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제 글 중 몇 가지 글은 딱히 소라에서 분류를 찾기 힘든 글이 많은데 이번 글도 그런 듯 싶습니다.
네토로 올리면서도 네토의 방향으로 흐르는 글은 아니라 생각이 들었는데 댓글에서 지적도 있어서 그냥
가장 무난하다 싶은 로맨스로 분류를 바꿔서 올립니다.
고작 2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는 비행시간,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1분 1초가 마치 1년이란 시간처럼 거대하고 길게 느껴지고 오늘따라 대기하는 시간조차 유독 길게 느껴진다.
드디어 올라탄 비행기, 하지만 언제나처럼 내가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비행기는 바로 출발하지 않는다. 타고 나서도 대기 시간은 존재하고, 끊임없이 기다림의 연속은 내 입 안을 바짝 타게 만든다.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내 손가락은 아내에게 무의식적으로 계속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제발 받기를 바라며..
‘받아...받아 제발....’
애가 타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밤부터 몇 번이나 도대체 전화를 걸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 십 번 전화를 걸었지만 은주의 전화기에선 끊임없는 신호음만 계속해서 울려댔다.
여보세요 한 마디면 되는데.. 그 말 한 마디면 이렇게 불안하지 않을 거 같은데..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그립고 보고 싶은 은주의 목소리는 아무리 내가 전화를 걸어도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하아.....”
절로 세어 나오는 한숨,
“저.. 괜찮으신가요? 안색이 너무 창백하신데..”
“네? 아..네 괜찮습니다..”
스튜어디스의 말에 휴대폰 액정에 얼굴을 비춰보자 내 얼굴은 정말 정상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잔뜩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이니 스튜어디스가 지나가다 신경을 쓸 만한 그런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때,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출발하는 비행기..
어차피 또 다시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일까..거의 한숨도 못 자서일까..
비행기 이륙과 동시에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고, 난 정말 뻗었다는 표현처럼 정신을 놓아 버렸다.
희뿌옇게 펼쳐진 안개..
아니 안개비였다. 팔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비가 오고 있다는 걸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었고,
난 지금 이 곳이 어딘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여기는 어디일까..난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좀처럼 생각을 해봐도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것인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고 난 일단 무작정 앞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아까부터 오던 안개비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고, 한 치 앞의 시야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몇 번이나 일어나고 넘어지다 반복하다 난 또 다시 돌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에 걸려 넘어졌고 자리에서 일어나다 벽과 같은 것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오...”
머리에 느껴지는 시큰한 통증과 벽으로 보이는 앞을 더듬자 손에 무언가 만져지고 그것을 옆으로 살짝 돌리자 벽이 아닌 문이 열렸다.
‘아..문이었구나..그런데 여긴 또 어디지..’
일단 문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으로 들어가자 거짓말같이 문 앞까지 펼쳐져 있던 안개는 모두 사라져 있었고, 또렷하게 잘 보이는 안은 어딘가 낯익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
“안 와..오늘 그 이는 안 올 거야..”
“그럼 오늘밤 당신을 내 맘대로 유혹해도 되는 건가요?”
“그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고,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목소리는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나와 은주의 침실이었고, 익숙한 목소리는 은주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은주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 옆엔 익숙한 한 사내가 은주의 뽀얗고 부드러운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저...저 놈은....!!’
바로 그 남자였다. 은주의 입술을 앗아간..
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그때처럼 또다시 얼어버렸고, 은주는 눈앞에 보이는 날 마치 무시하는 듯이 쳐다도 보지 않고 그 남자를 향해 나에게만 보이는 그 유혹적인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남자는 은주의 그런 눈빛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진하게 은주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고, 손을 아래로 뻗어 은주의 은밀한 그 곳을 간질이고 있었다.
‘안 돼...안 돼...!!!’
난 미친 듯이 은주와 그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목소리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고 내 목소리는 그저 내 안에서 크게 울려댈 뿐이었다.
‘뭐야..이게..왜...안 돼...!!!’
내 눈에선 미친 듯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필사적으로 하지 말라고 소리를 내고 앞으로 뛰어나가려 했지만 조금의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몸은 한 발자국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은주..
은주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입가엔 나에게 늘 보여주던 환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왜.....왜.......’
