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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2 02:59 789회 0건
제9화


‘저 골목길만 돌아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겨울의 흐린 하늘 아래, 차분하게 가라앉은 거리를 걸어 지훈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평소의 수수한 복장인채로 손에 케이크가 든 종이 가방을 든 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아직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지훈이를 만나고 싶었다.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낡은 아파트를 올려다 보았다. 온천에서 돌아온 지 이틀. 결국 그동안 희성이는 만나지 못했다. 어제 동아리 연습전에 들른 연구실에도 희성이는 없었다. 고백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없다는 얘기에 왠지 안심이 되기도 했었다. 만약 희성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말을 했을까.. 지금도 그 대답은 찾아지지가 않았다. 희성이가 싫어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훈의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이런 마음인채로 양다리를 걸친 채 희성을 만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용서받지 못할 이야기였지만 희성을 향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순서는 뒤바뀌고 말았지만 우선 지훈이와 이야기를 한 후에 희성을 만날 생각이었다.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 추워.. 따뜻하게 하고 있으려나..”

삐걱이는 계단을 올랐다. 그 후로 지훈이와 단둘이 만난 적이 없었다. 연습을 끝낸 후 부실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지훈이와 마주쳤지만 눈을 마주하지도 못했다. 다른 부원들과 똑같이 대하는 지훈의 태도에, 기다려 주지도 않고 먼저 가버리고 마는 지훈의 태도에, 마치 자신을 거절하는 것 같은 그런 지훈의 태도에 가슴이 아팠다. 외로워 보이는 뒷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였다. 그런 지훈을 안아줄 생각이었다. 만약 그렇게 하는 것으로 희성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결심을 굳힌 채 유미는 지훈을 찾아가고 있었다.

“지훈아… 지훈아.. 안에 있니?”

입김을 내 뱉으면 노크를 했다. 유미의 노크로 인해 유리창이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집안에 있을 것만 같았다. 어둠이 깔린 집안에 불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안에 있을 것만 같았다.

“지훈아.. 지훈아…”

문이 열렸다. 어스름한 실내에서 지훈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미의 발밑에 시선을 떨군채 감정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지훈의 태도가 이상했다. 당황하고 있는 것도 거부하는 것도 아니엇다. 하지만 자신을 피하고 있는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유미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맛있어 보여서 사왔어. 같이 먹자”

하지만 지훈은 대답이 없었다.

“내가.. 방해라도 한 거니?”

“…아뇨..”

그것 뿐이었다. 지훈은 문을 열어둔 채 돌아서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처음 왔을 때와 같이 살풍경한 방안이었다. 전기 스토브는 있었지만 켜져 있지는 않았다. 바깥 공기와 다를 것이 없었다. 작은 탁자 위에는 커버가 씌워진 단행본이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담요가 말려져 있었다. 난방도 하지 않은 채 담요를 뒤집어 쓰고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나 보았다.

“스토브.. 켜세요”

물을 끓이고, 컵을 준비하던 지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로도 안켜고 뭐하고 있었어? 춥지 않아? 감기 걸려…”

“춥기야 하죠.. 하지만.. 전기세가…”

“아.. 응..”

넓은 지훈의 등을 보면서 유미는 이제부터는 자신이 따뜻하게 해줄 것이라고 다시한번 다짐했다. ‘같이 있어줄게.. 이젠 외토리가 아냐’

유미는 스토브를 켜고 탁자 앞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유미가 들고온 케이크를 올려 놓았다.

“아.. 꽃 피었네..”

가라앉은 분위기에 어색하게 방안을 돌아보던 유미가 창가에 놓여진 화분을 발견했다. 봉우리가 맺혀 있던 화분에 꽃이 피었다.

“아, 오늘 아침에 피었어요”

유미 앞에 컵을 놓으며 지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커피의 향의 느껴졌다. 컵에서 전해지는 온기처럼 조금식 지훈의 말소리에 감정이 되돌아 오는 것 같았다. 정말 유미를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꽤 진한 빨간 색이네.. 이런 동백꽃.. 처음 봐”

“누나.. 맘에 들어요? 이 꽃?”

