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지훈과 만나기 위해서 아침부터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려 긴 속눈썹을 더욱 강조하고 눈썹화장을 마쳤다. 입술엔 요염한 짙은 붉은 색의 립스틱을 발랐다. 지훈이 좋아하는 화려하고 진한 메이크업이었다. 은은한 펄이 들어간 글로스를 덧발랐다. 한층 더 화려해진 인상이었다. 화장을 할수록 거울속의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다. 또 한사람의 자신으로…. 희성이가 모르는 또 다른 자신..
‘잘 어울린다니까. 밝힌다는 이미지가 잘 드러나잖아? 지금 유미한테 딱이야 딱! 이제부턴 그 얼굴로 나를 즐겁게 하는 거야’
처음은 그런 지훈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지훈이와 만날 때에는 다른 사람이 되기로 했다. 자신이 아닌 그 누군가.. 음란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싫은 누군가가 되기로 했다. 출구가 없는 힘든 현실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은 스스로 그런 화장을 했다. 청초하고 자연스러운 화장만 해오던 유미가 언제부터인가 화려한 메이크업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준비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걸려온 전화는 없었다. 이미 오전 9시를 지나 있었다. 지훈이를 만나야 하는 날에 이 시간까지 호출이 없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언제인가는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불려나가 지훈의 아파트에서, 러브호텔의 한 방에서, 골목길 어느 빌딩의 비상계단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당해왔었다. 그게 당연한 하루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데 이시간까지….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어딘가 텅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제, 희성이를 만났었다. 남자친구의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아파왔다. 지훈을 만날 때마다 지훈이 원하는 색으로 물들어 변해가고 있었다.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지훈의 강한 조교에 순응하는 몸처럼 언젠가는 마음마저 그렇게 변해버릴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혼자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희성이를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직접 얼굴을 볼 용기는 없었다. 그저 먼 발치에서라도…. 며칠 전, 잠든 얼굴을 보았을 때처럼 그렇게 먼 발치에서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생각에 학교에 들렀었다. 하지만 교정의 한쪽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그만 희성과 마주치고 말았었다.
“어쩌자고… 그렇게…”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감싸안은채 유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마주치자 마자 머리속이 새하얘졌었다.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터질듯이 뛰었다. 숨이 막히고, 몸이 떨렸다. 자신을 믿고 있던 남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고, 배신을 하고, 누구보다도 소중한 남자친구를 잊어버리고 육욕에 빠져 들었었던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자신이 비참하게만 느껴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뛰어서 도망치고 말았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는 희성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희성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이야기 하고 싶었고, 안기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뛰어서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다. 또 심한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최악이었다. 차라리 없어져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오후가 되어도 지훈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희성의 집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차분해지지 않았다. 오후 무렵의 조용한 집안에서 벽에 걸린 시게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그저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식탁에 없드려 언제 울릴지 모르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 지금.. 지훈이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깜짝 놀랐다. 시계바늘은 이제 막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훈의 든든한 몸이, 쾌락에 빠져 포로가 되고 만 자신의 모습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기다리다니.. 더 이상 희성을 배반하는 일은… 하지만 그 한편으로는 몸 깊은 곳에서 차마 뿌리치지 못했던 뜨거운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지훈이에게 몸을 맡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몸을 쓰다듬던 지훈의 단단한 손길이, 가슴을 덮어오던 넓은 지훈의 가슴이, 몸 깊은 곳까지 용서없이 뚫고 들어오던 뜨거운 그 무엇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래서는 안되었다. 그럴 리가 없어야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읽고 있던 원서를 펼쳤다. 다른 생각을 하려면 할수록 지훈이를 생각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누나한테 접근했던 건… 그 자식을 괴롭히기 위해서라고…’
지훈이 자신을 안는 건 복수의 게임을 위해서였다. 자신을 불러내는 건 희성이를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공원에서의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유미한테.. 내 여자한테…그 따위 짓을… 죽여버리겠어”
지훈이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을 지켜주었다.
‘내 소중한…’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이 무엇이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중년남자를 쫓아낸 후 지훈은 유미가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옷을 입기를 기다려 말없이 안아왔었다. 떨림이 남아 있던 유미의 몸을 아플 정도로 강하게 끌어 안았었다. 그 모습은 치욕의 한게를 추구하던 평소의 지훈의 모습과는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정답이 보이질 않았다. 유미는 혼란스러웠다. 생각이 같은 자리만을 맴돌고 있었다.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와 같이 골랐던 희성의 방의 커튼을 흔들었다. 방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곧 어둠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 으으음..”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으려고 움직인 순간 맨살에 입은 스웨터가 가슴을 스치자 달콤한 자극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후우… 싫어.. 이런…”
자신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젖꼭지가 일어서 있었다. 지훈을 만나지 않고 있어도 자신의 몸이 누구의 것인지.. 유미의 몸은 지훈의 것이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지훈이 새겨놓은 계명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쾌락의 늪으로 유미를 이끌고 있었다. 처음엔 미약한 아픔과 위화감만으로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서서히 달콤한 자극으로 바뀌어가고, 쌓여갈수록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유미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고 또 다시 테이블에 엎드리고 말았다.
“입력 미스였나…?”
희성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대형 디스플레이에서는 몇가지의 3D그래픽과 에러메시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프로젝트의 준비에 정신이 없었지만 짬이 날 때마다 연구실에 들러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는 유전자 해석 시뮬레이션의 세밀도를 높이기 위해 단말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는 단순한 미스였다. 또 처음부터 다시 입력할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집중력이 떨어져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이유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제 곧 프로젝트가 시작될 터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 좀 마시고 올게요..”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가운을 입은채 연구실 밖으로 나섰다.
“희성이 저녀석.. 엄청 망가진 거 같지 않아?”
“아무리 저 녀석이 아님 진행되지 않는 연구라고는 해도.. 계속 일만 하잖아.. 게다가.. 너도 들었지? 그 소문…”
“아.. 응.. 들었어.. 그 여자친구 얘기지? 다들 알고 있던데?”
“심하지 않냐? 완전히 좆된 거 같던데?”
“그럼 그게 정말이었던 거야? 그렇게 사이 좋아 보이더니..”
“그런가봐.. 희성일 보라고.. 저렇게 기운이 없잖아”
“나 같으면 절대 용서 못한다”
같은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이 소리를 죽여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흘려 들으며 복사기의 잼을 고치려고 이리저리 복사기를 뜯어보던 지영이 결국 고개를 들었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학부생을 붙들고는 고쳐놓으라는 말만 던져 놓고 희성이 사라진 쪽으로 종종 걸음을 걸었다.
“저.. 저기 선생님, 저.. 다음 수업 있는데요?”
이학부 연구동의 옆에 있는 작은 야외 휴게실. 희성은 벤치에 앉아 정문으로 이어지는 가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판기가 놓여져 있을 뿐 사람이 없었다. 지붕도 있어서 비를 피할 수 있게 만들어진 그곳은 완전 금연인 연구동을 빠져나와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 흡연자들의 집합장소였다. 최근들어 희성이가 자주 들르는 장소기도 했다.
앞으로 1주일뒤면 12월도 끝이 난다. 해가 바뀌고 있었다. 자켓을 입지 않고 밖으로 나왔던 탓에 얼어붙는 것 같은 북풍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겁게 내려앉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이대로라면 밤에는 비나 눈이 내릴 것만 같았다. 멍하니 그런 생각들을 하며 가운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불을 붙였다.
“우욱~ 콜록 콜록”
몇번을 피워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기침을 하고 있는 희성의 손에서 누군가가 담배를 빼앗아 들었다.
“뭐야.. 이런 거 나 피우고.. 그만 둬”
“아.. 선생님”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담배나 찾고…”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면서 지영이 물어왔다.
“아뇨.. 특별히 이유 같은 건 없어요…”
하지만 갈라지고 작은 목소리였다. 지영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었다.
“그럼 더 끊어야겠네..그리고 말야.. 그 어떤 일도 무리를 해서는 안돼. 가끔은 쉬어주지 않으면.. 초조하거나 서둘러서는 잘 될일도 잘 되지 않으니까 말이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희성이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커피잔에 입을 대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지영이가 걱정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프로젝트 때문만이 아니라 정말 희성의 입장에서 대해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지만 유미에 관한 일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가족을 잃고 나서부터는 유미에게만 그의 속마음을 내보여 왔었다. 유미도 희성이에게만은 만들어지지 않은 진실된 웃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힘들때나 어려울 때면 언제나 유미의 웃는 얼굴과 따뜻함으로 위로를 받아 왔었다. 희성이에게 있어서 유미만이 특별한 존재였다.