왜라는 말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왜..나 말고 그 남자와 그렇게 있으면서 환하고 웃고 있는 거니..
내가 여기 있는데..
은주는 여전히 내 눈빛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미소 짓고 있었고, 은주의 온 몸을 더듬어대던 남자는 은주의 그 곳에 머물러 있던 물건을 조금씩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안 돼...안 돼.....!!!’
난 마지막으로 온 힘을 짜내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내 목소리는 은주에게 조금도 전달되지 않았고, 결국 은주의 그 곳으로 남자의 물건이 완전히 들어가며 은주는 입을 크게 벌리며 신음과 함께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아......”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고객님, 정신 차리세요!! 고객님!!!!”
얼굴에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며 얼굴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고, 옆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가까스로 눈을 떴다.
“고객님, 괜찮으세요??”
너무나 걱정스러운 눈빛, 아까 그 스튜어디스였다.
그제야 내가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는 게 생각이 났고,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나를 잔뜩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나는 좀 전의 영상..
‘꿈이었구나...’
너무나 생생해서 도무지 꿈이라고 생각이 안 들었는데 꿈이었던 것이다.
꿈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안도감이 밀려왔고, 그제야 내가 얼마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것인지 생각이나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뭔가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옆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는데 스튜어디스가 수건을 내밀었다.
“땀 좀 닦으세요..너무 많이 나셔서..”
“아..고맙습니다...”
스튜어디스가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니 정말 흥건할 정도로 땀이 묻어나왔고, 새삼 얼마나 끔찍한 악몽을 꾼 것인지 다시 그 꿈이 떠올라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래 꿈이었어..그럴 리가 없지...’
이어지는 기내 방송,
조금 있으면 도착한다는 방송이었다. 거의 출발하자마자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어서 2시간 반을 잔 것이다.
아직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혹시나 빠트리는 물건이 있을까 주위를 꼼꼼히 살피며 정리를 하는 동안 비행기는 익숙한 인천 공항에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활주로에 비행기가 착륙을 하고, 나는 가장 먼저 비행기를 빠져나와 수속을 밟고 택시를 잡아 서둘러 은주의 회사로 향했다.
“아저씨, 빨리 좀 가주세요”
“지금 최대한 빨리 가고 있는거에요..”
내리자마자 속이 다시 타들어가는 내 마음과 달리 야속하게도 택시 아저씨는 뭐가 그리 느긋한지 조금 밟다가 신호에 걸려 서다 가다를 반복했고 내 속은 이미 다 타서 뭉개져 버리는 듯 했다.
‘하아....’
하지만 내가 재촉한다고 갑자기 택시가 은주의 회사 앞에 도착할 리도 없었고, 난 창밖을 보다 휴대폰을 보다 반복하며 어서 빨리 택시가 도착하기만을 바랬다.
얼마나 오래 걸렸던 것일까,
확실한 것은 평소보다 꽤나 걸린 건 분명하다는 사실이었고 난 잔돈을 받지도 않고 택시비를 택시기사 손에 쥐어주고 아내의 회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은주의 회사 근처에 와 본적은 있었지만 회사 안에 들어온 건 처음이라 막상 들어오자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을 하는 찰나, 신혼 초기에 집들이 할 때 봤었던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내 앞으로 지나갔다.
“저..저기요”
“네?”
여자는 무슨 볼 일이냐며 날 바라봤고, 난 한참을 우물쭈물하다 은주의 남편임을 밝혔다.
“아..은주 남편..기억나요..그런데 회사는 무슨 일로? 오늘 은주 출근 안 했는데..”
“네..?”
난 여자의 말에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 번 여자에게 물었다. 하지만 여자는 확실히 오늘 은주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난 어안이 벙벙했다.
은주는 지금까지 한 번도 회사를 결근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결근이라니...
왜? 무엇 때문에?
머릿속에는 끊임없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 여자에게 더 이상 묻는 건 뭔가 나나 은주나 이상한 사람이 될 거 같아 난 대충 여자에게 둘러대고 서둘러 회사를 빠져 나왔다.
‘어디 있는 거니...집에 있는 걸까...’
회사가 아니라면 집, 그 외엔 은주가 갈만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고 난 다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도무지 연락도 안 받고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은주의 행방에 내 마음은 극도로 불안해졌고, 불안해지면 여지없이 나오는 습관인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하아....”
