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없는 시간, 이 시간들이 너무나 낯설다.
언제나 집에 오면 환한 웃음으로 날 반겨주던 아내는 이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적,
그 고요한 분위기만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그리고 어느새 세 달..
그래도 아직까지 내 곁에 있고 싶다고 하던 아내는 세 달이 넘게 연락 한 통 없었다.
당장이라도 아내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지만,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난 참고 또 참았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한 그 말들 때문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냐고.. 아내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그 말.. 그 말까지 안 들어줄 수는 없었다.
이제는 정희씨 밖에 연락이 오지 않는 휴대폰.. 난 휴대폰을 무심히 들여다본다.
수 없이 남아있는 지영과 정희씨의 메시지들.. 유감스럽게도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아내에게 내가 보낸 메시지는 1년이 넘은 것이다.
들어갈 때 복숭아를 사가지고 들어간다는 메시지..그게 내가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 후 남겨진 수많은 메시지는 지영과 정희씨와 주고받은 것들이었다.
오늘은 어떤 자세가 좋았니..다음번에 만나면 걸어 다니기 힘들게 만들어 주겠다는 그런 저질스러운 표현들이 남아 있는 지영과의 메시지..
이렇게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쉽다고 같이 살면 너무 좋을 거 같다고.. 이런 말 진짜 잘 안 하는데 오랜만에 너무 설레어서 꼭 해야겠다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절절한 사랑을 하는 커플들처럼 사랑의 밀어가 담겨있는 정희씨와의 메시지..
아내는 이것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얼마나 비참했을까..
아내의 그 슬픔이 그 분노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떤 심정이었을지..
난 차마 그걸 조금이라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아내의 반응.. 오히려 더 화내고 더 슬퍼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아내의 반응은 최대한 자신의 기분을 억제하며 나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날 아직 사랑해서일까..아직까진 날 놓치고 싶지 않아서..?
모르겠다. 정확히 아내가 어떤 마음인지는..
하지만 중요한 건 너무나 서글픈 건.. 아내가 떨어져 있는 그 시간동안 아내에 대한 미안함은 점점 더 커져갔지만, 아내에 대한 애틋함..그리움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아내를 보고 싶다는 그리움, 그리고 외로움으로 인해 어딘가 기댈 곳이 필요했고, 어느새 난 정희씨를 찾아가는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집에 귀가하는 시간은 항상 12시가 넘는 늦은 시간.. 혹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정희씨의 집에서 바로 출근을 하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정희씨를 보면 볼수록..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 살을 맞대고 있는 날이 많아질수록 정희씨에 대한 나의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갔다.
물론 아직까지 나 역시 아내를 향한 내 마음.. 그 끈을 놓아버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흐음.. 이 넥타이가 조금 더 나은 거 같아”
“그래? 난 이게 더 나은 거 같은데..”
“아니래두 이게 조금 더 나아..”
“알았어~ 그걸로 하자. 이러다 출근 늦겠다”
“어머! 내 정신 좀 봐..시간이 벌써..얼른 출근해”
“어 알았어~ 있다 봐”
정희씨의 입에 살며시 뽀뽀를 하고 난 집을 나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창문을 내리고 이층을 바라보니 정희씨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다.
“잘 갔다 와”
“알았어. 창문 닫아. 추워. 날씨가 쌀쌀하다”
“알았어..”
이제는 아침이면 날씨가 꽤나 쌀쌀한 12월 초의 날씨.. 어서 들어가라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희씨는 내가 갈 때까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고집이 센 여자..내가 먼저 어서 가야 창문을 닫고 들어가겠지..
난 마지막으로 정희씨에게 손을 한 번 더 흔들어 주고 차를 출발했다.
백미러로 보이는 서서히 멀어지는 정희씨의 얼굴..
난 그런 정희씨의 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고,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김과장, 이번 단기 프로젝트 성과가 아주 대단하던데~ 사장님 칭찬이 아주 대단하셔. 이렇게만 하면 내년 승진 노려볼 수도 있겠는데?”
“부장님도 참..올해 제가 과장으로 승진했는데 어떻게 벌써 부장을..”
“아~ 이 사람이..우리 사장님 스타일 몰라? 특진 있잖아. 특진. 자네 동기는 벌써 올해 부장을 달았는데 자네라고 부장 승진 못할 거 뭐 있어? 지금처럼만 하면 내가 사장님께 아주 잘 말씀드려서 꼭 부장 달 수 있게 힘 써줄 테니까 지금처럼만 하라고 응?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알겠습니다..”
부장은 아침부터 입이 귀에 걸려서 싱글벙글해선 사장실로 들어갔다.
하긴..이번에 내가 진행한 프로젝트는 내가 입사한 이래로 처음으로 주도해서 제대로 성공한 일이었고, 더군다나 내 동기이자 최부장의 라이벌인 영업2팀의 이부장을 제치고 최종적으로 따낸 프로젝트였다.
거기에 최근 이부장의 기세가 하늘을 뚫을 듯해서 번번이 최부장이 고배를 마시고 있었으니..
최부장의 입이 귀에 걸릴 수밖에..
“과장님, 정말 이러다 내년이면 부장 진급하시겠는데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흐흐..”
“부장은 무슨...미리 김칫국 마시지 말어..난 생각도 안 하고 있으니까..”
“에이~~ 그게 무슨 소리세요. 우리 최부장님이 사장님 오른팔이잖아요. 요즘 왼팔인 이부장님이 힘을 좀 쓰고 있었지만..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사장님이 가장 아끼시는 게 최부장님 아닙니까~ 그런 최부장님이 힘써주신다면 승진은 말 안 해도 따 놓은 당상이죠..!”
“뭐..모르겠다 나는...”
“오늘 부장님이 기분 좋다고 한 턱 쏘신다고 하는데 가실거죠?”
“어..가야지. 안 가면 또 무슨 소리 들으려고..”
“흐흐..잘 생각하셨어요~ 이제 과장님도 슬슬 내년 부장 진급하시고 그 위도 바라보고 계시면 싫더라도 이런 자리는 꼭 참석하셔야죠..”
약삭빠르고 능구렁이 같은 녀석, 정말 회사 사람이 아니라면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정현이란 이 녀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 가식적인 미소..말투..