지금의 희성이로써는 지영의 따뜻한 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영에게 기대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었다.
어제 바로 이 장소에서 유미를 보았었다. 우연이었다. 언제나처럼 평상시의 모습으로 지내기가 힘들어서, 혼자 있고 싶어서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었다.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담배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눈 앞에 유미가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유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유미는 놀란 얼굴이었다. 겁먹은 표정마저 띄우고 서둘러서 등을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유미가 어째서…. 쫓아갈 수조차 없었다. 다리가 땅이 붙은 듯 움직이질 않았다. 숨을 쉬는 것도 힘들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유미가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유미가 자신의 부름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j다.
그 모습 뒤로 지훈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여자친구를 빼앗기고도, 비웃음을 사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너무나도 사무쳤다. 이대로라면 유미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이… 어떻게 하면….
이어지는 출장 탓에 외박이 이어졌고, 연구실에서의 철야작업도 늘었다. 유미를 만날 시간을 만들기는커녕 집에 갈 시간 조차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다고는 해도 단 한순간도 유미를 생각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걱정스러웠다. 걱정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지훈에 대한 부담감 등으로 인해 그저 손을 놓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어떻게 하고 있을지.. 무사히 있을지.. 유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휴대폰을 꺼냈지만 뭐라고 해야할지 몰랐다. 지훈이로부터 구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했다.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려고도 하지 않던 유미의 모습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어서 통화버튼을 누르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집에 돌아가 보면 빨래는 정리되어 있었다. 청소도 되어 있었고, 옷장 안의 옷들도 겨울 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든 것을 유미가 해놓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며칠 전 새벽에 집에 들렀을 때 유미가 자신의 배개를 꼭 껴안고 잠들어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유미는 옆에 없었지만 그녀가 만들어 둔 아침상이 희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지 못해도,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아직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던 만큼 유미가 자신을 피하고 도망치듯 사라져버린 것이 충격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지훈이 자신과 만나지 말라고 시켰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자신은 결심하지 않았던가.. 유미를 믿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바로 옆에 지영이 앉아 있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희성은 불안감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옆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던 지영이 침묵을 깼다.
“그런데 말야 희성아..”
조용하게 말을 걸었다. 희성은 입을 다문채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전에 얘기했던 거.. 생각 좀 해봤니?”
이미 지혜로부터 대략의 이야기는 들었었다. 이전 연구실에서 희성과 유미의 섹스를 훔쳐보던 지훈이라는 남자 아이가 지혜와 짜고서 희성이로부터 유미를 빼앗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결국 유미를 생각대로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희성이가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 등 대략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영은 아직 몇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여기보다 설비도 잘 되어 있고 너처럼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많아. 연구를 진행하는데 있어서는 좋은 자극이 될 거야”
“후우~”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 듯한 희성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영은 말을 이었다.
“내년 봄부터 나… 이학연구센터의 XX 지부에 연구실을 만들기로 했어. 여기도 그렇고 거기도 그렇고.. 혼자서는 전부 다 살펴볼 수 없잖아. 그래서 말야 T공대쪽을 희성이한테 맡길까 싶거든..”
“그.. 그런.. 제가.. 더구나 아직…”
“학점은 거의 다 따두었잖아. 적은 여기에 두고 졸업논문은 거기서 쓰면 될 거야. 어차피 심사는 내가 하잖아. 희성이면 뭐 논문통과가 안될리도 없고..”
그리고 잠시 말을 끊었다. 지영은 잠시 사이를 두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 없는 게.. 희성이 너한테도 편할 거 같아서 말이야..”
“좀 더.. 시간을 주세요”
식어있는 커피를 비운 후 희성은 그렇게 대답했다.
해가 저물기 시작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지훈이였다.
“많이 기다렸나?”
평소와 같은 말투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아르바이트에 관한 얘기라던가 시험에 관한 얘기 등 아무래도 좋을만한 이야기 뿐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나와’라는 짧은 명령만이 있을 뿐이었는데… 지훈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마치 조건반사처럼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은 지훈의 그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대화가 끊겼다.
“유미..나오고 싶나?”
“……!”
강한 말투였다. 마음을 들여다 보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에 분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대답이 없지? 나오고 싶냐고 물었는데?”
“…네…”
목이 메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맥박이 빨라졌다.
“… 안기고 싶나?”
그랬던 것이다. 지훈은 그저 자신을 애태우고,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훈의 의도를 알고나서도, 자신이 또 당하고 만 것을 알아차리고도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네…”
쾌락의 파도에 휩쓸리지도 않은 상태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지훈을 원하고 있었다.
“그럼.. 제대로 부탁해야지? 안아달라고…”
지훈의 말투가 바뀌었다. 가볍고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안아줘…요…”
거역하지 못했다. 그정도까지 몸에 새겨진 달콤한 쾌락의 유혹이 강렬했다.
“조금 더 감정을 실어서! 내 장난감이잖아 너. 그럼 장난감 답게 부탁해야지. 어차피 하루 종일 질질 싸고 있었지? 못참고 혼자 딸딸이라도 친 거 아냐? 대낮부터 딜도를 꽂아넣고..”
“아..아니에요”
“자 그럼 들려줘봐.. 네가 하고 싶은 걸…”
“아.. 네…”
주저하지도 않았다. 비어있는 손으로 스웨터의 위로 가슴을 만졌다.
“아응.. 아흣.. 으응..”
가슴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민감해져 있었다. 가볍게 만진 것 만으로도 전류 같은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자신은… 장난감이었다. 역시 자신은 지훈이에게 있어서 장난감 밖에 되지 못하는 존재였다.
“아응.. 하아.. 아응.. 하아.. 하아..”
손이 곧 스웨터의 안으로 파고 들었다. 풍만한 가슴을 스스로 흔들면서 가녀린 손가락으로 민감한 젖꼭지를 튕기듯 돌렸다. 구슬처럼 부드러운 피부는 농염하게 물들고 안타까움에 허리를 비틀면서 허벅지를 꼬았다. 그렇게 할 때마다 하반신을 따라 달콤한 자극이 퍼져나갔다.
“어쭈? 제법인데? 역시 음란한 년이라 빨리 배운다니까. 아주 재미 붙였어 하하하. 그럼 이번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중계를 좀 해봐 실황중계 말야”
“지.. 지금.. 왼쪽 가슴을… 세게 잡았어요.. 그.. 그것만으로도 기분… 기분 좋아요.. 마치 내손 같지 않고… 아으응.. 좀 더.. 좀 더 거칠게.. 하고 싶어요,,,,”
자신의 말을 듣고 또 수치심이 자극되고 말았다.
“오른쪽은 어떻지?”
“꼬..꼭지가.. 아플 정도로… 젖꼭지가 스웨터에 스쳐서.. 느.. 느껴져요..”
“아래쪽은? 아래쪽도 만지고 싶나?”
“네! 마.. 만지고 싶어요!”
“자, 그럼 이렇게 말해봐”
유미는 망설이지도 않고 ‘유미의 음탕한 개보지를 혼자서 질척질척하게 적시게 해주세요’라고 복창해 보였다.
“좋아.. 해봐”
“고.. 고맙습니다..”
유미는 통화중이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손으로 들지 않아도 통화가 가능하게끔 유미는 테이블 위로 올라가 엎드렸다.
“하읏.. 사.. 살짝.. 움직인 것만으로도 스쳐서. 이.. 이렇게…”
남자친구의 집 주방 안에서 의자가 흔들리는 소리와 거친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퍼지고 있었다. 서둘러서 지퍼를 내리고 허리를 들고 바지를 무릎까지 내렸다.
“하읏!”
달궈져 있던 쾌락의 샘을 손가락으로 문지리면서 흘러내리는 보지물을 손가락에 묻힌 것만으로도 감은 눈꺼플 안으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나 젖어 있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어때? 아주 질질 싸고 있는 거 아냐?”
“아주.. 많이… 젖었어요.. 너무나…”
“하여간에 음란한 년이라니까”
지훈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질컥거리는 젖은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가끔씩 깊이 넣을 때마다 높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허리를 들썩였다. 왼손은 변함없이 넘칠 것만 같은 풍만한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손가락은 젖꼭지를 집고서 당겼다가 굴렸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총명해 보이던 커다란 눈동자에선 이미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반쯤 열린 입술에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아가곤 했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침이 턱을 타고 테이블 위로 흐르고 있었다. 더.. 더 강한 자극이… 쾌락의 거친 파도에 몸을 맡기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하흑.. 하앙.. 아응.. 하아… 하아.. 아으응”
테이블 바닥에서 몸을 지탱하고 있던 유미의 무릎이 흔들림에 따라 엉덩이가 춤을 추고 있엇다.
