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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내를 돌려줘 - 1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2 02:41 1,855회 0건
나의 아내를 돌려줘

1부





초가을이지만 바람이 제법 차다.
며칠 전까지도 그런대로 날이 따듯했는데,
어제부터 이틀 내내 비가 내려서 궂은 날씨다.


인적이 드문 지방의 작은 병원 입구.
장례식장 주변에 여러대의 차가 줄지어 들어서고 있다.
주차장 면적도 협소한 편이지만, 방문객이 많지 않아 크게 붐비지 않았다.
저녁 시간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식장으로 들어서고..
거구의 남자 둘이서, 검은 양복을 입고 식장 한켠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대화중이다.


“사람이 그래도 제법 왔어, 생각보다는..”
“그런 것 같아.. 진태 녀석이 인맥이 나름 좋잖아~
다 이런 경조사 때 그 사람의 평소 인간관계가 드러나는 셈이지”
“풋... 그런가~ 그나저나 너 할 얘기가 있다며..”


“아아, 다른게 아니고.. 성민이 때문에 말이야”
“성민.. 성민.. 진성민??”
“그래~ 용케 기억은 하고 있냐?”
“...... 기억하고 말고!..”


둘다 짙은 올 블랙차림이어서 분위기도 칙칙한데다,
두 사람 모두 거구의 운동선수 타입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이좋은 어깨들의 동창회로 혼동할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머리가 조금 웨이브진 퍼머로 중간 정도 길이.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얼굴 인상은 대체로 시원한 호남형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짧은 스포츠 컷에 안경을 썼다.
얼굴은 하얀데 자잘한 피부 트러블이 숨어 있다.


갈색 피부를 가진 남자, 임경훈.
그가 현서의 얼굴에 난 여드름을 힐끗- 보며 말한다.
오랜 시간 잊혀진 기억이었던..
성민이라는 이름을 듣고 현서도 매우 놀라는 얼굴이다.


“.........
어떻게 지낸데? 별일은 없고?”
“하하~ 궁금할 것 같았어.
오늘 장례식장에 안그래도 니가 오면 말 꺼내려했는데..
성민이 녀석이 좀 좋지 않은 상황이거든”


“오랜만에 얘기하면서 대뜸 좋지 않기는, 무슨 얘길 하려고~”
“궁금하지, 계속 얘기해줄까?”
“궁금하지 임마. 너 답지 않게 이런 분위기에서 무게를 잡는데”
“클클...”


넉살 좋은 웃음의 경훈이, 초조해하는 현서에게 털어놓는다.
지금 두 사람은 친구 진태의 부친상에 참석해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둘 외에, 또 한사람의 일행은
장례식장 식당에서 지인들과 대화중이었다.


상주를 포함해서, 네 명의 절친 모두는 스무살 재수시절에 처음 만난 사이다.
서른 일곱 살 동갑의 네 남자.
"4명"이라는 테두리에 속하지 않은, 성민이라는 이름...
반갑고도 다소 껄끄러운 주제가 나오자~ 현서는 썩 달갑지 않은 눈빛이다.
속 마음을 숨기며, 경훈에게 꼬치꼬치 관심을 갖고 묻는다.


“...... 불치병이라니?
뭐 암이나 그런거야?”
“암이겠지. 나한테도 정확히 말을 안해 얘가~
자기 말로는 이미 세포가 거진 전이되서 손을 쓰기 어렵다 그러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와서 말기라고?”
“어~어~ 쉬잇, 흥분하지마라.
심각한 상황이니까 나도 너한테 말을 꺼내지..
말기라서 성민이 놈도 오래 못살거 같대.. 길어야 6개월 정도”


“하아~! 이거야 원 미치겠군...
무거운 자리에서 또 한사람 곧 떠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라니..”
“ㅋㅋ 그런가. 아픈 사람 두고 할 말은 아니지”
“뭐 암튼, 지금 그놈은 어디에 있어?”


“지금 수원에서 지내지”
“살아, 거기서? 부모님이랑 같이 있나”
“어~ 차차 얘기해줄게..
쉬잇, 저기 석준이 온다.
야야, 현서야”
“응..?”
“석준이나 진태한테는 내가 한 얘기, 아직은 하지 말아라”
“...... 그럴게”


자리가 자리인지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기가 불편했다.
껄렁 껄렁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구릿빛 피부의 남자.
훤칠한 키에 겉멋부리기 좋아하는, 영락없는 제비 스타일이다.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두 친구에게 외치는 석준.


“여어~ 어서 와서 밥들 먹어~ 식당 밥이 맛있다 얘들아”
“새끼야 니는 밥도 잘 쳐묵는다.. 낄낄”
“밥은 먹고 살아야지~ 가실 분은 가시더라도..
산 사람들은 악착같이 먹고 버텨야지 않겄냐!..”
“모처럼 입바른 소리하네.. 색기~
사람들 안에 많이 왔든?”
“몰라, 나도 모르는 얼굴들이 태반이라.. 좀 껄쩍지근하다, 자! 어서 일루와”


석준은 나머지 둘에 비해 야윈 체형이다.
머리 숱은 많지 않은 편이고 광대뼈가 약간 돌출되어 있다.
장례식보다는 하객패션과 더 어울릴 것 같은..
세련된 곤색 정장을 빼입었다.
껄껄껄~ 특유의 너털 웃음을 지으며
자못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의 두 친구에게 어깨동무를 한다.


시간이 많이 지나 저녁 열한시경.
상주 진태를 위해 내내 자리를 지키던 세 사람도 피로를 느꼈다.
하품이 나오는 걸 어렵게 억누르며, 옆의 셋 눈치를 보는 석준.
피곤한 안색의 진태와, 나머지 두 사람도 대화를 나누다가 화젯거리가 떨어진 상황이다.
무거운 분위기에 슬슬 자리를 파하자는 이야길 꺼내본다.


