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이 얼얼하다. 얼마나 내 손으로 내 뺨을 때린 걸까..
비릿한 피 맛도 나는걸 보니 입 안이 터진 것일까.. 아무렴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느새 새벽 6시, 날이 밝아온다. 까맣던 어둠이 지나가고 조금씩 푸르스름한 하늘로 세상이 바뀌어간다.
난 한숨도 자지 못하고 쇼파에 멍하니 그대로 앉아 날을 지새웠다.
이틀 동안 잠을 잔 게 거의 두 시간이 될까 하다 보니 정신이 아득해져 온다.
누군가 나를 옆에서 툭 하고 건드리면 그대로 쓰러질 정도로..
이런 상태로 과연 회사는 출근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감정은 감정, 현실은 현실.. 난 부서질 거 같은 몸을 겨우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볼품없기 그지없었다.
퀭한 눈, 입술껍질이 다 일어나서 부르튼 입술, 이틀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해서 얼굴에 잔뜩 올라와 있는 뾰루지까지..
“몰골이 말이 아니구만....”
쓴 웃음이 나온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기에..
대충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얼굴에 물만 끼얹고 면도도 하지 않고 난 욕실에서 나와 조심히 안방 문을 열어 보았다.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아내의 모습.. 난 조심스레 아내가 깨지 않게 침대에 살며시 앉아 새우처럼 불편하게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고 있는 아내의 몸을 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제대로 베개에 눕히고 위해 돌리는 순간 아내의 얼굴에 묻어있는 눈물 자국을 보았다. 자면서도 울었던 것일까..아니면 새벽에 깨어나서 운 것일까..
마음이 저릿하다.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내 가슴을 면도날로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난 차마 출근한다고 아내를 깨울 수 없었고, 편하게 자도록 아내를 내버려두고 회사에 출근했다. 그리고 출근하자마자 부장에게 쉬고 싶다고 연차를 냈다.
부장은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많이 안 좋으면 하루 정도 더 쉬어도 된다고 얼른 들어가라고 말했다.
아마도 부장이 날 그렇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건 처음이 아니었을까.. 그 정도로 내 몰골이 말도 안 되게 형편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부장의 허락을 받자마자 난 곧바로 가방을 챙겨 들었다. 주변의 다른 부서원들은 하나같이 어서 들어가라고 많이 힘들어 보인다는 말을 한 마디씩 했고, 난 듣는 둥 마는 둥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출근한 지 한 시간 만에 그렇게 회사를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조용한 집안, 아직 아내는 잠들어있는지 집 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혹시나 난 아내가 깰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구두를 벗고 들어와 조심스런 걸음으로 안방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순간 불안한 느낌과 함께 난 욕실부터 온 방문을 다 열어 보았다. 하지만 아내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과 함께 그 순간 식탁 위에 하나의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필체, 아내의 글씨였다.
-당분간 친정집 가서 쉬고 올게. 가서 아무 말 하지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은 말고..휴대폰 꺼놓을 거니까 연락 하지 마. 그리고 내 말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이 정리가 될 때까지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잖아? 아직까지 오빠를 놓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너무 걱정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그리고 조금 생각해봤는데 사람 맘이라는 게 마음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거 순간 생각이 들더라. 만약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나도 태현 오빠를 버리고 오빠를 택하진 않았겠지..오빠가 지금 그 정희라는 여자에게 마음 가는 거 어쩌면 어쩔 수 없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물론 아직도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최소한 어떤 생각으로 오빠가 그 여자에게 빠진 것일까 뭐 그런 걸 나 혼자 최소한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을 했다고 할까..아무튼 나 없어도 잘 지내고..그 여자 만나는 거에 대해서 뭐라고 하진 않을게..오빠가 그 여자를 정리를 하든 계속 만나든 어떤 상황이더라도 그 여자를 한 번은 더 만나야 할 테니까..그리고 그건 오빠 선택이겠지. 우리가 부부라고 하더라도 내가 오빠의 선택까지 간섭할 순 없을 테니까..
메모는 그렇게 끝나 있었고, 난 메모를 확인하자마자 미친 듯이 뛰어나갔다. 분명 내가 출근할 때까지 아내는 자고 있었고, 내가 출근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고작 두 시간이 이제 될까 말까였다.
그렇다면 아내가 아직 집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았을 그런 가능성도 있었다.
난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슬리퍼를 신고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나갔다. 하지만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벌써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를 탄 것일까..
서둘러 다시 아파트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에 시동을 걸고 난 곧장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제발 늦지 않기를 바라며..떠나기 전에 잡을 수 있기를 바라며..
가는 동안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메모의 말대로 아내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타들어가는 마음.. 하지만 그런 나의 마음을 모르는지 원망스럽게도 오늘따라 신호는 왜 이렇게 걸리는지.. 차는 왜 이리 막히는지 평소보다 이십분이 더 걸려서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내는 벌써 출발했을까..
난 해남 행 버스가 출발하는 곳으로 미친 듯이 사람들 속에서 아내를 찾았다.
혹시라도 아내가 아직 있을까봐.. 내가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하지만 그런 나의 바람과 달리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역시나 이미 가버린 것일까..내가 늦은 것일까..
“하아.....”
답답함에 깊은 한숨이 튀어 나온다. 그렇게 늦지 않기를 바랐는데 결국 늦었다니..
그 순간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손이 부드럽게 내 손을 잡는다.
누구지...?
고개를 들어보니 놀랍게도 아내가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은주야...”
