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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ow must go on - 27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3 01:30 546회 0건
나의 그런 짓은 냉정히 생각해 본다면 순수한 광증이었다.
내 생명을 아무렇게나 흘려보내고 참으로 살지 않으리라는 패배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삶의 토대를 만들고 싶은 소망이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이었다.

나를 병원으로 데려간 사람은 지훈이었다.
지훈은 나의 전화를 받고 단걸음에 달려와 주었다.
결코 침착을 잃지 않는 것은 그의 천성인 것 같았다.
지훈은 화가 나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동요하지 않는 조용한 몸짓으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나는 거의 실신상태로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상처가 심각하다는 것과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상스럽게 담담했다.
고통의 한복판에는 아무리 심한 고통도 와 닿지 않는 피안지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일종의 기쁨이 있었다.
아니, 승리에 넘친 긍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발등은 소독되어졌고 나는 통증 때문에 심하게 소리 질렀다.
그리고 진통제를 맞았고 나는 곧 일어나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진정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지훈에게 고맙다는 인사 대신 이렇게 말했다.
-김지훈, 그렇게 안쓰럽게 쳐다볼 거 없어.
나는 지금 무섭게 도덕적인 짓을 한 거야.
심하게 구토하고 난 뒤에야 평화는 찾아오는 거야.
-나는 처음 알았다. 사람의 뼈의 색깔이 이렇게 예쁘다는 것을..
지훈은 농담으로 동문서답했지만 그 목소리는 쉰 것 같았고 딱딱해져 있었다.

나는 응급수술을 받았다.
서 너 차례 이식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우려와 다르게 봉합이 되었기 때문에
수술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나의 병실은 정형외과 치료실 바로 맞은편이었다.
때문에 나는 아침 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고
그것은 꽤나 큰 심리적 압박이었다.
나는 이틀에 한 번 씩 치료를 받았는데
치료를 받는 날이 되면 새벽부터 깨어나 미리 울곤 했다.
그런 물리적 고통을 제외한다면 병원에서의 나의 생활은 평화로운 편에 속했다.
나는 아무것도 결정할 필요가 없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나는 신체적으로는 구속되었으나 정신적으로는 자유를 얻은 셈이었다.

민숙의 분노는 보다 인간적이고 일차원 적인 것이었다.
민숙은 반 기브스를 하고 있는 내 다리를 보고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욕을 한 바가지쯤은 쏟아 내더니 곧이어 눈물을 흘렸고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더니 다음엔 준호를 향해 분통을 터트렸다.

민숙의 준호를 향한 분격함은 내 곁에 머물며 간호해 주는 며칠 간 멈춰지지 않았고
내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서도 준호를 원망하는 것 대신
육체에 마저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마무리 하려 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감정은 그렇게나 가장 가까운 친구에 의해서도 구제받을 수 없는 무엇이었다.

곧 크리스마스였고 눈이 내렸다.
병원의 10층에는 넓은 테라스가 있었는데
민숙은 나를 휠처어에 태우더니 그곳으로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민숙은 테라스에 도착하자 내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고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공기는 서늘했고 기분 좋게 맑았다.
나는 휠처어의 바퀴를 굴려 눈이 내리는 곳 까지 다가가서
다치지 않은 왼 발을 최대한 내밀었다.
건강한 나의 발에 차가운 눈이 떨어져 닿더니 곧 녹아버리기를 반복했다.
내가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놀이에 몰두해 있을 때
낯익은 체취와 발걸음이 내 앞에 나타났다.

민숙이 아니었다.
그 순간에는 아무런 감정도 찾지 못할 만큼 놀라움에 넘친 뜻밖의 재회였다.
내 앞에 서 있는 준호는 말이 없었다.
나를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준호의 눈은 초점 없이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나도 말을 하는 것을 삼갔다.
왜냐하면 나는 가장 조심스럽게 준호와 나 사이의 비밀의, 침묵의, 오히려의 깊은 대화를
그렇게 꾀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우리는 30분 이상을 그렇게 굳어 있었다.

-왜 나를 방해하러 왔어요?
나는 겨우 입을 떼어 무감하게 말했다.
나의 말은 예사롭게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았으나
나의 목소리에는 갑자기 불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준호의 방문은 나에게 추억과 소망을 가져온 것이다.

나를 비로소 쳐다보는 준호의 눈은 강하고 열렬한 광채를 띠었으나
그건 일순 후에는 사라져 버렸다.
그러더니 눈물이 떨어졌다.
굵은 눈물의 방울이었다.

준호는 고통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준호는 말을 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그렇게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만약 당신이 알았더라면....?
-....
-내가 말해주었더라면....
-무슨 소리에요?
-그래도 당신이 이렇게 했을까....?

