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은 평화롭고 싶은 시간을 뚫고 올라와 불쑥 불쑥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
그것은 흩어버리고 나면 잠잠해졌다가 다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막연한 불길함이었다.
나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두 달 반 동안 모두 열 네 권의 책을 읽었다.
그 중에 대부분은 지훈이 사다 준 것들이었다.
지훈은 책과 함께 간식도 챙겨주었다.
나는 지훈이 나에게 읽혀지길 바라며 고른 책들을 무척 열심히 읽었고
치즈케익, 초밥, 화과자 따위의 간식도 맛있게 먹었다.
지훈의 방문은 적극적인 애정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런 지훈에게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지훈이 준호를 나쁘게 바라봤던 과거에서부터 현재 까지도
어떤 잠재적 연결감이 존속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편하기도 했다.
퇴원을 며칠 앞둔 저녁에 나는 병실의 텔레비전 소리가 귀에 거슬려
목발을 짚고 로비로 내려갔다.
나는 지훈이 가져다 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라는 책을 펼쳤다.
이 책의 화두는 ‘저항’이라는 단어로 귀결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하고 완성하면서
마지막에는 자신의 죽음으로 마무리 하려는 것 같은 이 책의 기본 뼈대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지만 실은 죽음과 죽음 사이에 놓인 삶의 형태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고른 지훈의 의도가 짐작되어서 미소했다.
-여전사!
나를 여전사라고 부르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어? 열 한 시나 되어야 온다지 않았니? 지금은 겨우 여덟시인데..
-저녁 약속이 취소됐어. 그 책을 벌써 2권 째 읽는구나.
지훈이 씨익 웃더니 내 옆으로 다가 앉으며 말했다.
-응. 너 다운 선택이야. 재밌지는 않지만 재밌어.
나는 말괄량이 같은 재빠른 어조로 말하고 혀를 낼름거렸다.
-장난칠 기운이 다시 생겨서 다행이야. 이번엔 내가 무슨 책을 가져왔을까?
나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거렸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였다.
-음.. 내가 유시민 싫어하는 걸 알면서 이걸 골랐어?
-알기 때문에 골랐지. 읽어보면 유시민이 싫지만 싫지 않아 질거야.
우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여전사, 퇴원 선물 뭐 해줄까?
-스포츠카!
-왜?
-지금의 내 상태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이상적이지만 받을 수 없게 불가능한 것 같아서!
나는 거침없이 말해놓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음....
지훈의 시선이 기브스한 내 발 쪽으로 가더니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농담한거야. 난 괜찮아. 흉은 좀 남겠지만 성형수술이라는 최첨단의 방법이 있어.
난 걸을 수 있고 하이힐도 다시 신을 수 있데.
-그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지훈아...
나는 진지하고 침착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불렀다.
지훈이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자해를 하고 의식을 잃기 시작한 순간처럼 삶을 강렬하게,
그처럼 집중되어서, 끔찍하게, 아름답게 느낀 때는 없어.
나는 불행 속에서 날개를 찾았어.
나는 행복 속에서 보다 불행 속에서 천사처럼 날아보았어.
나에게는 다행히도 감각하는 힘이 있잖아.
-그래 너는 강한 힘을 가졌어.
너의 어조는 언제 어디서든지 생에 대한 굽혀질 수 없는 타고난 흥미를 말하고 있어.
나는 애교스럽게 웃으며 손으로 브이자를 그려 보였다.
지훈은 나를 죄스러운 쾌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 같았다.
-혹시 나를 원망하니?
내가 너에게 한 말 때문에 둘 사이가 갈라진 것 같아서.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나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회피일거야.
내가 그 사람과 헤어진 건 너 때문이 아니야.
나는 부도덕의 한 가운데서 도덕을 지키려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버렸어.
세상 일들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
모든 건 맞물려 있었어.
그 사람이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고 건강한 정신에 대한 면역이 떨어졌을 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신뢰를 잃을 만한 행동을 해버린 거야.
하지만 너는 너의 입장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나에게 그랬던 걸 거야.
그렇더라도 나는 흔들리지 말았어야 했어.
나는 의미심장한 씁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지훈의 눈이 어떤 결연함으로 빛나더니 깊게 나를 응시했다.
