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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2 02:58 792회 0건
제3화


샤워를 마친 유미가 잡옷으로 갈아입고 식탁에서 희성과 마주 앉았다.

“물.. 너무 뜨겁진 않았니?”

“아니..괜찮았어…”

희성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컵에 따라 내밀었다. 유미는 컵을 두손으로 감싸쥐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낼 뿐이었다. 고개를 숙인채 희성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청순함이 느껴지는 투명해 보일 정도의 하얀 피부가 오늘은 웬지 핏기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 희성은 가슴이 아파왔다.

“유미야.. 있잖아…”

“…응?”

고개를 숙인채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유미가 대답했다. 또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출장 따위 가지 않는 것이 옳았다. 왜 자신은 유미를 혼자두고…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지훈을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자신의 책임이었다. 자신이 유미 옆에만 있었으면 이런 일은… 머리 속에서 되살아나는 조금 전의 유미의 알몸을 애써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쾌락에 겨워 떨리던 신음소리와 요염하게 몸을 뒤틀던 유미의 몸짓을 눈으로 보고 말았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도 희성의 가슴을 후벼파내고 있었다. 분명히 그 때 유미는 다른 남자에게, 지훈에게 안기글 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몸짓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유미는 그런 짓을 할 여자가 아니었다. 그랬는데.. 그 자식이 도대체 유미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자신이 지훈에게 원한을 산 탓으로, 자신 때문에 여자친구의 신상에 드리우고 만 악몽을 어떻게 하면 털어버릴 수 있을지 정답이 보이지가 않았다. 자신이 좀 더 확실히 유미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자식 얘긴데…”

유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 자식..”

“그만! 부탁이야”

어쩌면 좋을지 몰랐지만 어떻든 넘어야 하는 시련이기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기로 했다. 지훈과의 관계를 다 털어놓고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희성이 꺼낸 첫 마디를 유미가 막았다. 긴 눈썹 아래로 보이는 커다란 눈동자가 겁에 질려 있었다.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말아줘. 제발.. 지금은.. 아무 것도…”

“유미야”

“가르쳐 달라고 했으면서 듣고 싶지 않다는 거.. 내 멋대로인 거 알아. 하지만.. 하지만…”

유미의 가녀린 어깨가, 긴 손가락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서워.. 겁나.. 만약 시킨대로 하지 않은 것을 알면.. 나.. 이번엔.. 어떤 심한 짓을… 더 이상…”

꺼져 들어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무섭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싫어.. 더 이상 이런 거.. 싫어… 나.. 미쳐버릴지도 몰라..”

몸을 웅크린 채 겁에 떨고 있는 모습 따위는 발랄하던 유미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밝고, 끊이지 않는 미소, 지기 싫어하는 탓에 적극적으로 매사에 임하던 유미의 그런 변모가 희성의 입을 다물게 하고 말았다. 얼마나 심한 일을 당했으면… 지금까지 당해 왔는지… 언제나 유미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째서….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을, 가장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대가가 새삼 무겁게만 느껴졌다.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시간만이 흘러가고 있었다. 긴 침묵을 깨고 그저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유미가 잠시 사이를 두고 입을 열었다.

“왜.. 희성이가 사과를 해?”

“응?”

“희성이는 아무 것도 잘못한 거 없잖아…”

의외의 말이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더 정신차렸어야 해. 지금 보다도 훨씬 더.. 그럼.. 그러니까 유미를 지켰으면.. 유미가 이런 일 따위 겪지 않았어도 됐어..”

“희성이는 그랬어.. 충분히.. 날… 그러니까 희성이가 잘못한 건 없어..”

“유미야…”

“내가.. 전부.. 내가 잘못한 거야…”

당황한 희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미의 손목에 남겨진 구속의 흔적을 유미는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내가.. 희성을 배신했던 거야..”

계속해서 지훈이가 신경이 쓰였었다. 희성과의 사이가 어색해졌을 때, 지훈과 데이트를 했고 몸을 허락했었다. 몇번이고 그만두려 했지만 그만두지 못하고 관계를 가져왔었다. 그날 이후로 지훈의 태도가 바뀌고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피할 수 없는 덫에 걸리고 만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되고 말았던 과정을 담담한 어조로 희성이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희성이 모르고 있었던 지훈과의 관계를 털어 놓았다.