유미의 맞은편에 앉은 지훈이 컵을 두손으로 감싼 채 유미를 바라 보았다.

“응. 가지 하나 정도 나눠줄래? 키워볼까 싶은데..”

감정이 사라진 지훈의 얼굴을 올려다 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갖고 싶으면 화분째 가져가세요. 이건 분재 같은 거 안되는 꽃이에요. 내가 태어난 곳에서 밖에 자라지 못한대요. 땅이 바뀌면 죽어버리거든요”

“그래? 신기하네..”

또 다시 대화가 끊겼다. 어색해진 유미가 케이크 봉지를 들며 말을 이었다.

“아! 지훈아 케이크 먹자”

케이크를 한입 베어문 지훈의 입가에 평소의 미소가 보였다. 그게 지훈이 유미에게 보여준 마지막 미소였다.


이용하기 위해서 접근했었다. 그저 그것뿐. 그 때문에 유미가 힘들어하거나 상처받는 것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유미는 친해지고 나자 자신을 따뜻하게 마주 봐주었다. 처음으로 따뜻한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유미를 속이기 위한 거짓 웃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짜 웃음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유미만은 그 사람과 다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기에 헤어지기로 했다. 유미를 빼앗아 오기 위한 여행이었는데 오히려 이별여행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랬는데 유미가 찾아온 것이다.

“아, 크림 묻었다”

지훈의 입술에 묻은 크림을 몸을 내밀어 자신의 입술로 핥아내었다.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의도였다. 유미딴에는 친밀함을 나타내려는 의도였었다. 하지만 지훈이에게는 그런 유미의 태도가 색기로 남자를 유혹하려는 몸짓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여자도 결국 그 사람과 같아…’

“훗.. 먹어 버렸다”

핥아낸 크림을 삼킨 후 답지 않은 행동은 한 후 쑥쓰러워하는 유미의 모습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잠깐 마음을 내주었더니 결국 이렇게 쉽게 꼬리를 치다니.. 이렇게 간단히 남자친구를 버리고 여기까지 오다니.. 이 여자도 결국 그것밖에는 머리에 들어있지 않은 다른 여자와 마찬가지야. 속아서는 안돼’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짜증이 서서히 밀려들고 있었다.

“맛있지? 요 딸기가 제맛인 거 같아.. 그래서 단골이거든. 나도 하나 먹어야지~”

유미의 있는 그대로의 부드러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안고 있는 지훈의 속마음이 그 부드러움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케이크를 항해 뻗은 유미의 손을 커다란 지훈이 손이 덥썩 잡아왔다. 차가왔다.

‘지훈아..?”

지훈이 유미의 손을 잡아 당겼다. 집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마주보았다. 지훈의 눈에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짙은 욕망의 빛이 떠올랐다. 먹이를 노리는 동물 같은 눈빛이었다. 그런 눈으로 유미를 마주보고 있었다.

“누나, 이리 와봐요”

“응…”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유미를 옆에 앉히자 마자 지훈이 유미를 안으며 넘어졌다.

“지훈아…”

저항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지훈의 체온을 느끼고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눈을 감고 지훈의 입맞춤을 재촉이라도 하듯 기다리고 있었다. 지훈의 손이 유미의 턱을 들어올렸다. 긴머리를 흐트러트린 채 몸을 맡기고 있는 유미의 인형 같은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미의 얼굴을 보던 지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생각을 털어내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저은 지훈이 입술을 겹쳐갔다.


어둠이 깔린 방안에서 유미의 부드러운 몸매가 하얗게 떠올라 있었다.

