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엉망이라는 비참감이 자의식의 저류에 납덩어리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순식간에 보호자에서 환자의 신분으로 바뀌어 3층 수술대에 눕혀졌고
엄마는 10층 병실에 홀로 남겨졌다.
천정에 매달린 수술대 위의 조명이 켜졌다.
그것은 살아있는 괴기스러운 생명체처럼
눈을 부릅뜨고 나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것 같았다.
-지금 네 꼴을 보니 행복은 짧은 얼마간의 밝은 빛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겠지?
맥박과 혈압을 체크하는 기계가 내 몸에 연결되고
간호사와 의사가 주고받는 건조한 대화들이 먼 데서 오는 것처럼 들려올 때
나는 K대학 병원 어디에선가 다른 환자를 치료하고 있을 준호를 떠올렸다.
-마취하세요.
라는 사무적인 의사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의 혈관 속으로 어떤 차가운 액체의 느낌이 흘러들기 시작했다.
나는 재같이 쏟아지는 무감각의 밑으로 질식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고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이 떠졌을 때 나는 탁류 아래의 깊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의식은 느리게 일깨워졌다.
회복실인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이 맑아질 때 까지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시각과 청각이 몽롱한 상태에서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간호사가 보호자가 올 때 까지 더 쉬어야 한다고 말렸지만
나에게 그런 부축의 손이 있을 리 없었다.
비틀거리며 겨우 병실로 돌아갔을 때 엄마는 초점 잃은 눈동자로 눈을 반쯤 뜨고
입을 벌린 채로 힘들고 희미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양 손은 억제대에 묶여 있었고
산소 호흡기와 연결된 모니터에서는 경계수위를 알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그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소리는 기어이 네 귀를 찢어버리고 말겠다는 결심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끈질기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엄마는 완전히 버려진 모습이었다.
천천히 죽어가는 엄마의 모습 위에 한 달 남짓 밖에 살지 못하고 떠난 태아의 형상이 겹쳐지자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축복받을 수 없고 부정되어질 생명을 잉태를 한 것의 두려움과
이제 막 손가락과 발가락이 생기기 시작한 고귀한 작은 한 생명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심정의 고통을 느끼며 숨죽여 울었다.
그 순간은 자연이 호흡을 중지한 것 같은 무시무시한 시간이었고
아무것도 생기를 전하고 있지 않은, 시간 보다는 영원에 속해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다른 어떤 노력으로도 내 기분을 전환시켜 보려고 애쓰지 않았고
나를 악질적인 우울 속에 내버려두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나의 우울은 조금도 맑아지지 않았다.
나는 짧은 순간이나마 한 생명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준호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격심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저주하게 될 것 같았다.
나는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어머니는 좀 어때요.
준호의 목소리에는 바쁜 일상에서 오는 생기가 묻어있었다.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그보단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나는 고의적으로 무감정하게 말하고 숨을 고른 뒤 이어서 말했다.
-나 임신 4주에요.
왜였을까. 나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었다.
준호는 영원처럼 침묵했다.
그러나 나는 그 침묵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준호의 말은 침묵에서 나와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준호씨 부인에게 알릴 수 있겠어요?
나는 완전히 포장되고 악의에 넘친 거짓말을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해버렸고
동시에 내가 얼마나 불행한가를 준호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 쉽게 들켜버리는
너무나 뻔한 거만과 고집의 자국도 나타내고 있었다.
공포스러운 전류가 나를 통해 준호를 감염시키는 것 같았고
붕괴해 가는 준호의 정신에 대한 명백성은 나에게 칼로 베는 것 같은 아픔을 주었다.
나는 저주받은 아기의 죽음과 함께 준호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나도 엄마와 함께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모든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운명은 결국 운명이라는 것.
생의 가장 중요한 일들은 당사자의 생각을 넘어서 엉뚱하게 결정되는 것이라고
나를 타일렀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추악한 것을 보려하지 않으면 중요한 것도 보지 못하게 되리란 사실을 예감했다.
이것은 냉정하고 공정한 죄와 벌이었다.
나는 이처럼 회색이고 이처럼 죽은 것 같은 광경을 전에 본 일이 없었다.
병실은 황폐한 모습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무섭게 깨끗하고 정돈된 분위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완전히 버림받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인생도 끝없는 풀밭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네 개의 벽이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맥박과 혈압은 아직 정상이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기계에 의존된 수치였다.
음식의 공급과 모든 치료는 중단되었고 엄마의 의식은 약물에 취해 불투명했다.
새벽 미명이었다.
