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날이 흐리다. 요즘 장마철은 7월은 돼서 오곤 하던데 벌써 장마는 아닐 텐데..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서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비가 오려나 봐요”
“그러게요..잠시만 앉아 계세요”
“네...”
여자가 분주히 화분들을 밖으로 꺼내기 시작한다. 아마도 금방이라도 비가 올 거 같아 비를 맞히기 위해 내 놓는 것이겠지..
난 그 모습을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여자와 함께 화분을 옮기고 있었다.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
“괜찮아요. 뭐 그리 무겁지도 않는데..”
“고맙습니다..”
날 보며 생긋 웃어 보이는 여자..그 웃음이 무척이나 예쁘다.
그리고 그 웃음을 보자 갑자기 이 여자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나이는 몇 살인지, 결혼은 했는지, 하지 않았다면 현재 남자친구는 있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는지..
“수고 많으셨어요. 혼자해도 되는데.. 괜히 이리로 모셔 와서 일이나 시킨 거 같아 죄송하네요..”
“아니에요. 제가 좋아서 한 건데요 뭘..”
“어..비 온다..”
쏴아 거리는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어 보아 오래올 비는 아니고 소나기인 듯싶다.
“요즘 비 구경하기 힘들었는데 무지 오랜만에 비가 오는 거 같아요..”
“그러게요. 마지막으로 비 온 지 이주는 넘은 거 같네요..”
“비가 오면 참 좋아요. 화분들도 비를 맞힐 수 있고..뭔가 기분이 감상적으로 되는 것도 같고..”
“그런가요...? 전 나이를 들어서 그런지 비 오면 우산은 챙겼나 걱정부터..옷에 빗물이 튀지나 않을까 그런 걱정부터 먼저 들던데..”
“그래요? 저도 그럼 나이 조금 더 들면 그렇게 되겠죠..아니면 제가 너무 철이 없는 걸지도..”
“철이 없긴요...순수해서 그런 거겠죠..”
순수..여자와 아주 잘 어울리는 그런 단어였다.
특히 티 없이 저런 맑은 웃음을 보일 때면 정말 세상에 저런 순수한 사람이 있을까 라는 그런 생각도 들곤 했다.
“어머 내 정신 좀..시간이 꽤 된 거 같은데..너무 많이 시간을 뺏은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어차피 회사 안 들어가고 바로 집으로 갈 꺼라..”
“그러시다면 다행이구요..”
여자는 내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래도 이젠 가봐야 하지 않겠냐며 내 손에 명함을 건넸다.
‘블루로즈..이정희..’
난 혼자서 가게이름과 여자의 이름을 되 뇌이며, 명함을 지갑 안에 조심스레 집어넣고 내 명함을 꺼내 여자에게 내밀었다.
“교통사고는 바로 안 아파도 며칠이나 몇 주 있다가 아플 수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다음 주에 꼭 병원 다시 가 보시고, 그때 저한테 미리 연락 주세요. 제가 같이 따라 갈게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제가 신경이 쓰여서 그래요. 그래야 제 맘이 편할 거 같아요..”
“네.. 뭐 그러시다면..이제 비가 그쳤네요. 전 그럼..아..요기 이 장미 꽃다발 하나만 사갈게요”
“선물하시게요? 여자 친구나 아내?”
“아뇨..예뻐서 그냥 집에 두려구요..”
“그러시구나..가져가세요..”“돈은...?”
“괜찮아요. 제가 오늘 신세를 많이 졌잖아요. 사고도 내고..화분도 들어주시고..”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계속 괜찮다고 말하는 정희씨의 마음을 더 이상 밀어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난 공짜로 장미꽃다발을 손에 들고 정희씨의 가게에서 나왔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환하게 비추는 햇살.. 그 햇살이 정희씨의 가게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고, 그 앞에서 정희씨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조심해서 가세요..꼭 연락 주시구요”
“네..”
난 가볍게 정희씨에게 목례를 하고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미친 듯이 두근대는 마음..정희씨의 웃는 얼굴을 보며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아직까지 이런 내 마음을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해서..
“왠 꽃이야?”
“지나는 길에 예뻐서 샀어”
“별 일이네..오빠가 꽃을 다 사오고..”
“그런가..그렇게 오랜 만인가..?”
“그럼..오빠한테 꽃 선물 받아본 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
아내는 오랜만에 내가 안겨다 준 장미 꽃다발에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말처럼 언제 마지막으로 꽃을 선물해줬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전의 일이기에..
아내에게 갑자기 미안함이 밀려온다.
지영과 나눴던 몇 개월간의 밀애.. 그리고 오늘 스치듯이 만난 정희씨에 대해 설던 마음까지..
내가 이래도 되는 건지..십 년이 넘는 시간동안 나만 바라보며 나를 믿고 사는 아내에게 잘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닌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나..좀 씻고 쉴게”
“어... 많이 피곤해?”
