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emory - 처음으로 이겨보았어. >
< 하나의 영혼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영혼의 내부에 감추어져 있다.
어떠한 그림도 본질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과 같이. >
- 칼릴 지브란 -
형! "아름다운 시절" 이라는 말 있잖아요?
우리 그때를 우리들의 그 아름다운 시절, 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누군가 나더러 그러더군요. 이제 그만 형을 떠나 보내주라고요.
그 얘기는... 그 시절은 그저 추억으로, 추억으로 묻어놓고 이제는 앞날을 살라는 얘기겠지요.
그래요, 형!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잖아요.
깨알 같은 아스라이 그 수많은 추억 알갱이 중에서
때로 어떤 알갱이는 따로 떼어내어 이리저리 굴리고 헤집고... 곱씹어보면 곱씹어볼수록
끝없이 마음이 아리는 그런 것이 있죠.
그래요. 형과 나, 우리들... 그 시절을 반추하면서, 내 가슴에 고이고이 간직해온
형과 나, 우리들의... 아름다운 그 시절을 반추하면서 그래서,
언젠가는... 내 안 저 깊은 심연에 가라앉아있던 <나>를 끄집어내어 형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
모두 다.
...
그 해, 고등학교 2학년 가을이었지요. 예술제 미술부문에서 내가 대학부, 일반부를 모두 통틀어 대상을 탔지.
연극부문에서 대통령상을 가져가고 미술부문은 국무총리상 이었잖아요. 나라에서 주는 상장이라 대단했어요.
형은 그때 수채화를 그렸지만 난, 유화를 그렸지. 내가 유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수채화로는 형을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어. 형의 수채화 실력은 대학 4학년 수준이라 했으니까.
내게는... 고등학생이 유화를 그리는 경우가 없었으니 충분히 프리미엄이 있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화는 돈이 좀 들어가야 했지. 젠장.
형보다 나은 건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
...
그렇게 처음으로, 형을... 처음으로 이겨보았어.
"자! 봤지 형? 나도 형을 이길 수가 있는 거야" 그랬지.
들떴어. 각종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 등에 나왔잖아요. 시골학교라서...
학교에서 개교 이래 최고의 상이라고 했지요.
거기다가 그거 하나로 대학 특기생은 확보되었으니까. 들떴지.
미안해 형.
형은 수없이 많은 대회에서 최고상, 특선을 받았어도 나라에서 주는 국무총리 상 같은 거는 없었지.
사실은 내가 그렇게 운이 좋았던 거지.
거기다가 형은... 사실 대학갈 형편이 안 되었던 형이었는데... 정말 미안해 형.
형, 참 그... 흠.. 그 일 말이야...
형이 졸업한 그해 겨울에요. 어느 날 내가 불쑥 찾아갔는데 형이 그녀랑 같이 자고 있었잖아?
반쯤 알몸이던 그녀...
그 때...
< memory - 그 겨울의 수음은 ...>
그해 가을...
그래요, 형!
형의 책꽂이에서 피카소의 화집이 하나 있었지.
아니야. 피카소의 화집이 아니라 무슨 미술잡지 속에 <피카소의 펜화>가 특집으로 실려 있었어요.
충격이었어. 펜화특집이 아니라 피카소가 그린 춘화도였더군요. 피카소도 외설춘화를 그렸다니...
피카소의 여인들 적나라한 모습들... 피카소가 마리테레즈와 섹스하는 연작들...
형이 화장실 간 사이 나, 그거 뜯었어요. 분명히 내가... 분명히 내가 뜯었다는 걸 형이 알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뜯었지. 그렇게 무모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 동네는 들판을 지나게 되어 있잖아? 도로포장이 안 된, 자갈이 깔려진 신작로 가든지
개천이 흐르는 들판 봇도랑 길이 있었는데 봇도랑 길은 멀리 둘러서 가지만 좋았지. 신작로 길은 차가 지날 때마다 먼지가 가득 날리고 때때로 돌멩이도 튀어서 싫었거든... 거기다 봇도랑 길은 사시사철 훨씬 더 낭만적이어서
늘 그리로 다녔지. 밤에는 좀 무섭기도 했지만...
그 봇도랑 길에는 논과 밭을 구분 짓거나, 밭과 밭을 구분해 주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곳곳에 있었지요.
그래요. 거기... 탱자나무 울타리 안쪽은 더구나 밤이면 꽤나 음침했어요.
그 곳에서 나, 교교한 달빛 아래에서... 열여덟의 나, 수음을 했어. 젠장.
교교한 달빛아래 피카소의 마리테레즈는 나, 열여덟의 욕정을 분출토록 했어요.