엄마는 거의 잠을 자는 상태였지만
나는 서서히 어둠을 물리치며 벅차오르는 빛의 광경을 보여주고 싶어서
창문 쪽으로 엄마를 돌려 뉘어 주었다.
살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잠든 엄마의 모습이 쌔근쌔근 아기와 같았다.
나는 가만히 침대 위로 올라가 엄마 옆에 누워보았다.
문득 젊은 시절의 엄마가 떠오른다.
아장거리는 내 고사리 손을 잡고 나들이 하는 엄마의 꽃무늬 원피스는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옷 중에 가장 예뻤다.
잘못을 저지르는 날이면 혼꾸멍을 내려고 장롱 위에 숨겨놓은 엄마의 자막대기가
내겐 제일 위협스러웠고
난 자막대기를 내다버릴 수 있을 만큼 내 키가 어서 자라길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콤한 추억은, 엄마의 카스테라.
우리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간식이라고 해봐야
손님들이 가끔 쥐어주는 천 원짜리로 사먹는 구멍가게 과자가 전부였다.
그래서 동네를 순회하는 외판원에게서 큰마음 먹고 구입했을 원형 제빵기가
케케묵은 먼지를 털고 다락에서 내려오는 날이면 나는 행복했던 것 같다.
돈을 아끼느라 기름종이 대신 신문지를 깔아 구운 카스테라였지만
갓 구워 모락모락 김이 나는 빵 한 조각을 입에 쏘옥 집어넣었을 때의 살살 녹던 맛이란
세상 최고의 것이었다.
그 맛있는 카스테라를 만들어주던 엄마의 손에
지금은 주사바늘이 꽂혀 있다.
겨울날 고무장갑도 안 끼고 빨래를 하는 억척스럽고 아직 젊던 엄마의 거북이 등짝 같은 손을
난 가만 생각하니 애처로워했던 기억이 없다.
독하디 독한 손이라고, 자식 보다 돈 세는 걸 더 좋아하는 모진 손이라며 욕했으면 했지..
한 번도 곱게 잡아 어루만져 보지 않았다.
화장품 값이 아깝워 가꾸지 않은 못생긴 엄마 손은 예쁘장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 순간엔 그처럼 날카롭고 거부적이던 엄마의 기억은 물리쳐졌다.
나는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매우 애처롭고 극도로 몽상된 행복을
엄마의 마지막 시간을 통해 향락하려는 것일까?
나의 우울과 고독감이 나로 하여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엄마의 등짝 뒤에서 피난처를 찾게 하는 것일까?
이런 기분은 나를 감동시키기 보다는 유혹을 했다.
마치 가시와도 같이 나를 찔렀다.
내 손은 수액으로 퉁퉁 부은 엄마의 손 마디마디를 만지작거리다가 젖가슴으로 옮겨 갔다.
(이 젖가슴 힘차게 빨며 삼남매가 자란거구나)
나는 마치 생명자체를 만지는 것 같았다.
이 접촉 속에서 내 고통은 녹아 없어지고 막연하고 달콤한 음미의 공간이 생겨났다.
내 눈에는 눈물이 괴었지만 나는 눈물을 참았다.
그리고 평생을 죄인처럼 묶어두었던 말이 도망치듯 불쑥 내 입을 떠났다.
-엄마,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잠결에도 듣고 있었던 걸까.
-울지마..
라는 엄마의 이 한 마디에 내 억장은 무너지면서
간신히 억눌렀던 둑을 터트리고 흐르는 눈물에 목이 메였다.
그러나 나는 엄마에게 우는 것을 들키지 않았다.
엄마는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엄마에 대한 나의 비겁과,
나에 대한 엄마의 불신과 냉담에게 지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이상스럽게 동요되었다.
내가 겪은 일들이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한낱 언어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운명을 만드는 것은 나 자신 이외에 아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도대체 인간은 고뇌를 통해서만 현명해질 수 있는 것일까?
(오늘 새벽녘에 나는 나의 일생에 처음으로 진짜 결단을 내리겠다.
준호와 나의 사랑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도 불치의 병에 걸렸다.
그리고 나는 사랑이라는 자기유지 본능의 교묘한 수단이
고통이라는 비겁한 무기로 나를 완전히 쓰러뜨리기 전에
이것을 끝낼 자유를 택하겠다.)
나는 이 생각을 마치 노래의 후렴처럼 되풀이했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명령에 의해서일 것에 불과했지만
숨을 쉬면서도 죽은 것 같은 무감각 상태의 지속은
오히려 나에게 어떤 용기와 대담성을 주었다.
