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대로
2부
여우인지 곰인지 (2)
-*-
나는 불편한 인간 관계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법도 모르지만, 불편한 인간 관계에서 도망치는 요령도 마찬가지로 알지 못한다.
어리숙하게 매번 손해보는 타입이라서, 김지은은 마치 나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라도 보는 양 안심하지 못 하는 표정이다.
“ 서방님, 오늘은 일찍 올거야? ”
김지은이 이렇게까지 나를 신경써줄 만큼, 내 사교성은 확실히 끔찍하고 비범한 수준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끌려다니면서 싫은 자리를 불려다니는 것은 아니였다.
애초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해다니는 생활이 일상다반사라고는 해도, 사실 상대편에서 나를 먼저 부르는 일도 없다.
그저, 인기 없는 사람의 한심한 투정일 뿐이다.
나는 적어도 자신의 주제파악은 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어색한 미소와 함께 김지은에게 대답해 주었다.
“ 내가 여기 아니면, 어디 갈 곳은 있나요. ”
“ 음, 음. 훌륭해. 후후. 자, 뽀뽀합시다. ”
김지은의 붉고 도톰한 입술이 나를 향해 사랑스럽게 내밀어지자,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입술을 맞추었다.
입술의 촉감은 무척이나, 비교할 것이 딱히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하다.
“ …. ”
내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김지은의 아름다운 얼굴에 어쩐지 수줍어하는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
게다가 김지은 특유의 달콤하고 아련한 체취가 코 끝에 물씬 다가오는 것이, 어쩐지…
“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네요. ”
“ 그러니까 일찍 돌아와야 해, 서방님. 오늘 장 보러 가는 날이야. ”
“ 오는 길에 내가 사올게요. ”
“ 안 돼. 무조건! 같이 해야 돼. 쇼핑도 할 거야. 서방님이 내 옷 골라줘야지. ”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단호하면서도 진지하게 잘라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크로스백을 고쳐메면서 말했다.
“ 알았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
“ 나, 그러면 서방님 데리러 갈거야? 또 몰랐다고 하면 안 돼. ”
나라는 사람을 없으면 안된다고 이야기해 주는 연인이 곁에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 틀림없다.
-*-
우리는 가끔 어떻게 사랑에 빠지고, 어떻게 그 사랑을 유지하는지 설명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반드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인과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 …결국은 호르몬들이 사랑을 완성하는거죠. 안 그렇습니까, 윤소영 양? 수업에 집중합시다. ”
나는 한참동안 본 수업의 취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여느 때의 나처럼 혼자 공상에 빠지기 시작했었다.
멍하니 샛길로 빠져서 공상을 하고 있었는데, 윤소영은 내가 졸고 있다고 생각한듯 나를 깨우다가 윤현민 교수에게 핀잔을 듣고야 말았다.
윤소영의 얼굴에 약간 뾰로통한 빛이 어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고치며 혼자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 안 졸았는데… 미안. ”
“ 그게 더 나빠. ”
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다시 열심히 교수가 강의하고 있는 내용을 필기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윤소영에게는 진지하고 열심하게 임하지 않는 일이 없는 것 같다.
“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뇌는 ‘ 페닐에틴아민(Phenylethylamine, P.E.A) ’ 이라는 사랑 호르몬의 지배를 받습니다. 자신의 눈에 스스로 떼어낼 수 없는 콩깍지를 씌워버리는 이 호르몬은 뇌에 강력한 쾌락을 주고, 강렬한 쾌감을 주는 만큼이나 중독성이 큽니다. 대개 사랑하는 사람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까지 한다면, 그것은 호르몬의 영향을 깊숙하게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
글쎄, 모르겠다.
아니, 아닌가.
하기사, 내가 고집을 부리고 화를 낸다는 일 자체가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였다.
내가 김지은과 윤소영에게 이따금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는건, 왜 그러는 걸까.
그만큼 그녀들을 믿어서?
