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는 차 인석이 범죄를 저지를 만한 성격도 아니고, 자살할만한 동기도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리나케 회장실을 향해서 갔다. 비서실에 들어선 그는 비서실장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직 고 실장만이 차 인석이 죽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회장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간 그는 권 회장에게 급한 일로 다녀올 곳이 있다고 말했다.
권 회장은 당연히 자신의 부탁으로 진우가 외출하는 줄 알고 있었다. 회장실을 나온 그는 비서실을 지나치면서 주위를 살폈다. 은연중에 그는 고 실장에 대한 경쟁의식을 느낀 것이었다. 부리나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 진우는 승용차를 몰고 나왔다. 그는 차 인석이 살고 있었던 집으로 향했다.
진우는 차 인석의 사망이 자살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 사건현장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차 인석의 집이 있는 대로변에 승용차를 세우던 그는 마주쳐 자나가는 승용차를 예리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얼핏 보기는 했으나 고 실장이 운전을 하는 승용차였다. 멀어져가는 승용차를 바라보던 그는 연립주택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골목으로 들어갔다.
음산하고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간 그는 5층 건물 연립주택으로 올라갔다. 3층의 차 인석이 살았던 현관 문 앞에는 경찰통제선의 노란 띠가 늘어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장갑을 착용한 그는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현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난감해진 그는 계단 중간에 드러난 창문을 보고 내려갔다.
계단창문을 열고 나간 그는 가스 파이프를 잡고 매달려 차 인석의 집 창문을 열었다. 그가 창문으로 들어선 곳은 세면장이었다. 거실로 들어가서 예리하게 주위를 살피던 그는 차 인석의 목줄이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대들보를 올려다봤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가구들과 바닥에 찍힌 발자국들! 경찰의 초등수사가 끝난 현장이었다.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주방 등 집안을 살피며 무언가 다른 흔적을 찾으려던 진우는 허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차 인석이 죽음으로서 그가 쫓던 목표가 사라진 것이었다. 집을 나오려고 다시 세면장으로 향하던 그는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다봤다. 거실 TV 받침대 밑에 무엇인가 반짝거리는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었다.
TV 받침대 밑에 엎드린 진우는 팔을 뻗어 자그마한 물체를 집어 들었다. 반짝이는 물체는 낯설지 않은 작은 큐빅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큐빅을 자신의 와이셔츠 소매에 달린 커프스보턴과 비교했다. 커프스보턴에 박힌 큐빅과 동일했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커프스보턴은 권 회장 취임식 기념으로 임직원에게 제공된 선물이었다.
진우는 카프스보턴이 차 인석의 죽음에 어떤 암시를 하는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차 인석이 임직원에게 카프스보턴을 받았든지, 아니면 차 인석의 집에 찾아온 임직원중 누군가가 떨어트린 것은 분명했다. 그는 과연 차 인석과 가까운 임직원이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주쳐 지나가던 승용차 안의 고 실장! 그가 차 인석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영상을 떠올렸다.
저녁 무렵, 진우는 청담동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혹시나 차 인석의 죽음과 관련된 정보가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건너편의 황제 살롱 간판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미 죽은 차 인석에 관해 모두 기피하는 상황에서 정보를 제공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관련이 있는 송 마담에게 물어본들 특별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황단보도 신호등이 바뀌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길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망설이던 진우도 사람들 틈에 끼어 길을 건너갔다. 살롱 입구로 다가가는 그는 대로변으로 와서 멈추는 승용차를 힐끔 바라봤다. 승용차 운전석 문이 열렸다. 그는 얼핏 몸을 돌렸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고 실장이었다.
승용차에서 내린 고 실장이 주위를 살피더니 황제 살롱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지만 진우도 그의 뒤를 따라 살롱으로 들어갔다. 계산대에 있던 송 마담과 가볍게 인사를 하던 그가 뒤를 돌아봤다. 진우를 발견한 그는 다소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어~! 미스터 서 아냐!? 여기는 왠일로.......!?”
“네. 요즘 가끔 한잔 하러 옵니다.”
“그래! 자네를 이곳에서 만날줄은........! 하여튼, 말동무나 하게 같이 한잔 할까?”
“고 실장님만 좋으시다면 요.”
룸에 들어가니 젊은 아가씨가 따라서 들어와서 고 실장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진우는 그녀가 고 실장의 고정파트너라고 짐작했다. 주문하지도 않았지만 술과 안주가 들어왔다. 고 실장의 파트너가 진우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눈웃음을 쳤다.
“처음 뵙네요. 저, 미스 장이예요. 잘 부탁 드려요.”
“아! 저 사람 우리 회사 직원이야.”
진우를 대신해서 고 실장이 대답했다. 그리고 미스 장의 어깨를 껴안고 토닥거렸다. 고 실장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린 그녀가 진우를 빤히 쳐다봤다.
“혹시, 아는 아가씨 있으세요?”
“미스 리라고 하던가! 한 번 와서 그 아가씨하고 술 한 잔 했는데........”
“송희......!? 아니면 희정 언니?”
“아! 희정 씨라고 하던 거 같은데요.”
미스 장이 나갔다가 이 희정을 데리고 들어왔다. 조금은 짙은 화장의 미스 리가 진우를 알아보고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했다. 미스 장이 고 실장의 잔에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진우 옆에 앉은 미스 리가 미스 장에게서 위스키 병을 건네받고 미소를 흘렸다.
“자~! 한잔 하세요. 저번에는 제가 취해서 실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취한 거 같지 않던데........”
“미스터 서! 벌써 썸싱이 있는 모양이군.”
“실장님은!? 그런 건 아녜요.”
진우를 향한 고 실장의 말에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은 미스 리가 눈을 흘겼다. 미스 장의 어깨를 껴안은 고 실장이 술잔을 들어 내밀었다.
“하하하~! 너 네들 말을 누가 믿겠나. 자, 자~! 술이나 한잔 하자고........”
모두들 술잔을 들고 마셨다. 고 실장이 야한 농담이 이어지고 그녀들은 깔깔거리며 폭소를 터트렸다. 술잔이 거듭 채워질수록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흥을 돋우는 두 여자가 영상 반주기를 틀어놓고 노래를 하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고, 좁지 않은 홀 안은 시끄러운 음악소리로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네, 고아원 출신이라면서~!”
“네!?”
고 실장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진우가 귀를 기울였다. 술에 약해서인지 고 실장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고 실장은 말하기 힘들었는지 그에게 다가앉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손바닥을 모아 목소리를 높여서 물었다.
