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호는 마치 어두운 강물에서 떠오르듯이 고개를 쳐들고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그리고는 암담하고 의미 깊은 꿈에서 깬 사람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언가에 지쳐있는 것 같은 준호의 얼굴에는 어떤 결심의 빛이 보였다.
-우리들이 처음 만난 이래
나는 연희씨가 나의 생과 갈라놓을 수 없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어요.
연희씨는 내 생에 새로운 방향을 주었어요.
하지만 연희씨의 본질전체는 넓은 무대를 위해서 만들어져 있어요.
준호는 이렇게 말하고 잠시 동안 잠잠했다.
준호는 이 말을 아이러니와 악의가 없이 말했으나
그 말의 무뚝뚝한 객관성은 어떤 말보다도 날카롭고 가혹하게 들렸다.
(이 사람은 나를 밀어내려 하는 것일까..)
이 생각은 나의 뇌 속에 마치 벼락같이 떠올랐다.
그 순간에 나는 준호의 사고의 거대한 전환을 의심했다.
-사람들에게 사랑이나 행복 또는 정의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을까요.
중요한 건 옳은 답이 아니라 옳다고 생각하는 답이겠죠.
나는 가까스로 이성을 지탱시키며 본질을 피해 말했다.
-연희씨.. 다만 나는 서울에 더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준호는 말이 막혀버리더니 곧 빠른 어조로 낮게 계속해서 말했다.
-왜냐하면 내 생활을 변경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무엇때문에요?
준호는 말을 하려고 했었다.
적어도 그것을 원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준호는 말해보려고 애쓰다가는 소용없다는 듯이 손을 가로젓더니 포기하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준호에게 모든 것을 말하도록 할 수가 있을까?)
내가 동요되어 입술을 떨며 뭔가 말하려고 하자
준호는 일순간 동안 손을 내 입 위에 얹었다.
준호의 손은 뜨거웠다. 뜨겁고 건조했다.
-그렇더라도 연희씨는 나를 믿어야 해요.
나를 이렇게 쫓은 것이 악한 무엇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금 보다 자주 볼 수 없게 되는 것 뿐이에요.
내가 지금의 결정을 후회하게 될 날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줘요.
매우 견디기 힘든 날들이 될거에요.
준호는 짧게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까지 애착하고 있던 무엇이 갑자기 지긋지긋해지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잠시도 참을 수 없어지고 마는 것.
나의 모든 것이 전과 꼭 같은데도. 내 목소리나 태도나 습관들이..
그런데 갑자기 준호에게 그것이 변한 것같이 보이고
밉고 참을 수 없이 쓸쓸하고 적의에 찬 것으로 보이는 것.
그래서 떠나려는 것.
자기도 모르게 준호는 벌써 나로부터 자기 자신을 끌어내어 간 것은 아닐까.
나는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준호가 보아주기 때문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이 후 우리는 저녁을 함께 먹었지만 암울한 분위기가 맴 돌았고 둘 다 긴장하고 있었다.
준호는 평소처럼 섬세하고 자상하게 많은 것들을 챙겼다.
그러나 이 날은 준호의 완벽한 에스코트가 나에게 역설적으로 작용했다.
나는 이성이 점점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테이블에서 막 일어섰을 때 준호가 나를 다시 앉게 하더니
갑자기 내 발치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풀어진 구두끈을 묶어주기 시작했다.
준호는 이처럼 언제나 내가 아주 편안하게 보호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남자였다.
(이 사람이 나에게서 멀어지려 한다)
준호의 그러한 섬세한 움직임은
눈물나도록 어쩔 줄 모르는 아이러니한 분노를 내게 품게 만들었다.
-집에 가겠어요.
-나랑 있기 싫어요?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준호와 같이 있는다면 나의 행동은 점점 나쁜 방향으로 강요될 것만 같았다.
-택시를 타겠어요.
-데려다줄게요.
나는 싫다고 했지만 준호는 한사코 나를 자기의 차에 태웠다.
그리고 의자의 등받이를 뒤로 제쳐 내가 편히 기댈 수 있게 했다.
준호가 자신의 휴머니즘은 나약함 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이 사람은 나약한 결정을 또 내린 것은 아닐까.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준호를 아파트 정문에서 돌려보냈다.
준호의 차가 멀리 코너를 돌아 사라졌을 때 나는 확인 안 한 문자함을 열었다.