절로 튀어나오는 한숨에 손톱을 계속 물어뜯는 모습을 보고 이상한지 택시 기사는 한 번씩 뒤쪽을 흘깃흘깃 봤지만 그런 남의 시선 따위를 의식할 여유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
택시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 어느새 우리 동 앞에 서 있었고, 난 깊은 심호흡을 하고 요금을 정산하고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현관 입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매일 같이 드나드는 동선인데 오늘따라 왜 이리 긴장이 되는 건지, 내 손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엘리베이터를 타며 난 다시 한 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긴장하지 말자. 아무 일 없을 거야..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자고 있을지도 몰라’
이런 저런 잡생각 속에 어느새 1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무거운 한 발자국을 내딛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와 천천히 익숙한 방향을 향해 걸어가 도어락을 꾹꾹 눌러댔다.
띠리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집 안을 감싸고 있었다.
단순히 내 느낌 탓인지, 불안한 내 심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집 안에서 묻어나고 있었고 그 이유는 내 시선이 발 아래로 향하며 왜 그런지 설명해 주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신발,
분명한 남자의 신발이었다. 또다시 미친 듯이 쿵쾅대며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손을 얹고 깊은 심호흡을 하며 난 천천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야...아닐 거야...’
부정, 부정하고 싶었다.
저 신발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저 신발이 의미하는 것 따윈 아무 것도 없다고..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 달리 내 마음은 빠르게 불안함이 잠식하고 있었고, 늘 걸어 다니던 거실에서 안방까지 거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멀게만 느껴졌다.
한 발작 한 발작 내딛으며 발에서 나온 땀으로 양말은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었고 힘겨운 내 발걸음은 드디어 안방 문까지 와 있었다.
아주 살짝 열려 있는 안방 문,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의 모습이 문틈으로 살짝 보였고 무언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끼며 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난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이 왜.......”
남자의 눈은 살짝 나와 마주치고 흔들리더니 이내 시선을 회피하며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숙였던 남자의 얼굴이 다시 올라오는 순간 남자의 얼굴에 내 주먹이 날아가 꽂히고,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왜...!!! 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왜..!!”
살면서 싸움 한 번 한 적이 없던 나였다.
어릴 때 남들에 비해 조금 덩치가 큰 편이었지만 항상 제일 뒷자리에서 조용히 앉아있기만 하고 힘이 쎈 녀석들이 날 때리더라도 늘 맞기만 해서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 순둥이, 그게 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늘 따라다니던 별명이었다.
곰처럼 덩치 큰 녀석이 맨날 맞으면서 인상 좋게 씨익 웃어 보인다고...
왜 그랬을까.. 글쎄 지금도 모르겠다. 근데 딱히 싸움이란 걸 하고 싶지 않았던 건 확실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 내가 이 남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인데 무자비하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절제되지 않는 분노.. 살면서 이렇게 분노를 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뺑소니범에게 치여서 돌아가셨던 날도,
내가 먹지 않은 아버지 생일 케이크를 동생 녀석이 먹고 밖에 나가는 통에 혼자 누명을 뒤집어써서 엄마에게 거짓말한다고 다리에 피멍이 들 정도로 맞았던 날도,
처음 짝사랑하는 아이에게 고백한 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내 앞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던 녀석과 팔짱을 끼며 유유히 걸어가던 그 날도,
이렇게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참을 만 했다. 조금은 슬펐지만...그럴 수 있다고..
이해한다고..
하지만 지금 눈앞에 이 상황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편이 정확했다.
왜...왜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머리를 맴돌고 있다.
우리 둘만의 침실에.. 무슨 권리로 이 남자가 들어와 있는 것인지.. 도대체 은주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변명해봐...변명해 보라고....”
내 손은 남자의 코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고, 남자는 코가 부러진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저...오해...”
“개 같은 새끼..너 같은 쓰레기 같은 놈들이 입에 달고 사는 그 말이 오해야..오해...”
참을 수 없는 분노,
언제나 갑보단 을로써 살아왔던 인생에 대한 참아왔던 분노일까, 매스컴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떠들어대는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작아지는 남편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같이 공감하며 울분을 토해냈던 기억 때문일까..
분노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고, 가증스러운 남자의 오해란 말에 내 이성의 끈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의 도발에도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으음...자기야..언제 왔...민수야 너 얼굴이...”