“왔네..혹시나 올까봐 기다렸는데..”
“너...”
아내를 보자마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내의 모습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는 게 대체 얼마만이란 말인가..
“울지 마.. 나 그리고 이제 가 봐야 해..”
“무슨 소리야. 기다렸다며..”
“그런 메모 써 놓고 이런 말 하면 진짜 웃긴 거 아는데 그냥 가기 전에 오빠 얼굴 한 번만 더 보고 갔으면 싶어서 그래서 기다린거야. 버스 시간 10분밖에 안 남아서 이제 들어가려고 했는데 마침 딱 오네..”
“은주야. 잠깐만..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러지마..응?”
“오빠...”
“어....?”
“나도 여자들이 남자들한테 뭘 잘못한지 알아? 이렇게 묻는 거 정말 싫어하는데..지금은 묻고 싶네. 오빠가 뭘 잘못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여자에게 사랑했다고 말한 거 그거 거짓이었던 거야? 오빠 그렇게 쉽게 사랑한다는 말 하는 사람 아니잖아.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나 처음 사귈 때 오빠가 말했잖아. 난 쉽게 사랑한다는 말 하는 사람 아니라고. 그래서 너한테도 사랑한다는 말 정말 아껴서 할 거라고..그렇게 나한테 말했잖아. 기억 안 나?”
“어....기억 나..”
기억이 안 날 리가 있나. 아주 선명하게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내의 말대로 난 사랑해 라는 말은 정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는 마음을 신조로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 맘은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사랑해 라는 말을 써본 건 내 인생에서 정말 몇 안 되는 순간이었고..
그리고 얼마 전 정희씨에게 사랑해 라는 말을 한 사실.. 정희씨의 앞에서..그리고 정희씨와의 카톡에서도 그 말을 주고받은 걸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란 놈은...끝까지 어쩔 수 없구나..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돼, 안 돼 할 수 없는 거잖아. 정말 오빠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오빠의 마음대로 그렇게 움직이진 않았겠지..사랑이라는 거 한 번 빠져들면 나올 수 없는 그런 거니까..그래서 시간을 좀 갖자고..나에게도 오빠에게도 생각할 시간이란 게 필요할 테니까..”
“그러다 내가 널 놓아버리면....”
진심이 나와 버렸다. 정희씨를 좋아하는 내 맘도 이미 너무나 커져 버렸기에..
해서는 안 될 말을 다시 아내의 앞에서 해버렸다.
그런데 아내는 내 말을 듣고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오히려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게 오빠의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지. 오빠를 놓치고 싶지 않지만..오빠가 너무나 내 옆에 있어줬으면 싶지만..그렇다면..받아 들여야지...”
환하게 웃고 있는 아내의 뺨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아내의 손이 내 손을 빠져 나간다.
지금 이 손을 놓으면 영영 다시는 아내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아내가 점점 나에게서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데..
나는 아내에게 다가가 붙잡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느새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며 버스를 올라타는 아내의 모습..
이게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지금 내가 다시 한 번 붙잡는다면 아내가 다시 돌아올 지도 모르는데..
선택, 붙잡을 수 없는 선택.. 난 그 선택을 해버렸다.
거짓된 마음으로 아내를 붙잡는다면 더욱더 힘들어질 걸 알았기에..
나에게서 멀어지는 아내를 놓아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돌아온 집 안..분명 아침까지 있던 아내였는데 어디에도 더 이상 아내가 없다.
침대에는 아직 아내의 체취,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아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거짓말처럼 신기루처럼 아내가 사라졌다.
믿겨지지 않는 현실..아니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내 손으로 붙잡지 못한 아내인데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
아내가 떠나고 혼자 남겨졌다는 이 순간이..
웃음이 튀어 나온다. 헛웃음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아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까...?
아니면 아내의 말처럼 난 어쩔 수 없이 정희씨를 본 그 순간부터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확실한 건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정희씨에게 빠져들지 않았을 거란 확신은 없다는 것이다. 아니..되돌린다고 해도 빠져들겠지..그 사람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시간..
난 조금의 손도 까딱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그저 멍하니 하루 종일 쇼파에 앉아 있었다.
완전한 정적을 느끼며..
어느새 어두워져 가는 주변..불을 켜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사방에 어둠이 밀려오고 집 안이 너무나 깜깜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싫지 않다. 뭔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
하루 종일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그런 기분이다.
고개를 흘깃 돌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2시가 지나있다. 이렇게 하루가 가버린 것인가..
내 연차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날아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문득 정희씨가 떠오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척 하려 노력해보았지만 역시나 힘들고 슬픈 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지금 누구에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떠오른 게 정희씨였다.
나란 인간은 정말...
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정희씨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망설이며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결국 못 참고 정희씨에게 연락을 해버렸다.
고작 하루만에..내가 직접 설명해 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놓고..
난 지금 아무 것도 설명해 줄 수 없는데..참지 못하고 그렇게 연락을 해버리고 말았다.
“민수씨?”
“네...”
“벌써 생각할 시간 끝난 거에요? 어제는 엄청 걱정스런 목소리로 기다리라 그러기에 난 빨라도 일주일..어쩌면 한 달은 못 볼지도 모를 거라 걱정하고 있었는데 뭐에요..”
정희씨의 목소리가 장난스럽다. 고작 하루도 못 참고 연락할 거면서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한 거냐고..
