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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3 01:27 667회 0건
평일이어서 그런지 에버랜드를 찾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진우는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갔다. 조수석 문을 열고 지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려서려던 그녀가 비틀거렸다. 그녀의 부츠 뒤축이 문턱에 걸린 것이었다.

“어 멋~!”

당황한 지아가 진우에게 매달렸다. 얼떨결에 그녀를 끌어안은 진우가 그녀를 빤히 내려다봤다. 평소보다 표정이 밝아진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 순간, 그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은 충동에 휘말렸다.

놀랐던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쳤던 지아가 수줍은 표정으로 벗어나려고 하자, 그가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받쳐들고 빤히 내려다봤다. 예기치 않은 그의 행동에 당황하는 그녀의 눈빛! 그는 그녀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로 천천이 다가갔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고 그녀는 급히 숨을 들이 마셨다.

“.........!”

동그랗게 떴던 지아의 눈동자가 스르르 감겼다. 진우는 가슴에 안은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고 당겼다. 당황했던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그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녀가 마음을 빼앗겼던 남자는 없었다. 마냥 젊음에 부풀은 시절을 보내다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결혼을 했던 것이다.

지아의 결혼생활은 암담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녀에게 진우는 처녀시절로 돠돌아가는 타임머신 같았다. 은연중에 그를 가슴에 담고 있던 그녀는 아늑하고 달콤한 세상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입술과 입술이 감정의 불씨를 일으켰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혀를 빨아 당겼다.

“음........!?”

지아가 다시 눈동자를 크게 떴다. 예상치 못한 그의 열정이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키스가 프렌치 키스로 변하고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껴안은 팔에 힘을 주어 그녀의 허리를 당겼다. 입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감촉! 가슴속 깊이 그녀를 생각하고 있던 그의 감정이 솟구쳤다.

“아........!”

지아는 온 몸의 신경이 살아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 동안 남편에게 강압적으로 당했던 스킨쉽은 역겨운 감정뿐이었다. 그런데 진우에게 첫 키스를 받는 순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심장이 두근거렸었다. 그리고 그의 키스를 받을때마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의식했다.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여자의 본능이었다. 아니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열정으로 가득한 뜨거운 남자의 체취! 진우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헤집고 들어온 것이었다. 흠칫하며 숨을 멈추던 그녀는 눈을 사르르 감으며 그의 혀를 받아 들였다. 혀와 혀가 엉키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민감한 감각속에 휘말렸다. 문득 그녀는 주위를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녀는 살프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사람들이 봐요.......!”
“...........”

속삭이듯이 촉촉한 목소리를 흘린 지아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진우의 가슴에서 벗어났다. 주변을 살핀 그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감정이 고조된 표정이 역력한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감정을 이해하듯이 미소를 흘린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손을 마주잡은 그들은 사람들 틈에 끼어 높이 솟아 돌아가는 놀이기구를 향해 걸어갔다.

멀리 보이는 놀이기구의 원형 선반이 기둥위로 치솟았다가 추락할때마다 사람들의 환성이 터져 나왔다. 바라보며 걸어가는 지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겠다.......!”
“여기 안 와봤나?”

“친구들과 한번 왔어요. 사실 이런 곳에 자주 올 수가 없었어요. 항상 승용차로 등교시켜줬고 집에 올 때도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거든요.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많지 않았어요.”
“가족들 관심과 보호를 많이 받고 자랐네.”

“글쎄요......!? 그게 보호인지는 몰라도, 친구가 많지 않았어요. 그게 후회되기도 하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차라리 그 시절이 행복했던거 같아요. 철이 없어서 그런지 원래 내 성격이 쾌활해서 그런지, 지금은 아니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니, 즐거운 마음을 가져요.”

“난, 언니 오빠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특히 오빠가 있었으면 했는데.......”
“..........!?”

진우는 권 태호 회장이 자식이 없어서 지아를 입양했기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 입장에서 보면 어린 시절부터 사육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권 종호의 야욕에 희생물이 된 것이었다. 그는 더욱 그녀를 권 회장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생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지아가 그를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귀는 여자........! 있어요?”
“여자.......!?”

“이를테면 마음에 담아둔 여자라든가.......?”
“사귀는 여자는 없어도, 항상 가슴속에 담아놓은 여자는 있지.......”

“어떤.......! 여자인가요?”
“알고 싶어......?”

“그냥, 궁금해서요........”
“지금, 내 옆에 있잖아.”