나는 준호의 눈에 공포가 떠 있는 것을 보았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준호의 눈은 그때의 어떤 일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준호는 아직 말을 안 했다.
어떤 끔찍스러운 일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준호는 더듬거리면서 서툴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백번도 더 이혼을 생각했어요.
아내에게 사실을 이야기 하고 나를 단념시키는 것이
기만하는 것 보다 덜 무거운 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다정하고 온유한 아내의 얼굴은 나를 겁쟁이로 만들곤 했어요.
그런데 이제 나는 나쁜 운명에 의해 아내를 버릴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된 거에요.

여기에서 준호는 이야기를 중단하고 잠시 침묵하다가
심각하고 침울한 어조로 힘겹게 다시 입을 열려 하고 있었다.
준호는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내 아들이...... 민기가...... 백혈병이에요.

내 눈은 충격과 연민으로 동그랗게 떠졌다.
나는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준호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나는 나에게 닥친 일을 내던질 수가 없어요. 연희씨에게 짐을 지울 수도 없어요.
이 운명을 피해 달아난다면 연희씨와 함께 한다고 해도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무가치하게 느껴질 것이에요.

나는 사람이 많은 경험을 겪은 뒤에 갖게 되는 얼굴,
무엇이든 준비가 되어 있는 관대함에 넘친 얼굴,
많은 것을 알고 나서도 생을 경멸하지 않는 사람의
우수에 넘친 고요가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 날 이후 나는 준호를 내 시야에서 완전히 잃어버렸다.
준호는 내 다친 발 앞에 서서 두 시간을 그렇게 울다가 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못 견디게 지친 마음으로 심한 추위를 느끼며 떨었다.
휠처어를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민숙은 나를 따뜻한 실내로 옮긴 후 커피를 가져와 내밀었다.
나는 받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얘기를 나눴니? 그 자식.... 아니 그 사람이 또 네 마음을 아프게 한 거야?
민숙이 조심스럽게 탐구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왜 그랬니? 내가 한 몹쓸 짓을 왜 그 사람이 알아버리도록 했니?
나는 완강하지만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자기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서도 그 사람을 보호해 주려고 하는 너라니...
그래서 나한테 화가 나니?
민숙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처음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야.
-어째서?
-수수께끼가 풀렸거든.
-수수께끼?
-응
-그 말은 이제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소리야?
민숙은 약간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글쎄 내가 온전히 모든 걸 받아들이기 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거야.
하지만 이 적나라한 진실과 중요한 인식으로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내 생각의 유령들은 사라지게 되겠지.
-그 사람은 네가 가진 자기의 아이를 부정한 사람이야.
그건 그동안 그 사람이 너에게 해왔던 구애에 배반되는 명백한 잘못이야.
-내가 피임을 안 한건 그 사람 동의 없이 순전히 나 혼자 결정한거야.
그래서 나는 벌을 받은 것 같고 죄책감이 생겼어.
민숙아, 그 아이는 다만 이 세상에 나올 운명이 아니었던 거야.

-남자들이 너를 시기하고 싫어하고 그러면서도 사랑한 건
사랑에 관한 너의 냉소주의 때문이라고 난 생각 했어.
그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위대한 자산처럼 보였어.
그 사람의 무엇이 너를 이렇게 까지 맹신하도록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이 도대체 너에게 무슨 짓을 한거니?
민숙은 격양된 어조로 따지듯이 말했다.

-맹신이라구?
나는 피식 웃었다.
-민숙아...
나는 온유하고 다정스럽게 민숙을 부른 뒤 일부러 뜸을 들여 덧붙여 말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건.. 그건 아이를 낳는 일과 같아.
한 번 낳아버린 마음인데 어떻게 그걸 되돌릴 수가 있어?
설령 그 사람이 비겁한 겁쟁이거나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였다고 할지라도 말이야.
내가 선택한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바라던 종류의 사람이 아니고
나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해서 사랑을 거둬들인다면 그게 사랑이야?
사랑이 어떻게 변한단 말이니...
-세상에 맙소사! 너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그 날 밤 나는 오래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나는 하늘이 열려 있는 성당 안에 있었다.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빛으로 가득 찬 눈부신 하늘이었다.
나는 점점 눈이 시려왔고 강한 광선에 의해 시력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두려움과 아픔이 섞여 있는 신기한 평화를 느꼈다.
그때에 갑자기 모든 창문으로 새 떼가 날아들었다.
시커먼 기름을 뒤집어 쓴 새들은 온통 나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눈을 떴고 가위에 눌렸다.
악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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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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