“… 이제 알겠어? 희성아… 그러니까 희성이가 잘못한 건 없는 거야…”

말을 마친 유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려뜬 눈으로 슬쩍 희성을 바라 보았다. 희성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희성이가 잘못한 건 없어.. 잘못을 한 건.. 나니까..”

유미는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 몰랐다. 오늘 같은 날, 털어놓게 되면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하지만 희성이 그저 자신만을 탓하고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유미 자신을 심한 일을 당하고 만 천사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렵혀지지 않은 깨끗한 우상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그런 자신만을 원하는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렵혀지고 깨어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최악의 형태로 전해지고 말았다.

“싫어졌지? 나 같은 거…”

“…싫어지다니..그럴 리가… 없잖아”

희성은 간신히 대답했다. 유미는 등을 돌린 채 방문 손잡이를 잡고 말을 꺼냈다.

“나.. 더 이상..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유미야!”

문을 열고 나가버린 듯한 유미의 기척에 당황한 희성의 부름에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다.

“유미야~ 유미야~~”

왜.. 유미가 그 자식을…? 몰래 만나고 있었다고…? 설마 그런 일이…



“여보세요? 유미야.. 제발 전화 좀 받아.. 얘기를 했으면 해..내가 할 수 있는 게 틀림없이 있을 테니까…”

이걸로 벌써 몇번째인지도 몰랐다. 똑 같은 메시지를 자동 응답기에 남기고는 전화기를 책상위에 내려 놓았다. 충격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미팅을 하고 있어도, 무엇을 하고 있어도 문득문득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유미의 모습이 떠 올랐다. 사실을 이야기 한 이후로 마치 자신을 거부하는 것만 같았던 유미의 태도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 몰래 자신이 아닌 남자를 만났고, 그 남자와… 그 어느 사실도 믿기 어려웠다.

유미가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니.. 거짓말.. 거짓말이 분명했다. 유미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자신이 어떻게 하면…

“왜…?”

아침 일찍 유미의 집을 들렀지만 학교를 가지 않겠다며 혼자 있게 해 달라는 유미의 대답만 들을 수 있을 뿐이였다. 그 이후로 전화도 받지 않았다. 쌓아왔던 관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한순간인 것만 같았다.

모니터 위를 흐르고 있던 숫자의 나열이 멈췄다. 입력해 두었던 수치의 에러 메시지가 나타났다. 키보드를 치워버리고 머리를 감싸고 한숨을 내 쉬었다. 아무리 해도 연구를 계속할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유미야…”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같은 생각만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지훈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후회, 유미에 대한 초조함이 온통 뒤섞여 머리 속을 헤집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훈을 유미로부터 떼어놓을 방법은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섣불리 움직이면 또 유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자신의 무력함에 짜증만이 치밀어 올랐다. 생각만 하고 있어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언제 또 지훈이 유미 앞에 나타날지 몰랐다. 다시한번 지훈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가서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더 이상 유미를 아프게 할 수는 없었다. 머리 속으로 지훈의 얼굴이 떠 오르고, 또 다시 그에게 안겨 있던 유미의 얼굴이 떠 올랐다.

“젠장!”

혼란스러운 유미는 그저 그날의 약속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유미를 지훈으로부터 구해내고 싶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힘이 되어주어야만 했다. 그것만을 생각했다. 그 밖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희성에게 있어서 유미는 그 모든 것이었기에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싫어질 리가 없었다. 유미 역시 정말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닐 터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전부 그 자식 때문이었다. 휴대폰에 걸린 마스코트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쥐고 있는 희성의 등 뒤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희성 오빠~”

지혜가 그렇게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꼭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더 큰 일이 생기기 전에.. 꼭 오빠에게 말해야 할 거 같아서요.. 오빠?”

아무런 반응이 없는 희성이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지혜가 다가왔다.

“저기.. 오빠… 왜 그래요?”

고개를 숙인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대답한 희성의 표정을 살펴보기 위해 지혜가 옆으로 돌아왔다.

“응? 오..오빠.. 그 상처… 어떻게 된 거에요? 설마.. 지훈이가…”

지훈…? 그 빌어먹을 자식의 이름에 희성이 비로소 반응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 채 낫지 않은 얼굴의 상처 이상으로 처음보는 일그러진 표정을 본 지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사였다. 어쩌면 벌써…?

“지훈이라니..? 어떻게 된 거지?”