탱자가 떨어져 썩는 냄새가 나서 다행이었어. 가시에 걸린 탱자, 땅에 떨어져 썩어가던 탱자 냄새,
그 냄새가 정충냄새를 희석시켰지. 형도 알지? 탱자 썩는 냄새...
그리고 그 겨울 밤. 형이 졸업한 그 겨울밤. 형은 형의 마리테레즈와 한 이불 속에 있었던 거야.
흐트러진 이부자리... 헝클어진 그녀 머리카락 맨살의 어깨가 보였지.
그녀였어. 언젠가 읍내 퍼모스트의 집에서 형과 나, 같이 만났던 적 있었잖아. 그녀가 형의 마리테레즈였더군.
서구적인 얼굴을 가졌고, 청순미에다 묘한 섹시함까지 가진 그런 얼굴이었어.
그런데 나는 왜, 당황해 하는 형을 불편하게까지 하면서 얼른 나오질 못했을까.
일어나지도 못하고 숨죽이고 있던 그녀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
그랬어.
그 겨울... 눈발 날리던 밤공기가 무척 차가웠지요. 나만의 은밀한 곳,
탱자나무가지 사이로 백만 천만의 눈발 쓸려가며 씽씽 휘날리던 소리...
그건 외마디였어. 그 겨울 들판에 내팽개쳐진 내 自我의 맥박소리.
그래요.
그 겨울의 수음은 그렇게 백만 천만의 눈발로 휘날리는 겨울 들판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서 행해졌지.
탱자 썩는 냄새도 필요 없었어. 눈발 쓸려가는 소리에 묻혀갔으므로...
흐트러진 이부자리에서 형의 마리테레즈,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맨살의 어깨를 떠올리며...
아아~ 젠장.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 흩뿌려지던 내 정충들... 그런 다음 일시에 몰려오던 허탈감, 자괴감...
그 개떡 같은 기분...
형. 우리들의 베아트리체는...
< memory - 아, 그리운 마리테레즈... >
형.
카타르시스(Katharsis)라는 말 있잖아요.
무슨 뜻인지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봤지요.
카타르시스란, 정화(淨化), 배설(排泄)을 뜻한다, 라네요. "몸 안의 불순물을 배설 한다"는 의학적 용어로 쓰이며,
또 다른 한 의미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의 <비극(悲劇)의 정의>에 나오는 용어로써, "비극에 의한 자기정화" 라고 하는데... "비극에 의한 자기정화" 란, 비극의 주인공에 대한 동일시, 연민, 두려움을 통해 내 감정의 격렬함과 인간적인 정염을 순화시키는 정신적 승화작용이라네요.
...
형. 어쩌면 나, 형의 비극을 즐겼는지 몰라요.
즐긴다? 역시 말보다 글이 어렵군요.
그래요. 나, 사실 형이 불행해 지기를 바랐어요. 존경하고 부러워하고 그랬지만... 솔직히 형이 대학을 못가고
미술학원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어렵게 살고 있음을 그걸 즐겼어요. 내가 형보다 나은 거라곤 내 아버지가
공무원이라서 그래서 형보다 조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는 것... 그것밖에 없었으므로...
형을 조롱했던 거지.
...
형. 그 겨울 밤, 형이 마리테레즈와 흐트러진 모습 보여준 그 밤. 혼돈이었어.
왜 그리 그녀가 섹시하던지 말예요. 우리들의 베아트리체 아니, 형의 베아트리체는
청순하기 그지없었는데 말이야.
마리테레즈.
형의 마리테레즈, 그녀를 탐하고 싶었어.
그러면서도 나, 그 밤 이후로 나, 형을 욕했어. 뭐라고 할까. 정리가 잘 안되지? 이중성이지 뭐. 글쎄 정확한 어휘인지 몰라도 내적분열이랄까, 그런 거지.
나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형이 여자랑 잠자리를 가지는 거 나는, 생각해본 적 없었거든... 나는 말이야.
하지만... 그걸 인정해야 했어요.
21살 형이 가고 싶은 대학도 못가고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도 잃고 그래서 이상은 높으나 현실이 따라와 주지 않는 형의 그 처지에서 어쩌면 형은 형의 <순수>를 내팽개치고 싶었을 거야.
서글픈 <自我>를 내팽개치고 싶었을 거야.
그래, 난 참 나쁜 놈이야.
형이 떠난 뒤에 가끔, 가끔, 형의 여자, 마리테레즈를 찾아보려 했거든...
형의 <비극의 자리 위>에 푹신푹신한 요를 깔고 그녀랑 뒹굴고 싶었어. 피카소의 춘화도처럼.
내게 나쁜 피가 흐르나봐.
아, 그리운 마리테레즈...