뒤를 돌아보니 이제 깨어난 듯한 은주가 잔뜩 놀란 얼굴로 나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야..왜 그래..무슨 일이야..”
“무슨 일....? 그걸 왜 내가 설명을 해야할까..지금 설명을 들어야 할 입장이 누군데..”
“저..그건 오..”
“닥쳐!”
난 매서운 눈빛으로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남자는 그런 내 시선에 살기를 느꼈는지 내 눈을 피했고 난 다시 아내 은주를 바라봤다.
“말해봐..내가 지금 어떻게 이 상황을 납득해야 할지..”
“아...저...하아...자기야 정말 미안한데...기억이..”
“기억이 안 난다고? 어제 나랑 통화한 건 기억해?”
“어...기억나..”
“근데 기억이 안 난다. 그 후 일들이? 하아...기억은 안 나는데 넌 지금 침대에 누워 있고, 저 기분 나쁜 놈은 네 옆에 붙어 있고..그게 내가 집에 와서 본 전부야..왜 저 놈이 우리 집에 있는걸까? 왜 너와 나 둘만의 방에 들어와 있는걸까? 난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은주는 내 말을 들으며 점점 표정이 심각해져 갔고, 내 말이 모두 끝나고나자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단어, 절망..
마음속에 있던 말을 모두 비워내고 나자 분노는 사그라들고 그 곳을 절망감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아니..온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듯 했다.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하아....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겠는지 모르겠는데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아...”
“오해....?”
오해라는 말을 은주로부터 듣게 될 줄이야..
이건 너무 뻔한 레파토리 아닌가.. 오해...
차라리 무슨 다른 변명이라도 하지.. 오해라니..
구질구질한 변명이라도 좋으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납득할 수 있게 저 남자가 지금 이 곳에 있는 건 아무 의미가 아니라고 난 저 남자를 데려온 적이 없다고 변명이라도 하지...
오해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잠시도 이곳에 머물러 있기 힘들었다.
“어디가!!”
은주는 내가 갑자기 일어나 나가자 깜짝 놀라 잠옷을 입은 체 뛰어나왔다.
“왜 그래 갑자기.. 내 말 좀 들어봐.. 어디 가냐고...!!”
은주의 애타는 외침.. 하지만 그 외침이 내 발걸음을 조금도 멈출 수는 없었다.
한 번 아닌 건 아니라는 것.. 평소 고지식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나에게 아닌 건 아닌 것이었다.
“자기야........”
은주의 흐느낌..
뒤를 돌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약해 질까봐..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고 닫혀 지는 문틈으로 보이는 은주의 눈물 젖은 얼굴..
난 그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끝....끝인 건가..이렇게....’
극도의 허무함..허망함이 밀려왔다.
8년간의 연애, 그리고 1년간의 결혼생활이 이렇게 끝이란 말인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퍼붓는 장대 같은 소나기..
여름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더니 아까까지 햇볕이 쨍쨍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비가 퍼붓고 있었다. 우산도 없는데...
그래..이 거지같은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버리게...그냥 맞으며 걸어가자...
그런 생각과 함께 밖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으려는데 계단을 통해 뛰어내려온 은주가 뒤에서 나에게 와락 안겼다.
“왜..그래..나 무서워.....흐흑...그러지마...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제발...정말...나 좀 믿어줘.....”
“내가......만약 내가....그랬다면 넌 날 믿을 수 있었을까.....?”
“그..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날 못 믿었겠지...미안...우리 사이에 신뢰는 이미 깨져버린 거 같아..”
“자...자기야...자기야.....!!”
애타는 은주의 외침..안쓰럽게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겠지..
미안..그런데 오늘은 널 달래줄 수 없을 거 같아..
마지막 힘을 짜내서 내 옷을 부여잡는 은주의 손을 뿌리치고 미친 듯이 비가 퍼붓는 밖으로 난 걸어 나갔다.
차갑게 온 몸에 퍼붓는 비...이 정도 비라면 눈물 따윈 금방 가려지겠지..
이렇게 마지막인 것일까..
마지막이라면 은주의 얼굴 한 번만 더 보고 갈까....
한참을 걸어가던 나는 뒤돌아 은주를 바라봤고, 은주는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난 그런 은주를 보며 내 꿈속에 은주의 모습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나의 사랑...안녕...