“고아원 출신으로 대학까지 졸업했다면서 운전기사나 하고 있어서 되겠냐고?”
“아~! 네. 고 실장님도 마찬가지라고 하던데요!?”
“내가........!?”
“.........!?”
진우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난번에 미스 리를 통해 들었던 말이었다. 순간 진우는 예민하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술잔을 드는 고 실장의 와이셔츠 소매였다. 그도 회장 취임식 기념 카프스보턴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큐빅 알이 빠져 있었다. 진우는 모든 상황을 판단할 때 우연의 일치라고 분수가 없었다.
어쨌든 고 실장이 차 인석의 집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차 인석의 이마에 긁힌 상처와 후 두부 파손이 사경 직전에 몸부림에 일어난 것일 수도 있지만 타살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경찰에서 발표했었다. 진우는 차 인석의 이마의 상처가 고 실장의 카프스보턴에 긁힌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했다.
진우는 최 인식을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을 고 실장에게 초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물증이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긴장한 진우는 소리 없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고 실장을 빤히 쳐다봤다. 몹시 취해 보이는 고 실장의 얼굴에 왠지 고독함이 묻어났다. 그가 진우의 말을 부정하듯이 고개를 저었다.
“누구한테 들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일찍 부모를 잃은 건 사실이야. 그러나 단 하나밖에 없는 누나의 보살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 그런데.......”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말이야. 누님이........”
말을 이어가려던 고 실장이 노래와 춤을 추고 있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할 일을 잊고 흥에 도취되어 있었다. 고 실장은 그녀들의 소란스러움에 말하기 힘들었는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과일 안주를 집어 그녀들에게 던졌다.
“이 년들아! 내가 너희들 기분 맞춰주러 온줄 알아!?”
“..........”
“뭐, 이런 것들이 있어! 부를 때까지 나가있어!”
“..........”
“뭘 쳐다봐! 나가라는 말 안 들려!”
고 실장이 집어든 양주병을 던질 것처럼 고함을 질렀다. 갑작스럽게 화를 돋우는 고 실장을 바라보던 그녀들이 영상반주기를 끄고 슬금슬금 홀을 나갔다. 털썩 소파에 주저앉은 고 실장이 술잔을 들고 벌컥 위스키를 들이마셨다.
“난 말이야! 스트레스 풀려고 술을 마시지만, 끅~! 저런 여자들 보면 울화통이 터져. 저 년들 보면 우리,.....! 우리 누나가, 생각나! 끅~! 우리 누나 같은 여자는 없었어.........”
“...........!”
연달아 트림을 하던 갑자기 고 실장이 울먹이는 목소리를 흘렸다. 그는 취해서 흐느적거리면서도 스스로 위스키를 따라서 마셨다. 진우는 그의 속마음을 알아볼 기회라고 생각했다.
“고 실장님! 누님이 어떻게 되셨나요?”
“응.......! 그, 그놈이 죽인 거나 다름없어. 바보같이........”
“.........”
진우를 바라보는 고 실장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고 실장이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고 실장이 별안간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난.......! 난 말이야. 한 순간도 못 견디겠어.......”
“..........!?”
“우리 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어........”
“............”
“내가 무슨 목적으로 사는지 알아........!?꼭 그놈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만들어야......”
“그래서 신화그룹에서 출세하려는 건가요?”
“뭐라고........!?”
진우를 게슴츠레하게 바라보던 고 실장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듣고만 있던 진우는 한마디 물어보고 엷은 웃음을 흘렸다. 진우는 고 실장에 대한 심증을 굳혔지만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었다. 진우의 표정을 살피던 고 실장은 별다른 의미를 느낄 수 없었는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세상은 돈이 최고야. 출세해야지. 그래야 그 놈을 상대하지. 난 말이야.....! 끄윽~! 그 놈 주위의 여자들 모두 우리 누님처럼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어. 차근차근..........”
“...........”
딸꾹질까지 하면서 고 실장이 뇌까렸다. 진우가 고개를 숙이는 고 실장의 빈 잔에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것 같았던 그가 술잔을 들어 마셨다.
“내가 세상을 이기지 못하면 세상이 나를 패배자로 만든다면서........내 목표에 걸리적거리는 놈들은 모두........! 하하하........!”
고 실장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진우는 마치 실험물을 관찰하듯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그 남자의 여자에게 보복했습니까?”
“응.......!?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세상은 자신의 감정조차 감추고 사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니까.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여자들을 보는 그 놈의 심정이 어떨까........!?”
“하지만.........! 엉뚱한 피해자는 어떻게 하지.......!?
“피해자......!? 나 말이야?”
“이를테면 차 인석씨..........!”
“차.......! 누구라고..........!?”
“차 인석~!”
진우를 빤히 쳐다보는 고 실장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진우를 경계하는 고 실장의 눈빛!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과 상관없다는 태연한 표정을 하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 뉴스에 나왔더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니, 당신이 모를 리가 없지. 요즘 자주 만나서 술을 마셨을 텐데!?”
“하하.......! 알고 보면 그놈도 쓰레기야. 여자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그런 놈들은 없어져야해.”
“그렇다면 최 인석과 송 마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네. 권 회장이 숨겨놓은 여자가 송 마담이라는 것도........!”
“넌 뭐야! 권 회장 지시로 내 뒷조사도 한 거야? 송 마담과 권 회장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야.”
목소리를 높여 고함을 지른 고 실장이 진우를 잔뜩 노려봤다. 진우는 지금까지 말만으로도 그가 범행의 장본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진우는 그가 감정을 들어내는 순간을 이용해서 직접 실토를 받아낼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탁자 밑으로 휴대폰을 꺼내들고 녹음 스위치를 눌렀다. 그리고 비웃듯이 고 실장을 바라봤다.
“아니! 애초에 당신이 권 회장을 노리고 만든 각본이야. 최 인석은 당신의 꼭두각시일 뿐이고.”
“하하하........! 그럴 듯하지만, 나는 아니야. 너는 쓸데없는 일에 관심 갖지 않는 것이 좋아.”
“최 인석의 입에서 당신의 본색이 들어나는 것이 두려웠던 거지. 최 인석이 더 많은 돈을 달라고 협박했고! 그래서 말다툼 끝에 최 인석을 죽였어!”
“내가 그 놈을 죽였다고!?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은 있었지. 인간쓰레기니까.”
