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날의 肖 像 - 전국대학미전.... >
대학 3학년 때. 내 나이 27 살... 늦었다.
군대 가기 전에 다니던 학교가 맘에 안들어 때려치고 군대 말년에 공부해서 군인 신분으로 학력고사를 보고
제대하면서 다행히 내가 가고 싶어했던 대학에 합격했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많았다. 27 살에 대학 3학년이었으니....
그해 가을에 우리학교에서 <전국대학미술전람회>가 열렸다. 대구에서 열리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미술전 준비위원이 되었고 전국에서 모여드는 학생들의 미술작품을 접수하는 곳을 맡게 되었다.
그녀를 만난것은 거기서 였다.
접수 마감 날 이미 마감시간을 넘긴 늦은 시간에 한무리 여학생들이 우루루 들이닥쳤다. 서울에서 내려온 S 여대 미대 학생들이었다. 그녀는 그 사이에 그렇게 끼어있었다. 그녀들 일행은 15명 정도...
시끌벅적하게 접수를 마치고 나가면서 그녀들 중 누군가가 내게 쭈볏쭈볏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죄송하지만 오늘 너무 늦어서 못올라가서요. 자고 낼 갈려고 하는데요~~~
대구서 좀 놀만한 곳 좀 소개해 주시면 안될까요?"
"..... 글쎄요? 어디를 소개해 드리나? 밤인데..."
"언제 마치죠? 이 접수요?"
"뭐 이제 끝날 때가 된것 같기도.... 8시 반이니까 1시간 30 분이나 오바했는데..."
"우리요. 이 학교 한번 둘러보구 올테니까요 약속없으면 그때 같이 좀 가세요. 우리가 모실께요. 캡틴으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녀들 틈사이로 내가 좋아하는 긴 생머리에다 날씬하고 이지적이고...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그녀... 아주 짧은 시간동안이었지만 뚜렷이 그녀의 이지적인 이미지에 현혹되어 버렸다.
그렇다. 내 젊은 날 내 또하나의 가슴시린 사랑의 이야기는 그녀의 이지적인 눈동자와 마주치면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을 날 밤... 그렇게...
< 젊은날의 肖 像 - 첫키스 >
우리는.. 택시 몇대에 나눠타고 대구 시내 나이트 클럽으로 갔다.
알고 봤더니 내가 맘에 들어한 그녀가 제일 언니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학교를 늦게 가서 현재 24 살이나 되었다. 나랑은 3 살 차이... 궁합은 딱인데....
그때 나는 우리과 선배랑 결혼 생각을 할 정도로 진하게? 사귀고 있었다.
15명이나 되는 여자아이들은 나이트에 들어가자 마자 맥주도 나오기 전에 벌써 몇몇은 플로우어에 나가서 흔들고 있었다. 이어서 맥주 몇잔 씩 돌아가고 뭐 난리도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그녀가 내 옆으로 오더니 젤 언니로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통성명을 하자고 그랬다.
그녀의 이름은 민수. 그렇게 시끄러움 속에서 그녀는 뭐라고 좀 얘기를 걸어오고 맥주도 권하고 해서 같이 서너잔을 마셨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여자아이가 생각지도 않게 곁에서 그러니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같이 플로우어로 나가자고 해서 같이 나갔다. 나는 그다지 춤은 못추는 편이지만뭐 그녀도 다분히 춤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나이트에 가보면 항상 그렇듯이 디스코에서 블루스 타임으로 바뀌면 거의가 우르르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잡았다. 블루스 타임에...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블루스라는 게 그냥 여자 어깨에 손얹고
대충 모양만 내면 되니까... 그녀도 그런것 같고... 그러다 다시 디스코 타임이되어서 같이 좀 흔들다가 나는 들어 왔다. 15명의 여자들 틈새에서 뭐 아무리 남자라도 분위기라는 게 있어서...
자리로 들어와서 맥주 좀 마시고 있는데 그녀도 따라 들어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왜 놀지 않고 들어왔냐 면서 맥주를 권했다. 그렇게 여자애들 춤추는 것 보면서 앉아 있는데 그때. 정말로 느닷없이 그녀가 나를 껴안더니 내게 키스를 했다. 참,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얼떨떨 했다. 뿌리치지도 못하고(?) 난 그저 기분좋게 당하고만 있었다. 길고 긴 키스가 이어졌다. 그 복잡한 나이트에서 자기 친구들이 다 보는 곳에서 여자가 남자를 성폭행(?)하다니....
그녀와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젊은날의 肖 像 - 문학적인 펜팔...>
어릴때 꿈이 많았다. 우선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책을 사모아 읽었다. 책벌레인 미술부 선배의 영향이긴 했지만한때는 내방에 몇 백권이나 쌓여있었다. 그렇게 사긴했지만 어려워서 읽다가 만 것도 있고... 정독을 못하고 겉핥기도 했었다. 국문학과로 가고 싶었지만 성적이 안나왔다.
젠장, 문학가가 되는데 수학이나 과학이나 물상, 생물, 기술이 왜 필요하며 거기다가 우리나라 말로 쓸건데
영어는 왜 필요하며 제 2 외국어는 왜 필요했는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당시 <스크린>이라는 영화 잡지도 정기구독했었다. 영화 관련 책도 수 십권 사서 읽었다. 연극영화과에 가려고 해도 성적이 안되었다. 그래서 미대로 갔다. 이렇게 얘기하니 마치 미대는 공부 못해도 가는 걸로 생각할까? 하긴 뭐, 성적이 좀 안나와도 그림 잘 그리면 들어가니까. 대학 들어가서 공분 않고 연애만 했을걸로 알까? 내 자랑이 아니라 대학 8학기동안 1학년 1학기 빼고 나머지 7학기를 장학생으로 다녔다. 졸업시 전체 평점이 4.5 만점에 3.98이나 됐으니 100 점으로 환산하면 90점에 가깝다. 그러니 연애만 한게 아니라는 건데... 이런, 주접을 떨었군.
하여간 난 문학이 좋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문학적인 여자를 만나서 문학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렇게 한 번 사귀고 싶었다. 민수는 내가 바라던 문학적인 여자아이였다. 나이트에서 난데없이 내 입술을 빼앗고는...그녀가 앞장서서 서로들 갖고 있던 여관비까지 달달모아서 술 마시더니 드디어는 전부 내 화실에 가서 자겠다고 했다. 참 그녀를 비롯해서 다들 대책이 안서는 여자아이들이었다.
자정을 훨씬 넘기고갈 때 처럼 택시에 몇몇씩 나눠타고 내 화실로 돌아왔다. 조그만 화실에 15명의 여자들이 들이닥쳤으니 난리도 아니었다.술에 취한 애들은 구석구석 꼬불쳐 드러누웠고누울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 애들은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민수는 졸지도 않고 술에 취한 채 내곁에 앉아 휘적휘적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그 밤은 아수라장으로 지나갔고 다음 날 오전에 그녀들은 올라갔다.
나는 그녀들이 올라간 뒤로 민수, 그녀를 좀 안좋게 생각했다. 뭐 좋게 얘기하자면 자유주의자? 나쁘게 얘기하면 홀랑 까진 아이? 그렇게 이지적인 얼굴을 해가지고 그러다니 인지부조화 였다.
그런데 그녀로부터 편지가 왔다. 실례가 많았다라고 시작한 편지의 내용이 상당히 감성적이고 문학적이었다.
내 화실에 걸려있던 초기의 내 드로잉 작품이 칼릴지브란의 드로잉같은 터치였다는 얘기로부터 미술에 관한 얘기들은 평론가 수준이었다. 술에 떡이 되어 처음보는 남자에게 키스를 퍼붓던 여자여서 안좋게 생각했는데 놀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나는 꼬박꼬박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우리는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전혜린이 왜 그토록 사랑하던 딸 정화를 두고 31 살의 나이로 자살을 해야 했었는지를... 그녀의 독일 유학생활, 슈바빙과 그녀가 얘기한 바하만과 루이제 린저와 헤르만 헷세와 데미안에 대해서...
그녀도 나도 시를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는 시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 서슬퍼른 5공 군사정권에 맞서 시로 저항했던 민중시인들 얘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같은 그 당시의 문학에 대해서 많은 공감을 같이 했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녀는 제법 관심이 많았다.
