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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피기 좋은 날 - 4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3 01:24 885회 0건
잠을 자긴 잔 것일까 싶을 정도로 잠깐 졸듯이 잠을 자고,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멍한 상태로 안방에서 나오니 아내가 내가 들어왔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쇼파에 앉아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부부 사이엔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데..
지금 내 마음을, 상황을 사실대로 말하고 아내에게 물어볼까..
그때 그 남자는 누구였냐고? 그럼 내 마음이 편해질까? 아내도 나와 같을까?

아주 잠시의 고민이었지만 그리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내 대답은 No였다.
잠깐의 불장난일거라 생각했던 내 바람은 이미 잠깐의 불장난이 아니었다.
정희씨를 향한 내 스스로에 대한 마음을 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걸 사실대로 아내에게 털어놓았다간 기다리는 건 아마도 파멸이겠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지금은 난 아내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에게 거짓을 말할 용기가 없었기에.. 아내의 두 눈을 바라보면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할 거 같아서..그럼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게 한 번에 부숴 져 버릴까봐 그게 너무나 두려웠다.

회피..
내가 씻고 욕실에서 나올 때도, 말없이 식탁에 앉아 퍽퍽한 시리얼에 우유를 말아 먹을 때도 내가 돌아보길 바라며 계속해서 날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을 난 잠시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내는 내가 출근 준비를 모두 마치고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나가려는 그 순간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끝끝내 난 아내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집에서 나왔다.

가슴이 답답하다.
너무나 상쾌한 공기에 맑은 아침인데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너무나 답답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결국 지금처럼 가다가 끝은 아내와 정희씨, 두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게 너무나 눈에 선하게 보이는데 난 둘 중 어느 한 사람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너무나 멍청하게도 두 사람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멍청한 생각이라니...

이런 바보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머리가 터질 거 같았고, 당장이라도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지영이라면...그녀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할까.. 그녀라면 이런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텐데..

아니.. 애초에 그녀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처녀와 유부남이라는 관계의 선을 긋고 정희씨에게 다가갔어야 하는데..

평생 살면서 한 번도 못 만나 본 이상형과 같은 사람이었기에 너무나 쉽게 정희씨에게 빠져든 것이 실수였다. 그래선 안 됐는데.. 마음을 그리도 쉽게 뺏겨선 안 되는 거였는데..

몸이 가기 전에 마음부터 먼저 빼앗겨 버린 그 상황이 나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내가 그 어떤 선택도 내릴 수 없게..그렇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만약 아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난 아내와 정희씨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이제는 그 선택을 선뜻 하지 못하게 된 그런 상황까지 와버린 것이었다.

‘난...이제 어떡해야 하지...’

그 순간 울리는 카톡 소리, 정희씨겠지..
부지런한 그 사람은 항상 같은 시간에 나에게 연락을 보내니까..

그런데 도저히 오늘은 휴대폰을 열어볼 엄두가 안 난다.
그 사람과 연락을 할수록, 그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걷잡을 수 없이 그 사람에게 빠져드는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휴대폰을 확인하기가 너무나 두려웠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짧게 느껴졌던 적이 있을까..
오늘 하루는 정말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그 동안 정희씨에게 온 수많은 카톡..그리고 부재 중 전화..
하지만 난 무음모드로 해 놓은 체 그 연락을 하나도 확인하지 않았다.
아니..확인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좋을 거 같다.

어느새 퇴근시간..오늘따라 술을 그리 좋아하는 부장은 급한 일이 있다며 칼같이 퇴근을 해버리고, 다른 직원들도 저마다 약속이나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먼저 퇴근해 버리고 부서원들 중 나만이 퇴근을 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오늘따라 밀린 업무도 없고, 미리 해야 할 일도 이미 오후 중에 모두 끝내 놓은 상태였다.
이젠 어떡해야 하나..집에 가야 하는데...집에 가서 도무지 아내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 이런 저런 쓸데없는 일을 하며 최대한 시간을 보냈지만 겨우 7시가 조금 넘어 있었고, 이제는 정말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100년은 묵은 듯 한 깊은 한숨을 땅이 꺼져라 쉬며, 컴퓨터 전원을 끄고 가방을 챙겨들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어떻게 도착한 지 모를 아파트 입구..
내 발걸음은 마치 지은 죄를 안다는 듯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고,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어느새 나는 집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도어락 문을 열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내가.. 아내가 아침 출근하던 그 모습 그대로 쇼파에 앉아 있었다.
정말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사람처럼..그 모습 그대로..