소심한 아이.
형도 알다시피 어린 시절부터 나, 소심했어요. 남자답지 못했지요.
지금. 불혹을 넘었지만 여태껏 나, 한 번도... 남자다워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형.
하여간 나는요. 남자들 세계에서 그 세계를 관리할 능력이 애초부터 없었나 봐요.
그렇게 남자로서의 자격지심이 많았고 <남자답지 못함>에 대한 강박증이 심했던 것 같아요.
중학 2학년 때... 나를 유난히 못살게 굴던 <도문깡>이라는 별명의 나쁜 녀석이 있었어요.
우리 반에서 싸움 1등이었으며 동네의 또래 집단에서 힘으로 군림하던 녀석이었지요.
그 날도 녀석이 날 괴롭히고 있었는데, 그때 돌연히 내게 호의적이던 또 다른 파의 두목인 <딱섬>이라는 별명을 가진 녀석이 나서는 거예요.
"야!! 도문깡!! 너? 얘 건들지 말거라!! 응?"
그랬으니 상대방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지요. 그래서 잠시 주먹다짐을 하더니
수업을 마치고 학교 뒤 야산으로 가서 어느 쪽이든 이길 때까지 대결을 하기로 둘이 합의를 하더군요.
수업을 마치고 나 때문에 두 주먹이 서로의 자존심과 패밀리(?)의 명예를 걸고 싸우기로 했는데
그러나 정작 나는 거기에 안 갔어요. 겁이 나서였지. 딱섬이 패해서 내가 얻어맞을까 봐...
그러나 그 싸움은 딱섬이 패거리가 이겼지요. 그때 만약 내가 따라 나섰더라면
나도 당당히 그 패밀리의 몇 번째 똘마니가 되었을 지도 몰라요.
...
형. 그랬어.
나는 가끔 <딱섬>이나 <도문깡>같은 왕초가 되어 여러 졸병들을 거느리면서 다른 낯선 놈들을 물리치는
아주 허황한 꿈을 꾸곤 했어요.
하지만, 꿈속에서 내가 제압한 녀석들의 얼굴을 들춰보면 이상하게도 내게 만만한 가족들이었어요.
그런 꿈은 항상 나를 괴롭혔고 나는 그 악몽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지요.
형. 있잖아요.
내가 대학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CF 감독 했다고 했지요?
CF 감독을 하다가 도태된 것도 따지고 보면 남자답지 못해서였던 것 같아요.
실력도 실력이지만, CF 한 편 만드는데 대략 60~70명에 달하는 스태프의 힘을 빌어야 하는데
저마다의 개성으로 한가락 하는 스태프들을 휘어잡는다는 것이 내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지요.
그들을 휘어잡을 만한 배짱이 없었지요.
젠장. 한마디로 <카리스마>가 없었던 거지.
일일이 그들의 주장을 들어준다든지, 실수한 것도 그냥 봐주니 스태프들에게는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는다지만,
결국은 촬영을 힘들게 하게 되고 덩달아 제작비도 늘어나게 되고, 그러다 보니 광고주나 회사 경영진에겐 눈 밖에 난 것이지요. 회사측에선 영업마인드 없고 실적 없는 감독으로 취급했고요. 따라서 항상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웠지요. 바로 남자답지 못했던 콤플렉스 때문이지 않을까. 그러다 결국 잘렸죠 뭐.
다시 한 번 사춘기 이후를 돌이켜 보면 그렇게... 남자답지 못했던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것 같아요.
...
그 여름밤. 늘 그렇듯, 땡볕 내려쬐던 여름날은 쉬이 물러날 것 같지 않다가 해가 지면서는 금방 어두워지고... 어두워지면서 시골은요, 낮에 땡볕으로 데워졌던 물상들이 슬그머니 식으면서 내뿜는 그 냄새들이 정말로 알싸하잖아요? 형언키 힘든 그 여름밤의 정취가 시간가는 줄 모르도록 하지요.
베아트리체랑...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형의 베아트리체랑 그렇게 밤 깊어가는 줄 모르고
나란히 둑에 앉아있었죠.
그때. 그 깡패 같은 놈들이 둑 아래서 불쑥 나타난 거예요.
늘 나를 못살게 굴던 우리 학교 동창 놈이 끼어있었지요. 중학교 때의 <도문깡>이랑 똑같은 녀석이었거든요.
두 녀석은 다른 학교 날라리들이었는데 좁은 읍내여서 다들 서로 아는 사이지요.
"시팔! 이 새끼는 미술부만 아니었음, 맨날 내 밥이구마는..."