“아니 죽여 버리고 싶은 게 아니라, 감정이 격해서 죽였던 거야. 아직 누님의 원한을 되돌려 줘야할 일이 많았거든.”
“하하하.........!”
갑자기 고 실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탁자위에 놓인 위스키 병을 들어서 삼켰다. 눈동자가 붉게 충혈 된 그가 진우를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는 말이군. 나를 범인으로 몰아서 권 회장에게 아부하고 싶은 거야!? 과연 그렇게 될까? 내가 그랬다고 해도 증거도 없는 모함은 하지 마.”
“모함이라고.........!?”
진우는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체 없이 고 실장의 목을 팔로 감아쥐고 소파에 쓰러트렸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고 실장은 무척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목이 조여 얼굴이 벌겋게 된 고 실장이 그를 후려치려고 팔을 휘둘렀다. 진우가 그의 팔을 잡아 꺾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그가 비명을 질렀다.
“하 악~! 이, 이 새끼가.........!”
“네가 차 인석을 죽였다는 증거가 있어. 차 인석이 죽기 전에 사람을 시켜 송 마담을 협박했다는 사실도 실토했고, 너는 사건현장에 카프스보턴 큐빅을 떨어트리는 실수를 했어.”
진우는 카프스보턴 큐빅을 꺼내 고 실장의 눈앞에 들이댔다. 크게 뜬 고 실장의 눈동자가 의아심과 좌절감이 깃들어보였다. 큐빅을 주머니에 넣은 진우는 큐빅이 빠진 카프스보턴을 착용하고 있는 고 실장의 팔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고 실장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건 임직원은 모두 갖고 있는 거야. 넌 실수하고 있어. 나를 폭행한 죄로 경찰에 고소할 테니까. 이거 안 놔!”
“과연 그럴까!? 큐빅에 차 인석의 혈흔이 있는데도.......! 솔직히 자백하는 것이 건강에 좋을 거야.”
어느새 진우는 비수를 꺼내들고 있었다. 예리한 칼날이 번쩍이고 버둥거리던 고 실장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 악~! 왜 이래!? 사, 살려줘........”
고 실장의 손이 올라가 있는 탁자위에 피가 튀였다. 진우가 그의 팔을 탁자위에 올려놓고 비수로 손등을 내리 찍었던 것이었다. 얼굴빛이 창백해진 고 실장이 몸을 비틀며 아우성쳤다.
“사, 살려줘. 내, 내가 홧김에 주, 죽였어. 아, 아니 다투다 보니 그 놈이 죽었어.”
“넌, 차 인석이 송 마담을 못 잊어 쫓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접근했던 거지?”
“그, 그래.......! 그 놈도 송 마담을 협박해서 다시 자신의 여자로 만들려고 했어.......”
“그럼, 네가 송 마담의 집에 트럼프를 놓아두라고 사람을 시킨 거야?”
“아, 아니! 난 차 인석에게 대가를 주고 지시를 했을 뿐이야........!”
고 실장의 변명을 들은 진우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고 실장도 만만치 않았다. 허우적거리던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탁자위의 위스키 병을 휘둘렀다. 진우는 휘두르는 그의 팔을 걷어차고 팔꿈치로 명치끝을 가격했다. 바닥에 떨어진 위스키 병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지고 휘청거리던 고 실장이 벌렁 나동그라졌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달려온 송 마담과 종업원들이 홀 입구 출입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난장판이 된 식탁과 홀 안의 광경, 그리고 입가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고 실장의 모습에 모두들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우는 묵묵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112를 눌러 최 인석을 죽인 범인을 잡았다고 전화했다.
형사와 같이 경찰서로 동행한 진우는 자신이 지금까지 밝혀낸 사건정보들과, 휴대폰에 녹음된 고 실장의 자백, 카프스보턴 큐빅을 증거물로 전달했다. 고 실장의 자택을 수사한 경찰에서는 많은 량의 트럼프, 사건의 전말을 밝힐 수 있는 일기장과 메모들을 발견했다.
새벽에 경찰서에서 나온 진우는 근처 찜질방에 쓰러져 잤다. 물론 일을 처리하느라 권 회장 출근을 못시켜준다고 전화를 했다. 늦게 출근한 진우는 사건에 대한 보고를 하려고 회장실로 올라갔다. 그를 보고도 권 회장은 서류결재를 하느라고 바쁘게 움직였다.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는 권 회장이 책상 앞에 서 있는 여비서를 힐끔 올려다보고는 물었다.
“고 실장은 어디 갔나?”
“고 실장은 못 나올 겁니다!”
진우가 여비서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권 회장이 의아스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결재를 받은 여비서가 나가고 권 회장이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에게 손짓을 했다.
“앉아! 고 실장이 왜......!?”
“범인을 잡아서 경찰에 넘겼습니다. 최 인석을 죽인 사람도 고 순철이었습니다.”
“그 놈이 왜.......!?”
“혹시 고 순애라는 여자를 아십니까?”
“고 순애.......!?”
이름을 되 내인 권 회장이 잠시 미간을 찌푸리면서 입구 쪽을 살폈다. 고 순애라는 이름을 떠올리려던 권 회장이 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진우는 여자관계가 난잡한 권 회장의 사생활을 추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룹 총수로 군림하는 그가 추악하게 느껴졌다. 고 실장의 누나를 추행하고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었다. 권 회장은 의도적으로 태연한 모습을 보이려했다.
“음~! 오래전에 총무과에 근무하던 회사 직원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군요......”
“사실은 말이야........!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
“내가 술이 취해서 그만, 하룻밤 데리고 잤던 직원이야.”
“고 실장이 고 순애의 남동생이었습니다.”
“뭐라고........!?”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권 회장이 바짝 당겨 앉았다. 진우의 뜻밖의 말에 벌린 입술을 다물지 못하는 권 회장의 표정! 진우는 믿지 못하겠다는 권 회장에게 사실임을 확인하는 말 대신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을 받고 자살한 고 순애는 일찍 부모를 잃은 고 실장에게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모양입니다. 부모를 대신해서 고등학교를 졸업시킨 누나의 죽음에 원한을 품었던 것이지요.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고 실장은 송 마담에게 배신당한 차 인석을 이용했고, 말다툼 끝에 자신이 들어날 것이 두려워 살해했던 모양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차 인석을 의심해서..........”
진우의 보고를 듣는 동안 권 회장의 표정은 수시로 변했다. 권 회장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가 비벼 끄기를 반복했다. 그는 사실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한 아내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아내를 선택했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는 그는 송 마담을 대상으로 성적인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이었다.