“은주야.....”

아내를 부르는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진작 아내에게 모든 걸 털어 놓았어야 했는데.. 내 이기심으로 아내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왜 아내가 나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지금 아내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난 천천히 아내의 앞으로 다가갔다.
두렵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오늘은 일찍 오네..그 사람 안 만났니?”
“..........”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하다. 고개를 들은 아내는 얼마나 울었는지 빨개진 퉁퉁 부은 두 눈으로 나를 원망에 가득 찬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는 언제부터 알았던 것일까..

“오래 같이 살면 가족 같아지고, 그래서 남자들이 다른 생각 많이 한다더라. 바람도 피고 그런 다더라 이런 이야기 할 때 내 남편이 설마 그럴까봐 그런 생각했어. 오빠도 잘 아는 나랑 친한 은지가 작년에 이혼하면서 사람 속은 모르는 거라고 남편이 바람나서 이혼할 때 나보고 그렇게 조심하라고 사람 모르는 거라고 할 때도 난 오빠 믿었어..”
“.....”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난 한 마디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근데..근데..정말 미안하게도 어느 순간 그냥 섹스를 하는 게 너무나 싫어졌어..너무나 충격적이었던 내가 불임이라는 이야기..그 이야기를 듣는 그 날부터 정말 더 이상은 오빠와 섹스를 한다는 게 행복하지 않았어..”

안다. 나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혼 2년 차가 넘어가고 아이가 생기지 않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 양 쪽 집에서 난리를 쳐서 결혼하고 처음으로 가게 되었던 산부인과, 아내는 불임이라는 판정을 받았고 그 날 아내는 울다가 지쳐서 쓰러질 정도로 힘들어 했다.

그 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충격적인 그 날을..
아내는 그 날 이후 한동안은 내 손이 몸에 스치는 것도 싫어할 정도로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가 거의 6개월 이상이 지속되었고, 조금씩 다시 안정을 찾아갔지만 아내는 그 후 더 이상 섹스를 즐길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아내의 모습에 나도 서서히 지쳐갔고.. 결혼 3년차가 넘어가던 그 시점부터 아내와 난 섹스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그래서....정말 죽기보다 싫었지만 당신이 바람핀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지영이란 여자와 몸을 섞는다는 거 알았을 때 그냥 모른 척 넘어갔어. 내가 해 줄 수 없는 부분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난 더 이상 오빠에게 섹스로 그런 행복을 줄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런데...그걸로 모자랐니..? 그래서 이젠 몸이 아닌 마음까지 주기로 한 거니? 그 정희라는 여자에게..?”

아내가 오열을 한다. 이런 모습은 불임이라는 판정을 받았던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런 모습이었다. 세상이 끝난 사람처럼.. 아내는 울부짖으며 나의 가슴을 두드렸다. 나쁜 놈이라고..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난 정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던 것일까..아내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또한 아내가 불임이란 건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아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 아내에게 난 또 하나의 상처를 주는 것인가...

왜 아내가 모를 거라 생각한 것일까.. 아내는 내가 지영과 몸을 섞는다는 걸 알고도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나에게 대했을까..너무나 힘들었을 텐데..어떻게..

그러고도 난 너무나 태연히 지영을 떠나보내고 정희씨와 다시 바람을 피고 있었다. 이번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넘어간...

나란 놈은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아내에게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누구의 차에서 내렸는지 궁금하니? 피해자는 가해자를 평생 기억한다던데 역시 가해자는 기억 못하는가 보구나..그때 태현 오빠는 차 안에서 오빠 얼굴 보고 한 번에 알아봤다고 하던데..”

태현..태현이 누구지..
분명 낯익은 이름인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정말 기억 못하나 보네..내 첫사랑..나랑 3년간 사귄 그 사람..그 사람에게서 오빠가 날 뺏어갔잖아..”

김태현..그제야 기억이 난다. 아내의 첫 사랑..
아내는 고등학교 때부터 1살 연상이던 같은 학교인 태현이란 남자를 좋아했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내는 결국 태현과 같은 대학교까지 입학하였고, 결국 오랜 짝사랑이 결실을 이뤄 아내는 태현과 사귀게 되었다.

태현과 아내는 교내에서 소문이 난 닭살커플이었는데 둘은 늘 붙어 다녔다고 한다. 태현은 아내를 위해 영장까지 미뤄서 2학년이 마치고 군대를 가게 됐는데, 아내는 의정부에 있는 306보충대에까지 태현을 따라가서 엄청 울었다고 말했었다.

