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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피기 좋은 날 - 8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3 01:24 801회 0건
여름의 타는 듯한 뜨거운 바닷가도 매력적이지만, 한겨울의 조용한 바닷가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조용한 바닷가에 찬바람이 불며 눈이라도 내리면 그런 낭만적인 분위기가 더욱 더 살게 되고, 누구와 오더라도 혹은 혼자 오더라도 뭔가 로맨스가 생길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하물며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하는 겨울 바닷가는 더 말해서 무엇하리..

차를 타고 가다 인적이 거의 없는 듯한 바닷가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한참을 바닷가를 걸었다.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낮은 낮대로..밤은 밤대로 매력이 있는 게 바다이니까..

“좋네요..참 좋아..”
“나도..나도 좋아요...”

그러다 눈이 내린다. 바닷가의 날씨는 언제나 종잡을 수 없으니까..

“와 눈 온다..”
“그러게요..일기 예보에는 눈 온다는 말 없었는데..”
“예쁘다..저기 봐요..바다에 닿으니까 바로 녹아서 사라져요..”
“그러네요..정말 예쁘네요..”

바다의 수면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리는 눈.. 그리고 우리 주위로 하얗게 백사장을 물들이는 눈.. 마치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벌써 이렇게 같이 여행한지 삼일이나 지났어요..알아요?”
“그런가요? 시간 참 빠르네요..”
“민수씨..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어서 물어보진 못했지만 솔직히 궁금하네요...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나도..궁금해요..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내가 미리 대답해줘요...?”
“.......”
“아마 나는 저기 바다에 닿는 눈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아내는 민수씨에게 우리 주변에 지금 쌓이고 있는 눈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수많은 추억이 겹겹이 쌓인 사람.. 사람은 추억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잖아요. 그런 많은 추억을 가진 사람을 놓기란 쉽지 않잖아요..”

정희씨가 저만큼 먼저 걸어간다. 가는 걸음걸음마다 하얗게 변하는 백사장 위로 정희씨의 발자국이 찍힌다.

나는 정희씨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을 같이 하고 있는 건 정희씨였지만, 사실 이 곳은 아내와의 연애시절에도 그리고 결혼하고 나서도 많이 왔던 바닷가였다.

아내는 경북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20살이 되기 전까지 바닷가를 딱 두 번 밖에 가보지 못했는데 그 바닷가가 너무나 인상적이고 좋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와 연애를 하며, 또 결혼을 하고 나서도 우리의 여행은..휴가는 항상 바닷가였다.
바다를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

난 정희씨와 여행을 왔지만 이번 여행을 하면서 오히려 아내를 그리고 아내와의 추억을 수도 없이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아내와의 추억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그 어딜 가도 아내와 함께 했던 많은 것들이 가득 가득 쌓여 있었다.

“안 올 거에요..? 나 먼저 가요”
“기다려요. 같이 가요..”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벌써 저만치 멀어져간 정희씨가 해맑게 웃으며 나를 부른다.

사랑스러운 사람...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람..

아내와의 수많은 추억이 쌓이고 또 쌓여있고..아직도 아내를 많이 사랑하지만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너무나 예쁘고 예쁜 사람..

어쩌면 저 사람을 결국 울리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 사실이 나를 너무나 힘들게 했다.

이미 정희씨의 말대로 결국은 내가 아내에게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더 확고해지고 있었기에 마음이 아파왔다.

정말 이번 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 될 지도 모를 것만 같아서..

“이거 봐요 예쁘죠”
“그러네요..”

언제 바닷가에서 찾은 건지 정희씨는 정희씨의 눈만큼 맑고 예쁜 조약돌을 집어 들어 나의 손에 올려놓았다.

“선물이에요~ 내가 선물했으니까 오늘 저녁은 민수씨가 쏘는 걸로..!”
“그러죠~ 좋은 선물 받았으니까 저녁은 제가..”

정희씨가 다시 환하게 웃는다. 정말 그늘이라곤 이 사람에게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늘 나에게 밝고 환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그녀..