그때 사장실 문이 열리며 아까보다 더 활짝 웃는 얼굴로 최부장이 나에게 다가온다.
“아~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오늘 회식은 다음에 하는 걸로 하지. 사장님이 나랑 따로 한 잔 하고 싶다고 하시네...흐흐..이거 정말 미안해”
“아이고, 우리 부장님~!! 오늘 드디어 사장님이랑 독대하시는 겁니까? 이부장도 못한 그 독대를..!!”
“아~ 짜식..또 또 오바 한다.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말고~ 어쨌든 회식은 다음에 하는 걸로 하자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충성~!!”
아..정말 밥맛없는 녀석.. 난 오늘 회식이 취소가 돼서 오히려 저 밥맛없는 자식이 부장 옆에서 아양을 떠는 꼴을 안 봐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장님, 오늘 바쁘십니까? 괜찮으시면 오늘 술이나 한 잔..
거래처 박부장의 연락이었다. 지영과의 일이 있고난 후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지만, 다른 거래처와의 일이나 프로젝트로 바빠서 거의 들리지 못한 지 3개월이 넘어가고 있어 실로 오랜만의 연락이었다. 더군다나 회사 일이 아닌 개인적으로 이렇게 연락이 온 건 처음이라 박부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오늘 잡혀 있던 회식이 취소 돼서 마치고 그리 바쁜 일도 없었고..
“오랜만입니다 과장님, 요즘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괜히 이렇게 제가 불러낸 건 아닌지..”
“아닙니다. 이번에 맡았던 프로젝트도 끝나고 해서..이제는 좀 시간이 여유가 있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구요..자 들어가시죠”
“네..”
우리는 지영과 나, 박부장이 함께 왔던 몇 달 전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그 날의 기억.. 쓴 웃음이 나온다. 그 날 지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지금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을 수도 있었다.
그 한 번의 선택.. 돌이킬 수 없는 그 선택이 많은 것을 바꾸어 버렸다.
한 번도 일탈이라는 걸 해본 적 없던 나에게..일탈을 가르쳐준 그녀..
지금 와서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겠지만..
박부장과 난 일식집에 들어온 지 1시간이 넘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저 술잔을 기울였다.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어떤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박부장의 얼굴도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나와는 다른 그런 고민이겠지만..
어느새 들어온 지 1시간 반, 정적을 먼저 깬 건 박부장이었고 그 입에선 뜻밖의 인물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과장님”
“네..”
“지영이 기억하시죠?”
“아..그럼요..기억하죠..”
“저..지영이랑 잤습니다. 사실 사장뿐만 아니라 회사 유부남 중에서 지영이랑 잠자리를 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겠죠. 단지 한 번 자고 끝이었나..아니면 계속해서 관계를 가졌나 차이일 뿐이지..”
“네에......”
갑자기 지영과의 잠자리를 털어 놓다니.. 그것도 지금이 아닌 오래 전 일을.. 난 박부장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혹시 과장님도 지영이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는지 모르겠지만..뭐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그 아이 참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런 매력이라고 해야 할까..그런 게 있었죠”
뭐..지영이와 난 그저 잠자리 파트너 그 이상 그 이하의 관계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영이 그 나이 또래에서 풍기기 힘든 그런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히 사실이었다.
“지영이는 끊임없이 잠자리 파트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선을 그었지만 불행히도 전 점점 지영이에게 빠져들었습니다. 지영이가 다른 남자와도 그러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사장과 그런 관계를 들키고 난 후 회사에서 쫓겨나고 나서도 말이죠. 지영인 이런 나를 왜 좋아하냐며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며 매몰차게 날 대했지만..어디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되나요.. 쉽게 정리가 안 되더라구요..”
“네..그렇죠...사람 마음이란 게..”
어찌 박부장의 그 마음을 모를 수 있을까.. 난 그 마음을 지금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박부장이 어떤 고충을 겪었을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포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계속해서 매달리고 또 매달렸죠. 구차하게 보일 정도로..이혼 하고 너에게로 가겠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지영이는 그런 나에게 오히려 정이 떨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저에게 지친 지영이는 연락처도 바꿔 버리고 잠수를 타버리더군요. 마지막 연락이 9월이었으니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너무나 보고 싶고.. 한 번만 더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데..”
9월..9월은 지영이 나에게 다시 연락을 해 온 그때였다. 바람피기 좋은 날이라며..
그동안 그럼 박부장과의 문제 때문에 연락을 하지 못하다 완전히 박부장과의 관계가 끝이 났다고 판단해서 나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었던가..그리고 다시 나와 잘해 보기 위해서..
물론 다시 만난 지영을 난 결국 밀어내버렸지만..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난 단숨에 연거푸 세 잔을 들이켰다.
입 안 가득 쓴 맛이 올라온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과연 잘못한 사람은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다들 힘들어하고 서로 힘들게 살아갈까..단지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건 서로의 감정에 충실했다는 그것 하나뿐인데..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우리 중에 옳은 선택을 한 건 지영 하나 뿐인건가..
그녀처럼 끝끝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그렇게 살았어야 이렇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까..
아직도 난 뭐가 옳은지 뭐가 잘못된 것인지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정말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인지..
“저 이혼했습니다..”
“부장님...!”
“네..뭐..제가 또라이 같은 놈이죠..워낙 회사 내에서 지영씨 스캔들이 크게 터져서 회사 내에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었죠. 그런데 우리 순진하고 불쌍한 와이프.. 한 번은 그럴 수 있다며..남자들 다 결혼하고 한 번은 바람피고 그런다더라면서 이해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제 스스로 용서를 못하겠더라구요. 더군다나 와이프가 그런 말을 하는데도 지영이 얼굴이 아른거리는데 어떻게 제가 평생 와이프 얼굴을 보고 살 수 있겠습니까.. 전 그런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와이프에게 이혼해 달라 말했습니다. 이 죄는 내가 평생 가지고 살겠다고.. 와이프는 조금만 더 생각해보라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변할 리 없었고..지난주에 이혼 도장을 찍었습니다..”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 상황과 너무나 비슷했기에..
나도 저런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함에..