"가시나 이거 삼삼하고..."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지요. 아니나 다를까, 한 놈이 겁에 질려 숨소리도 못 내는 베아트리체를
거칠게 낚아채어 둑으로 내려가고 두 녀석은 나를 에워싸더군요. 형의 베아트리체를...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
그 시절... 나의 아브락사스는 무엇이었던가. 내가 깨고 나와야 할 알은 무엇이었을까.
내 영혼이 태어나기 위해서 파괴해야 할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바로 형, 바로 나의 절대자인 형이었어, 형이 바로 나의 아브락사스 였어.
나의 신이었어.
하지만 나는 형을... 나는 형을 극복하고 싶었어. 그러나 나는 형을 극복할 수가 없었어.
쫓아가면 또 저만치 앞서가 어디 높은 곳에서 날 빤히 내려다보면서 그러면서 날 주눅 들게 했고
질투 나게 했고 시기하도록 내버려뒀던 거지.
...
형, 언젠가 신문에서 류시화 시인의 <나를 찾아 떠나본 적이 언제였던가?>라는 글을 읽었는데요.
류시화 시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중에서 자신을 찾아나서는 여행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이다. <나>를 찾아 얼마나 멀리까지 가보았는지
마지막으로 떠나본 적이 언제였던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 싶다더군요.
...
형! 현실에 부딪혀 살다보니 어디 나를 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어.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가 더, 가치 있는 것이라 하는데...
글쎄, 나는 지금 내가 서있는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모르고 있어. 그러니 내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렇잖아?
...
각설하고,
그 여름 밤 사실 베아트리체는 아무런 일 없었어. 내 알량한 사내로서의 자존심과
맞바꿨지. 젠장.
지금도 난 내게 딱 3명에게만 총질을 해도 된다는 그런 특혜(?)가 주어진다면
중학교 때 도문꽝이랑 고등학교 때 그 놈이랑 또 한 녀석이 있는데... 그 셋을 죽여 버리고 싶어.
그래, 그랬어. 베아트리체는 아무런 일 없었어. 그 놈들이 소문을 나쁘게 퍼트린 거야.
형이 오해를 하고 있음을 나중에 알았지만, 형에게 따로 얘기 못했어. 안했던 건지도 몰라.
나의 아브락사스, 형이 괴로워하는 것을 즐겼지.
형, 미안해.
그 뒤로 우리 셋 서로 어색하게 된 거. 둘을 지켜주지 못한 거. 그거 정말 미안해.
그거 정말 미안해.
형...
아직도 알에서 깨지 못한 나, 어디를 향해 가는 게 좋은지는 얘기 해줄래?
나의 아브락사스...
그래요. 내 젊은 날...
그 시절 내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 칼릴 지브란 -
화가이자 시인이자 철학자인 칼릴 지브란,
우습게도 미술학도인 내가 칼릴 지브란을 알게 된 것은 대학의 철학시간이었지요.
인간 내면의 순수한 영혼을 찬양한 지브란.
.... 헤르만 헷세 -
<데미안>을 세 번이나 읽었지요.
처음 고 2 때쯤, 형이 그 책을 툭 던져줘서 읽었지만 좀 어려웠고요,
그 뒤로 대학 때 한 번 더 읽었고, 군대서 한 번 더 읽었지요.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뭐냐고 묻는 질문에는 나는 꼭 <데미안>이였고요.
헤르만 헷세를 숭배했지요.
.... 전혜린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수필집,
한 지식인의 고뇌와 감수성이 가슴에 와 닿았고요.
...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그리고, 카프카의 <변신>등.
무엇보다도 위의 인물들을, 책들을 거의 모두
형의 다락방에서, 형을 통해 알게 되었지.
그래, 다시 한 번 하는 얘기지만... 형으로부터...
내 젊은 날, 내 감성의 원천은 형을 숭앙하고 흠모한데서부터 출발한 거야.
미술부 선배인 형, 겨우 두 살 위인 형에게서... 화가 지망생이면서도 문학적이던
형의 그 예술적 감수성.
형의 섬세한 손가락 끝에서 탄생되던 도저히 내가 흉내 낼 수 없었던... 형의 석고데생,
깊이 있는 대각선 구도의 풍경수채화... 생과일보다 더 과일다운 정물수채화...
방안 가득 쌓아놓은 형의 책들 제목만큼이나 다양한 형의 박식함... 영민함...
날 늘 주눅 들게 했던 그 침착함...
...
형이 살아있었다면 내가 참, 좋았을 건데...
형, 우리 언제 만날까?
형이 이 세상 살다 떠난 24년에 난 배 이상 더 살았으니...
후... 말이 이상하네? 하긴,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이젠 훨씬 덜 남았을 거야.
...
그 때까지...
형, 잘 지내.
안녕.