그 시절...사실은 암담했다. 1983년 12월에 전두환 정권은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했었고 수감되었던 학생들과 교수들이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주요 대학에 배치된 경찰들 또한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하고도 경찰들의 옷만 사복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대학에 프락치의 투입방식은 더욱 자연스럽고 은밀해졌다. 그러다 그 가을에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발생했고 민정당사 농성으로 이어졌다.
예술계도 다들 뒤숭숭했다. 민중미술가들이 하나 둘 저마다 강렬한 붓질로 저항했고 당연히 시인들도 무용가도 저항했다. 하지만 난 그 쪽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젠장. 내겐 그림과 사랑이 전부 였던가?
그 때 나는... 그녀로부터 내 감성을 확인했으며 그녀의 신비주의 예술가적 언어에 매료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권력의 불의에 대해 분개할 줄 아는그녀의 <의식>에 대해서도 매료당하고 있었다.
그 해 가을 학기가 다 갈 때까지 우리들의 펜팔(?)은 계속되었다.
그런 어느 날 미술학원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늦게 화실로 돌아왔더니 화실 문에 메모가 하나 붙어 있었다.
<기다리다가 차 시간이 되어서 못보고 그냥 올라 갑니다. 편지 드릴께요. 강현희...>
강현희?
그랬다. 그녀랑 그때 같이 내려온 아이중에 하나다. 조금 뚱뚱하고 좀 그냥 그렇게 생긴 아이다.
그녀가 왜 내려왔을까? 서울에서 여기까지....
<젊은날의 肖 像 - 플라토닉 러브... 그 사이에>
겨울방학이 되었다.
1984년이 저물고 있었다. 1984...조지오웰이 예견한 1984년. 그의 얘기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 것처럼 국내 정세는 암흑 그 자체였다. 조지오웰은 이성과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을 희망했다고 하는데... 그럼...그해 첫날에 발표된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컨셉이 좀 어긋났던건가? 어떻던 겨울방학이 되었다. 두어달 동안에 민수에게 내가 보낸 편지의 일련 번호가 벌써 일백단위가 넘었다.
나는 누구에게 마음먹고 편지를 보내면 항상 일련번호를 매기곤 했다.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글자로...
하나, 둘, 셋....
쉰 하나, 쉰둘....
일흔 하나, 일흔 둘... 이런 식이다.
나는 다음 편지가 그냥 다시 1번으로 시작되는 것 보다는 일련번호를 주욱 이어 나가므로써 상대에게 정성들여 편지를 보낸다는 것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글쎄 뭐랄까...금방 끝내는 그런 대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고 그러면서 자연히 상대방도 차곡차곡 일련번호대로 편지를 묶게되어 그것을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도록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라고 생각했다. 또 그러면 은근히 <기다림>을 가질 거라고 일련번호대로 간추려 모아가는 어떤 기다림을 주는 것 그런 작은 기다림이 모아져서 큰 기다림이 될 거라 생각했다. 편집증인가?
그렇게 시작된 민수와 나의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대화는 일백 열 쯤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서서히 그녀에게 빨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내색 한 번도 안했다. 그 영혼의 대화를 지키고 아끼기위해서... 거기다가... 대구 애인을 계속 만나고 있었고 그녀를 배신(?) 할 수도 없었다. 이를테면 대구의 애인이랑은 <현실적인 사랑>이고 민수와의 사랑은 <영혼과의 교감>이랄까, 라고 할까...
어떻던 현실적으로는 그녀를 떠나서 민수에게 갈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대구에 있고 그녀는 서울에 있으므로...
그런 어느 날. 거의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강현희가 찾아왔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지난 번에는 날 만나지도 못하고 올라갔고 그담에 편지가 두어통 왔지만 답장을 안했다.
내 그림작업을 보고 싶어서 내려 왔었다던가.
하여간 이 얘기 저 얘기... 내려오면서 창밖으로 본 풍경 얘기 옆자리의 아줌마 얘기... 뭐 그런 사소한 얘기들을 써 보냈었다. 그래서 딱히 그녀에게는 할 말이 없어서 답장을 안보냈고 민수랑 주고 받는 우리들의 펜팔이 아무래도 많이 걸렸었다. 지금은 방학이라 집으로 보내지만 그 땐 학교로 편지를 보냈으므로 어쩌면 현희가 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 현희씨! 왠일로 여기까지...?"
"편지 답장 안해 주시니 직접 왔죠~ 그림작업 많이 하셨어요?"
"아 아, 미안해요. 좀 바빠가지구... 들어와요."
"아저씨? 아저씨라고 불러야지... 아저씨니까... 예비역이잖아요 그쵸? 바쁘다고요? 아저씨도 뭐 으X으샤 하는데, 데모 같은데 가요? 예비역도 운동권 많더라고요?"
"..."
"뭐, 그림작업 보면 전혀 아닌것 같고..."
"난 정치랑은 거리가 멀어요"
"풋~ 다행이다."
"뭐가요? 뭐가 다행인데? 애인이 운동권인가?"
"아저씨 작품은 초현실이나 오브제 그런 거라..."
그녀는 마치 오래전부터 들락거린 사람처럼 화실 가운데 의자에 앉더니 이런 저런 얘길 하면서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근데 얘는 이게 뭐야 지금...얘로 인해 좀 난감해 질 수도 있겠다는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젊은날의 肖 像 - 언니의 주특기>
이상했다. 왜 내겐 여자관계(?)가 복잡하게 돌아갈까. 하나를 만나서 끝나면 또 하나를 차례대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고등학교 때. 나는 <성희>라는 여자애가 무조건 좋아서 그녀를 꼬셔서 사귀고 있었다. 그 당시엔 걔도 날 사랑한다고 했다. 걔랑 <나자리노>라는 영화를 같이 봤는데 그 뒤로 걔가 날 <나자리노>라 불렀다. 나는 걔를 그 영화 속의 여주인공 이름 <그리셀다>라 불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무렵 걔는 나의 단짝 친구를 좋아했었다고 했다. 나랑 만나면서도 내 친구를 겻눈질 한 거였다. 그 사실을 내게 알려준 여자아이는 <영순> 이었다. 영순이는 무조건 날 좋아한 여자아이다. 내가 아무리 저를 싫어하고 구박하고 다른 여자애 만난 얘길해도 온갖 자존심 상하는 얘길해도 막무가내로 날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여자아이... <민숙>
민숙이는 아주 얼굴은 못생겼지만 유능한 문학소녀였다. 걔는 매일같이 내게 문장력이 대단한 편지를 보내고
헤르만 헷세의 시나 휘트먼의 시등을 예쁜 편지지에 예서체로 정성껏 써서 보내곤 했다. 민숙이는 내게 중단편 문학집 등, 많은 책을 선물했다. 어쩌면 걔가 선물한 책들 때문에 나도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그래서 나는 민숙이를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문학적인 감성이 좋아서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다. <플라토닉 러브>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여자애들이 다들 서로 친구사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복잡했었다. 결국은 날 막무가내로 좋아한 <영순> 때문에 엉망으로 되어버렸다.
지금. 서울에서 반나절도 좋게 걸려 대구까지 나를 보러 내려온 이 강현희라는 존재가 언뜻 옛날의 영순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날 엉망으로 만들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민수랑 나와의 사이에서 말이다. 커피를 만들고... 오디오를 켜서 레코드를 올렸다. 그녀는 내 그림을 하나하나 꺼집어 내어 감상을 했고 책꽂이에 꽂혀있던 사진 앨범을 한장한장 끝까지 보았고 거기에 등장하는 내 주변 사람들을 궁금해 했다.
"고속버스 타고 왔나? 올라가는 표는 예매하고?"
그녀는 22살 밖에 안되어서 말을 놓기로 했다. 그게 나를 더 편하게 할것 같아서 얼른 말을 내려버렸다.
"아뇨. 예매 안했는데..."
"저녁 7시 반이 막차일 텐데? 지금 벌써 4시가 넘었는데 어쩔려고?"
"아저씨 지금 절 막 쫓아 보낼려고 안달난 사람 같애요. 고속버스 못타면 기차로 가면 되잖아요?