아니면, 틀림없이 그런 나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해서?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그렇게 솔직한 모습으로 변하는 건가?
페닐에틴아민의 영향?
“ …입니다. 문제는, 이 페닐에틴아민이라는 사랑 호르몬의 지속 기간은 대개 3개월에 불과하다는 거죠. 길어야 3년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조차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시선으로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사랑이 식어버리고 헤어지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죠. 윤소영 양, 질문 있습니까? ”
“ 교수님, 그렇다면 사랑에도 유통 기한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
“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에 대해서 말해 주자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외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죠. 생물의 뇌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
강단에 선지 어언 30년 째라는 윤현민 교수는 가볍게 생수병의 뚜껑을 열고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윤소영의 질문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친절하게 보충 설명까지 곁들여 대답해주었다.
“ 예를 들면, 백조는 죽을 때까지 배우자를 향해서 페닐아틴아민이 끊임없이 분비되는 생물 중 하나죠. 물론, 사람들 중에서도 드물게 그런 예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죠. 결혼에 골인하고 나서 장수한 부분들이 `같이 사는건 의리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대개 이런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
나이 지긋한 노교수의 센스있는 농담에, 강의실이 웃음으로 채워졌다.
윤현민 교수는 웃음소리가 잦아들기를 잠시 기다리더니,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이대로 수업을 끝내버려도 무방하기는 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강의에 집중하는 학생들을 보자, 노교수의 교육열이 불타오른 모양이다.
“ 이성의 눈을 쳐다보거나 간단한 스킨십만 이루어져도 맥박이 빨라지거나 땀이 나는 등 신진대사가 활발하게 진행된다면, 사랑의 호르몬 페닐아틴아민이 뇌에서 분비되고 있다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이것의 분비가 시작되면 사람은 사랑에 빠지는 감정을 가득 느끼게 되는 거겠죠. 건강에는 참 좋은 약입니다만, 어쩌면 독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페닐아틴아민의 지배를 받는 사례 몇 가지를 정리해서 다음 수업 때 준비해 오세요. ”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정말.
주변에서는 과제를 만들어주는 노교수에 대해서 묘한 야유가 들려왔지만, 윤소영의 호기심 많고 장난기 넘치는 새침한 연갈색 눈동자가 묘한 기대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윤소영은 오늘 강의에서 무언가 즐거운 감흥을 얻은 모양이였다.
노교수가 강의를 시작했을 때 나누어 주고 남은 유인물들과 노트북을 가지고 강의실에서 나가자, 나는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는 유인물과 노트 등의 필기구를 가방 속에 쑤셔넣기 시작했다.
윤소영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어딘가 즐거워 하는듯한 얼굴로 내게 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 왜? ”
“ 오늘 수업 재밌지 않았어? ”
뭐..
평소에 비하면, 훨씬 유익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였다.
후반부만.
게다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였다.
나는 하품을 하면서, 졸린듯한 목소리로 윤소영에게 대답해 주었다.
“ 이런건 상식이지. ”
“ 뭐야, 지금 잘난 척 하는거야? ”
“ 나처럼 연애할줄 모르는 인간들이 원래 이런건 훨씬 더 잘 아는 법이거든. ”
내가 씩 웃으며 크로스백을 메고 그녀를 기다려주자, 윤소영은 책상 위에 늘어진 필기구와 노트를 주섬주섬 정리하면서 나를 곱게 흘겼다.
“ 모르긴 뭘 몰라, 너도 은근 베테랑이거든? ”
뭐, 사고 때문에 김지은과 윤소영과 한창 연애하던 기억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건 그렇고, 어쩐지 지금의 윤소영은 평소보다 조금 들떠있는 듯한 모습이였다.
“ 기분 좋아보인다? ”
“ 응. 그렇게 보여? 히힛. ”
“ 물어봐도 되는거야? ”
나는 평소보다 들떠있는 윤소영에게 겸연쩍은 표정으로 질문했다.