유미선배를 망가뜨리는 것. 그걸 원했었다. 남자친구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도록, 남자친구 옆에 있을 수 없도록 엉망진창으로 더럽히고만 싶었다. 그랬기에 지훈의 제안을 수락하고 둘 사이를 찢어놓기 위해 희성에게 접근했었다. 하지만..

“지혜야!”

언제부터일까 그런 희성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힘들어졌다.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 희성을 속이고 있는 자신이 싫어졌었다.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이야기 해야만 했다. 자신을 싫어한다고 해도, 경멸당한다고 해도, 두번 다시 희성이와 이야기 할 수 없게 된다고 해도 사실을 이야기 하고 한시라도 빨리 유미를 지훈에게서 떼어놓아야만 했다. 늦어버리기 전에..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저.. 제가.. 오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지훈이가 유미선배를 노리고 있었어요.. 나.. 나는.. 걔한테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오빠한테 다가 갔던 거에요… 유미 선배 마음을 흔들기 위해서.. 그리고.. 저… 지훈이랑 같이.. 유미선배 괴롭힌 적도… 있어요..”

믿을 수가 없었다. 희성의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어..어째서.. 그런 일을..”

“오빠를… 유미선배한테서.. 뺏고 싶었어요. 좋아했거든요.. 나만 볼 수 있도록…”

“뭐..뭐?”

할말을 잊었다. 희성은 놀라서 멍해진 채로 시선을 바닥으로 내려 깔았다. 지혜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지혜의 마음을 자신은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 정도는 알아줄 줄 알았다. 분명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그런 지혜가 지훈과 짜고서 유미를… 지혜 마저 나를…

“그 자식한테.. 들었어.. 유미한테도… 나를 속였다더군…”

“아니에요. 그건 내가 꾸몄기 때문에… 잘못한 건 나에요.. 내가 한 짓… 용서 받지 못할 거라는 거 알아요..하지만.. 이대로 두면… 유미선배가 불쌍해요… 지훈이는.. 유미선배에게 못할 짓을 할 거라고.. 그게 목적이라고… 자세한 건 모르지만… 하지만 처음부터 그 목적으로..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에요.. 유미선배를 도와주세요”

“그만! 이제 그만!”

말을 막는 희성의 고함소리에 지혜는 몸을 움츠렸다. 지금 희성이로써는 지혜에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자신도 유미를 돕고 싶었다. 유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닫고, 자신을 피하고 있는 유미에 대한 초조한 마음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 그리고 지혜마저도 자신을 속였다고 하는 배신에 치가 떨렸다.

“나만..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복잡한 마음이 분노가 되어 마침내 터져버리고 말았다.

“꺼져버려! 지금 당장!”

치밀어오르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거친 목소리로 지혜를 노려보고 있는 자신에게 스스로도 놀랐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초라해 보였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자신이 정신차리지 않으면 유미는… 다시 한번 기도하는 심정으로 휴대폰의 마스코트를 움켜 쥐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만 같았다.

“제가… 제가 도와드릴게요.. 지금부터라도.. 오빠…”

애원하는 지혜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일어선 희성이 지혜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꺼지라고 했지?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꺼져버려”

“오..오빠.. 제발… 이제와서 용서받지 못할 거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선배가…”

“닥쳐!”

희성은 유미를 복도로 끌어내었다.

“너하곤 상관 없는 일이야. 두번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지혜를 복도로 내팽개친 희성이 연구실의 문을 닫아버렸다.

“오..오빠!”

지혜는 마치 희성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빠…”

문 앞에 선 채로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지혜의 뒤쪽에서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지영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이야기를 했으면 싶은데.. 괜찮으려나? 저 친구.. 도와주고 싶지 않아?”


그 후로 3일이나 유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계속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 같았다. 매일 아침 문을 사이에 두고 짧은 몇마디만 주고 받을 뿐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보는 희성에게 미안하다는 틀에 박힌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오후가 되었을 무렵 유미에게세 메시지가 들어왔다. 만나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6시에 스타벅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메시지였다. 3일간 몇번이고 자동 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기고, 몇번이고 문자를 남겼지만 딱 한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짧은 답신 말고는 돌아온 것이 없었다. 그랬던 유미였기에 문자를 보고는 어쩌면 유미가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가 보고 싶어서 희성은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어이 희성이, 기다렸잖아”

하지만 약속장소에는 유미와 그 자식이 함께였다.

“어.. 어째서 네가…?”