시내 나가서 저녁 맛있는거나 좀 사주세요."
"..."
할 수 없이 나는 그녀를 데리고 시내로 나갔다. 화랑 몇군데를 돌아다니다가 대구백화점 뒤에 있는 대학생들이 잘가는 레스토랑에 가서 돈까스를 사먹였다. 기차도 밤 10시가 넘으면 없는 걸로 알았기 때문에 나는 저녁을 먹자마자 택시 태워서 동대구역으로 데리고 갔다. 대구역으로 걸어서 갈 수도 있었지만 대구 시내는 좁아서 금방 친구녀석들이나 후배들에게 걸릴 수도 있었기에 그녀랑 같이 걷기 싫었다.
마침 주말도 아니고 해서 표는 살 수 있었다. 대합실 의자에 앉아 기차시간을 기다리는데 그녀가 그랬다.
"아저씨 새해, 내달 초에 서울에서 전시회 있다면서요?"
"응? 어떻게 알았어?"
"민수 언니가요 얘기하던데요? 언니가요,
그 때 아저씨 올라오니까 우리들 한테 다 모이라고 집합 걸던데요 뭐."
"..."
"며칠 안남았어요."
"민수 언니가 현희 여기 내려온거 알아?"
"아뇨, 얘기 안했어요. 걱정돼요? 민수 언니 알까봐?"
"응... 아니 그게 아니라..."
"아저씨... 민수 언니한테는 편지 보내면서 저 한테는 왜 안보내요?"
"응? ...."
"아저씨 민수 언니 좋아해요?"
"아냐~ 그냥 편지 왔다갔다 그러는 거야. 펜팔친구지..."
"아저씨! 그 언니 재미있는 언니다?"
"무슨? 어떻게?"
"지난 번에 나이트에서 그 언니가 아저씨 한테 키스 했잖아요? 그거 그 언니 주특기에요.
술마시면 꼭 남자 하나 그렇게 골라서 안겨버려요."
"..."
"그 때 우리 다 있죠? 저 아저씨 오늘 밥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얼마나 웃었다구요."
<젊은날의 肖 像 - 밤...>
해가 바뀌었다. 민수나 현희, 나도... 모두가 졸업반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새해 벽두부터 <팀스피리트85> 한미합동훈련에 북한을 참관하도록 제의하겠다고 난리였다.
웃기는 짬뽕들이었다. 여전히 지하철역 입구나 대학가 지하도 출입구에는 사복경찰이 깔려 있었다. 신경쓰지 말자, 하면서도 기분은 좋지않았던 그런 시절이었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예술가니까 예술만 하면 된다, 라고 자위했다. 그런 날들이었지만 난, 서울 인사동이나 동숭동 화랑에서 그룹전을 자주 가졌다. 그럴 때마다 민수가 오픈식 때 맞춰서 나왔다. 민수가 나와서 좋았다. 가끔 강현희가 같이 나오기도 했다.
우리는 인사동 보다는 주로 사간동에 있는 자주가던 막걸리 집으로 가서 <미술>을 <문학>을.... 불확실한 <미래>를 안주 삼아 많은 얘기를 했다. 아쉽게도 그녀가 술을 마셔도 내게 더이상 키스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 때마다 현희가 술에 취해서 문제였다.
그렇게 또 헤어지면... 내가 내려가서 편지를 보냈다.
지금도 기억에 남지만 칼릴지브란 얘기를 그녀에게 많이 했다. 칼릴지브란은 내 정신적 스승이었으니까.
<예언자> <보여줄 수 있는 사랑는 너무 작습니다> 그런 책들 얘기를 했고,그녀는 니이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 대해서 내게 많은 얘기를 했다. 그 당시 우리학교에서는 <교양도서>를 정해서 1학점을 이수해야 했었는데 그 덕분으로 나는 <짜라....> 를 택하기도 했었다. 어려운 내용이어서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고등학교 때... 내게 데미안을 얘기하고 시를 보내던 민숙이 나를 쫓아다니던 영순이 그러다 내게 겨울강변에서 안겼던 영순이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성희...
대학 때에도 현실적인 사랑과 플라토닉 러브... 그 사이에 끼어서 방황하는 사랑...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사랑... 그것이 대학 졸업반이던 나와 우리들의 초상이었던가.
가을이 되었다.
전두환은 이순자를 데리고 5박6일 동안이나 미국에 가서 레이건을 만나고 왔다. 그 앞에 정권의 꼴뚜기들이 도열해있는 그림이 우스꽝스러웠다. 대학생들은 다 잡아 가둬놓고 미국에 가서는 안보협력을 합의하고 왔다네.
안보씩이나?
...
그 가을. 민수네 학교에서 <졸업작품전>이 열린다고 올라오라고 했다.
서울에 올라갔다. 졸업작품전을 보고... 내가 올라 왔다고 대구에 왔던 그 팀들이 다 모였다. 그녀의 학교 앞에서 저녁을 먹고 학사주점으로 가서 신나게 마셨다. 그래서 민수가 나를 챙기느라 옆에 앉으면.... 오른쪽에 민수가 앉으면 재빨리 현희가 왼쪽으로 앉았다.
그렇게 밤늦도록 마시다 보니 어느 새 하나 둘씩 들어가고 민수와 현희만 끝까지 남아 있었다.
"잘 마셨고... 이제 다들 집으로 가야지?"
"형은 어떻게 할거에요?"
민수가 그랬다.
"난 등촌동에 친척집 있으니까 그리로 가면 돼요."
"그래요? 그럼 택시 잡아드릴께요. 너 현희는
나랑 같이 가다가 내리면 되지"
"아냐, 언니 언니 먼저가. 난 아저씨랑 얘기 좀 할래."
강현희가 상기된 얼굴로 내 팔을 끌며 그랬다.
"나중에 얘기 하지 뭐. 들어가 그냥... 술도 취했잖아?"
현희는 끝내 민수를 차태워 보내더니 남았다. 나는 어떻던 그녀랑 헤어지고 싶었다. 솔직히 그녀가 성가셨다.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닐 뿐더러 민수의 후배라서...
나는 민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현실적인 모습도 사랑하고 있었지만 이지적이고 학구적이고... 그녀가 가진 예술가적 기질과 예민하고 섬세한 그녀의 감성에 마냥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랑은 플라토닉 사랑이었다.
"다음에 얘기하고 집에 가지?"
나는 택시를 잡고서 현희를 태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타지 않고 버텼다. 그래서 나는 그럼 나 먼저 가겠다며 그 택시를 탔다. 그런데 그녀도 따라서 타버렸다.
"아저씨 등촌동이라고 했죠? 그럼 가다가 종로에서 내릴께요."
"등촌동이면 종로로는 안가는데?"
택시 기사가 그랬다.
참 대책이 안섰다. 나는 등촌동으로 간다고 하고서 그 근처에서 내려 여관에서 잘 생각을 했었다.
등촌동에 친척이 살고 있긴 했지만 갈 생각은 않았던 것이다. 종로 2가 에서 같이 내렸다.
"이제 정말 택시 잡아 줄테니 먼저 가."
"저 때문에 내렸어요?"
"너 술 많이 취했구나 이제보니?"
"저기까지만 좀 걸어가요. 아저씨..."
우리는 종로 2가에서 광화문까지 걸어갔다. 별 얘긴 안했다. 시간은 1시가 넘어 2시가 다 되어갔다.
"너! 안갈래? 정말?"
"그래요. 아저씨 먼저 가세요."
"..."
"저, 저기 행촌동이거든요. 다 왔어요."
"..."
"조금만 가면 돼요. 아저씨 이제 가요 그럼."
"그래 그럼 잘가. 가보라구 어서..."
"..."
"가! 가라 어서..."
"아저씨, 왜 택시 안잡어요?"
"..."
"예?"
"참, 나. 너땜에 너무 늦어서 친척집에 못가잖아!! 됐어?"
"..."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교보빌딩 뒤 어디 허름한 여관으로 갔다. 그녀가 기어이 가지 않고 쫓아왔다. 무슨 생각인지... 술이 취해서인지... 길에서 마냥 그러고 있을 수도 없고...
<젊은날의 肖 像 - 저 지금 동거해요...>
여관방의 키를 받았다.