윤소영은 배시시 미소지으며 내 팔짱을 끼면서, 신이 난듯한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 사랑에도 유통 기한이 있다고 했잖아. ”
“ 그랬지. ”
“ 우리는 벌써 2년 넘게 채웠는데. 아무래도, 우리는 백조인가봐. 그치? ”
“ 기한이 있기는 할걸…. ”
내 혼잣말에,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걷던 윤소영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녀는 마치, ‘ 다시 말해봐 ’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 한… 만년 쯤? ”
“ 방금 고쳐말한거 아니지? ”
“ 페닐아틴아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
아무래도 콩깍지는, 나보다 윤소영이 더 단단하게 씌인 모양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같이 한심한 인간을 좋아할리가 없다.
윤소영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 무슨 뜻이야? ”
“ 그런게 있어. ”
“ 뭐야, 말 안해? 죽을래? ”
옆구리가 꼬집히는 강렬한 고통에, 나는 눈물을 찔끔하면서 윤소영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 이건 말 못해. ”
“ 네, 네. 별로 궁금하지도 않네요. ”
“ 진짜 말 안 해줘야지. ”
우리는 애들처럼 티격태격하면서 인문대 건물에서 빠져 나왔다.
여기는 도색을 새로 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건물을 다시 지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는 오늘 내내 티격태격하고 있는 윤소영도 동의했다.
윤소영은 자하연 근처의 벤치 하나에 걸터 앉더니, 옆 자리를 탁탁 두드리면서 나를 말없이 쳐다 보았다.
어쩐지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동안 고민하던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의 옆에 앉았다.
“ 더 가까이 와. 이런데서 내외하고 있어. 너 초등학생이야? ”
그녀는 언짢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살이 붙은 엉덩이의 매력적인 감촉이 여실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몸을 붙였다.
가까이 오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먼저 오는게 어디 있담.
하기사, 지금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윤소영은 나를 언제나 그렇게 대한다.
윤소영은 느긋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네를 타는 것처럼 가볍게 다리를 흔들더니, 내 손을 꼭 붙잡으면서 다정하게 말을 붙였다.
“ 수업 끝나고 할 거 없지? ”
없다고 말해, 라고 강요하는 듯한 새침하고 앙큼한 눈빛은..
역시 윤소영에게만 어울리는, 매력적인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할 일이 있을리가 없는 평소라면 그냥 넘어가 주었겠지만, 오늘은 김지은과의 선약이 있다.
나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 있는데. ”
“ …. 무슨 일? ”
니가 할 일이 어딨어, 라고 말하는 듯한 발끈한 윤소영의 눈빛에, 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대답해 주었다.
“ 나도 할 일 있어. ”
“ 그러니까, 무슨 일. ”
“ 선생님이랑 장도 보고, 쇼핑하러 가기로 했거든… 옷 골라주는 날이야. ”
윤소영은 어딘가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였다.
그녀의 새침한 연갈색 눈동자에 약간 노기가 서리면서, 윤소영은 나를 차갑게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 야, 너 나랑 쇼핑 안 하잖아. ”
“ 나도 하자고 하면 하지…. ”
“ 와, 진짜. 배신감. 괜히 물어봤어. 나 지금, 페닐아틴아민이 사라지는 소리가 막 들리거든? ”
“ 그건 안 되는데…. ”
이럴 때, ‘ 물어본 니가 잘못이지 ’ 라는 대답을 해버리는 남자들이 얼마나 페닐아틴아민이 없는 인간들인지 알 것 같다.
약간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윤소영은 내 대답을 듣고 한숨을 푹 쉬면서,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 나랑도 주말에 쇼핑해. ”
“ 토요일? ”
“ 왜 토요일만이야? 일요일도 해. 니 주말은 원래 내 거였거든? ”
윤소영은 새침한 표정으로 나를 흘기면서, 언짢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삐치는 것도 어쩜 이렇게 매력적인건지, 정말.