“하읏… 하아.. 지훈아…”

단단하게 일어선 지훈의 자지가 부드럽게 휘감겨 들어오는 보지 속살을 헤집고 들어갔다. 유미의 입에서 달콤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스토브 덕분인지 체온 덕분인지 더 이상 추위는 느껴지지가 않았다.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랐다. 지훈이 더욱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등을 안고 있던 손을 풀고, 지훈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눈을 마주보면서 희성이 이외의 사람에게는 하지 않았던 말을, 아끼고 있던 말을 꺼냈다.

“사랑해.. 지훈아..”

지훈은 눈을 피하고 있었다. 뜻밖의 반응이었다. 좋아할 줄 알았다. 언제나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기뻐해줄 줄 알았다.

“…그래서… 남자친구랑은 어쩔 작정인데요?”


지훈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혼자말처럼 내 뱉았다.

“응..? 희…희성이랑은… 헤….헤어질 거야……. 그러니까 이제… 지훈이…뿐…하으응~”

유미의 말을 자르기라도 하듯이 깊숙히 자지를 찔러넣었다. 질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랑…? 놀구 있네.. 이것 보라고 이 여자도 결국 애인을 버리고 내게 안기려고 여기오지 않았어. 다른 남자 품으로 가버린 그 사람… 날 버린 그 여자처럼…. 역시 여자라는 건 다 마찬가지야. 망가지던 말던 내가 알바 아냐. 이용해 주겠어. 철저하게 끌어내려 주지…’

어머니에게로 향한 원망이 유미에게로 전이되면서 지훈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만 갔다.

‘희성이 이놈… 죽음보다 못한 아픔을 되돌려주겠어. 너 혼자만 행복할 수는 없지. 내가 느꼈던 아픔을… 이제 네가 느낄 차례야…’

“하으음.. 아응… 아아.. 지훈아…”

지훈의 눈빛이 달라졌다. 차갑게 식어버린 눈빛이 찌르듯이 날카롭게 유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보는 지훈의 표정에 유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네가 아끼던 이여자.. 내가 망가트려 줄게. 잘 봐’

“그럼 안되죠 누나. 그 자식이랑 헤어져는… 후우.. 그런 소리 마세요..”

그렇게 말을 하며 자지를 얕게 꺼냈다가 유미의 보지 안으로 깊숙히 박아넣었다. 유미의 풍만한 가슴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흑.. 하아.. 하음.. 지..지훈아.,.. 왜..왜 그래?”

“내가.. 언제… 누나더러.. 사랑해 달라고 했어요? 누난 그저.. 다리만 벌리면 되는 거였어요”

말을 마친 지훈이 거칠게 허리를 흔들었다.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하여간 여자라는 것들은.. 조금만 잘해주면 이런다니까”

귀에 들리는 지훈의 얘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변한 지훈의 태도에 경악했다.

“왜.. 왜 그래… 응?”

“못알아들었어요? 그래선 곤란하다니까요.. 그 바보자식이랑 헤어져셔는…’

“무..무슨 소리야? 응? 지훈아…”

자지를 넣고 있는 채로 지훈은 유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누나한테 접근한 건 말이죠… 그 자식…누나의 그 잘난 남자친구 자식을 괴롭히기 위해서라구요… 그 자식한테 가장 소중한 걸… 누나를 이렇게 망가트려서… 보여주기 위해서라구요”

낮은 지훈의 목소리가, 거짓말 같은 그 말이 똑똑히 들려오고 있었다.

“뭐..?”

“복수라구요 복수… 그래서 누나한테 접근한 거라고..”

“거.. 거짓말…”

울 것 같은 유미의 말을 냉정하게 끊었다. 유미의 그 애절함도 잔인하게 밟아 뭉갰다.