"이제 가! 여관 잡아주고 간다며?"
"참, 아저씬 되게 구박해!"
여관 아줌마가 이상한듯 쳐다봤다. 남녀가 뒤바뀐 것 같으니까... 아무리 맘에 안들어도 같이 잘 수는 있다. 현희도 따지고 보면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몸매가 좀 문제고... 그것도 순전히 내 기준에서 그렇다. 어른들이 보면 두리뭉실하고 통통한 괜찮은 신부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수 귀에라도 들어 간다면... 그건 안되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일로만으로도 오해할 수 있는데 더 진행된다는 것은 안될 일이 아닌가.
"방에서 잠깐만 얘기하다 가면 안돼요?"
"야! 너? 철이 없는 거냐? 아님 뭐야 도대체? 내가 너랑 자랴? 너 안가면 내가 갈거야.
너가 여기서 자든 말든!!"
"알았어요. 알았어요. 갈께요. 낼 몇시에 일어날 거에요?"
"몰라!! 그냥 눈뜨면 일어나는 거지... 왜?"
"낼 아저씨 아침 사드릴려구요."
그렇게 해서 현희는 갔고 다음날 나는 서둘러 대구로 내려 왔다. 나중에 현희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현희는 다음날 오전에 그 여관으로 날 찾아 왔었다고 했다. 하여간에...
그 뒤로 내 졸업작품전이 있었다. 민수에게 초대장을 보냈는데 민수는 내려오지 않았다. 좀 복잡한 일이 있었노라고 그 뒤에 편지가 왔었다. 그리고 편지도 뜸해졌다. 정말 뭔가 복잡한 일이 있는 것 같아서... 그녀가 그 일이 정리되면 다시 편지하겠거니 생각했다.
겨울방학이 되었다. 4학년 2학기의 겨울방학... 의미가 없다.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해프닝이나 설치미술 같은 별 해괴한 작품을 하는 내게 있어서는 그냥 바로 <실업자> 가 아닌가. 연말의 세기말같은 불안과 초조의 시간들이 고장난 괘종시계의 초침처럼 흘렀다. 그리고... 세상은 언제부터인지 내게서 등을 돌린채 자기네들끼리 크리스마스다 망년회다 들떠 있었다. 꼴사납게도....
민수의 침묵은 생각보다 깊고 오래갔다.
민수.그녀는 내게 무슨 존재일까. 물론 대구에서 애인을 만나고 있지만그래서 말도 안되는 모순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섹스를 안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라도 애인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또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
섹스?
양심?
양심을 팔면... 양다리는 언제나 가능했다. 젠장.
양심보단 끊임없이 불끈거리는 욕정이 우선이었지.
그래. 비겁한 모순이었고 비열한 인간성이었다.
그랬다. 그것과 상관없이 민수는 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민수랑 섹스하는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민수랑은 다른 여자에게서 처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아니고 싶었다. 비록 내가 그녀에게 입술을 뺏기긴 했지만.
영혼의 사랑...
내가 그녀에게 입버릇처럼 얘기한 칼릴지브란과 메리헤스켈의 사랑... 키에르 케골과 레기네 올센의 사랑...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영적인 사랑... 그런 것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죽도록 보고 싶었다.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전화는 안했다. 우린 전화로 대활 한 적이 없었다.
해가 바뀌고... 연초가 지나고 나는 서울로 올라갔다.
어떻던 그저 돌아다닐 수는 없었기에 우선 미술 잡지사에 있는 선배한테 얘기해서 홍대 앞의 입시미술학원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그래서 서교동 <산울림 소극장> 바로 옆집에 잠만 자는 옥탑방을 얻었다.
그렇게 대충 열흘 정도가 지난 뒤 나는 현희네 집으로 전화를 했다.
"우와!! 아저씨가 전화를 다 하네? 잘 지내세요?"
"나 지금 홍대 앞인데... 시간 좀 있어?"
"홍대? 서울 왔단 말예요?"
그렇게 해서 현희를 만났다.
"민수는 뭐해?"
"치, 민수언니 물어볼려고 저 만나자 그랬던 거에요?"
"짜식이... "
"저도 통 못만났어요. 연락 잘 안돼.
집에 잘 없더라구요. 학교 실기실에서 짐도 안빼고... 그대로던데..."
"이리 저리 연락해봐서 학원으로 전화 좀 해달라고 해줘."
"안 해. 아저씨는 되게 재수야!!"
"얌마. 꼭 연락할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그런게 있어, 하여간..."
며칠 뒤 민수가 전화를 했다. 홍대 앞 <흙과 두 남자>에서 만났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해서 걱정되었었는데 생각보단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그동안 연락 못해서 미안하다고도 했다. 덤덤해 보였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내가 이상했다.
격정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만감이 교차했지만.... 억누르고 술 한잔 하면서 점점 나도 덤덤한 모습으로 보이도록 노력했다. 제법 술을 마셨을 때... 그녀가 그랬다.
"저 지금 동거해요."
"..."
그랬다. 또록또록...
"저 지금 동거해요. 어떤 애랑요."
"저 지금 동거해요. 어떤 애랑요."
그랬다. 또록또록....
<젊은날의 肖 像 - 다시는 똥폼 잡나 봐라.>
언젠가 뒤져본 그 시절 내 대학노트에는 이런 낙서가 있었다.
<... 최루가스 문드러져 내린 눈물에
세수를 하고 아아
뻥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청계고가를 떠다녀야 했다.
희미한 공중전화 BOX에 매달려 혼선으로 떠돌아다니던
깡마른 햇볕을 ?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뒤
수만의 입자로 불어나는 희디흰
눈발로 일어서야 했다.>
내가 써놓고도 사실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젠장... 플라토닉 러브고 영혼의 사랑이고 나발이고 다 무의미 했다. 그 당시에는.... 다시는 내가 그렇게 똥폼 안잡는다 다짐했다. 그저 나라는 인간은 동물적인 본능으로 그냥 만나자마자 탐색 좀 하다가 본론으로 가야 했다.
하긴 좀 깊이 생각해보면 치사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바로 옆의 애인은 홀라당 벗겨서 온갖 데를 다 들춰보면서 유희를 즐기고도 멀리있는 또다른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는 영혼이네 플라토닉이네 문학이네 철학이네 하면서
똥폼 잡았으니 그랬으니 벌받은 거지... 생긴대로 놀았어야 했는데... 이 여자 저 여자 붙잡아 두고 소유하려 했고... 사랑을 빙자한 집착으로 일관했으니... 당연히 벌받은 거지...
민수.그녀는 그렇게 해서 내곁을 홀연히 떠났다.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린 운동권 학생에게 가버렸다. 젠장...
내가 어울리지도 않는 칼릴지브란이네 어쩌네 얄팍한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럴 즈음에 그녀는 도저히 자신이 돌봐주지 않으면, 숨겨주지 않으면 금방 잡혀가 죽어버릴 것 같은... 남자애를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를 돌봐주러 가버린 것이다. 뭐 할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운동권 남자에게 가느냐고 하나?
"내가 아님 걔는 아마 돌아버릴거에요" 하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내가 철학이나 문학 레포트를 쓰듯 보낸 수백통의 편지는... 빌어먹을 쥐뿔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똥폼 잡지말고 진작에 사랑한다고 할것을... 그렇게 고백이라도 할걸. 대구의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그녀에게 순정을 바치겠노라 고백하고 그래서 그녀에게 갈 걸... 그런 가시적인 노력은 하지도 않고 뜬구름 잡는 플라토닉을 운운했으니...
그래도...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 있어서 그것이 사랑했던 여자를 가장 깔끔하게 보낸 것이었다. 그렇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 않았던 유일한 <헤어짐>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내가 자신을 끔찍히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 여한은 없었다. 그리고 또한, 맘이 떠난 여자를 붙들고서 치사하게 협박을 하거나... 치졸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서 애걸복걸하지 않았던 유일한 <헤어짐>이었다. 어떻던 <남자 답게> 한 여자를 떠나보낸 것이었다. 기분은 개떡같았지만.
양다리 걸치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 그래 알았어. 다시는 내가 똥폼 잡나 봐라... 그랬었다. 그때.