“나 배고파요. 벌써 6시네~ 얼른 저녁 먹으러 가요”
“그래요. 뭐 먹고 싶어요? 회? 아님 매운탕? 아님 이 근처 근사한 밥집 있으려나”
“어디라도 좋아요..”
“에이~ 정희씨 먹고 싶은 거 먹어야죠”
“난 정말 상관없어요. 그냥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 있으면 들어가요”
“그래요 그럼..”

정희씨와 난 한참을 걸었다. 둘 다 우유부단한 성격이라서 그럴까..
늘 이렇게 저녁 메뉴 하나 고르는 것도 서로 미루다 힘들어서 끝은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들어가자로 결론이 나곤 했고, 고집은 또 쎈 게 비슷해서 마음에 안 드는 곳은 곧 죽어도 가기 싫어해서 이렇게 정말 먹을 곳이 많이 없는 곳에서는 한참을 걷곤 했다.

“어..저기 왠지 괜찮아 보이는데요..”
“어디요..? 아 저기 불빛 비치는 저 식당이요?”
“네..”

커다란 바위 위에 지어진 3층의 어딘가 분위기 있어 보이는 식당..

솔직히 말하면 벌써 30분 넘게 걸어서 조금 힘들기도 했고, 멀리서 봤을 때 뭔가 분위기 있어 보여서 괜찮을 거 같은 느낌이었는데 가까이서 봐도 나쁘지 않아 정희씨에게 가보자고 했는데 다행히 정희씨도 싫은 것 같지는 않은 눈치였다.



안으로 들어간 식당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나름 분위기 있고 괜찮아 보이는 레스토랑이었고, 우리는 그 곳에서 저녁을 먹고 간단히 와인을 한 잔 했다.

“바위 위에 지어져 있어서 그런지 전망이 참 좋네요..밤바다가 예뻐요..”
“그러게요. 어쩌다 지나가다 들린 건데 전망도 예쁘고 맛도 나쁘지 않네요”
“네 맛있었어요. 맛도 좋고 전망도 좋고..하나만 빼면 다 좋네요..”
“뭐가 맘에 안 드는 게 있었어요?”
“민수씨요..여자 맘 모르는 민수씨..”
“네...?”
“자꾸 내 입으로 아내 이야기 하는 거 싫긴 한데 혹시 아내 앞에서 내 생각하거나 나 떠올리고 그런 적 있어요?”
“.........”

할 말이 없다. 그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있구나..정말 민수씨 욕심쟁이인건지..미련한 건지..여자들은 민감하잖아요. 예민하고.. 자기 앞에서 다른 여자 떠올리는 걸 모를 거 같아요? 당연히 알지.. 그것도 민수씨처럼 그렇게 대놓고 티내는 사람이면..”
“티..많이 나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여행 하는 3일 내내 오로지 나한테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나 있었나 본인이 한 번 생각해볼래요?”
“하...미안하네요..”
“미안..정말 미안해서 미안한가 궁금하네요..나도 알아요. 민수씨 지금 입장..그리고 많이 힘들거라는 거.. 하지만 이번 여행은 정말 우리 둘의 마지막 여행이 될 지도 모르는데..그래서 나한테 좀 집중해 주길 바랐는데 그게 아니니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그러네요..”
“정희씨..”
“알아요. 내 욕심이란 거. 민수씨는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고..난 처녀고..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내에게 돌아갈 테니..그거 너무나 잘 아는데.. 어쩌면 이번 여행 이후로 민수씨 다시는 볼 수 없을거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아는데..그래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시간만큼은 나한테 좀 집중해 줬으면 해요...그게 그렇게 어렵나요?”
“.........”
“민수씨는 너무 욕심이 많아. 정말..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사람..아내나 나나 다 불쌍하네요..왜 민수씨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지..”

정희씨가 웃는다. 그것도 환하게..
이런 말을 하면서 울어야 할 거 같은데..
저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정말 나쁜 놈이라고 나를 조롱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미워서 이젠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것일까..
도무지 그 의미를 모르겠다.