난 무슨 말을 해야 할까..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지금 너무 위로를 받고 싶은데..정희씨 앞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면 정희씨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나..그리로 지금 가도 돼요?”
“지금이요...? 늦었는데...난 괜찮은데..민수씨 괜찮아요?”
“괜찮아요. 지금 그리로 갈게요...”
“알았어요..”
난 정희씨와의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정희씨의 집으로 출발했다. 이제는 몇 번을 가서 익숙한 그 곳으로..
차에서 내리는데 정희씨가 집 앞에 나와 있다. 그 날의 귀여운 잠옷과 달리 예쁘장한 원피스형 잠옷을 입고..
“왜 기다렸어요. 내가 내리면 연락할 텐데..”
“걱정되니 그렇죠...”
정희씨가 내 품에 안겨온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정희씨의 체온..
얼마나 날 걱정을 했을까.. 갑자기 그렇게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선 무작정 기다려 달라 했으니..
그리곤 다시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뜬금없이 찾아온다고 했으니..
정희씨는 한참을 내 품에 안겨 떨어지지 않았고, 난 겨우 정희씨에게 괜찮다는 말을 계속해서 정희씨를 내 품에서 떼어놓을 수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에요..?”
“네..그럼요...”
정희씨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다. 난 어딜 가나 이렇게나 여자를 울리고 다는 운명인가..
순간 그런 생각에 헛웃음이 튀어 나왔고, 난 정희씨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어라...너무 깔끔한 거 아냐..”
“오늘은 미리 정리 좀 했죠..온다고 미리 말해서..”
“안 그래도 되는데...”
“에이..그래도 여자 방이 너무 지저분해서 솔직히 실망했잖아요. 그때 그런 눈치가 조금 보이던데..”
“아니에요..정말...아..내가 오다가 편의점에서 와인 하나 사 왔는데 술 괜찮아요..?”
“술이요? 어쩐 일로 술을 다 마시자고..”
정희씨와 첫 데이트에서 간단하게 한 잔 하고 이번이 두 번째이니 꽤나 오랜만에 술을 권해서 그런지 정희씨는 놀란 눈치였다.
“정말 무슨 큰 일이 있나 봐요..술 마시고 이야기해야 할...? 알았어요 마셔요..”
정희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잔을 가지고 왔고, 난 정희씨의 잔에 와인을 조금 따라주고 내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워 한 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어..무슨 와인을 그렇게 마셔요..”
그렇지. 와인을 이렇게 우스운 모습으로 원 샷 하는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오늘은 왠지 취하고 싶었다.
난 정희씨를 향해 웃어 보이며, 정희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거푸 와인을 연속으로 마셔댔다.
알딸딸한 기분.. 슬 취기가 올라온다. 아까 편의점에서 가장 도수가 높은 와인을 사와서 그런지 고작 6~7잔정도 마신 거 같은데 머리가 살짝 빙글 도는 것 같다.
“계속 술만 마실 거 에요...?”
정희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분명 무슨 말을 할 거 같은데.. 그것도 중요한 말을..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시고 있으니 이런 내가 답답하겠지..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알코올의 힘이 필요했다.
난 연거푸 와인 3잔을 더 들이켰고, 완전히 정신이 몽롱해져 왔다.
“민수씨 많이 취한 거 같아..누울래요?”
“아니..나 괜찮아요..나 이제 이제는 말해야 할 거 같아요..정말.. 더 이상 숨기면 안 될 거 같아..”
“............”
정희씨가 아무런 대답이 없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리.. 난 지금 이 사실을 털어 놓아야 한다.
“나...나.....하아...나 유부남이에요..”
“알아요..그럴 거 같았어..”
“네...? 알았다구요...?”
난 순간 술이 완전히 깨는 듯 했다. 내가 유부남이란 걸 알았단 말인가..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았단 말인가...
정희씨는 그 말을 하고도 표정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너무나 담담했다.
“그냥..나도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혹은 여자의 촉감이라고 할까..결혼을 하신 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했어요. 그 날 우리 집에서 새벽까지 있다가 나간 날..그 생각이 더욱 강해졌고, 어제 전화로 나중에 모든 사실을 말해준다고 할 때 거의 확신을 했어요. 결혼한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런데...아무렇지도 않아요? 내가 사기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내가 밉지 않아요...?”
“그랬다면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겠죠. 나도..나도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연애를 좀 해봤지만 유부남을 만난 건 처음이니까요. 그리고 백프로 유부남이란 걸 알고 처음부터 만난 건 아니었으니까.. 어느 순간 유부남이면 어쩌지란 생각과 함께 민수씨를 밀어내야 하는 생각을 했는데..사람 맘이란 게 그렇지 않잖아요. 내가 싫어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밀어내려 해도 자꾸만 민수씨가 더 마음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솔직히 좀 힘들기도 했는데..어느 순간 그냥 받아들였어요. 유부남이면 어떠냐..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고..끝내는 게 후회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정희씨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내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려왔다. 창피함..부끄러움의 눈물..
난 나란 인간의 바닥은 정말 어디까지일까..
아내..지영..정희씨..세 사람은 나에게 솔직했다.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고 설령 잘못된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걸 모두 책임지고 혹은 책임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란 인간은 그저 일을 벌려 놓고 막상 책임이 져야 하는 순간이 되면 꼬리를 말고 두려워했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있으면서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가지려 하다가 떨어트릴까 두려워 우는 아이처럼..
난 너무나 비겁했던 것이다. 너무나 비겁한 인간..