“힘...내세요..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네.. 말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 후 말없이 한참을 더 몇 시간동안 술을 기울이고 완전히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가 되었을 때 자리를 파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과장님두요.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누군가에게 털어놓으니까 마음이 속 시원하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한 번도 보지 못한 박부장의 솔직한 모습..그리고 힘이 축 빠진 어깨를 보고 처음으로 그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미래의 내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박부장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난 곧바로 택시를 타고 정희씨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도저히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잘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오늘 회식이라 그랬나?”
“어? 어어..좀 마셨어..”
“아휴~ 술 냄새..”
난 정희씨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무언가 심적인 편안함과 함께 취기가 몰려오자 잠이 쏟아진다.
“안 씻고 잘 거야?”
“어어..그냥 잘래..”
“씻구 자~!!!”
정희씨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진다.
온 몸에 쏟아지는 나른한 느낌과 함께 난 그대로 잠에 빠져 들었다.
기절하듯 얼마나 오래 잠든 것일까, 타는 듯한 갈증에 눈을 떠 옆을 보니
정희씨가 내 옆에서 새록새록 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술 마시고 오는 날이면 침대 옆에 올려 져 있는 정희씨의 꿀물..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식어 있는 꿀물을 마시니 어느 정도 갈증이 해소가 되었고, 조금 정신이 들어 내 몸을 보니 어느새 잠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고 내 몸에선 술 냄새가 아닌 향긋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아마도 자는 동안 정희씨가 내 몸을 따뜻한 수건으로 닦아준 것이겠지..
예전에도 이런 기억이 몇 번 있었으니까..
난 잠들어 있는 정희씨의 사랑스런 얼굴을 몇 번 쓰다듬어 주고 볼에 가볍게 뽀뽀를 해주었다.
“으음..일어났어요?”
“어..내가 깨웠나..미안..”
“아니..괜찮아요..”
아직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정희씨가 손을 뻗어 내 품에 꼬옥 안겨온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정희씨의 온기..새벽녘이라 그런지 정희씨의 품이 오늘따라 더욱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욕구가 샘솟는다.
난 거침없이 정희씨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고, 정희씨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나를 살짝 밀쳐낸다.
“양치까지는 못 했단 말이에요..으으...술 냄새..”
“아..미안해요..”
“뭘 또 미안해..장난친 건데..”
정희씨가 사랑스런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내 입술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부드러운 정희씨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와 내 혀와 엉키기 시작했다.
키스만으로 잔뜩 발기해버린 내 물건.. 난 서둘러 정희씨의 옷을 벗겼다.
“하아..왜 이렇게 급해요..천천히...”
“싫어요..오늘은 오늘은 안 그러고 싶어..”
“알았어요..마음대로...”
난 거의 정희씨의 옷을 찢을 듯이 거칠게 벗겨내고는 정희씨의 마지막 남은 팬티, 그 팬티를 벗기지도 않고 옆으로 살짝 제치고 아직 완전히 젖어있지 않은 그 곳으로 내 물건을 밀어 넣었다.
“하아..조..조금만 살살..”
정희씨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그제야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며 내가 너무 거칠게 정희씨를 대했구나란 생각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아..미안..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너무 흥분해서..”
“아니에요. 그런 민수씨의 모습도 좋아..근데 조금만 살살..”
언제 인상을 찡그렸냐는 듯이 정희씨가 다시 환하게 미소 짓는다. 그리고 그 미소에 정희씨에 대한 미안함이란 감정은 눈 녹듯이 사그라들었고, 난 정희씨의 팬티를 벗겨내고 조심스럽게 그 곳으로 내 물건을 다시 밀어 넣었다.
“하아...하으음...”
정희씨의 가냘픈 신음이 흘러나온다.
내 물건은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정희씨의 그 곳으로 들어갔다 나오고 있었고, 조금씩 찔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분홍색 속살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하아...하으윽...!”
어느새 완전히 정희씨의 안으로 들어간 내 물건.. 정희씨가 나를 와락 끌어안는다.
“하아..좋아요..민수씨가 너무 좋아..”
정희씨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와 닿는다. 이어지는 부드러운 키스..
그와 함께 난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하아..하아....”
정희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달뜬 신음소리..그 신음소리에 맞춰 우리의 몸은 하나가 되어 뜨겁게 새벽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아..하아..좋아...좋아요..”
“나도..나도 정희씨가 좋아..”
우리는 서로의 몸에 뜨겁게 키스를 퍼부으며, 평소보다 더욱 더 거칠게 더욱 더 뜨겁게 서로의 몸을 탐했다.
“나..이제 나올 거 같아..이제..”
“안에 해줘요..그러고 싶어..”
“하아..하아..알았어요..”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달아 가는 정희씨와 나, 밖은 깜깜하던 밤에서 푸르스름한 새벽을 지나 조금씩 해가 뜨려는지 밝아 오고 있었고 그와 함께 난 정희씨의 몸 안 깊숙이 잔뜩 사정을 해버렸다.
실로 오랜만에 하는 격한 섹스.. 이런 섹스는 지영과 한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었다.
몸이 부숴 질 것 같은 그런 섹스..
섹스 후에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지쳐 버렸고, 서로를 안고 격한 숨소리만을 내뱉었다.
“하아..하아..너무 좋았어..오늘 진짜 남자 같았던 거 알아요?”
“하하..그럼 지금까진 여자 같았어요?”
“아니..그런 말은 아니고..어쨌든 너무 좋았어요”
“나도..나도 좋았어요..”
우린 다시 한 번 부드러운 입맞춤을 나누었고, 30분이라도 눈을 부치기 위해 난 정희씨의 품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잠깐의 숙면, 잠깐 잠을 잔다는 것이 어째 싸한 느낌에 눈이 스르륵 떠졌고,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이 고작 20분 남아 있었다.
난 정신 나간 놈처럼 서둘러 옷을 입고 대충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뛰어나갔고, 정희씨는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하고 내가 나가는 걸 보고 침대에 누워 잘 갔다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정희씨의 집에서 나와 난 곧장 대로변으로 달려갔고, 다행히 한 번에 택시가 잡혀서 출근 시간 1분 전에 난 겨우겨우 회사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 도착했는데 왠 일로 부장이 보이지 않는다.
“정현아, 부장님은?”