막내 동생 재범이에게 (긴급 전화요망)이란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는 단축 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잘 지냈니? 무슨 일이니?
-누나, 엄마가 암이래..
-뭐?
나는 충격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한참 동안 혼란스러운 슬픔에 몸을 내맡기고 완전히 고독하게 서 있었다.
나는 조금도 눈물을 가리려고 하지 않고 소리 없이 계속해서 울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혼자 틀어박혀버렸다.
방을 캄캄하게 해놓고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한 상태로 있었다.
하지만 멍해진 머리로도 내가 한 짓 때문에 벌을 받을 때가 온 것이라는 생각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갈증에 시달리다 보면 오히려 물맛도 잊어버리는 중환에 사로잡히듯이
나는 사랑의 목마름을 잊어버린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준호를 만났을 때 비로소 나 자신을 만난 것이었고
만약 그를 잃게 된다면
생명에의 직접적인 자연스러운 길이 끊긴다는 것을 점점 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실은 격렬하게 사랑을 희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준호에게서 달아나 버리고 싶은 강한 의무를 느꼈으나
창피스럽게, 경멸받을 만하게, 우스꽝스럽게 욕망에 지고 말았다.
준호가 아내는 선량하고 총명한 여자이지만
남자에게 꿈을 줄 수 없는 종류의 여자들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나는 가혹한 진실 대신 부드러운, 구원에 넘친 거짓을 택한 것인지도 몰랐다.
때때로 인간은 다만 타협 속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서운 생각을 한다.
나는 엄마를 미워한다.
그런데 엄마의 시한부 판정은 나에게 서럽고 묘하게 눈물겨우면서
더 많이 엄마를 미워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불시에 발판을 잃어버리고 낭떠러지에 굴러떨어진 이율배반적이고 생소한
싫은 느낌이 들게 한다.
새벽이 왔을 때,
안개 낀 아침의 이질적인 아름다움은 나를 엉망으로 폭발시켰다.
나는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나는 울면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고통의 중심에 있었고 준호는 어림없는 가장자리에 머무는 것 같았다.
내가 위로받을 수 없었던 것은 준호의 심장이 차가운 탓이기 보다
내 고뇌의 거센 열기가 금방이라도 파열할 듯 위급했기 때문이었을까.
며칠 후 나는 본가로 갔다.
나는 엄마를 만나서 좀 얘기를 나누고 또 위로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적어도 겉으로는
암 선고를 받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태평스러운 모습이었다.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앉은 엄마의 점잖은 몸가짐과 우아한 태도는
전혀 비극적이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냉혹한 현실에 대한 엄마다운 대처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엄마에게 닥쳐 온 운명의 한 복판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 자신의 발 밑에서도 방바닥이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았고
엄마의 운명이 나와 관계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단 한번 만이라도 엄마의 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엄마...
하고 나는 불렀다.
내 말은 한 마디도 엄마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절망적으로 말을 시작했다.
-엄마는 자신에 대해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왜 하소연 하거나 울지 않아요?
엄마는 작은 손짓으로 내게 침묵을 명했다.
그 손짓은 “잔인하다구? 그게 무슨 뜻이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왔잖아요. 나는 엄마 딸이잖아요. 왜 나한테 기대지 않는 거에요?
나는 불꽃같은 분노를 가지고 계속해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엄마는 이 말을 꽤 단정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로 말했다.
-엄마!
나는 소리지르며 울음을 터트렸다.
요새 나는 너무 자주 울고 있었다.
아, 이 얼마나 이상스러운 모녀인 걸까.
엄마는 내가 최선을 원해서 말하면, 그걸 듣지 않고 무시하고 덮어버렸다.
나는 엄마에게 경멸받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았다.
엄마와 나는 서로의 불행을 위해 태어났고
저마다 가치 있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상호간에 방해물이나 쇠사슬에 불과하다.
엄마는 매우 아름다운 편에 속하며 재능이 있고 주부의 모범이기는 하나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높은 목적을 향한 노력을 전연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정신적인 것을 의심하며, 나를 의심하고,
내가 충분히 돈 벌기를 할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경멸한다.
돈이 나한테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도 모르고!
나는 또 한 번 엄마와의 대화에 실패하고 비참한 꼴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생존본능처럼 준호를 찾았다.