“훗..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 참 누나도 멍청하지.. 그놈이나 누나나 똑 같아. 몇번 안아준 것만으로 이렇게 허리를 흔들잖아? 왜? 그놈한테는 만족 못하겠어? 욕구불만이야? 바보 남자친구에 음란한 여자친구라.. 멋진 조합이야… 하하하. 하나 더 가르쳐줄까? 지혜도 내편이었어. 누날 그 자식한테서 떼놓기 위해서 말야… 도움 좀 받았지. 지혜 그 자식은 그 바보새끼한테 반한 모양이더라고.. “

겨우 따뜻해지기 시작한 방안이었지만 소름이 돋았다. 남자친구를 매도하고 자신을 비웃는 그 말에 유미는 그제서야 지훈의 증오에 가득찬 덫에 빠져버린 것을 깨달았다. 지훈이 진심을 알아버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꼼짝도 할 수 없는 함정에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시..싫어.. 하지마.. 하지마.. 아아악~!”

지훈의 가슴을 떠밀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두 손목을 지훈에게 붙잡힌 채 침대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 누나.. 언제나처럼 느끼게 해줄게요.. ‘아응~ 아응~”소리나 내고 있어요. 그때처럼 ‘쌀 거 같아~’ 하면서 엉덩이나 흔들어 보라구요”

말을 마치자 마자 지훈은 거칠게 움직였다. 유미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창백한 얼굴로 그렇게 지훈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일방적인 욕망이 종지부를 찍었다. 원하지 않았던 절정에 오르고 나서야 간신히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벗은 몸을 가리기라도 하듯 서둘러 옷을 입고서 지훈에게 물었다.

“지훈아… 거짓말이지…? 그거… 거짓말이지…?”

그 상냥하던 지훈이 전부 연기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장난이지? 응? 안그랬잖아..지훈이 그런 사람 아니잖아… 날 봐서라도.. 희성이를 봐서라도...”

하지만 꺼져들어가는 유미의 목소리를 지우기라도 하듯 지훈이 말을 잘랐다.

“아직 이해가 안되요? 아니 내가 왜 그 바보자식 사정을 봐줘야 하는데요? 그 자식..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한테 안겨서 헐떡대고 있는 줄은 알지도 못한 채 그 잘난 연군가 뭔가를 한다면서요? 쳇.. 웃기고 자빠졌네… 누나도 그렇게 생각 안해요?”

“너..너무해..”

남자친구를 저버렸던 자신에게도 그랬지만 그 남자친구를 비웃는 지훈에게 화가 났다.

“그만! 그만 해!”

노려보며 소리치는 유미를 침대에 앉아있던 지훈이 가볍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복수라니? 왜 희성이가 그 복수 같은 걸 당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

“아 거참 시끄러운 년이네”

“뭐…?”

여전히 얼굴 가득히 비웃음을 띄운 채 말을 이었다.

“뭐.. 마음 내키면 나중에 알려주던가 할게. 그것보다 참.. 누나 잘 알고 있지? 앞으로도 누난 나한테 안겨야 한다는 거.. 이것저것 귀찮게 따지지 말고 그 보지나 벌리면 되거든? 그 바보자식의 애인인 채로 말야. 그 바보 애인이 아님 누나한테는 아무런 가치도 없거든… 듬뿍 귀여워 해줄게.. 지금보다도 더 말야…”

“헛소리 하지마! 누가 너 따위하고 그런대? 웃기지 마… 앞으로 두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발끈한 유미가 코트를 들고 일어섰다. 그런 유미를 바라보며 지훈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꺼냈다.

“여자친구 뺏기고, 그렇게 가지고 놀다가 버려졌다는 그런 소문이 돌면 그 자식.. 지금처럼 연구나 제대로 하려나 몰라”

“뭐…?”

“그것보다도 말야.. 조금 잘해줬더니.. 그렇게 쉽게 남자친구 버리고 내게 왔던 주제에 무슨 얼굴로 그 자식한테 갈 건데? ‘어머 역시 나한테는 희성이 뿐이야..’ 라고 할려고?”

“비겁한 자식…”

“이런… 충고 해주는 거잖아.. 나한테 안긴 거 숨기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말야.. 누난 그냥 그 보지만 벌리고 있음 된다니까… 싫어? 그럼 그 자식한테 다 얘기해주지 뭐. 아예 학교전체에 소문이라도 낼까봐…”

유미는 치를 떨었다. 꼭 쥐고 있는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협박하는 거니?”