“아직 안 오셨어요. 어쩐 일로 부장님이 지각을 다 하시네요. 과장님도 지각은 안 하셨는데 겨우 출근시간 맞춰서 오시고 별 일이 다 있네요..흐흐.. 아~! 그러고보니 아직 사장님도 안 오신 거 같은데...아무래도 두 분이서 어제 너무 과음을 하셨나 보네요. 그런데 과장님도 어제 술 드셨어요? 아직 술 냄새가..”
“아..난 어제 저 거래처 박부장이랑..”
“에이~ 부장님 뭐에요~ 그런 자리라면 저도 부르시지..저 이번 주 내내 술 안마시고 어제 회식만 기다려서 술 엄청 고팠는데..아쉽네..”
“그래..미안..다음엔 부를게”
“미안하긴요. 헤헤..말이 그렇다는 거죠. 어! 부장님 나오셨습니까!”
“어..그래”
“나오셨어요”
“어..김과장, 아오 골이야..오늘 아침 미팅은 그냥 건너뛰고, 정현아 너 가서 술 깨는 약 좀 사와라..아주 골이...”
“어제 많이 드셨어요?”
“말도 마라..거의 4차인지 5차인지..아무튼 새벽 5시에 집에 들어간 거 같아..”
“헐..엄청 드셨네요. 알겠습니다.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부장은 정말 술을 어제 엄청 많이 마신건지,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하던 아침 미팅도 하지 않고 사장 오면 깨우라는 말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잠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부장의 잔소리 없이 편하고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 날 인거 같은 기분..
그 기분은 틀리지 않았고, 부장은 하루 종일 골골대며 잔소리 하나 없이 멍하게 앉아 있다 퇴근시간이 되자 칼같이 퇴근해 버렸고 덕분에 우리 부서원들도 하나둘 오랜만에 칼퇴근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에 남겨진 건 나 하나..
다른 팀의 부서원들도 내일이 토요일이다 보니 하나 둘 퇴근하고 사무실에 남겨진 건 나를 포함해 체 5명이 되지 않았다.
“아우..나도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그런 가 피곤하네..그만 퇴근해볼까..”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누구지...’
잠시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고,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아내였다.
“잘 지냈어..?”
“으..은주니?”
“어...벌써 내 목소리도 까먹은 거야?”
“그럴 리가...”
“나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서울 왔다가 이제 가려는 길인데..오빠 회사 앞인데 잠깐 얼굴 좀 볼래? 바쁘면 그냥 가고..”
“아니..안 바빠. 기다려”
“응..‘
난 전화를 끊고 정말 이렇게 빠르게 퇴근 준비를 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거의 빛의 속도로 책상을 정리하고 서둘러 회사 앞으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아내의 모습.. 그런데 어딘가 달라 보인다.
아내의 머리가 짧아져 있었다. 짧은 단발의 연갈색으로 염색한 아내의 모습..
오래 전 내가 처음으로 아내를 만났을 때 그때 그 모습으로 아내는 돌아가 있었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린다. 얼마 만에 아내에게 이런 느낌을 받아보는 것일까..
“계속 멍하니 그렇게 서 있을 거야? 나 다리 아파..오늘 많이 돌아다녀서..”
“어? 어어..미안..”
난 아내의 말을 듣고 비로소 멍하게 있다 정신이 들어 아내의 손을 잡고 회사 근처의 카페로 데려갔다.
“생각보다 얼굴색이 좋네. 내심 나 때문에 속앓이 해서 얼굴 많이 상하진 않았나 걱정했는데..괜히 걱정했네..”
“아..아니야..그냥 뭐..그렇지..”
“그 사람이 잘해 줘? 그래서 그런 거 아냐? 나랑 있을 때보다 얼굴이 더 좋아 보이는걸..”
“아니야 정말 그런 거 아니야 은주야..”
“뭐..그렇게 심하게 부정할 필요 없어. 그냥 오늘은 진짜 오랜만에 오빠 얼굴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뭐 따지려고 온 것도 아니고..볼 일도 있어서 왔다가 오빠 생각도 나고..이러다 오빠 얼굴 까먹는 거 아닌가 걱정도 되고 해서 잠깐 보고 가려고..”
“그럼 다시 가는 거야.. 오늘..?”
“어..내려가 봐야지..”
“다시..안 올라올 거니..?”
“그 질문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오빠 마음이 정리 되었으면 내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게.. 근데 그게 아니라면 더 이상 오빠에게 내 자리가 없다면 내가 다시 돌아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그...그런 거구나..”
“아직 마음의 정리가 덜 된 거 같네..오빠 얼굴 보니까..”
너무나 날 잘 알고 있는 사람..10년을 넘게 같이 있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내 얼굴만 봐도..내 눈빛만 봐도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니까..
아내의 말대로 난 지금.. 아직까지.. 아내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줬지만 내 마음을 정리를 하지 못 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아니..어리석게도 두 사람 다 붙잡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망상을 아직까지 하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게도 두 사람을 다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세상에 사랑은 하나 밖에 없다고.. 어떻게 양 다리를 걸치냐며..
진정한 사랑은 한 명만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거라고 그렇게 친구들을 손가락질하고 욕하며 순애보인 척 하던 내가..
이제는 그 친구들과 다를 바 없는 오히려 더 심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둘 다 놓치기 싫은 거야..? 이기적이다...욕심쟁이고..아휴...나도 바보 같다. 왜 이런 오빠가 싫지 않지..밉지 않지..오빠를 놓아 버리면 그만인데..왜 그게 안 되지..”
아내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내의 모습인데..
난 다시 아내를 울리고 말았다.
“나 그만 갈게..오빠 만나서 이런 우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또 울어 버렸네. 나 잡지도 말고 따라 나오지도 마..그냥 오늘은 이렇게 갈게..오빠가 나 잡으면 나 너무 힘들 거 같아..오빠한테 매달려서 울고..제발 돌아와 주면 안 되냐고 그렇게 애원할 거 같아. 나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그러니 나오지 마..”
아내가 일어선다. 불과 몇 분 아내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는데..
카페 문을 열고 아내가 나가고 있다.
또 다시 또 다시 그렇게 멀어진다. 몇 달 만에 겨우 본 아내의 얼굴인데..
지금 보고 또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점점 멀어져 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난 그저 지켜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아내의 선택이니까..