“아니..그런 건 아니고 오늘 사고도 좀 있고 해서..”
“사고?? 무슨 사고??”
아내가 꽃다발을 쇼파에 던져버리고 욕실에 들어가려는 내 앞을 막아섰다.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무슨 말이야? 어디 다쳤어?? 그런 말 없었잖아”
“아니..그냥 살짝..별 거 아닌 사고야. 걱정할까봐 말 안 한 거지. 병원도 갔다 왔는데 이상 없다더라”
“정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아내의 눈엔 잔뜩 눈물이 고여 있었다.
차마 아내의 두 눈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진짜 괜찮아..씻고 나와서 얘기하자..응?”
“알았어...”
아내는 그제야 옆으로 피해주었고 난 욕실로 들어와 문을 잠궜다.
그리고 샤워기의 차가운 물을 한참동안 몸에 퍼부었다.
감성적이 아닌 이성적인 판단을 위해서..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몇 개월 동안 어떤 짓을 해왔는지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될 그런 시기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퍼붓는 물줄기..
흐리멍텅했던 정신이 또렷해온다. 그리고 떠오르는 한 여자의 얼굴..
정희시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미쳤구나. 정말 드디어 미쳤나 보다.
방금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못 볼 정도로 그렇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놓고,
겨우 정신이 돌아왔나 싶은 순간에 떠오르는 얼굴이 정희씨라니..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제 정신이 아닐 수가 있나 싶다.
난 내 뺨을 손바닥으로 짝 소리가 나게 쳤다.
“정신 차려..미친놈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난 유부남이잖아..어쩌자고 이런...”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지영이 나에게 했던 말..
유부남과 처녀의 관계는 좋다고..처녀가 나중에 쿨 하게 끝낼 수만 있다면 뒤끝이 없는 관계니까..
‘정말 그런 건가...정말....’
이성적으론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이 들지만, 흔들리고 있는 내 마음은 좀처럼 나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직 멀었어...? 저녁 다 차려놨는데..”
“어..나가...”
아내의 재촉에 난 대충 물기만 닦고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반짝이는 휴대폰 불빛, 누군가에게 온 메시지였다.
난 혹시라도 누가 볼까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집어 들어 설레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녀이길 바라며..
-잘 들어가셨어요?
그녀..정희씨가 맞았다.
뭐라고 대답하지? 바로 대답할까 아니면 조금 뜸을 들였다가 대답할까...?
“오빠..밥 안 먹어?”
“어..어어 나갈게..”
아내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일단 나는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려..금방 샤워하고 스킨로션 바르는 사람이..”
“어? 어어..아니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어..진짜 괜찮대두..”
“그래두..교통사고는 보통 다치고 조금 있어야 증상이 나타난다잖아. 아까 괜찮았어도 지금 아플 수도 있지..”
“어..뭐 근데 아직은 괜찮네..”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낮에 똑같은 이야기를 했던 정희씨의 말이 떠오른다.
언제 아플지 모르니 다음 주에 꼭 병원 가보라고.. 갈 때 자기를 불러달라고 했던..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빙그레 웃어?”
“어? 내가??”
“어..갑자기 엄청 기분 좋게 웃은 거 알아?”
“그랬나...하하..아..이거 찌개가 맛있어서..그래서..”
“뭐야..평소 순두부찌개도 안 좋아하는 사람이...오늘 갑자기 비와서 장보러 가지도 못해서 집에 있는 걸로 요리한 건데..”
“아..그래..? 내가 싫어했나..”
“정말 괜찮아? 교통사고 나서 머리 다친 건 아니고...??”
“어..괜찮아”
“참..이상하네...알았어 얼른 밥 먹어..”
아내는 못내 내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거실로 갔고, 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비밀을 들킬 뻔 하다가 겨우 들키지 않은 사람처럼..
‘그래..한 번 사는 인생..재미없게 살 수는 없잖아. 내가 뭐..다른 살림 차리겠다는 것도 아니고..스치듯이 지나가는 바람이야...바람..아주 잠깐 지나가는...’
“그만 잘까?”
“어..내가 불 끌게..”
사방이 어두워지고, 자기 전 가볍게 샤워를 해서 시원하게 만든 몸을 가벼운 이불 속으로 밀어 넣는다.
포근함이 밀려오고 고요한 정적만이 주위를 감돈다.
살짝 잠이 들 것 같은 기분 좋은 이 느낌..잠들기 전의 이 느낌이 참 좋다.
하루 동안의 피로를 모두 보상받는 듯한..
“자...?”
“어..이제 자려고..잠이 안 와?”
“어..그러네..안아줘..잠 오게...”
아내가 내 품으로 안겨 들어온다. 나는 아내를 내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내는 잠이 오지 않으면 항상 내 품에 안겨서 잠을 청하곤 하니까..
나의 따뜻한 품에 안겨 있으면 잠이 안 온다고 칭얼대다가도 금세 잠이 들곤 했다.
