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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3 01:26 711회 0건
계단 밑의 어둠속에서 엿보고 있는 황 석기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하 직원의 가슴에 안겨있는 권 회장의 아내! 감히 회장님의 사모님과 어떻게!? 믿기지 않지만 눈 앞에 펼쳐진 사실이었다. 권 씨 일가의 충복이었던 그는 분노가 치밀었다. 진우가 그녀를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황 석기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거렸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진우는 도희를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고 자신이 걸친 옷을 벗어던졌다. 이미 그의 여자로서 더욱 민감해진 그녀는 근육으로 다져진 그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능동적으로 변한 그녀의 눈빛! 진우는 서둘러 그녀의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벗겨냈다. 브래지어 호크를 풀어내려는 것을 의식한 그녀가 등을 들어 올렸다.

넓은 침대위에 발가벗은 그들은 서로를 탐닉했다. 혀와 혀가 엉키며 서로의 타액을 들이마셨다. 그의 혀끝이 그녀의 알몸을 훑어 내려가며 민감한 돌기들을 불러 일으켰다. 점점 거칠어지는 그들의 숨소리와 서로를 갈구하는 눈빛! 그녀는 허벅지 사이에 틀어박힌 그의 어리를 보듬어 안으며 둔부를 들썩거렸다.

“하 으.......! 지, 진우씨........”

도희는 뜨거운 열기가 허벅지 사이로 들어와 뼈마디를 녹이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몸속에는 그에게서 느꼈던 격렬한 희열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예민한 감각기관들을 타액으로 적시던 그가 그녀는 젖가슴을 보듬으며 내려다봤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 고개를 돌린 그녀는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음........!”

진우의 입속으로 젖꼭지가 빨려 들어갔다. 도희는 온 몸이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던 그녀는 그의 허리를 움켜쥐고 당겼다. 그가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기둥처럼 솟은 페니스를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밀어 넣었다. 급히 들이마신 숨을 멈춘 그녀가 상체를 들어 올리며 매달렸다.

“하 읍~!”
“음.......!”

갑작스런 포만감에 빠져든 도희는 그를 깊이 받아드리려고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의 남성이 그녀의 몸속 깊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빠져 나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둔부를 들어올렸다. 몸속의 살갗을 헤집는 남성이 규칙적으로 진퇴를 하고 그녀는 엑스터시의 등선을 치달았다. 하나가 되어 거친 숨을 내쉬는 그들은 이미 익숙해진 서로의 불길 속에 휩싸였다.

신화그룹 본사 사옥 10층 회의실 안에는 권 이사와 임원들이 타원형 탁자 앞에 둘러 앉아 있었다. 회의 진행 중이었지만 누구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회의 주제 안건은 권 이사가 발의한 물류센터 건립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국내뿐만 아니라 동양 제일 큰 규모의 물류센터 건립을 하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임원회를 소집한 것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임원들이 권 이사의 안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권 이사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했다. 임원들은 실제로 신화그룹의 실제 권한을 갖고 있는 대표이사 의안을 반대하는 주동자가 될 수 없어서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침묵을 깨고 재정담당 정 동주이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서는 무리요. 기존 부지를 포기하고 다른 부지를 구입한다고 하는데, 지금 회사 자금사정이 최악입니다. 부지를 구입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정부에서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고, 환율이 곤두박질하고 있습니다. 공장들의 생산능력이 떨어져서 해외 건설업체 자재 공급도 원활하지 못한 형편입니다.”
“그건 일시적인 상황입니다. 이 년 전에도 우리 신화는 같은 여건에서 국내 최대의 경영실적을 올렸습니다. 이런 기회일수록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도리어 호재로 생각해야 됩니다. 자금 문제는 내가 처리할 것입니다.”

정 이사의 말에 권 이사가 역정을 품은 표정으로 반박했다. 정 이사의 말에 동조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임원들이 다시 권 이사의 눈치를 살폈다. 다시 정 동주 이사가 마이크를 끌어 당겼다.