나란 인간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까..그런 자격을 가질 수 없었다.
눈물이 미친 듯이 쏟아져 흘러내린다.
아내와 정희씨..그리고 지영에게도 너무나 미안했다.
나 혼자만의 이기심으로 어디까지 모두를 괴롭힐 것인가...
“울어요. 울고 싶을 땐 그렇게 울어...”
정희씨가 내 등을 토닥이며 나를 달래준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정희씨의 품에 파고들어 서럽게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오랜 시간동안..
얼마나 그렇게 소리 내어 울었을까..
너무 많이 울어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쉬고 나서야 울음은 멈추었고, 난 고개를 들어 정희씨를 바라봤다. 정희씨의 눈물로 가득 젖은 얼굴을..
“이제 좀 괜찮아요..?”
자신도 울었으면서..나보다 어쩌면 더 힘들었을 거면서..정희씨가 환하게 웃어 보인다.
“난..난 어쩌면 좋을까요..”
“마음 가는 데로 해요. 그래야 후회하지 않겠죠. 최소한 난 그렇게 행동하고 있으니까..”
마음 가는 데로..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 그렇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두려운 말..
“안아도 되요..?”
“그럼요..”
난 정희씨를 내 품에 꼭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듯이 온 힘을 다해서..
이렇게 정희씨를 꼭 안고 있으면 내 맘을 알 수 있을 거 같아서..정희씨를 향한 내 마음이 어떤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두근두근..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정희씨의 따뜻한 체온, 체취를 느끼며.. 내 심장 박동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사랑..어쩔 수 없는 사랑이구나.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아무리 밀어내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그 감정..
정희씨를 향한 내 마음은 사랑이 맞구나..
하지만 분명히 아내를 생각하는 내 마음.. 그것 또한 사랑이었다.
사랑엔 뜨겁게 타오르는 불타는 사랑만이 아닌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는 거니까..
난 지금 두 명의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어쩌면 좋단 말인가..
“충실해요..지금 이 순간에..당신의 마음에..”
정희씨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부딪혀 온다.
난 잠시 혼란스러운 생각에 멍하니 가만히 있었지만, 정희씨와 부딪힌 입술 사이로 애타게 혀가 내 입술 사이를 파고들려 했고 결국 내 입술은 열려 버렸다.
이어지는 뜨거운 키스..
그래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자. 내 감정에 충실하다면 해답을 찾을 수 있겠지..
난 적극적으로 정희씨의 키스를 받아들이며 처음 나눈 그 키스보다 더욱 더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정희씨의 옷을 하나하나 벗겼다.
어느새 완전히 알몸이 되어버린 정희씨의 눈부신 나신..
난 그 정희씨의 벗은 몸 위로 올라가 정희씨의 온 몸을 내 혀로 간질였다.
입술에서 다리 끝까지..
“하아...하아...하으윽...!”
내 입술이 성감대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정희씨의 입에서 끊임없이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리곤 한참을 돌고 돌아 도착한 정희씨의 소중한 그 곳.. 어느새 살짝 벌어져 있는 다리 사이로 내 머리는 파고들었고, 살짝 물이 나와 있는 분홍색 꽃잎을 혀로 간질였다.
“흐으음....!”
아까보다 조금 더 격해진 신음소리와 함께 정희씨의 몸이 살짝 부르르 떨려온다.
난 그런 정희씨의 다리를 꼭 붙잡고 더욱 더 집요하게 그리고 진하게 정희씨의 분홍색 속살에 입을 맞추었다.
“하아..하아...흐으으윽...!!”
더 이상 참기 힘든지 끊임없이 정희씨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살짝 비음이 섞인 달뜬 신음소리..그 신음소리와 함께 정희씨의 분홍색 속살은 조금 벌어져 있었고, 난 더 이상 참지 않고 모조리 옷을 벗고 커다랗게 발기한 내 물건을 그대로 정희씨의 벌어진 속살 안으로 한 번에 밀어 넣었다.
“아흐으으윽..!!!”
커다란 신음소리와 함께 나에게 꼭 안겨오는 정희씨..
난 그런 정희씨를 내 품에 꼭 안아주고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하아..하아...아흐으윽..!”
쉴 새 없이 정희씨의 입에서 튀어 나오는 신음 소리, 그 소리와 함께 내 몸은 끊임없이 정희씨의 몸을 탐했다. 더욱더 뜨겁게..더욱더 사랑스럽게..온 힘을 다해서..
뜨겁게 맞부딪히는 정희씨와 나의 몸.. 그리고 절정으로 향해가는 순간..
정희씨의 얼굴에서 아주 오래 전 아내와 좋았던 그 때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살짝 손만 잡아도 너무나 좋던 그때, 첫 키스를 하고나서 너무나 흥분되고 기분이 좋아 하루 종일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그때..하루 종일 섹스만 해도 너무 좋다며 모텔에서 하루 종일 아내와 벗은 체 몇 번이나 섹스를 하던 그 시절..
그땐 참 좋았는데..너무 좋았는데..
“하으으윽...!”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난 정희씨의 몸 안에 사정을 해버렸고, 정희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뭐야...안전한 날이긴 한데..말도 없이..하아..하아...”
정희씨가 가쁜 숨을 내쉬며 나를 살짝 삐진 눈빛으로 바라본다.
“미안..미안해요..”
난 그대로 정희씨의 몸으로 고꾸라지듯이 쓰러졌다.
정희씨와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눈을 감으니 더욱더 선명히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늘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던 아내의 모습이..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아내의 얼굴이..