<다음에 계속.... >
대학 3학년 때. 내 나이 27 살... 늦었다.
군대 가기 전에 다니던 학교가 맘에 안들어 때려치고 군대 말년에 공부해서 군인 신분으로 학력고사를 보고
제대하면서 다행히 내가 가고 싶어했던 대학에 합격했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많았다. 27 살에 대학 3학년이었으니....
그해 가을에 우리학교에서 <전국대학미술전람회>가 열렸다. 대구에서 열리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미술전 준비위원이 되었고 전국에서 모여드는 학생들의 미술작품을 접수하는 곳을 맡게 되었다.
그녀를 만난것은 거기서 였다.
접수 마감 날 이미 마감시간을 넘긴 늦은 시간에 한무리 여학생들이 우루루 들이닥쳤다. 서울에서 내려온 S 여대 미대 학생들이었다. 그녀는 그 사이에 그렇게 끼어있었다. 그녀들 일행은 15명 정도...
시끌벅적하게 접수를 마치고 나가면서 그녀들 중 누군가가 내게 쭈볏쭈볏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죄송하지만 오늘 너무 늦어서 못올라가서요. 자고 낼 갈려고 하는데요~~~
대구서 좀 놀만한 곳 좀 소개해 주시면 안될까요?"
"..... 글쎄요? 어디를 소개해 드리나? 밤인데..."
"언제 마치죠? 이 접수요?"
"뭐 이제 끝날 때가 된것 같기도.... 8시 반이니까 1시간 30 분이나 오바했는데..."
"우리요. 이 학교 한번 둘러보구 올테니까요 약속없으면 그때 같이 좀 가세요. 우리가 모실께요. 캡틴으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녀들 틈사이로 내가 좋아하는 긴 생머리에다 날씬하고 이지적이고...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그녀... 아주 짧은 시간동안이었지만 뚜렷이 그녀의 이지적인 이미지에 현혹되어 버렸다.
그렇다. 내 젊은 날 내 또하나의 가슴시린 사랑의 이야기는 그녀의 이지적인 눈동자와 마주치면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을 날 밤... 그렇게...
< 젊은날의 肖 像 - 첫키스 >
우리는.. 택시 몇대에 나눠타고 대구 시내 나이트 클럽으로 갔다.
알고 봤더니 내가 맘에 들어한 그녀가 제일 언니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학교를 늦게 가서 현재 24 살이나 되었다. 나랑은 3 살 차이... 궁합은 딱인데....
그때 나는 우리과 선배랑 결혼 생각을 할 정도로 진하게? 사귀고 있었다.
15명이나 되는 여자아이들은 나이트에 들어가자 마자 맥주도 나오기 전에 벌써 몇몇은 플로우어에 나가서 흔들고 있었다. 이어서 맥주 몇잔 씩 돌아가고 뭐 난리도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그녀가 내 옆으로 오더니 젤 언니로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통성명을 하자고 그랬다.
그녀의 이름은 민수. 그렇게 시끄러움 속에서 그녀는 뭐라고 좀 얘기를 걸어오고 맥주도 권하고 해서 같이 서너잔을 마셨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여자아이가 생각지도 않게 곁에서 그러니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같이 플로우어로 나가자고 해서 같이 나갔다. 나는 그다지 춤은 못추는 편이지만뭐 그녀도 다분히 춤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나이트에 가보면 항상 그렇듯이 디스코에서 블루스 타임으로 바뀌면 거의가 우르르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잡았다. 블루스 타임에...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블루스라는 게 그냥 여자 어깨에 손얹고
대충 모양만 내면 되니까... 그녀도 그런것 같고... 그러다 다시 디스코 타임이되어서 같이 좀 흔들다가 나는 들어 왔다. 15명의 여자들 틈새에서 뭐 아무리 남자라도 분위기라는 게 있어서...
자리로 들어와서 맥주 좀 마시고 있는데 그녀도 따라 들어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왜 놀지 않고 들어왔냐 면서 맥주를 권했다. 그렇게 여자애들 춤추는 것 보면서 앉아 있는데 그때. 정말로 느닷없이 그녀가 나를 껴안더니 내게 키스를 했다. 참,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얼떨떨 했다. 뿌리치지도 못하고(?) 난 그저 기분좋게 당하고만 있었다. 길고 긴 키스가 이어졌다. 그 복잡한 나이트에서 자기 친구들이 다 보는 곳에서 여자가 남자를 성폭행(?)하다니....
그녀와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젊은날의 肖 像 - 문학적인 펜팔...>
어릴때 꿈이 많았다. 우선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책을 사모아 읽었다. 책벌레인 미술부 선배의 영향이긴 했지만한때는 내방에 몇 백권이나 쌓여있었다. 그렇게 사긴했지만 어려워서 읽다가 만 것도 있고... 정독을 못하고 겉핥기도 했었다. 국문학과로 가고 싶었지만 성적이 안나왔다.
젠장, 문학가가 되는데 수학이나 과학이나 물상, 생물, 기술이 왜 필요하며 거기다가 우리나라 말로 쓸건데
영어는 왜 필요하며 제 2 외국어는 왜 필요했는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당시 <스크린>이라는 영화 잡지도 정기구독했었다. 영화 관련 책도 수 십권 사서 읽었다. 연극영화과에 가려고 해도 성적이 안되었다. 그래서 미대로 갔다. 이렇게 얘기하니 마치 미대는 공부 못해도 가는 걸로 생각할까? 하긴 뭐, 성적이 좀 안나와도 그림 잘 그리면 들어가니까. 대학 들어가서 공분 않고 연애만 했을걸로 알까? 내 자랑이 아니라 대학 8학기동안 1학년 1학기 빼고 나머지 7학기를 장학생으로 다녔다. 졸업시 전체 평점이 4.5 만점에 3.98이나 됐으니 100 점으로 환산하면 90점에 가깝다. 그러니 연애만 한게 아니라는 건데... 이런, 주접을 떨었군.
하여간 난 문학이 좋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문학적인 여자를 만나서 문학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렇게 한 번 사귀고 싶었다. 민수는 내가 바라던 문학적인 여자아이였다. 나이트에서 난데없이 내 입술을 빼앗고는...그녀가 앞장서서 서로들 갖고 있던 여관비까지 달달모아서 술 마시더니 드디어는 전부 내 화실에 가서 자겠다고 했다. 참 그녀를 비롯해서 다들 대책이 안서는 여자아이들이었다.
자정을 훨씬 넘기고갈 때 처럼 택시에 몇몇씩 나눠타고 내 화실로 돌아왔다. 조그만 화실에 15명의 여자들이 들이닥쳤으니 난리도 아니었다.술에 취한 애들은 구석구석 꼬불쳐 드러누웠고누울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 애들은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민수는 졸지도 않고 술에 취한 채 내곁에 앉아 휘적휘적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그 밤은 아수라장으로 지나갔고 다음 날 오전에 그녀들은 올라갔다.
나는 그녀들이 올라간 뒤로 민수, 그녀를 좀 안좋게 생각했다. 뭐 좋게 얘기하자면 자유주의자? 나쁘게 얘기하면 홀랑 까진 아이? 그렇게 이지적인 얼굴을 해가지고 그러다니 인지부조화 였다.
그런데 그녀로부터 편지가 왔다. 실례가 많았다라고 시작한 편지의 내용이 상당히 감성적이고 문학적이었다.
내 화실에 걸려있던 초기의 내 드로잉 작품이 칼릴지브란의 드로잉같은 터치였다는 얘기로부터 미술에 관한 얘기들은 평론가 수준이었다. 술에 떡이 되어 처음보는 남자에게 키스를 퍼붓던 여자여서 안좋게 생각했는데 놀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나는 꼬박꼬박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우리는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전혜린이 왜 그토록 사랑하던 딸 정화를 두고 31 살의 나이로 자살을 해야 했었는지를... 그녀의 독일 유학생활, 슈바빙과 그녀가 얘기한 바하만과 루이제 린저와 헤르만 헷세와 데미안에 대해서...
그녀도 나도 시를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는 시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 서슬퍼른 5공 군사정권에 맞서 시로 저항했던 민중시인들 얘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같은 그 당시의 문학에 대해서 많은 공감을 같이 했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녀는 제법 관심이 많았다.