< 끝 >
< 하나의 영혼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영혼의 내부에 감추어져 있다.
어떠한 그림도 본질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과 같이. >
- 칼릴 지브란 -
형! "아름다운 시절" 이라는 말 있잖아요?
우리 그때를 우리들의 그 아름다운 시절, 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누군가 나더러 그러더군요. 이제 그만 형을 떠나 보내주라고요.
그 얘기는... 그 시절은 그저 추억으로, 추억으로 묻어놓고 이제는 앞날을 살라는 얘기겠지요.
그래요, 형!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잖아요.
깨알 같은 아스라이 그 수많은 추억 알갱이 중에서
때로 어떤 알갱이는 따로 떼어내어 이리저리 굴리고 헤집고... 곱씹어보면 곱씹어볼수록
끝없이 마음이 아리는 그런 것이 있죠.
그래요. 형과 나, 우리들... 그 시절을 반추하면서, 내 가슴에 고이고이 간직해온
형과 나, 우리들의... 아름다운 그 시절을 반추하면서 그래서,
언젠가는... 내 안 저 깊은 심연에 가라앉아있던 <나>를 끄집어내어 형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
모두 다.
...
그 해, 고등학교 2학년 가을이었지요. 예술제 미술부문에서 내가 대학부, 일반부를 모두 통틀어 대상을 탔지.
연극부문에서 대통령상을 가져가고 미술부문은 국무총리상 이었잖아요. 나라에서 주는 상장이라 대단했어요.
형은 그때 수채화를 그렸지만 난, 유화를 그렸지. 내가 유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수채화로는 형을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어. 형의 수채화 실력은 대학 4학년 수준이라 했으니까.
내게는... 고등학생이 유화를 그리는 경우가 없었으니 충분히 프리미엄이 있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화는 돈이 좀 들어가야 했지. 젠장.
형보다 나은 건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
...
그렇게 처음으로, 형을... 처음으로 이겨보았어.
"자! 봤지 형? 나도 형을 이길 수가 있는 거야" 그랬지.
들떴어. 각종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 등에 나왔잖아요. 시골학교라서...
학교에서 개교 이래 최고의 상이라고 했지요.
거기다가 그거 하나로 대학 특기생은 확보되었으니까. 들떴지.
미안해 형.
형은 수없이 많은 대회에서 최고상, 특선을 받았어도 나라에서 주는 국무총리 상 같은 거는 없었지.
사실은 내가 그렇게 운이 좋았던 거지.
거기다가 형은... 사실 대학갈 형편이 안 되었던 형이었는데... 정말 미안해 형.
형, 참 그... 흠.. 그 일 말이야...
형이 졸업한 그해 겨울에요. 어느 날 내가 불쑥 찾아갔는데 형이 그녀랑 같이 자고 있었잖아?
반쯤 알몸이던 그녀...
그 때...
< memory - 그 겨울의 수음은 ...>
그해 가을...
그래요, 형!
형의 책꽂이에서 피카소의 화집이 하나 있었지.
아니야. 피카소의 화집이 아니라 무슨 미술잡지 속에 <피카소의 펜화>가 특집으로 실려 있었어요.
충격이었어. 펜화특집이 아니라 피카소가 그린 춘화도였더군요. 피카소도 외설춘화를 그렸다니...
피카소의 여인들 적나라한 모습들... 피카소가 마리테레즈와 섹스하는 연작들...
형이 화장실 간 사이 나, 그거 뜯었어요. 분명히 내가... 분명히 내가 뜯었다는 걸 형이 알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뜯었지. 그렇게 무모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 동네는 들판을 지나게 되어 있잖아? 도로포장이 안 된, 자갈이 깔려진 신작로 가든지
개천이 흐르는 들판 봇도랑 길이 있었는데 봇도랑 길은 멀리 둘러서 가지만 좋았지. 신작로 길은 차가 지날 때마다 먼지가 가득 날리고 때때로 돌멩이도 튀어서 싫었거든... 거기다 봇도랑 길은 사시사철 훨씬 더 낭만적이어서
늘 그리로 다녔지. 밤에는 좀 무섭기도 했지만...
그 봇도랑 길에는 논과 밭을 구분 짓거나, 밭과 밭을 구분해 주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곳곳에 있었지요.
그래요. 거기... 탱자나무 울타리 안쪽은 더구나 밤이면 꽤나 음침했어요.
그 곳에서 나, 교교한 달빛 아래에서... 열여덟의 나, 수음을 했어. 젠장.
교교한 달빛아래 피카소의 마리테레즈는 나, 열여덟의 욕정을 분출토록 했어요.