비릿한 피 맛도 나는걸 보니 입 안이 터진 것일까.. 아무렴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느새 새벽 6시, 날이 밝아온다. 까맣던 어둠이 지나가고 조금씩 푸르스름한 하늘로 세상이 바뀌어간다.
난 한숨도 자지 못하고 쇼파에 멍하니 그대로 앉아 날을 지새웠다.
이틀 동안 잠을 잔 게 거의 두 시간이 될까 하다 보니 정신이 아득해져 온다.
누군가 나를 옆에서 툭 하고 건드리면 그대로 쓰러질 정도로..
이런 상태로 과연 회사는 출근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감정은 감정, 현실은 현실.. 난 부서질 거 같은 몸을 겨우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볼품없기 그지없었다.
퀭한 눈, 입술껍질이 다 일어나서 부르튼 입술, 이틀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해서 얼굴에 잔뜩 올라와 있는 뾰루지까지..
“몰골이 말이 아니구만....”
쓴 웃음이 나온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기에..
대충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얼굴에 물만 끼얹고 면도도 하지 않고 난 욕실에서 나와 조심히 안방 문을 열어 보았다.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아내의 모습.. 난 조심스레 아내가 깨지 않게 침대에 살며시 앉아 새우처럼 불편하게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고 있는 아내의 몸을 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제대로 베개에 눕히고 위해 돌리는 순간 아내의 얼굴에 묻어있는 눈물 자국을 보았다. 자면서도 울었던 것일까..아니면 새벽에 깨어나서 운 것일까..
마음이 저릿하다.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내 가슴을 면도날로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난 차마 출근한다고 아내를 깨울 수 없었고, 편하게 자도록 아내를 내버려두고 회사에 출근했다. 그리고 출근하자마자 부장에게 쉬고 싶다고 연차를 냈다.
부장은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많이 안 좋으면 하루 정도 더 쉬어도 된다고 얼른 들어가라고 말했다.
아마도 부장이 날 그렇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건 처음이 아니었을까.. 그 정도로 내 몰골이 말도 안 되게 형편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부장의 허락을 받자마자 난 곧바로 가방을 챙겨 들었다. 주변의 다른 부서원들은 하나같이 어서 들어가라고 많이 힘들어 보인다는 말을 한 마디씩 했고, 난 듣는 둥 마는 둥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출근한 지 한 시간 만에 그렇게 회사를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조용한 집안, 아직 아내는 잠들어있는지 집 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혹시나 난 아내가 깰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구두를 벗고 들어와 조심스런 걸음으로 안방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순간 불안한 느낌과 함께 난 욕실부터 온 방문을 다 열어 보았다. 하지만 아내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과 함께 그 순간 식탁 위에 하나의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필체, 아내의 글씨였다.
-당분간 친정집 가서 쉬고 올게. 가서 아무 말 하지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은 말고..휴대폰 꺼놓을 거니까 연락 하지 마. 그리고 내 말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이 정리가 될 때까지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잖아? 아직까지 오빠를 놓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너무 걱정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그리고 조금 생각해봤는데 사람 맘이라는 게 마음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거 순간 생각이 들더라. 만약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나도 태현 오빠를 버리고 오빠를 택하진 않았겠지..오빠가 지금 그 정희라는 여자에게 마음 가는 거 어쩌면 어쩔 수 없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물론 아직도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최소한 어떤 생각으로 오빠가 그 여자에게 빠진 것일까 뭐 그런 걸 나 혼자 최소한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을 했다고 할까..아무튼 나 없어도 잘 지내고..그 여자 만나는 거에 대해서 뭐라고 하진 않을게..오빠가 그 여자를 정리를 하든 계속 만나든 어떤 상황이더라도 그 여자를 한 번은 더 만나야 할 테니까..그리고 그건 오빠 선택이겠지. 우리가 부부라고 하더라도 내가 오빠의 선택까지 간섭할 순 없을 테니까..
메모는 그렇게 끝나 있었고, 난 메모를 확인하자마자 미친 듯이 뛰어나갔다. 분명 내가 출근할 때까지 아내는 자고 있었고, 내가 출근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고작 두 시간이 이제 될까 말까였다.
그렇다면 아내가 아직 집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았을 그런 가능성도 있었다.
난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슬리퍼를 신고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나갔다. 하지만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벌써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를 탄 것일까..
서둘러 다시 아파트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에 시동을 걸고 난 곧장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제발 늦지 않기를 바라며..떠나기 전에 잡을 수 있기를 바라며..
가는 동안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메모의 말대로 아내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타들어가는 마음.. 하지만 그런 나의 마음을 모르는지 원망스럽게도 오늘따라 신호는 왜 이렇게 걸리는지.. 차는 왜 이리 막히는지 평소보다 이십분이 더 걸려서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내는 벌써 출발했을까..
난 해남 행 버스가 출발하는 곳으로 미친 듯이 사람들 속에서 아내를 찾았다.
혹시라도 아내가 아직 있을까봐.. 내가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하지만 그런 나의 바람과 달리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역시나 이미 가버린 것일까..내가 늦은 것일까..
“하아.....”
답답함에 깊은 한숨이 튀어 나온다. 그렇게 늦지 않기를 바랐는데 결국 늦었다니..
그 순간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손이 부드럽게 내 손을 잡는다.
누구지...?
고개를 들어보니 놀랍게도 아내가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은주야...”