“네.......!? 피 잇~!”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은 진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눈동자를 크게뜨고 그를 힐끔 바라본 지아가 도톰하고 작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진우는 처음으로 진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녀 또한 자신에대한 그의 감정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나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아는 남편에게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상으로 정말 의지할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걸음을 옮기는 진우는 자신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왜.......!? 거짓말 같아?”
“날 놀리는 거지요?”

“그렇지 않은데.......!”
“..........!?”

지아는 여객선에서 진우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따금 고통스러운 현실이 잘못된 운명때문이라고 탓했다. 그리고 진우를 만난 것도 운명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치 오래부터 찾고있던 사람을 만나는 감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연한 만남은 아닌 것 같아서 궁금했었다.

“그날 있잖아요.......?”
“무슨........!?”

“여객선 사고가 나던날,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날.......! 어디가려고 했어요?”
“아~! 그날......!? 미국에서 온지 얼마 안됐는데, 무작정 여행 다니는 중이었지.......”

진우는 의도적으로 그녀의 가족을 뒤쫓아 다녔다고 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마주친 순간 넋을 잃고 쳐다봤던 것은 사실이었다. 영혼까지 빼앗길 정도로 가슴이 뜨거워졌었다. 그녀 또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끼지 못했던 감정에 사로잡혔었다.
진우의 말에 지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난, 혹시 예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인가 착각했었어요.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그날........”
“사실은 아가씨인줄 알았는데........”

“실망했겠네요?”
“글세......! 그래도 관심을 멈출 수 없었어.”

“왜요!?”
“음......!? 뭐라고 표현할가......! 들판에 혼자 남겨진 여자 같다고 할가.......”

“그렇게 보였나요.......!? 동정하는 건 아니지요?"
"그건 아닌데.......나도 모를 느낌이었지."

"저는 정말 혼자가 싫어서, 형제가 있었으면 했는데.........”
“........”

지아의 얼굴에 쓸쓸함이 깃들어보였다. 그녀는 신화 그룹의 최 태호 회장의 양녀로 풍족함과 보호를 받고 자랐다. 부족함이 없이 자란 그녀는 활달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내면적으로는 혼자라는 생각에 고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불만을 터트리듯이 땅바닥의 돌을 툭 걷어찼다. 그리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진우를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혈액형이 머예요?”
“O 형.......”

“나도 O형인데. 외롭다고 생각은 했지만, 결혼전만해도 잘 웃고 두려움이 없었는데......철 없어서 그랬나!?”
“...........”

“오빠라고 부르면 안되나.......?”
“오빠.....!?”

지아의 물음을 되받아 흘리는 진우가 멈칫하였다. 평소 감정을 들어내지 않던 지아의 말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는 기억조차 없는 여동생을 떠올렸다. 다만 악몽속에 아릿하게 떠올려지는 어린 아기였다. 그의 표정을 살피는 그녀가 다시 물었다.

“괜찮지요......!?”

“나는 괜찮지만, 글쎄......! 그러고 싶어?”
“..........!”

되묻는 진우의 말에 어색한 표정으로 눈웃음을 지은 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우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문득 진우는 여동생이 살아 있다면 지아 나이 또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호칭이 증요하지 않았다. 또한 즉석에서 대답하면 농담처럼 들리고 진실성이 없는 것았다.

진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높이 치솟는 놀이기구 앞으로 다가가선 그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이거 타 볼까......?”
“응! 타고 싶어요.”

표를 구입한 진우는 지아를 데리고 일열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뒤에 가서 섰다. 높이 치솟았던 놀이기구가 추락하면서 비명과 환성을 지르던 사람들이 입구로 우르르 나왔다. 웃는 사람도 있고 겁에 질려 눈물이 글썽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진우와 지아는 나란히 놀이기구위에 올라 앉았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앉아 있는 원반이 천천히 솟아 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밑으로 추락하며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비명을 질렀다.

“어 맛~! 어떡해........”

눈을 질끈 감은 지아가 진우에게 매달렸다. 엷은 미소를 흘린 그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놀이기구가 높이 치솟거나 추락할때마다 그녀는 더욱 바짝 그의 가슴을 파고들며 얼굴을 묻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놀이기구에서 내려왔을 때 그녀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음......!”

넋을 잃은 표정으로 지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시 그들은 높고 낮은 레일을 달리는 열차 놀이기구로 다가갔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같이 밝은 표정을 지은 그녀가 말했다.