[진태] “이제 어서 들어들가라..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다고 고생했어..”
[현서] “아냐, 니가 제일 고생인데 우리 신경쓸게 뭐있어..”
[경훈] “그래.. 진태야, 잘 챙겨먹어라”
[진태] “응 알았으니까 어서들 가.
괜히 눈치보이게 더 있으면 나만 미안해진다”
[석준] “그럴까.. 미안하다..
걸음이 무겁다만.. 발인은 내일 아침이지?”


[진태] “어.. 오전 일곱시..”
[경훈] “장지 어디로 간다고?”
[진태] “광주 쪽으로.. 엄마가 천주교식으로 절차를 밟고 싶어하셔서,
광주에 있는 교구? 공원묘지 쪽으로 갈거같아”
[현서] “그러냐.. 먼길 가는데 많이 힘들겠구마”
[경훈] “멀리 떠나야하니까, 조금이라도 더 먹어두고 숙면해라”


[진태] “그래 니들 말대로 할게.
그러니까, 얼른 날 도와주는 길은~ 후딱 어여들 가는게 최고야.. 알제?”
[경훈] “야 진짜 미안하다 장지까지 같이 못가서..”
[현서] “그래..”
[진태] “쓸데없는 소리들 하지말고”


세 사람 모두 그 다음날 아침 출근해야해서 자리를 뜬다.
마침 그렇잖아도 발인은 진태와 가족 친지들끼리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좀체 발이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셋은 서울로 향한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도 별다른 대화 없이 고요했다.
경훈만 suv 차량을 끌고 왔고, 나머지 둘은 서울서부터 같이 타고 온 것이다.


“들어가.. 내가 나머지 얘긴 따로 전화로 할테니까”
“어~ 알았어, 천천히 줘도 되고”
“짜식~ 그래..”


각자 뿔뿔이 헤어진 세 사람.
현서도 지친 몸을 이끌고 아파트 초인종을 누른다.
띵~동~~
누구세요~?~ 라는 밝은 기운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아! 여보~ 오셨어요?”
“응.. 조금 늦게 왔어..”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요. 호호..
식은 잘 마치고 오신 거예요?”
“어~ 진태 혼자 안쓰러워서 봐줄 수가 있어야지..
속상하기도 하고.. 발걸음도 잘 안떨어지고..
휴~ 당신한테 할 말도 있는데.. 지금은 피곤하니까 나중에 하자”
“그러세요.. 일단 얼른 목욕부터..”


현서의 옷을 받아주며 싹싹하게 챙겨주는 여인.
아름답고 단아한 외모의 아내다.
귀엽게 생긋~ 웃으며 주위를 환히 밝혀준다.
밝은 씩씩한 그 모습에, 심신이 무척 지쳐있던 현서도 웃었다.


이름은 설주연.
현서의 대학 후배로, 무려 남편과 열 살이나 차이가 난다.
물론 현서가 재학중일 당시에 만난 사이는 아니고
졸업후 동문회 모임에 처음 참석하며 우연히 그녀를 알게 되었다.
싹싹하고 선배들을 따듯하게 잘 챙기는 모습에, 홀딱 반해버린 현서.


둘은 주연이 25살일 때 처음 만나 바로 이듬해에 결혼했다.
아이는 아직 없고, 이제 결혼 2년차이니..
스물 일곱의 젊은 아내 주연과 한창 달콤한 신혼 분위기에 젖어 있는 중이다.


아내는 천상 여자라고 불리는 타입이다.
은은하게 흘러내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아주 잘 어울리며
타고난 피부색이 원래 하얗지만, 최근 태닝을 해서 조금 살이 탔다.


167cm의 키에 57kg의 몸무게.
본인은 살이 조금 쪘다고 귀엽게 불평하지만
남편은 거기서 더 빠지면 뼈만 남는다고 놀리며~ 다이어트를 굳이 말린다.


얼굴과 몸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무척 여성스럽고,
여고생 시절을 그리워하는.. 여전한 소녀 감성을 간직하고 있다.
몸의 밸런스도 전반적으로 잘 잡혀있는 깨끗한 이미지.


그리고 청초한 분위기를 가장 잘 이끌어주는 것은~
역시 때묻지 않고, 순수함이 가득한 얼굴이다.
눈, 코, 입 모두가 오밀조밀하니 조그맣다.
얼굴 자체가 작아서 매우 조화롭게 잘 가꾸어진 미모다.


가끔 현서는 어떻게 저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질서정연하게 붙어 있느냐고 감탄하며 놀리곤 한다.
동양적인 차분함과 단아함이 녹아있는 예쁜 얼굴에..
학창시절부터 꽤나 많은 남자들을 설레게 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순하게 생긴 외모에 걸맞게(?)
약간의 백치미도 지니고 있는 여자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시절에도 성적이 괜찮았고 머리가 좋았지만
그 실체는~ 완벽해 보이는 느낌과는 다르게..
의외로 허당끼가 많은 여자였다.


여간한 일은 뭐든 잘 웃어넘기고, 낙천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서
아내의 그런 허당스러운 모습도 남편은 그저 이쁘고 사랑스럽다.


남편과는 10살이나 나이차가 나다보니..
처음 사귈때는 그래도 장난을 많이 치고, 큰 오빠 뻘에게 대들기도 했는데..
지금은 결혼 후 최대한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른다.
본래 타고난 순종적인 성향이, 천상 가정주부와 잘 어울리는 여인이다.