“이건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권 이사님 개인적인 판단에만 의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정부가 대기업 규제를 하고 있는 마당에 허가를 내줄지도 확실치 않고, 확실한 자금조달 계획도 수립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또한 회장님이 정상으로 활동할 수 없어 공석 상태에서 결정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한 뒤에 좀 더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권 종호는 정 이사의 말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신화그룹의 초기 멤버인 그를 신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형의 사업 파트너인 정 이사의 말을 무시할 수 없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때 관리담당 신 하진 이사가 일어섰다. 그는 권 종호의 학교후배이고 그의 수족 같은 임원이었다.

“회사를 염려하시는 정 이사님 말씀도 맞습니다. 하지만 대표이사님은 벌써 오래전부터 이 프로젝트를 신중하게 검토하시고 계셨습니다. 대표이사님을 믿고 상황을 돌파해나가야 신회의 발전이 있으리라 판단됩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병원 주치의사의 결과를 내렸습니다. 이 기회에 대표이사님을 회장으로 선출해서 신회그룹의 경영 조직을 개편했으면 하는 제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임원회 의안에 없던 신 이사의 발언이었다. 참석한 누구도 예기치 않았던 상황에 모두들 눈치를 살폈다, 임원들 대부분 권 태호 회장과 권 종호 이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형제간인 그들은 모두 추진력 있고 과감한 성품이지만 권 회장은 차분하고 인자한 성격인 반면에 동생 권 종호는 머리 회전이 빠르지만 거칠고 단순했다.

신화그룹내의 임원이나 직원들뿐 만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권 종호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형인 권 회장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던 실내가 임원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뭐라고.......!?”
“회장직을.........!?”

“맞는 말이야.”
“하지만, 회장님이........”
“어차피 대표이사가 오너 역할을 하고 있잖아.........”

권 종호는 엷은 미소를 띠고 묵묵히 임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미리 짜놓은 각본이었다. 그는 그의 주동세력인 신 이사와 총무과장을 지시하여 주주들을 미리 포섭해 놓은 것이었다. 찬성하는 표정의 임원도 있지만 정 동주 이사를 비롯한 몇몇 임원들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다른 임원이 불쑥 일어났다.

“회장 선임에 관한 건은 주주총회 의결이 필요한데, 가능합니까?”
“이사회에서 결정한 안건만 올리면 임시 주주총회에서 가결시키는데 문제가 없으리라고 판단됩니다. 다른 분을 회장 후보로 추대한다고 해도 대표이사님보다 많은 주주들의 찬성을 받을 수 없을 겁니다.”
“............”

권 종호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임원들은 반대 의견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또한 실제로 권 회장을 이어받을 가족이 권 종호밖에 없었다. 요양원에 있는 진 호식 이사나 재정담당 정 동주 이사가 주주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으나 실제로는 권 종호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앉아서 동태를 살피던 신 하진 이사가 손을 들고 일어섰다.

“그럼, 회장직 선임에 관한 안건을 정식으로 발의하겠습니다. 다른 의견 있으신 임원님 계십니까?”
“...........”

누구도 신 이사의 의안 발의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임원회의에 정식 안건이 아니고 갑자기 채택되는 것이기에 누구도 사전에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다만 정 동주 이사를 비롯한 소수의 임원들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실내를 돌아보던 신 이사가 권 종호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의자등거리에 기대고 앉았던 권 종호가 자세를 바로 잡고 의사봉을 집어 들었다.

“회장 선임에 관한 의안을 정식으로 채택합니다.”

권 종호가 대뜸 들고 있는 의사봉을 두들겼다.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만 들리고 실내의 모든 임원들은 침묵했다. 총무과장 고 순철이 분주하게 미리 준비된 서류들을 임원들에게 배포하고 신 이사가 이어서 말했다.

“회장 선임에 관한 임시총회 안건을 채택하는 의안에 찬성하시는 임원님들은 거수해주십시오
“.........”