권 회장이 송 마담을 알게 된 것은 아내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자신을 거부하는 아내에게 실망한 그는 집에 들어오기 전에 술집을 찾게 되었고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살롱까지 차려주면서 그녀의 집을 드나들었던 것이었다. 그는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숨긴 그녀를 가까이 하기도 역겹다는 생각을 했다.
경찰의 수사가 종결되고 고 실장은 차 인석을 살해한 범인으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는 권 회장은 고 실장의 살해동기 중에서 자신과 송 마담의 관계가 언론에 유포되지 않도록 검찰을 매수했다. 그리고 서 진우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다. 비록 형의 아내인 도희와 정을 통한 그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 동안 묵묵히 일 처리하는 그를 신임하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 회장은 사생활에 대한 문제를 의논할 사람이 진우 외에는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고 실장을 대신해서 진우를 비서실장으로 보직 발령했다. 하지만 자신의 자가용 운전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조차도 불안했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대도 개발의 직원을 형의 운전기사로 보내고, 김 인환을 다시 불러 총무과 직원으로 자신의 승용차 운전 보조 역할을 시켰다.
공석이 된 비서실장 직책에 오른 진우는 자유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권 종호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권 회장의 자가용 운전은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단지 그가 다른 업무로 자리를 비우는 경우에만 회사차를 운행하는 김 기사가 대행을 했다.
어쨌든 진우는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모든 것이 명백해진 상황에서 그는 당장이라도 권 회장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권 회장 스스로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권 회장의 입에서 직접 부모를 살해했다는 자백을 듣고 싶었다. 그것만이 악몽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그는 오 덕재에게 24시간 권 회장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늦더위가 지나고 푸르렀던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노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진우는 권 회장의 집안 식구들의 일거일동을 예민하게 관찰했다. 저택관리와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최 광섭은 사십대의 중년이었다. 출퇴근하는 그는 본사사옥 경비원을 거친 제육대 출신이었다. 그리고 집안 식구라고는 권 회장의 아내 지아와 가정부뿐이었다.
권 회장에게 딸린 식구들은 모두 진우가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권 회장의 아내 지아마저도 그의 목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따금 눈빛이 마주치는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여객선에서 그녀를 마주쳤던 순간의 감정이었다.
지아는 자신 스스로를 침실에 가두어 놓고 있었다. 이따금 진우와 마주치는 그녀는 생명을 잃은 그림자 같았다. 하지만 진우는 그녀에 대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실핏줄까지 드러나 보이는 투명한 피부에 도톰한 볼 살과 오목조목한 윤곽, 그리고 아담한 체구의 그녀 모습이 가슴에 각인되어 있었다. 항상 침묵과 표정 변화도 없는 그녀는 언어를 잃어버린 인형 같았다.
그리고 진우가 요즘 주시하는 사람 중에 하나가 가정부 조 숙희였다. 진우가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조 숙희는 삼십이 갓 넘은 나이로서 가정부로 들어오기 전에 신화 본사 사옥 담당 야쿠르트 배달 및 방문 판매 사원이었다. 학력이 중졸인 그녀는 사우디 건설현장에서 남편이 사망하고 아이도 없는 독신녀였다.
권 회장 저택에 오랫동안 일하던 가정부가 나이가 들어 그만두게 되었다. 총무과를 통해 소식을 들은 조숙희가 자원해서 권 회장 댁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나이가 젊은 조 숙희는 학벌이 없으나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다. 특출한 미모는 아니었으나 오동통한 살집의 농익은 몸매가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조 숙희의 평소 태도는 유별했다. 짙은 화장기로 권 회장의 퇴근을 맞이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주인마님 행세를 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권 회장의 아내 지아가 남편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안 살림 대부분이 그녀의 손에 움직였다. 진우는 그녀에게 모든 살림을 맡기고 방관하는 권 회장의 의중이 궁금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진우는 비서실 직원들과 각계인사들에게 보내는 선물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권 회장은 기업인들과 어울려 골프장으로 가고 없었다. 김 기사가 진우를 대신해서 회장 승용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나머지 선물들을 마무리한 직원들이 퇴근하고 혼자 남은 진우는 텅 빈 비서실을 둘러봤다.
의자에 앉은 진우는 서랍을 열고 바인더를 꺼내들었다. 바인더 속의 서류를 꺼내서 책상위에 펼쳐놓았다. 그가 오 덕재를 지시하여 중소기업청에서 알아낸 정보로서 중소기업인의 사진과 약력이 적힌 명세서였다. 그는 명세서에 붙어있는 증명사진을 떼어냈다. 대한기업의 사장 사진으로서 그의 생부사진이었다.
잠시 우울한 표정으로 사진을 바라보던 진우는 벌떡 일어났다.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끼워놓고 서류를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악몽의 어둠을 바라보듯이 이글거렸다. 주전자를 집어 들어 재만 남은 휴지통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회장실을 노려봤다.
문득 진우는 권 회장이 없는 틈을 노려 회장실로 들어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생부에 관한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에서였다. 그를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경비 카메라가 문제였다. 그는 화장지를 물에 적셨다. 그리고 회장실 입구를 비추는 카메라 밑에 의자를 놓고 올라섰다. 카메라 렌즈에 화장지를 붙인 후 그는 회장실로 들어갔다. 회장실 양쪽에 있는 카메라 렌즈도 같은 방법으로 처리했다.
경비원들이 순찰을 돌기 전에 처리해야하기에 진우는 빠르게 움직였다. 예민한 눈빛으로 서재에 꽂힌 책과 서류들을 꺼내 살폈다. 서재 서랍들을 뒤졌으나 그를 만족시키는 흔적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실망스런 표정으로 멈칫거리던 그는 권 회장의 책상 뒤편에 있는 청자 자기를 들고 뒤집었다. 권 회장의 일거일동을 살피던 그는 책상 서랍 열쇠를 놓아두는 장소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우는 청자 꽃병 안에서 바닥에 떨어지는 책상서랍 열쇠를 집어 들었다. 서랍마다 뒤졌으나 이렇다 할 물건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계획이 중단된 물류센터 프로젝트에 관한 서류들이 서립 깊숙이 놓여있었다. 대충 서류를 훑어본 그는 중요부분만 휴대폰을 이용해 사진을 촬영했다.