“협박? 농담이지? 누나가 선택하라고.. 처음에 보지를 벌린 것도 누나가 결정했던 거잖아. 앞으로도 계속 보지를 벌릴지. 그자식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잘 생각해봐. 솔직히 말하면 누나가 나한테 보지 벌린 걸 알고난 다음에 그자식 표정이 어떨지 보고 싶기도 하거든. 난 그것도 괜찮아. 그 바보자식.. 자기를 버린 누나랑 그래도 사귈래나…? 어떻게 할 거야? 다 불어? 내가 대신 불어줘?”

빛바랜 청바지를 입고 긴 다리를 꼰 채 두손을 뒤로 짚은 지훈은 여유만만했다. 더 한층 차가워진 눈빛이 여전히 유미를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웃기지 마 .. 희성이는… 희성이는… 네가 뭐라고 하든 안믿을 거야.. 나만.. 입 다물..”

“음… 계속 그렇게 속이시겠다? 이래서 계집이란 건 믿어선 안된다니까.. 거짓말에 배신에.. 아무렇지도 않지? 결국 누나도 그런 인간이었다는 거잖아. 그럼 그렇게 해.. 누나 왼쪽 허벅지에 말야… 내가 그렇게 박아대던 보지 바로 옆에… 점이 몇 개인지 알아?”

점차로 먹이감을 옥죄어 들어갔다. 유미의 저항을 콧방귀 한방에 날려버렸다. 몸을 떨면서 서 있는 유미에게 악의에 가득찬 비아냥거림이 쏟아졌다.

“비..비열한 자식..”

“맘대로 생각해.. 애인을 배신하는 누나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말야”

어깨를 떨어트리고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하..한번만이야… 그럼..”

간신히 입을 연 유미의 말을 간단하게 무시했다.

“내가 그만하고 싶을 때까지지!”

더 이상 유미에게는 어떤 선택권도 없었다. 희성이에게 연구를 빼앗을 수는 없었다. 그것도 자신탓으로… 그렇게 열심이던 연구를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희성의 목표를, 꿈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런 자신을 언제까지고 믿어주는 희성을 또 다시 배신할 수는 없었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잃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둘 사이의 모든 것을 자신의 배신으로 인해 더럽히고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창밖으로는 온통 어둠 뿐이었다. 형광등만 켜져있는 어둑한 방안에서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유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저지른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인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속았다고는 해도 자신의 잘못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내말대로 하는 거지?”

그 말이 가지는 무게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뭐든지 시키는대로 하는 거다”

“… 네”

하지만 고개는 흔들고 있었다.

“음.. 그럼 맹세해봐.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한번 봐야겠어”

“…응?”

지훈을 올려다 보며 애원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을 보며 지훈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

“거기… 내 앞에 네 발로 엎드려서 시키는대로 말해봐.. 알겠어?”

“유미는.. 이제부터.. 지훈이의… 자…자…장난감이 되겠습니다. 유미의 모..몸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놀아주세요. 귀여워 해… 주세요… 유미는.. 지훈이의, 지..지훈이의 …자..장난감입니다… 어떤 며..명령이라도… 따…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몇번이고 그렇게 복종의 맹세를 강요당했고, 반복했다.

“좋아.. 그걸로 됐어”

“…… 대신 부..부탁이 있어.. 희성이에게만은… 희성이에게만은 심한짓 하지 말아줘”

“뭐 그러지… 자 그럼 그 자세로 발바닥을 핥아봐”

“뭐..? 시..싫어..”

“뭐야? 못하겠다는 거야?”

앉은채 양말을 벗어버린 지훈이 눈 앞에 엎드려 떨고 있는 유의 코 앞으로 발을 내밀었다. 더 이상 유미에게는 도도한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 빨아.. 맹세한 증거를 내게 보여보란 말야. 내가 가르쳐 줬었지? 자지를 빨 때처럼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빨아보란 말야”

눈 앞에서 지훈이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희성아.. 미안해…’

언제나 밝았던 유미가 굴욕에 치를 떨면서 엷은 립스틱이 발라진 입술을 열고 혀를 내밀었다.