-


이틀 뒤 저녁.
7시 40분을 넘어서 어렵게 퇴근한 현서.
오늘 컨디션은 썩 나쁘진 않지만, 어서 집에 가서 잠을 보충하고 싶었다.
이쁜 마누라랑 어제 한바탕 힘을 쓰고 나니..
다리가 조금 후들거리는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내에게 온 톡을 확인하는 순간-
경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고, 총무과장님 왠일이십니까~”
“그래~ 어디냐 지금~ 퇴근했어?”
“했지~~ 이제 회사앞에서 차 몰고 나간다.. 니는 어디냐?”
“나는 진작 끝나서 지금 밥무러 왔다.
너 오늘 회식 같은거 없지?”
“그딴건 없어.. 오늘은 일찍 가서 쳐잘끄다~”


“ㅋㅋ.. 술 먹으면서 오늘 얘기좀 하자”
“전에 그 성민이.. 얘기 말인가?”
“그렇지.. 이어서 더 해야하니까”
“........
너 어딘데?”
“논현동이야. 이제 식사 거의 끝나가니까~ 전에 가던 선술집에서 보자”
“허~ 벌써 밥을 다먹다니 팔자 좋네.. 알았어~ 콜”


현서와 경훈은 대치동에 위치한 단골 이자카야에서 만났다.
주인장이 유쾌한 성격의 호인이고, 재미난 인테리어를 즐기는 편이다.
입구에서부터 커다란 도라에몽 풍선이 바구니에 앉아 손짓한다.
작은 원피스 포스터와 헬로키티 그림도 있고..
일본식 인형을 비롯하여 내부 소품에 신경을 많이 쓰는 듯.


아늑한 분위기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두 친구.
후리카케가 뿌려진 볶음밥과, 아삭한 질감의 돼지숙주볶음을 안주삼았다.
주거니 받거니~ 여러차례 사케를 마신 뒤 취기가 오른 두 사람.
그제야 오늘의 본론인 성민 이야기로 들어간다.


“그래서 말야...”
“응~ 성민이 새끼.. 진짜 오늘 내일 하는거야?”
“그렇다네.. 쓰불넘이.. 잘 연락이 되도 않는 놈인데..
이 색끼가.. 별안간에 나타나 전한다는 소식이 그러네..”
“끄윽~.....
어쩌겠냐... 짠하기는 하다만..”


“성민이가 나랑 거의 유일하게 친했잖냐”
“그렇지.. 그동안 꾸준하게 걔랑 연락했어?”
“어 글지~ 처음 너한테 소개시켜준 사람이 난데.. 내 친구 내가 챙긴다.
우린 더구나 중고딩때부터 불알친구였응게”
“하긴 그랬다..”


그랬지.. 맞네.
스무살 무렵에 갓 만난 네 사람에 비해서, 경훈과 성민은 어릴때부터 돈독한 사이였다.
넷이 재수할 때 이미 대학생 신분이던 성민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 경훈 소개로 다 같이 친해지게 되고..
다섯 명은 그때부터 같이 어울리고 놀며 친분을 다지게 된다.


생각나네 처음 만났던 그때가..
처음 만났던 그 시간은 정말 즐겁고 유쾌했었다.
자잘한 기억의 단편들을 끼워맞추며~
홀로 십수년 전 20대 초반의 기억을 찾아 떠나는 현서.
그런 모습을 옆에서 경훈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고 있다.


“툭 까놓고 말해보자, 현서야”
“...... 뭘 까자고..”
“뜬금없지만, 지나간 일이라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이 샛끼가 또오~ 나 옛날 얘기하는거 시러하는거 아는 놈이..”
“닥치고 그냥 들어~ 오늘은 상황이 상황아니냐~?”
“하아.. 그럴 타이밍이 맞기는 하다만..”


경훈이 무언가 옛날 얘기를 꺼내려 할때마다,
지금처럼 현서가 얼굴이 굳어지며 불편해할 때가 있다.
현서의 지난 과오로 인한 일이기 때문인데..


현서와 친구들이 만났던 시기는 때마침 IMF 사태가 터진 때였다.
온 나라가 불황의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어려운 시절..
조그마한 필터 납품업체를 운영하는 부친을 둔 덕에
너도 나도 힘들다는 그 불경기에도 현서는 물질적으로 크게 쪼들리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일 때도 여유로운 모습이었고
지금에 비해서 스무살 또래 답게 꽤나 막나가는 마이페이스였던 것이다.


맞아. 내가 생각해도 존나 대책없는 놈이었지..
술은 원래 잘 마시고 잘 놀던 편이었지만
특히나 재수시절에는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유흥문화를 즐겼다.
그렇게 아쉬운 것 없이 써가며 잘 놀았는데도
어째 석준을 제외하고 세명은 덜컥 대학에 붙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현서는 타고난 천성이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집안도 그런대로 부유하고 잘 놀다보니~
나중에 경훈 소개로 알게 된 성민에게도 초면부터 너무 편하게 대해버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훈과 현서는 잘 먹고 자라서 풍채가 좀 있었는데..
집안이 지지리도 어려웠던 고학생 성민은 아주 왜소한 체격이었다.


현서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안경을 썼지만
성민의 경우, 국민학교를 입학하기 전부터 시력이 나빠 안경이 필수였다.
흔히들 기억하는~
만화 영심이에서 남자친구로 나왔던 경태를 떠올리면, 성민과 매치가 쉬울 것이다.
꾀죄죄한 행색에 잘 못 먹어서 부쩍 야위었던 그 친구..
처음 만나고 얼마 안 지나서부터- 아랫사람처럼 부리곤 했다.


결정적으로 지금 현서가 불편해하는 사연은 무언가?
성민이 대학시절 죽도록 사랑했던 여자를 현서가 가로챘던 일로부터 시작된다.
말하자면 지독한 실연의 아픔을 심어준 것인데..
한 여자에게 크게 목매지 않고 장난감 정도로 가벼이 여겼던 그와 달리
순정남 성민은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그 여자를 섬겼었다.
그런데 그의 청춘을 짓이겨놓았던 현서는
별 힘 안들이고 손에 넣은 여자도 지겨워, 바로 이별을 통보한다.


아픈 기억이다.
진짜 철도 없었고 안하무인이었지. 나는 쓰레기였어.
성민이 사랑했던 그녀를 품에 안았던 그날밤.
현서는 의외로 그녀가 아직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럼 저 등신같은 성민 새끼는 아직 뚫지도 못했다는 얘기잖아.
이쯤되면... 보통의 경우는 없던 죄책감이라도 생길 수 있기 마련인데
남자 구실도 못하는 고자 녀석이라고, 당시는 성민을 욕했다.


