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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3 01:26 677회 0건
서재로 들어간 은영은 책상 앞에 앉았다. 직접 전하지 못하지만 남편에게 남겨야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펜을 들고 보니 머릿속이 백지 상태였다. 그녀는 남편을 향한 글을 썼다가 꾸겨 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마지막 편지에 무슨 끌을 썼는지 기억조차도 하지 못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손가방을 집어 들고 열었다,

은영은 왠지 침착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이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가방 속에서 수면제와 살충제 병을 끄집어냈다. 그녀는 한동안 살충제 병에 부착된 설명서를 읽었다. 수면제를 몽땅 입에 털어 넣고 살충제 물약을 들이켰다. 왠지 달콤하다는 감각을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서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니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자정을 향하는 밤은 점점 어둠과 정막에 휩싸여갔다. 주택가 멀리 대로를 질주하던 차량의 물결도 잦아졌다. 그때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한 재식의 여동생 민주였다. 그녀가 부모와 같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오빠 집에서 멀지 않았다. 그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민주는 언니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오빠를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그녀가 직접 목격했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다시 획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언니를 철저히 저주하던지 왜 그랬는지 답변이라도 듣고 싶었다. 골목 입구에 멈춘 그녀는 오빠의 빌라 앞을 살폈다. 그녀가 나갈 때 보았던 고급 승용차가 보이지 않았다.

빌라 3층 계단을 단숨에 뛰어 오른 민주는 치솟는 감정을 억제하느라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녀는 언니를 보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뚜벅 뚜벅 걸어간 그녀는 침실 방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잠들었는지 그녀가 온 것도 모르고 은영은 반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언니~! 일어나. 할 말 있어.”
“........”

침대에 걸터앉은 민주는 은영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런데 언니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가슴에 얹은 손이 밑으로 떨어졌다. 민주는 갑자기 불길함을 느꼈다. 술이라도 마셨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화장대 위를 향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화장대 위에 놓인 약봉지와 약병을 들고 살폈다. 그리고 그녀가 떨어트렸던 핸드폰이 있었다. 민주는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언니~! 언니. 왜 이래! 일어나 봐.”
“.........!”

민주가 아무리 흔들어도 은영은 꿈쩍하지 않았다. 언니의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언니의 손가 가슴이 차가웠다. 죽음의 길을 선택한 은영이 반응할 리가 없었다. 뒤늦게 상황을 직감한 민주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언니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왜 이래! 언니. 안 돼. 으흐흑.....흐윽~!”

민주의 울음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퍼졌다. 한동안 울음을 터트린 그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민주가 목격한 광경은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주의 놀라는 눈빛에 갈 곳을 잃은 그녀가 마지막 선택을 했던 것이었다. 온통 눈물로 얼룩진 그녀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애통한 울음을 이어갔다.

커튼 사이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서있던 진우는 잠들어 있는 지아의 침대로 다가갔다. 어린 나이에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헤어날 수 없는 생황을 했던 여자가 아니었다. 아직도 앳되고 철부지 같은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어린 여자가 아니었다.

진우는 자신의 가슴에서 새롭게 태어난 지아의 모습을 애처롭게 내려다봤다. 어제 저녁에 그녀는 아기를 갖고 싶다면서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의 마음은 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여동생이었는지 신을 원망하고 싶었다.

진우는 도저히 권 회장의 말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설령 더욱 절망에 빠진다고 해도 권회장의 말을 획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고아원에서 일했던 홍 승기 노인의 말을 떠올렸다. 권 회장의 말을 획인시켜 줄 사람은 마지막까지 고아원에 있던 베로니카 수녀였다. 그는 메모지를 남기고 지아가 깨어나기 전에 오피스텔을 나왔다.

정오가 가까워 진우는 명동성당에 도착했다. 성당내의 정결함과 경건함에 저절로 조급했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것 같았다. 사무실을 찾아 방문한 목적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담당 사무원은 친절하게 녹차까지 주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한동안 서류를 검토하던 사무원이 다가왔다.

“형제님! 찾으시는 수녀님이 이 지영 베로니카 수녀님이라고 하셨지요?”
“네. 어디 계십니까?”

“지금 은퇴하셔서 수녀원에 계시는데요.”
“어느 곳인데요?”