신 이사가 묻는 동시에 손을 번쩍 드는 임원도 있고, 눈치를 살피며 손을 드는 임원도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정 동주 이사를 비롯한 소수임원만 시선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권 종호가 의사봉을 집어 들었다.

“주주총회에 발의할 회장 선임에 관한 의안을 채택합니다.”
“.........”
“.........”

모든 사항이 돌발적이지만 일사천리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의사봉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 회의장을 나가는 임원, 수군대는 임원, 회의장이 조금은 소란스러워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임원은 이사회 종료를 알리는 총무과장의 목소리를 듣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까지 앉아있던 정 동주 이사는 권 종호를 노려보다가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권 종호는 희색이 만면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소수의 임원들의 반대하는 표정에 기분이 좋지 않지만 그는 계획대로 형을 대신해서 회장이 된 것이나 다름없기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회장의 권한이 필요했던 그는 뒤따라 들어온 신 이사와 고 과장의 등을 토닥거렸다.

“수고했어! 형식적이지만 임시 총회 날짜를 빠르게 잡도록 해. 주주들 수당과 선물도 푸짐하게 준비하고.”

“네. 이사님! 아~! 이제 회장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성급하긴.......!? 겸손한 태도도 필요해.”

권 이사는 자신 스스로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신 하진이사는 마치 자신이 회장직에 오른 것처럼 거들먹거렸다. 권 종호는 책상 서랍에서 바인더를 꺼내들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가 신 이사에게 작성하게 지시했던 물류센터 건립 프로젝트에 관한 서류였다. 이사회에 부의했던 안건에 반대하는 임원도 소수 있었으나 흐지부지 가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 이사와 머리를 맞대고 신중하게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일주일후, 용산의 신화그룹 본사 사옥에는 많은 차량들이 드나들었다. 임시총회에 참석하는 주주들이었다. 사옥 건물 내에도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총회 안건에 반대하는 소수의 주주들은 불참하였고, 유일하게 권 이사와 같이 회장에 추대된 정 동주 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작 회의는 삼십분도 소요되지 않았다.

정 동주 이사는 들러리에 불과했고 권 종호가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되었다. 참석했던 주주들은 수당이 듬뿍 담겨진 봉투와 선물꾸러미를 들고 돌아갔다. 권 태호 회장이 사용하던 방은 새롭게 인테리어를 꾸미고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회장실로 들어가 앉은 권 종호는 비로소 신화의 주인이 된 기분이어서 뿌듯했다. 그는 신 하진 이사가 추천하는 총무과장 고 순철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그도 그의 대학 후배였다.

권 종호의 회장 취임식은 삼성동 그랜드 호텔로 정해졌다. 성대하게 준비한 식장에는 공직자들과 기업인들, 그리고 연예인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초청되었다. 그의 아내 진 도희, 권 회장의 아내 권 지아, 그의 여동생 권 민경은 물론 평소 가깝지 않았던 친척들까지도 보였고, 가정부, 관리인, 경비원까지도 극소수만 제외하고 모두 참석했다.

권 민경의 화려한 드레스에 비해 진 도희는 검은 정장 차림으로 시종일관 침울한 표정으로 있었다. 진우는 별로 꾸밈없이 넥타이가 없는 흰 와이셔츠에 검은 양복을 걸치고 한쪽 구석에 있었다. 그가 시선을 향한 곳에는 연단 앞쪽의 권 종호 회장의 아내 지아였다. 짧은 짧은 커트 머리와 흰색 블라우스위에 감색 체크무늬 투피스를 착용하고 앉아있는 그녀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화장기도 없는 지아의 모습은 누가 봐도 유부녀라기보다는 처녀티가 완연했다. 진우는 홀로 앉아있는 도희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했다. 그녀는 그에게 권 종호의 회장 취임식에 참석하기 싫다고 말했었다. 회장 취임식이 시작 되기 전에 지아가 남편의 뒤를 따라 연단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직원들이 전 회장 부인인 예의로 도희에게 다가가서 연단으로 오르라고 안내했다.