탱자가 떨어져 썩는 냄새가 나서 다행이었어. 가시에 걸린 탱자, 땅에 떨어져 썩어가던 탱자 냄새,
그 냄새가 정충냄새를 희석시켰지. 형도 알지? 탱자 썩는 냄새...
그리고 그 겨울 밤. 형이 졸업한 그 겨울밤. 형은 형의 마리테레즈와 한 이불 속에 있었던 거야.
흐트러진 이부자리... 헝클어진 그녀 머리카락 맨살의 어깨가 보였지.
그녀였어. 언젠가 읍내 퍼모스트의 집에서 형과 나, 같이 만났던 적 있었잖아. 그녀가 형의 마리테레즈였더군.
서구적인 얼굴을 가졌고, 청순미에다 묘한 섹시함까지 가진 그런 얼굴이었어.
그런데 나는 왜, 당황해 하는 형을 불편하게까지 하면서 얼른 나오질 못했을까.
일어나지도 못하고 숨죽이고 있던 그녀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
그랬어.
그 겨울... 눈발 날리던 밤공기가 무척 차가웠지요. 나만의 은밀한 곳,
탱자나무가지 사이로 백만 천만의 눈발 쓸려가며 씽씽 휘날리던 소리...
그건 외마디였어. 그 겨울 들판에 내팽개쳐진 내 自我의 맥박소리.
그래요.
그 겨울의 수음은 그렇게 백만 천만의 눈발로 휘날리는 겨울 들판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서 행해졌지.
탱자 썩는 냄새도 필요 없었어. 눈발 쓸려가는 소리에 묻혀갔으므로...
흐트러진 이부자리에서 형의 마리테레즈,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맨살의 어깨를 떠올리며...
아아~ 젠장.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 흩뿌려지던 내 정충들... 그런 다음 일시에 몰려오던 허탈감, 자괴감...
그 개떡 같은 기분...
형. 우리들의 베아트리체는...
< memory - 아, 그리운 마리테레즈... >
형.
카타르시스(Katharsis)라는 말 있잖아요.
무슨 뜻인지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봤지요.
카타르시스란, 정화(淨化), 배설(排泄)을 뜻한다, 라네요. "몸 안의 불순물을 배설 한다"는 의학적 용어로 쓰이며,
또 다른 한 의미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의 <비극(悲劇)의 정의>에 나오는 용어로써, "비극에 의한 자기정화" 라고 하는데... "비극에 의한 자기정화" 란, 비극의 주인공에 대한 동일시, 연민, 두려움을 통해 내 감정의 격렬함과 인간적인 정염을 순화시키는 정신적 승화작용이라네요.
...
형. 어쩌면 나, 형의 비극을 즐겼는지 몰라요.
즐긴다? 역시 말보다 글이 어렵군요.
그래요. 나, 사실 형이 불행해 지기를 바랐어요. 존경하고 부러워하고 그랬지만... 솔직히 형이 대학을 못가고
미술학원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어렵게 살고 있음을 그걸 즐겼어요. 내가 형보다 나은 거라곤 내 아버지가
공무원이라서 그래서 형보다 조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는 것... 그것밖에 없었으므로...
형을 조롱했던 거지.
...
형. 그 겨울 밤, 형이 마리테레즈와 흐트러진 모습 보여준 그 밤. 혼돈이었어.
왜 그리 그녀가 섹시하던지 말예요. 우리들의 베아트리체 아니, 형의 베아트리체는
청순하기 그지없었는데 말이야.
마리테레즈.
형의 마리테레즈, 그녀를 탐하고 싶었어.
그러면서도 나, 그 밤 이후로 나, 형을 욕했어. 뭐라고 할까. 정리가 잘 안되지? 이중성이지 뭐. 글쎄 정확한 어휘인지 몰라도 내적분열이랄까, 그런 거지.
나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형이 여자랑 잠자리를 가지는 거 나는, 생각해본 적 없었거든... 나는 말이야.
하지만... 그걸 인정해야 했어요.
21살 형이 가고 싶은 대학도 못가고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도 잃고 그래서 이상은 높으나 현실이 따라와 주지 않는 형의 그 처지에서 어쩌면 형은 형의 <순수>를 내팽개치고 싶었을 거야.
서글픈 <自我>를 내팽개치고 싶었을 거야.
그래, 난 참 나쁜 놈이야.
형이 떠난 뒤에 가끔, 가끔, 형의 여자, 마리테레즈를 찾아보려 했거든...
형의 <비극의 자리 위>에 푹신푹신한 요를 깔고 그녀랑 뒹굴고 싶었어. 피카소의 춘화도처럼.
내게 나쁜 피가 흐르나봐.
아, 그리운 마리테레즈...
소심한 아이.