그 여자 얘기를 이제와서 왜?
지겹도록.. 시간이 흘러 잊혀질만하면 경훈이 나타나..
가엾은 친구 성민을 대신해 그런 잘못을 되풀이해선 안된다고 강조하곤 한다.
귀에 인이 박혔어 아주 씨바알..
근 5~6년 가까이 성민에 대한 언급을 아예 안하더니,
오늘 몇 년만에 다시 그 얘길 무겁게 꺼내는 거다.


결론을 내기 전에 깔아두어야할 말이 있으니 잠자코 들으라는 경훈의 말에..
고집불통이고 오만했던, 예전 현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아닌게 아니라 십몇년전부터 현서는 유독~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경훈에게는 큰소리를 치지 못했다.


체격도 현서 본인보다 좀 더 우람하고.. 잘 먹어서 퉁퉁하니 체격이 좋아진 그에 비해,
중고등학교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온 경훈.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몇가지 무술 실력까지 갖췄다고 했다.
거기에 은근하게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닌 것이다.
이러하니.. 그렇게 여간한 사람을 아래로 깔보고 함부로 대하던 현서도,
유일한 두 사람, 아버지와 경훈 앞에서만은 까불지 못했다.


“십새끼야.. 내가 거친 욕은 안하고 싶은데.. 너 참 쓰레기짓 많이 했어.. 끄윽..”
“...... 그래.. 니 말이 죄다 맞는 말이다..
이제 와서 내가 뭐라 지꺼릴 말이 없어..”
“이 샛귀~ 왜 뭐라할 말이 없냐, 반성하는 마음,
미안해하고 사죄스러운 남자로서의 결의, 이런게 없어서 되겠냐?”
“아니 그게 저.. 경훈아.. 그게 내 말은..”


“듣기 싫어 시발... 끄윽~ 아.. 술이 켸속 들어가네~ 야.. 소주 하나 더 시켜”
“적당하게 마시지 그래~ 아까부터 소맥에 계속 병나발 불었는데..”
“시켜라~”
“끙... 그럼 도수 낮은거 사케로 시킬게..”


지은 죄 많은 현서, 오늘 고양이 앞의 쥐다.
쩔쩔매는 모습도 오랜만이라고~ 본인도 느낀다.
그래도 경훈은 현서에게 조언도 많이 해주고 워낙 절친한 사이라
고깝게 들릴수도 있는 직언, 폭언들도 유들하게 잘 넘길 수 있다.
정종을 홀짝이며, 경훈의 말이 이어진다.


“너 문디야.. 전에 왜 했던 말 있잖냐..”
“대뜸? 케케~ 야 안주도 챙겨먹어”
“냅둬.. 그~ 끄윽.. 뭐지.. 니 마누라 이름?”
“주연이?”
“어~ 너 와이프 걔가 서주연이라 그랬지~?”
“설주연.. 이름은 똑바로 해야지 ㅎㅎ”


“서나 설이나 새꺄.. 몇 살?”
“..... 스물.. 일곱..”
“하~ 이거! 참나.. 이 색기 진짜 쓰레기네 안되겠어..
개 도둑놈이구만.. 끌끌끌”
“ㅋㅋㅋ 그래 그래~”
“그려 주연이는 여전히 내조 잘하고, 말 잘 듣구?”
“아무렴~~ 항상 한결같지...
천상 여자니까 걔는..”


안하던 주연이 얘기를 왜 꺼낼까?
그때까지만 해도 현서는 약간 갸웃~하는 정도뿐이었다.


경훈은 벌개진 눈과 어울려 잔뜩 취한 얼굴로 지그시~ 현서의 얼굴만 물끄러미 본다.
갑자기 마누라 이야길 꺼내더니,
부담스럽게 무거운 분위기를 내며 한참동안 말을 안했다.
그러기를 벌써 삼십여초..
현서는 잘 말하던 경훈이 뚝 흐름을 끊자,
달리 할 말도 없었고 어색해서 가만히 있었다.


“너 말야.. 내가 지금 반 대가리 꼭지 돌아서 걍 떠드는데~
술김에 꼭 하는 얘긴 아니고.. 끄윽~”
“어.. 말해..”
“니 존나 나랑 개같이 놀고 막 살 때 기억나는지 몰겠다~
그때 얘기하다가, 니가 지껄였던 말..”
“무슨..?”


“추임새 넣지 말고 듣고만 있어,
너 시발 주연이 만나기 전에 후리던 년들도..
다른 남자들한테 일부러 몇 번씩 대주라카고, 미친짓 좀 했제?”
“............
그러긴 했쥐.. 나만 즐기긴 아깝다는 그런 넓은.. 박애정신이랄까 헤헤헤”
“미친 새꺄~! 지 여자를 딴 넘 품에 안겨주는게 씹변태지,
무슨 그런 개떡같은 취미가 있어..”


“야 너 취했어 훈아.. 그거 한창~
진짜 철없던 어린애일 때 뭣 모르고 하던 짓거리지..
지금은 그딴 짓 안한다..”
“닥쳐, 안하긴 뭘 안해, 개가 똥을 끊지 니가 안한다고?”
“씨발.. 좀 그만해.. 왜 이런 얘기 하냐?
성민이 얘기만 하는 날이잖아, 오늘 같은 날”


“........ 그랬지..
불쌍한 우리 성민이 얘기할려고 나오라캤는데..
그래, 성민이 땜시 니 마누라 말도 꺼내는거담마”
“성민이 때문에..?”


거기까지 듣던 현서는,
갑자기 등골이 왠지 모르게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 촉이 좋은 그의 예감을 보자면...
이 때가 서서히 막이 오를 불행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만땅 취한 경훈의 말이 이어진다.