그 시절...사실은 암담했다. 1983년 12월에 전두환 정권은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했었고 수감되었던 학생들과 교수들이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주요 대학에 배치된 경찰들 또한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하고도 경찰들의 옷만 사복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대학에 프락치의 투입방식은 더욱 자연스럽고 은밀해졌다. 그러다 그 가을에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발생했고 민정당사 농성으로 이어졌다.
예술계도 다들 뒤숭숭했다. 민중미술가들이 하나 둘 저마다 강렬한 붓질로 저항했고 당연히 시인들도 무용가도 저항했다. 하지만 난 그 쪽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젠장. 내겐 그림과 사랑이 전부 였던가?
그 때 나는... 그녀로부터 내 감성을 확인했으며 그녀의 신비주의 예술가적 언어에 매료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권력의 불의에 대해 분개할 줄 아는그녀의 <의식>에 대해서도 매료당하고 있었다.
그 해 가을 학기가 다 갈 때까지 우리들의 펜팔(?)은 계속되었다.
그런 어느 날 미술학원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늦게 화실로 돌아왔더니 화실 문에 메모가 하나 붙어 있었다.
<기다리다가 차 시간이 되어서 못보고 그냥 올라 갑니다. 편지 드릴께요. 강현희...>
강현희?
그랬다. 그녀랑 그때 같이 내려온 아이중에 하나다. 조금 뚱뚱하고 좀 그냥 그렇게 생긴 아이다.
그녀가 왜 내려왔을까? 서울에서 여기까지....
<젊은날의 肖 像 - 플라토닉 러브... 그 사이에>
겨울방학이 되었다.
1984년이 저물고 있었다. 1984...조지오웰이 예견한 1984년. 그의 얘기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 것처럼 국내 정세는 암흑 그 자체였다. 조지오웰은 이성과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을 희망했다고 하는데... 그럼...그해 첫날에 발표된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컨셉이 좀 어긋났던건가? 어떻던 겨울방학이 되었다. 두어달 동안에 민수에게 내가 보낸 편지의 일련 번호가 벌써 일백단위가 넘었다.
나는 누구에게 마음먹고 편지를 보내면 항상 일련번호를 매기곤 했다.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글자로...
하나, 둘, 셋....
쉰 하나, 쉰둘....
일흔 하나, 일흔 둘... 이런 식이다.
나는 다음 편지가 그냥 다시 1번으로 시작되는 것 보다는 일련번호를 주욱 이어 나가므로써 상대에게 정성들여 편지를 보낸다는 것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글쎄 뭐랄까...금방 끝내는 그런 대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고 그러면서 자연히 상대방도 차곡차곡 일련번호대로 편지를 묶게되어 그것을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도록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라고 생각했다. 또 그러면 은근히 <기다림>을 가질 거라고 일련번호대로 간추려 모아가는 어떤 기다림을 주는 것 그런 작은 기다림이 모아져서 큰 기다림이 될 거라 생각했다. 편집증인가?
그렇게 시작된 민수와 나의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대화는 일백 열 쯤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서서히 그녀에게 빨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내색 한 번도 안했다. 그 영혼의 대화를 지키고 아끼기위해서... 거기다가... 대구 애인을 계속 만나고 있었고 그녀를 배신(?) 할 수도 없었다. 이를테면 대구의 애인이랑은 <현실적인 사랑>이고 민수와의 사랑은 <영혼과의 교감>이랄까, 라고 할까...
어떻던 현실적으로는 그녀를 떠나서 민수에게 갈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대구에 있고 그녀는 서울에 있으므로...
그런 어느 날. 거의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강현희가 찾아왔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지난 번에는 날 만나지도 못하고 올라갔고 그담에 편지가 두어통 왔지만 답장을 안했다.
내 그림작업을 보고 싶어서 내려 왔었다던가.
하여간 이 얘기 저 얘기... 내려오면서 창밖으로 본 풍경 얘기 옆자리의 아줌마 얘기... 뭐 그런 사소한 얘기들을 써 보냈었다. 그래서 딱히 그녀에게는 할 말이 없어서 답장을 안보냈고 민수랑 주고 받는 우리들의 펜팔이 아무래도 많이 걸렸었다. 지금은 방학이라 집으로 보내지만 그 땐 학교로 편지를 보냈으므로 어쩌면 현희가 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 현희씨! 왠일로 여기까지...?"
"편지 답장 안해 주시니 직접 왔죠~ 그림작업 많이 하셨어요?"
"아 아, 미안해요. 좀 바빠가지구... 들어와요."
"아저씨? 아저씨라고 불러야지... 아저씨니까... 예비역이잖아요 그쵸? 바쁘다고요? 아저씨도 뭐 으X으샤 하는데, 데모 같은데 가요? 예비역도 운동권 많더라고요?"
"..."
"뭐, 그림작업 보면 전혀 아닌것 같고..."
"난 정치랑은 거리가 멀어요"
"풋~ 다행이다."
"뭐가요? 뭐가 다행인데? 애인이 운동권인가?"
"아저씨 작품은 초현실이나 오브제 그런 거라..."
그녀는 마치 오래전부터 들락거린 사람처럼 화실 가운데 의자에 앉더니 이런 저런 얘길 하면서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근데 얘는 이게 뭐야 지금...얘로 인해 좀 난감해 질 수도 있겠다는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젊은날의 肖 像 - 언니의 주특기>
이상했다. 왜 내겐 여자관계(?)가 복잡하게 돌아갈까. 하나를 만나서 끝나면 또 하나를 차례대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고등학교 때. 나는 <성희>라는 여자애가 무조건 좋아서 그녀를 꼬셔서 사귀고 있었다. 그 당시엔 걔도 날 사랑한다고 했다. 걔랑 <나자리노>라는 영화를 같이 봤는데 그 뒤로 걔가 날 <나자리노>라 불렀다. 나는 걔를 그 영화 속의 여주인공 이름 <그리셀다>라 불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무렵 걔는 나의 단짝 친구를 좋아했었다고 했다. 나랑 만나면서도 내 친구를 겻눈질 한 거였다. 그 사실을 내게 알려준 여자아이는 <영순> 이었다. 영순이는 무조건 날 좋아한 여자아이다. 내가 아무리 저를 싫어하고 구박하고 다른 여자애 만난 얘길해도 온갖 자존심 상하는 얘길해도 막무가내로 날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여자아이... <민숙>
민숙이는 아주 얼굴은 못생겼지만 유능한 문학소녀였다. 걔는 매일같이 내게 문장력이 대단한 편지를 보내고
헤르만 헷세의 시나 휘트먼의 시등을 예쁜 편지지에 예서체로 정성껏 써서 보내곤 했다. 민숙이는 내게 중단편 문학집 등, 많은 책을 선물했다. 어쩌면 걔가 선물한 책들 때문에 나도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그래서 나는 민숙이를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문학적인 감성이 좋아서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다. <플라토닉 러브>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여자애들이 다들 서로 친구사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복잡했었다. 결국은 날 막무가내로 좋아한 <영순> 때문에 엉망으로 되어버렸다.
지금. 서울에서 반나절도 좋게 걸려 대구까지 나를 보러 내려온 이 강현희라는 존재가 언뜻 옛날의 영순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날 엉망으로 만들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민수랑 나와의 사이에서 말이다. 커피를 만들고... 오디오를 켜서 레코드를 올렸다. 그녀는 내 그림을 하나하나 꺼집어 내어 감상을 했고 책꽂이에 꽂혀있던 사진 앨범을 한장한장 끝까지 보았고 거기에 등장하는 내 주변 사람들을 궁금해 했다.
"고속버스 타고 왔나? 올라가는 표는 예매하고?"
그녀는 22살 밖에 안되어서 말을 놓기로 했다. 그게 나를 더 편하게 할것 같아서 얼른 말을 내려버렸다.
"아뇨. 예매 안했는데..."
"저녁 7시 반이 막차일 텐데? 지금 벌써 4시가 넘었는데 어쩔려고?"
"아저씨 지금 절 막 쫓아 보낼려고 안달난 사람 같애요. 고속버스 못타면 기차로 가면 되잖아요?