오늘도 역시...10분도 체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잠든 아내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내 품에 안겨 귀여운 모습으로 잠이 든 아내의 모습..
무엇이 문제일까...?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인데..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나서 설레는 감정이 없어지고 무뎌져서 그런 것일까..?
이젠 정말 가족처럼 너무나 편해서 그런 것일까...?
연애시절엔 안기만 해도 몸이 달아오르고 당장이라도 아내와 섹스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는데 이제는 그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너무 편하기만 하다. 내 품에 안겨있는 아내가..
마치 친여동생처럼..
‘미안해..정말..나도 내 감정이 잘 컨트롤이 되지가 않네..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데..정말 미안한데 이번 한 번만 그냥 아주 조금만 장난치다 돌아올게..돌아오면 훨씬 더 잘 할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이성은 안 된다고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정희씨에게 흔들리고 있었고, 난 아내에게 듣지 못할 사과를 먼저 했다. 나중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기분 좋은 아침이네요. 새벽에 살짝 비가 뿌렸는지 아침 공기가 무척 상쾌한 거 같아요.
-아..그러네요. 어제는 집에 오자마자 뻗어버려서 답장을 못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잘 들어가셨나 싶어서 안부 차 연락한 건데요 뭘..
아침 출근길에 날아온 정희씨의 카톡..
난 그 연락에 아침부터 기분 좋게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고, 정희씨는 하루에 몇 번씩 사소한 연락들을 나에게 했다.
오늘은 날씨가 어땠는지..어떤 손님이 왔다갔는지..아직 차를 못 찾아서 늦게 출근할 뻔 했다는 이야기까지.. 그런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에게 털어놓았고, 난 하루 종일 회사 일로 지쳐가다가 그런 정희씨의 연락을 받고 한 번씩 웃을 수 있었다.
일상.. 정희씨와의 연락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정희씨가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 연락하기도 하고..우리는 수시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부쩍이나 가까워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고 이제는 카톡 뿐만 아니라 별 일이 없으면 하루에 한 번 이상 통화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지나간 일주일이란 시간..
수리를 맡겼던 차를 찾고는 병원에 갔다 오면서 일주일 만에 정희씨의 가게를 찾았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아..차 찾으면서 병원 다녀오는 길에 들렀어요”
“병원이요? 가실 때 연락 주시지..”
“괜찮아요. 오늘도 엑스레이도 찍고 의사가 여기저기 살펴봤는데 별 일이 없대요”“그럼 다행이구요..”
“별 일 없으면 저녁이나 같이 할까요?”
“어어...지금 여덟신데 아홉시가 마감시간인데..”
“그럼 한 시간 기다리죠 뭐..”
“에잇..오늘 장사도 잘 안되는데 하루만 농땡이 치죠 뭐..”
정희씨는 장난스레 혀를 쏙 내밀고는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고 밖에 있는 화분들을 안으로 들이기 시작했다.
“어..저 때문에 일찍 마감 안 하셔도 되는데..”
“그냥 오늘은 좀 일도 하기 싫고 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그런 날 있잖아요. 그냥 일하기 싫어서 땡땡이 치고 싶은 날..”
환한 미소.. 저 미소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정희씨가 웃을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건 분명 정상적인 반응은 아님이 분명했다.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감정일지도..
“자..다 됐는데 가실까요?”
“어..네에..”
어느새 가게 마감 준비를 모두 끝낸 정희씨를 바보 같은 표정으로 멍하게 바라보다 난 정희씨의 손에 이끌려 가게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해보는 데이트.. 지영과의 그런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라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보는 건 정말 오랜만에 일이었다.
정희씨와 같이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나란히 걸으니 마치 우리가 연인사이인 것처럼 착각이 들었다.
“아직은 6월이라 그런지 밤이면 좀 시원하고 걷기엔 훨씬 좋은 거 같아요”
“그러게요..딱 걷기에 좋은 날씨네요..”
“아마..어제 비가 좀 와서 그렇지 않을까 싶네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벌써 시간이 11시가 넘었는데 들어가 봐야 하지 않나요?”
“벌써요? 시간 가는 줄 몰랐네..”
“가요. 바래다 줄게요. 차는 언제 찾아요?”
“내일쯤 찾으러 갈 거 같아요. 혼자 가도 되는데..”
“아니에요. 바래다 줄게요”
난 한사코 괜찮다는 정희씨를 차에 억지로 태워 집 앞까지 바래다줬다.
“여기에요?”
“네..부모님은 지방에 계셔서 혼자 자취하거든요. 언니는 작년에 결혼해서..원래 같이 살았는데..”
“아..그렇군요..혼자 살면 무섭고 그렇지 않아요? 워낙 세상이 흉흉해서..”
“괜찮아요. 화분 번쩍 번쩍 드는 거 보셨잖아요. 제가 원래 겁이 없고 씩씩해요..”