절박한 탄원의 고함소리를 내어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배기겠는
괴수같이 커져만 가는 벌거벗은 자의식을
순박한 남정네의 너그러운 용납으로 어루만지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암담하고 의미 깊은 꿈에서 깬 사람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언가에 지쳐있는 것 같은 준호의 얼굴에는 어떤 결심의 빛이 보였다.
-우리들이 처음 만난 이래
나는 연희씨가 나의 생과 갈라놓을 수 없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어요.
연희씨는 내 생에 새로운 방향을 주었어요.
하지만 연희씨의 본질전체는 넓은 무대를 위해서 만들어져 있어요.
준호는 이렇게 말하고 잠시 동안 잠잠했다.
준호는 이 말을 아이러니와 악의가 없이 말했으나
그 말의 무뚝뚝한 객관성은 어떤 말보다도 날카롭고 가혹하게 들렸다.
(이 사람은 나를 밀어내려 하는 것일까..)
이 생각은 나의 뇌 속에 마치 벼락같이 떠올랐다.
그 순간에 나는 준호의 사고의 거대한 전환을 의심했다.
-사람들에게 사랑이나 행복 또는 정의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을까요.
중요한 건 옳은 답이 아니라 옳다고 생각하는 답이겠죠.
나는 가까스로 이성을 지탱시키며 본질을 피해 말했다.
-연희씨.. 다만 나는 서울에 더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준호는 말이 막혀버리더니 곧 빠른 어조로 낮게 계속해서 말했다.
-왜냐하면 내 생활을 변경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무엇때문에요?
준호는 말을 하려고 했었다.
적어도 그것을 원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준호는 말해보려고 애쓰다가는 소용없다는 듯이 손을 가로젓더니 포기하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준호에게 모든 것을 말하도록 할 수가 있을까?)
내가 동요되어 입술을 떨며 뭔가 말하려고 하자
준호는 일순간 동안 손을 내 입 위에 얹었다.
준호의 손은 뜨거웠다. 뜨겁고 건조했다.
-그렇더라도 연희씨는 나를 믿어야 해요.
나를 이렇게 쫓은 것이 악한 무엇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금 보다 자주 볼 수 없게 되는 것 뿐이에요.
내가 지금의 결정을 후회하게 될 날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줘요.
매우 견디기 힘든 날들이 될거에요.
준호는 짧게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까지 애착하고 있던 무엇이 갑자기 지긋지긋해지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잠시도 참을 수 없어지고 마는 것.
나의 모든 것이 전과 꼭 같은데도. 내 목소리나 태도나 습관들이..
그런데 갑자기 준호에게 그것이 변한 것같이 보이고
밉고 참을 수 없이 쓸쓸하고 적의에 찬 것으로 보이는 것.
그래서 떠나려는 것.
자기도 모르게 준호는 벌써 나로부터 자기 자신을 끌어내어 간 것은 아닐까.
나는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준호가 보아주기 때문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이 후 우리는 저녁을 함께 먹었지만 암울한 분위기가 맴 돌았고 둘 다 긴장하고 있었다.
준호는 평소처럼 섬세하고 자상하게 많은 것들을 챙겼다.
그러나 이 날은 준호의 완벽한 에스코트가 나에게 역설적으로 작용했다.
나는 이성이 점점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테이블에서 막 일어섰을 때 준호가 나를 다시 앉게 하더니
갑자기 내 발치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풀어진 구두끈을 묶어주기 시작했다.
준호는 이처럼 언제나 내가 아주 편안하게 보호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남자였다.
(이 사람이 나에게서 멀어지려 한다)
준호의 그러한 섬세한 움직임은
눈물나도록 어쩔 줄 모르는 아이러니한 분노를 내게 품게 만들었다.
-집에 가겠어요.
-나랑 있기 싫어요?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준호와 같이 있는다면 나의 행동은 점점 나쁜 방향으로 강요될 것만 같았다.
-택시를 타겠어요.
-데려다줄게요.
나는 싫다고 했지만 준호는 한사코 나를 자기의 차에 태웠다.
그리고 의자의 등받이를 뒤로 제쳐 내가 편히 기댈 수 있게 했다.
준호가 자신의 휴머니즘은 나약함 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이 사람은 나약한 결정을 또 내린 것은 아닐까.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준호를 아파트 정문에서 돌려보냈다.
준호의 차가 멀리 코너를 돌아 사라졌을 때 나는 확인 안 한 문자함을 열었다.
막내 동생 재범이에게 (긴급 전화요망)이란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는 단축 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잘 지냈니? 무슨 일이니?
