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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ow must go on - 26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3 01:30 604회 0건
7월 12일에 엄마는 돌아가셨고 화장되었다.
엄마를 잃은 상실과 기아감은 내 전 의식도 지져 태워버렸다.
연기로 화한 엄마와 나의 모든 것.
물거품 같은 불의 포말 앞에서 나는 오히려 추웠다.
불의 추위에 떨며 나는 나의 벌을 빌었다.
갓 만들어져서 너무나 그 효험이 살아 있는 나의 벌.
그 열망의 의지는 그 이상의 필연이었다.

나의 본질 속에 있는 마녀적인 것, 아니, 화산적인 것은 나를 당황시킨다.
아마 나는 나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준호와 나의 만남은 다시 이어졌지만
그것은 헤어지기 위해서 수고하고 있는 나날들 같았다.
나는 열망 속에서 무참하게 침몰했다.
그것은 맨발로 달리려는 가시밭길의, 다시금의 분발이었다.
나는 극단적으로 행동했고 일부러 악하게 말 했고 조롱하고 비난하며 폭발했고
약속처럼 시시각각 죽어 넘어졌다.

나의 절망적인 계획은 진전되어 갔다.
별이 가득 찬 맑고 추운 시월의 어느 가을밤.
나는 준호로부터 그렇게도 열망하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준호와 나는 함께 거닐기 좋아했던 공원에 있었다.
그 밤은 내가 아직 한 번도 겪어 본 일이 없을 만큼 조용하고 유리처럼 투명한 밤이었다.

-엄마는 나를 싫어했었고 내가 화의 근원이고 엄마의 생을 망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내가 고통 받지 않았다면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사람은 정말 모순 덩어리죠?
나는 나의 운명이 마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달려있다는 듯이,
내 말의 파수를 보듯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연희씨 고통의 대부분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들이에요.
연희씨가 나를 믿고 그냥 내버려두기만 했어도..
세상에! 이 사람은 세상의 남자들이 빠짐없이 하는 상투적인 말을 하고 있었다.

-믿음이라구요? 아직도 나를 사랑하냐고 내가 물어보고 당신이 그렇다고 말하면
나는 믿어야 할까요? 그걸 믿어야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사람 간의 관계에서 믿음은 책임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완전한 것은 없어요.
심지어는 순수한 절망조차도 없고 모든 것은 혼합물,
이것저것이 섞인 혼합물일 뿐이에요. 믿음도 마찬가지에요.
나의 입술은 씁쓸하게 일그러졌으나 어둠 때문에 준호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날 사랑하나요?
나는 마치 본능이나 경험이 깊은 불신을 명하는
먹이 주는 곳으로 꼬여 나온 수줍은 짐승과도 같은 일종의 경계를 유지하며 말했다.

준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준호의 눈은 맑고 크게 나에게 향해 있었다.
나는 놀라움을 가지고 보통 때처럼 준호가 나의 마음을 사려고 애쓰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준호는 나의 마음을 풀어 놓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군요.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그러나 복종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어떤 것이 닥쳐와도 이미 더 놀라지 않을
또 고통에 고통을 쌓아올린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목소리였다.
이런 분위기는 나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 감정은 잠시 동안밖에 계속되지 못했다.
나는 곧 내가 스스로를 속이고 공감의 환상을 꾀는 거짓됨에 말려들고 있음을 알았다.

어둠은 짙어 갔다. 거의 자정이었다.
공원은 가을의 마른 나무와 이슬에 젖은 잔디밭 위에 천천히 썩어가는 첫 번째 낙엽의
코를 찌르게 강한 향기에 가득 차 있었다.

나의 목은 긴장으로 콱 막혀 있었고 내 입술은 뜨겁고 건조했다.
나는 목이 졸리우는 것과 같이 고통스럽게 이어서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의 가운데를 방랑해 다니고 있어요. 마치 집시처럼 이요.
우리는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데도 속해 있지 않아요.
우리에게 뚜렷한 선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이제 그 선을 준호씨가 그어주길 바래요.
나는 하지 않겠어요.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준호는 나의 눈에서 갑자기 조소의 불꽃을
또 나 자신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도전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
준호의 눈빛은 서늘해졌고 완전히 포기한 사람의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 한동안의 침묵이 깨지고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래요 헤어져요.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에는 단 한 마디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
라고 준호의 음성은 신음처럼 말했다.
준호의 고개는 천천히 숙여졌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참모습보다도 나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
준호가 이렇게 말하도록 이끌어 낸 것일까?
아니면 나는 준호를 나의 행복 보다 더 사랑하는가?