“우리, 이것도 탈가요......!?”
“정말 괜찮겠어?”

“헤 헤~! 난, 괜찮은데.”
“안 괜찮은거 같은데.”

“음......!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오빠가 염려할 만큼 겁쟁이 아닌데~!”

장난꾸러기 소녀처럼 웃음을 흘린 지아가 눈웃음을 쳤다. 진우는 오빠라는 호칭에 얼떨떨햇다. 그는 자신있다는 표정을 하는 그녀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열차를 타고 급한 경사를 질주할떼 그녀는 꺄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매달렸다.

열차 놀이기구에서 내린 그녀가 휘청거리며 입구로 걸어나갔다. 진우는 안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바닥에 주저 앉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크.......! 나, 오줌 쌀번했어. 호호.......!”
“하하하........! 어지럽지?”

“조금........! 하지만, 스릴있어. 크크크.......! 미치겠네.”

진우는 생각보다 순수하고 거침없는 지아의 말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다른 놀이기구를 타자고 서슴없이 말했다. 두가지의 놀이기구를 더 타고 나서도 그녀는 무서움도 없이 소녀처럼 마냥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범버카 앞으로 다가간 그녀가 미소를 흘렸다.

“이것도 타 보고 싶네! 제미있겠는데.”
“그럴까......!”

진우는 문득 짖궂은 생각이 들었다. 범퍼카에 올라앉은 그는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져 다른 사람 뒤로 숨었다. 그녀가 그를 찾느라고 두리번거렸다. 그는 속도를 내서 그녀의 버버카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범퍼카를 들이 받았다. 쾅! 소리와 함께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어 맛! 난 몰라........!”
“하하.......!”

균형을 잃은 그녀의 범퍼카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핸들을 잡고있던 그녀의 팔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진우가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들은 어느새 오누이처럼 친근함을 느꼈다. 놀란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뿜어낸 그녀가 하얗게 눈을 흘겼다.

“못 됐어~! 가만 안둘거야.”
“하하.......!”

씨근덕거리는 지아가 진우를 쫓아 범버카를 몰고 왔다. 서로 쫓고 쫓기며 범버카를 부딪치며 즐기는 사이에 시간이 종료됐다. 범퍼카에서 내린 그녀가 그를 쫓아왓다. 그리고 두 주먹을 쥐고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애들처럼 짖궂어. 정말 못됐어!”
“하하......! 운전 교습소도 아니고, 그런 재미로 타는거지. 뭐.”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놀이기구를 기다렸다가 타느라고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한결 스스럼이 없어진 지아가 스스로 진우의 팔장을 꼈다. 그는 양식 전문점으로 지아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녀는 시장했던지 주문한 스테이크를 덥석 집어 접시위에 올려놓고 잘라 먹었다. 그리고 포크로 찍은 스테이크 조각을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지아는 피곤했는지 꾸벅거리고 졸았다. 집으로 들어가니 가정부 조 숙희가 눈동자를 휘둥그렇게 뜨고 그들을 쳐다봤다. 진우는 지아와 외출하는 것이 처음이라서 가정부의 눈치가 보였다. 조 숙희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지아에게 물었다.

“어디 다녀 오셨어요?”
“그냥, 답답해서. 바람쏘이러........”

태연한 표정으로 지아가 말끝을 흐렸다. 지아는 남편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조 숙희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 지아는 사실 남편과 그녀를 방관하고 있지만 내심 역겨워서 상대하기도 싫었다. 그녀에게 만큼은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오히려 건방지다는 눈빛으로 조 숙희를 흘겨 봤다. 진우는 퉁명스러운 말투를 흘리는 지아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지아는 외출복을 훌훌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나온 그녀는 피곤함에 일찍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침묵속에 갇혀 있었던 그녀는 진우와 함께 했던 외출이 너무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찌든 일상생활에 젖어있는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던 순간이었다.