“왔네..혹시나 올까봐 기다렸는데..”
“너...”
아내를 보자마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내의 모습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는 게 대체 얼마만이란 말인가..
“울지 마.. 나 그리고 이제 가 봐야 해..”
“무슨 소리야. 기다렸다며..”
“그런 메모 써 놓고 이런 말 하면 진짜 웃긴 거 아는데 그냥 가기 전에 오빠 얼굴 한 번만 더 보고 갔으면 싶어서 그래서 기다린거야. 버스 시간 10분밖에 안 남아서 이제 들어가려고 했는데 마침 딱 오네..”
“은주야. 잠깐만..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러지마..응?”
“오빠...”
“어....?”
“나도 여자들이 남자들한테 뭘 잘못한지 알아? 이렇게 묻는 거 정말 싫어하는데..지금은 묻고 싶네. 오빠가 뭘 잘못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여자에게 사랑했다고 말한 거 그거 거짓이었던 거야? 오빠 그렇게 쉽게 사랑한다는 말 하는 사람 아니잖아.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나 처음 사귈 때 오빠가 말했잖아. 난 쉽게 사랑한다는 말 하는 사람 아니라고. 그래서 너한테도 사랑한다는 말 정말 아껴서 할 거라고..그렇게 나한테 말했잖아. 기억 안 나?”
“어....기억 나..”
기억이 안 날 리가 있나. 아주 선명하게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내의 말대로 난 사랑해 라는 말은 정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는 마음을 신조로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 맘은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사랑해 라는 말을 써본 건 내 인생에서 정말 몇 안 되는 순간이었고..
그리고 얼마 전 정희씨에게 사랑해 라는 말을 한 사실.. 정희씨의 앞에서..그리고 정희씨와의 카톡에서도 그 말을 주고받은 걸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란 놈은...끝까지 어쩔 수 없구나..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돼, 안 돼 할 수 없는 거잖아. 정말 오빠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오빠의 마음대로 그렇게 움직이진 않았겠지..사랑이라는 거 한 번 빠져들면 나올 수 없는 그런 거니까..그래서 시간을 좀 갖자고..나에게도 오빠에게도 생각할 시간이란 게 필요할 테니까..”
“그러다 내가 널 놓아버리면....”
진심이 나와 버렸다. 정희씨를 좋아하는 내 맘도 이미 너무나 커져 버렸기에..
해서는 안 될 말을 다시 아내의 앞에서 해버렸다.
그런데 아내는 내 말을 듣고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오히려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게 오빠의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지. 오빠를 놓치고 싶지 않지만..오빠가 너무나 내 옆에 있어줬으면 싶지만..그렇다면..받아 들여야지...”
환하게 웃고 있는 아내의 뺨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아내의 손이 내 손을 빠져 나간다.
지금 이 손을 놓으면 영영 다시는 아내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아내가 점점 나에게서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데..
나는 아내에게 다가가 붙잡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느새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며 버스를 올라타는 아내의 모습..
이게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지금 내가 다시 한 번 붙잡는다면 아내가 다시 돌아올 지도 모르는데..
선택, 붙잡을 수 없는 선택.. 난 그 선택을 해버렸다.
거짓된 마음으로 아내를 붙잡는다면 더욱더 힘들어질 걸 알았기에..
나에게서 멀어지는 아내를 놓아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돌아온 집 안..분명 아침까지 있던 아내였는데 어디에도 더 이상 아내가 없다.
침대에는 아직 아내의 체취,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아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거짓말처럼 신기루처럼 아내가 사라졌다.
믿겨지지 않는 현실..아니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내 손으로 붙잡지 못한 아내인데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
아내가 떠나고 혼자 남겨졌다는 이 순간이..
웃음이 튀어 나온다. 헛웃음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아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까...?
아니면 아내의 말처럼 난 어쩔 수 없이 정희씨를 본 그 순간부터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확실한 건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정희씨에게 빠져들지 않았을 거란 확신은 없다는 것이다. 아니..되돌린다고 해도 빠져들겠지..그 사람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시간..
난 조금의 손도 까딱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그저 멍하니 하루 종일 쇼파에 앉아 있었다.
완전한 정적을 느끼며..
어느새 어두워져 가는 주변..불을 켜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사방에 어둠이 밀려오고 집 안이 너무나 깜깜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싫지 않다. 뭔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
하루 종일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그런 기분이다.
고개를 흘깃 돌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2시가 지나있다. 이렇게 하루가 가버린 것인가..
내 연차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날아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문득 정희씨가 떠오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척 하려 노력해보았지만 역시나 힘들고 슬픈 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지금 누구에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떠오른 게 정희씨였다.
나란 인간은 정말...
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정희씨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망설이며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결국 못 참고 정희씨에게 연락을 해버렸다.
고작 하루만에..내가 직접 설명해 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놓고..
난 지금 아무 것도 설명해 줄 수 없는데..참지 못하고 그렇게 연락을 해버리고 말았다.
“민수씨?”
“네...”
“벌써 생각할 시간 끝난 거에요? 어제는 엄청 걱정스런 목소리로 기다리라 그러기에 난 빨라도 일주일..어쩌면 한 달은 못 볼지도 모를 거라 걱정하고 있었는데 뭐에요..”
정희씨의 목소리가 장난스럽다. 고작 하루도 못 참고 연락할 거면서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한 거냐고..
난 무슨 말을 해야 할까..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지금 너무 위로를 받고 싶은데..정희씨 앞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면 정희씨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나..그리로 지금 가도 돼요?”