두근 두근 거리는 마음..
어째 경훈의 취한 입에서 나올 말이 조금 짐작이 갔다.
다시 한동안 뜸을 들이고~
아까처럼 게슴츠레 느끼한 눈빛으로 현서를 보는 경훈.


앞서 얘기한 성민의 첫사랑을 취한 이야기말고도
사실 현서가 성민을 꼬붕처럼 부리던 그 시절,
해서는 안될 못된 짓거리를 한 일이 또 있었는데...
니 부정한 짓거리는 내가 잘 알지, 그런 뉘앙스를 내비친다.
바늘 방석도 어지간하다.


예전에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괴로워했던 성민이고
지금은 몸이 다 망가져서 곧 죽을 몸이 되어가니, 마지막 죽는 사람 소원좀 들어주라는 것이다.
현서는 예전, 자신의 네토 경험을 그가 언급할때부터 촉이 왔는데
덜컥 본론이 튀어나왔다.
아... 왠지 이런 흐름일 것 같긴 했는데..


이어진 말은.. 아니나 다를까..
놀라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히는 소리였다.


“주연이를..
성민이 품에..안겨주라고..?..”
“그래! 한번 시원하게 주라~ 이기다~”
“하하~~ 너 제정신으로 하는 말 맞지?”
“아 짜식이, 내가 너한테 허튼 소리하든? 암리 취했어도 말이다”
“.... 확실히 헛소리하는 놈은 아니지..”


그 말은 맞았다.
기본적인 주량이 세고 몸도 튼튼해서
웬만큼 많이 마시고 취해도 정신력으로 끄떡없는 경훈이다.
그런 녀석이 하는 말이니, 본심이 틀림없었다.


경훈의 노려보는 눈이 날카롭다.
현서는 식은땀이 솟음을 느끼며, 잠시 시선을 외면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많고 많은, 경훈 주변의 여자들 지인들이 있을텐데..
왜 나에게.. 내 소중한 아내를 언급하는 것일까?


현서는 성민에게 과거 몹쓸짓을 했어도
서른 가까이 되면서부터 철이 좀 들고는,
지난 나쁜 행실들에 대해서 철도 들고 크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성민의 야윈 손을 붙잡고..
내가 정말 나쁜 놈이었으니..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며,
때아닌 눈물까지 보이며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었다.


그랬던 적도 있고~
아버지 회사가 주저앉으면서, 잘나가던 집안도 조금 어려워지고..
대학 졸업 후 현서가 직장을 다니면서 여윳돈이 생기면 여전히 어려운 성민을 가끔 도와주곤 했다.
가끔 불러내서 밥도 사주고 명절 이럴 때 선물도 종종 주고..
가식이 아닌, 옛 친구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였다.


물론 그걸로 사람으로서 할 도리를 다했다 생각은 안하지..
예전의 과실은 그대로 기억속에 남아 있으니까.
그래도 할만큼 해왔는데..
이건 뜬금없이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 아닌가.


“참~ 너 결혼식 때 성민이 왔었냐”
“아니 결혼식 때 부르긴 했는데..”
“진짜 불렀어, 청첩장 보냈나?”
“...... 청첩장은 아니고, 문자로 연락했지..”
“이 새끼가 지금..
멍청한 놈아, 그런건 솔직하게 말 안해도 돼!”
“하핫... 그래, 내가 지금 내 무덤을 팠다..”


부르긴 불렀다.
나머지 네 친구는 결혼식때 모두 와서, 주연과 현서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기원해주었는데..
끝내 성민은 피로연에도, 그 이후에도 연락이 없었다.
그러려니~ 하고 현서도 이해하던 참이다.


가만 그러고보니..
결혼식때 못본 주연이를 성민 놈이 얼굴을 봤었나?
그럴 기회도 없었는데..
일단 경훈의 말도 안되는 제안은 둘째치고,
아내의 얼굴이라도 봤어야 성민이 그런 부탁을 할 것 아닌가.


“얼굴 봤어~ 성민이가”
“어떻게?? 만난 적도 없었는데”
“디지털 시대에 귀신 좆질하는 소리하고 있엉~
청첩장 니가 깟톡으로 보낸거~ 나한테 있잖냐..”
“아...!”
“관심없어하길래, 야 함 봐라, 현서 마누라다.. 내가 뵈줬지”
“......
그랬더니? 뭐라고 하디?...”


“별 관심없는 척 하더니~ 이쁘다고 보라니까~ 보더라.
글더니 지럴? 마니 이쁘다고.. 니 부럽다고 그러네”
“하하하... 정말?”
“어~ 피식, 이 새끼 아직 꼬추는 달려갖고..
은근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얼굴 같다~ 뭐 이 지랄도 하더라”
“.... 그, 그래?”


성민의 마음에 든 얼굴..
그런가.
아내 주연의 웨딩드레스 차림 하나만 보았더라도
성민은 그녀를 적잖게 마음에 들 가능성이 컸다.
왜냐..
성민의 여자보는 취향은 현서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어릴 때 취미삼아, 녀석의 여자를 여흥으로 몇차례 가져봤으니 말이다.


그랬지, 나랑 거의 판박이였어..
어떻게 된게 신기할 정도로, 현서가 그리는 이상형과 거의 일치했다.
얼굴이나 체형 키 이런 외적인 모습 외에도
현서가 좋아하는 여자의 성격과 취향같은 부분들도~
나중에 그의 여자를 뺏은 후 알고보니 묘하게 똑같았다.
그런 판국이니.. 이제 와서 성민이, 자신의 아내를 맘에 들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충격적인 얘기가 분명한데도..
현서는 두근 두근.. 가슴이 묘하게 뛰는 흥분을 느꼈다.
이마에 맺히는 땀을 조용히 닦아본다.
경훈은 잠시 화장실 다녀온다고 자릴 비웠다.
그가 없는 사이, 현서 혼자 수없이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잠긴다.


그런가...
이제 내가 어떤 식으로라도..
곧 떠나는 길이 언제일지 모를, 녀석의 마지막 소망을 들어줘야 하는가..
하하..