“아하하.. 그 바보자식. 지금 지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의 발가락을 빨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겠지? 이거 최곤데?”

엄지발가락에서부터 차레로 하나씩 발가락 사이사이도 빼먹지 않고 혀를 대었다. 입에 머금고 혀로 굴리고 있는 유미를 내려다 보면서 지훈은 크게 웃었다. 지훈의 눈은 얇은 니트의 등쪽으로 가늘게 들어간 허리와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둥근 엉덩이, 사람들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발군의 스타일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동아리의 남자라면 누구나 동경하던 미모의 유미가 개처럼 엎드려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 리본을 흔들면서, 소리를 내며 발가락을 빨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는 지훈의 가학 마인드가 한층 더 자극을 받았다.

‘희성이 이놈,.. 이건 약과야.. 이제부터 두고 보라고.. 네 눈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발을 빠는 그런 년으로 만들어 줄게. 기대하라고’

“누나 내일부터는 매일 연습 끝나고 남는 거.. 알지? 제대로 귀여워해줄게.. 그 음탕한 몸으로 나도 즐겁게 해 달라고. 이몸의 그 귀한 아르바이트 시간을 쪼개서 가지고 놀아주는 거니까 인사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지훈이 발가락을 입안 깊숙히 밀어 넣었다.

“으윽..”

젖은 소리를 내며 빨고 있던 발가락을 입에서 꺼낸 유미가 실처럼 늘어지는 침을 닦으며 젖은 눈으로 지훈을 보았다.

“콜록..콜록… 고…고마워요…”

터져나오는 기침을 억누르며 힘없는 소리로 지시를 따랐다. 도저히 저항을 기력조차 없애버리는 지훈의 철저한 농락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일 뿐이었다. 두발을 그렇게 빨게 한 후 풀려난 유미가 현관 손잡이를 잡았다.

“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유미의 몸이 멈칫했다.

“그 맘에 든다고한 꽃 말야.. 동백꽃이 아니라 귀신 동백꽃이야”

“그..그게..뭐.. 어쨌다는 거지?”

유미는 뒤돌아 보지 않은채 간신히 되물었다.

“옛날에 말야 내가 태어난 땅 근처를 다스리던 장수가 있었는데..전쟁이 나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 장수의 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모양이야. 그 덕분에 장수는 목숨을 잃었다지? 그런데 덕망이 높던 장수라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해서 묻어준 모양이야. 바로 그 자리에서 이 꽃이 피어났다고 해. 그 땅에서밖에 살 수 없는 그런 꽃으로 말이지. 그 꽃색깔이 꼭 피빛 같아서 말야. 그래서 사람들이 귀신 동백꽃이라고 부든다고 하더라고”

“얘기 끝났으면 그만 가볼게”

입술을 깨물며 얘기를 다 들은 유미가 문을 열었을 때 지훈이 내뱉은 한마디가 유미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꽃말이 말야. 배반, 부정, 뭐 그런 거더라고 누나한테 딱이지 않아?”

말을 마친 후 웃어대는 지훈의 악의에 찬 웃음소리가 유미를 따라오고 있었다.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기억에 없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희성의 방에 불이 켜져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발 걸음이 멈췄다. 이제와서 희성을 볼 면목이 없었다. 도망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안기고 싶었다. 그 따뜻함을 느끼고 싶었다.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미안한 마음과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편한대로만… 더럽혀 진 주제에.. 배신한 주제에..’