“장충동 성모성심 수녀원인데요. 피정을 자주 나가셔서 만나실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진우는 수녀님이 계신 곳을 알아낸 것만도 기뻤다. 감춰졌던 모든 사실을 알게 될지도 마음에 그는 마음이 들떴다, 그러나 장충동 수녀원을 찾아 갔으나 베로니카 수녀님은 출타중이셨다. 수녀원에 계시기는 하지만 이틀 전에 춘천의 마리아의 집에 가셨는데 언제 오실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진우는 포기할 수 없었다. 어쨌든 수녀님을 만나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무렵에 그는 춘천에 도착했다. 아파트 주위와 주택가를 돌아다니다가 복덕방에 문의하여 간신히 마리아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뜨락에는 아기들을 안은 미혼모들이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나이 많은 수녀님이 미소를 띠우며 진우를 쳐다봤다. 그는 종사하는 여직원에게 다가가서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여직원이 눈을 껌벅이더니 그를 쳐다봤던 나이 드신 수녀님을 불렀다.

“베로니카 수녀님! 손님이 찾아 오셨는데요.”
“나를.......!?”

아기들 의류를 챙기던 베로니카 수녀님이 진우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수녀님이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의아스런 표정으로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그가 수녀님 앞으로 다가서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저는 서 진우라고 합니다. 이십 여 년 전에 인천 보육원에 계시던 베로니카 수녀님 맞으시죠?”
“오~! 그래요. 그런데 뉘신지 모르겠네.”

“제가 어린 시절이어서 잘 모르실 겁니다. 그 때 제 이름은 송 재민이었습니다.”
“송 재민!? 그렇군. 내가 나이가 많아 기억력이 없지만 처음 듣는 이름 같은데.”

“저희 아버님 성함이 송, 민자 욱자 이신데 혹시 아실는지.......!?”
“아! 송 민욱 사장님은 기억나지. 좋은 일도 많이 하셨으니까. 젊은이가 아드님이시라고?”

“네.”
“그래 맞아! 송 사장님에게 어린 아들과 젖먹이 딸이 있었지. 하여튼 어디 좀 앉지. 휴게실로 갈까.”

수녀님은 앞장서서 또 다른 건물의 휴게실로 들어갔다. 아담한 휴게실 벽에는 십자가와 기도문들이 적힌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수녀님은 손수 커피를 타가지고 왔다. 탁자를 마주하고 앉은 수녀님은 양손으로 커피 잔을 모아들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은총으로 오래 살다보니......! 오래전 사람도 만나는군. 반가워요.”
“네. 수녀님을 뵈니 가슴이 설렙니다.”

“호호~! 그래요! 무슨 일로 날 찾아 왔어요.”
“아까 제 여동생이 잇다는 것을 기억하신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가물가물 하지만.”

진우는 수녀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하는 말에 조바심이 났다. 그의 마음과 달리 수녀님은 평온한 표정으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진우는 마지막 불씨를 꺼트리고 싶지 않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여동생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요.”
“여 동생.....!? 이름이 뭐였더라......”

“송 은희였습니다.”
“아! 그런거 같군. 불의의 사고로 송 사장님 가족이 돌아 가시고, 아드님과 따님이 고아원에 오게되었지. 그런데 은희가 그때 급성 심장병으로 사망한 것은 알고 있지?”
‘네.......!? 은희가 죽어요?“

진우는 수녀님의 뜻밖의 말에 어의가 없고 황당했다. 그가 지금까지 들었던 말로는 은희가 입양되어 보육원을 떠났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청천 벽력같은 수녀님의 말이었다. 수녀님이 도리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동생이 사망한 것을 모르고 있었나? 하기야 우리도 갑자기 사망했으니 몹시 놀랬지.”
“저는 제가 떠난 후 은희도 입양되었다고 알고 있었데요.......”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네. 아니야.”

수녀님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찌되었다는 말인가. 사망한 권 태호 회장은 분명히 보육원에서 은희를 양녀로 데려다 키웠다고 했다. 어리둥절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제 동생은 젊은 부부에게 입양되었다고 하던데요. 그 남자 이름이 권 태호. 그 사람의 부인, 그리고 그 남자동생이 같이 와서 데려갔다고 하던데요.”

“권 태호!? 그분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신화그룹 회장이잖아. 그분은 알고 있지.”
“네. 그분에게 직접 들은 건데요.”

“아! 뭔가 착각들 하고 있었구나. 음.......?!”

수녀님이 지억을 떠 올리는 표정을 하고는 무릎을 쳤다. 진우는 무엇이 착각이라는 말인지 이야기 할수록 자신이 알고자 하는 진실이 오리무중이었다.