“너무 겁이 없어도 안 좋아요..위험한 건 피해야죠”
“그런가요...? 흐음..생각해 볼게요..그 충고...오늘 바래다 줘서 고마워요. 들어갈게요. 운전 조심해요”
“정희씨..”
“네..?”
원래 감정대로 따르는 건 생각이란 게 필요하지 않은 법이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날 향해 고개를 돌리는 정희씨의 입에 내 입술을 맞추었다.
촉촉하게 느껴지는 정희씨의 입술.. 그리고 커다랗게 커지는 동공..
하지만 내 입술을 피하진 않았다.
이어지는 어색함.. 원래 일을 저지르고 나면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어색함이 밀려온다.
난 황급히 짧은 입맞춤을 끝내고자 정희씨의 닿은 내 입술을 살며시 떨어트렸다.
“미안..미안해요”
“아니..좋았어요...쪽..”
정희씨의 입술이 다시 나에게 다가와 살며시 닿았다 떨어진다. 그리고 환하게 웃어 보인다.
“갈게요. 운전 조심해요”
아주 짧지만 길게 느껴지고, 부드러웠지만 강렬했던 입맞춤의 시간..
머릿속이 몽롱해지고 지금 이 시간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정말 좀 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맞는 건지..
한동안 난 멍하니 정희씨가 멀어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꿈결같던 환상 속에서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아직 내 입술에 조금은 남아있는 정희씨의 입술의 감촉을 손으로 살짝 매만져 보았다.
떨림..기분 좋은 떨림.. 그리고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 감정..
애써 그 감정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마음이 말해주고 있는 건 그 감정이 확실했다.
잠깐의 불장난이길 바랬는데..잠시 스쳐가는 바람이길 바랐는데..
고작 두 번 봤을 뿐인데 왜 이리 빠져 드는건지..
난 정희씨에게 너무나 쉽고 빠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불안했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 일까봐.. 정말 그래서 안 된다고.. 그 감정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정희씨와의 두 번째 만남은 몹시 설레면서도 몹시도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거 같은 너무나 반짝거리고 예쁜 유리구슬을 들고 있는 어린 아이처럼..
너무나 예쁜데..그래서 오래 가지고 있고 싶은데 부서져버리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집에 도착했나 모르겠다. 사고가 안 난 것이 다행일 정도로 난 거칠게 차를 몰았다.
정희씨에 대한 그 감정을..그 느낌을 떨쳐내고 싶어서 있는 힘껏 악셀을 밟아서 평소의 거의 반 정도 걸리는 시간으로 집에 도착했다.
이미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방에 등 하나만 아주 약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사방이 어두웠다.
아마 이리 늦은 시간이라면 자겠지..
안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내는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난 하나하나 옷을 모두 벗고 알몸이 되어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으음...들어왔어..?”
아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더욱더 아내의 입술에 진하고 깊게 내 입을 맞추고 혀를 밀어 넣었다.
“왜 이래..술 냄새...”
아까 정희씨와 식사를 하며 마셨던 와인 몇 잔 때문에 술 냄새가 나는 모양이다.
“미안..”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나는 더욱더 집요하게 아내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으며 아내의 잠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왜 이래 정말...갑자기...”
당황스런 아내의 표정..당황스럽겠지.
3년 동안 한 번의 관계도 가지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이러니까..
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했다. 아내에게서 다시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아내와 섹스를 하고 싶었다. 아니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계속된 나의 공세에도 조금의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고, 내가 잠옷을 벗기고 속옷까지 완전히 벗기는 동안 조금의 반항도 없이 그저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오빠가 하고 싶으면 해..”
내가 하고 싶으면 하라니..넌 하고 싶지 않다는 거니..?
아내의 표정이 너무나 평온하다. 조금의 흥분도..조금의 설렘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렇게 아내에게 키스를 퍼붓고 가슴을 만지고, 벗은 아내의 몸을 보는데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는 틀린 것일까...
“내가...내가 잠시 미쳤었나 보다. 그만 자...”
“오빠....”
잔뜩 심각해진 표정으로 내 팔을 잡는 아내, 난 그런 아내의 팔을 뿌리치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차가운 물을 온 몸에 퍼부었다.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아내의 동의도 없이..
그저 알량한 내 마음의 죄책감 때문에 아내를 범하려고 한 것인가..
내가 짐승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다시 정희씨가 떠오른다.
몇 시간 전에 있었던 너무나 짧았지만 달콤했던 그 입맞춤이..
거부할 수 없었던 그 떨림이..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었던 그 감정이..
‘나...이제 어떡해야 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마음가는대로 해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해야죠.
지영이 있었다면 나에게 이렇게 말해줬겠지. 그녀라면 충분히 그런 말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그래 내 감정에 충실하자..더는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이런 삶은...너무 재미없잖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드디어 내가 미친 건가..