그렇게 시작된 태현의 군 생활, 난 그쯤 제대를 하고 학교에 복학했는데 한 눈에 들어온 게 바로 지금의 아내였다.

아내는 정말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라 처음 본 그 날부터 난 1년간을 아내를 따라 다녔다.

아내는 처음에는 나에게 엄청 차갑게 대하고 쌀쌀맞게 굴었지만, 난 그런 아내의 모습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아내를 따라 다녔고 어느 순간부터 차갑던 아내의 모습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잘해주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아내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걸린 1년이란 시간..
아내는 그동안 태현과 떨어져 있어서 많이 힘들어 했고, 난 그런 아내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옆에서 의지가 되려 많이 노력했다.

그런 내 노력이 먹혀든 것일까..아니면 아내가 태현의 빈자리로 너무나 외로웠기 때문일까..
크리스마스이브에 1년이란 시간이 걸려서 마침내 한 고백에 아내는 울면서 승낙을 했다.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며..나 태현 오빠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라며..

그 날, 그 날 이후 아내는 내 사람이 되었고 난 아내와 결혼까지 골인하게 됐다.

그런데 그 날 이후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이름..그 이름이 아내의 입에서 다시 나오게 될 줄이야..

“이제 기억이 나는 표정이네?”
“그..그 사람과 왜...?”
“오빠 지금 웃긴 거 알지? 오빠가 왜 지영이란 사람과 왜 정희란 사람과 그랬는지는 나에게 하나도 설명하지 않고 그저 내가 태현 오빠를 만났다는 게 그리 중요하고 궁금한거야?”

아내의 눈빛에 원망이 잔뜩 서려있다.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쓰레기같이 굴고 있다는 걸..

하지만 궁금했다. 왜 아내가 태현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인지..

“궁금해? 궁금해서 미쳐 버릴 거 같아? 알았어...얘기해 줄게..오빠는 아는지 모르겠지만 오빠와 사귀고 나서도 한 번씩 태현 오빠는 나에게 연락이 왔었어. 물론 전화는 받지 않았지만 문자로..SNS로..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번씩 말해주곤 했어. 그래서 태현 오빠가 결혼을 한 것도..결혼해서 중국에 건너가서 살게 된 것도..별거를 하다 이혼을 하고 다시 얼마 전에 한국에 돌아온 것도 알고 있었어...”

처음 듣는 이야기. 아내의 이야기는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가 그만큼 아내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아니면 나와 다르게 아내는 태현이 연락 오는 걸 내가 눈치 채지 못하게 잘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뭐..어떤 거라도 지금은 상관이 없었다. 그저 아내가 왜 태현과 다시 만나게 됐는지..그게 나에겐 중요하고 최대의 관심사였으니까..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없어. 그냥 궁금하더라. 못 본지 10년이 훨씬 넘었으니까..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혼했다니까 걱정도 되고..오빠가 바람피우고 있으니까 태현 오빠한테 감정 이입도 많이 되고..태현 오빠도 아내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했다고 하더라고..”
“..........”

믿든지 안 믿든지..그래..아내가 태현과 자지 않았다고 결백하다고 하더라도 난 아내를 의심하겠지..도둑이 제 발을 저린다고..난 지영과 정희씨와 잤으니까..아내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믿을 수 없겠지..

“이제 어쩔 건데? 오빠는 그 여자에게 갈 거야? 난 태현 오빠에게 가고? 그런 걸 원해? 미안해서 근데 어쩌지..난 태현 오빠 다시 봤는데 전혀 설레이지도 않더라. 솔직히 속으로 조금 걱정했거든. 이러다 나도 바람나는 거 아닌지..그럼 오빠하고 나하고 결혼은 끝이 나는 거 아닌지..그런 걱정 했는데 전혀 안 설어..그냥 오랜만에 봐서 반가움 그게 끝이었어. 그래서 오빠가 더 이해가 안 가...어떻게 그리 쉽게 맘이 가니..백 번 천 번 양보해서 몸이 가는 건 이해해줬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맘이 가..어떻게....”

이제는 다 울어서 더 이상 눈물이 한 방울도 흘러나올 거 같지 않던 아내의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제야 확신이 든다. 아내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아내는 나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태현과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고..조금도 설레지 않았다는 아내의 말을 모조리 난 믿을 수 있었다.