-연희야..
나를 부르는 지훈의 목소리에는 초조감이 실려있었다.
-응?
-나랑 사귈래?
나는 땀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고 당황해서 침묵했다.
내가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리고 말하기를 주저하면서 책을 만지작거리자
지훈이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내가 놀람을 감추고 부드럽고 따뜻한 지훈의 손의 감촉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지훈은 그러지 못하도록 더 꼭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지훈을 바라봤다.
지훈의 표정은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대답 보다는 나의 어떤 반응이라도 요구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친구로서 좋아하고 존중하지만
결코 상대방이 있는 피안의 영역에의 문지방을 넘어설 수는 없을 거야.
너도 알지 않니. 너는 내 인생을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네 가치와는 달랐으니까.
그 사람과의 관계는 끝났어. 하지만 이건 모든 걸 의미하는 게 아니야.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기억하고 아마 어쩌면 평생 생각하게 될거야.
나는 곤혹스럽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하지만 네가 겪은 일로 인해서 그런 치명적 결함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나는 6년 전부터 너를 좋아했어.
하지만 나는 독신주의자였고 굉장한 정열에 불타서 너를 차지하지 않아도
이성에 대한 너의 냉엄한 거리가 나에게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을 줬어.
네가 똑똑한 체 하지만 실은 기막힌 바보였다는 걸 미리부터 알았더라면
나는 조금 더 일찍 용기를 낼 수 있었을지 몰라.
너는 혼자서는 암만해도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없어.
나는 너를 이제는 나의 곁에 두고 싶다.
-너는 나를 왜 좋아하기 시작했어?
-그 질문은 나에게 보다는 모든 남자를 향한 질문처럼 들리는구나.
-어쩌면...
-남자들이 너에게 호감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방관했던 건
그들이 너에게서 발견하는 매력이라는 것이 무가치하고 흔해빠진 것들이었기 때문이야.
나는 그들이 너의 속사람은 거북스러워하면서 흔한 매력에 사로잡히는 것에 대해
네가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너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어. 하지만 너 보다 예쁜 여자는 얼마든지 있거든.
하지만 너 보다 예쁜 많은 여자들은 그저 밋밋한 얼굴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너는 표정이 풍부해. 그래서인 거야.
너는 그 표정 때문에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을거야.
-그렇구나..
-연희야...!
지훈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엑센트를 집어넣어 나를 불렀다.
-응?
-그런 단답형 말고 내게 들려줄 이야기가 없어?
나는 네 생각을 듣고 싶어. 그게 뭐가 되었든..
나는 말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다는 듯 옅게 한숨을 내려 쉬고 나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어두컴컴하고도 출구 없어 보이는 복도를 무한히 걸어갈 때 문을 열어주었고,
나에게 와서 햇빛이 찬란한 넓은 평야의 광경을 보여주었어.
비록 그 평야에 내가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 광경만이라도 나를 최후의 절망에서 구제한 거야.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말이 막혀버리더니 더 이상 어떤 말도 찾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지훈아, 나는... 글쎄...
나는 승낙도 거절도 할 수가 없었다.
지훈이 혼란의 이유를 물었으나 나는 다만 손을 들었다가 다시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그것은 나의 심한 갈등의 정도를 완전히 나타내고 있는 몸짓이었다.
그러자 지훈은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다면서 쓸쓸하게 웃었다.
지훈이 돌아간 후에 나는 책을 읽을 수가 없어졌다.
(나는 지훈의 존재에 위로받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새롭게 희망적이기는 하나 또 다시 위험한 곳으로 먼 길을 떠나기보다는
정돈된 집에서 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는 어느 편이 더 나은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나에게 사랑은 꽤 많은 갈팡질팡과 눈물과 히스테리와 싸움과 화해와 끝없는 오해와
몇 개의 아름다운 밤과 많은 기다림으로서 기억에 남게 되었다.
사랑은 언제나 기다림과 연결되어 있다.
전화를 기다리고, 만남을 기다리고, 그의 이혼을 기다리고, 그의 최종적 결정을 기다리고,
처음에는 이성적 인내심을 가지고, 나중에는 바보 같은 강박에 시달리면서.
