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회장은 며칠 전에 액자가 떨어져 놀랏던 일도 무척 신경이 쓰였다. 조 숙희를 탓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그녀가 의도적으로 액자가 떨어지도록 했을리는 없다고 판단이 되었다. 하지만 왠지 불안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제 그는 작은 상자를 소포로 받았었다. 소포 안에는 애니메이션 영상 CD가 들어 있었다.
어두운 숲속 별장이었다. 두 그림자가 비수를 들고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죽이고 별장에 불을 질렀다. 선혈이 낭자한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난장판 속에 치솟는 불길! CD를 보고 권 회장은 잊혔던 기억을 되살렸다. 그런데 그 CD의 영상처럼 불 길속을 헤매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기겁을 해서 깨어난 것이었다. 마치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 보는 것만 같았다.
권 회장은 누가 무슨 목적으로 CD를 보냈는지 궁금함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발신인도 없는 우편물이었다. 다만 과거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밖에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것은 진우가 보낸 것이었다.
운전하고 있는 진우가 백미러로 권 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권 회장의 표정은 몹시 우울한 표정이었다. 항상 독선적인 그의 평상시 모습과 다른 것이었다. 진우는 골프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는 권 회장의 심중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권 회장이 충격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에 진우는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권 회장은 모든 것이 잘 풀리지 않는 현실을 잠시나마 도피하고 싶은 것이다. 기업 총수들은 이따금 골프원정이라는 명목으로 해외로 나가고 있다. 도박을 하거나 섹스파트너로 현지여자를 비서로 고용해서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권 회장은 난관에 부딪치는 상황들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쌓이는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송 마담과 관계가 끊어지고 아내의 냉정한 태도에 권 회장은 더욱 심적인 충격에 휩싸였다.
기업 오너들과 미팅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권 회장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루하루가 야생마처럼 들판을 달리는 심정이어서 피곤했다. 더욱이나 오늘 오너들과의 미팅에서 무척 외롭다는 것을 의식했다. 계획한 것은 아니자만 오너들의 부인들도 몇 명 합석한 자리였다. 모두들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그는 열등감마저 들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룹의 총수이지만 권 회장은 가정만큼은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생각에 우울했다. 정겹게 보이는 부부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권 회장은 외로움에서 벗어 날수가 없었다. 그가 어린 나이의 지아를 아내로 선택한 것은 세상 물정에 물들지 않은 때 묻지 않은 청순함 때문이었다. 그의 지시에 복종하는 여자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물거품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권 회장의 시선이 살며시 열리는 문을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여직원이 그를 발견하고 당황했다. 총무과에 근무하는 유 은영 대리였다. 권 회장은 항상 반듯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총무과장 한 재식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총무과에 같이 근무했으며 일 년 전에 결혼했다.
권 회장이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한 재식 과장이었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한 재식은 엘리트였다. 업무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반듯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직원이어서 권 회장이 장차 주요 간부로 키우려고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권 회장은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유 은영의 여성스러운 매력에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 은영도 한 재식과 마찬가지로 정숙함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그녀는 말이 없고 조용했다. 권 회장은 참석했던 그들의 결혼식을 떠 올렸다. 누가 봐도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권 회장은 조순하고 꾸밈이 없는 그녀에게 특별한 여성미를 느꼈었다. 그는 은연중에 유 은영과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한 과장이 부러웠다.
유 대리는 권 회장이 출타중인 것으로 알고 무심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권 회장의 시선을 발견한 그녀는 당황했다. 그녀는 어정쩡한 자세로 변명을 하듯이 결제 판을 내밀며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안 계신 줄 알고, 결제 판을.......”
“아! 괜찮아. 책상위에 올려 놔.”
두려운 표정을 짓는 은영을 바라보는 권 회장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춤거리던 그녀가 차분한 발걸음으로 권 회장의 옆을 지나 책상위에 결제 판을 올려놓았다. 조심스럽게 돌아선 그녀가 그를 지나쳐 나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권 회장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 계장! 바쁘지 않으면 잠시 앉지.”
“네........!? 네.”
머뭇거리던 유 은영이 권 회장의 옆 소파에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그녀는 여자들의 유행과 달리 무릎 밑까지 늘어진 스커트를 걸치고 있었다. 다소곳하고도 날씬한 체구에 블라우스 단추를 목 밑까지 채운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학교 선생처럼 단정해 보였다. 정숙한 그녀에게 오히려 성적매력이 돋보였다. 권 회장은 곁눈으로 블라우스 위로 들어난 봉긋한 그녀의 젖가슴을 훔쳐봤다.
“그래. 요즘 재미있나?”
“네. 회장님 덕분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아니. 결혼생활 말이야.”
“네.”
“한 과장이 착실하니까........! 잘 해주지?”
“네. 회장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항상 감사드리고 있어요.”
은영은 애써 시선을 외면하지만 권 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한 과장을 대리에서 총무과장으로 승진시켜 준 것은 권 회장의 배려였다. 뿐만 아니라 평사원이었던 유 은영을 계장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그녀는 기회가 되면 감사의 뜻을 전하려던 참이었다. 권 회장이 그녀를 느긋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과장이 부럽군. 유 계장처럼 여성스러운 여자를 만났으니.”