-누나, 엄마가 암이래..
-뭐?
나는 충격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한참 동안 혼란스러운 슬픔에 몸을 내맡기고 완전히 고독하게 서 있었다.
나는 조금도 눈물을 가리려고 하지 않고 소리 없이 계속해서 울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혼자 틀어박혀버렸다.
방을 캄캄하게 해놓고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한 상태로 있었다.
하지만 멍해진 머리로도 내가 한 짓 때문에 벌을 받을 때가 온 것이라는 생각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갈증에 시달리다 보면 오히려 물맛도 잊어버리는 중환에 사로잡히듯이
나는 사랑의 목마름을 잊어버린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준호를 만났을 때 비로소 나 자신을 만난 것이었고
만약 그를 잃게 된다면
생명에의 직접적인 자연스러운 길이 끊긴다는 것을 점점 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실은 격렬하게 사랑을 희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준호에게서 달아나 버리고 싶은 강한 의무를 느꼈으나
창피스럽게, 경멸받을 만하게, 우스꽝스럽게 욕망에 지고 말았다.
준호가 아내는 선량하고 총명한 여자이지만
남자에게 꿈을 줄 수 없는 종류의 여자들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나는 가혹한 진실 대신 부드러운, 구원에 넘친 거짓을 택한 것인지도 몰랐다.
때때로 인간은 다만 타협 속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서운 생각을 한다.
나는 엄마를 미워한다.
그런데 엄마의 시한부 판정은 나에게 서럽고 묘하게 눈물겨우면서
더 많이 엄마를 미워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불시에 발판을 잃어버리고 낭떠러지에 굴러떨어진 이율배반적이고 생소한
싫은 느낌이 들게 한다.
새벽이 왔을 때,
안개 낀 아침의 이질적인 아름다움은 나를 엉망으로 폭발시켰다.
나는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나는 울면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고통의 중심에 있었고 준호는 어림없는 가장자리에 머무는 것 같았다.
내가 위로받을 수 없었던 것은 준호의 심장이 차가운 탓이기 보다
내 고뇌의 거센 열기가 금방이라도 파열할 듯 위급했기 때문이었을까.
며칠 후 나는 본가로 갔다.
나는 엄마를 만나서 좀 얘기를 나누고 또 위로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적어도 겉으로는
암 선고를 받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태평스러운 모습이었다.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앉은 엄마의 점잖은 몸가짐과 우아한 태도는
전혀 비극적이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냉혹한 현실에 대한 엄마다운 대처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엄마에게 닥쳐 온 운명의 한 복판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 자신의 발 밑에서도 방바닥이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았고
엄마의 운명이 나와 관계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단 한번 만이라도 엄마의 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엄마...
하고 나는 불렀다.
내 말은 한 마디도 엄마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절망적으로 말을 시작했다.
-엄마는 자신에 대해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왜 하소연 하거나 울지 않아요?
엄마는 작은 손짓으로 내게 침묵을 명했다.
그 손짓은 “잔인하다구? 그게 무슨 뜻이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왔잖아요. 나는 엄마 딸이잖아요. 왜 나한테 기대지 않는 거에요?
나는 불꽃같은 분노를 가지고 계속해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엄마는 이 말을 꽤 단정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로 말했다.
-엄마!
나는 소리지르며 울음을 터트렸다.
요새 나는 너무 자주 울고 있었다.
아, 이 얼마나 이상스러운 모녀인 걸까.
엄마는 내가 최선을 원해서 말하면, 그걸 듣지 않고 무시하고 덮어버렸다.
나는 엄마에게 경멸받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았다.
엄마와 나는 서로의 불행을 위해 태어났고
저마다 가치 있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상호간에 방해물이나 쇠사슬에 불과하다.
엄마는 매우 아름다운 편에 속하며 재능이 있고 주부의 모범이기는 하나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높은 목적을 향한 노력을 전연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정신적인 것을 의심하며, 나를 의심하고,
내가 충분히 돈 벌기를 할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경멸한다.
돈이 나한테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도 모르고!
나는 또 한 번 엄마와의 대화에 실패하고 비참한 꼴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생존본능처럼 준호를 찾았다.
절박한 탄원의 고함소리를 내어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배기겠는
괴수같이 커져만 가는 벌거벗은 자의식을
순박한 남정네의 너그러운 용납으로 어루만지게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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