“아응.. 안돼.. 하응,, 모.. 못참겠어요… 하응,”
“뭐야? 벌서 싸는 거야? 얼마나 쌓여 있었던 거야? 아직은 안되지..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참아!”
“아.. 안돼요.. 싸.. 쌀 거 같아요.. 제발… 싸게 해주세요..”
“안돼.. 참아.. 아 맞다 유미 너 알고 있나? 네가 언제나 노브라 차림인 거.. 다 들켜버린 거? 그렇게 커다란 빨통을 흔들고 다니고 스웨터 위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젖꼭지 빨딱 세워서 다녀서야 어린애도 알아볼 거야. 혹시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얇은 스웨터만 입고 다닌 거 아냐? 너 .. 남자들 시선 봤지? 보여주는 걸로도 느끼지? 이 노출 변태년아”
“아응.. 아… 아니에요.. 부.. 부끄러워요.. 하흑.. 시.. 싫어.. 하아.. 하아..”
달콤한 호흡에 섞인 신음소리를 유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참을 방법이 없었다. 지훈의 그러한 제지도 손가락의 거친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몸이 떨릴 정도의 자극이 되어 또 다시 유미를 덮쳐오고 있었다.
“부.. 부탁이에요.. 싸.. 쌀 거 같아요.. 더는.. 아응,,”
“좋아.. 자 요전에 내가 얼굴에 싸주던 걸 생각하면서 싸도록 해봐”
“아응.. 네… 하흑”
드디어 지훈의 허락이 떨어졌다. 유미는 지훈에게 배운대로 가장 민감한 부분을 적확하게 골라서 자극을 가했다. 또 다른 손가락을 더해 스스로의 보지를 벌려 클리토리스를 드러내게 만들었다.
“아으응.. 하아아악~!”
막힌 듯한 신음소리였다. 날씬한 다리가 곧게 뻗어졌다.
“아으응,. 하악.. 아응.. 하아앙”
뜨. 뜨거운 것이 가득.. 코에 느껴지던 비릿한 정액의 냄새가 되살아 났다. 유미는 뜨거운 좆물을 온몸에 뒤집에 쓰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 했다. 기분 좋은 감각에 휩싸여 갔다.
“하아아아아…”
굳어 있는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 나갔다.
“쌌나? 어때? 만족했지?”
“아.. 아니에요.. “
엎드린채로 전화의 저쪽에 있는 지훈에게 속삭였다.
“뭐라고? 잘 안들려”
“가.. 갖고 싶어요..지훈이 거.. 지훈이 자지가.. 피.. 필요해요..”
“푸후훗! 아주 제대로 빠졌구만.. 씨발년.. 이제 알겠어? 네 몸은 이제 나 없이는 만족 못한다는 거.. 넌 이제 나 없이는 못산다고”
“제..제발.. 부탁이에요..”
파도가 빠져나가는 듯이 스스로 만들어낸 쾌감에서 빠져나오자 더 강한 쾌감에 대한 열망만이 넘쳐났다. 지훈에 의해서 개발된 만족을 모르는 육체는 더 강한 느낌을 원하고 있었다. 이제 막 절정을 경험했음에도 또 다시 몸은 달구어져가고 있었다. 어중간했던 절정이 오히려 의식을 잃을정도로 강한 느낌을 알고 있는 유미의 정욕에 불을 지폈다.
“그래? 그렇게 하고 싶으면 나와”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그런데 말야.. 오늘은 안보낼 거야.. 내 지시가 아니라 네 뜻대로 정하도록 해. 네가 원해서 네가 결정하고 나한테 안기러 오도록 하라고”
유미가 대답하기 전에 지훈이 덧붙였다.
“아 맞다. 집에 가지 않으면 그 병신새끼가 걱정하겠지? 그러니까 네가 먼저 얘기 해놓고 와. 나한테로 가서 자고 오겠다고. 나한테 안기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야 하하하하.. 제대로 얘기하고 오면 상으로 아침까지 잔뜩 귀여워 해줄게. 언제나처럼 미칠 정도로 느끼게 만들어 줄게”
유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는 끊어졌다.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직 여운이 남아 있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고 흐트러진 옷을 고쳐 입었다.
외출을 해버리면 또 다시 희성이에게 상처를주게 되는 일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핸드백을 들고 조종이라도 당하는 듯이 현관을 향했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다. 멈추지 않으면… 하지만…
잠금을 풀고 손잡이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 문이 열렸다.
희성이 서 있었다. 눈 앞에 남자 친구가 서 있었다.
“희.. 희성아…”
“아.. 있었구나… 참 그동안 고마웠어.. 청소라던가…”
희성이는 평소와 같이 이야기하려고 애를 썼다.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친 일이라던지, 몇번이고 심한 상처를 받았던 기억 등을 억지로 감추고 있는 남자친구의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눈이 부셔 유미는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좀 앉아봐. 커피 타줄게..”
“아.. 네,,”
원래의 유미였다면 ‘응!’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터였다. 동격이 아닌 복종의 언어로 대답을 하고 마는 유미를 보고 지훈이에 의해서 달라지고 만 두 사람의 관계를 새삼 깨닫고는 희성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둘이 이야기 해보는 거… 참 오랜만이다…”
“그러네…”
식탁에 앉았다. 조금전까지만 하더라도 명령받은대로 자위에 몰두하던 그 식탁에 앉은 유미는 좀처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치밀어 오르는 죄책감 때문에 희성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저 짧은 대답뿐이었다. 대화가 좀처럼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고민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렇게 고민만 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우선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렇게 해서 유미를…
“… 유미야.. 있잖아…”
“…응?”
여전히 유미는 테이블 저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자고 가지 않을래…?”
유미는 살짝 몸을 떨었다. 이윽고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 지훈이네…가야.. 해.. 오늘은.. 그.. 그러니까.. 그… 그 사람 하고의 날이니까…. 내일… 올게… 미..안..”
“그.. 그랬니? 그..렇구나..”
또 다시 침묵이 찾아오고 유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일… 미안…”
핸드백을 들고 현관을 향하는 유미의 빨간 리본으로 묶인 긴 머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친구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돌아보지도 않고 신발을 신고 손잡이를 잡았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성은 무엇인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유미를 그냥 보내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이대로 유미를 보내버린다면 두번 다시… 그저 그 생각만이 머리 속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못 보내! 그런 자식한테.. 안보낼 거야”
희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유미에게로 달려가 뒤에서 유미를 안으려고 두 팔을 뻗었다. 어깨에 손이 닿았다.
“싫어! 안돼! 손대지 말아줘”
유미는 그렇게 소리치며 희성의 손을 뿌리치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이 주저앉아 버렸다.
“왜.. 왜 그래 유미야…?”
다시한번 거부당하고 말았다. 그저 멍하니 유미를 내려다 보며 왜냐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미안.. 미안해.. 하지만.. 안돼..”
유미 역시 그저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다.
“그 자식 때문에 그래? 그렇게.. 그 자식이 좋은 거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유미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몇번이고 고개만을 젓고 있었다.
“그…럼.. 왜…?”
주저앉아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유미를 희성은 가만히 안아주었다. 유미의 새로운 거부는 더 이상 없었다.
“유미야…?”
희성은 유미의 옷 아래로 느껴지는 이물감에 손을 떼고 말았다. 유미는 그제서야 결심을 한 듯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 그게…?”
희성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유미는 바지까지 벗은 후 희성이 앞에 알몸을 드러내었다. 지훈이가 새겨놓은 계명을 희성이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비칠듯이 투명한 하얀 피부를 강조라도 하듯이 빨간 로프가 몸을 감고 있었다. 소위 이야기 하는 SM의 구속이었다. 몇겹으로 가슴을 둘러서 사타구니까지 매듭지어진 빨간 로프는 유미의 새하얀 살결을 파고 들고 있었다. 가녀린 허리는 물론 온몸을 그렇게 빨간 로프가 휘감고 있었다.