“지금이요...? 늦었는데...난 괜찮은데..민수씨 괜찮아요?”
“괜찮아요. 지금 그리로 갈게요...”
“알았어요..”
난 정희씨와의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정희씨의 집으로 출발했다. 이제는 몇 번을 가서 익숙한 그 곳으로..
차에서 내리는데 정희씨가 집 앞에 나와 있다. 그 날의 귀여운 잠옷과 달리 예쁘장한 원피스형 잠옷을 입고..
“왜 기다렸어요. 내가 내리면 연락할 텐데..”
“걱정되니 그렇죠...”
정희씨가 내 품에 안겨온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정희씨의 체온..
얼마나 날 걱정을 했을까.. 갑자기 그렇게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선 무작정 기다려 달라 했으니..
그리곤 다시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뜬금없이 찾아온다고 했으니..
정희씨는 한참을 내 품에 안겨 떨어지지 않았고, 난 겨우 정희씨에게 괜찮다는 말을 계속해서 정희씨를 내 품에서 떼어놓을 수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에요..?”
“네..그럼요...”
정희씨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다. 난 어딜 가나 이렇게나 여자를 울리고 다는 운명인가..
순간 그런 생각에 헛웃음이 튀어 나왔고, 난 정희씨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어라...너무 깔끔한 거 아냐..”
“오늘은 미리 정리 좀 했죠..온다고 미리 말해서..”
“안 그래도 되는데...”
“에이..그래도 여자 방이 너무 지저분해서 솔직히 실망했잖아요. 그때 그런 눈치가 조금 보이던데..”
“아니에요..정말...아..내가 오다가 편의점에서 와인 하나 사 왔는데 술 괜찮아요..?”
“술이요? 어쩐 일로 술을 다 마시자고..”
정희씨와 첫 데이트에서 간단하게 한 잔 하고 이번이 두 번째이니 꽤나 오랜만에 술을 권해서 그런지 정희씨는 놀란 눈치였다.
“정말 무슨 큰 일이 있나 봐요..술 마시고 이야기해야 할...? 알았어요 마셔요..”
정희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잔을 가지고 왔고, 난 정희씨의 잔에 와인을 조금 따라주고 내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워 한 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어..무슨 와인을 그렇게 마셔요..”
그렇지. 와인을 이렇게 우스운 모습으로 원 샷 하는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오늘은 왠지 취하고 싶었다.
난 정희씨를 향해 웃어 보이며, 정희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거푸 와인을 연속으로 마셔댔다.
알딸딸한 기분.. 슬 취기가 올라온다. 아까 편의점에서 가장 도수가 높은 와인을 사와서 그런지 고작 6~7잔정도 마신 거 같은데 머리가 살짝 빙글 도는 것 같다.
“계속 술만 마실 거 에요...?”
정희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분명 무슨 말을 할 거 같은데.. 그것도 중요한 말을..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시고 있으니 이런 내가 답답하겠지..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알코올의 힘이 필요했다.
난 연거푸 와인 3잔을 더 들이켰고, 완전히 정신이 몽롱해져 왔다.
“민수씨 많이 취한 거 같아..누울래요?”
“아니..나 괜찮아요..나 이제 이제는 말해야 할 거 같아요..정말.. 더 이상 숨기면 안 될 거 같아..”
“............”
정희씨가 아무런 대답이 없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리.. 난 지금 이 사실을 털어 놓아야 한다.
“나...나.....하아...나 유부남이에요..”
“알아요..그럴 거 같았어..”
“네...? 알았다구요...?”
난 순간 술이 완전히 깨는 듯 했다. 내가 유부남이란 걸 알았단 말인가..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았단 말인가...
정희씨는 그 말을 하고도 표정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너무나 담담했다.
“그냥..나도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혹은 여자의 촉감이라고 할까..결혼을 하신 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했어요. 그 날 우리 집에서 새벽까지 있다가 나간 날..그 생각이 더욱 강해졌고, 어제 전화로 나중에 모든 사실을 말해준다고 할 때 거의 확신을 했어요. 결혼한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런데...아무렇지도 않아요? 내가 사기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내가 밉지 않아요...?”
“그랬다면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겠죠. 나도..나도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연애를 좀 해봤지만 유부남을 만난 건 처음이니까요. 그리고 백프로 유부남이란 걸 알고 처음부터 만난 건 아니었으니까.. 어느 순간 유부남이면 어쩌지란 생각과 함께 민수씨를 밀어내야 하는 생각을 했는데..사람 맘이란 게 그렇지 않잖아요. 내가 싫어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밀어내려 해도 자꾸만 민수씨가 더 마음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솔직히 좀 힘들기도 했는데..어느 순간 그냥 받아들였어요. 유부남이면 어떠냐..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고..끝내는 게 후회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정희씨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내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려왔다. 창피함..부끄러움의 눈물..
난 나란 인간의 바닥은 정말 어디까지일까..
아내..지영..정희씨..세 사람은 나에게 솔직했다.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고 설령 잘못된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걸 모두 책임지고 혹은 책임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란 인간은 그저 일을 벌려 놓고 막상 책임이 져야 하는 순간이 되면 꼬리를 말고 두려워했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있으면서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가지려 하다가 떨어트릴까 두려워 우는 아이처럼..
난 너무나 비겁했던 것이다. 너무나 비겁한 인간..
나란 인간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까..그런 자격을 가질 수 없었다.