“과분한 말씀에요.”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지.”
“네. 열심히 살겠습니다.”
“요즘은 남편 출세도 아내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잖아. 정치도 그렇잖아.”
“네.........”
“앞으로 한 과장이 아내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야. 그러니 유 계장이 잘해야지.”
“네.........”
“나도 좀 많이 도와주고.”
“최선을..... 다 할게요.”
“언제 한번 내가 식사 자리를 마련하지.”
“네.....!? 고맙습니다.”
유 은영은 권 회장의 말이 고맙기도 하면서도 왠지 두려웠다. 회사 여직원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권 회장의 여성편력에 대한 루머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권 회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권 회장은 눈웃음이 깃든 그녀의 표정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 은영은 잠시 침묵이 흐르는 공간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녀가 살 프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 나가볼게요.”
“그러지. 공연히 시간 뺐은 건 아닌가.”
“아, 아니에요. 고마웠습니다.”
“그럼, 같이 식사 한번 하는 거지?”
“네.......!?”
자리에서 일어서 돌아서려던 은영은 흠칫 놀랐다. 권 회장이 슬며시 그녀의 팔을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강조하듯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서 전달되는 느끼한 촉감에 어떤 태도를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녀는 평범한 가정이지만 완고한 부모 밑에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다.
은영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남자는 남편뿐이었다. 그녀는 감히 회장의 손을 뿌리 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꼿꼿이 서서 미소를 흘렸다.
“감사합니다........”
“그래~!”
권 회장은 문을 나서는 은영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긋한 그녀에게서 전달되는 체취를 음미하고 있었다. 한동안 여자를 멀리 해서인가 소유하고 싶은 여인의 체취였다. 불같이 솟아나는 욕구의 불길!
권 회장은 유 대리의 미소어린 눈빛이 결코 부정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뿌리침이 없는 그녀의 미소. 그는 여자들의 무기는 육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의 여자들은 자신의 육체로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변함이 없었다. 어쩌면 그의 오해가 그 자신의 단점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권 회장은 아내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를수록 유 은영의 다소곳한 잔상을 지울 수 없었다. 퇴근해서 잠자리에 들면서도 그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음날 권 회장은 시간을 내서 잠시 백화점에 들렸다. 그리고 여성용 명품 코너로 가서 살피다가 핸드백을 구입했다. 오후에 그는 유 은영을 호출했다. 그리고 별다른 말없이 지시했다.
“유 대리가 꼼꼼하고 차분하니 내 서류들을 정돈해줘.”
“네........!?”
‘왜.....! 바쁜가?“
“아뇨.”
“그럼 부탁해.”
은영은 비서들이 할 일을 자신에게 지시를 하는 것에 의아스럽게 생각했지만 권 회장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권 회장이 내민 서류들을 집어 들고 회장실을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권 회장이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아니, 그냥 여기서 해. 들고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으니.”
“.........네.”
은영은 탁자위에 서류들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서루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권 회장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서류정리를 하는 동안 결재 서류들을 검토했다.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사실 권 회장은 이따금 은영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은영은 권 회장의 눈빛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스커트 자락과 블라우스 앞가슴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은영의 두려움과 달리 권 회장은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그녀의 몸매를 어루만지듯이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지시한 서류 정돈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서류정돈을 끝내고 책상 앞에 다가섰다.
“회장님! 또 지시할 일이라도........”
“아니, 수고했어. 깔끔하군. 그리고.......”
“.........!?”
“이건 유 대리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건데. 마음이 들지 몰라.”
“네.......!?”
권 회장이 책상위에 올려놓은 것은 여자들이 보두 선망하는 명품 이태리 가방이었다. 빤히 그녀를 바라보는 권 회장의 눈빛! 은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회, 회장님 이건.........”
“괜찮아. 내가 직원 중에 관심을 갖는 직원이 한 과장과 유대리라는 것만 알고 있어.”
“하지만........제겐 과분한......”
“하하~! 괜찮다니까. 별로 부담스런 것도 아닌데. 가서 일봐.”
“..........!?”
은영으로서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주춤거리던 그녀는 마지못해 건네받은 가방을 들고 천천히 돌아섰다. 입구로 향해 걸어가는 그녀는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권 회장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공연히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후 권 회장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날 이후 권 회장은 자주 유 대리를 불러 잔일을 지시했다. 경계심을 가졌던 은영은 차츰 권 회장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렸다. 어느 날은 권 회장이 고가의 손목시게를 은영에게 주었다. 그녀의 남편에게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은영은 정말 회장이 다른 직원들보다 그들 부부를 배려하는 마음일 것이라고 느꼈다.
주말이 지나고 권 회장은 계획했던 골프 여행을 가기로 작정했다. 새로운 한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에 진우는 권 회장의 지시로 여행가방과 골프장비들을 승용차에 챙겨 실었다. 회사로 출근해서 서류를 결제한 권 회장은 신 하진 이사를 불러 업무보고를 받고 진우에게 승용차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했다.