“일단 앉아봐. 얘기 좀 하자고”

마치 놀리는 듯한 어투로 지훈이 대답했다. 더구나 자신은 유미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이 유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자신 쪽으로 당겨 안고는 빨간 리본으로 묶인 유미의 긴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유미한테서 떨어지지 못해?”

울컥하는 희성을 도발이라도 하듯이 지훈은 오히려 유미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 닥치고 앉기나 하라고.. 여기서 쪽팔리고 싶지 않으면 말야”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는 유미는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던 것은 유미였는데 어째서 여기에 지훈이 와 있어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희성이었다. 지훈의 명령에 따라 유미가 그를 불러내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희성은 유미의 옆에 왜 지훈이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른 채 지훈을 노려보며 두 사람을 마주하고 앉았다. 지훈의 입이 열렸다.

“너 임마, 3일이나 유미를 내팽개치고 있었대매? 아주 여유만만해.. 하지만 그래서는 게임이 안되지 않겠어? 그래서 유미랑 이야기 해서 새로운 룰을 정했어”

“이야기를 해? 유미야.. 어떻게 된 거야?”

유미는 그동안 혼자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았는가. 희성이 그렇게 물어보아도 유미는 그저 아무 말도 없었다.

“내일부터 유미는 나랑 너 하루씩 번갈아가며 상대하기로 했어. 자기 차례일 때는 유미에게 뭘 해도 괜찮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아두라고 멍청한 자식”

“번갈아가며 뭐가 어째? 누구 맘대로..”

“유미도 괜찮다던데?”

지훈은 가방에서 넷으로 접은 종지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뭐야 이게?”

“게임 서약서. 이 룰에 이견 없지? 없으면 여기에 사인하라고 너만 남았으니까”

“무슨 말도 안되는..”

지훈의 이름 옆에 유미의 필체로 서명이 되어 있었다. 이름 옆에 손도장마저 찍혀져 있었다.

“유미, 너도 뭐라고 좀 해봐”

“…해줘… 부탁이야…”

“그렇게 작게 얘기해서는 안들리잖아.. 제대로 부탁하지 않으면 남자친구가 들어주겠어?”

“…한달만.. 그러니까.. 부탁할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분명히 유미는 희성에게 그렇게 하자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왜 그래 유미야…”

희성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유미를 바라 보았다. 지훈이 시키는대로 하고 있는 유미기 믿을 수가 없었다.

“너 이자식.. 또 유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남자친구가 3일이나 내팽개쳐 뒀다고 해서 외로워 해서 말야.. 그/래/서. 너 대신에 내가 귀여워해준 거 뿐인데?”

지훈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대답했다. 귀가 의심스러웠다. 유미는 그동안 자신과 만나려고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러는 동안에 지훈을 만났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알고 싶으면 가르쳐 주지”

사실은 바로 그것이 지훈이 희성을 불러낸 진짜 목적이었다. 희성이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미를 가지고 노는 것을 통해 희성을 몰아 붙이고 죽을만큼 힘든 고통을 맛보게 하는 것. 오늘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 희성을 불러내었던 것이다.

주머니에서 한장의 사진을 꺼내 희성의 앞에 들이 밀었다.

“잘 봐둬. 어제 찍은 사진이야. 뭘 하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이 자식에게 설명 좀 해줘봐”

“…네”

거기에는 러브호텔의 소파에서 가랑이를 벌리고 앉아 있는 지훈의 다리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묻고 있는 유미의 모습이 찍혀져 있었다. 빨간 리본으로 묶인 긴 머리를 한채 자지를 빨고 있는 여자는 틀림없이 유미였다. 지훈이 내려다 보며 찍은 사진이었다. 아뭇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새하얀 등과 둥근 엉덩이가 그대로 보여지고 있었다.

“……!!”

“지훈이가 안아주기 전에.. 지훈이의… 그거…”

“아 그런 목소리로는 안들린다니까.. 왜? 또 하고 싶어?”

“아.. 미안해요.. 지훈이가 안아주기 전에 지훈이 걸 열심히 빨아서 봉사를 했어요. 음.. 그러니까 입으로 받아서 전부… 지훈이 거.. 전부 마셨어요.. 아주.. 마.. 맛있었어요”

여자친구가 이야기 하는 믿을 수 없는 음란한 말에 희성은 몸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 가위라도 눌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자, 다음은 이거”

지훈이 꺼내든 두번째의 사진에서 유미는 서 있는채로 화장대 거울 앞에서 후배위로 자지를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묶여 있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얼굴이 드러난 유미는 초점이 없는 눈으로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빨강헤 상기되어 있는 표정이 거울에 비쳐 보이고 있었다.