맙소사, 사랑은 기다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런 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도 준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흩어버리고 나면 잠잠해졌다가 다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막연한 불길함이었다.
나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두 달 반 동안 모두 열 네 권의 책을 읽었다.
그 중에 대부분은 지훈이 사다 준 것들이었다.
지훈은 책과 함께 간식도 챙겨주었다.
나는 지훈이 나에게 읽혀지길 바라며 고른 책들을 무척 열심히 읽었고
치즈케익, 초밥, 화과자 따위의 간식도 맛있게 먹었다.
지훈의 방문은 적극적인 애정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런 지훈에게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지훈이 준호를 나쁘게 바라봤던 과거에서부터 현재 까지도
어떤 잠재적 연결감이 존속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편하기도 했다.
퇴원을 며칠 앞둔 저녁에 나는 병실의 텔레비전 소리가 귀에 거슬려
목발을 짚고 로비로 내려갔다.
나는 지훈이 가져다 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라는 책을 펼쳤다.
이 책의 화두는 ‘저항’이라는 단어로 귀결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하고 완성하면서
마지막에는 자신의 죽음으로 마무리 하려는 것 같은 이 책의 기본 뼈대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지만 실은 죽음과 죽음 사이에 놓인 삶의 형태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고른 지훈의 의도가 짐작되어서 미소했다.
-여전사!
나를 여전사라고 부르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어? 열 한 시나 되어야 온다지 않았니? 지금은 겨우 여덟시인데..
-저녁 약속이 취소됐어. 그 책을 벌써 2권 째 읽는구나.
지훈이 씨익 웃더니 내 옆으로 다가 앉으며 말했다.
-응. 너 다운 선택이야. 재밌지는 않지만 재밌어.
나는 말괄량이 같은 재빠른 어조로 말하고 혀를 낼름거렸다.
-장난칠 기운이 다시 생겨서 다행이야. 이번엔 내가 무슨 책을 가져왔을까?
나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거렸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였다.
-음.. 내가 유시민 싫어하는 걸 알면서 이걸 골랐어?
-알기 때문에 골랐지. 읽어보면 유시민이 싫지만 싫지 않아 질거야.
우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여전사, 퇴원 선물 뭐 해줄까?
-스포츠카!
-왜?
-지금의 내 상태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이상적이지만 받을 수 없게 불가능한 것 같아서!
나는 거침없이 말해놓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음....
지훈의 시선이 기브스한 내 발 쪽으로 가더니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농담한거야. 난 괜찮아. 흉은 좀 남겠지만 성형수술이라는 최첨단의 방법이 있어.
난 걸을 수 있고 하이힐도 다시 신을 수 있데.
-그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지훈아...
나는 진지하고 침착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불렀다.
지훈이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자해를 하고 의식을 잃기 시작한 순간처럼 삶을 강렬하게,
그처럼 집중되어서, 끔찍하게, 아름답게 느낀 때는 없어.
나는 불행 속에서 날개를 찾았어.
나는 행복 속에서 보다 불행 속에서 천사처럼 날아보았어.
나에게는 다행히도 감각하는 힘이 있잖아.
-그래 너는 강한 힘을 가졌어.
너의 어조는 언제 어디서든지 생에 대한 굽혀질 수 없는 타고난 흥미를 말하고 있어.
나는 애교스럽게 웃으며 손으로 브이자를 그려 보였다.
지훈은 나를 죄스러운 쾌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 같았다.
-혹시 나를 원망하니?
내가 너에게 한 말 때문에 둘 사이가 갈라진 것 같아서.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나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회피일거야.
내가 그 사람과 헤어진 건 너 때문이 아니야.
나는 부도덕의 한 가운데서 도덕을 지키려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버렸어.
세상 일들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
모든 건 맞물려 있었어.
그 사람이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고 건강한 정신에 대한 면역이 떨어졌을 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신뢰를 잃을 만한 행동을 해버린 거야.
하지만 너는 너의 입장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나에게 그랬던 걸 거야.
그렇더라도 나는 흔들리지 말았어야 했어.
나는 의미심장한 씁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지훈의 눈이 어떤 결연함으로 빛나더니 깊게 나를 응시했다.
-연희야..