공항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권 회장은 진우에게 주중의 계획안을 취소하거나 인사들의 만남을 다음 주로 연기하라는 지시를 했다. 특히 물류센터 건립 허가에 관한 변동사항이 있으면 즉시 전화하라고 강조했다. 귄 회장의 휴가는 진우를 자유롭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그를 태운 항공기가 사라지고 목표를 잃은 진우는 왠지 허전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로 돌아온 진우는 비서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권 회장의 직선적인 성격에 항상 긴장했던 직원들이 안정된 모습으로 업무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권 회장이 지시한 사항을 직원들에게 처리하도록 하고 한 시간 가량 머물다가 청량리에 있는 대도개발 운송 사무실로 갔다.
평소보다 많은 화물차량이 주차장에 있었고 또한 인천부두에 정박 중인 화물선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운송량이 줄어든 것이었다. 사무실에는 곽 상무와 최 부장 등 간부급 직원들이 모여앉아 밀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귀담아 듣고 있던 그는 영등포로 갔다. 오 덕재에게 맡긴 새한화물 사무실을 찾아간 것이었다.
화물트럭은 모두 작업을 나가고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동안 대도운수의 적지 않은 물량이 새한화물로 넘어온 탓이었다. 그가 사무실로 들어가니 여직원 한 명과 오 덕재만이 남아 있었다.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오 덕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진우를 처음 대하는 여직원은 오 덕재의 태도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 덕재가 그녀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지시하고는 진우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그가 말했다.
“사장님 덕분에 우리 애들이 요즘 호강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음~! 잘해줘서 고마워요.”
“모두 사장님 덕분이죠. 그런데 평생 주먹질만하다가 서류를 보려니까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어디 오너가 직접 일하나. 직원들을 활용하기 나름이지.”
“지금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잘 되고 있습니다. 먼저 알려주신 쌍화건설 자재 운송도 제가 트라이를 해서.......”
오 덕재는 그동안 서업 성과를 자랑삼아 설명했다. 오 덕재는 진우를 대적할 수가 없어서 굴복했고, 적지 않은 액수로 제시하는 그를 주인으로 모시기로 했다.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진우는 오 실장의 장황한 설명을 듣고 새한화물 사무실을 나왔다.
모처럼만에 여유로운 시간이지만 진우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가 운전하는 승용차는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어서 출출한 생각이든 그는 집으로 향했다. 평일 근무시간에 그가 귀가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에 관리인 최 광섭과 가정부 조 숙희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다만 잠시 거실로 나왔던 지아가 그를 보고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미 그에게 보여서는 안 될 모습까지 보였고 자존심마저 상실한 상태였다. 잠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큰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아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던 가정부 숙희가 간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점심 식사 차릴 가요?”
“네 !”
“.........,!”
진우의 대답에 이어 잠시 망설이던 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거리던 지아도 가정부를 도우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점심 식사가 준비되고 오래간만에 권 회장을 제외한 식구들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하지만 모두들 침묵으로 식사에만 열중했다. 다만 이따금 진우와 지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식사 후에 진우는 거실 소파에 가서 앉았다. 지아가 커피를 타서 갖고 그의 옆에 앉았다. 진우는 탁자위에 올려놓은 커피 잔을 집어 들면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항상 어두웠던 그녀의 얼굴 혈색이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신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회장님, 필리핀 간 거 알아요?”
“네. 가정부에게 들었어요.”
“그럼 직접 말 안했어요?”
“네........! 언제 온다고 해요?”
“다음 주에 오신다고 하던데........”
처음 듣는 소리라는 표정으로 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TV를 향하고 있으나 관심은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깎아놓은 조각처럼 오목조목한 윤곽과 어린 소녀 같은 볼살이 드러나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손으로 빚어놓은 인형같았다. 크지 않은 아담한 체구는 처녀티를 벗어나지 않는 앳된 모습이었다.
진우는 문득 집안의 울타리에만 갇혀 있는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영혼을 잃은 인형처럼 권 회장의 노리갯감이 되어있는 그녀를 보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망설이던 그가 그녀의 표정 을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요?”
“..........!?”
“집에만 있으면 답답할 텐데..... 가끔 바깥바람도 쏘이는 게........”
“어디요......?”
“그냥.......”
말없이 빤히 쳐다보던 지아가 막상 장소를 물었지만, 진우도 생각하지 않고 물었기에 답변이 궁했다. TV 화면에 주말 나들이를 하는 도시인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교양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에버랜드에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가 TV화면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저기 갈가요?”
“..........!?”