확실한 건 이제 내 감정에 충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녀가..정희..그녀를 갖고 싶어졌다.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서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비가 오려나 봐요”
“그러게요..잠시만 앉아 계세요”
“네...”
여자가 분주히 화분들을 밖으로 꺼내기 시작한다. 아마도 금방이라도 비가 올 거 같아 비를 맞히기 위해 내 놓는 것이겠지..
난 그 모습을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여자와 함께 화분을 옮기고 있었다.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
“괜찮아요. 뭐 그리 무겁지도 않는데..”
“고맙습니다..”
날 보며 생긋 웃어 보이는 여자..그 웃음이 무척이나 예쁘다.
그리고 그 웃음을 보자 갑자기 이 여자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나이는 몇 살인지, 결혼은 했는지, 하지 않았다면 현재 남자친구는 있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는지..
“수고 많으셨어요. 혼자해도 되는데.. 괜히 이리로 모셔 와서 일이나 시킨 거 같아 죄송하네요..”
“아니에요. 제가 좋아서 한 건데요 뭘..”
“어..비 온다..”
쏴아 거리는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어 보아 오래올 비는 아니고 소나기인 듯싶다.
“요즘 비 구경하기 힘들었는데 무지 오랜만에 비가 오는 거 같아요..”
“그러게요. 마지막으로 비 온 지 이주는 넘은 거 같네요..”
“비가 오면 참 좋아요. 화분들도 비를 맞힐 수 있고..뭔가 기분이 감상적으로 되는 것도 같고..”
“그런가요...? 전 나이를 들어서 그런지 비 오면 우산은 챙겼나 걱정부터..옷에 빗물이 튀지나 않을까 그런 걱정부터 먼저 들던데..”
“그래요? 저도 그럼 나이 조금 더 들면 그렇게 되겠죠..아니면 제가 너무 철이 없는 걸지도..”
“철이 없긴요...순수해서 그런 거겠죠..”
순수..여자와 아주 잘 어울리는 그런 단어였다.
특히 티 없이 저런 맑은 웃음을 보일 때면 정말 세상에 저런 순수한 사람이 있을까 라는 그런 생각도 들곤 했다.
“어머 내 정신 좀..시간이 꽤 된 거 같은데..너무 많이 시간을 뺏은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어차피 회사 안 들어가고 바로 집으로 갈 꺼라..”
“그러시다면 다행이구요..”
여자는 내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래도 이젠 가봐야 하지 않겠냐며 내 손에 명함을 건넸다.
‘블루로즈..이정희..’
난 혼자서 가게이름과 여자의 이름을 되 뇌이며, 명함을 지갑 안에 조심스레 집어넣고 내 명함을 꺼내 여자에게 내밀었다.
“교통사고는 바로 안 아파도 며칠이나 몇 주 있다가 아플 수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다음 주에 꼭 병원 다시 가 보시고, 그때 저한테 미리 연락 주세요. 제가 같이 따라 갈게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제가 신경이 쓰여서 그래요. 그래야 제 맘이 편할 거 같아요..”
“네.. 뭐 그러시다면..이제 비가 그쳤네요. 전 그럼..아..요기 이 장미 꽃다발 하나만 사갈게요”
“선물하시게요? 여자 친구나 아내?”
“아뇨..예뻐서 그냥 집에 두려구요..”
“그러시구나..가져가세요..”“돈은...?”
“괜찮아요. 제가 오늘 신세를 많이 졌잖아요. 사고도 내고..화분도 들어주시고..”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계속 괜찮다고 말하는 정희씨의 마음을 더 이상 밀어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난 공짜로 장미꽃다발을 손에 들고 정희씨의 가게에서 나왔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환하게 비추는 햇살.. 그 햇살이 정희씨의 가게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고, 그 앞에서 정희씨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조심해서 가세요..꼭 연락 주시구요”
“네..”
난 가볍게 정희씨에게 목례를 하고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미친 듯이 두근대는 마음..정희씨의 웃는 얼굴을 보며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아직까지 이런 내 마음을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해서..
“왠 꽃이야?”
“지나는 길에 예뻐서 샀어”
“별 일이네..오빠가 꽃을 다 사오고..”
“그런가..그렇게 오랜 만인가..?”
“그럼..오빠한테 꽃 선물 받아본 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
아내는 오랜만에 내가 안겨다 준 장미 꽃다발에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말처럼 언제 마지막으로 꽃을 선물해줬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전의 일이기에..
아내에게 갑자기 미안함이 밀려온다.
지영과 나눴던 몇 개월간의 밀애.. 그리고 오늘 스치듯이 만난 정희씨에 대해 설던 마음까지..
내가 이래도 되는 건지..십 년이 넘는 시간동안 나만 바라보며 나를 믿고 사는 아내에게 잘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닌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나..좀 씻고 쉴게”
“어... 많이 피곤해?”
“아니..그런 건 아니고 오늘 사고도 좀 있고 해서..”