“이.. 이 따위 짓을…”
유미의 목에는 검정색 가죽 목줄이 지훈에게의 복종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채워져 있었다. 혼자서는 풀지 못하도록 자물쇠까지 채워져 있는 상태였다. 목이 올라오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던 것도 그 목줄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개.. 자식.. 이 따위 짓을 하고도…”
거기에 더해서 온몸에 매직으로 낙서가 되어 있었다. 가슴에는 ‘음란한 년’ ‘개변태’라는 글씨가, 복부에는 ‘자지를 밝히는년’ ‘똥구멍으로도 싸는 년’ 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배꼽 아래로 눈을 돌리자 보지털 마저 깨끗하게 면도가 되어져 있었고, 같은 글씨로 ‘내 전용 좆물받이’라고 굵게 쓰여져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 안쪽으로는 날짜가 있었고, 왼쪽 허벅지 안쪽에는 바를 정자가 새겨져 있었다. 4개의 바를 정자와 3획이 그어져 있었다. 유미를 돌려 세워보니 ‘병신 새끼.. 내 여자 몸에 손 대지 마’라는 글씨가 거칠게 쓰여져 있었다.
“이… 이런 몸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여러가지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을 너무 많이 당해서..내 몸 같지가 않아… 나… 더럽혀 졌거든…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거든…”
이날 처음으로 희성을 향해 마주 보고 있었다. 진한 화장에 어울리지 않는 약해 보이는 눈으로 희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도.. 사실은.. 그 사람한테 안기러 가려고 하는 중이었어… 그 사람한테…. 이렇게.. 야하게 화장을 하고.. 안기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거기까지 이야기한 유미가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희성이가 알고 있는 내가 아니야… 더 이상… 나… 이런 내가… 더럽지…? 희성이가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미.. 미안해…”
목소리가 갈라져서 떨리고 있었다.
“내가.. 나빴어… 희성이를 믿지 못했었으니까… 희성이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말아서… 미안해… 나 때문에.. 힘들게 해서…”
현관 앞 마루에 주저 않아 머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무릎을 꿇고 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미워해도 괜찮아.. 아.. 아니야.. 미워 하도록 해… 그렇게 하면 희성이는.. 힘들지 않아도 되니까… 더 이상.. 희성이를 힘들게 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나를… 차라리..”
“유미는 하나도 더럽지 않아!”
희성은 유미를 강하게 안았다. 자신의 마음이 전달될 수 있도록 부드럽게 하지만 강하게 유미를 끌어 안았다.
“나한테 제일 힘든 건.. 유미를 잃어버리는 거야…”
유미는 그렇게 심한 일을 당했어도.. 유미 자신 보다 희성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희성이 역시 유미와 이어진 육체의 끈 보다는 마음의 끈을 더 믿고 있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희.. 희성아.. 이런.. 이런 날… 안아주는 거야?”
“’이런’이라니.. 유미는 단 하나뿐인 내 소중한 사람이야. 내 마음은 전혀 변하질 않았는 걸?”
유미를 지키고 싶었다. 더 이상 힘들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희성은 유미를 안은채 로프를 풀기 시작했다.
“희.. 희성아..”
“더 이상 그 자식한테는 가지 않아도 돼. 내가 유미 옆에 있잖아”
희성은 다시 한번 유미를 힘주어 안았다.
목줄은 풀어내지 못했지만 몸에 쓰여 있던 낙서는 희성이 조심스럽게 지우고 씻어내었다. 제법 엷어졌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은 침대 안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희성의 팔 안에서 유미는 어린아이처럼 포근히 안겨서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조금 더 빨리 이렇게 했어야 했었다…. 희성은 유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희성아.. 좀 마른 거 같아..”
따뜻했다. 포근한 기분이었다. 유미는 수염이 거칠게 자라나 있는 희성의 얼굴을 만졌다.
“이렇게 될 때까지..나.. 모르고 있었어.. 미안… 미안해..”
“괜찮아 유미야..”
유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덕분에 유미는 아픈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웃고 있었다.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충동은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셀수 없을 정도로 지훈이에게 당했고, 몇번이고 남자친구에게 상처를 주었던 탓에 차라리 희성이와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유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부드럽게 안기게 되자. 변하지 않은 애정을 느끼게 되자 비관적인 생각들은 얼음처럼 녹아버리고 말았다. 가슴 속으로 따뜻한 온기가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역시..희성이와 함께 있고 싶었다… 이런.. 이런 나를 희성은 받아주고 있었다. 그 어떤 심한 일을 당했어도 희성은 자신을 안아주고 있었다… 그런 희성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동안 어긋나기만 하던 두 사람의 마음이 간신히 하나가 되어가는, 그런 따뜻하던 시간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벨 소리에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유미가 놀란듯이 몸을 일으켰다.
“유미야.. 왜..? 왜 그래?”
유미는 침대에 엎드린 채 휴대폰의 액정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그 자식이야?”
전화벨 소리는 시간이 지나도 끊어지질 않았다. 집요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유미는 희성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쥐고만 있었다.
“어떡해.. 어떻게 하지…?”
그토록 발랄하고 명랑하던 유미를 이런 전화 한통으로 겁에 질리게 만들다니…
“앗! 희성아…”
“…여보세요?”
유미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아든 희성이 전화를 받았다.
“흠… 그랬었군… 오랜만이야? 병신 새끼.. 아직 살아 있었네?”
여유만만한 지훈의 목소리였다. 마치 희성을 깔보는 듯한 말투도 여전했다.
“너 같은 자식에게.. 두번 다시 유미를 보낼 생각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
“뭐?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뭐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유미는 내 여자야. 너야말로 멋대로 손대지 말라고”
“헛소리 하지 마”
희성의 말을 무시한 채 지훈은 너무나도 당당히 요구했다.
“내 장난감 옆에 있지? 바꿔봐.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안돼.. 유미는 너 같은 자식이랑 할 얘기 없으니까”
“아 그래? 그럼.. 병신새끼가 중도에 게임을 포기한 벌로 유미의 사진을.. 아, 봤잖아? 그 보지 벌리고 좆물로 범벅이 되어 있던 그 사진 말야.. 그 사진을 학교에 뿌리도록 할 게. 녹음되어 있는 신음 소리도 인터넷에 올리지 뭐”
“뭐.. 뭐라고..? 이 자식.. 그 따위로 비겁하게…”
“미스 W대의 음란 사진이라… 아마 벌떼처럼 달려들 거야 하하하”
“그.. 그.. 그러기만 해봐.. 아주 죽여버릴 테니까”
“우와~ 무셔라.. “
거기까지 말한 후 지훈의 말투가 낮고 무겁게 바뀌었다.
“뭐야.. 이 병신 새끼.. 그래도 나쁘지 않잖아? 지금까지 넌 혼자만 그렇게 편하게 살아왔으니까 말야.. 그 여자 정도는 내게 넘기라고. 나도 조금은 좋아져야 하지 않겠어?”
희성에게 있어서는 카운터 펀치였다.
“웃…!!”
“…나 바꾸라고 하지 않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희성을 바라보며 유미가 가만히 전화기를 손에서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저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유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 그… 그건.. ..그.. 그러니까.. 아.. 아뇨.. 아니에요.. 그런… 그런 일 없어요… 미.. 미안해요.. 두번 다시.. 정말.. 두번 다시…. 아니에요.. 자.. 잘못했어요.. 그.. 그런.. 아뇨.. 아무것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미안해요.. 네.. 네.. 알겠습니다…”
후배를 대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점차 유미의 말투에서 억양이 사라지다가 결국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말투가 되어 있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맞장구만 치고 있을 뿐이었다.
“… 네.. 맞아요.. 네.. 유미는… 그래요.. 네.. 지훈이가 말하는대로.. 네.. 말씀하시는 대로에요… 정말.. 잘못했어요…”
어깨를 떨구고, 등을 굽힌 채 고개를 숙인 유미가 희성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너 이자식.. 유미한테 무슨 짓을!”
“시끄러 병신 새끼야.. 잘 들어.. 내일부터 1박2일로 셋이서 어딜 좀 가야 되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거기서.. 네 눈 앞에서 그년이 내 여자란는 증거를.. 나 없이는 못사는 년이라는 걸 보여줄게.. 기대하라고.. 아.. 그리고.. 너한테는 선택권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지?”
지훈은 통화를 끝내고도 짜증이 남아 있는 듯이 전화기를 침대위로 내팽개치고 말았다.
“병신 새끼.. 너만은… 너만은 결코 그냥두지 않아.. 피눈물을 흘리게 해주지.. 너도..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게”
원한에 사로잡힌 눈에 그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증오를 폭발시키기라도 하듯이 지훈이 중얼거렸다.
기대하라고.. 흐흐흐흐..
캄캄한 방안에서 낮은 웃음소리만이 낮게 깔려 울리고 있었다.