취임식이 시작되고 권 종호의 회장 취임사에 이어서 장내는 요란한 박수갈채가 넘쳐흘렀다. 공직자와 기업인들의 축사가 이어지고 취임식장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취임식이 끝나고 리셉션은 호화롭게 진행되었다. 모두들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평소 친근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술잔을 마주쳤다.

진우는 한쪽 구석의 탁자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권 민경이 그를 바라보고 다가왔다. 그녀는 들고 온 그라스의 와인을 마시고는 그에게 권했다. 그는 권 이사가 무슨 지시를 할지 몰라 대기하고 있었기에 한 모금 마시고 그라스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그에게 하얗게 눈을 흘겼다.

“왜, 안 마셔? 내가 주는 잔 싫어?”
“지금 회장님 지시, 대기 중.........!”

“피 잇~! 한잔인데 어때! 마시고 나 한잔 줘.”
“..........”

민경은 스커트 자락이 허벅지까지 치켜 올라가있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진우는 의도적으로 유혹하는 그녀의 눈빛이 역겨웠다. 그의 시선은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축하객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권 종호 회장과 마네킹처럼 뒤를 따르는 그의 아내 지아였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웃던 권 종호가 아내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 하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아가 권 종호를 노려봤다. 그리고 그녀는 팔을 잡아당기는 남편을 뿌리치며 몸을 돌렸다. 순간 입구를 향해 몸을 돌린 그녀와 진우의 눈빛이 마주쳤다. 다시 붙잡으려고 하는 권 종호를 돌아본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 미간을 찌푸렸던 권 종호는 이내 축하객을 향해 웃는 모습을 보였다. 민경이 들고 있는 그라스에 와인을 따라 주던 진우가 슬며시 일어섰다.

“잠간만.......!”
“어디 가........?”

민경의 말을 무시한 진우는 빠른 걸음으로 입구로 나갔다. 복도에는 리셉션 장소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올려다보니 그녀의 투피스 자락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부리나케 층계를 뛰어 올라갔다. 한층, 두층 오르다보니 옥상으로 향한 출입구였다.

열려있는 옥상 출입구로 들어간 진우는 지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저절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네킹처럼 서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그에게 눈인사를 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공연히 쑥스러운 그는 어줍은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여, 여기.......계셨군요........”
“아.......!? 안녕하세요.”

“바람도 차고 위험한데........”
“왜요.......!? 내가 뛰어 내리기도 할가 봐서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염려 마세요. 이젠 그런 짓 안 해요.”

진우나 지아는 침몰하던 여객선 당시를 떠 올린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염려스러워 뒤쫓아 온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뛰어나온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사생활에 대한 것이고, 혹시나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릴 것 같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이따금 시선을 마주치고 눈웃음을 지었다.

지아의 눈동자 속에 가까이 다가서는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악몽 속에 아릿하게 떠오르던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인형처럼 환상적인 그녀의 모습!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턱 밑에서 숨결을 흘리는 그녀의 입술이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입술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여객선에서 마주했던 그를 떠올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키스를 받았던 당시의 환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감정의 열기가 고조되고 그녀는 현실 속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짙은 눈망울이 반짝였다. 무슨 말인가 하고픈 그녀의 표정! 하지만 돌아선 그녀가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진우는 그녀 뒤를 따라가려고 한발자국 움직였다가 멈추어 섰다. 빙판 위를 걸어가듯이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감정만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한편 지아가 사라지고 권 종호는 기분이 언짢았다. 사실 그는 취임식장에도 나오려고 하지 않으려던 아내를 윽박질러서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과 2차 리셉션을 마련하였기에 아내에게 같이 가자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를 뿌리치고 나가버린 것이었다. 회장 취임에 들떴던 그는 씁쓸했지만 축하객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권하는 잔을 마다하지 않고 마셨다.

얼큰해진 권 종호는 아내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직원들에게 지시할 수도 없기에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도 그를 축하하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때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남자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 나이가 많으면서도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혀 그에게 인사를 했다. 남자를 바라보던 그가 환한 웃음을 흘렸다.