“정말 미안할 때만 미안하다 말해요. 어쩌면 그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가 더 상처가 될 지도 몰라.. 정말 민수씨가 나나 아내한테 미안한 건지 난 잘 모르겠네요..결국 민수씨가 선택한 거잖아요. 날 만난 것도..아내를 만난 것도..”

정희씨는 그 말 이후 한참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고, 정희씨처럼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정말 두 사람한테 미안한 게 맞는 건지..

“그만 가요. 날이 늦었네..내일 또 아침 일찍 출발하려면 일찍 자야죠. 이제 4일 남았는데 하루도 그냥 아쉽게 쓰고 싶지 않아요”

정희씨는 먼저 일어나 씩씩하게 걸어갔고, 난 그 뒤를 말없이 뒤따라갔다.





“오늘은...싫어요..”
“화 난 거에요?”
“민수씨..”
“네...”
“내 몸이 좋은 거에요? 아님 날 정말 사랑하는 거에요?”
“그게 무슨..”
“남자들은 사랑 없이도 섹스 하잖아요. 여자들도 물론 그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요. 사랑 없이 섹스를 잘 하진 않죠. 남자들에 비해서..”
“그래서요..내가 정희씨의 몸만 탐하려고 한다는...?”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해요. 그냥 오늘은 솔직히 좀 혼란스럽네요. 정말 민수씨가 절 사랑하는 건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절대 정희씨와 섹스를 위해서 만난 건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거라면 내가 이렇게 힘들어할 이유도 없고, 정희씨와 여행을 오지도 않았겠죠”
“알아요...알아....근데..화 나.. 질투 난단 말이에요..이번 여행 끝나면 당신이 그 사람에게 가 버릴 거라는 거 아니까...그래서 그냥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내가 쉬운 여자라서.. 나와 섹스하려고 만난 사이라고..그렇게 민수씨가 말해주면 마음이 편할 거 같아서..”

정희씨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그리고 난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다.
아내를 버리는 선택..그런 선택을 할 수 없을 거란 걸 여행을 시작하고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느끼고 있었기에..

정희씨가 그런 내 감정을..내 마음을 읽었단 걸 알았기에
더 이상 난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그건 거짓뿐인 위로가 될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난 어쩌면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를 다짐을 했다.
정말 남은 4일 동안은 이 세상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정희씨 하나뿐이라는 생각으로
정희씨에게만 집중하기로..

그게 내가 정희씨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예의이자 배려라고 생각이 들었으니까..


난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훌쩍거리고 있는 정희씨에게 다가가 뒤에서 조심히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정말..이번엔 거짓이 아니에요. 정말 미안해요.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거 같네. 내 말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정말 지금부터는 정희씨에게만 집중할게요..”

뒤로 돌아있던 정희씨가 내 쪽으로 몸을 돌린다.
아직도 눈가에 촉촉하게 맺혀있는 눈물..
난 그런 정희씨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병 주고 약 주기에요..웃긴 왜 웃어..나쁜 사람...”
“미안..그냥 웃음이 나오네요. 그렇게 삐져서 훌쩍이고 있는 거 보니까 너무 귀여워서..”
“귀엽긴 뭐가 귀여워..울어서 얼굴도 엉망인데...”
“이리와요. 안아줄게..”
“놔요...”

내가 안으려는 걸 한참을 칭얼대며 밀어대던 정희씨는 계속해서 꿋꿋이 안으려는 나에게 백기를 든 건지 나를 향해 입을 삐죽 내밀고는 나에게 안겼다.

“좋아서 안기는 거 아니에요..”
“알았어요..오늘은 몸에 손 끝 하나 안 건드릴 테니까 어서 자요. 오늘 많이 걸어 다녀서 피곤할 텐데..”
“좀 피곤하긴 해요..”

따뜻한 정희씨의 체온..
정희씨를 먼저 재우려고 안았는데 정희씨의 몸이 너무 따뜻해서 그런지 내가 먼저 졸음이 밀려온다.

“민수씨..”
“어? 네네..”

살짝 잠이 들었다 정희씨의 말에 난 다시 잠에서 깨었다.