지훈과 만나기 위해서 아침부터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려 긴 속눈썹을 더욱 강조하고 눈썹화장을 마쳤다. 입술엔 요염한 짙은 붉은 색의 립스틱을 발랐다. 지훈이 좋아하는 화려하고 진한 메이크업이었다. 은은한 펄이 들어간 글로스를 덧발랐다. 한층 더 화려해진 인상이었다. 화장을 할수록 거울속의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다. 또 한사람의 자신으로…. 희성이가 모르는 또 다른 자신..
‘잘 어울린다니까. 밝힌다는 이미지가 잘 드러나잖아? 지금 유미한테 딱이야 딱! 이제부턴 그 얼굴로 나를 즐겁게 하는 거야’
처음은 그런 지훈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지훈이와 만날 때에는 다른 사람이 되기로 했다. 자신이 아닌 그 누군가.. 음란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싫은 누군가가 되기로 했다. 출구가 없는 힘든 현실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은 스스로 그런 화장을 했다. 청초하고 자연스러운 화장만 해오던 유미가 언제부터인가 화려한 메이크업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준비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걸려온 전화는 없었다. 이미 오전 9시를 지나 있었다. 지훈이를 만나야 하는 날에 이 시간까지 호출이 없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언제인가는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불려나가 지훈의 아파트에서, 러브호텔의 한 방에서, 골목길 어느 빌딩의 비상계단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당해왔었다. 그게 당연한 하루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데 이시간까지….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어딘가 텅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제, 희성이를 만났었다. 남자친구의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아파왔다. 지훈을 만날 때마다 지훈이 원하는 색으로 물들어 변해가고 있었다.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지훈의 강한 조교에 순응하는 몸처럼 언젠가는 마음마저 그렇게 변해버릴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혼자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희성이를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직접 얼굴을 볼 용기는 없었다. 그저 먼 발치에서라도…. 며칠 전, 잠든 얼굴을 보았을 때처럼 그렇게 먼 발치에서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생각에 학교에 들렀었다. 하지만 교정의 한쪽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그만 희성과 마주치고 말았었다.
“어쩌자고… 그렇게…”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감싸안은채 유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마주치자 마자 머리속이 새하얘졌었다.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터질듯이 뛰었다. 숨이 막히고, 몸이 떨렸다. 자신을 믿고 있던 남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고, 배신을 하고, 누구보다도 소중한 남자친구를 잊어버리고 육욕에 빠져 들었었던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자신이 비참하게만 느껴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뛰어서 도망치고 말았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는 희성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희성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이야기 하고 싶었고, 안기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뛰어서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다. 또 심한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최악이었다. 차라리 없어져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오후가 되어도 지훈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희성의 집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차분해지지 않았다. 오후 무렵의 조용한 집안에서 벽에 걸린 시게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그저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식탁에 없드려 언제 울릴지 모르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 지금.. 지훈이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깜짝 놀랐다. 시계바늘은 이제 막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훈의 든든한 몸이, 쾌락에 빠져 포로가 되고 만 자신의 모습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기다리다니.. 더 이상 희성을 배반하는 일은… 하지만 그 한편으로는 몸 깊은 곳에서 차마 뿌리치지 못했던 뜨거운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지훈이에게 몸을 맡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몸을 쓰다듬던 지훈의 단단한 손길이, 가슴을 덮어오던 넓은 지훈의 가슴이, 몸 깊은 곳까지 용서없이 뚫고 들어오던 뜨거운 그 무엇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래서는 안되었다. 그럴 리가 없어야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읽고 있던 원서를 펼쳤다. 다른 생각을 하려면 할수록 지훈이를 생각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누나한테 접근했던 건… 그 자식을 괴롭히기 위해서라고…’
지훈이 자신을 안는 건 복수의 게임을 위해서였다. 자신을 불러내는 건 희성이를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공원에서의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유미한테.. 내 여자한테…그 따위 짓을… 죽여버리겠어”
지훈이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을 지켜주었다.
‘내 소중한…’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이 무엇이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중년남자를 쫓아낸 후 지훈은 유미가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옷을 입기를 기다려 말없이 안아왔었다. 떨림이 남아 있던 유미의 몸을 아플 정도로 강하게 끌어 안았었다. 그 모습은 치욕의 한게를 추구하던 평소의 지훈의 모습과는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정답이 보이질 않았다. 유미는 혼란스러웠다. 생각이 같은 자리만을 맴돌고 있었다.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와 같이 골랐던 희성의 방의 커튼을 흔들었다. 방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곧 어둠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 으으음..”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으려고 움직인 순간 맨살에 입은 스웨터가 가슴을 스치자 달콤한 자극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후우… 싫어.. 이런…”
자신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젖꼭지가 일어서 있었다. 지훈을 만나지 않고 있어도 자신의 몸이 누구의 것인지.. 유미의 몸은 지훈의 것이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지훈이 새겨놓은 계명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쾌락의 늪으로 유미를 이끌고 있었다. 처음엔 미약한 아픔과 위화감만으로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서서히 달콤한 자극으로 바뀌어가고, 쌓여갈수록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유미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고 또 다시 테이블에 엎드리고 말았다.
“입력 미스였나…?”
희성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대형 디스플레이에서는 몇가지의 3D그래픽과 에러메시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프로젝트의 준비에 정신이 없었지만 짬이 날 때마다 연구실에 들러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는 유전자 해석 시뮬레이션의 세밀도를 높이기 위해 단말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는 단순한 미스였다. 또 처음부터 다시 입력할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집중력이 떨어져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이유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제 곧 프로젝트가 시작될 터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 좀 마시고 올게요..”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가운을 입은채 연구실 밖으로 나섰다.
“희성이 저녀석.. 엄청 망가진 거 같지 않아?”
“아무리 저 녀석이 아님 진행되지 않는 연구라고는 해도.. 계속 일만 하잖아.. 게다가.. 너도 들었지? 그 소문…”
“아.. 응.. 들었어.. 그 여자친구 얘기지? 다들 알고 있던데?”
“심하지 않냐? 완전히 좆된 거 같던데?”
“그럼 그게 정말이었던 거야? 그렇게 사이 좋아 보이더니..”
“그런가봐.. 희성일 보라고.. 저렇게 기운이 없잖아”
“나 같으면 절대 용서 못한다”
같은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이 소리를 죽여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흘려 들으며 복사기의 잼을 고치려고 이리저리 복사기를 뜯어보던 지영이 결국 고개를 들었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학부생을 붙들고는 고쳐놓으라는 말만 던져 놓고 희성이 사라진 쪽으로 종종 걸음을 걸었다.
“저.. 저기 선생님, 저.. 다음 수업 있는데요?”
이학부 연구동의 옆에 있는 작은 야외 휴게실. 희성은 벤치에 앉아 정문으로 이어지는 가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판기가 놓여져 있을 뿐 사람이 없었다. 지붕도 있어서 비를 피할 수 있게 만들어진 그곳은 완전 금연인 연구동을 빠져나와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 흡연자들의 집합장소였다. 최근들어 희성이가 자주 들르는 장소기도 했다.
앞으로 1주일뒤면 12월도 끝이 난다. 해가 바뀌고 있었다. 자켓을 입지 않고 밖으로 나왔던 탓에 얼어붙는 것 같은 북풍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겁게 내려앉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이대로라면 밤에는 비나 눈이 내릴 것만 같았다. 멍하니 그런 생각들을 하며 가운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불을 붙였다.
“우욱~ 콜록 콜록”
몇번을 피워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기침을 하고 있는 희성의 손에서 누군가가 담배를 빼앗아 들었다.
“뭐야.. 이런 거 나 피우고.. 그만 둬”
“아.. 선생님”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담배나 찾고…”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면서 지영이 물어왔다.
“아뇨.. 특별히 이유 같은 건 없어요…”
하지만 갈라지고 작은 목소리였다. 지영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었다.
“그럼 더 끊어야겠네..그리고 말야.. 그 어떤 일도 무리를 해서는 안돼. 가끔은 쉬어주지 않으면.. 초조하거나 서둘러서는 잘 될일도 잘 되지 않으니까 말이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희성이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커피잔에 입을 대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지영이가 걱정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프로젝트 때문만이 아니라 정말 희성의 입장에서 대해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지만 유미에 관한 일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가족을 잃고 나서부터는 유미에게만 그의 속마음을 내보여 왔었다. 유미도 희성이에게만은 만들어지지 않은 진실된 웃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힘들때나 어려울 때면 언제나 유미의 웃는 얼굴과 따뜻함으로 위로를 받아 왔었다. 희성이에게 있어서 유미만이 특별한 존재였다.