“처음은 뒤로 했어요… 지.. 지훈가.. 아주… 깊게 넣어줘서.. 음… 기분이 너무 좋았어… 무릎이 떨려서…서 있지 못할 정도로… 느꼈어요.. 거기도.. 벌써… 부끄러울 정도로 젖어서…”

쉴틈없이 당하고 있는 도중에도 지훈은 끊임없이 유미이게 지금 자신이 어떤 체위로 안겨 있는지, 어떤 느낌인지 꼭 말로 표현하기를 강요해 왔었다. 유미의 말로 인해 유미의 마음 속에 스스로가 음란한 노예임을 자인하게 하는 조교였다. 벌써 몇번이고 반복해서 기억되어 있는 대사를 유미는 남자친구 앞에서 망설임도 없이 읖조리고 있었다. 멍해져 있는 희성의 얼굴을 보며 지훈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세번째 사진이 내밀어졌다. 유미는 얼굴을 들지도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위에서 하면.. 어디가 좋은지 알수도 있고 혼자 움직이기 편해서 좋아요.. 하지만 역시 지훈이가 해주는 게 더 좋아요.. 안기는 게 편이… 위에서 보다 아래서.. 지훈이가 거칠게 넣어주면…”

사진 속의 유미는 여성 상위자세로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트레이드 마크인 기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스스로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고 손가락으로는 젖꼭지를 비틀고 있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음란한 모습의 유미였다. 마치 짐승처럼 섹스에 몰입해 있는 여자친구의 모습이었다.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이 얼마나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다음 사진을 꺼내들자 유미가 말을 더듬었다.

“그..그건..”

네번쨔 사진을 보자 마자 희성은 자신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이.. 이 따위 짓을..!”

“뭘 그렇게 놀라나? 괜찮아.. 그치 유미야? 내가 시키는대로 약 먹고 있잖아? 안그래?”

유미는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말야.. 너도 걱정하지 말고 안에다 싸라고.. 아무리 싸도 임신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까”

침대 위에서 크게 다리를 벌리고 있는 유미의 보지에서 하얀 정액이 흘러내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절정의 여운속에 빠져있는 듯한 황홀한 표정으로 스스로 자신의 보지를 벌려서 내보이고 있었다.

“유미는 말야.. 안에다 싸주는 거 굉장히 좋아하는 거 같더라고? 어? 넌 몰랐어? 너 정말 그러고도 남자친구였던 거야? 맞지? 유미야.. 안에다 싸주는 거 좋아하지? 네 입으로 설명해봐”

한때는 마음을 주고, 몸까지 허락했었다. 너무 믿었던 탓에 덫에 걸리고 말았었다. 복종의 사슬에 걸린채 육욕의 지옥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무서웠다. 쾌락의 고문이 반복되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거역하지도 도망가지도 못했다. 절망스러웠다. 깊은 어둠 속에서 몸과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畇? 잔혹한 날들이 이어졌고, 몸은 쾌락에 물들고 마음은 산산히 부서지고 있었다.

“… 지훈이가…”

유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책을 읽는 것 같은 담담한 어조였다.

“유미 보지에 많이.. 많이 싸줬어요.. 셀수 없을 정도로… 지훈이 정액… 너무 뜨거워서.. 안에다 싸면..기분이 좋아져요.. 그것만으로도.. 유미는… 몇번이고.. 그것만으로도 느껴버릴 것 같아요..”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여자친구가 아니라 악마의 조정을 받는 인형이었다. 지훈이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낸 인형이었다.

“자 마지막 사진이야”

지훈의 말에 유미가 흠칫 몸을 떨었다.

“뭐해?”

“유.. 유미야..!”

사진을 본 희성이 자신도 모르게 유미를 부르고 말았다.

“자, 이 자식한테 정확하게 알려주라고.. 뭐해? 어서 얘기해”

지훈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유미는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남자친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복받쳐 오른 유미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테이블에 엎드리고 말았다.

“뭐야.. 설명 못해? 거 참 어쩔 수 없군….”