그런데..하루 종일 의도적으로 정희씨의 연락을 피하던 나에게 아내의 말 하나가 연못가에 돌맹이를 던진 듯 잔잔히 가라앉던 내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 여자에게 갈 거냐는 말.. 불현 듯 그 순간 하루 종일 정희씨가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침부터 연락 하나 없어 너무나 걱정하면서 날 기다리고 있을 정희씨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


그동안 기억 못하고 있었지만 아내는 엄청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조그만 내 눈빛, 내 손짓 하나에도 모두 신경을 쓰고 알아챌 정도로 아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순간 정희씨를 떠올리며 흔들린 내 눈빛.. 아내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정말...정말 사랑하는 거니...사랑한다고 연락을 단순히 주고받는 게 아니라 그런 거니..”

아내의 목소리가 떨린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린다.

“으..은주야 피..!”
“손대지마..”

은주는 처음으로 나에게 너무나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피를 닦아주려는 내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마...”
“은주야...”
“가...그 사람에게 가..마음이 가는 거 아니니? 나랑 있으면서 그 사람 떠올리는 거면, 그런 동정 받고 싶지 않아. 어서 가..”
“어떻게 가..널 두고...”
“나? 내 걱정은 하지 마..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오빠 맘 이해 한 번 해보려고..나 혼자 이렇게 비참할 순 없잖아. 나 혼자 이렇게 내 가정 지키려고 아등바등 하면 너무 바보 같잖아..”

아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아내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아내의 생각도..


아내가 휴대폰을 집어 든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어..태현 오빠 나야..”

태현이다. 처음 연애를 하면서 너무나 신경 쓰였던 그 이름..혹시나 다시 나에게서 아내를 뺏어가지 않을까 너무나 날 걱정하게 만들었던 그 이름이 다시 아내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나에겐 아내를 막을 힘도..그럴 명분도 조금도 없었다.
아내는 태현과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고 나를 바라봤다. 웃음 띈 얼굴로..

“이제 이러면 된 거니? 오빠는 그 여자에게 가고, 나도 오빠를 이해하기 위해서 태현 오빠를 만나면 그러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인가?”
“으..은주야...”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이런 나를 걷잡을 수 없을까봐 걱정이 돼..하지만 아직까지 오빠를 놓고 싶지 않아. 그 사람에게 뺏기고 싶지도..그런데 그냥 바보같이 이렇게 있으면 내가 너무 비참해질까봐. 당장이라도 오빠에게 이혼하자고 할까봐.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력을 해보는 거야. 오빠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 아내를..
아내는 지금 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내에게 그것마저 하지 말라며 그렇게 난 말할 수 없었다.

“이제 가도 돼..그 사람에게...”

아내는 그 말을 끝으로 쇼파에서 일어서 안방으로 들어갔고, 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초..1분..1시간..
그렇게 멍하니 서서 1시간이란 시간이 흘렀고, 안방에서 아내가 내가 사준 흰색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평소 명품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내가 한동안 꽂혀서 계속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곤 하던 원피스..

난 그 사실을 알고 결혼 10주년이 되던 날 아내에게 그 원피스를 선물했다.
아내는 원피스를 선물 받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나에게 웃어 보였었다.

너무나 아까워서 도저히 입지 못하겠다던 그 원피스..
1년에 한 번 입을까 말까한 그 원피스를 아내가 입고 나온 것이다.
태현에게 가기 위해서..

“은..은주야..”
“기다리지마”

아내는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고, 그저 어서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나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문자를 하고 몇 십 번 전화를 걸어도 돌아오는 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목소리뿐이었다.

초조함...불안함...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으로 얼마나 아내를 기다렸을까..
시간은 어느새 12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순간 허탈함과 함께 웃음이 튀어 나왔다.
내가 새벽4시가 넘어서 들어왔는데 한 숨도 못 자고 울면서 날 기다리다 자신이 잘못한 게 있냐며 묻던 아내...

이미 내가 바람피는 걸 알면서도 아내는 날 믿고 기다리며 아침이 밝아오도록 날 기다린 것이다.

내가 돌아오길 바라며..설마 아침이 될 때까지 그 사람과 있지는 않겠지란 생각으로..
몸은 줘도 마음만은 줘버린 건 아니겠지..그런 생각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난 그 기대를 무참히 깨버린 것이고..
아내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잘못한 게 있는지 물었다.
아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고.. 모든 잘못은 내가 하고 있었음에도..

왜 난 한 번도 아내한테 당당하지 못했을까..
아내는 조금의 잘못도 없었기에 나에게 그리 당당했다.
태현과 아무 일도 없었기에..나에게 죄를 짓는 짓을 한 게 하나도 없었기에 그리도 끝까지 당당했고 날 끝까지 믿어주었지만..