지금의 희성이로써는 지영의 따뜻한 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영에게 기대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었다.
어제 바로 이 장소에서 유미를 보았었다. 우연이었다. 언제나처럼 평상시의 모습으로 지내기가 힘들어서, 혼자 있고 싶어서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었다.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담배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눈 앞에 유미가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유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유미는 놀란 얼굴이었다. 겁먹은 표정마저 띄우고 서둘러서 등을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유미가 어째서…. 쫓아갈 수조차 없었다. 다리가 땅이 붙은 듯 움직이질 않았다. 숨을 쉬는 것도 힘들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유미가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유미가 자신의 부름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j다.
그 모습 뒤로 지훈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여자친구를 빼앗기고도, 비웃음을 사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너무나도 사무쳤다. 이대로라면 유미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이… 어떻게 하면….
이어지는 출장 탓에 외박이 이어졌고, 연구실에서의 철야작업도 늘었다. 유미를 만날 시간을 만들기는커녕 집에 갈 시간 조차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다고는 해도 단 한순간도 유미를 생각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걱정스러웠다. 걱정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지훈에 대한 부담감 등으로 인해 그저 손을 놓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어떻게 하고 있을지.. 무사히 있을지.. 유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휴대폰을 꺼냈지만 뭐라고 해야할지 몰랐다. 지훈이로부터 구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했다.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려고도 하지 않던 유미의 모습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어서 통화버튼을 누르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집에 돌아가 보면 빨래는 정리되어 있었다. 청소도 되어 있었고, 옷장 안의 옷들도 겨울 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든 것을 유미가 해놓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며칠 전 새벽에 집에 들렀을 때 유미가 자신의 배개를 꼭 껴안고 잠들어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유미는 옆에 없었지만 그녀가 만들어 둔 아침상이 희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지 못해도,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아직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던 만큼 유미가 자신을 피하고 도망치듯 사라져버린 것이 충격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지훈이 자신과 만나지 말라고 시켰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자신은 결심하지 않았던가.. 유미를 믿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바로 옆에 지영이 앉아 있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희성은 불안감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옆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던 지영이 침묵을 깼다.
“그런데 말야 희성아..”
조용하게 말을 걸었다. 희성은 입을 다문채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전에 얘기했던 거.. 생각 좀 해봤니?”
이미 지혜로부터 대략의 이야기는 들었었다. 이전 연구실에서 희성과 유미의 섹스를 훔쳐보던 지훈이라는 남자 아이가 지혜와 짜고서 희성이로부터 유미를 빼앗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결국 유미를 생각대로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희성이가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 등 대략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영은 아직 몇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여기보다 설비도 잘 되어 있고 너처럼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많아. 연구를 진행하는데 있어서는 좋은 자극이 될 거야”
“후우~”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 듯한 희성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영은 말을 이었다.
“내년 봄부터 나… 이학연구센터의 XX 지부에 연구실을 만들기로 했어. 여기도 그렇고 거기도 그렇고.. 혼자서는 전부 다 살펴볼 수 없잖아. 그래서 말야 T공대쪽을 희성이한테 맡길까 싶거든..”
“그.. 그런.. 제가.. 더구나 아직…”
“학점은 거의 다 따두었잖아. 적은 여기에 두고 졸업논문은 거기서 쓰면 될 거야. 어차피 심사는 내가 하잖아. 희성이면 뭐 논문통과가 안될리도 없고..”
그리고 잠시 말을 끊었다. 지영은 잠시 사이를 두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 없는 게.. 희성이 너한테도 편할 거 같아서 말이야..”
“좀 더.. 시간을 주세요”
식어있는 커피를 비운 후 희성은 그렇게 대답했다.
해가 저물기 시작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지훈이였다.
“많이 기다렸나?”
평소와 같은 말투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아르바이트에 관한 얘기라던가 시험에 관한 얘기 등 아무래도 좋을만한 이야기 뿐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나와’라는 짧은 명령만이 있을 뿐이었는데… 지훈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마치 조건반사처럼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은 지훈의 그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대화가 끊겼다.
“유미..나오고 싶나?”
“……!”
강한 말투였다. 마음을 들여다 보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에 분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대답이 없지? 나오고 싶냐고 물었는데?”
“…네…”
목이 메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맥박이 빨라졌다.
“… 안기고 싶나?”
그랬던 것이다. 지훈은 그저 자신을 애태우고,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훈의 의도를 알고나서도, 자신이 또 당하고 만 것을 알아차리고도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네…”
쾌락의 파도에 휩쓸리지도 않은 상태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지훈을 원하고 있었다.
“그럼.. 제대로 부탁해야지? 안아달라고…”
지훈의 말투가 바뀌었다. 가볍고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안아줘…요…”
거역하지 못했다. 그정도까지 몸에 새겨진 달콤한 쾌락의 유혹이 강렬했다.
“조금 더 감정을 실어서! 내 장난감이잖아 너. 그럼 장난감 답게 부탁해야지. 어차피 하루 종일 질질 싸고 있었지? 못참고 혼자 딸딸이라도 친 거 아냐? 대낮부터 딜도를 꽂아넣고..”
“아..아니에요”
“자 그럼 들려줘봐.. 네가 하고 싶은 걸…”
“아.. 네…”
주저하지도 않았다. 비어있는 손으로 스웨터의 위로 가슴을 만졌다.
“아응.. 아흣.. 으응..”
가슴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민감해져 있었다. 가볍게 만진 것 만으로도 전류 같은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자신은… 장난감이었다. 역시 자신은 지훈이에게 있어서 장난감 밖에 되지 못하는 존재였다.
“아응.. 하아.. 아응.. 하아.. 하아..”
손이 곧 스웨터의 안으로 파고 들었다. 풍만한 가슴을 스스로 흔들면서 가녀린 손가락으로 민감한 젖꼭지를 튕기듯 돌렸다. 구슬처럼 부드러운 피부는 농염하게 물들고 안타까움에 허리를 비틀면서 허벅지를 꼬았다. 그렇게 할 때마다 하반신을 따라 달콤한 자극이 퍼져나갔다.
“어쭈? 제법인데? 역시 음란한 년이라 빨리 배운다니까. 아주 재미 붙였어 하하하. 그럼 이번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중계를 좀 해봐 실황중계 말야”
“지.. 지금.. 왼쪽 가슴을… 세게 잡았어요.. 그.. 그것만으로도 기분… 기분 좋아요.. 마치 내손 같지 않고… 아으응.. 좀 더.. 좀 더 거칠게.. 하고 싶어요,,,,”
자신의 말을 듣고 또 수치심이 자극되고 말았다.
“오른쪽은 어떻지?”
“꼬..꼭지가.. 아플 정도로… 젖꼭지가 스웨터에 스쳐서.. 느.. 느껴져요..”
“아래쪽은? 아래쪽도 만지고 싶나?”
“네! 마.. 만지고 싶어요!”
“자, 그럼 이렇게 말해봐”
유미는 망설이지도 않고 ‘유미의 음탕한 개보지를 혼자서 질척질척하게 적시게 해주세요’라고 복창해 보였다.
“좋아.. 해봐”
“고.. 고맙습니다..”
유미는 통화중이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손으로 들지 않아도 통화가 가능하게끔 유미는 테이블 위로 올라가 엎드렸다.
“하읏.. 사.. 살짝.. 움직인 것만으로도 스쳐서. 이.. 이렇게…”
남자친구의 집 주방 안에서 의자가 흔들리는 소리와 거친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퍼지고 있었다. 서둘러서 지퍼를 내리고 허리를 들고 바지를 무릎까지 내렸다.
“하읏!”
달궈져 있던 쾌락의 샘을 손가락으로 문지리면서 흘러내리는 보지물을 손가락에 묻힌 것만으로도 감은 눈꺼플 안으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나 젖어 있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어때? 아주 질질 싸고 있는 거 아냐?”
“아주.. 많이… 젖었어요.. 너무나…”
“하여간에 음란한 년이라니까”
지훈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질컥거리는 젖은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가끔씩 깊이 넣을 때마다 높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허리를 들썩였다. 왼손은 변함없이 넘칠 것만 같은 풍만한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손가락은 젖꼭지를 집고서 당겼다가 굴렸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총명해 보이던 커다란 눈동자에선 이미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반쯤 열린 입술에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아가곤 했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침이 턱을 타고 테이블 위로 흐르고 있었다. 더.. 더 강한 자극이… 쾌락의 거친 파도에 몸을 맡기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하흑.. 하앙.. 아응.. 하아… 하아.. 아으응”
테이블 바닥에서 몸을 지탱하고 있던 유미의 무릎이 흔들림에 따라 엉덩이가 춤을 추고 있엇다.