눈물이 미친 듯이 쏟아져 흘러내린다.
아내와 정희씨..그리고 지영에게도 너무나 미안했다.
나 혼자만의 이기심으로 어디까지 모두를 괴롭힐 것인가...
“울어요. 울고 싶을 땐 그렇게 울어...”
정희씨가 내 등을 토닥이며 나를 달래준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정희씨의 품에 파고들어 서럽게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오랜 시간동안..
얼마나 그렇게 소리 내어 울었을까..
너무 많이 울어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쉬고 나서야 울음은 멈추었고, 난 고개를 들어 정희씨를 바라봤다. 정희씨의 눈물로 가득 젖은 얼굴을..
“이제 좀 괜찮아요..?”
자신도 울었으면서..나보다 어쩌면 더 힘들었을 거면서..정희씨가 환하게 웃어 보인다.
“난..난 어쩌면 좋을까요..”
“마음 가는 데로 해요. 그래야 후회하지 않겠죠. 최소한 난 그렇게 행동하고 있으니까..”
마음 가는 데로..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 그렇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두려운 말..
“안아도 되요..?”
“그럼요..”
난 정희씨를 내 품에 꼭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듯이 온 힘을 다해서..
이렇게 정희씨를 꼭 안고 있으면 내 맘을 알 수 있을 거 같아서..정희씨를 향한 내 마음이 어떤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두근두근..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정희씨의 따뜻한 체온, 체취를 느끼며.. 내 심장 박동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사랑..어쩔 수 없는 사랑이구나.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아무리 밀어내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그 감정..
정희씨를 향한 내 마음은 사랑이 맞구나..
하지만 분명히 아내를 생각하는 내 마음.. 그것 또한 사랑이었다.
사랑엔 뜨겁게 타오르는 불타는 사랑만이 아닌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는 거니까..
난 지금 두 명의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어쩌면 좋단 말인가..
“충실해요..지금 이 순간에..당신의 마음에..”
정희씨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부딪혀 온다.
난 잠시 혼란스러운 생각에 멍하니 가만히 있었지만, 정희씨와 부딪힌 입술 사이로 애타게 혀가 내 입술 사이를 파고들려 했고 결국 내 입술은 열려 버렸다.
이어지는 뜨거운 키스..
그래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자. 내 감정에 충실하다면 해답을 찾을 수 있겠지..
난 적극적으로 정희씨의 키스를 받아들이며 처음 나눈 그 키스보다 더욱 더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정희씨의 옷을 하나하나 벗겼다.
어느새 완전히 알몸이 되어버린 정희씨의 눈부신 나신..
난 그 정희씨의 벗은 몸 위로 올라가 정희씨의 온 몸을 내 혀로 간질였다.
입술에서 다리 끝까지..
“하아...하아...하으윽...!”
내 입술이 성감대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정희씨의 입에서 끊임없이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리곤 한참을 돌고 돌아 도착한 정희씨의 소중한 그 곳.. 어느새 살짝 벌어져 있는 다리 사이로 내 머리는 파고들었고, 살짝 물이 나와 있는 분홍색 꽃잎을 혀로 간질였다.
“흐으음....!”
아까보다 조금 더 격해진 신음소리와 함께 정희씨의 몸이 살짝 부르르 떨려온다.
난 그런 정희씨의 다리를 꼭 붙잡고 더욱 더 집요하게 그리고 진하게 정희씨의 분홍색 속살에 입을 맞추었다.
“하아..하아...흐으으윽...!!”
더 이상 참기 힘든지 끊임없이 정희씨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살짝 비음이 섞인 달뜬 신음소리..그 신음소리와 함께 정희씨의 분홍색 속살은 조금 벌어져 있었고, 난 더 이상 참지 않고 모조리 옷을 벗고 커다랗게 발기한 내 물건을 그대로 정희씨의 벌어진 속살 안으로 한 번에 밀어 넣었다.
“아흐으으윽..!!!”
커다란 신음소리와 함께 나에게 꼭 안겨오는 정희씨..
난 그런 정희씨를 내 품에 꼭 안아주고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하아..하아...아흐으윽..!”
쉴 새 없이 정희씨의 입에서 튀어 나오는 신음 소리, 그 소리와 함께 내 몸은 끊임없이 정희씨의 몸을 탐했다. 더욱더 뜨겁게..더욱더 사랑스럽게..온 힘을 다해서..
뜨겁게 맞부딪히는 정희씨와 나의 몸.. 그리고 절정으로 향해가는 순간..
정희씨의 얼굴에서 아주 오래 전 아내와 좋았던 그 때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살짝 손만 잡아도 너무나 좋던 그때, 첫 키스를 하고나서 너무나 흥분되고 기분이 좋아 하루 종일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그때..하루 종일 섹스만 해도 너무 좋다며 모텔에서 하루 종일 아내와 벗은 체 몇 번이나 섹스를 하던 그 시절..
그땐 참 좋았는데..너무 좋았는데..
“하으으윽...!”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난 정희씨의 몸 안에 사정을 해버렸고, 정희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뭐야...안전한 날이긴 한데..말도 없이..하아..하아...”
정희씨가 가쁜 숨을 내쉬며 나를 살짝 삐진 눈빛으로 바라본다.
“미안..미안해요..”
난 그대로 정희씨의 몸으로 고꾸라지듯이 쓰러졌다.
정희씨와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눈을 감으니 더욱더 선명히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늘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던 아내의 모습이..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아내의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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