“사고?? 무슨 사고??”
아내가 꽃다발을 쇼파에 던져버리고 욕실에 들어가려는 내 앞을 막아섰다.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무슨 말이야? 어디 다쳤어?? 그런 말 없었잖아”
“아니..그냥 살짝..별 거 아닌 사고야. 걱정할까봐 말 안 한 거지. 병원도 갔다 왔는데 이상 없다더라”
“정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아내의 눈엔 잔뜩 눈물이 고여 있었다.
차마 아내의 두 눈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진짜 괜찮아..씻고 나와서 얘기하자..응?”
“알았어...”
아내는 그제야 옆으로 피해주었고 난 욕실로 들어와 문을 잠궜다.
그리고 샤워기의 차가운 물을 한참동안 몸에 퍼부었다.
감성적이 아닌 이성적인 판단을 위해서..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몇 개월 동안 어떤 짓을 해왔는지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될 그런 시기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퍼붓는 물줄기..
흐리멍텅했던 정신이 또렷해온다. 그리고 떠오르는 한 여자의 얼굴..
정희시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미쳤구나. 정말 드디어 미쳤나 보다.
방금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못 볼 정도로 그렇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놓고,
겨우 정신이 돌아왔나 싶은 순간에 떠오르는 얼굴이 정희씨라니..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제 정신이 아닐 수가 있나 싶다.
난 내 뺨을 손바닥으로 짝 소리가 나게 쳤다.
“정신 차려..미친놈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난 유부남이잖아..어쩌자고 이런...”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지영이 나에게 했던 말..
유부남과 처녀의 관계는 좋다고..처녀가 나중에 쿨 하게 끝낼 수만 있다면 뒤끝이 없는 관계니까..
‘정말 그런 건가...정말....’
이성적으론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이 들지만, 흔들리고 있는 내 마음은 좀처럼 나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직 멀었어...? 저녁 다 차려놨는데..”
“어..나가...”
아내의 재촉에 난 대충 물기만 닦고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반짝이는 휴대폰 불빛, 누군가에게 온 메시지였다.
난 혹시라도 누가 볼까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집어 들어 설레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녀이길 바라며..
-잘 들어가셨어요?
그녀..정희씨가 맞았다.
뭐라고 대답하지? 바로 대답할까 아니면 조금 뜸을 들였다가 대답할까...?
“오빠..밥 안 먹어?”
“어..어어 나갈게..”
아내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일단 나는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려..금방 샤워하고 스킨로션 바르는 사람이..”
“어? 어어..아니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어..진짜 괜찮대두..”
“그래두..교통사고는 보통 다치고 조금 있어야 증상이 나타난다잖아. 아까 괜찮았어도 지금 아플 수도 있지..”
“어..뭐 근데 아직은 괜찮네..”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낮에 똑같은 이야기를 했던 정희씨의 말이 떠오른다.
언제 아플지 모르니 다음 주에 꼭 병원 가보라고.. 갈 때 자기를 불러달라고 했던..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빙그레 웃어?”
“어? 내가??”
“어..갑자기 엄청 기분 좋게 웃은 거 알아?”
“그랬나...하하..아..이거 찌개가 맛있어서..그래서..”
“뭐야..평소 순두부찌개도 안 좋아하는 사람이...오늘 갑자기 비와서 장보러 가지도 못해서 집에 있는 걸로 요리한 건데..”
“아..그래..? 내가 싫어했나..”
“정말 괜찮아? 교통사고 나서 머리 다친 건 아니고...??”
“어..괜찮아”
“참..이상하네...알았어 얼른 밥 먹어..”
아내는 못내 내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거실로 갔고, 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비밀을 들킬 뻔 하다가 겨우 들키지 않은 사람처럼..
‘그래..한 번 사는 인생..재미없게 살 수는 없잖아. 내가 뭐..다른 살림 차리겠다는 것도 아니고..스치듯이 지나가는 바람이야...바람..아주 잠깐 지나가는...’
“그만 잘까?”
“어..내가 불 끌게..”
사방이 어두워지고, 자기 전 가볍게 샤워를 해서 시원하게 만든 몸을 가벼운 이불 속으로 밀어 넣는다.
포근함이 밀려오고 고요한 정적만이 주위를 감돈다.
살짝 잠이 들 것 같은 기분 좋은 이 느낌..잠들기 전의 이 느낌이 참 좋다.
하루 동안의 피로를 모두 보상받는 듯한..
“자...?”
“어..이제 자려고..잠이 안 와?”
“어..그러네..안아줘..잠 오게...”
아내가 내 품으로 안겨 들어온다. 나는 아내를 내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내는 잠이 오지 않으면 항상 내 품에 안겨서 잠을 청하곤 하니까..
나의 따뜻한 품에 안겨 있으면 잠이 안 온다고 칭얼대다가도 금세 잠이 들곤 했다.