대답을 하지 않는 지아는 항상 숨 막히는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스스로를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었다. 아니 현실에서 벗어날 용기조차 잃고 있었다. 집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잠시 자문자답하던 그녀는 그의 눈빛에 용기를 얻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진우는 찻잔을 들고 머뭇거리는 그녀를 살폈다. 소파에서 일어난 그녀가 자신의 방이 있는 복도로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는 왠지 어린 소년처럼 기분이 들떴다. 일어나서 서성거리던 그는 그녀가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맑은 날씨에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쪼이는 오후 한나절이었다. 승용차로 다가가는 진우가 현관문을 나서는 지아를 돌아봤다. 검은색 스판바지에 롱부츠와 캐주얼 재킷 걸친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보였다. 그리고 거실 창문을 내다보는 가정부 조 숙희의 모습이 얼비쳤다. 그가 시동을 거는 승용차 조수석에 지아가 올라앉았다.
부드러운 엔진소리와 함께 승용차가 주택가를 벗어났다. 신호등 앞에서 차를 세운 진우는 별다른 표정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 지아를 곁눈질해서 살폈다. 사람들이 오가는 주변을 두리번거린 그가 입가에 웃음을 지어보이며 혼잣말처럼 침묵을 깼다.
“오늘, 날씨 좋으네.........”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진우의 말을 듣고 지아가 몸을 숙여 앞 유리창의 하늘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우는 모처럼 외출을 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다른 여자와 달리 선뜻 그녀의 심정을 물어보기가 두려웠다. 혹시나 유리인형처럼 연약해 보이는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감이었다.
지아는 쑥스러워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키스를 받아드렸던 자신 스스로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은밀한 비밀스러움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점점 그를 대하기가 자연스러워졌고 그후에도 비밀스러움이 이어졌다. 서로 같은 감정으로 바라보는 남녀간의 스킨십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그가 아주 오랜 기억속을 함께 했던 사람이라는 감정뿐이었다.
오직 남편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려는 지아의 일상생활에 뛰어든 남자가 진우였다. 그녀는 남자를 사랑했던 기억조차 없이 결혼을 했다. 그런데 요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남자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침묵속에 침체되어 있는 그녀의 일상생활이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은연중에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그의 눈빛을 생각한다.
지아는 문득 문득 그녀 자신을 향하고 있는 진우를 의식했다. 그도 나와 같은 감정인가. 아니면 동정을 하는 것인가. 안타까운 생각에 위로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여자로서 처음으로 느끼는 작은 감정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판교 인터체인지가 가까워질 무렵까지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지아는 문득 자신을 향하는 진우의 시선을 의식했다. 자잘한 눈빛을 마주친 그가 한 손을 뻗쳐 콘솔박스를 열었다. 그리고 껌 한 통을 꺼내들었다.
“심심하지 않아요?”
“.........!”
껌을 받아든 지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녀는 껌을 받아들고 포장지를 벗겼다. 그리고 진우의 입에 물려줬다. 그녀도 포장지를 벗긴 껌을 입속에 넣고 우물거렸다. 보육원생들을 태운 봉고차량이 옆으로 지나쳤다. 무언가 망설이던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서요?”
“........네!”
“기억이 나요?”
“너무 어려서 기억이 안나요.”
“.........!”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는 문득 진우의 출생이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집안 식구 누구도 그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그도 고아 출신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혹시 진우씨........!?”
“나도,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입양되어, 고아원 시절 기억이 별로........”
동병상린일까, 지아는 진우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그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상하면서도 카리스마가 풍기는 눈빛은 운전기사로 만족할 남자 같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항상 말없이 묵묵히 남편의 지시를 받고 있는 직원이기에 궁금할 뿐이었다.
지아는 남편을 접근하지 못하게 할 테니 기다리라는 그의 말을 흘려버릴 수가 없었다. 단지 동정심이나 위로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의미심장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듣지 말았어야할 두렵고 위험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남편의 심복으로 단순하게 운전기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인지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나요?”
“음......! 졸업하고 귀국했지.”
“왜요? 외국생활이 힘들어서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진우가 대답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그녀의 모습은 그의 감정을 흡입하는 매력이 넘쳐흘렀다. 순간 그는 자신의 지난 과거와 감정을 드러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닫혀있는 마음을 쉽게 열수가 없어서 빙긋이 웃었다. 지아는 그의 묘한 표정에 더 답답하기만 했다.
“그럼, 현재 생활에 만족하나요?”
“만족이라기보다는.......! 생활하려면 돈을 벌어야하고.”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알고 싶어.......!?”
“.........!”
지아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궁금하다는 표정을 했다. 그도 그녀의 대답을 원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신갈 인터체인지에서 에버랜드로 향하는 길로 핸들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화물차 한 대가 끼어들기를 하고 진우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당황한 그녀가 황급히 그의 어깨를 붙들고 매달렸다. 그는 별로 놀란 기색 없이 침착하게 승용차를 도로 옆에 정차 시켰다. 그리고 턱밑에서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의미 있는 눈빛을 보냈다.
“사람마다 이렇게 예기치 않은 상황을 당하게 되고, 풀어야할 문제가 발생하지.........! 지금은 지아 씨를 생각하고!”
“네.........!?”
“지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 운전해야 하니까........”
“.........”
