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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2 02:51 1,640회 0건

그리고
두 사람은 만난 지 꼭 1년째 되는 2012년 8월 20일, 그녀의 방에서 처음 사랑을 나누었다.
행위는 어떤 섬세하고 값 비싼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고 천천히 진행되었다.
은채는 "처음"에 동반되는 아픔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이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그가 서툰 움직임 끝에 사정을 하고, 그녀의 몸 위로 포개어졌을 때는 숨쉬기 힘든 그 무게감조차도 포근하게 느껴졌고, 그의 단단한 양 팔에 안겨있노라면 세상 모든 해로운 것들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놓였다.
친구들에게 들었던 것처럼 머리가 하얘지거나 붕-뜨는 것 같은 기분은 아직까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수호와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행복한 그녀였다.

정신적인 만족으로 충만한 은채와 달리, 수호는 24년 만에 처음 안아본 여자의 몸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 폭신한 감촉과 부드럽고 매끈한 피부는 아마 평생을 만져도 질리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의 상처와 그녀가 가진 콤플렉스를 이해하고 1년을 소중히 지켜줬던 그였지만 이미 한번 여자의 살 내음을 맡아버린 이상 그도 여느 남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데이트가 한참인 대낮에도 온통 끝나고 그녀의 자취방에 들어갈 궁리만 머릿속에 가득할 지경으로 그녀와의 관계에 심취해버린 그였다.

은채 역시 그런 수호의 변화를 느끼지 못할 만큼 둔감한 여자 친구는 아니었고, 그가 요구하면 언제든 그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호는 은근히 소심한 구석이 많은 남자였고,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서도 정작 말을 꺼내지 못해 30분 이상 안절부절 못 하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일도 잦았다.

은채는 여자 입장에서 그런 그를 방으로 먼저 들이지는 못하고 짐짓 모른 척 보내야 했지만, 어쩐지 그런 그의 모습조차 사랑스럽고 귀엽게만 느껴져 살며시 미소 지으며 그의 뒷모습을 향해 한참동안 손을 흔들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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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7일 금요일 21:50]


조심스럽게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은채의 모습을 숨죽인 채 바라본 건 수호의 친구들 뿐 아니라 술집의 모든 남자들이 마찬가지였다. 물론 남자친구인 수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평소와 달리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은 그로서도 사귄지 1년 만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원피스는 무릎 위까지 오는 길이로 짙은 네이비 컬러에 군데군데 아기자기한 무늬가 있고 검은색 카라가 달린 것이었다.
옷 자체는 무척 단정한 스타일이었지만 술집 안의 어느 누구도 그런 그녀를 보며 수수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짙은 네이비 원피스 아래로 뻗은 그녀의 새하얗고 가느다란 두 다리와 대비되는 그녀의 볼륨감은 가디건을 위에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입구로 한달음에 달려간 수호가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술집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우와~ 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왔어?」

「피~ 뭐야 그건? 평소에는 안 예쁘다는 뜻이야?」 은채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아니 그게 아니고.. 평소에는 이런 옷 잘 안 입잖아.」 수호가 당황하며 말했다.

「오빠 친구들 처음 보는 자린데 그래도 조금은 신경을 써야지.」

은채의 대답에 수호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그런 수호에게 은채가 살며시 까치발을 들더니 그의 귀에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거 지퍼 잠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응? 왜? 지퍼 고장났어?」

「으이구~ 바보~ 몰라도 돼!」

여전히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토라진 척 앞장서는 그녀의 모습조차도 마냥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자리로 안내하는 수호였다.


「안녕하세요. 수호오빠 여자친구인 서은채라고 합니다.」

수줍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는 그녀를 친구들은 한참동안이나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지켜보는 수호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평소와 달리 분위기를 주도하여 서로 간에 간단히 소개도 시켰다. 이미 주영이의 제대 축하라는 애초의 목적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들이었다.
어색한 소개가 끝나자 은채를 향한 친구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왜 수호 같은 녀석과 사귀냐는 식의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은채는 무척 곤란해 하면서도 하나씩 수호의 장점을 나열하기 시작했고 친구들은 이내 듣기 싫다고 아우성을 쳤다. 수호는 생전 처음 겪는 그런 상황이 너무 좋았고,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여자친구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근데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에요?」
셋 중에 가장 점잖은 태도를 고수하고 있던 주영이 물었다.

은채는 첫 만남 때의 일을 떠올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미 친구들의 반응에 의기양양해진 수호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지 못한 채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때 신이 나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느라 수호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친구들이 지금 수호가 그녀를 치한에게서 구해줬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무슨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그와 그녀가 서로 눈을 맞추고 대화라도 나눌 때면 얼마나 노골적으로 은채의 가슴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말이다.

.
.
.

술을 못 한다며 거의 마시지도 않은 여자친구를 기어코 바래다주겠다며 따라 나선 수호는 나간 지 1시간이 훌쩍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남은 세 명의 친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대화는 거의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야. 이 새끼 안 올 것 같은데?」 한참의 침묵을 깨고 주영이 입을 열었다.

「씨x. 너 같으면 오겠냐? 떡치러 가지.」 어째 신경질적인 말투로 현택이 대답했다.