“미안..자는 거 방해했나 보네..”
“아니..말해요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깜빡..”
“아냐..피곤한가 보네..얼른 자요”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그리고 피곤하면 정희씨가 말 안 해도 말하다가 아마 잠들 거 같은데요..”
“그렇긴 하네요..”

정희씨가 나를 보며 빙긋 웃는다.

“한 여자가 있었어요..그리 잘 나지도 그리 못나지도 않은..”
“네...”
“여자는 욕심도 많고 꿈도 많은 평범한 그런 학생이었어요.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가지고 싶은 것도 많은..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나게 됐어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처음엔 무척이나 아저씨 같아 보이는 그런 남자를..”

내 이야기인가..? 순간 멍해지던 정신이 또렷해지며 난 이야기에 집중했다.

“남자는 여자가 일하는 카페에 단골로 오는 손님이었어요. 매주 최소 2번 이상은 꼬박꼬박 오곤 했죠. 그러기를 3개월..여자는 남자가 궁금했어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사람인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항상 똑같은 시간에 와서 2시간 이상 가만히 앉아 있다 갈까 하고 말이죠. 남자는 카페에 오면 늘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 가곤 했거든요”
“그래서요..”
“결국 궁금한 사람이 먼저 다가간다고..여자는 남자에게 먼저 다가갔어요. 호기심을 못 이긴 거죠. 당신이 궁금하다고..어떤 사람인지..왜 항상 같은 커피를 시키고,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2시간이 지나면 가는 것인지..”

점점 이야기가 흥미로워진다. 난 이미 잠이 달아난 지 오래였고, 눈을 반짝이며 정희씨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러자 남자는 놀랍게도 그 이유를 모르냐고 오히려 여자에게 반문했어요. 당연히 여자는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고, 전혀 모르겠다고 대답했죠. 남자는 그 대답을 듣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일 말해주겠다고 가버렸어요. 여자는 갑자기 남자가 가버리자 당황스러웠지만 내일이면 대답을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하루만 참자는 생각으로 기다렸죠.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여자는 카페 매출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 괜히 자기가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단골손님을 쫓은 건 아닌 가 후회가 됐죠”
“그랬겠네요”
“그런데 단골손님이던 그 남자를 완전히 다 기억에서 잊었다고 생각하던 한 달이 되어가던 시점, 남자가 다시 카페에 나타났어요. 여자는 무척이나 놀랐고,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가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뜻밖의 고백을 했어요. 당신이 좋다고..하지만 좋아해도 될지 모르겠어서 한참을 망설였다고..그래서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다고..”
“와아..대박이네요..그래서 고백을 받아드렸어요?”
“여자는 갑작스런 고백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지만, 처음엔 너무나 아저씨 같던 남자가 어느새 너무 편안하게 느껴지고 차츰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호감이 그 이상의 감정으로 발전하려던 찰나 그 남자가 사라져버린 거죠. 그래서 그 고백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어요. 여자는 사랑에 너무나 쉽게 흔들릴 나이 20살이었으니까요..”
“어쨌든 그럼 잘 된 거 아닌가요? 해피엔딩이니까..”
“그렇게 끝이 났으면 그랬겠죠”
“뒷이야기가 더 있나요?”

정희씨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 한숨의 의미는 무엇일까...

“둘은 정말 뜨겁게 사랑했어요. 24시간이 너무나 짧을 정도로..사귀고 나서도 남자는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여자가 학교가 마치는 시간이면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 아르바이트 하는 곳까지 바래다주고, 아르바이트가 끝이 나면 다시 기다리고 있다 여자를 만났어요. 그리고 밤이면 항상 같이하곤 했죠. 여자는 자취를 했거든요”

어딘가 정희씨 이야기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야기..그리고 불안한 느낌..

“불타오르듯이 뜨거운 사랑..그 사랑은 뜻밖에 이유로 얼마 가지 못했어요. 여자의 자취방으로 들이닥친 한 여자..그 여자는 남자의 부인이라고 말하며 여자를 막무가내로 때리고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살면서 이렇게 많은 욕을 들어봤나 싶을 정도로 입에 담기도 힘든 저주와 같은 욕을 퍼붓고 떠났어요”
“아......”