“그분들이 입양한 아이는 다른 아이였어. 은희는 분명히 사망했어. 나도 무척 가슴이 아팠던 일이야.”
“그럼, 권 회장이 입양한 아이는 누구지요?”

“비슷한 시기에 은희하고 같은 또래의 여자아기가 보육원에 들어왔어. 그 아기를 권 회장이 입양한 것이었어.”
“네.......!?”

진우는 어의가 없었다. 그렇다면 권 회장이 잘못 알고 있었고 지아가 여동생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러면 지아는 과연 누구라는 말인가. 그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 아기의 부모는 누구지요?”

“가슴 아픈 지난 일이야. 어느 날 한 젊은 처녀가 아기를 데리고 찾아왔어. 앳되어 보이기에 아기 엄마인줄 몰랐지. 그런데 남자에게 강제로 당하고 임신을 했던 모양이야. 죽고 싶은 심정인데 아기때문에 어쩔수 없이 왔다면서 울면서 사정사정하는 거야.”
“..........!?”

“우리는 차라리 그 여자를 설득해서 아기를 낳아 기르게 하려고 했지만, 결구 아기를 문 앞에 놔두고 쪽지만 남기고 사라졌어. 나중에 연락이 됐지만 아기를 포기하더군. 요즘도 참 안타까운 일들이 많아. 모두 주님의 은총을 받아야 할 아기들인데.”

“그 아기 엄마와 연락이 가능할까요?”
“글쎄, 하도 오래전 일이라서. 그 보육원을 인수한 보육원에 기록이 남아 있을 런지는 모르겠네.”

진우는 자신이 있던 고아원에서 들었던 말을 기억했다. 그가 있던 고아원을 제물포 성당 보육원에서 인수했다는 말이었다. 시간도 늦었고 피곤했다. 하지만 그는 지아가 자신의 여동생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 마음이 안정되었다. 기다리고 있을 지아가 걱정되었다.

진우는 밤 10시가 지나서 서울에 도착했다. 지아가 관연 누구인가를 확인해야 모든 것이 확실해 질 것이다. 지아에게 늦어도 저녁에는 돌아간다는 메모를 남기고 올라 온 것이다. 다시 인천에 가서 확인하기는 늦은 시간이고, 그렇다고 군산으로 내려갔다가 올라 올수도 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지아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 어떻게 된 거야? 왜 안와.”
“미안해. 급한 일이 생겨서 내일 내려갈게.”

“나, 혼자 있으니 무섭단 말이야.”
“미안해. 내일 최대한 일찍 내려갈게. 사랑해.”

“피 잇~! 못됐어. 일찍 와야 돼!”
“알았어.”

진우는 거의 울상으로 말하는 지아의 표정이 떠올라 애틋하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획인만 할 수 있다면 두렵지 않고 주저할 필요 없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호텔이 투숙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었던 그는 밖으로 나갔다.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날 궁금함을 견디지 못한 준우는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그가 인천에 도착 했을 때는 한창 출근시간이라서 도로가 혼잡하였다. 그가 제물포 성당 보육원을 찾아 갔으나 과거의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담당 사무원이 당시 기록문서가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미리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준우는 보육원 주변의 야산을 거닐었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인내가 필요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사무원은 여전히 책상위에 쌓아놓은 지난 서류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진우는 전화를 받으면서 바쁘게 일하는 사무원의 모습을 보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과자와 음료수를 사가지고 들어가서 사무원에게 건네주었다. 봉지를 받아든 사무원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찾았어요. 아기 엄마 주소요.”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오래된 주소라서 아직도 살고 계신지는 모르겠네요.”
“일단 확인해 봐야지요. 수고하셨습니다.”

진우는 사무원이 건네주는 메모지를 받아 들고 나왔다. 메모지에 적힌 이름은 이 선애, 주소가 인천시 송현동이었다. 그곳을 찾아가니 개인 주택들이 밀집된 지역이었다. 그는 잔득 기대를 하고 붉은 벽돌집 철문에 부착된 초인종을 눌렀다. 젊은 여인이 나와 의아스런 눈빛을 하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사람 좀 찾으러 왔는데요. 이 집 주인 되시나요?”

“그런데요.....!? 누구를 찾으세요.”
“이곳에 이 선애씨라고 계시나요?”
“그 분 먼저 사시던 분인데, 삼 년 전에 이 집 팔고 이사 가셨어요.”