네토로 올리면서도 네토의 방향으로 흐르는 글은 아니라 생각이 들었는데 댓글에서 지적도 있어서 그냥
가장 무난하다 싶은 로맨스로 분류를 바꿔서 올립니다.
고작 2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는 비행시간,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1분 1초가 마치 1년이란 시간처럼 거대하고 길게 느껴지고 오늘따라 대기하는 시간조차 유독 길게 느껴진다.
드디어 올라탄 비행기, 하지만 언제나처럼 내가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비행기는 바로 출발하지 않는다. 타고 나서도 대기 시간은 존재하고, 끊임없이 기다림의 연속은 내 입 안을 바짝 타게 만든다.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내 손가락은 아내에게 무의식적으로 계속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제발 받기를 바라며..
‘받아...받아 제발....’
애가 타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밤부터 몇 번이나 도대체 전화를 걸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 십 번 전화를 걸었지만 은주의 전화기에선 끊임없는 신호음만 계속해서 울려댔다.
여보세요 한 마디면 되는데.. 그 말 한 마디면 이렇게 불안하지 않을 거 같은데..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그립고 보고 싶은 은주의 목소리는 아무리 내가 전화를 걸어도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하아.....”
절로 세어 나오는 한숨,
“저.. 괜찮으신가요? 안색이 너무 창백하신데..”
“네? 아..네 괜찮습니다..”
스튜어디스의 말에 휴대폰 액정에 얼굴을 비춰보자 내 얼굴은 정말 정상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잔뜩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이니 스튜어디스가 지나가다 신경을 쓸 만한 그런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때,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출발하는 비행기..
어차피 또 다시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일까..거의 한숨도 못 자서일까..
비행기 이륙과 동시에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고, 난 정말 뻗었다는 표현처럼 정신을 놓아 버렸다.
희뿌옇게 펼쳐진 안개..
아니 안개비였다. 팔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비가 오고 있다는 걸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었고,
난 지금 이 곳이 어딘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여기는 어디일까..난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좀처럼 생각을 해봐도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것인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고 난 일단 무작정 앞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아까부터 오던 안개비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고, 한 치 앞의 시야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몇 번이나 일어나고 넘어지다 반복하다 난 또 다시 돌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에 걸려 넘어졌고 자리에서 일어나다 벽과 같은 것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오...”
머리에 느껴지는 시큰한 통증과 벽으로 보이는 앞을 더듬자 손에 무언가 만져지고 그것을 옆으로 살짝 돌리자 벽이 아닌 문이 열렸다.
‘아..문이었구나..그런데 여긴 또 어디지..’
일단 문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으로 들어가자 거짓말같이 문 앞까지 펼쳐져 있던 안개는 모두 사라져 있었고, 또렷하게 잘 보이는 안은 어딘가 낯익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
“안 와..오늘 그 이는 안 올 거야..”
“그럼 오늘밤 당신을 내 맘대로 유혹해도 되는 건가요?”
“그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고,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목소리는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나와 은주의 침실이었고, 익숙한 목소리는 은주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은주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 옆엔 익숙한 한 사내가 은주의 뽀얗고 부드러운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저...저 놈은....!!’
바로 그 남자였다. 은주의 입술을 앗아간..
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그때처럼 또다시 얼어버렸고, 은주는 눈앞에 보이는 날 마치 무시하는 듯이 쳐다도 보지 않고 그 남자를 향해 나에게만 보이는 그 유혹적인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남자는 은주의 그런 눈빛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진하게 은주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고, 손을 아래로 뻗어 은주의 은밀한 그 곳을 간질이고 있었다.
‘안 돼...안 돼...!!!’
난 미친 듯이 은주와 그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목소리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고 내 목소리는 그저 내 안에서 크게 울려댈 뿐이었다.
‘뭐야..이게..왜...안 돼...!!!’
내 눈에선 미친 듯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필사적으로 하지 말라고 소리를 내고 앞으로 뛰어나가려 했지만 조금의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몸은 한 발자국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은주..
은주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입가엔 나에게 늘 보여주던 환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왜.....왜.......’
왜라는 말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왜..나 말고 그 남자와 그렇게 있으면서 환하고 웃고 있는 거니..