「..야. 근데 은채씨 가슴 진짜 존나 크지 않냐?」

「..진짜 C컵 맞는 거 같던데..? 수호가 뽕도 아니라며..」

「씨x새끼.. 개부럽네..」

「지금도 둘이 존나 하고 있는 거 아니냐?」

「... ...」

주영과 재형의 대화에도 현택은 여전히 무거운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어쩐지 그는 지금 기분이 몹시 상해있는 상태였고, 주영과 재형도 그걸 느끼고는 분위기를 띄워보려 애쓰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사이여도 사실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서열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는 싸움을 잘 하고 "일진"에 가까울수록, 대학생 때는 학벌이 좋거나 돈이 많을수록, 사회에 나가서는 직장과 연봉이 높을수록 관계에서 우위에 서기 쉽다. 물론 친구관계에서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견해와 관계도 인정하지 않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현택은 어려서부터 가장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항상 골목대장 역할을 도맡아 해왔으며, 고등학교 때는 소위 "잘 나가는"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수호를 비롯한 예전 동네친구들을 조금이나마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1년 전, 수호가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처음 이야기했을 때도 내심 ‘수호가 만나는 여자가 뻔하지.’라고 생각하며 별다른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였다.
하지만 그 날 술자리에서 사진으로 본 그녀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예뻤다. 거기다가 뭐? C컵? 구라치지마, 새끼야.
그런 속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눈앞에 그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근사한 여자가 나타나 수호의 여자친구랍시고 소개를 한 것이다. 현택은 그 날 수호네 커플이 돌아가기 전까지는 내색하지 않고 평소처럼 유쾌하게 술자리를 주도했지만, 속으로는 알 수 없는 패배감과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소주나 빨러 가자.」
깊은 침묵을 깨고 현택이 자리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자리를 옮기고 소주 한 병을 겨우 깠을 무렵 주영은 졸려서 더 이상 못 있겠다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버렸다. 현택은 그런 주영에게 화풀이라도 하듯 군바리는 어쩔 수 없다며 꺼지라고 욕을 퍼부었다.
결국 현택과 재형이만 남아 대작을 하는 형국이 되었고, 그들의 술자리는 좋은 안주거리와 함께 새벽 4시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아이 개새끼~ 존나 여친 생겼다고 못 온다는 연락 한 통이 없네. 하~」

「존나게 하느라 그럴 새도 없나보지.」

「그러게. 씨x새끼. 담에 보면 뒤졌어~」

「근데 부럽긴 존나 부럽다. 하~ 나도 씨x 그런 여친 하나 있었으면..」

「가슴이 씨x 막 이래~~ 원피스 터지는 줄 알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아오~ 그런 년은 빨통 딱 잡고 뒤에서 존나 박아줘야 제 맛인데.」
이미 얼큰하게 취한 현택은 그녀가 그래도 친구의 여자친구라는 사실도 망각한 듯 상스러운 단어로 그녀를 지칭하며 연신 허리를 튕겨댔다.

「ㅋㅋㅋㅋ난 야동에서 보던 젖치기 해보고 싶어. 이 새끼는 벌써 해봤겠지?」

「당연히 해봤겠지, 병x아. 그 년이 지하철에서 치한한테 당하는 걸 구해주고 만났다고 했나? 아~ 존나 운 좋은 새끼. 그 년은 왜 그걸 내 눈 앞에서 안 당해서~」

「미친 새끼ㅋㅋㅋㅋ 너였으면 같이 만졌겠지.」

「그건 그래. 크크. 근데 알고 보면 그년도 당하면서 느끼고 있던 거 아니냐? 왜 고작 중삐리한테 당하면서 잠자코 당하고만 있어? 알고보면 존나 까져가지고 즐기고 있었는데 수호가 눈치없이 방해한거 아니냐? 크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추어졌던 검은 본심을 연이어 쏟아내던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른 것은 그 즈음이었다.


「야 진짜 어떻게 한번 못 먹나?」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로 현택이 말했다.

「미친 놈. 그래도 친구 여자친구다.」

대사 자체로만 보면 강한 만류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현택이 듣기에는 분명 어딘가 애매한 뉘앙스가 있었다. 어쩌면 혹시..?

「아니 그러니까. 혹시라도 뭐 없나 하는 거지.. 친구끼리 의 상할 일 없이ㅋㅋㅋ」

「... ...」

장난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이 완전히 농담이 아님을 알고 있는 재형은 일단 말을 아꼈다. 몇 초 정도였지만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농담이야 새끼야. 근데 씨x 까놓고 어차피 아다도 아닌데 한번 한다고 뭐 닳냐? 닳아? 그리고 그렇게 순진한 척 하는 년일수록 뒤에서 다 호박씨 까고 밤마다 이놈 저놈한테 가랑이 벌리고 다닌다니까. 무슨 보지 한번 대주는데 1년이 걸려? 지랄이지. 대개 걸레년들이 순진한 놈 만나서 아다인 척할 때 그러는 경우가 많은 법이거든. 그년 학교 근처에서 자취까지 한다며? 너 같으면 그런 애, 응? 가슴도 존나 크고 자취하는데 술까지 못 먹는 애 있으면 그걸 가만히 놔두겠냐? 분명히 학교 선배란 놈들이 억지로 술 좀 먹이고 바래다준다고 하면서 존나게 따먹었을 걸? 뭐 내 말이 틀리냐?」

재형도 자신과 같은 생각일거라고 생각했던 현택은 재형이 별 대꾸가 없자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괜스레 더 취한 척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역시.. 이 새끼는 완전히 진심이다."

평소 눈치가 빠른 재형이 그런 현택의 의중을 확실히 파악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 그렇지. 여자 후리는 방법이 딴거 있나? 일단 술이지.」

「!」

자신만 음흉한 속내를 내보였다는 생각에 애꿎은 안주만 뒤적이며 연신 속으로 "씨x"을 되뇌고 있던 현택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재형을 바라본다.
재형은 그게 아니면 뭐 다른 방법이라도 있냐는 듯 무심하게 현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수호새끼도 술 존나 약하고.. 둘 다 기억 못할 정도로 취하게만 하면 뭐 여자 한번 먹는게 힘들겠냐..」

그 말을 들은 현택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
하지만 그것은 미소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흉측하고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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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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