바로 코앞에 있는 진우의 눈빛을 의식하는 지아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던 팔을 풀었다. 그가 다시 가속페달을 밟았다. 정감이 어린 그의 강렬한 눈빛! 그녀는 부끄러운 생각에 마주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의 말속에 포함된 의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깊은 애정이 담긴 그의 목소리! 그의 눈빛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을 향한 그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두운 숲속 별장이었다. 두 그림자가 비수를 들고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죽이고 별장에 불을 질렀다. 선혈이 낭자한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난장판 속에 치솟는 불길! CD를 보고 권 회장은 잊혔던 기억을 되살렸다. 그런데 그 CD의 영상처럼 불 길속을 헤매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기겁을 해서 깨어난 것이었다. 마치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 보는 것만 같았다.
권 회장은 누가 무슨 목적으로 CD를 보냈는지 궁금함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발신인도 없는 우편물이었다. 다만 과거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밖에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것은 진우가 보낸 것이었다.
운전하고 있는 진우가 백미러로 권 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권 회장의 표정은 몹시 우울한 표정이었다. 항상 독선적인 그의 평상시 모습과 다른 것이었다. 진우는 골프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는 권 회장의 심중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권 회장이 충격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에 진우는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권 회장은 모든 것이 잘 풀리지 않는 현실을 잠시나마 도피하고 싶은 것이다. 기업 총수들은 이따금 골프원정이라는 명목으로 해외로 나가고 있다. 도박을 하거나 섹스파트너로 현지여자를 비서로 고용해서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권 회장은 난관에 부딪치는 상황들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쌓이는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송 마담과 관계가 끊어지고 아내의 냉정한 태도에 권 회장은 더욱 심적인 충격에 휩싸였다.
기업 오너들과 미팅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권 회장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루하루가 야생마처럼 들판을 달리는 심정이어서 피곤했다. 더욱이나 오늘 오너들과의 미팅에서 무척 외롭다는 것을 의식했다. 계획한 것은 아니자만 오너들의 부인들도 몇 명 합석한 자리였다. 모두들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그는 열등감마저 들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룹의 총수이지만 권 회장은 가정만큼은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생각에 우울했다. 정겹게 보이는 부부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권 회장은 외로움에서 벗어 날수가 없었다. 그가 어린 나이의 지아를 아내로 선택한 것은 세상 물정에 물들지 않은 때 묻지 않은 청순함 때문이었다. 그의 지시에 복종하는 여자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물거품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권 회장의 시선이 살며시 열리는 문을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여직원이 그를 발견하고 당황했다. 총무과에 근무하는 유 은영 대리였다. 권 회장은 항상 반듯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총무과장 한 재식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총무과에 같이 근무했으며 일 년 전에 결혼했다.
권 회장이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한 재식 과장이었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한 재식은 엘리트였다. 업무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반듯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직원이어서 권 회장이 장차 주요 간부로 키우려고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권 회장은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유 은영의 여성스러운 매력에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 은영도 한 재식과 마찬가지로 정숙함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그녀는 말이 없고 조용했다. 권 회장은 참석했던 그들의 결혼식을 떠 올렸다. 누가 봐도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권 회장은 조순하고 꾸밈이 없는 그녀에게 특별한 여성미를 느꼈었다. 그는 은연중에 유 은영과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한 과장이 부러웠다.
유 대리는 권 회장이 출타중인 것으로 알고 무심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권 회장의 시선을 발견한 그녀는 당황했다. 그녀는 어정쩡한 자세로 변명을 하듯이 결제 판을 내밀며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안 계신 줄 알고, 결제 판을.......”
“아! 괜찮아. 책상위에 올려 놔.”
두려운 표정을 짓는 은영을 바라보는 권 회장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춤거리던 그녀가 차분한 발걸음으로 권 회장의 옆을 지나 책상위에 결제 판을 올려놓았다. 조심스럽게 돌아선 그녀가 그를 지나쳐 나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권 회장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 계장! 바쁘지 않으면 잠시 앉지.”
“네........!? 네.”
머뭇거리던 유 은영이 권 회장의 옆 소파에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그녀는 여자들의 유행과 달리 무릎 밑까지 늘어진 스커트를 걸치고 있었다. 다소곳하고도 날씬한 체구에 블라우스 단추를 목 밑까지 채운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학교 선생처럼 단정해 보였다. 정숙한 그녀에게 오히려 성적매력이 돋보였다. 권 회장은 곁눈으로 블라우스 위로 들어난 봉긋한 그녀의 젖가슴을 훔쳐봤다.
“그래. 요즘 재미있나?”
“네. 회장님 덕분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아니. 결혼생활 말이야.”
“네.”
“한 과장이 착실하니까........! 잘 해주지?”
“네. 회장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항상 감사드리고 있어요.”
은영은 애써 시선을 외면하지만 권 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한 과장을 대리에서 총무과장으로 승진시켜 준 것은 권 회장의 배려였다. 뿐만 아니라 평사원이었던 유 은영을 계장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그녀는 기회가 되면 감사의 뜻을 전하려던 참이었다. 권 회장이 그녀를 느긋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과장이 부럽군. 유 계장처럼 여성스러운 여자를 만났으니.”