원상태로 돌려놓은 실내를 둘러본 그는 경비카메라에 붙인 화장지를 떼어내고 회장실을 나왔다. 양팔 깍지 끼고 생각에 잠겼던 그는 부리나케 비서실을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본사 사옥을 나온 그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거실 안에 들어선 그는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권 회장은 당연히 자신의 부탁으로 진우가 외출하는 줄 알고 있었다. 회장실을 나온 그는 비서실을 지나치면서 주위를 살폈다. 은연중에 그는 고 실장에 대한 경쟁의식을 느낀 것이었다. 부리나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 진우는 승용차를 몰고 나왔다. 그는 차 인석이 살고 있었던 집으로 향했다.
진우는 차 인석의 사망이 자살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 사건현장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차 인석의 집이 있는 대로변에 승용차를 세우던 그는 마주쳐 자나가는 승용차를 예리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얼핏 보기는 했으나 고 실장이 운전을 하는 승용차였다. 멀어져가는 승용차를 바라보던 그는 연립주택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골목으로 들어갔다.
음산하고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간 그는 5층 건물 연립주택으로 올라갔다. 3층의 차 인석이 살았던 현관 문 앞에는 경찰통제선의 노란 띠가 늘어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장갑을 착용한 그는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현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난감해진 그는 계단 중간에 드러난 창문을 보고 내려갔다.
계단창문을 열고 나간 그는 가스 파이프를 잡고 매달려 차 인석의 집 창문을 열었다. 그가 창문으로 들어선 곳은 세면장이었다. 거실로 들어가서 예리하게 주위를 살피던 그는 차 인석의 목줄이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대들보를 올려다봤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가구들과 바닥에 찍힌 발자국들! 경찰의 초등수사가 끝난 현장이었다.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주방 등 집안을 살피며 무언가 다른 흔적을 찾으려던 진우는 허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차 인석이 죽음으로서 그가 쫓던 목표가 사라진 것이었다. 집을 나오려고 다시 세면장으로 향하던 그는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다봤다. 거실 TV 받침대 밑에 무엇인가 반짝거리는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었다.
TV 받침대 밑에 엎드린 진우는 팔을 뻗어 자그마한 물체를 집어 들었다. 반짝이는 물체는 낯설지 않은 작은 큐빅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큐빅을 자신의 와이셔츠 소매에 달린 커프스보턴과 비교했다. 커프스보턴에 박힌 큐빅과 동일했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커프스보턴은 권 회장 취임식 기념으로 임직원에게 제공된 선물이었다.
진우는 카프스보턴이 차 인석의 죽음에 어떤 암시를 하는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차 인석이 임직원에게 카프스보턴을 받았든지, 아니면 차 인석의 집에 찾아온 임직원중 누군가가 떨어트린 것은 분명했다. 그는 과연 차 인석과 가까운 임직원이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주쳐 지나가던 승용차 안의 고 실장! 그가 차 인석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영상을 떠올렸다.
저녁 무렵, 진우는 청담동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혹시나 차 인석의 죽음과 관련된 정보가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건너편의 황제 살롱 간판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미 죽은 차 인석에 관해 모두 기피하는 상황에서 정보를 제공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관련이 있는 송 마담에게 물어본들 특별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황단보도 신호등이 바뀌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길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망설이던 진우도 사람들 틈에 끼어 길을 건너갔다. 살롱 입구로 다가가는 그는 대로변으로 와서 멈추는 승용차를 힐끔 바라봤다. 승용차 운전석 문이 열렸다. 그는 얼핏 몸을 돌렸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고 실장이었다.
승용차에서 내린 고 실장이 주위를 살피더니 황제 살롱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지만 진우도 그의 뒤를 따라 살롱으로 들어갔다. 계산대에 있던 송 마담과 가볍게 인사를 하던 그가 뒤를 돌아봤다. 진우를 발견한 그는 다소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어~! 미스터 서 아냐!? 여기는 왠일로.......!?”
“네. 요즘 가끔 한잔 하러 옵니다.”
“그래! 자네를 이곳에서 만날줄은........! 하여튼, 말동무나 하게 같이 한잔 할까?”
“고 실장님만 좋으시다면 요.”
룸에 들어가니 젊은 아가씨가 따라서 들어와서 고 실장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진우는 그녀가 고 실장의 고정파트너라고 짐작했다. 주문하지도 않았지만 술과 안주가 들어왔다. 고 실장의 파트너가 진우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눈웃음을 쳤다.
“처음 뵙네요. 저, 미스 장이예요. 잘 부탁 드려요.”
“아! 저 사람 우리 회사 직원이야.”
진우를 대신해서 고 실장이 대답했다. 그리고 미스 장의 어깨를 껴안고 토닥거렸다. 고 실장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린 그녀가 진우를 빤히 쳐다봤다.
“혹시, 아는 아가씨 있으세요?”
“미스 리라고 하던가! 한 번 와서 그 아가씨하고 술 한 잔 했는데........”
“송희......!? 아니면 희정 언니?”
“아! 희정 씨라고 하던 거 같은데요.”
미스 장이 나갔다가 이 희정을 데리고 들어왔다. 조금은 짙은 화장의 미스 리가 진우를 알아보고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했다. 미스 장이 고 실장의 잔에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진우 옆에 앉은 미스 리가 미스 장에게서 위스키 병을 건네받고 미소를 흘렸다.
“자~! 한잔 하세요. 저번에는 제가 취해서 실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취한 거 같지 않던데........”
“미스터 서! 벌써 썸싱이 있는 모양이군.”
“실장님은!? 그런 건 아녜요.”
진우를 향한 고 실장의 말에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은 미스 리가 눈을 흘겼다. 미스 장의 어깨를 껴안은 고 실장이 술잔을 들어 내밀었다.
“하하하~! 너 네들 말을 누가 믿겠나. 자, 자~! 술이나 한잔 하자고........”
모두들 술잔을 들고 마셨다. 고 실장이 야한 농담이 이어지고 그녀들은 깔깔거리며 폭소를 터트렸다. 술잔이 거듭 채워질수록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흥을 돋우는 두 여자가 영상 반주기를 틀어놓고 노래를 하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고, 좁지 않은 홀 안은 시끄러운 음악소리로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네, 고아원 출신이라면서~!”
“네!?”
고 실장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진우가 귀를 기울였다. 술에 약해서인지 고 실장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고 실장은 말하기 힘들었는지 그에게 다가앉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손바닥을 모아 목소리를 높여서 물었다.
“고아원 출신으로 대학까지 졸업했다면서 운전기사나 하고 있어서 되겠냐고?”