‘ 그나저나 일요일은 안 되는데, 큰일 났네. ’
2부
여우인지 곰인지 (2)
-*-
나는 불편한 인간 관계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법도 모르지만, 불편한 인간 관계에서 도망치는 요령도 마찬가지로 알지 못한다.
어리숙하게 매번 손해보는 타입이라서, 김지은은 마치 나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라도 보는 양 안심하지 못 하는 표정이다.
“ 서방님, 오늘은 일찍 올거야? ”
김지은이 이렇게까지 나를 신경써줄 만큼, 내 사교성은 확실히 끔찍하고 비범한 수준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끌려다니면서 싫은 자리를 불려다니는 것은 아니였다.
애초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해다니는 생활이 일상다반사라고는 해도, 사실 상대편에서 나를 먼저 부르는 일도 없다.
그저, 인기 없는 사람의 한심한 투정일 뿐이다.
나는 적어도 자신의 주제파악은 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어색한 미소와 함께 김지은에게 대답해 주었다.
“ 내가 여기 아니면, 어디 갈 곳은 있나요. ”
“ 음, 음. 훌륭해. 후후. 자, 뽀뽀합시다. ”
김지은의 붉고 도톰한 입술이 나를 향해 사랑스럽게 내밀어지자,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입술을 맞추었다.
입술의 촉감은 무척이나, 비교할 것이 딱히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하다.
“ …. ”
내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김지은의 아름다운 얼굴에 어쩐지 수줍어하는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
게다가 김지은 특유의 달콤하고 아련한 체취가 코 끝에 물씬 다가오는 것이, 어쩐지…
“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네요. ”
“ 그러니까 일찍 돌아와야 해, 서방님. 오늘 장 보러 가는 날이야. ”
“ 오는 길에 내가 사올게요. ”
“ 안 돼. 무조건! 같이 해야 돼. 쇼핑도 할 거야. 서방님이 내 옷 골라줘야지. ”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단호하면서도 진지하게 잘라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크로스백을 고쳐메면서 말했다.
“ 알았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
“ 나, 그러면 서방님 데리러 갈거야? 또 몰랐다고 하면 안 돼. ”
나라는 사람을 없으면 안된다고 이야기해 주는 연인이 곁에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 틀림없다.
-*-
우리는 가끔 어떻게 사랑에 빠지고, 어떻게 그 사랑을 유지하는지 설명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반드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인과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 …결국은 호르몬들이 사랑을 완성하는거죠. 안 그렇습니까, 윤소영 양? 수업에 집중합시다. ”
나는 한참동안 본 수업의 취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여느 때의 나처럼 혼자 공상에 빠지기 시작했었다.
멍하니 샛길로 빠져서 공상을 하고 있었는데, 윤소영은 내가 졸고 있다고 생각한듯 나를 깨우다가 윤현민 교수에게 핀잔을 듣고야 말았다.
윤소영의 얼굴에 약간 뾰로통한 빛이 어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고치며 혼자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 안 졸았는데… 미안. ”
“ 그게 더 나빠. ”
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다시 열심히 교수가 강의하고 있는 내용을 필기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윤소영에게는 진지하고 열심하게 임하지 않는 일이 없는 것 같다.
“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뇌는 ‘ 페닐에틴아민(Phenylethylamine, P.E.A) ’ 이라는 사랑 호르몬의 지배를 받습니다. 자신의 눈에 스스로 떼어낼 수 없는 콩깍지를 씌워버리는 이 호르몬은 뇌에 강력한 쾌락을 주고, 강렬한 쾌감을 주는 만큼이나 중독성이 큽니다. 대개 사랑하는 사람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까지 한다면, 그것은 호르몬의 영향을 깊숙하게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
글쎄, 모르겠다.
아니, 아닌가.
하기사, 내가 고집을 부리고 화를 낸다는 일 자체가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였다.
내가 김지은과 윤소영에게 이따금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는건, 왜 그러는 걸까.
그만큼 그녀들을 믿어서?