지아는 습관차럼 항상 혼자 침대에 누워 잠들었었다. 그런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지아는 갑자기 진우가 곁에 없다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의 그윽하고 자상한 눈빛은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를 생각할수록 그녀는 새삼스럽게 자신이 여자인 것을 자각할수 있었다. 폭력적인 남편에게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밤이 늦어서 잠이든 지아가 눈을 뜨니 창문 커튼사이로 밝은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부리나케 일어난 그녀는 잠옷차림으로 거실과 주방을 살폈다. 진우의 모습을 찾아 다닌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가 출근한 집안은 썰렁하기만 했다. 집안에 혼자 남아있다는 쓸쓸함에 그녀는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세면을 하고 나온 지아는 시장함을 느껴 주방으로 들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던 그녀는 식사를 포기하고 돌아섰다. 혼자 식사를 하려니 식욕이 없었다. 주방과 연결된 조 숙희의 방문을 열고 들여다봤다. 그녀는 TV를 켜놓은채 침대위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거실로 나온 그녀는 적막함을 견딜수 없었다. 베란다 창문으로 밝은 햇살의 정원을 바라보던 그녀는 오디오의 전원을 눌렀다. 그녀가 즐겨 듣고 있는 CD 에서 라사 델 셀라의 신비하고 구슬픈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디오의 볼륨을 높인 그녀는 발레리나처럼 팔을 벌리고 율동을 했다.

권 회장이 없는 신화그룹의 비서실 분위기는 부드럽고 화기애애했다. 이따금 울려오는 잔화벨소리, 그리고 직원들의 잡담과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진우는 일상적으로 컴토하는 서류를 들여다보던 시선을 창문으로 향했다. 어제나 다름없이 높은 구름이 떠있는 맑은 날씨였다. 그는 배시시 눈웃음이 깃든 지아의 모습을 떠올리고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책상위의 서류를 들고 일어난 그는 비서실을 나왔다. 기획실에 통보해줄 문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도를 걸어가던 그는 벨소리가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멈추어섰다. 낯선 전화번호이기에 진우는 망설였다. 그는 혹시 오 덕재에게 걸려온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의외로 지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기........! 오빠, 바빠요?”
“아~! 지아, 왠일로......!?”

진우는 서슴없이 오빠라고 호칭하는 지아의 목소리가 생소하게 들렸다. 하지만 항상 우울했던 그녀의 모습이 밝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 바닷가좀 데려다 줄 수 있어요......?”

“갑자기, 바다는 왜......!?”
“그냥.......! 바다가 보고 싶어서........! 안되나!”

“음.......! 회사 근처로 나올수 있나?”
“네~!”

지아와 본사 사옥 근처의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진우는 부리나케 기획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는 민경의 모습이 보였다. 혼자가 아니고 낯익은 남자와 웃으면서 무슨얘기인지 주고 받는 그녀였다. 걸음을 멈춘 그는 그녀와 마주치기가 꺼림직해서 주춤거렸다.

지나쳐가던 민경의 시선이 진우가 있는 복도로 향했다. 그를 발견한 그녀가 멈추어섰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할수 없었다. 아니 피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웃음이 깃들었던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그를 향해 또닥거리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마주선 그녀가 날타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요즘 재미있는 모양이네. 도희하고 잤다면서!? 그 년이 그렇게 좋았어?”
“글쎄......! 뭐라고 말하기 바래?”

“나쁜 새끼~!”
“........!?”

한마디 내뱉은 민경이 대뜸 진우의 뺨을 후려치려고 팔을 휘둘렀다. 흠칫하며 뒤로 물러선 그가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복도 끔에는 그녀와 같이 가던 남자가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을 쌀쌀맞게 뿌리친 그녀가 표독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내가 충고하는데, 그년 미친년이야. 요즘 어떤 놈, 만나는지 몰라도, 밖으로만 나돌아다니던데.......!”
“..........”

“잘해 봐~!”

코웃음을 흘린 민경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서서 갔다. 그리고 진우가 보라는 듯이 기다리고 있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복도 어귀를 돌아서 사라졌다. 진우는 잠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진우는 문득 어쩔수 없이 당했다고 권회장에게 변명하던 도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에게 미안하다고 하던 그녀의 표정이 떠올랐다.

삼십여분후에 진우는 커피숍에서 만난 지아를 태운 승용차를 몰고 서해안 고속도로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가 그녀와 함께 가려고 생각한 곳은 태안반도였다. 그도 가보지 못한 곳이라서 기대를 했다. 미용실을 다녀왔는지 그녀의 짧은 쇼커트머리가 더욱 돋보였다. 가볍고 찰랑거리는 프린팅의 레니본 스커트에 가디건을 걸친 그녀 모습이 깜직해보였다. 그녀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친숙한 표정이었다.

“나 때문에 일에 지장 주는거 아녜요?”

“아니, 그렇지 않아도 어제 지아와 같이 있던 시간을 생각하고 있었지.”
“정말......!?”

“모처럼만에 즐거운 하루였어.”
“나도.......!”