“아~! 네. 고 실장님도 마찬가지라고 하던데요!?”
“내가........!?”
“.........!?”
진우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난번에 미스 리를 통해 들었던 말이었다. 순간 진우는 예민하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술잔을 드는 고 실장의 와이셔츠 소매였다. 그도 회장 취임식 기념 카프스보턴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큐빅 알이 빠져 있었다. 진우는 모든 상황을 판단할 때 우연의 일치라고 분수가 없었다.
어쨌든 고 실장이 차 인석의 집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차 인석의 이마에 긁힌 상처와 후 두부 파손이 사경 직전에 몸부림에 일어난 것일 수도 있지만 타살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경찰에서 발표했었다. 진우는 차 인석의 이마의 상처가 고 실장의 카프스보턴에 긁힌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했다.
진우는 최 인식을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을 고 실장에게 초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물증이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긴장한 진우는 소리 없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고 실장을 빤히 쳐다봤다. 몹시 취해 보이는 고 실장의 얼굴에 왠지 고독함이 묻어났다. 그가 진우의 말을 부정하듯이 고개를 저었다.
“누구한테 들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일찍 부모를 잃은 건 사실이야. 그러나 단 하나밖에 없는 누나의 보살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 그런데.......”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말이야. 누님이........”
말을 이어가려던 고 실장이 노래와 춤을 추고 있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할 일을 잊고 흥에 도취되어 있었다. 고 실장은 그녀들의 소란스러움에 말하기 힘들었는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과일 안주를 집어 그녀들에게 던졌다.
“이 년들아! 내가 너희들 기분 맞춰주러 온줄 알아!?”
“..........”
“뭐, 이런 것들이 있어! 부를 때까지 나가있어!”
“..........”
“뭘 쳐다봐! 나가라는 말 안 들려!”
고 실장이 집어든 양주병을 던질 것처럼 고함을 질렀다. 갑작스럽게 화를 돋우는 고 실장을 바라보던 그녀들이 영상반주기를 끄고 슬금슬금 홀을 나갔다. 털썩 소파에 주저앉은 고 실장이 술잔을 들고 벌컥 위스키를 들이마셨다.
“난 말이야! 스트레스 풀려고 술을 마시지만, 끅~! 저런 여자들 보면 울화통이 터져. 저 년들 보면 우리,.....! 우리 누나가, 생각나! 끅~! 우리 누나 같은 여자는 없었어.........”
“...........!”
연달아 트림을 하던 갑자기 고 실장이 울먹이는 목소리를 흘렸다. 그는 취해서 흐느적거리면서도 스스로 위스키를 따라서 마셨다. 진우는 그의 속마음을 알아볼 기회라고 생각했다.
“고 실장님! 누님이 어떻게 되셨나요?”
“응.......! 그, 그놈이 죽인 거나 다름없어. 바보같이........”
“.........”
진우를 바라보는 고 실장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고 실장이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고 실장이 별안간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난.......! 난 말이야. 한 순간도 못 견디겠어.......”
“..........!?”
“우리 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어........”
“............”
“내가 무슨 목적으로 사는지 알아........!?꼭 그놈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만들어야......”
“그래서 신화그룹에서 출세하려는 건가요?”
“뭐라고........!?”
진우를 게슴츠레하게 바라보던 고 실장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듣고만 있던 진우는 한마디 물어보고 엷은 웃음을 흘렸다. 진우는 고 실장에 대한 심증을 굳혔지만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었다. 진우의 표정을 살피던 고 실장은 별다른 의미를 느낄 수 없었는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세상은 돈이 최고야. 출세해야지. 그래야 그 놈을 상대하지. 난 말이야.....! 끄윽~! 그 놈 주위의 여자들 모두 우리 누님처럼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어. 차근차근..........”
“...........”
딸꾹질까지 하면서 고 실장이 뇌까렸다. 진우가 고개를 숙이는 고 실장의 빈 잔에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것 같았던 그가 술잔을 들어 마셨다.
“내가 세상을 이기지 못하면 세상이 나를 패배자로 만든다면서........내 목표에 걸리적거리는 놈들은 모두........! 하하하........!”
고 실장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진우는 마치 실험물을 관찰하듯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그 남자의 여자에게 보복했습니까?”
“응.......!?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세상은 자신의 감정조차 감추고 사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니까.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여자들을 보는 그 놈의 심정이 어떨까........!?”
“하지만.........! 엉뚱한 피해자는 어떻게 하지.......!?
“피해자......!? 나 말이야?”
“이를테면 차 인석씨..........!”
“차.......! 누구라고..........!?”
“차 인석~!”
진우를 빤히 쳐다보는 고 실장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진우를 경계하는 고 실장의 눈빛!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과 상관없다는 태연한 표정을 하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 뉴스에 나왔더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니, 당신이 모를 리가 없지. 요즘 자주 만나서 술을 마셨을 텐데!?”
“하하.......! 알고 보면 그놈도 쓰레기야. 여자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그런 놈들은 없어져야해.”
“그렇다면 최 인석과 송 마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네. 권 회장이 숨겨놓은 여자가 송 마담이라는 것도........!”
“넌 뭐야! 권 회장 지시로 내 뒷조사도 한 거야? 송 마담과 권 회장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야.”
목소리를 높여 고함을 지른 고 실장이 진우를 잔뜩 노려봤다. 진우는 지금까지 말만으로도 그가 범행의 장본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진우는 그가 감정을 들어내는 순간을 이용해서 직접 실토를 받아낼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탁자 밑으로 휴대폰을 꺼내들고 녹음 스위치를 눌렀다. 그리고 비웃듯이 고 실장을 바라봤다.
“아니! 애초에 당신이 권 회장을 노리고 만든 각본이야. 최 인석은 당신의 꼭두각시일 뿐이고.”
“하하하........! 그럴 듯하지만, 나는 아니야. 너는 쓸데없는 일에 관심 갖지 않는 것이 좋아.”
“최 인석의 입에서 당신의 본색이 들어나는 것이 두려웠던 거지. 최 인석이 더 많은 돈을 달라고 협박했고! 그래서 말다툼 끝에 최 인석을 죽였어!”
“내가 그 놈을 죽였다고!?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은 있었지. 인간쓰레기니까.”
“아니 죽여 버리고 싶은 게 아니라, 감정이 격해서 죽였던 거야. 아직 누님의 원한을 되돌려 줘야할 일이 많았거든.”
“하하하.........!”