“아응.. 안돼.. 하응,, 모.. 못참겠어요… 하응,”
“뭐야? 벌서 싸는 거야? 얼마나 쌓여 있었던 거야? 아직은 안되지..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참아!”
“아.. 안돼요.. 싸.. 쌀 거 같아요.. 제발… 싸게 해주세요..”
“안돼.. 참아.. 아 맞다 유미 너 알고 있나? 네가 언제나 노브라 차림인 거.. 다 들켜버린 거? 그렇게 커다란 빨통을 흔들고 다니고 스웨터 위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젖꼭지 빨딱 세워서 다녀서야 어린애도 알아볼 거야. 혹시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얇은 스웨터만 입고 다닌 거 아냐? 너 .. 남자들 시선 봤지? 보여주는 걸로도 느끼지? 이 노출 변태년아”
“아응.. 아… 아니에요.. 부.. 부끄러워요.. 하흑.. 시.. 싫어.. 하아.. 하아..”
달콤한 호흡에 섞인 신음소리를 유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참을 방법이 없었다. 지훈의 그러한 제지도 손가락의 거친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몸이 떨릴 정도의 자극이 되어 또 다시 유미를 덮쳐오고 있었다.
“부.. 부탁이에요.. 싸.. 쌀 거 같아요.. 더는.. 아응,,”
“좋아.. 자 요전에 내가 얼굴에 싸주던 걸 생각하면서 싸도록 해봐”
“아응.. 네… 하흑”
드디어 지훈의 허락이 떨어졌다. 유미는 지훈에게 배운대로 가장 민감한 부분을 적확하게 골라서 자극을 가했다. 또 다른 손가락을 더해 스스로의 보지를 벌려 클리토리스를 드러내게 만들었다.
“아으응.. 하아아악~!”
막힌 듯한 신음소리였다. 날씬한 다리가 곧게 뻗어졌다.
“아으응,. 하악.. 아응.. 하아앙”
뜨. 뜨거운 것이 가득.. 코에 느껴지던 비릿한 정액의 냄새가 되살아 났다. 유미는 뜨거운 좆물을 온몸에 뒤집에 쓰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 했다. 기분 좋은 감각에 휩싸여 갔다.
“하아아아아…”
굳어 있는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 나갔다.
“쌌나? 어때? 만족했지?”
“아.. 아니에요.. “
엎드린채로 전화의 저쪽에 있는 지훈에게 속삭였다.
“뭐라고? 잘 안들려”
“가.. 갖고 싶어요..지훈이 거.. 지훈이 자지가.. 피.. 필요해요..”
“푸후훗! 아주 제대로 빠졌구만.. 씨발년.. 이제 알겠어? 네 몸은 이제 나 없이는 만족 못한다는 거.. 넌 이제 나 없이는 못산다고”
“제..제발.. 부탁이에요..”
파도가 빠져나가는 듯이 스스로 만들어낸 쾌감에서 빠져나오자 더 강한 쾌감에 대한 열망만이 넘쳐났다. 지훈에 의해서 개발된 만족을 모르는 육체는 더 강한 느낌을 원하고 있었다. 이제 막 절정을 경험했음에도 또 다시 몸은 달구어져가고 있었다. 어중간했던 절정이 오히려 의식을 잃을정도로 강한 느낌을 알고 있는 유미의 정욕에 불을 지폈다.
“그래? 그렇게 하고 싶으면 나와”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그런데 말야.. 오늘은 안보낼 거야.. 내 지시가 아니라 네 뜻대로 정하도록 해. 네가 원해서 네가 결정하고 나한테 안기러 오도록 하라고”
유미가 대답하기 전에 지훈이 덧붙였다.
“아 맞다. 집에 가지 않으면 그 병신새끼가 걱정하겠지? 그러니까 네가 먼저 얘기 해놓고 와. 나한테로 가서 자고 오겠다고. 나한테 안기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야 하하하하.. 제대로 얘기하고 오면 상으로 아침까지 잔뜩 귀여워 해줄게. 언제나처럼 미칠 정도로 느끼게 만들어 줄게”
유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는 끊어졌다.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직 여운이 남아 있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고 흐트러진 옷을 고쳐 입었다.
외출을 해버리면 또 다시 희성이에게 상처를주게 되는 일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핸드백을 들고 조종이라도 당하는 듯이 현관을 향했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다. 멈추지 않으면… 하지만…
잠금을 풀고 손잡이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 문이 열렸다.
희성이 서 있었다. 눈 앞에 남자 친구가 서 있었다.
“희.. 희성아…”
“아.. 있었구나… 참 그동안 고마웠어.. 청소라던가…”
희성이는 평소와 같이 이야기하려고 애를 썼다.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친 일이라던지, 몇번이고 심한 상처를 받았던 기억 등을 억지로 감추고 있는 남자친구의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눈이 부셔 유미는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좀 앉아봐. 커피 타줄게..”
“아.. 네,,”
원래의 유미였다면 ‘응!’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터였다. 동격이 아닌 복종의 언어로 대답을 하고 마는 유미를 보고 지훈이에 의해서 달라지고 만 두 사람의 관계를 새삼 깨닫고는 희성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둘이 이야기 해보는 거… 참 오랜만이다…”
“그러네…”
식탁에 앉았다. 조금전까지만 하더라도 명령받은대로 자위에 몰두하던 그 식탁에 앉은 유미는 좀처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치밀어 오르는 죄책감 때문에 희성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저 짧은 대답뿐이었다. 대화가 좀처럼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고민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렇게 고민만 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우선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렇게 해서 유미를…
“… 유미야.. 있잖아…”
“…응?”
여전히 유미는 테이블 저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자고 가지 않을래…?”
유미는 살짝 몸을 떨었다. 이윽고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 지훈이네…가야.. 해.. 오늘은.. 그.. 그러니까.. 그… 그 사람 하고의 날이니까…. 내일… 올게… 미..안..”
“그.. 그랬니? 그..렇구나..”
또 다시 침묵이 찾아오고 유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일… 미안…”
핸드백을 들고 현관을 향하는 유미의 빨간 리본으로 묶인 긴 머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친구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돌아보지도 않고 신발을 신고 손잡이를 잡았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성은 무엇인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유미를 그냥 보내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이대로 유미를 보내버린다면 두번 다시… 그저 그 생각만이 머리 속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못 보내! 그런 자식한테.. 안보낼 거야”
희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유미에게로 달려가 뒤에서 유미를 안으려고 두 팔을 뻗었다. 어깨에 손이 닿았다.
“싫어! 안돼! 손대지 말아줘”
유미는 그렇게 소리치며 희성의 손을 뿌리치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이 주저앉아 버렸다.
“왜.. 왜 그래 유미야…?”
다시한번 거부당하고 말았다. 그저 멍하니 유미를 내려다 보며 왜냐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미안.. 미안해.. 하지만.. 안돼..”
유미 역시 그저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다.
“그 자식 때문에 그래? 그렇게.. 그 자식이 좋은 거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유미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몇번이고 고개만을 젓고 있었다.
“그…럼.. 왜…?”
주저앉아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유미를 희성은 가만히 안아주었다. 유미의 새로운 거부는 더 이상 없었다.
“유미야…?”
희성은 유미의 옷 아래로 느껴지는 이물감에 손을 떼고 말았다. 유미는 그제서야 결심을 한 듯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 그게…?”
희성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유미는 바지까지 벗은 후 희성이 앞에 알몸을 드러내었다. 지훈이가 새겨놓은 계명을 희성이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비칠듯이 투명한 하얀 피부를 강조라도 하듯이 빨간 로프가 몸을 감고 있었다. 소위 이야기 하는 SM의 구속이었다. 몇겹으로 가슴을 둘러서 사타구니까지 매듭지어진 빨간 로프는 유미의 새하얀 살결을 파고 들고 있었다. 가녀린 허리는 물론 온몸을 그렇게 빨간 로프가 휘감고 있었다.