그게 내 선택이니까..
언제나 집에 오면 환한 웃음으로 날 반겨주던 아내는 이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적,
그 고요한 분위기만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그리고 어느새 세 달..
그래도 아직까지 내 곁에 있고 싶다고 하던 아내는 세 달이 넘게 연락 한 통 없었다.
당장이라도 아내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지만,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난 참고 또 참았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한 그 말들 때문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냐고.. 아내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그 말.. 그 말까지 안 들어줄 수는 없었다.
이제는 정희씨 밖에 연락이 오지 않는 휴대폰.. 난 휴대폰을 무심히 들여다본다.
수 없이 남아있는 지영과 정희씨의 메시지들.. 유감스럽게도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아내에게 내가 보낸 메시지는 1년이 넘은 것이다.
들어갈 때 복숭아를 사가지고 들어간다는 메시지..그게 내가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 후 남겨진 수많은 메시지는 지영과 정희씨와 주고받은 것들이었다.
오늘은 어떤 자세가 좋았니..다음번에 만나면 걸어 다니기 힘들게 만들어 주겠다는 그런 저질스러운 표현들이 남아 있는 지영과의 메시지..
이렇게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쉽다고 같이 살면 너무 좋을 거 같다고.. 이런 말 진짜 잘 안 하는데 오랜만에 너무 설레어서 꼭 해야겠다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절절한 사랑을 하는 커플들처럼 사랑의 밀어가 담겨있는 정희씨와의 메시지..
아내는 이것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얼마나 비참했을까..
아내의 그 슬픔이 그 분노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떤 심정이었을지..
난 차마 그걸 조금이라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아내의 반응.. 오히려 더 화내고 더 슬퍼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아내의 반응은 최대한 자신의 기분을 억제하며 나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날 아직 사랑해서일까..아직까진 날 놓치고 싶지 않아서..?
모르겠다. 정확히 아내가 어떤 마음인지는..
하지만 중요한 건 너무나 서글픈 건.. 아내가 떨어져 있는 그 시간동안 아내에 대한 미안함은 점점 더 커져갔지만, 아내에 대한 애틋함..그리움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아내를 보고 싶다는 그리움, 그리고 외로움으로 인해 어딘가 기댈 곳이 필요했고, 어느새 난 정희씨를 찾아가는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집에 귀가하는 시간은 항상 12시가 넘는 늦은 시간.. 혹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정희씨의 집에서 바로 출근을 하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정희씨를 보면 볼수록..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 살을 맞대고 있는 날이 많아질수록 정희씨에 대한 나의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갔다.
물론 아직까지 나 역시 아내를 향한 내 마음.. 그 끈을 놓아버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흐음.. 이 넥타이가 조금 더 나은 거 같아”
“그래? 난 이게 더 나은 거 같은데..”
“아니래두 이게 조금 더 나아..”
“알았어~ 그걸로 하자. 이러다 출근 늦겠다”
“어머! 내 정신 좀 봐..시간이 벌써..얼른 출근해”
“어 알았어~ 있다 봐”
정희씨의 입에 살며시 뽀뽀를 하고 난 집을 나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창문을 내리고 이층을 바라보니 정희씨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다.
“잘 갔다 와”
“알았어. 창문 닫아. 추워. 날씨가 쌀쌀하다”
“알았어..”
이제는 아침이면 날씨가 꽤나 쌀쌀한 12월 초의 날씨.. 어서 들어가라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희씨는 내가 갈 때까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고집이 센 여자..내가 먼저 어서 가야 창문을 닫고 들어가겠지..
난 마지막으로 정희씨에게 손을 한 번 더 흔들어 주고 차를 출발했다.
백미러로 보이는 서서히 멀어지는 정희씨의 얼굴..
난 그런 정희씨의 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고,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김과장, 이번 단기 프로젝트 성과가 아주 대단하던데~ 사장님 칭찬이 아주 대단하셔. 이렇게만 하면 내년 승진 노려볼 수도 있겠는데?”
“부장님도 참..올해 제가 과장으로 승진했는데 어떻게 벌써 부장을..”
“아~ 이 사람이..우리 사장님 스타일 몰라? 특진 있잖아. 특진. 자네 동기는 벌써 올해 부장을 달았는데 자네라고 부장 승진 못할 거 뭐 있어? 지금처럼만 하면 내가 사장님께 아주 잘 말씀드려서 꼭 부장 달 수 있게 힘 써줄 테니까 지금처럼만 하라고 응?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알겠습니다..”
부장은 아침부터 입이 귀에 걸려서 싱글벙글해선 사장실로 들어갔다.
하긴..이번에 내가 진행한 프로젝트는 내가 입사한 이래로 처음으로 주도해서 제대로 성공한 일이었고, 더군다나 내 동기이자 최부장의 라이벌인 영업2팀의 이부장을 제치고 최종적으로 따낸 프로젝트였다.
거기에 최근 이부장의 기세가 하늘을 뚫을 듯해서 번번이 최부장이 고배를 마시고 있었으니..
최부장의 입이 귀에 걸릴 수밖에..
“과장님, 정말 이러다 내년이면 부장 진급하시겠는데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흐흐..”
“부장은 무슨...미리 김칫국 마시지 말어..난 생각도 안 하고 있으니까..”
“에이~~ 그게 무슨 소리세요. 우리 최부장님이 사장님 오른팔이잖아요. 요즘 왼팔인 이부장님이 힘을 좀 쓰고 있었지만..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사장님이 가장 아끼시는 게 최부장님 아닙니까~ 그런 최부장님이 힘써주신다면 승진은 말 안 해도 따 놓은 당상이죠..!”
“뭐..모르겠다 나는...”
“오늘 부장님이 기분 좋다고 한 턱 쏘신다고 하는데 가실거죠?”
“어..가야지. 안 가면 또 무슨 소리 들으려고..”
“흐흐..잘 생각하셨어요~ 이제 과장님도 슬슬 내년 부장 진급하시고 그 위도 바라보고 계시면 싫더라도 이런 자리는 꼭 참석하셔야죠..”
약삭빠르고 능구렁이 같은 녀석, 정말 회사 사람이 아니라면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정현이란 이 녀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 가식적인 미소..말투..