입가에 미소를 지은 지아가 손가방을 뒤지더니 CD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그녀가 카오디오에 CD를 넣으니 외국 여가수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사 델 셀라의 밀물이었다. 추억을 떠올리듯이 흐릿한 눈동자로 정면을 주시하는 그녀가 마른 목소리를 흘렸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인데.......,!”
“라사 델 셀라의 아버지가 멕시코인이고 어머니가 유대계 미국인 걸로 아는데.......”

“오빠도 아네! 이 CD, 차에 놔둬야겠다.”
“라사 형제가 많았지. 부모가 재혼전에 데려온 아이들 여섯과 재혼후에 낳은 아이들 넷을 캠핑카에 태우고 유랑생활을 했다는데..........”

“네!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라사는 젊은 나이에 죽었어요. 유방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고독한 생활에 익숙해진 지아는 주로 월드뮤직과 제3세계뮤직에 심취해 있었다. 그녀는 나다, 엔리코, 밀바, 엘레나 등 가수들에 대해서 세심하게 알고 있었다. 2시간 가량 고속도로를 지나서 부안 인터체인지에 도착했다. 진우는 부안읍으로 승용차를 몰고 들어갔다. 전통시장을 구경하고 해물 요리로 점심식사를 했다.

승용차로 변산반도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지아는 어린아이처럼 무척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상쾌한 바닷바람과 출렁이는 파도. 이름모를 바위섬, 날개 말리는 가마우지, 사랑을 속삭이는 갈매기, 안개가 자욱한 환상속에 경치, 그것만으로 충분한 서해 절경이 그곳에 있었다.

서해안을 다스렸다는 개양 할머니의 전설이 살아있는 수성당과 채석강에 이르는 곳은 시들어가는 코스모스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지만 경관 조성사업이 질되어서 봄에는 유채꽃, 여름에는 메밀꽃이 만발한다고 했다. 적벽강 입구에 주차를 시킨 진우는 지아의 손을 잡고 해안을 걸었다.

방풍림 역할을 하는 후박나무 군락지와 용두산을 돌아오는 암반과 단애를 이룬 해안절벽은 기대 이상으로 신비로웠다. 바닷가를 거니는 젊은이들의 웃고 떠드는 모습이 여유로워보였다. 바위에 붙은 조개를 캐던 젊은 여자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찢는 모습을 보고 지아가 키들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마냥 즐거운 표정으로 바위를 건너뛰며 그에게 매달렸다.

한동안 해변을 거닐던 그들은 통나무로 지어진 작은 카폐로 들어갔다. 대부분 남녀가 어울린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주문한 커피를 마시던 지아가 진우에게 상체를 굽히며 한쪽 구석을 가르쳤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자와 나이가 어려보이는 숙녀가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지아가 귓속말을 했다.

“저 사람들 부녀사이 같지는 않은데.......?”
“글쎄, 요즘은 구별하기 힘들어.......”

진우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숙녀가 머리를 중년남자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부녀지간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을 유심히 살피던 지아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고 오면을 했다. 그는 지아가 그들로 인해서 나이 차이가 많은 남편과 자신을 의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폐를 나오니 어느덧 황혼으로 붉게 물든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채석강을 돌아보고 해안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다보니 바다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진우는 승용차를 돌려 서울로 향했다. 카오디오를 틀어 놓고 눈을 감고 있던 지아는 피곤한지 잠이 들었다. 그가 화성 휴게소에 승용차를 주차시키니 그녀가 눈을 번쩍 뜨고 두리번거렸다.

“어디지......!?”
“화성! 간단히 식사를 할까?”

“응! 나, 배고파.”
“하하.......!”

진우는 어린아이같은 말투를 흘리는 지아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는 슬며시 그녀의 목어깨를 껴안으며 내려다봤다. 배시시 눈웃음이 깃든 그녀의 맑은 눈동자! 그는 그녀의 작고 도톰한 입술에 키스를 했다. 이미 스킨십에 익숙해진 그녀가 그의 등에 팔을 감고 키스를 받아 들였다. 감정이 솟구친 그가 그녀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동시에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 잉~! 못 됐어.......”
“하하......!”

진우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하얗게 눈을 흘긴 지아가 두 주먹을 쥐고 그의 가슴을 마구 두들겼다. 그러나 그녀는 싫지않은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이고는 승용차에서 내렸다. 휴계소로 들어간 그들은 돤장찌개를 주문해서 시장끼를 모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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