아니면, 틀림없이 그런 나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해서?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그렇게 솔직한 모습으로 변하는 건가?
페닐에틴아민의 영향?
“ …입니다. 문제는, 이 페닐에틴아민이라는 사랑 호르몬의 지속 기간은 대개 3개월에 불과하다는 거죠. 길어야 3년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조차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시선으로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사랑이 식어버리고 헤어지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죠. 윤소영 양, 질문 있습니까? ”
“ 교수님, 그렇다면 사랑에도 유통 기한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
“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에 대해서 말해 주자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외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죠. 생물의 뇌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
강단에 선지 어언 30년 째라는 윤현민 교수는 가볍게 생수병의 뚜껑을 열고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윤소영의 질문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친절하게 보충 설명까지 곁들여 대답해주었다.
“ 예를 들면, 백조는 죽을 때까지 배우자를 향해서 페닐아틴아민이 끊임없이 분비되는 생물 중 하나죠. 물론, 사람들 중에서도 드물게 그런 예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죠. 결혼에 골인하고 나서 장수한 부분들이 `같이 사는건 의리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대개 이런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
나이 지긋한 노교수의 센스있는 농담에, 강의실이 웃음으로 채워졌다.
윤현민 교수는 웃음소리가 잦아들기를 잠시 기다리더니,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이대로 수업을 끝내버려도 무방하기는 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강의에 집중하는 학생들을 보자, 노교수의 교육열이 불타오른 모양이다.
“ 이성의 눈을 쳐다보거나 간단한 스킨십만 이루어져도 맥박이 빨라지거나 땀이 나는 등 신진대사가 활발하게 진행된다면, 사랑의 호르몬 페닐아틴아민이 뇌에서 분비되고 있다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이것의 분비가 시작되면 사람은 사랑에 빠지는 감정을 가득 느끼게 되는 거겠죠. 건강에는 참 좋은 약입니다만, 어쩌면 독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페닐아틴아민의 지배를 받는 사례 몇 가지를 정리해서 다음 수업 때 준비해 오세요. ”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정말.
주변에서는 과제를 만들어주는 노교수에 대해서 묘한 야유가 들려왔지만, 윤소영의 호기심 많고 장난기 넘치는 새침한 연갈색 눈동자가 묘한 기대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윤소영은 오늘 강의에서 무언가 즐거운 감흥을 얻은 모양이였다.
노교수가 강의를 시작했을 때 나누어 주고 남은 유인물들과 노트북을 가지고 강의실에서 나가자, 나는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는 유인물과 노트 등의 필기구를 가방 속에 쑤셔넣기 시작했다.
윤소영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어딘가 즐거워 하는듯한 얼굴로 내게 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 왜? ”
“ 오늘 수업 재밌지 않았어? ”
뭐..
평소에 비하면, 훨씬 유익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였다.
후반부만.
게다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였다.
나는 하품을 하면서, 졸린듯한 목소리로 윤소영에게 대답해 주었다.
“ 이런건 상식이지. ”
“ 뭐야, 지금 잘난 척 하는거야? ”
“ 나처럼 연애할줄 모르는 인간들이 원래 이런건 훨씬 더 잘 아는 법이거든. ”
내가 씩 웃으며 크로스백을 메고 그녀를 기다려주자, 윤소영은 책상 위에 늘어진 필기구와 노트를 주섬주섬 정리하면서 나를 곱게 흘겼다.
“ 모르긴 뭘 몰라, 너도 은근 베테랑이거든? ”
뭐, 사고 때문에 김지은과 윤소영과 한창 연애하던 기억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건 그렇고, 어쩐지 지금의 윤소영은 평소보다 조금 들떠있는 듯한 모습이였다.
“ 기분 좋아보인다? ”
“ 응. 그렇게 보여? 히힛. ”
“ 물어봐도 되는거야? ”
나는 평소보다 들떠있는 윤소영에게 겸연쩍은 표정으로 질문했다.