지금도 난 아내에게 조금도 당당하지 못하고..비겁하게 아내가 아무런 일이 없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한 짓에 대한 조금의 부끄러움도 반성도 없이..태현과 아내에게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았음을 바라고 또 바라는 쓰레기 같은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을 지금 이 순간에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란...나란 인간은 정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온다. 아내는 지금까지 그 모든 사실을 다 알면서도 혼자서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란 인간은 도대체 아내에게 어디까지 최악의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그 순간 휴대전화가 울린다. 정희씨의 전화다.
나로 인해 힘들어할 또 다른 한 사람..갑작스레 모든 연락을 하나도 받지 않아 너무나 걱정스럽겠지..그래서 지금 이 시간까지 잠 못 들고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겠지..

아내와 정희씨,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알량한 생각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고 이미 아내에게 커다란 상처를..정희씨에게도 커다란 상처를 가져다주기 직전까지 내몰고 있었다.

“여보세요..”
“민수씨 울어요? 목소리가 왜 그래요..왜 하루 종일 연락이 안되요..걱정되게..”

가늘게 떨려오는 정희씨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위태했다.

“난 괜찮아요. 시간이 늦었는데 안자고 뭐해요..”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는데 잠이 와요..이런 적 한 번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그러는데..”

한 번도 이런 적 없는 사람..난 오늘 두 사람에게 동시에 신뢰를 잃어버린 것인가..
한 번도 바람을 피워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가..한 번도 연락 안 된 적이 없던 사람이 되어 있는 나는 두 사람의 신뢰를 얼마나 깨트려버릴 것인가..

“날 왜 기다려요..나 같은 사람을 왜..나같이 정신 나간 쓰레기 같은 놈을 왜...”
“민수씨 도대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내가 그리로 갈까요? 어디에요. 내가 갈게요”

다급하게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는 정희씨..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말하면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지..

하지만 내가 유부남이라면..아내와 내가 사는 집으로 오라고 한다면 그녀는 올까..그럴 리가 없겠지..그건 말도 안 되는 정신 나간 짓이니까..

“지금 당장은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어요. 정말 미안해요. 날 걱정해주는 건 정말 너무나 고맙고 미안한데 당분간은 그냥 날 믿고 기다려줘요. 내가 모든 걸 설명해줄게..그동안은..그냥 날 믿고 기다려줘요..”
“알았어요...그게 민수씨 결정이라면..기다릴게요..”

깊은 한숨과 함께 정희씨의 전화가 끊어진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짜고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고 당분간 기다려달라는 내 말이 얼마나 황당하게 들려올까..

정희씨의 연락에 넋이 나가서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도어락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내가 들어온다.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비틀대면서 들어오던 아내는 내가 다가가 부축을 하려고하자 나를 거칠게 밀어냈다.

“내가...내가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왜 다 오빠 마음대로야..내 말이 우스워? 바람피는 것도 오빠 맘이고..내 몸에 손대는 것도 오빠 맘이야? 왜 그렇게 다..오빠 맘대로야..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니..”
“은주야 그게 아니라..”
“됐어..시끄러..다 필요 없어..다..”

은주는 쓰러질 듯이 위태롭게 비틀비틀 대면서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 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이미 완전히 아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기에 난 안방으로 들어가 아내를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히기 위해 옷을 벗겼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난 혹시나 아내가 태현과 잠자리를 가지진 않았는지 확인했는데 아내의 벗은 몸에 그런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란 놈은 이런 상황에도...’

끝까지 아내와 태현의 관계를 의심하는 나란 인간에 대해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고..그 순간 아내가 몸을 옆으로 뒤척이며 잠꼬대를 했다.

“난...난..그럴 수 없더라..태현 오빠에겐 아무 마음이 생기지 않더라..오빠를 사랑하니까..”

술에 취해 잠에 취해 힘들게 한 단어 한 단어를 말하는 아내의 잠꼬대가 너무나 선명하게 내 귓가에 들려왔고, 그 말은 내 마음을 너무나 깊게 후벼 파고 있었다.

“나...나란 놈은 정말....”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난 그 눈물을 참으려 이를 악물면서 아내에게 잠옷을 입혀주고 조용히 안방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쇼파에 앉아 한참을 울며 내 뺨을 때렸다.
아내에게 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이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내 스스로 뺨이 아니라 다른 곳을 더 심하게 때릴 수도 있었다.
아내의 맘을 조금이라도 달래줄 수 있다면..그 어떤 것이라도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지금은 아내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길..아내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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