오늘도 역시...10분도 체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잠든 아내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내 품에 안겨 귀여운 모습으로 잠이 든 아내의 모습..
무엇이 문제일까...?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인데..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나서 설레는 감정이 없어지고 무뎌져서 그런 것일까..?
이젠 정말 가족처럼 너무나 편해서 그런 것일까...?
연애시절엔 안기만 해도 몸이 달아오르고 당장이라도 아내와 섹스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는데 이제는 그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너무 편하기만 하다. 내 품에 안겨있는 아내가..
마치 친여동생처럼..
‘미안해..정말..나도 내 감정이 잘 컨트롤이 되지가 않네..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데..정말 미안한데 이번 한 번만 그냥 아주 조금만 장난치다 돌아올게..돌아오면 훨씬 더 잘 할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이성은 안 된다고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정희씨에게 흔들리고 있었고, 난 아내에게 듣지 못할 사과를 먼저 했다. 나중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기분 좋은 아침이네요. 새벽에 살짝 비가 뿌렸는지 아침 공기가 무척 상쾌한 거 같아요.
-아..그러네요. 어제는 집에 오자마자 뻗어버려서 답장을 못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잘 들어가셨나 싶어서 안부 차 연락한 건데요 뭘..
아침 출근길에 날아온 정희씨의 카톡..
난 그 연락에 아침부터 기분 좋게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고, 정희씨는 하루에 몇 번씩 사소한 연락들을 나에게 했다.
오늘은 날씨가 어땠는지..어떤 손님이 왔다갔는지..아직 차를 못 찾아서 늦게 출근할 뻔 했다는 이야기까지.. 그런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에게 털어놓았고, 난 하루 종일 회사 일로 지쳐가다가 그런 정희씨의 연락을 받고 한 번씩 웃을 수 있었다.
일상.. 정희씨와의 연락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정희씨가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 연락하기도 하고..우리는 수시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부쩍이나 가까워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고 이제는 카톡 뿐만 아니라 별 일이 없으면 하루에 한 번 이상 통화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지나간 일주일이란 시간..
수리를 맡겼던 차를 찾고는 병원에 갔다 오면서 일주일 만에 정희씨의 가게를 찾았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아..차 찾으면서 병원 다녀오는 길에 들렀어요”
“병원이요? 가실 때 연락 주시지..”
“괜찮아요. 오늘도 엑스레이도 찍고 의사가 여기저기 살펴봤는데 별 일이 없대요”“그럼 다행이구요..”
“별 일 없으면 저녁이나 같이 할까요?”
“어어...지금 여덟신데 아홉시가 마감시간인데..”
“그럼 한 시간 기다리죠 뭐..”
“에잇..오늘 장사도 잘 안되는데 하루만 농땡이 치죠 뭐..”
정희씨는 장난스레 혀를 쏙 내밀고는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고 밖에 있는 화분들을 안으로 들이기 시작했다.
“어..저 때문에 일찍 마감 안 하셔도 되는데..”
“그냥 오늘은 좀 일도 하기 싫고 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그런 날 있잖아요. 그냥 일하기 싫어서 땡땡이 치고 싶은 날..”
환한 미소.. 저 미소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정희씨가 웃을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건 분명 정상적인 반응은 아님이 분명했다.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감정일지도..
“자..다 됐는데 가실까요?”
“어..네에..”
어느새 가게 마감 준비를 모두 끝낸 정희씨를 바보 같은 표정으로 멍하게 바라보다 난 정희씨의 손에 이끌려 가게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해보는 데이트.. 지영과의 그런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라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보는 건 정말 오랜만에 일이었다.
정희씨와 같이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나란히 걸으니 마치 우리가 연인사이인 것처럼 착각이 들었다.
“아직은 6월이라 그런지 밤이면 좀 시원하고 걷기엔 훨씬 좋은 거 같아요”
“그러게요..딱 걷기에 좋은 날씨네요..”
“아마..어제 비가 좀 와서 그렇지 않을까 싶네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벌써 시간이 11시가 넘었는데 들어가 봐야 하지 않나요?”
“벌써요? 시간 가는 줄 몰랐네..”
“가요. 바래다 줄게요. 차는 언제 찾아요?”
“내일쯤 찾으러 갈 거 같아요. 혼자 가도 되는데..”
“아니에요. 바래다 줄게요”
난 한사코 괜찮다는 정희씨를 차에 억지로 태워 집 앞까지 바래다줬다.
“여기에요?”
“네..부모님은 지방에 계셔서 혼자 자취하거든요. 언니는 작년에 결혼해서..원래 같이 살았는데..”
“아..그렇군요..혼자 살면 무섭고 그렇지 않아요? 워낙 세상이 흉흉해서..”
“괜찮아요. 화분 번쩍 번쩍 드는 거 보셨잖아요. 제가 원래 겁이 없고 씩씩해요..”