형도 알다시피 어린 시절부터 나, 소심했어요. 남자답지 못했지요.
지금. 불혹을 넘었지만 여태껏 나, 한 번도... 남자다워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형.
하여간 나는요. 남자들 세계에서 그 세계를 관리할 능력이 애초부터 없었나 봐요.
그렇게 남자로서의 자격지심이 많았고 <남자답지 못함>에 대한 강박증이 심했던 것 같아요.
중학 2학년 때... 나를 유난히 못살게 굴던 <도문깡>이라는 별명의 나쁜 녀석이 있었어요.
우리 반에서 싸움 1등이었으며 동네의 또래 집단에서 힘으로 군림하던 녀석이었지요.
그 날도 녀석이 날 괴롭히고 있었는데, 그때 돌연히 내게 호의적이던 또 다른 파의 두목인 <딱섬>이라는 별명을 가진 녀석이 나서는 거예요.
"야!! 도문깡!! 너? 얘 건들지 말거라!! 응?"
그랬으니 상대방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지요. 그래서 잠시 주먹다짐을 하더니
수업을 마치고 학교 뒤 야산으로 가서 어느 쪽이든 이길 때까지 대결을 하기로 둘이 합의를 하더군요.
수업을 마치고 나 때문에 두 주먹이 서로의 자존심과 패밀리(?)의 명예를 걸고 싸우기로 했는데
그러나 정작 나는 거기에 안 갔어요. 겁이 나서였지. 딱섬이 패해서 내가 얻어맞을까 봐...
그러나 그 싸움은 딱섬이 패거리가 이겼지요. 그때 만약 내가 따라 나섰더라면
나도 당당히 그 패밀리의 몇 번째 똘마니가 되었을 지도 몰라요.
...
형. 그랬어.
나는 가끔 <딱섬>이나 <도문깡>같은 왕초가 되어 여러 졸병들을 거느리면서 다른 낯선 놈들을 물리치는
아주 허황한 꿈을 꾸곤 했어요.
하지만, 꿈속에서 내가 제압한 녀석들의 얼굴을 들춰보면 이상하게도 내게 만만한 가족들이었어요.
그런 꿈은 항상 나를 괴롭혔고 나는 그 악몽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지요.
형. 있잖아요.
내가 대학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CF 감독 했다고 했지요?
CF 감독을 하다가 도태된 것도 따지고 보면 남자답지 못해서였던 것 같아요.
실력도 실력이지만, CF 한 편 만드는데 대략 60~70명에 달하는 스태프의 힘을 빌어야 하는데
저마다의 개성으로 한가락 하는 스태프들을 휘어잡는다는 것이 내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지요.
그들을 휘어잡을 만한 배짱이 없었지요.
젠장. 한마디로 <카리스마>가 없었던 거지.
일일이 그들의 주장을 들어준다든지, 실수한 것도 그냥 봐주니 스태프들에게는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는다지만,
결국은 촬영을 힘들게 하게 되고 덩달아 제작비도 늘어나게 되고, 그러다 보니 광고주나 회사 경영진에겐 눈 밖에 난 것이지요. 회사측에선 영업마인드 없고 실적 없는 감독으로 취급했고요. 따라서 항상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웠지요. 바로 남자답지 못했던 콤플렉스 때문이지 않을까. 그러다 결국 잘렸죠 뭐.
다시 한 번 사춘기 이후를 돌이켜 보면 그렇게... 남자답지 못했던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것 같아요.
...
그 여름밤. 늘 그렇듯, 땡볕 내려쬐던 여름날은 쉬이 물러날 것 같지 않다가 해가 지면서는 금방 어두워지고... 어두워지면서 시골은요, 낮에 땡볕으로 데워졌던 물상들이 슬그머니 식으면서 내뿜는 그 냄새들이 정말로 알싸하잖아요? 형언키 힘든 그 여름밤의 정취가 시간가는 줄 모르도록 하지요.
베아트리체랑...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형의 베아트리체랑 그렇게 밤 깊어가는 줄 모르고
나란히 둑에 앉아있었죠.
그때. 그 깡패 같은 놈들이 둑 아래서 불쑥 나타난 거예요.
늘 나를 못살게 굴던 우리 학교 동창 놈이 끼어있었지요. 중학교 때의 <도문깡>이랑 똑같은 녀석이었거든요.
두 녀석은 다른 학교 날라리들이었는데 좁은 읍내여서 다들 서로 아는 사이지요.
"시팔! 이 새끼는 미술부만 아니었음, 맨날 내 밥이구마는..."