나도 모르게 긴 탄식과 함께 한숨이 튀어 나온다.

“여자는 울었어요. 울고 또 울고..자신이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그리고 한참을 울다 지쳐서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가 되어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죠. 하지만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한 통, 두 통, 열 통, 스무 통이 넘게 전화를 했지만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왜..왜 그런...”
“하루 이틀..일주일..남자는 종적을 감췄어요. 당연히 연락도 없었고.. 그렇게 다시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남자는 카페에 나타났어요. 무척이나 수척해진 몰골로..”
“하아....”
“여자는 남자를 보자마자 당장 뺨이라도 때리고 싶었지만, 너무나 남자의 꼴이 말이 아니었기에 차마 그럴 수 없었어요. 그리고 남자가 여자를 처음 보자마자 꺼낸 말이 미안하단 말이었으니까...남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체 끝없이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고..여자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그때 찾아와서 했던 여자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구나 라는 생각만 들었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는 유부남이란 사실...”
“그래서...결국 헤어진 건가요..?”
“대부분의 유부남들은 바람을 피워도 다시 아내에게 돌아가죠. 그 남자도 다를 바 없었어요.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너밖에 없다고 말했지만 다시 아내에게 돌아갔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결국...그렇군요...”

가슴이 찌릿하다. 모든 이야기가 나에게 하는 이야기 같아서..
가슴이 아프고 정희씨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결국 미안하다는 말밖에 해 줄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런 사실이 너무나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누구 이야기 같아요...?”
“글쎄요..정희씨...?”
“우리 엄마요..스무살에 날 가진 우리 엄마 이야기에요..”

말문이 막힌다. 차라리 정희씨 이야기라면 좋았을 것을 이란 생각과 함께..

“난 얼굴도 모르는 우리 아빠라는 사람에 대해서 내가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의 전부에요. 엄마는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아빠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 전엔 아빠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내가 물을 때마다..그저 아빠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먼 나라에 가 있다고 이야기만 했었거든요”

가슴이 시리다. 내가 이런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런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고 너무나 어이가 없고 충격적이었어요. 우리 엄마가 미혼모라니..유부남과 사랑해서 태어난 게 나라니..아빠라는 사람은 내가 세상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니..정말 솔직히 말하면 너무나 충격적이고 더럽고 죽고 싶었어요.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라니..내 몸이 너무나 더럽게 느껴졌어요..”
“.........”
“6개월..꼬박 6개월이 걸린 거 같아요. 그 사실을 인정하는데..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었거든요.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고..매일을 울고 또 울면서 악을 쓰고 화도 내보았지만 결국 깨달았어요. 그래도 바뀌는 건 없다고.. 내가 불륜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 우리 아빠가 유부남이란 사실은 내가 인정하기 싫어도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는 거니까..”
“그렇죠...”
“그렇게 인정을 하고 나니까 차라리 마음이 편하고 홀가분하더라구요. 처음부터 인정할 걸..그냥 받아들일 걸..그런 후회가 들 정도였으니까..그렇게 6개월..6개월이란 시간동안 난 너무 나만 본다고 주위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고 있었죠. 엄마는 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예전부터 생각해왔다고..저녁잠이 무척이나 많던 엄마가 밤새 자지 않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할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전 눈치를 전혀 못 챘어요. 그 날이 엄마가 떠나기 전 날 밤이었는데...엄마는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몇 번이나 나한테 꼭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서 자식도 놓고 행복하게 잘 살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난 어디 갈 사람처럼 왜 그러냐고 그랬고..그러다 잠이 들었고 깨어보니 엄마는 없었어요. 그동안 엄마가 모아놓은 전 재산과 편지 한 장을 남겨 놓고 사라진 거죠. 자기를 찾지 말라면서..자기는 엄마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희씨....”