진우는 이사를 갔다는 말에 맥이 빠졌다. 주민 센터로 가서 이사 간 주소를 확인하는 방법만이 남았다. 돌아서던 그는 다시 집 주인 여자에게 물었다.

“혹시 어디로 가셨는지 아시나요?”
“길 건너 주공아파트로 이사 가셨는데, 집 주소는 잘 모르지만, 제가 그 아주머니 잘 알아요.”

“어디가면 만날 수 있을 가요?”
“송현 시장 아시죠! 거기서 옛날부터 옷 수선 가게를 하세요.”

“아! 그런가요. 고맙습니다.”

송현 시장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재래시장이었다. 진우는 북적거리는 시장 안으로 들어가서 옷 수선가게를 찾아 다녔다. 여자가 가르쳐 준 가게는 오래된 스레드 지붕의 건물이었다. 가게 입구 유리창에는 퇴색된 글씨로 옷 수선 가게임을 알리는 글씨가 있었다.

진우가 출입문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니 어둠침침한 가게 안에는 중년여인이 재봉틀 앞에 앉아있었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덜컹거리는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일에 열중하던 여인이 일어서면서 그를 쳐다봤다. 잔주름이 있으나 곱상하게 나이든 여인이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저 사람을 찾으러 왔는데요.”

“누굴 찾으시는데요?”
“이 선애씨라고........”

“전데요. 왜.....! 그러세요?”

진우는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하얀 피부에 나이보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어쩐지 지아의 귀염성 있는 미모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안도감이 들면서도 긴장이 됐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혹시 마리아의 집이라는 고아원을 아십니까?”
“마리아의 집.......!?”

순간 여인의 눈동자 동공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잠시 멍한 표정으로 진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나 이내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그건 왜 물어보시는데요?”
“이십 여 년 전에 그 마리아의 집 고아원에 여자 아기를 맡긴 분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 그 고아원은 없어지고 인수받은 제물포 성당 보육원에 가서 찾아보니 아주머니 성함이 나오더군요.”

“누구신지 모르지만, 그걸 알아서 어쩌시려고요?”
“그때 아기였던 여자의 지금 이름이 권 지아입니다. 말씀 드리기 쉽지 않지만 제가 지금 지아의 보호자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아의 어머니가 아주머니이시죠?”

“.........!?”

대답 없이 진우를 바라보던 이 선애가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 휘청하더니 재봉틀 앞에 가서 앉았다. 그녀의 대답이 조급한 그가 재봉틀 앞으로 다가섰다.

“맞습니까!? 대답해주십시오.”
“지난 일을 말하고 싶지 않네요. 그냥 돌아가 주세요.”

이 선애는 냉랭한 표정으로 진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시 재봉틀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는 돌아설 수 없었다. 지아를 생각해서라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지아는 생모가 살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하지만 생모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씀하기 힘드시겠지만, 지아가 지금 몹시 힘든 상황이고 꼭 필요한 일입니다. 물론 지난 과거를 밝힌다는 것이 고통스러우시겠지만 아주머니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

진우의 말에 선애는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으로 봐서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일어선 그녀는 뒤돌아서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그녀가 진우를 향해 돌아서서 한쪽의 소파를 가르쳤다.

“앉으세요.”
“...........”

진우가 소파로 향하니 선애는 뒤쪽의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가 커피 두 잔을 쟁반에 받쳐서 들고 나왔다. 그녀는 탁자위에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진우를 살폈다. 폭이 넓은 주름 스커트를 여미며 마주앉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괜찮으세요?”
“네.”

“지아라고 했나요?”
“네~!”

한마디 물어 놓고 선애는 무언가 떠 올리고 있었다. 커피 잔을 양손으로 들고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인가 입을 열려고 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아는 지금 어디 있나요?”
“이야기 하자면 긴데, 지금 군산에 있습니다.”

“건강하게 잘 있나요.......?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네. 조금 문제가 있지만, 제가 보호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되십니다.”

“보호라면....... 어떤 관계로!?”
“사실은........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주춤거리던 진우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를 자세히 살피던 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녀는 콧물을 들이마시듯이 훌쩍거리며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내가 죄인이지요. 잊으려고 했지만, 항상 가슴이...........”
“........”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아이가 입양되었다는 소식을........”
“그랬어요. 부유한 집에 입양되었지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지금 와서 밝힌다고 그 아이에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요.”
“글쎄요. 하지만 언젠가 알아야할 일이고,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찾아뵙게 되었고요.”