나는 준호를 여전히 사랑한다.
하지만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준호는 갔다.
나는 준호를 길가까지도 바래다주지 않았다.
이제 나는 혼자다.
더 할 말이 무엇인가?
나는 어쩌면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실망을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깨끗하고 똑바른 절단이었다.
끝났다.
나는 공원벤치에 앉아서 준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준호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준호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해버리는 불쾌한 의무를 끝마친 것이다.
불가피했던 일을 한 것이다.
준호는 짐이 하나 가벼워진 마음으로 계속해서 살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는?

나는 변덕스럽게 곧 내 상황을 저주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결코 그 속에 빠져들어간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전 보다 훨씬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싸워온 저 어두운 힘에 나를 맡겨야 한다.

지훈은 나의 이별소식을 듣자 거침없이 축하단다고 말했다.
그리고 준호는 나의 가장 내면에 품고 있는 이상형과 놀랍게도 꼭 같았을 테지만
연애에 매우 익숙하고 교활한 남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준호는 내가 생각해 오던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나는 준호를 사랑하게 된 것으로
이상형이란 순이론적인, 소망과 결합된 상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준호의 무언지 모르는 카리스마는 나를 지배하고 결정했다.
준호는 비지성적인 사람들과 조화하는 우아한 매력을 지녔고
부드럽게 보이는 탄력적이고 음악적인 비로드 같은 어둠을 지니고 있다.
그의 성질은 대체로 온유하지만 종종 뜻밖의 박력이 있다.
준호는 여자와의 다양한 연애사건을 과거에 경험했고
여자에 대한 성실함이란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 단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호는 오로지 나에게만 애정의 지속과 집착성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런 기분 좋은 신뢰의 관계를 준호를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느낄 수 없었다.
어느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변화무쌍한 정신의 소유자인 내가
준호의 식물적인 매력과 종종 이해할 수 없고 억제할 수 없는 태도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것이 교활함이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를 경험하지 않은 어느 누구에게도 그를 손가락질하도록 용납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가 설령 나쁜 남자일지라도,
선택하고 결정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니까.

동시에 이런 나의 마음이 상처를 가리는 가면과도 같이
완전히 폐쇄된 절망스러운 미련임을 또한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의 쉽고 신속한 판단에 의한 애정이나 동정에 넘친
비련의 여주인공 대접에 결코 위로받지도 않을 것이다.
잃어버린 무엇을 한탄하는 편이 한 번도 갖지 않았던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나는 고통 또한 재산임을 알았다.
이런 종류의 느낌은 그 일의 중심에 서 보지 않는다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걸 안다.
나는 절망스럽게 외친다.
이런 것은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그리고 문제가 되고 있는 그 남자를 당신이 알지 못한다면
내가 다만 부도덕하고 무능한 백치로밖에 안 보일 것이란 것을..





그리움의 치열한 고통을 경험으로 알게 된 나에게는 무시무시한 계획이 있었다.
이제 정말 그것을 실천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나의 불가침한, 침해될 수 없는 본질적이고 어둡고 야성적인 순수함이
과연 이 새로운 경험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새벽 두시.
나는 베란다의 타일바닥에 맨발로 웅크리고 앉았다.
나는 이것이 나에게 어떤 물리적인 고통을 줄 것인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두려웠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나는 얼마 참지 못하고 다시 그를 만나러 달려가게 될 것이다.
나는 준호처럼 하기는 싫었다.
나는 그와 완전히 끊어져야만 하고 재회의 가능성을 없애야 한다.

세 시가 넘었을 때, 나는 드디어 갈색 병을 집어 들었다.
병을 잡은 내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뚜껑을 열자 매캐하고 시큼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한 두 방울의 염산이 발등에 떨어지자 순식간에 살을 꿰뚫었다.
아주 깊고 심한 상처였다.
나는 아무 느낌도 없이 피가 솟는 것과 살이 찢어져 벌어진 것을 보았다.
나는 조금도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이상한 둔감이었다.
훨씬 뒤에야 나는 소리 지르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천길 벼랑에까지 떨어져 아찔한 수심을 실감하는 듯이 단말마로 몸부림치며 뒹굴었다.
나는 비로소 닿은 것이다.
성실하고 심각한 소원에.
이후엔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지막 여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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