갑자기 고 실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탁자위에 놓인 위스키 병을 들어서 삼켰다. 눈동자가 붉게 충혈 된 그가 진우를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는 말이군. 나를 범인으로 몰아서 권 회장에게 아부하고 싶은 거야!? 과연 그렇게 될까? 내가 그랬다고 해도 증거도 없는 모함은 하지 마.”
“모함이라고.........!?”
진우는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체 없이 고 실장의 목을 팔로 감아쥐고 소파에 쓰러트렸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고 실장은 무척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목이 조여 얼굴이 벌겋게 된 고 실장이 그를 후려치려고 팔을 휘둘렀다. 진우가 그의 팔을 잡아 꺾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그가 비명을 질렀다.
“하 악~! 이, 이 새끼가.........!”
“네가 차 인석을 죽였다는 증거가 있어. 차 인석이 죽기 전에 사람을 시켜 송 마담을 협박했다는 사실도 실토했고, 너는 사건현장에 카프스보턴 큐빅을 떨어트리는 실수를 했어.”
진우는 카프스보턴 큐빅을 꺼내 고 실장의 눈앞에 들이댔다. 크게 뜬 고 실장의 눈동자가 의아심과 좌절감이 깃들어보였다. 큐빅을 주머니에 넣은 진우는 큐빅이 빠진 카프스보턴을 착용하고 있는 고 실장의 팔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고 실장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건 임직원은 모두 갖고 있는 거야. 넌 실수하고 있어. 나를 폭행한 죄로 경찰에 고소할 테니까. 이거 안 놔!”
“과연 그럴까!? 큐빅에 차 인석의 혈흔이 있는데도.......! 솔직히 자백하는 것이 건강에 좋을 거야.”
어느새 진우는 비수를 꺼내들고 있었다. 예리한 칼날이 번쩍이고 버둥거리던 고 실장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 악~! 왜 이래!? 사, 살려줘........”
고 실장의 손이 올라가 있는 탁자위에 피가 튀였다. 진우가 그의 팔을 탁자위에 올려놓고 비수로 손등을 내리 찍었던 것이었다. 얼굴빛이 창백해진 고 실장이 몸을 비틀며 아우성쳤다.
“사, 살려줘. 내, 내가 홧김에 주, 죽였어. 아, 아니 다투다 보니 그 놈이 죽었어.”
“넌, 차 인석이 송 마담을 못 잊어 쫓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접근했던 거지?”
“그, 그래.......! 그 놈도 송 마담을 협박해서 다시 자신의 여자로 만들려고 했어.......”
“그럼, 네가 송 마담의 집에 트럼프를 놓아두라고 사람을 시킨 거야?”
“아, 아니! 난 차 인석에게 대가를 주고 지시를 했을 뿐이야........!”
고 실장의 변명을 들은 진우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고 실장도 만만치 않았다. 허우적거리던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탁자위의 위스키 병을 휘둘렀다. 진우는 휘두르는 그의 팔을 걷어차고 팔꿈치로 명치끝을 가격했다. 바닥에 떨어진 위스키 병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지고 휘청거리던 고 실장이 벌렁 나동그라졌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달려온 송 마담과 종업원들이 홀 입구 출입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난장판이 된 식탁과 홀 안의 광경, 그리고 입가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고 실장의 모습에 모두들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우는 묵묵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112를 눌러 최 인석을 죽인 범인을 잡았다고 전화했다.
형사와 같이 경찰서로 동행한 진우는 자신이 지금까지 밝혀낸 사건정보들과, 휴대폰에 녹음된 고 실장의 자백, 카프스보턴 큐빅을 증거물로 전달했다. 고 실장의 자택을 수사한 경찰에서는 많은 량의 트럼프, 사건의 전말을 밝힐 수 있는 일기장과 메모들을 발견했다.
새벽에 경찰서에서 나온 진우는 근처 찜질방에 쓰러져 잤다. 물론 일을 처리하느라 권 회장 출근을 못시켜준다고 전화를 했다. 늦게 출근한 진우는 사건에 대한 보고를 하려고 회장실로 올라갔다. 그를 보고도 권 회장은 서류결재를 하느라고 바쁘게 움직였다.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는 권 회장이 책상 앞에 서 있는 여비서를 힐끔 올려다보고는 물었다.
“고 실장은 어디 갔나?”
“고 실장은 못 나올 겁니다!”
진우가 여비서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권 회장이 의아스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결재를 받은 여비서가 나가고 권 회장이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에게 손짓을 했다.
“앉아! 고 실장이 왜......!?”
“범인을 잡아서 경찰에 넘겼습니다. 최 인석을 죽인 사람도 고 순철이었습니다.”
“그 놈이 왜.......!?”
“혹시 고 순애라는 여자를 아십니까?”
“고 순애.......!?”
이름을 되 내인 권 회장이 잠시 미간을 찌푸리면서 입구 쪽을 살폈다. 고 순애라는 이름을 떠올리려던 권 회장이 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진우는 여자관계가 난잡한 권 회장의 사생활을 추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룹 총수로 군림하는 그가 추악하게 느껴졌다. 고 실장의 누나를 추행하고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었다. 권 회장은 의도적으로 태연한 모습을 보이려했다.
“음~! 오래전에 총무과에 근무하던 회사 직원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군요......”
“사실은 말이야........!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
“내가 술이 취해서 그만, 하룻밤 데리고 잤던 직원이야.”
“고 실장이 고 순애의 남동생이었습니다.”
“뭐라고........!?”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권 회장이 바짝 당겨 앉았다. 진우의 뜻밖의 말에 벌린 입술을 다물지 못하는 권 회장의 표정! 진우는 믿지 못하겠다는 권 회장에게 사실임을 확인하는 말 대신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을 받고 자살한 고 순애는 일찍 부모를 잃은 고 실장에게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모양입니다. 부모를 대신해서 고등학교를 졸업시킨 누나의 죽음에 원한을 품었던 것이지요.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고 실장은 송 마담에게 배신당한 차 인석을 이용했고, 말다툼 끝에 자신이 들어날 것이 두려워 살해했던 모양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차 인석을 의심해서..........”
진우의 보고를 듣는 동안 권 회장의 표정은 수시로 변했다. 권 회장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가 비벼 끄기를 반복했다. 그는 사실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한 아내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아내를 선택했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는 그는 송 마담을 대상으로 성적인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이었다.