“과분한 말씀에요.”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지.”
“네. 열심히 살겠습니다.”
“요즘은 남편 출세도 아내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잖아. 정치도 그렇잖아.”
“네.........”
“앞으로 한 과장이 아내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야. 그러니 유 계장이 잘해야지.”
“네.........”
“나도 좀 많이 도와주고.”
“최선을..... 다 할게요.”
“언제 한번 내가 식사 자리를 마련하지.”
“네.....!? 고맙습니다.”
유 은영은 권 회장의 말이 고맙기도 하면서도 왠지 두려웠다. 회사 여직원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권 회장의 여성편력에 대한 루머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권 회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권 회장은 눈웃음이 깃든 그녀의 표정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 은영은 잠시 침묵이 흐르는 공간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녀가 살 프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 나가볼게요.”
“그러지. 공연히 시간 뺐은 건 아닌가.”
“아, 아니에요. 고마웠습니다.”
“그럼, 같이 식사 한번 하는 거지?”
“네.......!?”
자리에서 일어서 돌아서려던 은영은 흠칫 놀랐다. 권 회장이 슬며시 그녀의 팔을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강조하듯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서 전달되는 느끼한 촉감에 어떤 태도를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녀는 평범한 가정이지만 완고한 부모 밑에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다.
은영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남자는 남편뿐이었다. 그녀는 감히 회장의 손을 뿌리 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꼿꼿이 서서 미소를 흘렸다.
“감사합니다........”
“그래~!”
권 회장은 문을 나서는 은영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긋한 그녀에게서 전달되는 체취를 음미하고 있었다. 한동안 여자를 멀리 해서인가 소유하고 싶은 여인의 체취였다. 불같이 솟아나는 욕구의 불길!
권 회장은 유 대리의 미소어린 눈빛이 결코 부정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뿌리침이 없는 그녀의 미소. 그는 여자들의 무기는 육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의 여자들은 자신의 육체로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변함이 없었다. 어쩌면 그의 오해가 그 자신의 단점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권 회장은 아내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를수록 유 은영의 다소곳한 잔상을 지울 수 없었다. 퇴근해서 잠자리에 들면서도 그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음날 권 회장은 시간을 내서 잠시 백화점에 들렸다. 그리고 여성용 명품 코너로 가서 살피다가 핸드백을 구입했다. 오후에 그는 유 은영을 호출했다. 그리고 별다른 말없이 지시했다.
“유 대리가 꼼꼼하고 차분하니 내 서류들을 정돈해줘.”
“네........!?”
‘왜.....! 바쁜가?“
“아뇨.”
“그럼 부탁해.”
은영은 비서들이 할 일을 자신에게 지시를 하는 것에 의아스럽게 생각했지만 권 회장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권 회장이 내민 서류들을 집어 들고 회장실을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권 회장이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아니, 그냥 여기서 해. 들고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으니.”
“.........네.”
은영은 탁자위에 서류들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서루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권 회장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서류정리를 하는 동안 결재 서류들을 검토했다.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사실 권 회장은 이따금 은영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은영은 권 회장의 눈빛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스커트 자락과 블라우스 앞가슴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은영의 두려움과 달리 권 회장은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그녀의 몸매를 어루만지듯이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지시한 서류 정돈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서류정돈을 끝내고 책상 앞에 다가섰다.
“회장님! 또 지시할 일이라도........”
“아니, 수고했어. 깔끔하군. 그리고.......”
“.........!?”
“이건 유 대리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건데. 마음이 들지 몰라.”
“네.......!?”
권 회장이 책상위에 올려놓은 것은 여자들이 보두 선망하는 명품 이태리 가방이었다. 빤히 그녀를 바라보는 권 회장의 눈빛! 은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회, 회장님 이건.........”
“괜찮아. 내가 직원 중에 관심을 갖는 직원이 한 과장과 유대리라는 것만 알고 있어.”
“하지만........제겐 과분한......”
“하하~! 괜찮다니까. 별로 부담스런 것도 아닌데. 가서 일봐.”
“..........!?”
은영으로서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주춤거리던 그녀는 마지못해 건네받은 가방을 들고 천천히 돌아섰다. 입구로 향해 걸어가는 그녀는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권 회장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공연히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후 권 회장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날 이후 권 회장은 자주 유 대리를 불러 잔일을 지시했다. 경계심을 가졌던 은영은 차츰 권 회장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렸다. 어느 날은 권 회장이 고가의 손목시게를 은영에게 주었다. 그녀의 남편에게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은영은 정말 회장이 다른 직원들보다 그들 부부를 배려하는 마음일 것이라고 느꼈다.
주말이 지나고 권 회장은 계획했던 골프 여행을 가기로 작정했다. 새로운 한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에 진우는 권 회장의 지시로 여행가방과 골프장비들을 승용차에 챙겨 실었다. 회사로 출근해서 서류를 결제한 권 회장은 신 하진 이사를 불러 업무보고를 받고 진우에게 승용차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했다.