시내 나가서 저녁 맛있는거나 좀 사주세요."
"..."
할 수 없이 나는 그녀를 데리고 시내로 나갔다. 화랑 몇군데를 돌아다니다가 대구백화점 뒤에 있는 대학생들이 잘가는 레스토랑에 가서 돈까스를 사먹였다. 기차도 밤 10시가 넘으면 없는 걸로 알았기 때문에 나는 저녁을 먹자마자 택시 태워서 동대구역으로 데리고 갔다. 대구역으로 걸어서 갈 수도 있었지만 대구 시내는 좁아서 금방 친구녀석들이나 후배들에게 걸릴 수도 있었기에 그녀랑 같이 걷기 싫었다.
마침 주말도 아니고 해서 표는 살 수 있었다. 대합실 의자에 앉아 기차시간을 기다리는데 그녀가 그랬다.
"아저씨 새해, 내달 초에 서울에서 전시회 있다면서요?"
"응? 어떻게 알았어?"
"민수 언니가요 얘기하던데요? 언니가요,
그 때 아저씨 올라오니까 우리들 한테 다 모이라고 집합 걸던데요 뭐."
"..."
"며칠 안남았어요."
"민수 언니가 현희 여기 내려온거 알아?"
"아뇨, 얘기 안했어요. 걱정돼요? 민수 언니 알까봐?"
"응... 아니 그게 아니라..."
"아저씨... 민수 언니한테는 편지 보내면서 저 한테는 왜 안보내요?"
"응? ...."
"아저씨 민수 언니 좋아해요?"
"아냐~ 그냥 편지 왔다갔다 그러는 거야. 펜팔친구지..."
"아저씨! 그 언니 재미있는 언니다?"
"무슨? 어떻게?"
"지난 번에 나이트에서 그 언니가 아저씨 한테 키스 했잖아요? 그거 그 언니 주특기에요.
술마시면 꼭 남자 하나 그렇게 골라서 안겨버려요."
"..."
"그 때 우리 다 있죠? 저 아저씨 오늘 밥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얼마나 웃었다구요."
<젊은날의 肖 像 - 밤...>
해가 바뀌었다. 민수나 현희, 나도... 모두가 졸업반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새해 벽두부터 <팀스피리트85> 한미합동훈련에 북한을 참관하도록 제의하겠다고 난리였다.
웃기는 짬뽕들이었다. 여전히 지하철역 입구나 대학가 지하도 출입구에는 사복경찰이 깔려 있었다. 신경쓰지 말자, 하면서도 기분은 좋지않았던 그런 시절이었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예술가니까 예술만 하면 된다, 라고 자위했다. 그런 날들이었지만 난, 서울 인사동이나 동숭동 화랑에서 그룹전을 자주 가졌다. 그럴 때마다 민수가 오픈식 때 맞춰서 나왔다. 민수가 나와서 좋았다. 가끔 강현희가 같이 나오기도 했다.
우리는 인사동 보다는 주로 사간동에 있는 자주가던 막걸리 집으로 가서 <미술>을 <문학>을.... 불확실한 <미래>를 안주 삼아 많은 얘기를 했다. 아쉽게도 그녀가 술을 마셔도 내게 더이상 키스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 때마다 현희가 술에 취해서 문제였다.
그렇게 또 헤어지면... 내가 내려가서 편지를 보냈다.
지금도 기억에 남지만 칼릴지브란 얘기를 그녀에게 많이 했다. 칼릴지브란은 내 정신적 스승이었으니까.
<예언자> <보여줄 수 있는 사랑는 너무 작습니다> 그런 책들 얘기를 했고,그녀는 니이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 대해서 내게 많은 얘기를 했다. 그 당시 우리학교에서는 <교양도서>를 정해서 1학점을 이수해야 했었는데 그 덕분으로 나는 <짜라....> 를 택하기도 했었다. 어려운 내용이어서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고등학교 때... 내게 데미안을 얘기하고 시를 보내던 민숙이 나를 쫓아다니던 영순이 그러다 내게 겨울강변에서 안겼던 영순이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성희...
대학 때에도 현실적인 사랑과 플라토닉 러브... 그 사이에 끼어서 방황하는 사랑...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사랑... 그것이 대학 졸업반이던 나와 우리들의 초상이었던가.
가을이 되었다.
전두환은 이순자를 데리고 5박6일 동안이나 미국에 가서 레이건을 만나고 왔다. 그 앞에 정권의 꼴뚜기들이 도열해있는 그림이 우스꽝스러웠다. 대학생들은 다 잡아 가둬놓고 미국에 가서는 안보협력을 합의하고 왔다네.
안보씩이나?
...
그 가을. 민수네 학교에서 <졸업작품전>이 열린다고 올라오라고 했다.
서울에 올라갔다. 졸업작품전을 보고... 내가 올라 왔다고 대구에 왔던 그 팀들이 다 모였다. 그녀의 학교 앞에서 저녁을 먹고 학사주점으로 가서 신나게 마셨다. 그래서 민수가 나를 챙기느라 옆에 앉으면.... 오른쪽에 민수가 앉으면 재빨리 현희가 왼쪽으로 앉았다.
그렇게 밤늦도록 마시다 보니 어느 새 하나 둘씩 들어가고 민수와 현희만 끝까지 남아 있었다.
"잘 마셨고... 이제 다들 집으로 가야지?"
"형은 어떻게 할거에요?"
민수가 그랬다.
"난 등촌동에 친척집 있으니까 그리로 가면 돼요."
"그래요? 그럼 택시 잡아드릴께요. 너 현희는
나랑 같이 가다가 내리면 되지"
"아냐, 언니 언니 먼저가. 난 아저씨랑 얘기 좀 할래."
강현희가 상기된 얼굴로 내 팔을 끌며 그랬다.
"나중에 얘기 하지 뭐. 들어가 그냥... 술도 취했잖아?"
현희는 끝내 민수를 차태워 보내더니 남았다. 나는 어떻던 그녀랑 헤어지고 싶었다. 솔직히 그녀가 성가셨다.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닐 뿐더러 민수의 후배라서...
나는 민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현실적인 모습도 사랑하고 있었지만 이지적이고 학구적이고... 그녀가 가진 예술가적 기질과 예민하고 섬세한 그녀의 감성에 마냥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랑은 플라토닉 사랑이었다.
"다음에 얘기하고 집에 가지?"
나는 택시를 잡고서 현희를 태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타지 않고 버텼다. 그래서 나는 그럼 나 먼저 가겠다며 그 택시를 탔다. 그런데 그녀도 따라서 타버렸다.
"아저씨 등촌동이라고 했죠? 그럼 가다가 종로에서 내릴께요."
"등촌동이면 종로로는 안가는데?"
택시 기사가 그랬다.
참 대책이 안섰다. 나는 등촌동으로 간다고 하고서 그 근처에서 내려 여관에서 잘 생각을 했었다.
등촌동에 친척이 살고 있긴 했지만 갈 생각은 않았던 것이다. 종로 2가 에서 같이 내렸다.
"이제 정말 택시 잡아 줄테니 먼저 가."
"저 때문에 내렸어요?"
"너 술 많이 취했구나 이제보니?"
"저기까지만 좀 걸어가요. 아저씨..."
우리는 종로 2가에서 광화문까지 걸어갔다. 별 얘긴 안했다. 시간은 1시가 넘어 2시가 다 되어갔다.
"너! 안갈래? 정말?"
"그래요. 아저씨 먼저 가세요."
"..."
"저, 저기 행촌동이거든요. 다 왔어요."
"..."
"조금만 가면 돼요. 아저씨 이제 가요 그럼."
"그래 그럼 잘가. 가보라구 어서..."
"..."
"가! 가라 어서..."
"아저씨, 왜 택시 안잡어요?"
"..."
"예?"
"참, 나. 너땜에 너무 늦어서 친척집에 못가잖아!! 됐어?"
"..."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교보빌딩 뒤 어디 허름한 여관으로 갔다. 그녀가 기어이 가지 않고 쫓아왔다. 무슨 생각인지... 술이 취해서인지... 길에서 마냥 그러고 있을 수도 없고...
<젊은날의 肖 像 - 저 지금 동거해요...>
여관방의 키를 받았다.