나는 순식간에 보호자에서 환자의 신분으로 바뀌어 3층 수술대에 눕혀졌고
엄마는 10층 병실에 홀로 남겨졌다.
천정에 매달린 수술대 위의 조명이 켜졌다.
그것은 살아있는 괴기스러운 생명체처럼
눈을 부릅뜨고 나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것 같았다.
-지금 네 꼴을 보니 행복은 짧은 얼마간의 밝은 빛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겠지?
맥박과 혈압을 체크하는 기계가 내 몸에 연결되고
간호사와 의사가 주고받는 건조한 대화들이 먼 데서 오는 것처럼 들려올 때
나는 K대학 병원 어디에선가 다른 환자를 치료하고 있을 준호를 떠올렸다.
-마취하세요.
라는 사무적인 의사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의 혈관 속으로 어떤 차가운 액체의 느낌이 흘러들기 시작했다.
나는 재같이 쏟아지는 무감각의 밑으로 질식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고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이 떠졌을 때 나는 탁류 아래의 깊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의식은 느리게 일깨워졌다.
회복실인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이 맑아질 때 까지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시각과 청각이 몽롱한 상태에서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간호사가 보호자가 올 때 까지 더 쉬어야 한다고 말렸지만
나에게 그런 부축의 손이 있을 리 없었다.
비틀거리며 겨우 병실로 돌아갔을 때 엄마는 초점 잃은 눈동자로 눈을 반쯤 뜨고
입을 벌린 채로 힘들고 희미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양 손은 억제대에 묶여 있었고
산소 호흡기와 연결된 모니터에서는 경계수위를 알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그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소리는 기어이 네 귀를 찢어버리고 말겠다는 결심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끈질기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엄마는 완전히 버려진 모습이었다.
천천히 죽어가는 엄마의 모습 위에 한 달 남짓 밖에 살지 못하고 떠난 태아의 형상이 겹쳐지자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축복받을 수 없고 부정되어질 생명을 잉태를 한 것의 두려움과
이제 막 손가락과 발가락이 생기기 시작한 고귀한 작은 한 생명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심정의 고통을 느끼며 숨죽여 울었다.
그 순간은 자연이 호흡을 중지한 것 같은 무시무시한 시간이었고
아무것도 생기를 전하고 있지 않은, 시간 보다는 영원에 속해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다른 어떤 노력으로도 내 기분을 전환시켜 보려고 애쓰지 않았고
나를 악질적인 우울 속에 내버려두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나의 우울은 조금도 맑아지지 않았다.
나는 짧은 순간이나마 한 생명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준호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격심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저주하게 될 것 같았다.
나는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어머니는 좀 어때요.
준호의 목소리에는 바쁜 일상에서 오는 생기가 묻어있었다.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그보단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나는 고의적으로 무감정하게 말하고 숨을 고른 뒤 이어서 말했다.
-나 임신 4주에요.
왜였을까. 나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었다.
준호는 영원처럼 침묵했다.
그러나 나는 그 침묵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준호의 말은 침묵에서 나와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준호씨 부인에게 알릴 수 있겠어요?
나는 완전히 포장되고 악의에 넘친 거짓말을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해버렸고
동시에 내가 얼마나 불행한가를 준호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 쉽게 들켜버리는
너무나 뻔한 거만과 고집의 자국도 나타내고 있었다.
공포스러운 전류가 나를 통해 준호를 감염시키는 것 같았고
붕괴해 가는 준호의 정신에 대한 명백성은 나에게 칼로 베는 것 같은 아픔을 주었다.
나는 저주받은 아기의 죽음과 함께 준호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나도 엄마와 함께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모든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운명은 결국 운명이라는 것.
생의 가장 중요한 일들은 당사자의 생각을 넘어서 엉뚱하게 결정되는 것이라고
나를 타일렀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추악한 것을 보려하지 않으면 중요한 것도 보지 못하게 되리란 사실을 예감했다.
이것은 냉정하고 공정한 죄와 벌이었다.
나는 이처럼 회색이고 이처럼 죽은 것 같은 광경을 전에 본 일이 없었다.
병실은 황폐한 모습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무섭게 깨끗하고 정돈된 분위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완전히 버림받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인생도 끝없는 풀밭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네 개의 벽이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맥박과 혈압은 아직 정상이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기계에 의존된 수치였다.
음식의 공급과 모든 치료는 중단되었고 엄마의 의식은 약물에 취해 불투명했다.
새벽 미명이었다.