윤소영은 배시시 미소지으며 내 팔짱을 끼면서, 신이 난듯한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 사랑에도 유통 기한이 있다고 했잖아. ”
“ 그랬지. ”
“ 우리는 벌써 2년 넘게 채웠는데. 아무래도, 우리는 백조인가봐. 그치? ”
“ 기한이 있기는 할걸…. ”
내 혼잣말에,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걷던 윤소영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녀는 마치, ‘ 다시 말해봐 ’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 한… 만년 쯤? ”
“ 방금 고쳐말한거 아니지? ”
“ 페닐아틴아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
아무래도 콩깍지는, 나보다 윤소영이 더 단단하게 씌인 모양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같이 한심한 인간을 좋아할리가 없다.
윤소영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 무슨 뜻이야? ”
“ 그런게 있어. ”
“ 뭐야, 말 안해? 죽을래? ”
옆구리가 꼬집히는 강렬한 고통에, 나는 눈물을 찔끔하면서 윤소영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 이건 말 못해. ”
“ 네, 네. 별로 궁금하지도 않네요. ”
“ 진짜 말 안 해줘야지. ”
우리는 애들처럼 티격태격하면서 인문대 건물에서 빠져 나왔다.
여기는 도색을 새로 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건물을 다시 지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는 오늘 내내 티격태격하고 있는 윤소영도 동의했다.
윤소영은 자하연 근처의 벤치 하나에 걸터 앉더니, 옆 자리를 탁탁 두드리면서 나를 말없이 쳐다 보았다.
어쩐지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동안 고민하던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의 옆에 앉았다.
“ 더 가까이 와. 이런데서 내외하고 있어. 너 초등학생이야? ”
그녀는 언짢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살이 붙은 엉덩이의 매력적인 감촉이 여실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몸을 붙였다.
가까이 오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먼저 오는게 어디 있담.
하기사, 지금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윤소영은 나를 언제나 그렇게 대한다.
윤소영은 느긋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네를 타는 것처럼 가볍게 다리를 흔들더니, 내 손을 꼭 붙잡으면서 다정하게 말을 붙였다.
“ 수업 끝나고 할 거 없지? ”
없다고 말해, 라고 강요하는 듯한 새침하고 앙큼한 눈빛은..
역시 윤소영에게만 어울리는, 매력적인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할 일이 있을리가 없는 평소라면 그냥 넘어가 주었겠지만, 오늘은 김지은과의 선약이 있다.
나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 있는데. ”
“ …. 무슨 일? ”
니가 할 일이 어딨어, 라고 말하는 듯한 발끈한 윤소영의 눈빛에, 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대답해 주었다.
“ 나도 할 일 있어. ”
“ 그러니까, 무슨 일. ”
“ 선생님이랑 장도 보고, 쇼핑하러 가기로 했거든… 옷 골라주는 날이야. ”
윤소영은 어딘가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였다.
그녀의 새침한 연갈색 눈동자에 약간 노기가 서리면서, 윤소영은 나를 차갑게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 야, 너 나랑 쇼핑 안 하잖아. ”
“ 나도 하자고 하면 하지…. ”
“ 와, 진짜. 배신감. 괜히 물어봤어. 나 지금, 페닐아틴아민이 사라지는 소리가 막 들리거든? ”
“ 그건 안 되는데…. ”
이럴 때, ‘ 물어본 니가 잘못이지 ’ 라는 대답을 해버리는 남자들이 얼마나 페닐아틴아민이 없는 인간들인지 알 것 같다.
약간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윤소영은 내 대답을 듣고 한숨을 푹 쉬면서,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 나랑도 주말에 쇼핑해. ”
“ 토요일? ”
“ 왜 토요일만이야? 일요일도 해. 니 주말은 원래 내 거였거든? ”
윤소영은 새침한 표정으로 나를 흘기면서, 언짢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삐치는 것도 어쩜 이렇게 매력적인건지, 정말.
‘ 그나저나 일요일은 안 되는데, 큰일 났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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