내가 여기 있는데..
은주는 여전히 내 눈빛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미소 짓고 있었고, 은주의 온 몸을 더듬어대던 남자는 은주의 그 곳에 머물러 있던 물건을 조금씩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안 돼...안 돼.....!!!’
난 마지막으로 온 힘을 짜내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내 목소리는 은주에게 조금도 전달되지 않았고, 결국 은주의 그 곳으로 남자의 물건이 완전히 들어가며 은주는 입을 크게 벌리며 신음과 함께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아......”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고객님, 정신 차리세요!! 고객님!!!!”
얼굴에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며 얼굴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고, 옆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가까스로 눈을 떴다.
“고객님, 괜찮으세요??”
너무나 걱정스러운 눈빛, 아까 그 스튜어디스였다.
그제야 내가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는 게 생각이 났고,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나를 잔뜩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나는 좀 전의 영상..
‘꿈이었구나...’
너무나 생생해서 도무지 꿈이라고 생각이 안 들었는데 꿈이었던 것이다.
꿈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안도감이 밀려왔고, 그제야 내가 얼마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것인지 생각이나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뭔가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옆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는데 스튜어디스가 수건을 내밀었다.
“땀 좀 닦으세요..너무 많이 나셔서..”
“아..고맙습니다...”
스튜어디스가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니 정말 흥건할 정도로 땀이 묻어나왔고, 새삼 얼마나 끔찍한 악몽을 꾼 것인지 다시 그 꿈이 떠올라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래 꿈이었어..그럴 리가 없지...’
이어지는 기내 방송,
조금 있으면 도착한다는 방송이었다. 거의 출발하자마자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어서 2시간 반을 잔 것이다.
아직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혹시나 빠트리는 물건이 있을까 주위를 꼼꼼히 살피며 정리를 하는 동안 비행기는 익숙한 인천 공항에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활주로에 비행기가 착륙을 하고, 나는 가장 먼저 비행기를 빠져나와 수속을 밟고 택시를 잡아 서둘러 은주의 회사로 향했다.
“아저씨, 빨리 좀 가주세요”
“지금 최대한 빨리 가고 있는거에요..”
내리자마자 속이 다시 타들어가는 내 마음과 달리 야속하게도 택시 아저씨는 뭐가 그리 느긋한지 조금 밟다가 신호에 걸려 서다 가다를 반복했고 내 속은 이미 다 타서 뭉개져 버리는 듯 했다.
‘하아....’
하지만 내가 재촉한다고 갑자기 택시가 은주의 회사 앞에 도착할 리도 없었고, 난 창밖을 보다 휴대폰을 보다 반복하며 어서 빨리 택시가 도착하기만을 바랬다.
얼마나 오래 걸렸던 것일까,
확실한 것은 평소보다 꽤나 걸린 건 분명하다는 사실이었고 난 잔돈을 받지도 않고 택시비를 택시기사 손에 쥐어주고 아내의 회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은주의 회사 근처에 와 본적은 있었지만 회사 안에 들어온 건 처음이라 막상 들어오자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을 하는 찰나, 신혼 초기에 집들이 할 때 봤었던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내 앞으로 지나갔다.
“저..저기요”
“네?”
여자는 무슨 볼 일이냐며 날 바라봤고, 난 한참을 우물쭈물하다 은주의 남편임을 밝혔다.
“아..은주 남편..기억나요..그런데 회사는 무슨 일로? 오늘 은주 출근 안 했는데..”
“네..?”
난 여자의 말에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 번 여자에게 물었다. 하지만 여자는 확실히 오늘 은주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난 어안이 벙벙했다.
은주는 지금까지 한 번도 회사를 결근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결근이라니...
왜? 무엇 때문에?
머릿속에는 끊임없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 여자에게 더 이상 묻는 건 뭔가 나나 은주나 이상한 사람이 될 거 같아 난 대충 여자에게 둘러대고 서둘러 회사를 빠져 나왔다.
‘어디 있는 거니...집에 있는 걸까...’
회사가 아니라면 집, 그 외엔 은주가 갈만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고 난 다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도무지 연락도 안 받고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은주의 행방에 내 마음은 극도로 불안해졌고, 불안해지면 여지없이 나오는 습관인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하아....”