공항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권 회장은 진우에게 주중의 계획안을 취소하거나 인사들의 만남을 다음 주로 연기하라는 지시를 했다. 특히 물류센터 건립 허가에 관한 변동사항이 있으면 즉시 전화하라고 강조했다. 귄 회장의 휴가는 진우를 자유롭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그를 태운 항공기가 사라지고 목표를 잃은 진우는 왠지 허전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로 돌아온 진우는 비서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권 회장의 직선적인 성격에 항상 긴장했던 직원들이 안정된 모습으로 업무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권 회장이 지시한 사항을 직원들에게 처리하도록 하고 한 시간 가량 머물다가 청량리에 있는 대도개발 운송 사무실로 갔다.
평소보다 많은 화물차량이 주차장에 있었고 또한 인천부두에 정박 중인 화물선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운송량이 줄어든 것이었다. 사무실에는 곽 상무와 최 부장 등 간부급 직원들이 모여앉아 밀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귀담아 듣고 있던 그는 영등포로 갔다. 오 덕재에게 맡긴 새한화물 사무실을 찾아간 것이었다.
화물트럭은 모두 작업을 나가고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동안 대도운수의 적지 않은 물량이 새한화물로 넘어온 탓이었다. 그가 사무실로 들어가니 여직원 한 명과 오 덕재만이 남아 있었다.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오 덕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진우를 처음 대하는 여직원은 오 덕재의 태도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 덕재가 그녀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지시하고는 진우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그가 말했다.
“사장님 덕분에 우리 애들이 요즘 호강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음~! 잘해줘서 고마워요.”
“모두 사장님 덕분이죠. 그런데 평생 주먹질만하다가 서류를 보려니까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어디 오너가 직접 일하나. 직원들을 활용하기 나름이지.”
“지금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잘 되고 있습니다. 먼저 알려주신 쌍화건설 자재 운송도 제가 트라이를 해서.......”
오 덕재는 그동안 서업 성과를 자랑삼아 설명했다. 오 덕재는 진우를 대적할 수가 없어서 굴복했고, 적지 않은 액수로 제시하는 그를 주인으로 모시기로 했다.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진우는 오 실장의 장황한 설명을 듣고 새한화물 사무실을 나왔다.
모처럼만에 여유로운 시간이지만 진우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가 운전하는 승용차는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어서 출출한 생각이든 그는 집으로 향했다. 평일 근무시간에 그가 귀가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에 관리인 최 광섭과 가정부 조 숙희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다만 잠시 거실로 나왔던 지아가 그를 보고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미 그에게 보여서는 안 될 모습까지 보였고 자존심마저 상실한 상태였다. 잠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큰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아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던 가정부 숙희가 간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점심 식사 차릴 가요?”
“네 !”
“.........,!”
진우의 대답에 이어 잠시 망설이던 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거리던 지아도 가정부를 도우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점심 식사가 준비되고 오래간만에 권 회장을 제외한 식구들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하지만 모두들 침묵으로 식사에만 열중했다. 다만 이따금 진우와 지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식사 후에 진우는 거실 소파에 가서 앉았다. 지아가 커피를 타서 갖고 그의 옆에 앉았다. 진우는 탁자위에 올려놓은 커피 잔을 집어 들면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항상 어두웠던 그녀의 얼굴 혈색이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신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회장님, 필리핀 간 거 알아요?”
“네. 가정부에게 들었어요.”
“그럼 직접 말 안했어요?”
“네........! 언제 온다고 해요?”
“다음 주에 오신다고 하던데........”
처음 듣는 소리라는 표정으로 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TV를 향하고 있으나 관심은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깎아놓은 조각처럼 오목조목한 윤곽과 어린 소녀 같은 볼살이 드러나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손으로 빚어놓은 인형같았다. 크지 않은 아담한 체구는 처녀티를 벗어나지 않는 앳된 모습이었다.
진우는 문득 집안의 울타리에만 갇혀 있는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영혼을 잃은 인형처럼 권 회장의 노리갯감이 되어있는 그녀를 보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망설이던 그가 그녀의 표정 을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요?”
“..........!?”
“집에만 있으면 답답할 텐데..... 가끔 바깥바람도 쏘이는 게........”
“어디요......?”
“그냥.......”
말없이 빤히 쳐다보던 지아가 막상 장소를 물었지만, 진우도 생각하지 않고 물었기에 답변이 궁했다. TV 화면에 주말 나들이를 하는 도시인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교양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에버랜드에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가 TV화면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저기 갈가요?”
“..........!?”
대답을 하지 않는 지아는 항상 숨 막히는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스스로를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었다. 아니 현실에서 벗어날 용기조차 잃고 있었다. 집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잠시 자문자답하던 그녀는 그의 눈빛에 용기를 얻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진우는 찻잔을 들고 머뭇거리는 그녀를 살폈다. 소파에서 일어난 그녀가 자신의 방이 있는 복도로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는 왠지 어린 소년처럼 기분이 들떴다. 일어나서 서성거리던 그는 그녀가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맑은 날씨에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쪼이는 오후 한나절이었다. 승용차로 다가가는 진우가 현관문을 나서는 지아를 돌아봤다. 검은색 스판바지에 롱부츠와 캐주얼 재킷 걸친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보였다. 그리고 거실 창문을 내다보는 가정부 조 숙희의 모습이 얼비쳤다. 그가 시동을 거는 승용차 조수석에 지아가 올라앉았다.