자신을 탓하는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지금 유미가 있을 곳은 이곳 밖에 없었다. 여기 밖에 남아있질 않았다. 불어치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뻔뻔하다는 생각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아, 유미야.. 어서 와”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울리지도 않는 앞치마를 두르고 두 팔을 벌려 유미를 맞아 주었다. 희성의 그 웃는 표정을 보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울어선 안되었다. 간신히 눈물을 삼켰다. 힘들어하는 표정을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걱정할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일 있어? 왜그래?’라는 질문이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희성이가 알게 해서는 안되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로 인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유미야.. 미안해.. 집에도 오지 못해서… 어서 들어와. 오늘은 스튜를 만들었거든.. 따뜻해질 거야”

신발을 벗자마자 참지 못한 유미가 희성의 품에 안겨들었다.

“자..잠깐.. 유미야 왜 그래?”

“보고 싶었단 말야… 보고 싶었어….”

품 속으로 파고드는 유미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가만히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정말 미안해.. 너무 혼자 있게 했었지? 어제.. 연구실에도 왔었다며? 미안.. 출장 가느라..”

한번은 지훈을 선택했었다. 희성이에게 이렇게 안길 자격 따위는 이미 없어지고 말았었다. 하지만 이런 희성의 미소를 보며 안겨있으려니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쩌다가 이 사람을… 무엇보다도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을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라는 깊은 후회가 밀려 들었다. 두번 다시 희성을 잃고 싶지 않았다.

“어때? 맛있어?”

“응! 아주 맛있어… 희성이 요리 늘었는 걸?”

평소보다 오버를 한 표정으로 밝은 목소리를 지어냈다.

“그래? 잘됐네.. 이번엔 자신 있었거든”

희성이 받아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었던 탓에 발갛게 달아오른 유미의 뺨이 요염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긴 머리를 푼채로 식탁에 마주 앉았다. 희성은 스푼을 움직이고 있는 유미를 웃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속까지 익지 않은 딱딱한 감자조차도 어떤 요리보다 맛있게 느껴졌다.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마음 속으로 몇번이고 용서를 빌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보였다. 요즘 희성이의 연구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래서 말야. 아무래도 그 단백질이 발병 이유랑 관계있을 것 같단 말이지. 김교수를 중심으로 여러 대학이랑 연구소에서 나온 사람들로 테스크 포스가 만들어졌어. 본격적으로 분석에 들어갈 예정이거든. 그래서.. 어제는 갑자기 출장을 가게 되었지 뭐야. 아, 나도 김교수 추천으로 TFT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건 얘기 했었나?”

“우와~ 대단하네. 어려운 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거 대단한 거잖아 너무 잘됐다”

밝고 명랑하게 평소의 모습을 가장하면 할수록 가슴이 아팠다.

“고마워.. 하지만 그것도 다 유미 덕분인 걸.. 이렇게 유미가 옆에 있어서 그럴 수 있었던 거야. 지금까지는 좀 창피해서 얘기하지도 못했는데… 유미가 내 옆에 있기 때문에 나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야.. 고마워 유미야…”

웃으며 오히려 유미에게 고마워하는 희성이었다.

“아냐..무슨…”

기뻤다. 하지만 힘들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희성이와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거짓말을 계속 할 수 밖에 없었다.

“…… 만약.. 연구결과가 잘 나오게 되면.. 그 때…”

“응? 희성아”

“아.. 아냐.. 아무것도… 더 먹을래?”

“응, 그럴까?”

희성을 위해서도 견뎌야만 했다. 희성이가 알게 할 수는 없었다. 희성이가 상처받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얼마나? 반 정도면 돼?”

“응!”

주방에 서 있는 희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희성을 지켜주어야만 했다.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희성이만큼은.. 그것만이 희성을 배신하고 말았던 자신이 감내해야하는 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어떻게 되더라도 좋았다.. 그만큼 배신의 대가는 클 수 밖에 없었다. 복종의 덫이 크게만 느꼈다.

“내일부터 속옷은 입으면 안돼.. 이게 첫번째 명령이야”

지훈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저주받은 어둠 속에서 피하지도 못한 채 배신이 배신을 낳고야 말았다. 자꾸만 멀어질 것만 같은 연인의 뒷모습을 그렇게 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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