그때 사장실 문이 열리며 아까보다 더 활짝 웃는 얼굴로 최부장이 나에게 다가온다.
“아~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오늘 회식은 다음에 하는 걸로 하지. 사장님이 나랑 따로 한 잔 하고 싶다고 하시네...흐흐..이거 정말 미안해”
“아이고, 우리 부장님~!! 오늘 드디어 사장님이랑 독대하시는 겁니까? 이부장도 못한 그 독대를..!!”
“아~ 짜식..또 또 오바 한다.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말고~ 어쨌든 회식은 다음에 하는 걸로 하자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충성~!!”
아..정말 밥맛없는 녀석.. 난 오늘 회식이 취소가 돼서 오히려 저 밥맛없는 자식이 부장 옆에서 아양을 떠는 꼴을 안 봐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장님, 오늘 바쁘십니까? 괜찮으시면 오늘 술이나 한 잔..
거래처 박부장의 연락이었다. 지영과의 일이 있고난 후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지만, 다른 거래처와의 일이나 프로젝트로 바빠서 거의 들리지 못한 지 3개월이 넘어가고 있어 실로 오랜만의 연락이었다. 더군다나 회사 일이 아닌 개인적으로 이렇게 연락이 온 건 처음이라 박부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오늘 잡혀 있던 회식이 취소 돼서 마치고 그리 바쁜 일도 없었고..
“오랜만입니다 과장님, 요즘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괜히 이렇게 제가 불러낸 건 아닌지..”
“아닙니다. 이번에 맡았던 프로젝트도 끝나고 해서..이제는 좀 시간이 여유가 있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구요..자 들어가시죠”
“네..”
우리는 지영과 나, 박부장이 함께 왔던 몇 달 전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그 날의 기억.. 쓴 웃음이 나온다. 그 날 지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지금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을 수도 있었다.
그 한 번의 선택.. 돌이킬 수 없는 그 선택이 많은 것을 바꾸어 버렸다.
한 번도 일탈이라는 걸 해본 적 없던 나에게..일탈을 가르쳐준 그녀..
지금 와서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겠지만..
박부장과 난 일식집에 들어온 지 1시간이 넘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저 술잔을 기울였다.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어떤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박부장의 얼굴도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나와는 다른 그런 고민이겠지만..
어느새 들어온 지 1시간 반, 정적을 먼저 깬 건 박부장이었고 그 입에선 뜻밖의 인물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과장님”
“네..”
“지영이 기억하시죠?”
“아..그럼요..기억하죠..”
“저..지영이랑 잤습니다. 사실 사장뿐만 아니라 회사 유부남 중에서 지영이랑 잠자리를 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겠죠. 단지 한 번 자고 끝이었나..아니면 계속해서 관계를 가졌나 차이일 뿐이지..”
“네에......”
갑자기 지영과의 잠자리를 털어 놓다니.. 그것도 지금이 아닌 오래 전 일을.. 난 박부장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혹시 과장님도 지영이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는지 모르겠지만..뭐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그 아이 참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런 매력이라고 해야 할까..그런 게 있었죠”
뭐..지영이와 난 그저 잠자리 파트너 그 이상 그 이하의 관계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영이 그 나이 또래에서 풍기기 힘든 그런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히 사실이었다.
“지영이는 끊임없이 잠자리 파트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선을 그었지만 불행히도 전 점점 지영이에게 빠져들었습니다. 지영이가 다른 남자와도 그러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사장과 그런 관계를 들키고 난 후 회사에서 쫓겨나고 나서도 말이죠. 지영인 이런 나를 왜 좋아하냐며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며 매몰차게 날 대했지만..어디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되나요.. 쉽게 정리가 안 되더라구요..”
“네..그렇죠...사람 마음이란 게..”
어찌 박부장의 그 마음을 모를 수 있을까.. 난 그 마음을 지금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박부장이 어떤 고충을 겪었을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포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계속해서 매달리고 또 매달렸죠. 구차하게 보일 정도로..이혼 하고 너에게로 가겠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지영이는 그런 나에게 오히려 정이 떨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저에게 지친 지영이는 연락처도 바꿔 버리고 잠수를 타버리더군요. 마지막 연락이 9월이었으니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너무나 보고 싶고.. 한 번만 더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데..”
9월..9월은 지영이 나에게 다시 연락을 해 온 그때였다. 바람피기 좋은 날이라며..
그동안 그럼 박부장과의 문제 때문에 연락을 하지 못하다 완전히 박부장과의 관계가 끝이 났다고 판단해서 나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었던가..그리고 다시 나와 잘해 보기 위해서..
물론 다시 만난 지영을 난 결국 밀어내버렸지만..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난 단숨에 연거푸 세 잔을 들이켰다.
입 안 가득 쓴 맛이 올라온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과연 잘못한 사람은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다들 힘들어하고 서로 힘들게 살아갈까..단지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건 서로의 감정에 충실했다는 그것 하나뿐인데..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우리 중에 옳은 선택을 한 건 지영 하나 뿐인건가..
그녀처럼 끝끝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그렇게 살았어야 이렇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까..
아직도 난 뭐가 옳은지 뭐가 잘못된 것인지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정말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인지..
“저 이혼했습니다..”
“부장님...!”
“네..뭐..제가 또라이 같은 놈이죠..워낙 회사 내에서 지영씨 스캔들이 크게 터져서 회사 내에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었죠. 그런데 우리 순진하고 불쌍한 와이프.. 한 번은 그럴 수 있다며..남자들 다 결혼하고 한 번은 바람피고 그런다더라면서 이해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제 스스로 용서를 못하겠더라구요. 더군다나 와이프가 그런 말을 하는데도 지영이 얼굴이 아른거리는데 어떻게 제가 평생 와이프 얼굴을 보고 살 수 있겠습니까.. 전 그런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와이프에게 이혼해 달라 말했습니다. 이 죄는 내가 평생 가지고 살겠다고.. 와이프는 조금만 더 생각해보라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변할 리 없었고..지난주에 이혼 도장을 찍었습니다..”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 상황과 너무나 비슷했기에..
나도 저런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함에..