“이.. 이 따위 짓을…”
유미의 목에는 검정색 가죽 목줄이 지훈에게의 복종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채워져 있었다. 혼자서는 풀지 못하도록 자물쇠까지 채워져 있는 상태였다. 목이 올라오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던 것도 그 목줄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개.. 자식.. 이 따위 짓을 하고도…”
거기에 더해서 온몸에 매직으로 낙서가 되어 있었다. 가슴에는 ‘음란한 년’ ‘개변태’라는 글씨가, 복부에는 ‘자지를 밝히는년’ ‘똥구멍으로도 싸는 년’ 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배꼽 아래로 눈을 돌리자 보지털 마저 깨끗하게 면도가 되어져 있었고, 같은 글씨로 ‘내 전용 좆물받이’라고 굵게 쓰여져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 안쪽으로는 날짜가 있었고, 왼쪽 허벅지 안쪽에는 바를 정자가 새겨져 있었다. 4개의 바를 정자와 3획이 그어져 있었다. 유미를 돌려 세워보니 ‘병신 새끼.. 내 여자 몸에 손 대지 마’라는 글씨가 거칠게 쓰여져 있었다.
“이… 이런 몸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여러가지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을 너무 많이 당해서..내 몸 같지가 않아… 나… 더럽혀 졌거든…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거든…”
이날 처음으로 희성을 향해 마주 보고 있었다. 진한 화장에 어울리지 않는 약해 보이는 눈으로 희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도.. 사실은.. 그 사람한테 안기러 가려고 하는 중이었어… 그 사람한테…. 이렇게.. 야하게 화장을 하고.. 안기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거기까지 이야기한 유미가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희성이가 알고 있는 내가 아니야… 더 이상… 나… 이런 내가… 더럽지…? 희성이가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미.. 미안해…”
목소리가 갈라져서 떨리고 있었다.
“내가.. 나빴어… 희성이를 믿지 못했었으니까… 희성이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말아서… 미안해… 나 때문에.. 힘들게 해서…”
현관 앞 마루에 주저 않아 머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무릎을 꿇고 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미워해도 괜찮아.. 아.. 아니야.. 미워 하도록 해… 그렇게 하면 희성이는.. 힘들지 않아도 되니까… 더 이상.. 희성이를 힘들게 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나를… 차라리..”
“유미는 하나도 더럽지 않아!”
희성은 유미를 강하게 안았다. 자신의 마음이 전달될 수 있도록 부드럽게 하지만 강하게 유미를 끌어 안았다.
“나한테 제일 힘든 건.. 유미를 잃어버리는 거야…”
유미는 그렇게 심한 일을 당했어도.. 유미 자신 보다 희성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희성이 역시 유미와 이어진 육체의 끈 보다는 마음의 끈을 더 믿고 있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희.. 희성아.. 이런.. 이런 날… 안아주는 거야?”
“’이런’이라니.. 유미는 단 하나뿐인 내 소중한 사람이야. 내 마음은 전혀 변하질 않았는 걸?”
유미를 지키고 싶었다. 더 이상 힘들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희성은 유미를 안은채 로프를 풀기 시작했다.
“희.. 희성아..”
“더 이상 그 자식한테는 가지 않아도 돼. 내가 유미 옆에 있잖아”
희성은 다시 한번 유미를 힘주어 안았다.
목줄은 풀어내지 못했지만 몸에 쓰여 있던 낙서는 희성이 조심스럽게 지우고 씻어내었다. 제법 엷어졌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은 침대 안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희성의 팔 안에서 유미는 어린아이처럼 포근히 안겨서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조금 더 빨리 이렇게 했어야 했었다…. 희성은 유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희성아.. 좀 마른 거 같아..”
따뜻했다. 포근한 기분이었다. 유미는 수염이 거칠게 자라나 있는 희성의 얼굴을 만졌다.
“이렇게 될 때까지..나.. 모르고 있었어.. 미안… 미안해..”
“괜찮아 유미야..”
유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덕분에 유미는 아픈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웃고 있었다.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충동은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셀수 없을 정도로 지훈이에게 당했고, 몇번이고 남자친구에게 상처를 주었던 탓에 차라리 희성이와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유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부드럽게 안기게 되자. 변하지 않은 애정을 느끼게 되자 비관적인 생각들은 얼음처럼 녹아버리고 말았다. 가슴 속으로 따뜻한 온기가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역시..희성이와 함께 있고 싶었다… 이런.. 이런 나를 희성은 받아주고 있었다. 그 어떤 심한 일을 당했어도 희성은 자신을 안아주고 있었다… 그런 희성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동안 어긋나기만 하던 두 사람의 마음이 간신히 하나가 되어가는, 그런 따뜻하던 시간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벨 소리에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유미가 놀란듯이 몸을 일으켰다.
“유미야.. 왜..? 왜 그래?”
유미는 침대에 엎드린 채 휴대폰의 액정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그 자식이야?”
전화벨 소리는 시간이 지나도 끊어지질 않았다. 집요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유미는 희성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쥐고만 있었다.
“어떡해.. 어떻게 하지…?”
그토록 발랄하고 명랑하던 유미를 이런 전화 한통으로 겁에 질리게 만들다니…
“앗! 희성아…”
“…여보세요?”
유미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아든 희성이 전화를 받았다.
“흠… 그랬었군… 오랜만이야? 병신 새끼.. 아직 살아 있었네?”
여유만만한 지훈의 목소리였다. 마치 희성을 깔보는 듯한 말투도 여전했다.
“너 같은 자식에게.. 두번 다시 유미를 보낼 생각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
“뭐?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뭐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유미는 내 여자야. 너야말로 멋대로 손대지 말라고”
“헛소리 하지 마”
희성의 말을 무시한 채 지훈은 너무나도 당당히 요구했다.
“내 장난감 옆에 있지? 바꿔봐.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안돼.. 유미는 너 같은 자식이랑 할 얘기 없으니까”
“아 그래? 그럼.. 병신새끼가 중도에 게임을 포기한 벌로 유미의 사진을.. 아, 봤잖아? 그 보지 벌리고 좆물로 범벅이 되어 있던 그 사진 말야.. 그 사진을 학교에 뿌리도록 할 게. 녹음되어 있는 신음 소리도 인터넷에 올리지 뭐”
“뭐.. 뭐라고..? 이 자식.. 그 따위로 비겁하게…”
“미스 W대의 음란 사진이라… 아마 벌떼처럼 달려들 거야 하하하”
“그.. 그.. 그러기만 해봐.. 아주 죽여버릴 테니까”
“우와~ 무셔라.. “
거기까지 말한 후 지훈의 말투가 낮고 무겁게 바뀌었다.
“뭐야.. 이 병신 새끼.. 그래도 나쁘지 않잖아? 지금까지 넌 혼자만 그렇게 편하게 살아왔으니까 말야.. 그 여자 정도는 내게 넘기라고. 나도 조금은 좋아져야 하지 않겠어?”
희성에게 있어서는 카운터 펀치였다.
“웃…!!”
“…나 바꾸라고 하지 않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희성을 바라보며 유미가 가만히 전화기를 손에서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저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유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 그… 그건.. ..그.. 그러니까.. 아.. 아뇨.. 아니에요.. 그런… 그런 일 없어요… 미.. 미안해요.. 두번 다시.. 정말.. 두번 다시…. 아니에요.. 자.. 잘못했어요.. 그.. 그런.. 아뇨.. 아무것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미안해요.. 네.. 네.. 알겠습니다…”
후배를 대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점차 유미의 말투에서 억양이 사라지다가 결국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말투가 되어 있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맞장구만 치고 있을 뿐이었다.
“… 네.. 맞아요.. 네.. 유미는… 그래요.. 네.. 지훈이가 말하는대로.. 네.. 말씀하시는 대로에요… 정말.. 잘못했어요…”
어깨를 떨구고, 등을 굽힌 채 고개를 숙인 유미가 희성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너 이자식.. 유미한테 무슨 짓을!”
“시끄러 병신 새끼야.. 잘 들어.. 내일부터 1박2일로 셋이서 어딜 좀 가야 되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거기서.. 네 눈 앞에서 그년이 내 여자란는 증거를.. 나 없이는 못사는 년이라는 걸 보여줄게.. 기대하라고.. 아.. 그리고.. 너한테는 선택권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지?”
지훈은 통화를 끝내고도 짜증이 남아 있는 듯이 전화기를 침대위로 내팽개치고 말았다.
“병신 새끼.. 너만은… 너만은 결코 그냥두지 않아.. 피눈물을 흘리게 해주지.. 너도..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게”
원한에 사로잡힌 눈에 그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증오를 폭발시키기라도 하듯이 지훈이 중얼거렸다.
기대하라고.. 흐흐흐흐..
캄캄한 방안에서 낮은 웃음소리만이 낮게 깔려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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