“아이구! 황씨! 오랜만이네. 내가 찾아 보지도 못하고.”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남자는 다름 아닌 권 종호의 형, 권 태호 저택관리인 황 석기였다. 예전에는 그를 그림자처럼 모시던 심복으로서 사석에서 술자리도 자주했기에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식구나 다름없었다. 권 종호는 반가운 표정으로 황 석기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래! 요즘 건강은 좋고?”
“네. 회장님 덕분에요.”

“바빠서 가보지도 못했는데, 형님 건강은 요즘 어떠셔?”
“아시다시피 전 회장님이 회복하시기는 힘들잖아요.”

“그건, 그래! 그럼 안에 들어가서 뭘 좀 먹고 있어.”
“저.......! 회장님!”

황 석기가 몸을 돌리려는 권 종호를 불렀다. 사실 권 종호는 스케줄이 바빠 시간도 없지만, 그와 오래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옛정을 생각해서 반가이 맞이했던 것이었다. 그는 조금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왜.....!? 나중에 만나지.”
“지금 급히 드릴 말씀이........”

“뭔데......!? 지금 꼭 해야 되?”
“미리 찾아뵙고 말씀드리려던 건데........”

“그래.......!?”

권 종호는 그의 얘기를 들어야할지 망설여졌다. 귀찮기는 하지만 예전에도 그가 은밀하게 전했던 말들은 거의 중요한 참고가 되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주위를 둘러본 그는 문이 열려있는 작은 방을 확인하고 그에게 말했다.

“음.....! 저기......”

작은 방에는 직원들이 모여서 따로 준비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권 종호는 직원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손짓하고는 문을 닫았다. 탁자 앞의 소파에 앉은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서있는 황 씨를 불렀다.

“와서 앉아. 그래, 무슨 말인데?”
“저기 믿으실지 모르지만 너무 황당해서........”

주춤거리던 황 석기가 마주 앉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권 종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얼른 그가 얼른 얘기를 듣고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뭔 말인데, 빨리 해봐. 내가 시간이 없거든.......”
“한동안 곰곰이 생각했는데요.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이건........”

황 석기가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무심코 봉투를 열어보는 그의 안색이 변했다. 형의 아내 도희와 진우가 부둥켜안고 있는 사진, 키스를 하는 장면, 병원 복도에서 손을 잡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그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진속의 인물은 분명히 그들이었다.

“이게 뭐야........!?”
“저도 놀랬습니다. 차마 사모님이 미스터 서하고........! 믿지 못하실 거 같아서 찍었습니다.”

“음.......!?”

권 종호는 뒷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믿고 있던 진우가 형의 아내와 은밀한 관계라니, 그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벌떡 일어선 그는 방안을 배회했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주저앉으며 치미는 울화를 진정시켰다. 그는 한때 진 문식 이사의 가족과 이웃친척처럼 지냈고 형이 재혼하기 전까지는 도희를 여동생처럼 믿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다른 남자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배반당한 심정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리셉션 장소로 가서 그들을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의 사생활도 적지 않은 여자관계가 얽혀 있었다, 신화그룹의 총수를 바라보는 그는 항상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도희가 한창 젊은 나이의 여자였기에 그는 이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병든 남편의 외로운 아내였다. 진우 또한 그가 앞으로도 계속 심복으로 데리고 있을 만큼 능력이 뛰어났다. 도희를 어쩔 수도 없고 진우 또한 쫓아 낼 수도 없는 상황이기에 권 종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땅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아 실내를 배회하는 그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렇다고 방관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한편 2차로 준비된 리셉션에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는 시간이 조급했다. 그는 탁자위에 놓인 사진을 봉투 속에 넣었다. 그리고 봉투를 호주머니에 넣으며 일어섰다.

“이 사진 필름.....! 갖고 있나?”
“네!”

“나한테 보내.”
“네. 알았습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없었던 일로 하고.”
“네? 네.......!”