절로 튀어나오는 한숨에 손톱을 계속 물어뜯는 모습을 보고 이상한지 택시 기사는 한 번씩 뒤쪽을 흘깃흘깃 봤지만 그런 남의 시선 따위를 의식할 여유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
택시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 어느새 우리 동 앞에 서 있었고, 난 깊은 심호흡을 하고 요금을 정산하고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현관 입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매일 같이 드나드는 동선인데 오늘따라 왜 이리 긴장이 되는 건지, 내 손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엘리베이터를 타며 난 다시 한 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긴장하지 말자. 아무 일 없을 거야..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자고 있을지도 몰라’
이런 저런 잡생각 속에 어느새 1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무거운 한 발자국을 내딛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와 천천히 익숙한 방향을 향해 걸어가 도어락을 꾹꾹 눌러댔다.
띠리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집 안을 감싸고 있었다.
단순히 내 느낌 탓인지, 불안한 내 심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집 안에서 묻어나고 있었고 그 이유는 내 시선이 발 아래로 향하며 왜 그런지 설명해 주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신발,
분명한 남자의 신발이었다. 또다시 미친 듯이 쿵쾅대며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손을 얹고 깊은 심호흡을 하며 난 천천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야...아닐 거야...’
부정, 부정하고 싶었다.
저 신발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저 신발이 의미하는 것 따윈 아무 것도 없다고..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 달리 내 마음은 빠르게 불안함이 잠식하고 있었고, 늘 걸어 다니던 거실에서 안방까지 거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멀게만 느껴졌다.
한 발작 한 발작 내딛으며 발에서 나온 땀으로 양말은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었고 힘겨운 내 발걸음은 드디어 안방 문까지 와 있었다.
아주 살짝 열려 있는 안방 문,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의 모습이 문틈으로 살짝 보였고 무언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끼며 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난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이 왜.......”
남자의 눈은 살짝 나와 마주치고 흔들리더니 이내 시선을 회피하며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숙였던 남자의 얼굴이 다시 올라오는 순간 남자의 얼굴에 내 주먹이 날아가 꽂히고,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왜...!!! 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왜..!!”
살면서 싸움 한 번 한 적이 없던 나였다.
어릴 때 남들에 비해 조금 덩치가 큰 편이었지만 항상 제일 뒷자리에서 조용히 앉아있기만 하고 힘이 쎈 녀석들이 날 때리더라도 늘 맞기만 해서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 순둥이, 그게 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늘 따라다니던 별명이었다.
곰처럼 덩치 큰 녀석이 맨날 맞으면서 인상 좋게 씨익 웃어 보인다고...
왜 그랬을까.. 글쎄 지금도 모르겠다. 근데 딱히 싸움이란 걸 하고 싶지 않았던 건 확실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 내가 이 남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인데 무자비하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절제되지 않는 분노.. 살면서 이렇게 분노를 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뺑소니범에게 치여서 돌아가셨던 날도,
내가 먹지 않은 아버지 생일 케이크를 동생 녀석이 먹고 밖에 나가는 통에 혼자 누명을 뒤집어써서 엄마에게 거짓말한다고 다리에 피멍이 들 정도로 맞았던 날도,
처음 짝사랑하는 아이에게 고백한 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내 앞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던 녀석과 팔짱을 끼며 유유히 걸어가던 그 날도,
이렇게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참을 만 했다. 조금은 슬펐지만...그럴 수 있다고..
이해한다고..
하지만 지금 눈앞에 이 상황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편이 정확했다.
왜...왜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머리를 맴돌고 있다.
우리 둘만의 침실에.. 무슨 권리로 이 남자가 들어와 있는 것인지.. 도대체 은주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변명해봐...변명해 보라고....”
내 손은 남자의 코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고, 남자는 코가 부러진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저...오해...”
“개 같은 새끼..너 같은 쓰레기 같은 놈들이 입에 달고 사는 그 말이 오해야..오해...”
참을 수 없는 분노,
언제나 갑보단 을로써 살아왔던 인생에 대한 참아왔던 분노일까, 매스컴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떠들어대는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작아지는 남편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같이 공감하며 울분을 토해냈던 기억 때문일까..
분노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고, 가증스러운 남자의 오해란 말에 내 이성의 끈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의 도발에도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으음...자기야..언제 왔...민수야 너 얼굴이...”