엄마는 거의 잠을 자는 상태였지만
나는 서서히 어둠을 물리치며 벅차오르는 빛의 광경을 보여주고 싶어서
창문 쪽으로 엄마를 돌려 뉘어 주었다.
살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잠든 엄마의 모습이 쌔근쌔근 아기와 같았다.
나는 가만히 침대 위로 올라가 엄마 옆에 누워보았다.
문득 젊은 시절의 엄마가 떠오른다.
아장거리는 내 고사리 손을 잡고 나들이 하는 엄마의 꽃무늬 원피스는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옷 중에 가장 예뻤다.
잘못을 저지르는 날이면 혼꾸멍을 내려고 장롱 위에 숨겨놓은 엄마의 자막대기가
내겐 제일 위협스러웠고
난 자막대기를 내다버릴 수 있을 만큼 내 키가 어서 자라길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콤한 추억은, 엄마의 카스테라.
우리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간식이라고 해봐야
손님들이 가끔 쥐어주는 천 원짜리로 사먹는 구멍가게 과자가 전부였다.
그래서 동네를 순회하는 외판원에게서 큰마음 먹고 구입했을 원형 제빵기가
케케묵은 먼지를 털고 다락에서 내려오는 날이면 나는 행복했던 것 같다.
돈을 아끼느라 기름종이 대신 신문지를 깔아 구운 카스테라였지만
갓 구워 모락모락 김이 나는 빵 한 조각을 입에 쏘옥 집어넣었을 때의 살살 녹던 맛이란
세상 최고의 것이었다.
그 맛있는 카스테라를 만들어주던 엄마의 손에
지금은 주사바늘이 꽂혀 있다.
겨울날 고무장갑도 안 끼고 빨래를 하는 억척스럽고 아직 젊던 엄마의 거북이 등짝 같은 손을
난 가만 생각하니 애처로워했던 기억이 없다.
독하디 독한 손이라고, 자식 보다 돈 세는 걸 더 좋아하는 모진 손이라며 욕했으면 했지..
한 번도 곱게 잡아 어루만져 보지 않았다.
화장품 값이 아깝워 가꾸지 않은 못생긴 엄마 손은 예쁘장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 순간엔 그처럼 날카롭고 거부적이던 엄마의 기억은 물리쳐졌다.
나는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매우 애처롭고 극도로 몽상된 행복을
엄마의 마지막 시간을 통해 향락하려는 것일까?
나의 우울과 고독감이 나로 하여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엄마의 등짝 뒤에서 피난처를 찾게 하는 것일까?
이런 기분은 나를 감동시키기 보다는 유혹을 했다.
마치 가시와도 같이 나를 찔렀다.
내 손은 수액으로 퉁퉁 부은 엄마의 손 마디마디를 만지작거리다가 젖가슴으로 옮겨 갔다.
(이 젖가슴 힘차게 빨며 삼남매가 자란거구나)
나는 마치 생명자체를 만지는 것 같았다.
이 접촉 속에서 내 고통은 녹아 없어지고 막연하고 달콤한 음미의 공간이 생겨났다.
내 눈에는 눈물이 괴었지만 나는 눈물을 참았다.
그리고 평생을 죄인처럼 묶어두었던 말이 도망치듯 불쑥 내 입을 떠났다.
-엄마,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잠결에도 듣고 있었던 걸까.
-울지마..
라는 엄마의 이 한 마디에 내 억장은 무너지면서
간신히 억눌렀던 둑을 터트리고 흐르는 눈물에 목이 메였다.
그러나 나는 엄마에게 우는 것을 들키지 않았다.
엄마는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엄마에 대한 나의 비겁과,
나에 대한 엄마의 불신과 냉담에게 지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이상스럽게 동요되었다.
내가 겪은 일들이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한낱 언어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운명을 만드는 것은 나 자신 이외에 아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도대체 인간은 고뇌를 통해서만 현명해질 수 있는 것일까?
(오늘 새벽녘에 나는 나의 일생에 처음으로 진짜 결단을 내리겠다.
준호와 나의 사랑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도 불치의 병에 걸렸다.
그리고 나는 사랑이라는 자기유지 본능의 교묘한 수단이
고통이라는 비겁한 무기로 나를 완전히 쓰러뜨리기 전에
이것을 끝낼 자유를 택하겠다.)
나는 이 생각을 마치 노래의 후렴처럼 되풀이했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명령에 의해서일 것에 불과했지만
숨을 쉬면서도 죽은 것 같은 무감각 상태의 지속은
오히려 나에게 어떤 용기와 대담성을 주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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