권 회장이 송 마담을 알게 된 것은 아내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자신을 거부하는 아내에게 실망한 그는 집에 들어오기 전에 술집을 찾게 되었고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살롱까지 차려주면서 그녀의 집을 드나들었던 것이었다. 그는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숨긴 그녀를 가까이 하기도 역겹다는 생각을 했다.
경찰의 수사가 종결되고 고 실장은 차 인석을 살해한 범인으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는 권 회장은 고 실장의 살해동기 중에서 자신과 송 마담의 관계가 언론에 유포되지 않도록 검찰을 매수했다. 그리고 서 진우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다. 비록 형의 아내인 도희와 정을 통한 그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 동안 묵묵히 일 처리하는 그를 신임하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 회장은 사생활에 대한 문제를 의논할 사람이 진우 외에는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고 실장을 대신해서 진우를 비서실장으로 보직 발령했다. 하지만 자신의 자가용 운전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조차도 불안했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대도 개발의 직원을 형의 운전기사로 보내고, 김 인환을 다시 불러 총무과 직원으로 자신의 승용차 운전 보조 역할을 시켰다.
공석이 된 비서실장 직책에 오른 진우는 자유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권 종호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권 회장의 자가용 운전은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단지 그가 다른 업무로 자리를 비우는 경우에만 회사차를 운행하는 김 기사가 대행을 했다.
어쨌든 진우는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모든 것이 명백해진 상황에서 그는 당장이라도 권 회장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권 회장 스스로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권 회장의 입에서 직접 부모를 살해했다는 자백을 듣고 싶었다. 그것만이 악몽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그는 오 덕재에게 24시간 권 회장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늦더위가 지나고 푸르렀던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노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진우는 권 회장의 집안 식구들의 일거일동을 예민하게 관찰했다. 저택관리와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최 광섭은 사십대의 중년이었다. 출퇴근하는 그는 본사사옥 경비원을 거친 제육대 출신이었다. 그리고 집안 식구라고는 권 회장의 아내 지아와 가정부뿐이었다.
권 회장에게 딸린 식구들은 모두 진우가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권 회장의 아내 지아마저도 그의 목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따금 눈빛이 마주치는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여객선에서 그녀를 마주쳤던 순간의 감정이었다.
지아는 자신 스스로를 침실에 가두어 놓고 있었다. 이따금 진우와 마주치는 그녀는 생명을 잃은 그림자 같았다. 하지만 진우는 그녀에 대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실핏줄까지 드러나 보이는 투명한 피부에 도톰한 볼 살과 오목조목한 윤곽, 그리고 아담한 체구의 그녀 모습이 가슴에 각인되어 있었다. 항상 침묵과 표정 변화도 없는 그녀는 언어를 잃어버린 인형 같았다.
그리고 진우가 요즘 주시하는 사람 중에 하나가 가정부 조 숙희였다. 진우가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조 숙희는 삼십이 갓 넘은 나이로서 가정부로 들어오기 전에 신화 본사 사옥 담당 야쿠르트 배달 및 방문 판매 사원이었다. 학력이 중졸인 그녀는 사우디 건설현장에서 남편이 사망하고 아이도 없는 독신녀였다.
권 회장 저택에 오랫동안 일하던 가정부가 나이가 들어 그만두게 되었다. 총무과를 통해 소식을 들은 조숙희가 자원해서 권 회장 댁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나이가 젊은 조 숙희는 학벌이 없으나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다. 특출한 미모는 아니었으나 오동통한 살집의 농익은 몸매가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조 숙희의 평소 태도는 유별했다. 짙은 화장기로 권 회장의 퇴근을 맞이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주인마님 행세를 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권 회장의 아내 지아가 남편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안 살림 대부분이 그녀의 손에 움직였다. 진우는 그녀에게 모든 살림을 맡기고 방관하는 권 회장의 의중이 궁금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진우는 비서실 직원들과 각계인사들에게 보내는 선물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권 회장은 기업인들과 어울려 골프장으로 가고 없었다. 김 기사가 진우를 대신해서 회장 승용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나머지 선물들을 마무리한 직원들이 퇴근하고 혼자 남은 진우는 텅 빈 비서실을 둘러봤다.
의자에 앉은 진우는 서랍을 열고 바인더를 꺼내들었다. 바인더 속의 서류를 꺼내서 책상위에 펼쳐놓았다. 그가 오 덕재를 지시하여 중소기업청에서 알아낸 정보로서 중소기업인의 사진과 약력이 적힌 명세서였다. 그는 명세서에 붙어있는 증명사진을 떼어냈다. 대한기업의 사장 사진으로서 그의 생부사진이었다.
잠시 우울한 표정으로 사진을 바라보던 진우는 벌떡 일어났다.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끼워놓고 서류를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악몽의 어둠을 바라보듯이 이글거렸다. 주전자를 집어 들어 재만 남은 휴지통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회장실을 노려봤다.
문득 진우는 권 회장이 없는 틈을 노려 회장실로 들어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생부에 관한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에서였다. 그를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경비 카메라가 문제였다. 그는 화장지를 물에 적셨다. 그리고 회장실 입구를 비추는 카메라 밑에 의자를 놓고 올라섰다. 카메라 렌즈에 화장지를 붙인 후 그는 회장실로 들어갔다. 회장실 양쪽에 있는 카메라 렌즈도 같은 방법으로 처리했다.
경비원들이 순찰을 돌기 전에 처리해야하기에 진우는 빠르게 움직였다. 예민한 눈빛으로 서재에 꽂힌 책과 서류들을 꺼내 살폈다. 서재 서랍들을 뒤졌으나 그를 만족시키는 흔적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실망스런 표정으로 멈칫거리던 그는 권 회장의 책상 뒤편에 있는 청자 자기를 들고 뒤집었다. 권 회장의 일거일동을 살피던 그는 책상 서랍 열쇠를 놓아두는 장소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우는 청자 꽃병 안에서 바닥에 떨어지는 책상서랍 열쇠를 집어 들었다. 서랍마다 뒤졌으나 이렇다 할 물건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계획이 중단된 물류센터 프로젝트에 관한 서류들이 서립 깊숙이 놓여있었다. 대충 서류를 훑어본 그는 중요부분만 휴대폰을 이용해 사진을 촬영했다.
원상태로 돌려놓은 실내를 둘러본 그는 경비카메라에 붙인 화장지를 떼어내고 회장실을 나왔다. 양팔 깍지 끼고 생각에 잠겼던 그는 부리나케 비서실을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본사 사옥을 나온 그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거실 안에 들어선 그는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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