지훈이 혀를 차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갑자기 유미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으응… 시..싫어…으응…”

유미의 손톱이 테이블을 긁었다. 유미가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어디선가 낮은 진동음이 들려왔다. 미간을 찌푸린채 유미가 얼굴을 들었다.

“시.. 싫어.. 머.. 멈춰줘… 제발… 멈춰 주세요… 이… 이런데서.. 아흑.. 부탁이에요.. 제발..”

견디지 못한 유미가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몸을 굳힌 채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훈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자 그럼 제대로 말해봐”

거친 숨을 몰아쉬던 유미가 이날 처음으로 희성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유미의 커다란 눈동자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공허한 시선이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었다.

“…유미야…”

“아응.. 그.. 그 사진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참지 못한 희성이 유미의 시선을 피했다. 쇼파에 기대 앉아 있는 지훈의 위에서 다리를 크게 벌리고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 유미가 한장의 종이를 들고 있었다. 카메라를 향해서 ‘지훈이의 자지가 유미 보지에 박혀 있는 보아주세요. 유미는 남자친구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음란한 년이랍니다’ 라고 씌여진 종이를 들고 있었다. 틀림없는 유미의 글씨체였다. 여자친구가 쓴 것이 틀림없었다. 지훈의 자지가 뿌리까지 유미의 보지에 틀어박혀 있었다. 팽팽한 허벅지와, 자지가 틀어박힌 채 보지물을 흘리고 있는 유미의 보지와, 땀으로 젖어 있는 풍만한 가슴이 전부 선명하게 찍여있는 사진이었다. 미칠 정도로 흐트러져 요염한 표정으로 느끼고 있는 순간을 담아내고 있었다.

“지훈이가 일부러.. 약올리듯이… 느끼게 해주지 않아서… 못참아서.. 몇번이고 부탁했었는데도.. 해주지 않아서… 시키는대로 하면.. 그러니까.. 음란한 년이라고 인정하면 해준다고 해서… 그 사진을 그 증거로 찍었어요…”

말을 마친 유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너 이새끼!”

희성이 결국 지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지 여자친구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뭘 그렇게 발끈해?”

지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엷은 웃음마저 띄우고 있었다.

“아직 시작도 안했거든? 난 어땠는 줄 아나?”

“이.. 이 자식..”

지훈이에게 그 말을 들은 희성의 손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이쪽 자리의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흘깃거리고 있었다.

“너한테도 내가 봤던 지옥을 고대로 보여주지 않으면 절대 멈출 수 없다고.. 알아들어?”

지훈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던 희성의 손을 간단하게 뿌리치고 말았다.

“이년 머리 속은 아직 너한테 미련이 남아있을지 몰라도.. 몸은 안그래.. 이제 내가 아니면 느끼지도 못할걸? 나 없이는 못사는 몸이 되어 버린 거라고. 아마 이년 스스로가 더 잘 알아거야. 요 두달간 무지하게 귀여워 해줬으니까 말이지.. 지금도 너한테 이야기 하면서 질질 싸고 있을걸? 잘 들어.. 이년은 더 이상 네 여자가 아냐.. 내 장난감이지. 안그래 유미야? 내 말 잘 들을 거지? 이제부터는 이 자식이 아니라 내 말만 듣기로 맹세까지 했잖아.. 맹세만 몇번을 했었지?”

유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억울하면 되찾아가봐. 나한테서 이년을 말이지.. 둘이 같이 지옥에 떨어지던가 되찾던가 둘중 하나라고. 뭐 네가 이길 가능성은 없지만 말야.. 여자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게 무슨.. 멍청한 새끼 같으니라고”

“하하… 어쨌든 무척 재밌어.. 아주 유쾌해 아하하하”

일어선 채로 꼼짝도 못하는 희성을 올려다 보며 지훈이 유미에게 명령했다.

“어이, 오늘 일정 변경이야.. 가서 이자식하고 하고 와.. 알았지?”

5분이 넘도록 이어지던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유미였다.

“…가자…”

그렇게 말을 마치자 마자 빠른 걸음으로 커피숍을 나가는 유미를 희성이 서둘러서 쫓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훈이 유미가 시킨채 마시지도 않았던 캬라멜 마키아토를 들어 한모금 입에 대었다.

“우왓 달아.. 이런 걸 무슨 맛이라고..”

루즈가 묻어 있지 않은 빨때를 부러뜨려 바닥에 던지고는 짓밟으면서 잔혹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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