마셔 버렸나 봐 … 후배네 집에서 잤어”
“대회.. 좀 아쉬웠지?”
그렇게 대답하는 희성이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랬다. 대회날.. 그 때 난 지훈이와…. 그리고 그걸 희성이가…
말문이 막힌 채 희성이 타준 찻잔을 들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저기…”
두사람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아 미안.. 얘기해봐”
“아..아냐.. 할 이야기 있다며…?”
희성의 목소리로 보아서 헤어지자는 얘기라던가 어제 일로 추궁하려는 류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내용이 짐작도 가질 않았다.
“저기… 대회 날..말인데…”
목소리가 가라 앉았다. 희성은 더 얘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찻잔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미안해 희성아.. 나…”
더 이상 얘기하게끔 하지 않으려는 듯이 희성의 얘기가 이어졌다.
“미안! 나.. 바보같이 피하고만 있었지?”
“아냐.. 미안한 건 오히려 나지…”
테이블에서 고개를 숙인 유미를 향해 부드러운 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있지? 내가 봐 버린 거…”
조금 고개를 들었던 유미가 끄덕이는 듯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좀 놀랐어. 유미가.. 그럴 줄은 정말 몰랐거든.. 그런데 지혜가 그러더라고”
의외의 이름이 희성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 이번엔 유미가 희성을 바라 보았다.
“그 자식.. 다리가 걱정이 되어서 거길 갔던 거라고. 그자식이 오바 해서 갑자기 안은 거라고.. 말야. 진정시키려고 그랬던 거라며… 그 다음에 정식으로 뭐라고 그랬다고 하더라고.. 큰 시합이었으니까… 유미 답다고 생각했어”
“지혜가… 그랬어?”
“응 나랑 유미 사이.. 걱정 많이 하더라고. 걔가 그랬어. 유미를 믿지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덕분에 잔소리를 좀 들었지 뭐야. 사랑하는 사람 의심하는 거 아니라고. 유미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냐고 말야”
여자친구를 의심했던 자신이 한심했던 터에 지혜의 그런 말을 철썩같이 믿고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꼭 이말 하려고… 유미.. 믿고 있다고. 지금까지 믿어 왔었듯이 말야. 언젠가 유미가 말했었잖아”
너무나도 의외의 전개에 불쑥 말이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럼… 어제 지혜랑 데이트는…?”
“그런 것 까지 얘기했단 말야..? 자식 참.. 응 데이트 신청은 받긴 했는데… 아! 미안! 나도 그러려고 했었는데.. 일요일 아침에 지혜가 그러더라고. 날 더 이상 속일 수가 없다고.. 그러면서 전부 이야기 해준 거야…”
‘그런… 그,,럼… 난… 내가… 한 짓은…’
“그래서 말야. 다음에 놀이공원 가자. 왜 지난번에도 얘기했잖아. 가고 싶다고. 김교수한테 부탁하면 하루 정도 어떻게 될 거야”
터져나올 것 같은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도저히 얘기할 수 없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깊은 죄책감만이 밀려들었다. 현기증이 일 것만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선 유미가 희성이 쪽으로 다가가 뒤에서 그를 안았다.
지켜야만 했다.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거짓말이 더 나았다.
“고마워 희성아.. 고마워…. 나… 놀이공원 기대하고 있을게”
그렇게 애기하는 말과는 달리 희성이가 보지 않는 곳에서, 희성의 등 뒤에 서 있는 유미의 얼굴이 어두워져 있었다. 연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곧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희성아… 나… 놓으면 안돼….. 알았지?
“그럼..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미안해.. 괜히 의심해서…”
더 이상 유미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있는 힘껏 남자친구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고 간신히 그를 붙들고 있는 수 밖에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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