“힘...내세요..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네.. 말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 후 말없이 한참을 더 몇 시간동안 술을 기울이고 완전히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가 되었을 때 자리를 파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과장님두요.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누군가에게 털어놓으니까 마음이 속 시원하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한 번도 보지 못한 박부장의 솔직한 모습..그리고 힘이 축 빠진 어깨를 보고 처음으로 그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미래의 내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박부장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난 곧바로 택시를 타고 정희씨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도저히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잘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오늘 회식이라 그랬나?”
“어? 어어..좀 마셨어..”
“아휴~ 술 냄새..”
난 정희씨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무언가 심적인 편안함과 함께 취기가 몰려오자 잠이 쏟아진다.
“안 씻고 잘 거야?”
“어어..그냥 잘래..”
“씻구 자~!!!”
정희씨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진다.
온 몸에 쏟아지는 나른한 느낌과 함께 난 그대로 잠에 빠져 들었다.
기절하듯 얼마나 오래 잠든 것일까, 타는 듯한 갈증에 눈을 떠 옆을 보니
정희씨가 내 옆에서 새록새록 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술 마시고 오는 날이면 침대 옆에 올려 져 있는 정희씨의 꿀물..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식어 있는 꿀물을 마시니 어느 정도 갈증이 해소가 되었고, 조금 정신이 들어 내 몸을 보니 어느새 잠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고 내 몸에선 술 냄새가 아닌 향긋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아마도 자는 동안 정희씨가 내 몸을 따뜻한 수건으로 닦아준 것이겠지..
예전에도 이런 기억이 몇 번 있었으니까..
난 잠들어 있는 정희씨의 사랑스런 얼굴을 몇 번 쓰다듬어 주고 볼에 가볍게 뽀뽀를 해주었다.
“으음..일어났어요?”
“어..내가 깨웠나..미안..”
“아니..괜찮아요..”
아직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정희씨가 손을 뻗어 내 품에 꼬옥 안겨온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정희씨의 온기..새벽녘이라 그런지 정희씨의 품이 오늘따라 더욱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욕구가 샘솟는다.
난 거침없이 정희씨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고, 정희씨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나를 살짝 밀쳐낸다.
“양치까지는 못 했단 말이에요..으으...술 냄새..”
“아..미안해요..”
“뭘 또 미안해..장난친 건데..”
정희씨가 사랑스런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내 입술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부드러운 정희씨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와 내 혀와 엉키기 시작했다.
키스만으로 잔뜩 발기해버린 내 물건.. 난 서둘러 정희씨의 옷을 벗겼다.
“하아..왜 이렇게 급해요..천천히...”
“싫어요..오늘은 오늘은 안 그러고 싶어..”
“알았어요..마음대로...”
난 거의 정희씨의 옷을 찢을 듯이 거칠게 벗겨내고는 정희씨의 마지막 남은 팬티, 그 팬티를 벗기지도 않고 옆으로 살짝 제치고 아직 완전히 젖어있지 않은 그 곳으로 내 물건을 밀어 넣었다.
“하아..조..조금만 살살..”
정희씨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그제야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며 내가 너무 거칠게 정희씨를 대했구나란 생각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아..미안..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너무 흥분해서..”
“아니에요. 그런 민수씨의 모습도 좋아..근데 조금만 살살..”
언제 인상을 찡그렸냐는 듯이 정희씨가 다시 환하게 미소 짓는다. 그리고 그 미소에 정희씨에 대한 미안함이란 감정은 눈 녹듯이 사그라들었고, 난 정희씨의 팬티를 벗겨내고 조심스럽게 그 곳으로 내 물건을 다시 밀어 넣었다.
“하아...하으음...”
정희씨의 가냘픈 신음이 흘러나온다.
내 물건은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정희씨의 그 곳으로 들어갔다 나오고 있었고, 조금씩 찔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분홍색 속살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하아...하으윽...!”
어느새 완전히 정희씨의 안으로 들어간 내 물건.. 정희씨가 나를 와락 끌어안는다.
“하아..좋아요..민수씨가 너무 좋아..”
정희씨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와 닿는다. 이어지는 부드러운 키스..
그와 함께 난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하아..하아....”
정희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달뜬 신음소리..그 신음소리에 맞춰 우리의 몸은 하나가 되어 뜨겁게 새벽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아..하아..좋아...좋아요..”
“나도..나도 정희씨가 좋아..”
우리는 서로의 몸에 뜨겁게 키스를 퍼부으며, 평소보다 더욱 더 거칠게 더욱 더 뜨겁게 서로의 몸을 탐했다.
“나..이제 나올 거 같아..이제..”
“안에 해줘요..그러고 싶어..”
“하아..하아..알았어요..”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달아 가는 정희씨와 나, 밖은 깜깜하던 밤에서 푸르스름한 새벽을 지나 조금씩 해가 뜨려는지 밝아 오고 있었고 그와 함께 난 정희씨의 몸 안 깊숙이 잔뜩 사정을 해버렸다.
실로 오랜만에 하는 격한 섹스.. 이런 섹스는 지영과 한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었다.
몸이 부숴 질 것 같은 그런 섹스..
섹스 후에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지쳐 버렸고, 서로를 안고 격한 숨소리만을 내뱉었다.
“하아..하아..너무 좋았어..오늘 진짜 남자 같았던 거 알아요?”
“하하..그럼 지금까진 여자 같았어요?”
“아니..그런 말은 아니고..어쨌든 너무 좋았어요”
“나도..나도 좋았어요..”
우린 다시 한 번 부드러운 입맞춤을 나누었고, 30분이라도 눈을 부치기 위해 난 정희씨의 품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잠깐의 숙면, 잠깐 잠을 잔다는 것이 어째 싸한 느낌에 눈이 스르륵 떠졌고,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이 고작 20분 남아 있었다.
난 정신 나간 놈처럼 서둘러 옷을 입고 대충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뛰어나갔고, 정희씨는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하고 내가 나가는 걸 보고 침대에 누워 잘 갔다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정희씨의 집에서 나와 난 곧장 대로변으로 달려갔고, 다행히 한 번에 택시가 잡혀서 출근 시간 1분 전에 난 겨우겨우 회사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 도착했는데 왠 일로 부장이 보이지 않는다.
“정현아, 부장님은?”