경훈이 용변을 보고 나오면,
좋든 싫든 간에 확실히 뭔가 답을 주어야만 했다.
경훈이 넘의 팍팍하게 밀어붙이는..
화끈하지만 더럽고 다혈질적인 면을 볼 때,
당장 예스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여지는 줘야 한다.


“후~ 오줌발이 아주 터지네~
어때, 생각해봤나?”
“옹야~ 생각을 좀.. 해보긴 했는데..”
“으이구, 바로 확답 안내려도 됨마. 결정 지금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어떻게 말을 해줘야하는데?”


“프하하~ 왜그냐. 지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
“미안~ 농담이다 이거는.. 내가 실수했네”
“아냐 괜찬타~ 너 근디 술은 좀 깬 것 같다”
“어.. 물 마니 마시고 오줌 갈겼더니 좀 맑아지네..
그래서 말야, 생각하는데 도움 되라고 내가 어드바이스 하나 주마”
“뭔?”


여기서부터가 본편이다.
현서는 불안함이 담긴 시선으로,
또 한편으로는 조마 조마...
이상하게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묘한, 설레임을 느끼며 물었다.


“가장 우선 할 일은 성민이를 니가 먼저 만나야겠고, 그쟈?”
“그렇지..”
“최근에 운제 만났노?”
“...... 4, 5년 됐나~”
“거봐라~ 그리 오래 안봤으니까 니가 욕을 쳐먹는거야..”
“씨발.. 그냥 본론 빨리 말해”


“ㅋㅋ 봐라 니가 더 급하다 지금..
꿀꺽.. 나도 말할려니 긴장되네..”
“성민이 놈이 뭐래, 나 한번 먼저 보고 싶대?”
“...... 음, 그런 식으로 말도 했고.. 친구니까~
나도 물었지. 개소릴 처음에 하길래..
야 시발 친구 아낸데 뭔 소리하노.. 이랬거든”


구구절절히 할 얘기를 지나서,
떨리는 마음에 채근하는 현서에게 경훈이 털어놓은 이야기..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말했다고 하는데, 거기에 귀가 쏠렸다.


딱 두 번?...
처음부터 포부가 크네.
대부분은 “야~ 딱 한번만 품어보자”라고 애원할 터인데
성민은 경훈에게 왈, 현서의 아내를 두 번만 만나보길 원했단다.
두 번이라..


“단 둘이서..?”
“아니~ 그런 이야기는.. 아 뭐랬더라? 나도 기억이 까물까물..”
“아.. 좀.. 잘 되짚어봐..”
“ㅎㅎㅎ 기억이 나는갑다.
꼭 둘만 있을 필요는 없고, 만약에라도 니가~ 동의해준다면~”
“동의해준다면..??”


“흐읍~ 너 보는 앞에서라도, 한번 주연일 품에 안고 싶다카더라”
“헐! 나랑 같이 있는.. 자리에서?”
“그랴~ 그렇게 말했어.. 확실하다잉.
장소는 뭐..”
“자리야.. 우리 집이나~ 뭐 그래야겠지..”
“캬캬~ 이거봐라, 이미 맘의 준비를 하는구만..”
“아니.. 혼잣말이야..”


두 번이라..
만나되 단 둘이 만나진 않아도 괜찮고, 자신과 같이...
꿀꺽...
크게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궁금한 것을 더 물어봐야지 안되겠다..


“그럼 다른 것좀 물어보자.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성민인 무슨 병에 그래 걸린거래?”
“폐암”
“폐암?”
“어~ 그 빙시새끼, 첫사랑 잃고 담배만 존나게 펴댔어..
뭐 그것말고도 힘든 일이 오죽 많았냐..
그 자식은 잘 들여다보면, 모든 삶의 여정이 다 고난, 고통이여”


“그래.. 폐암이구나..
말기가 확실한 거~? 이제 아예 의사도 손 못대나?”
“아 것참~ 내가 불확실한 정보를 흘렸겠느냐고...
나도 믿기지 않고 청천벽력이라서, 그 담당의 찾아가서 개지랄했지..
거기 병원이 알고보니까 처음이 아니더라구.
어떻게든 낫고 싶어서 여기 저기~ 병원 다녀보고 알아본 모양이야”


“절망적이구만... 씁쓸하네 씨벌..
길어야 몇 개월, 이런 식으로 진단이 나온거?”
“ㅋㅋ 그래.. 웃을 상황이 아닌데 속이 쓰리네..
다른건 장담 못하는데~ 등신 의사놈들이 한결같이 똑같게 하나는 짚더라.
길어야 륙개월.. 짧으면 삼사개월만에 횡사한다고..”
“......... 아..”


길어야 반년.. 후..
불쌍한 놈..
그 순간 현서는,
오늘 꼭 일부라도 긍정적인 결론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술집에서 나와, 2차를 또 가자는 경훈의 권유에도 아랑곳 않는다.
지금 술을 더 쳐먹게 생겼냐...
심란한 마음을 붙잡고, 대리기사를 불러 집으로 향한다.
차 뒷자리에 앉아서도 내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오늘 같은 날..
달빛은 참 하얗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구나..


늦은 밤에 마주하는 아내는 역시 아름답다.
언제나 상대방을 배려하고, 마음 씀씀이도 지혜로워서 더욱 예뻐 보이는 아내.
잔뜩 술을 먹고 온 남편 앞에서 서운한 티를 조금 내지만
곧 밝게 웃으며, 얼마나 속상한 일이 있었느냐고..
어깨를 기분좋게 두드려주며 어서 쉬라고 말한다.