나를 부르는 지훈의 목소리에는 초조감이 실려있었다.
-응?
-나랑 사귈래?
나는 땀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고 당황해서 침묵했다.
내가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리고 말하기를 주저하면서 책을 만지작거리자
지훈이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내가 놀람을 감추고 부드럽고 따뜻한 지훈의 손의 감촉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지훈은 그러지 못하도록 더 꼭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지훈을 바라봤다.
지훈의 표정은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대답 보다는 나의 어떤 반응이라도 요구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친구로서 좋아하고 존중하지만
결코 상대방이 있는 피안의 영역에의 문지방을 넘어설 수는 없을 거야.
너도 알지 않니. 너는 내 인생을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네 가치와는 달랐으니까.
그 사람과의 관계는 끝났어. 하지만 이건 모든 걸 의미하는 게 아니야.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기억하고 아마 어쩌면 평생 생각하게 될거야.
나는 곤혹스럽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하지만 네가 겪은 일로 인해서 그런 치명적 결함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나는 6년 전부터 너를 좋아했어.
하지만 나는 독신주의자였고 굉장한 정열에 불타서 너를 차지하지 않아도
이성에 대한 너의 냉엄한 거리가 나에게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을 줬어.
네가 똑똑한 체 하지만 실은 기막힌 바보였다는 걸 미리부터 알았더라면
나는 조금 더 일찍 용기를 낼 수 있었을지 몰라.
너는 혼자서는 암만해도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없어.
나는 너를 이제는 나의 곁에 두고 싶다.
-너는 나를 왜 좋아하기 시작했어?
-그 질문은 나에게 보다는 모든 남자를 향한 질문처럼 들리는구나.
-어쩌면...
-남자들이 너에게 호감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방관했던 건
그들이 너에게서 발견하는 매력이라는 것이 무가치하고 흔해빠진 것들이었기 때문이야.
나는 그들이 너의 속사람은 거북스러워하면서 흔한 매력에 사로잡히는 것에 대해
네가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너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어. 하지만 너 보다 예쁜 여자는 얼마든지 있거든.
하지만 너 보다 예쁜 많은 여자들은 그저 밋밋한 얼굴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너는 표정이 풍부해. 그래서인 거야.
너는 그 표정 때문에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을거야.
-그렇구나..
-연희야...!
지훈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엑센트를 집어넣어 나를 불렀다.
-응?
-그런 단답형 말고 내게 들려줄 이야기가 없어?
나는 네 생각을 듣고 싶어. 그게 뭐가 되었든..
나는 말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다는 듯 옅게 한숨을 내려 쉬고 나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어두컴컴하고도 출구 없어 보이는 복도를 무한히 걸어갈 때 문을 열어주었고,
나에게 와서 햇빛이 찬란한 넓은 평야의 광경을 보여주었어.
비록 그 평야에 내가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 광경만이라도 나를 최후의 절망에서 구제한 거야.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말이 막혀버리더니 더 이상 어떤 말도 찾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지훈아, 나는... 글쎄...
나는 승낙도 거절도 할 수가 없었다.
지훈이 혼란의 이유를 물었으나 나는 다만 손을 들었다가 다시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그것은 나의 심한 갈등의 정도를 완전히 나타내고 있는 몸짓이었다.
그러자 지훈은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다면서 쓸쓸하게 웃었다.
지훈이 돌아간 후에 나는 책을 읽을 수가 없어졌다.
(나는 지훈의 존재에 위로받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새롭게 희망적이기는 하나 또 다시 위험한 곳으로 먼 길을 떠나기보다는
정돈된 집에서 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는 어느 편이 더 나은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나에게 사랑은 꽤 많은 갈팡질팡과 눈물과 히스테리와 싸움과 화해와 끝없는 오해와
몇 개의 아름다운 밤과 많은 기다림으로서 기억에 남게 되었다.
사랑은 언제나 기다림과 연결되어 있다.
전화를 기다리고, 만남을 기다리고, 그의 이혼을 기다리고, 그의 최종적 결정을 기다리고,
처음에는 이성적 인내심을 가지고, 나중에는 바보 같은 강박에 시달리면서.
맙소사, 사랑은 기다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런 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도 준호를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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