뭐라 할 말이 없다. 난 그저 정희씨를 내 품에 꼭 끌어안았다.
내가 나쁜 놈일지라도..내가 천하의 쓰레기 같은 놈일지라도 그냥 지금은 이렇게 정희씨를 꼭 안고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내가 조금이라도..도움이 된다면, 위로가 된다면 그걸로 족하니까..

“마지막 그 편지..그 편지를 보고 울지 않았어요. 울 수 없었어요. 보란 듯이 잘 살겠다고 이를 꽉 물고 그렇게 다짐했어요..5년..그게 벌써 5년 전이네요. 그런데 그렇게 잘 살 거라고 다짐해 놓고 지금 이렇게 되 버렸어요. 나 어떡하죠...”

정희씨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이제야 알 거 같아요. 엄마가 너무 바보 같다고 순진해서 유부남한테 당한 거라고..아빠가 나빴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그렇게 원망했는데..이제야 조금 알 수 있을 거 같아요..”
“정희씨...”

정희씨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사랑이 맘처럼 되지 않는 거란 걸...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마음이란 걸 어쩔 수 없다는 걸...민수씨..”
“네....”
“나 민수씨 사랑한 거 하나도 후회되지 않아요. 민수씨가 결국 아내에게 간다 해도 조금 밉긴 하겠지만 원망스럽지 않아. 사랑이란 건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같이 좋아서 한 거니까..반은 내 책임이니까..원망하지 않을 거에요..그러니 나한테 너무 미안해하지도 말고..그저 지금은 지금만...나한테 충실해줘요..더 많은 걸 바라진 않아..”
“알겠어요..알겠어..그만...그만..자꾸 말하니까 눈물이 더 흐르잖아요..”

정희씨의 얼굴이 어느새 눈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프다. 더 이상 말 한 마디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너무나 아파왔고,
난 그저 정희씨를 내 품에 안고 그저 같이 울어주는 것 그것밖에 해줄게 없었다.

“당신을 사랑한 것..그건 거짓이 아니야. 사랑해요..사랑해서 상처를 줘서 너무나 미안하고..당신 앞에서 다른 사람을 봐서 너무나 미안해...미안..정희씨...그러니 그만 울어요..”
“몰라...몰라...말은 이렇게 했는데 민수씨가 떠나 버리면 정말 그래 버리면 나 그게 너무나 두려워요. 그게 두려워서 자꾸 눈물이 나..내 공간속에 모두 민수씨의 흔적이 남아있으니까..”

도무지 눈물이 멈추지 않을 거 같다. 그리고 더 이상은 나도 참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안고 소리 내어 너무나 서럽게 한참을 울었다.

뒤틀려버린 운명이 싫어서..서로를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처연해서..

그렇게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밤에서 새벽이...새벽에서 아침이 찾아와 지쳐 잠들 때까지..





“민수씨 일어나요. 해가 벌써 중천에 떴어..잠꾸러기 계속 잠만 잘 거에요?”
“어..몇 시에요..”
“벌써 두 시가 넘었어..잠꾸러기..”
“어..음...정희씨 얼굴이 왜 그래요..눈이 너무 부었는데..”
“웃기네..민수씨 얼굴도 완전 웃기거든요. 부어서..”
“그래요...?”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뜨고 휴대폰 액정에 비춰 보니 정희씨 얼굴을 뭐라고 할 게 아니라 내 얼굴은 정말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원래 잘생긴 얼굴도 아닌데 밤새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도저히 내 얼굴은 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하아..진짜 못생겼다...”
“알긴 알아요? 아니까 다행이네..”
“알죠..정희씨는 부어도 예쁘고..”
“치..거짓말...자자~ 그만 늦장 부리고 그만 일어나요. 이제 4일 남았어. 더 이상은 울지도 말고 정말 행복하게 그렇게 보내고 싶다구요..그러니 그만 늦장 부리고 일어나요..”
“이렇게 조금만...더...”
“어어....!!”

난 나를 깨우려고 다가오는 정희씨를 끌어안고 정희씨의 입에 진한 입맞춤을 나누었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서로의 옷을 벗기고 사랑을 나누었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시한부 같은 행복한 4일간의 시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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