“호호, 왜 그렇게 자꾸 빤히 얼굴을 쳐다봐요..?”
“.... 아니.. 이뻐서..
쳇, 내가 내 마누라 얼굴도 뚫어지게 못보나?”
“키득~ 이이는 참.. 그런건 아니죠..
그냥 있잖아요, 여보 얼굴을 보니까
기분이 좋은 것 같기는~~ 한데!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가득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예요”


눈치가 귀신이다.
얼마 같이 살지 않았어도,
시시 각각 그날 그날에 따라 변하는 현서의 기색을, 주연은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자잘한 회사 일이야..”
“왜요~? 또 찌질한 부장님이 어디서 화풀이를~ 막 갈궈대셔요?”
“뭐...ㅋㅋㅋ
너.. 막 찌질한 부장이 화풀이한다는 말은 푸하하..”
“호호? 왜요.. 가능하면 기분 좋아지게~ 재미나게 표현해본건데 히~”


“하핫, 아니다~ 일단 밥부터 좀 먹고 말하자~”
“네~ 오늘의 메뉴는 무얼로~? 힝~”
“ㅎㅎ 대강 먹고 왔으니까, 가볍게 간식이나 좀 줘”
“네~”


남의 속도 모르고.. 말야..
참 해맑다. 어린 아이같아.
이럴 때 보면 가끔 둘이서 장난칠때..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정말 들어맞는다고 느낀다.


저, 언제까지나 천상 여자이고 싶어요.
여고 시절의 순수했던 그 추억과, 감성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금쪽 같은 아내의 속삭이는 말을 생각하니, 웃음이 번진다.
그런 아내를 내 어찌~ 휴우.


몸도 고되고, 머릿속도 궁리로 뒤죽박죽이 되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도 맘껏~
사랑하는 아내를 끌어안고 사랑을 불태우고 싶은데..
막상 경훈과 성민의 일을 떠올리니,
베란다에서 밤 늦은 시간까지 주구장창 줄담배만 피게 된다.



다시 사흘이 지난 뒤.
이틀 동안은 종일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으면서도 업무에 전혀 집중이 안됐다.
속도 꾸역 꾸역 얹혀서 넘어오고..
망할 놈의 윤부장 개새끼는 꼭 그럴 때 와서 속을 헤집는다.
...
오늘은 몸도 정신도 멀쩡한 상태다.


어제 못했던 전화를 해봐야 하는데...
두근 두근..
액정을 뚫어지게~ 아까부터 수시간째 들여다만 보고 있다.
누가 연락이 와서가 아니다.
경훈이 헤어지면서 찍어준, 성민의 번호였다.


번호도 없었구만 글고 보니...
생각할수록, 자신이 나중에 나이 먹고 성민에게 사과했던 것들과
진심을 다해서 빌었다고 기억했던 내용들은..
이제와서 정말 당당하게 진심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싶었다.


내가 지은 죄를 속죄하고 마음의 면죄부를 얻기 위해서였지,
하찮게 여겼던 성민이가 정말 잘되길 바래서가 아니었자나..
아직도 우습게 여기는 마음이 내 안에는 남아 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결혼식때도 내심 오지 않기를 바랬을 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지..
오늘 전화해봐야할텐데?
보나마나 오늘 저녁쯤이면, 경훈이 전화를 걸어 경과를 확인해볼 것이다.
3일 정도는 생각할 말미를 주겠다고 했으니...


꼭 이럴 때는 친구가 아니라 무슨 상전같다.
개새끼, 아무리 성민이가 안됐더라도~
지도 나랑 불알 사이면, 내 입장도 더 배려해줘야지..
일주일도 아니고 딸랑 사흘동안 생각해보라니..


후...
부장이 없는 틈을 타 또 나가서 담배를 찾는다.
요즘엔 회사 건물내 어디서든 다 금연구역이라,
번거롭게 옥상까지 와서 피어도 눈치가 보인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깔깔거리며 복도를 오가는
여직원들이 그를 보고.. 어려워하며 고개를 숙인다.
조금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주는 현서.
다른 때 같으면 오고 가며 한마디씩 아랫사람들도 챙겨주는데
오늘은 고민이 많은지라, 사람을 별로 마주하기 싫었다.


20대 초중반 저런 쌩쌩한 년들도~
그렇고 그런.. 지 애인 말고도, 딴 남자의 품에 안겨보고 싶단 생각을 할까?
하하. 그럴 수도 있겠지, 변태 남친만나서 잘못 꿰이면..


꼭 여자 입장 말고..
저 밑에 팔팔거리며 돌아댕기는 멍청한 사내놈들도 마찬가지일겨.
지 앤이나 와입을 딴 놈한테 대주고 싶어할지도..
소싯적의 나처럼 말야.


네토라레~ 요즘 말로는 그렇게 표현하지, 일본식 신조어라나 뭐래나..
참 좆같은 것만 기가 막히게 잘 들여온단 말야..
피식~ 하기야..
나도 싱싱한 여직원들 보면 절로 군침이 동하고,
애인이 있든 없든 데리고 자보고 싶을 때가 많으니까.


아니야, 애인이나 남친이 있는 여자가 더 정복하고픈 드는 법~
그게 수컷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니까..
서른 되기 전까지 내가 바로 산 증인이잖어.


그래도 37이 된 이제는...
이따금씩 쭉쭉빵빵한 여직원들을 보면 군침이 동하지만~
상상으로만 그치고 직접 행동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인간 강현서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예전 지인들이라면 놀랠 거다.
철부지 시절 망나니같은 짓을 워낙 많이 하고 다녔으니..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성숙해지고 어른이 되었다고 자부하면서~
스스로 생각해도 더러운 행위들을 멀리했던 것이다.


그날 퇴근 시간.
째깍 째깍...
정시 퇴근은 바라지도 않는다.
부장 개늠이 얼른 자리를 비워주기만 바랄뿐..


가슴 졸이며 사무실을 빠져나온뒤,
드디어-
저장해두었던 번호를.. 떨리는 손가락으로 꾹- 꾹- 누른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기에 앞서서 망설여지더니,
한번 마음 굳히고 버튼을 누르자 일사천리다.
뚜르르르..
신호가 간다.