"가시나 이거 삼삼하고..."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지요. 아니나 다를까, 한 놈이 겁에 질려 숨소리도 못 내는 베아트리체를
거칠게 낚아채어 둑으로 내려가고 두 녀석은 나를 에워싸더군요. 형의 베아트리체를...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
그 시절... 나의 아브락사스는 무엇이었던가. 내가 깨고 나와야 할 알은 무엇이었을까.
내 영혼이 태어나기 위해서 파괴해야 할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바로 형, 바로 나의 절대자인 형이었어, 형이 바로 나의 아브락사스 였어.
나의 신이었어.
하지만 나는 형을... 나는 형을 극복하고 싶었어. 그러나 나는 형을 극복할 수가 없었어.
쫓아가면 또 저만치 앞서가 어디 높은 곳에서 날 빤히 내려다보면서 그러면서 날 주눅 들게 했고
질투 나게 했고 시기하도록 내버려뒀던 거지.
...
형, 언젠가 신문에서 류시화 시인의 <나를 찾아 떠나본 적이 언제였던가?>라는 글을 읽었는데요.
류시화 시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중에서 자신을 찾아나서는 여행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이다. <나>를 찾아 얼마나 멀리까지 가보았는지
마지막으로 떠나본 적이 언제였던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 싶다더군요.
...
형! 현실에 부딪혀 살다보니 어디 나를 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어.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가 더, 가치 있는 것이라 하는데...
글쎄, 나는 지금 내가 서있는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모르고 있어. 그러니 내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렇잖아?
...
각설하고,
그 여름 밤 사실 베아트리체는 아무런 일 없었어. 내 알량한 사내로서의 자존심과
맞바꿨지. 젠장.
지금도 난 내게 딱 3명에게만 총질을 해도 된다는 그런 특혜(?)가 주어진다면
중학교 때 도문꽝이랑 고등학교 때 그 놈이랑 또 한 녀석이 있는데... 그 셋을 죽여 버리고 싶어.
그래, 그랬어. 베아트리체는 아무런 일 없었어. 그 놈들이 소문을 나쁘게 퍼트린 거야.
형이 오해를 하고 있음을 나중에 알았지만, 형에게 따로 얘기 못했어. 안했던 건지도 몰라.
나의 아브락사스, 형이 괴로워하는 것을 즐겼지.
형, 미안해.
그 뒤로 우리 셋 서로 어색하게 된 거. 둘을 지켜주지 못한 거. 그거 정말 미안해.
그거 정말 미안해.
형...
아직도 알에서 깨지 못한 나, 어디를 향해 가는 게 좋은지는 얘기 해줄래?
나의 아브락사스...
그래요. 내 젊은 날...
그 시절 내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 칼릴 지브란 -
화가이자 시인이자 철학자인 칼릴 지브란,
우습게도 미술학도인 내가 칼릴 지브란을 알게 된 것은 대학의 철학시간이었지요.
인간 내면의 순수한 영혼을 찬양한 지브란.
.... 헤르만 헷세 -
<데미안>을 세 번이나 읽었지요.
처음 고 2 때쯤, 형이 그 책을 툭 던져줘서 읽었지만 좀 어려웠고요,
그 뒤로 대학 때 한 번 더 읽었고, 군대서 한 번 더 읽었지요.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뭐냐고 묻는 질문에는 나는 꼭 <데미안>이였고요.
헤르만 헷세를 숭배했지요.
.... 전혜린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수필집,
한 지식인의 고뇌와 감수성이 가슴에 와 닿았고요.
...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그리고, 카프카의 <변신>등.
무엇보다도 위의 인물들을, 책들을 거의 모두
형의 다락방에서, 형을 통해 알게 되었지.
그래, 다시 한 번 하는 얘기지만... 형으로부터...
내 젊은 날, 내 감성의 원천은 형을 숭앙하고 흠모한데서부터 출발한 거야.
미술부 선배인 형, 겨우 두 살 위인 형에게서... 화가 지망생이면서도 문학적이던
형의 그 예술적 감수성.
형의 섬세한 손가락 끝에서 탄생되던 도저히 내가 흉내 낼 수 없었던... 형의 석고데생,
깊이 있는 대각선 구도의 풍경수채화... 생과일보다 더 과일다운 정물수채화...
방안 가득 쌓아놓은 형의 책들 제목만큼이나 다양한 형의 박식함... 영민함...
날 늘 주눅 들게 했던 그 침착함...
...
형이 살아있었다면 내가 참, 좋았을 건데...
형, 우리 언제 만날까?
형이 이 세상 살다 떠난 24년에 난 배 이상 더 살았으니...
후... 말이 이상하네? 하긴,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이젠 훨씬 덜 남았을 거야.
...
그 때까지...
형, 잘 지내.
안녕.
< 끝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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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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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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