굽실거리는 황 석기를 뒤로 하고 권 종호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리셉션 장소로 되돌아간 그는 축하객들 사이에 들어가 웃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얼마 후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리셉션 장소를 나왔다. 호텔 앞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를 태운 승용차가 호텔을 빠져 나가고 고급 승용차들이 줄지어 뒤를 따랐다. 빌딩가 주변은 오색찬란한 네온등이 어두운 밤을 수놓고 있었다.

경인고속도로는 언제나 혼잡했다. 인천항으로 승용차를 몰고 가던 진우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자동차 물결을 간신히 벗어났다. 신월 교차로에서 그는 핸들을 꺾어 다시 서울 방향으로 유턴했다. 하청 업체로부터 건축자재를 인수받아 사우디의 건설현장으로 보내는 화물선에 선적시키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본사사옥으로 급히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본사사옥으로 가는 을지로도 차량이 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중요한 지시가 기다리는 것 같아서 진우는 갓길로 추월해서 어렵게 본사사옥에 도착했다. 건물 입구에서 경비 직원이 그에게 다가와 7층 소회의실에서 회장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시간이 지체되었기에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빠른 걸음으로 소회의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다가 멈추어 섰다.

누군가 소회의실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고 순철 총무 과장이었다. 진우는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하는 고 실장이 무슨 이유로 소회의실을 엿보고 있었는지 의아스러웠다. 고 실장은 이내 정색을 하고 그를 향해 걸어왔다. 그는 말없이 지나치는 고 실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소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닫고 돌아선 진우는 저절로 긴장이 됐다. 예기치 않은 도희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실내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창밖을 향해 돌아서서 뒷짐을 짚고 있는 권 종호 회장, 그리고 부동자세로 서있던 김 인환 기사가 그를 쳐다봤다. 침묵이 흐르는 실내를 돌아보며 멈칫거리던 그가 권 회장의 뒤로 다가섰다.

“부르셨습니까?”
“..........!”

진우의 말에 권 회장이 돌아섰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김 기사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다. 김 기사가 진우와 도희를 힐끔 쳐다보며 회의실을 나갔다. 김 기사의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고 침묵이 흘렀다. 독기가 오른 권 회장의 눈빛! 진우와 도희를 번갈아 잔뜩 노려봤다.

“이 새끼가! 네가 어떻게~!?”

권 회장이 대뜸 진우의 뺨을 후려쳤다.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는 그는 도희의 시선을 의식했다. 숙였던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는 그녀는 잔득 겁에 질려 있었다. 창백한 그녀의 표정에 그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권 회장이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리고 그를 왈칵 밀어 젖혔다.

“넌, 그렇게 계집이 없었어? 하필이면.........!”
“..........!?”

뒷걸음을 치다가 멈춘 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권 회장을 쳐다봤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마주친 권 회장이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 꺼내 그를 향해 던졌다. 바닥에 흩어져 떨어지는 사진들! 진우 자신과 도희의 사진들이었다. 진우는 그때서야 도희와의 관계를 권 회장이 알게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권 회장이 다시 그를 후려칠 듯이 주먹을 높이 들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더 이상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불끈 쥐었던 주먹을 내린 권 회장이 도희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를 것처럼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형수님! 아니...... 그냥 도희라고 하지. 붙어먹을 놈이 그렇게 없었어?”
“.........”

“그렇게 남자가 필요했으면 밖에서 찾아볼 것이지........”
“..........”

“내 집안에 들어와서 등 따습고 배부르니 남자가 생각났어?”
“..........”

“네 아버지가 알면 박수치겠다. 미친 년~!”

도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권 회장이 어깨를 칠 때마다 뒷걸음쳤다. 진우는 자신이 보호해줘야 할 것만 같은 그녀가 애틋하기도 하지만, 자책감에 젖어 각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떻게 권 회장이 알았을까. 사진까지 찍어서 권 회장에게 알려줄 수 있는 사람으로 집안 식구들이 떠올랐다. 아니면 권 회장에게 아부하는 측근의 짓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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