뒤를 돌아보니 이제 깨어난 듯한 은주가 잔뜩 놀란 얼굴로 나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야..왜 그래..무슨 일이야..”
“무슨 일....? 그걸 왜 내가 설명을 해야할까..지금 설명을 들어야 할 입장이 누군데..”
“저..그건 오..”
“닥쳐!”
난 매서운 눈빛으로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남자는 그런 내 시선에 살기를 느꼈는지 내 눈을 피했고 난 다시 아내 은주를 바라봤다.
“말해봐..내가 지금 어떻게 이 상황을 납득해야 할지..”
“아...저...하아...자기야 정말 미안한데...기억이..”
“기억이 안 난다고? 어제 나랑 통화한 건 기억해?”
“어...기억나..”
“근데 기억이 안 난다. 그 후 일들이? 하아...기억은 안 나는데 넌 지금 침대에 누워 있고, 저 기분 나쁜 놈은 네 옆에 붙어 있고..그게 내가 집에 와서 본 전부야..왜 저 놈이 우리 집에 있는걸까? 왜 너와 나 둘만의 방에 들어와 있는걸까? 난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은주는 내 말을 들으며 점점 표정이 심각해져 갔고, 내 말이 모두 끝나고나자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단어, 절망..
마음속에 있던 말을 모두 비워내고 나자 분노는 사그라들고 그 곳을 절망감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아니..온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듯 했다.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하아....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겠는지 모르겠는데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아...”
“오해....?”
오해라는 말을 은주로부터 듣게 될 줄이야..
이건 너무 뻔한 레파토리 아닌가.. 오해...
차라리 무슨 다른 변명이라도 하지.. 오해라니..
구질구질한 변명이라도 좋으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납득할 수 있게 저 남자가 지금 이 곳에 있는 건 아무 의미가 아니라고 난 저 남자를 데려온 적이 없다고 변명이라도 하지...
오해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잠시도 이곳에 머물러 있기 힘들었다.
“어디가!!”
은주는 내가 갑자기 일어나 나가자 깜짝 놀라 잠옷을 입은 체 뛰어나왔다.
“왜 그래 갑자기.. 내 말 좀 들어봐.. 어디 가냐고...!!”
은주의 애타는 외침.. 하지만 그 외침이 내 발걸음을 조금도 멈출 수는 없었다.
한 번 아닌 건 아니라는 것.. 평소 고지식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나에게 아닌 건 아닌 것이었다.
“자기야........”
은주의 흐느낌..
뒤를 돌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약해 질까봐..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고 닫혀 지는 문틈으로 보이는 은주의 눈물 젖은 얼굴..
난 그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끝....끝인 건가..이렇게....’
극도의 허무함..허망함이 밀려왔다.
8년간의 연애, 그리고 1년간의 결혼생활이 이렇게 끝이란 말인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퍼붓는 장대 같은 소나기..
여름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더니 아까까지 햇볕이 쨍쨍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비가 퍼붓고 있었다. 우산도 없는데...
그래..이 거지같은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버리게...그냥 맞으며 걸어가자...
그런 생각과 함께 밖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으려는데 계단을 통해 뛰어내려온 은주가 뒤에서 나에게 와락 안겼다.
“왜..그래..나 무서워.....흐흑...그러지마...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제발...정말...나 좀 믿어줘.....”
“내가......만약 내가....그랬다면 넌 날 믿을 수 있었을까.....?”
“그..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날 못 믿었겠지...미안...우리 사이에 신뢰는 이미 깨져버린 거 같아..”
“자...자기야...자기야.....!!”
애타는 은주의 외침..안쓰럽게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겠지..
미안..그런데 오늘은 널 달래줄 수 없을 거 같아..
마지막 힘을 짜내서 내 옷을 부여잡는 은주의 손을 뿌리치고 미친 듯이 비가 퍼붓는 밖으로 난 걸어 나갔다.
차갑게 온 몸에 퍼붓는 비...이 정도 비라면 눈물 따윈 금방 가려지겠지..
이렇게 마지막인 것일까..
마지막이라면 은주의 얼굴 한 번만 더 보고 갈까....
한참을 걸어가던 나는 뒤돌아 은주를 바라봤고, 은주는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난 그런 은주를 보며 내 꿈속에 은주의 모습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나의 사랑...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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