“너무 겁이 없어도 안 좋아요..위험한 건 피해야죠”
“그런가요...? 흐음..생각해 볼게요..그 충고...오늘 바래다 줘서 고마워요. 들어갈게요. 운전 조심해요”
“정희씨..”
“네..?”
원래 감정대로 따르는 건 생각이란 게 필요하지 않은 법이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날 향해 고개를 돌리는 정희씨의 입에 내 입술을 맞추었다.
촉촉하게 느껴지는 정희씨의 입술.. 그리고 커다랗게 커지는 동공..
하지만 내 입술을 피하진 않았다.
이어지는 어색함.. 원래 일을 저지르고 나면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어색함이 밀려온다.
난 황급히 짧은 입맞춤을 끝내고자 정희씨의 닿은 내 입술을 살며시 떨어트렸다.
“미안..미안해요”
“아니..좋았어요...쪽..”
정희씨의 입술이 다시 나에게 다가와 살며시 닿았다 떨어진다. 그리고 환하게 웃어 보인다.
“갈게요. 운전 조심해요”
아주 짧지만 길게 느껴지고, 부드러웠지만 강렬했던 입맞춤의 시간..
머릿속이 몽롱해지고 지금 이 시간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정말 좀 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맞는 건지..
한동안 난 멍하니 정희씨가 멀어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꿈결같던 환상 속에서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아직 내 입술에 조금은 남아있는 정희씨의 입술의 감촉을 손으로 살짝 매만져 보았다.
떨림..기분 좋은 떨림.. 그리고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 감정..
애써 그 감정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마음이 말해주고 있는 건 그 감정이 확실했다.
잠깐의 불장난이길 바랬는데..잠시 스쳐가는 바람이길 바랐는데..
고작 두 번 봤을 뿐인데 왜 이리 빠져 드는건지..
난 정희씨에게 너무나 쉽고 빠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불안했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 일까봐.. 정말 그래서 안 된다고.. 그 감정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정희씨와의 두 번째 만남은 몹시 설레면서도 몹시도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거 같은 너무나 반짝거리고 예쁜 유리구슬을 들고 있는 어린 아이처럼..
너무나 예쁜데..그래서 오래 가지고 있고 싶은데 부서져버리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집에 도착했나 모르겠다. 사고가 안 난 것이 다행일 정도로 난 거칠게 차를 몰았다.
정희씨에 대한 그 감정을..그 느낌을 떨쳐내고 싶어서 있는 힘껏 악셀을 밟아서 평소의 거의 반 정도 걸리는 시간으로 집에 도착했다.
이미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방에 등 하나만 아주 약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사방이 어두웠다.
아마 이리 늦은 시간이라면 자겠지..
안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내는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난 하나하나 옷을 모두 벗고 알몸이 되어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으음...들어왔어..?”
아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더욱더 아내의 입술에 진하고 깊게 내 입을 맞추고 혀를 밀어 넣었다.
“왜 이래..술 냄새...”
아까 정희씨와 식사를 하며 마셨던 와인 몇 잔 때문에 술 냄새가 나는 모양이다.
“미안..”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나는 더욱더 집요하게 아내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으며 아내의 잠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왜 이래 정말...갑자기...”
당황스런 아내의 표정..당황스럽겠지.
3년 동안 한 번의 관계도 가지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이러니까..
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했다. 아내에게서 다시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아내와 섹스를 하고 싶었다. 아니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계속된 나의 공세에도 조금의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고, 내가 잠옷을 벗기고 속옷까지 완전히 벗기는 동안 조금의 반항도 없이 그저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오빠가 하고 싶으면 해..”
내가 하고 싶으면 하라니..넌 하고 싶지 않다는 거니..?
아내의 표정이 너무나 평온하다. 조금의 흥분도..조금의 설렘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렇게 아내에게 키스를 퍼붓고 가슴을 만지고, 벗은 아내의 몸을 보는데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는 틀린 것일까...
“내가...내가 잠시 미쳤었나 보다. 그만 자...”
“오빠....”
잔뜩 심각해진 표정으로 내 팔을 잡는 아내, 난 그런 아내의 팔을 뿌리치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차가운 물을 온 몸에 퍼부었다.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아내의 동의도 없이..
그저 알량한 내 마음의 죄책감 때문에 아내를 범하려고 한 것인가..
내가 짐승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다시 정희씨가 떠오른다.
몇 시간 전에 있었던 너무나 짧았지만 달콤했던 그 입맞춤이..
거부할 수 없었던 그 떨림이..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었던 그 감정이..
‘나...이제 어떡해야 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마음가는대로 해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해야죠.
지영이 있었다면 나에게 이렇게 말해줬겠지. 그녀라면 충분히 그런 말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그래 내 감정에 충실하자..더는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이런 삶은...너무 재미없잖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드디어 내가 미친 건가..
확실한 건 이제 내 감정에 충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녀가..정희..그녀를 갖고 싶어졌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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