“아직 안 오셨어요. 어쩐 일로 부장님이 지각을 다 하시네요. 과장님도 지각은 안 하셨는데 겨우 출근시간 맞춰서 오시고 별 일이 다 있네요..흐흐.. 아~! 그러고보니 아직 사장님도 안 오신 거 같은데...아무래도 두 분이서 어제 너무 과음을 하셨나 보네요. 그런데 과장님도 어제 술 드셨어요? 아직 술 냄새가..”
“아..난 어제 저 거래처 박부장이랑..”
“에이~ 부장님 뭐에요~ 그런 자리라면 저도 부르시지..저 이번 주 내내 술 안마시고 어제 회식만 기다려서 술 엄청 고팠는데..아쉽네..”
“그래..미안..다음엔 부를게”
“미안하긴요. 헤헤..말이 그렇다는 거죠. 어! 부장님 나오셨습니까!”
“어..그래”
“나오셨어요”
“어..김과장, 아오 골이야..오늘 아침 미팅은 그냥 건너뛰고, 정현아 너 가서 술 깨는 약 좀 사와라..아주 골이...”
“어제 많이 드셨어요?”
“말도 마라..거의 4차인지 5차인지..아무튼 새벽 5시에 집에 들어간 거 같아..”
“헐..엄청 드셨네요. 알겠습니다.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부장은 정말 술을 어제 엄청 많이 마신건지,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하던 아침 미팅도 하지 않고 사장 오면 깨우라는 말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잠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부장의 잔소리 없이 편하고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 날 인거 같은 기분..
그 기분은 틀리지 않았고, 부장은 하루 종일 골골대며 잔소리 하나 없이 멍하게 앉아 있다 퇴근시간이 되자 칼같이 퇴근해 버렸고 덕분에 우리 부서원들도 하나둘 오랜만에 칼퇴근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에 남겨진 건 나 하나..
다른 팀의 부서원들도 내일이 토요일이다 보니 하나 둘 퇴근하고 사무실에 남겨진 건 나를 포함해 체 5명이 되지 않았다.
“아우..나도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그런 가 피곤하네..그만 퇴근해볼까..”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누구지...’
잠시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고,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아내였다.
“잘 지냈어..?”
“으..은주니?”
“어...벌써 내 목소리도 까먹은 거야?”
“그럴 리가...”
“나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서울 왔다가 이제 가려는 길인데..오빠 회사 앞인데 잠깐 얼굴 좀 볼래? 바쁘면 그냥 가고..”
“아니..안 바빠. 기다려”
“응..‘
난 전화를 끊고 정말 이렇게 빠르게 퇴근 준비를 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거의 빛의 속도로 책상을 정리하고 서둘러 회사 앞으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아내의 모습.. 그런데 어딘가 달라 보인다.
아내의 머리가 짧아져 있었다. 짧은 단발의 연갈색으로 염색한 아내의 모습..
오래 전 내가 처음으로 아내를 만났을 때 그때 그 모습으로 아내는 돌아가 있었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린다. 얼마 만에 아내에게 이런 느낌을 받아보는 것일까..
“계속 멍하니 그렇게 서 있을 거야? 나 다리 아파..오늘 많이 돌아다녀서..”
“어? 어어..미안..”
난 아내의 말을 듣고 비로소 멍하게 있다 정신이 들어 아내의 손을 잡고 회사 근처의 카페로 데려갔다.
“생각보다 얼굴색이 좋네. 내심 나 때문에 속앓이 해서 얼굴 많이 상하진 않았나 걱정했는데..괜히 걱정했네..”
“아..아니야..그냥 뭐..그렇지..”
“그 사람이 잘해 줘? 그래서 그런 거 아냐? 나랑 있을 때보다 얼굴이 더 좋아 보이는걸..”
“아니야 정말 그런 거 아니야 은주야..”
“뭐..그렇게 심하게 부정할 필요 없어. 그냥 오늘은 진짜 오랜만에 오빠 얼굴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뭐 따지려고 온 것도 아니고..볼 일도 있어서 왔다가 오빠 생각도 나고..이러다 오빠 얼굴 까먹는 거 아닌가 걱정도 되고 해서 잠깐 보고 가려고..”
“그럼 다시 가는 거야.. 오늘..?”
“어..내려가 봐야지..”
“다시..안 올라올 거니..?”
“그 질문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오빠 마음이 정리 되었으면 내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게.. 근데 그게 아니라면 더 이상 오빠에게 내 자리가 없다면 내가 다시 돌아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그...그런 거구나..”
“아직 마음의 정리가 덜 된 거 같네..오빠 얼굴 보니까..”
너무나 날 잘 알고 있는 사람..10년을 넘게 같이 있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내 얼굴만 봐도..내 눈빛만 봐도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니까..
아내의 말대로 난 지금.. 아직까지.. 아내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줬지만 내 마음을 정리를 하지 못 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아니..어리석게도 두 사람 다 붙잡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망상을 아직까지 하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게도 두 사람을 다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세상에 사랑은 하나 밖에 없다고.. 어떻게 양 다리를 걸치냐며..
진정한 사랑은 한 명만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거라고 그렇게 친구들을 손가락질하고 욕하며 순애보인 척 하던 내가..
이제는 그 친구들과 다를 바 없는 오히려 더 심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둘 다 놓치기 싫은 거야..? 이기적이다...욕심쟁이고..아휴...나도 바보 같다. 왜 이런 오빠가 싫지 않지..밉지 않지..오빠를 놓아 버리면 그만인데..왜 그게 안 되지..”
아내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내의 모습인데..
난 다시 아내를 울리고 말았다.
“나 그만 갈게..오빠 만나서 이런 우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또 울어 버렸네. 나 잡지도 말고 따라 나오지도 마..그냥 오늘은 이렇게 갈게..오빠가 나 잡으면 나 너무 힘들 거 같아..오빠한테 매달려서 울고..제발 돌아와 주면 안 되냐고 그렇게 애원할 거 같아. 나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그러니 나오지 마..”
아내가 일어선다. 불과 몇 분 아내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는데..
카페 문을 열고 아내가 나가고 있다.
또 다시 또 다시 그렇게 멀어진다. 몇 달 만에 겨우 본 아내의 얼굴인데..
지금 보고 또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점점 멀어져 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난 그저 지켜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아내의 선택이니까..
그게 내 선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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