“어, 그래.. 성민이냐? 나 현서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각자의 목소리.
반가운 안부인사를 서로 건넨다.
건강은 어떠냐, 차도는 있느냐..
자잘한 겉치레 인사와 마음에 없는 신변에 대해 묻고..
조심스럽게 그의 기색을 살피며 천천히.. 아내의 이야기를 성민에게 던져본다.
꿀꺽..


“........
정말로, 경훈이가 너한테 그런 이야길, 꺼냈어..?”
“그래.. 내가 들은대로 너한테 전하는거다..”
“........
나는, 수, 술먹고 술김에.. 후니한테 그냥 바라는 점을.. 이야기한건데..”


큭, 이놈 봐라.


“하하~ 바랬다는 거는, 성미니 너도 간절히 원했다는 말이잖아”
“...... 그게.. 그, 그렇게 되지..”
“뭐가 말이 부실해, 확실히 말해봐”
“어, 응...?”
“너! .....
내.. 와이프하고.. 만나길 원한다면서?”


흥분했는지 현서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무척 조심스러워하는 성민의 허스키한 음성과는 대조적이다.
성민은 폐암 말기라는 말 답게,
원래의 목소리보다 한층~ 마치 가래낀 것처럼 탁한 음색이었다.
잠깐의 통화를 하면서 듣기 불편할 정도였다.


여하튼 전화를 걸기 전까지 초조하고 두려웠던 현서가
지금은 오히려 성민을 다그치고 있다.


“무슨 말인지 알지?
내가 경훈이 새끼한테 오늘 까지는 늦어도 답을 줘야한다.. 이 말이야”
“....... 갑자기.. 그렇다고 해도..
나는 지나가는 말로 내비친 의사고, 이렇게 급하게.. 당황스럽네..”


아, 이 능구렁이같은 짜식. 솔직하지 못하네.
마음 같아서는 외치고 싶었다.
"야 이 새끼야, 너 내 마누라랑 자고 싶잖아!"라고.


꾸욱~ 핸드폰을 말아 쥐었다.
콩닥 콩닥...
한마디 한마디 건네기가 두근거리고 설렌다.
깊게 한숨을 크게 들이쉰 뒤에, 결론을 말했다.


“야, 쓸데없이 말 끌지말자 우리.
그냥 시원하게 말해, 나 걱정하지 말고.. 진짜 괜찮거든.
생각을 수도 없이 했고, 결정하고 하는 말이다.
성민아.
너 언제 우리 곁을 떠날지 모르는 판인데..
나도 너한테 진 마음의 빛도 많고.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자”


성민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오히려 의연한 척 말을 건네며, 마음을 굳혔다는 현서 목소리를 듣고
수화기 너머에서 조용히 생각을 하는 느낌이다.
후~
두근 두근...
그 십여초의 시간들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런가.. 너희 부부가 괜찮다면..
나같이 어리석고 모자란 사람에게..
작은 친절을..
미안하다.. 그런 거창한 표현 안쓸게.
어쨌든 내 오랜 바람을 들어주고 싶어한다는 걸.. 나도 이제 알겠어..”
“.... 응..”


대화 짬짬이 성민의 말을 들으며,
‘오랜 바람’이라고 하는 말에 뭔가 미심쩍은 기분도 들었다.
풋~ 나도 신경 과민이 지나치군..


“그래 알았어, 성민아.
만나서 할 이야긴데.. 나도 모르게 마음이 너무 앞섰다.
우리 일단 만나자, 너 음식 뭐 좋아하냐?”
“오늘..?
오늘은 내가 시간내기가 좀 그런데..
아니 오늘이 아니어도, 나는 너 알다시피 병상에 있는 몸이라..”


아 그렇군.. 이 녀석은 아픈 몸이지..
그런 겔겔대는 몸으로 어찌 내 마누라를?
참나~
잠시 머리를 굴리는 현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중간 과정 다 끊고, 니가 우리 집으로 와”
“내가??....”
“어~ 나도 마음의 준비는 더 해야하고..
우리 와이프 주연이한테도 이런 저런 얘길 꺼내야하니까..”
“......아!.... 아직 말하진 않은...”


“신경쓰지마, 니가 신경쓸 필요 없어.
그러니까, 일단은..
대략적으로 일주일 후 오늘이라고 알고 있어”
“뭘 말이야?”


“일주일 뒤, 다음주 금요일 저녁에.. 우리 집으로 니가 직접 오도록해”
“너, 너희 집으로, 내가 직접..???”
“그래. 다른 디테일은 내가, 차후에 톡으로 다시 통보해줄테니까..”


기타 몇가지만 이야기하고, 그렇게 전화를 끊는다.
후, 이제 된건가..
한고비는 넘긴 거야?


임경훈 이 새끼야..
그래.. 한번 너희들 미친 척하는 것 뻔히 알지만, 어디 나도 한번 맞장구쳐보마.


모를 일이었다.
이쯤 되면 분노에 몸이 휩싸이고 막막해야 정상일텐데..
집으로 향하는 핸들을 돌리는 현서의 가슴은~
야릇한 흥분감과 불안함이 동시에 차오르고 있었다.






=

프롤로그 격에 해당하는 1부입니다.
한참 전부터 생각해왔던 소재입니다..
예전에도 후기에 남겼습니다만, 가끔씩 컴퓨터가 고장나는 통에-
몇번이나 시놉시스와 줄거리를 기록해놓은게 날아가서, 눈물을 삼켰습니다.
어쨌든 다시 쓰게 되어, 저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색엄 10부와 이 글 둘중에 무얼 쓸까, 고민하다가 여론을 보고 먼저 올립니다.
댓글에 전부 네토를 원하셔서(!?!) 놀랐네요;;
미리 안내드린대로 이 글은 최대한 길지 않도록, 10부 안팎으로 끝내려 합니다.
제목이... 좀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감이 있죠. 별별 생각을 하다가 요걸로 정했습니다.

-

아이고.. 첫회고 하니 추천은 상관없습니다만
댓글 좀~ 얘기안해도~ 적고 가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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