"이제 가! 여관 잡아주고 간다며?"
"참, 아저씬 되게 구박해!"
여관 아줌마가 이상한듯 쳐다봤다. 남녀가 뒤바뀐 것 같으니까... 아무리 맘에 안들어도 같이 잘 수는 있다. 현희도 따지고 보면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몸매가 좀 문제고... 그것도 순전히 내 기준에서 그렇다. 어른들이 보면 두리뭉실하고 통통한 괜찮은 신부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수 귀에라도 들어 간다면... 그건 안되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일로만으로도 오해할 수 있는데 더 진행된다는 것은 안될 일이 아닌가.
"방에서 잠깐만 얘기하다 가면 안돼요?"
"야! 너? 철이 없는 거냐? 아님 뭐야 도대체? 내가 너랑 자랴? 너 안가면 내가 갈거야.
너가 여기서 자든 말든!!"
"알았어요. 알았어요. 갈께요. 낼 몇시에 일어날 거에요?"
"몰라!! 그냥 눈뜨면 일어나는 거지... 왜?"
"낼 아저씨 아침 사드릴려구요."
그렇게 해서 현희는 갔고 다음날 나는 서둘러 대구로 내려 왔다. 나중에 현희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현희는 다음날 오전에 그 여관으로 날 찾아 왔었다고 했다. 하여간에...
그 뒤로 내 졸업작품전이 있었다. 민수에게 초대장을 보냈는데 민수는 내려오지 않았다. 좀 복잡한 일이 있었노라고 그 뒤에 편지가 왔었다. 그리고 편지도 뜸해졌다. 정말 뭔가 복잡한 일이 있는 것 같아서... 그녀가 그 일이 정리되면 다시 편지하겠거니 생각했다.
겨울방학이 되었다. 4학년 2학기의 겨울방학... 의미가 없다.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해프닝이나 설치미술 같은 별 해괴한 작품을 하는 내게 있어서는 그냥 바로 <실업자> 가 아닌가. 연말의 세기말같은 불안과 초조의 시간들이 고장난 괘종시계의 초침처럼 흘렀다. 그리고... 세상은 언제부터인지 내게서 등을 돌린채 자기네들끼리 크리스마스다 망년회다 들떠 있었다. 꼴사납게도....
민수의 침묵은 생각보다 깊고 오래갔다.
민수.그녀는 내게 무슨 존재일까. 물론 대구에서 애인을 만나고 있지만그래서 말도 안되는 모순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섹스를 안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라도 애인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또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
섹스?
양심?
양심을 팔면... 양다리는 언제나 가능했다. 젠장.
양심보단 끊임없이 불끈거리는 욕정이 우선이었지.
그래. 비겁한 모순이었고 비열한 인간성이었다.
그랬다. 그것과 상관없이 민수는 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민수랑 섹스하는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민수랑은 다른 여자에게서 처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아니고 싶었다. 비록 내가 그녀에게 입술을 뺏기긴 했지만.
영혼의 사랑...
내가 그녀에게 입버릇처럼 얘기한 칼릴지브란과 메리헤스켈의 사랑... 키에르 케골과 레기네 올센의 사랑...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영적인 사랑... 그런 것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죽도록 보고 싶었다.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전화는 안했다. 우린 전화로 대활 한 적이 없었다.
해가 바뀌고... 연초가 지나고 나는 서울로 올라갔다.
어떻던 그저 돌아다닐 수는 없었기에 우선 미술 잡지사에 있는 선배한테 얘기해서 홍대 앞의 입시미술학원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그래서 서교동 <산울림 소극장> 바로 옆집에 잠만 자는 옥탑방을 얻었다.
그렇게 대충 열흘 정도가 지난 뒤 나는 현희네 집으로 전화를 했다.
"우와!! 아저씨가 전화를 다 하네? 잘 지내세요?"
"나 지금 홍대 앞인데... 시간 좀 있어?"
"홍대? 서울 왔단 말예요?"
그렇게 해서 현희를 만났다.
"민수는 뭐해?"
"치, 민수언니 물어볼려고 저 만나자 그랬던 거에요?"
"짜식이... "
"저도 통 못만났어요. 연락 잘 안돼.
집에 잘 없더라구요. 학교 실기실에서 짐도 안빼고... 그대로던데..."
"이리 저리 연락해봐서 학원으로 전화 좀 해달라고 해줘."
"안 해. 아저씨는 되게 재수야!!"
"얌마. 꼭 연락할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그런게 있어, 하여간..."
며칠 뒤 민수가 전화를 했다. 홍대 앞 <흙과 두 남자>에서 만났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해서 걱정되었었는데 생각보단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그동안 연락 못해서 미안하다고도 했다. 덤덤해 보였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내가 이상했다.
격정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만감이 교차했지만.... 억누르고 술 한잔 하면서 점점 나도 덤덤한 모습으로 보이도록 노력했다. 제법 술을 마셨을 때... 그녀가 그랬다.
"저 지금 동거해요."
"..."
그랬다. 또록또록...
"저 지금 동거해요. 어떤 애랑요."
"저 지금 동거해요. 어떤 애랑요."
그랬다. 또록또록....
<젊은날의 肖 像 - 다시는 똥폼 잡나 봐라.>
언젠가 뒤져본 그 시절 내 대학노트에는 이런 낙서가 있었다.
<... 최루가스 문드러져 내린 눈물에
세수를 하고 아아
뻥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청계고가를 떠다녀야 했다.
희미한 공중전화 BOX에 매달려 혼선으로 떠돌아다니던
깡마른 햇볕을 ?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뒤
수만의 입자로 불어나는 희디흰
눈발로 일어서야 했다.>
내가 써놓고도 사실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젠장... 플라토닉 러브고 영혼의 사랑이고 나발이고 다 무의미 했다. 그 당시에는.... 다시는 내가 그렇게 똥폼 안잡는다 다짐했다. 그저 나라는 인간은 동물적인 본능으로 그냥 만나자마자 탐색 좀 하다가 본론으로 가야 했다.
하긴 좀 깊이 생각해보면 치사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바로 옆의 애인은 홀라당 벗겨서 온갖 데를 다 들춰보면서 유희를 즐기고도 멀리있는 또다른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는 영혼이네 플라토닉이네 문학이네 철학이네 하면서
똥폼 잡았으니 그랬으니 벌받은 거지... 생긴대로 놀았어야 했는데... 이 여자 저 여자 붙잡아 두고 소유하려 했고... 사랑을 빙자한 집착으로 일관했으니... 당연히 벌받은 거지...
민수.그녀는 그렇게 해서 내곁을 홀연히 떠났다.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린 운동권 학생에게 가버렸다. 젠장...
내가 어울리지도 않는 칼릴지브란이네 어쩌네 얄팍한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럴 즈음에 그녀는 도저히 자신이 돌봐주지 않으면, 숨겨주지 않으면 금방 잡혀가 죽어버릴 것 같은... 남자애를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를 돌봐주러 가버린 것이다. 뭐 할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운동권 남자에게 가느냐고 하나?
"내가 아님 걔는 아마 돌아버릴거에요" 하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내가 철학이나 문학 레포트를 쓰듯 보낸 수백통의 편지는... 빌어먹을 쥐뿔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똥폼 잡지말고 진작에 사랑한다고 할것을... 그렇게 고백이라도 할걸. 대구의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그녀에게 순정을 바치겠노라 고백하고 그래서 그녀에게 갈 걸... 그런 가시적인 노력은 하지도 않고 뜬구름 잡는 플라토닉을 운운했으니...
그래도...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 있어서 그것이 사랑했던 여자를 가장 깔끔하게 보낸 것이었다. 그렇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 않았던 유일한 <헤어짐>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내가 자신을 끔찍히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 여한은 없었다. 그리고 또한, 맘이 떠난 여자를 붙들고서 치사하게 협박을 하거나... 치졸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서 애걸복걸하지 않았던 유일한 <헤어짐>이었다. 어떻던 <남자 답게> 한 여자를 떠나보낸 것이었다. 기분은 개떡같았지만.
양다리 걸치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 그래 알았어. 다시는 내가 똥폼 잡나 봐라... 그랬었다. 그때.
<다음에 계속....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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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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