부드러운 엔진소리와 함께 승용차가 주택가를 벗어났다. 신호등 앞에서 차를 세운 진우는 별다른 표정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 지아를 곁눈질해서 살폈다. 사람들이 오가는 주변을 두리번거린 그가 입가에 웃음을 지어보이며 혼잣말처럼 침묵을 깼다.
“오늘, 날씨 좋으네.........”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진우의 말을 듣고 지아가 몸을 숙여 앞 유리창의 하늘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우는 모처럼 외출을 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다른 여자와 달리 선뜻 그녀의 심정을 물어보기가 두려웠다. 혹시나 유리인형처럼 연약해 보이는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감이었다.
지아는 쑥스러워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키스를 받아드렸던 자신 스스로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은밀한 비밀스러움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점점 그를 대하기가 자연스러워졌고 그후에도 비밀스러움이 이어졌다. 서로 같은 감정으로 바라보는 남녀간의 스킨십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그가 아주 오랜 기억속을 함께 했던 사람이라는 감정뿐이었다.
오직 남편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려는 지아의 일상생활에 뛰어든 남자가 진우였다. 그녀는 남자를 사랑했던 기억조차 없이 결혼을 했다. 그런데 요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남자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침묵속에 침체되어 있는 그녀의 일상생활이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은연중에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그의 눈빛을 생각한다.
지아는 문득 문득 그녀 자신을 향하고 있는 진우를 의식했다. 그도 나와 같은 감정인가. 아니면 동정을 하는 것인가. 안타까운 생각에 위로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여자로서 처음으로 느끼는 작은 감정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판교 인터체인지가 가까워질 무렵까지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지아는 문득 자신을 향하는 진우의 시선을 의식했다. 자잘한 눈빛을 마주친 그가 한 손을 뻗쳐 콘솔박스를 열었다. 그리고 껌 한 통을 꺼내들었다.
“심심하지 않아요?”
“.........!”
껌을 받아든 지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녀는 껌을 받아들고 포장지를 벗겼다. 그리고 진우의 입에 물려줬다. 그녀도 포장지를 벗긴 껌을 입속에 넣고 우물거렸다. 보육원생들을 태운 봉고차량이 옆으로 지나쳤다. 무언가 망설이던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서요?”
“........네!”
“기억이 나요?”
“너무 어려서 기억이 안나요.”
“.........!”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는 문득 진우의 출생이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집안 식구 누구도 그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그도 고아 출신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혹시 진우씨........!?”
“나도,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입양되어, 고아원 시절 기억이 별로........”
동병상린일까, 지아는 진우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그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상하면서도 카리스마가 풍기는 눈빛은 운전기사로 만족할 남자 같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항상 말없이 묵묵히 남편의 지시를 받고 있는 직원이기에 궁금할 뿐이었다.
지아는 남편을 접근하지 못하게 할 테니 기다리라는 그의 말을 흘려버릴 수가 없었다. 단지 동정심이나 위로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의미심장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듣지 말았어야할 두렵고 위험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남편의 심복으로 단순하게 운전기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인지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나요?”
“음......! 졸업하고 귀국했지.”
“왜요? 외국생활이 힘들어서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진우가 대답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그녀의 모습은 그의 감정을 흡입하는 매력이 넘쳐흘렀다. 순간 그는 자신의 지난 과거와 감정을 드러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닫혀있는 마음을 쉽게 열수가 없어서 빙긋이 웃었다. 지아는 그의 묘한 표정에 더 답답하기만 했다.
“그럼, 현재 생활에 만족하나요?”
“만족이라기보다는.......! 생활하려면 돈을 벌어야하고.”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알고 싶어.......!?”
“.........!”
지아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궁금하다는 표정을 했다. 그도 그녀의 대답을 원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신갈 인터체인지에서 에버랜드로 향하는 길로 핸들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화물차 한 대가 끼어들기를 하고 진우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당황한 그녀가 황급히 그의 어깨를 붙들고 매달렸다. 그는 별로 놀란 기색 없이 침착하게 승용차를 도로 옆에 정차 시켰다. 그리고 턱밑에서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의미 있는 눈빛을 보냈다.
“사람마다 이렇게 예기치 않은 상황을 당하게 되고, 풀어야할 문제가 발생하지.........! 지금은 지아 씨를 생각하고!”
“네.........!?”
“지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 운전해야 하니까........”
“.........”
바로 코앞에 있는 진우의 눈빛을 의식하는 지아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던 팔을 풀었다. 그가 다시 가속페달을 밟았다. 정감이 어린 그의 강렬한 눈빛! 그녀는 부끄러운 생각에 마주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의 말속에 포함된 의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깊은 애정이 담긴 그의 목소리! 그의 눈빛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을 향한 그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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