“음.....! 그러니까 이십 오년이 흘렀나. 그때만 해도 인천 주변이 모두 농촌이었지요. 저는 그냥 순수한 농부의 딸이었고요. 그런데 같은 동네에서 저를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었어요.......”

선애는 지난 과거를 회상하듯이 이따금 중단했던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아직도 처녀시절의 미모가 살아 있지만 동네 남자들에게 호감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친구 오빠에게 강간을 당하고 임신을 했다고 했다. 순박하기만 한 그녀에게는 죽음보다도 더한 충격이었다. 더욱이나 그녀를 강간한 남자는 고향을 떠나버렸다.

선애의 식구들은 동네에 소문이 두려워 전전긍긍했고, 그녀는 어찌하지 못하고 아기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두문불출하고 숨어 지내던 그녀에게 혼처가 들어왔다. 그녀는 부모의 권유를 거부하지 못하고 아기를 고아원에 맡기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결혼생활 내내 우울증에 시달렸다.

선애는 난산으로 지아를 낳고 다시 아기를 갖지 못했다. 철공소를 하던 그녀의 남편은 착하고 그녀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오 년 전에 남편이 암으로 죽고 그녀는 옷 수선 가게를 하면서 혼자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혼자 살아가다보니 더욱 과거의 일들이 살아나서 고통스럽다고 했다.

“저도 나쁜 년이지만,....! 그 놈은 악마예요. 지금은 모두들 부러워하는 위치에 있는지 모르지만 결국 죗값을 치룰 거예요.”
“누구를 말씀 하시는 건데요?”

“지아의 생부요.”
“그분이......! 뭐하시는 분인데요?”

“아마 아실 거예요?”
“누구신데요?”

“............!”

선애는 대답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주먹을 쥐고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여린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그만큼 그녀가 일생동안 저주하고 살아가는 남자라는 것을 진우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그는 더욱 궁금함에 벗어날 수 없었다. 더욱이 지아의 생부이고 그도 알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기에 확인하고 싶었다,

“저도 아는 사람이라고요! 누구인데요? 어려우시겠지만 말씀해 주실 수 없나요.”
“..........”

“말씀 안 해 주셔도 어쩔 수 없지만........”
“내가 했던 말들은 그 아이에겐 비밀로 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네. 물론 그렇게 해야지요.”
“그 아이 아버지는........”

“.........!?”
“전혀, 제가 생각지도 않았던 남자였어요.”

“아.......!”
“신화그룹 회장 알지요?”

“네.......!? 지금 누구라고 하셨어요? 얼마 전에 죽은 권 태호........”
“아뇨......!”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선애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권 태호라 해도 믿기지 않는데 아니라고 했다. 그는 도대체 그녀가 누구를 말하려는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그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 동생, 권 종호.”
“아닌데, 이건.......”

“네.....!? 맞아요. 내가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겠어요.”
“음........!”

진우는 소리 없는 신음을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무엇을 어떻게 판단해야하는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의지하고 축 늘어졌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뱉은 그는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받쳐 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주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

허공에 머문 진우의 시선이 벽을 향했다. 벽 위에 걸린 십자가상이 너무도 커다랗게 보였다. 그는 그녀가 허락한다면 지아를 만나도록 주선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아는 누구의 아내가 되었던가. 진우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이 커다란 동굴로 뻥 뚫렸다. 그리고 그 공간속으로 사람들의 아우성치는 목소리 울림으로 가득했다.

진우는 자신도 모르는 말로 여인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옷수선 가게를 나왔다. 그녀에게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 조차 그는 기억을 할 수 없었다. 승용차에 올라 안고도 그는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그의 승용차는 호남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인간은 평등한 행복을 소유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인의와 진리, 그리고 운명을 파괴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행복이란 만족감이고 즐거움이라고 한다. 자신이 원하는 욕망이나 욕구를 충족할 때 행복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과연 욕망과 욕구, 즐거움에 대한 만족이 행복일가.

진우는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여동생이 아니라는 진실에 모든 의혹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고통과 번민에서도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원히 비밀로 간직해야할 과제를 가슴에 안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아를 사랑할 수 있다는 기쁨만으로도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군산에 내려와서 오피스텔에 들어간 그는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방과 욕실등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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