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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3 01:21 981회 0건
## 씨클로


“ 어머? 오랜만이셔요~ “

“ 응. 잘 지냈어? “


저녁시간 병호는 간만에 씨클로를 찾았다.

점심시간, 아름과 식사를 하고 제안 마무리를 한 뒤 직원들을 퇴근 시켰다.

며칠만에 끝난 일정에 다들 반쯤은 혼이 나간 상태로 모두 퇴근을 한 뒤
병호는 아름과 따로 시간을 가지고 싶었지만 아름은 며칠 째 집에 들어가지 못해 일찌감치 가봐야 한다고 했다.

아쉬운 얼굴은 병호 뿐 이었을까.

병호는 아름의 얼굴에 스쳐가는 아쉬운 빛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아름을 보내고 정리한 뒤 사우나에서 샤워와 잠을 얻어 조금은 충전한 병호는 그간 뜸했던 씨클로에 얼굴을 내밀었다.


“ 얼마나 바쁘셨길래 한 번을 안오셔요? “

“ 아아~~ 잘 알잖아…. 우린 언제 시작할 지도 모르고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거. “

“ 호호. 그간 봐왔지만 언제나 익숙하진 않다구요. “


주희는 살랑거리며 병호의 옆으로 와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려넣는다.


“ 너무 바빠서 저 따윈 생각도 안나셨나봐요? “

“ 하하…하….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 “

“ 아름이랑 씹질하느라 정신 없었겠죠 뭐…. “

“ 어우…. 야야…. 그게. “


주희는 몸을 떼고 방긋 웃는다.


“ 그럼 오늘은 조용히 드시고 가셔요. 보시다시피 저도 바빠서…. “

“ 응? “


주위를 둘러보니 병호외에 손님이라고는 한 팀.
한 팀 정도야 알바생이 있으니 문제 없을 텐데 주희는 돌아서서 그 쪽으로 가버렸다.

…. 삐진건가?

남겨진 병호는 벙찐 얼굴로 주희를 돌아보았지만 주희는 병호 따윈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돌아보지 않았다.

위스키 샷잔 하나.
동그란 얼음이 담긴 온더락잔 하나와 물잔
견과류와 간단한 안주가 놓여진 접시와 언제나 마시는 멕켈란.
그리고 언제나 앉는 바 테이블의 자리.

병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미안했다.

흡사 먹고 버린 꼴이지 않은가.
아무리 정신 없었기로서니 문자 한 번을 하지 않았던 건 병호의 잘못이다.

아무리 엔조이라 하더라도 예의는 차리자는 게 병호의 규칙이라면 규칙이었는데
정말 주희의 말대로 아름에게만 빠져 전혀 신경을 못 쓴것인지 싶었다.

어떻게 풀어줘야 하나 하고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들어 갈 때 문자가 온다.

[ 띠링~ ]

발신인을 보니 주희였다.

‘ 응 ? ‘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주희는 역시 돌아보지도 않고 있었다.


‘ 반성 좀 하셨어요? ’

‘ ㅇㅇ 반성하는 중이고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있었어 ‘

‘ 어떻게 할 건데요? ‘

‘ 어떻게 잘못했다고 해야 주희가 봐주나 생각해봐야지. ‘

‘ ㅋㅋ 좀 있다가 검사하러 가겠어요. ‘


다행히 말을 붙일 기회는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잘 구슬러서 주희와 하룻밤을 보내볼까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해 지는 병호였다.

오후에 아름과 끝까지 하지 못한 욕구불만 이랄까.

정사를 가진 뒤로 아름은 익숙해 졌다고 해야 할 지 대범해 졌다고 해야 할 지….
병호를 대하는 것에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남들이 눈치챌만큼 어떤 행동을 보이거나 들킨 것은 아니다.

뭔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아까 낮의 일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주저하는 모습은 있었지만 사무실에서 병호의 물건을 입에 넣던 모습….
게다가 수동적으로 시킨 것만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병호를 자극 시키기기 위해 여러가지로 핥고 빨던 모습은
병호가 알던 아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싫지는 않지만 말이다.

사람관계에 있어 동률은 없다고 생각하는 병호였다.
어느 누군가는 당연히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가급적이면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다.
아름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아름에게 넘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훗….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병호는 피식하고 웃음을 입에 물었다.
아무래도 병호는 아름을 완전히 자기 것을 만들고 싶은 듯 했다.


“ 실례 좀 할까요? “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병호.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장년의 신사가 자신의 언더락 잔을 들고 빙긋이 웃고 있었다.


“ 아…. 예 무슨 일이신지…? “

“ 이런….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전 여기 씨클로의 오너 입니다. “

“ 아~! 사장님이셨군요? “


씨클로에 다닌지 몇 년이지만 사장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주희의 말로는 일흔 즈음의 노인네라고 했는데 실제로 보니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갓 60 즈음 된 모습.

180 중반은 되어보이는 키에 체격이 좋았고 떡 벌어진 어깨가 운동으로 열심히 관리하는 모습이었다.

머리는 반백이었지만 짧게 자르고 왁스를 발라 단정하게 넘긴데다가
핏 좋은 면바지를 간단히 접어올려 발목이 드러나게 하고 스니커를 신은 폼이 어색하지도 않았고 낡은 데님셔츠를 걸쳤으나
추레하지도 않았다.

나이를 먹었으나 스타일이 좋다고 할까?
외려 병호와 같이 다닌다면 조금 농담을 보태 큰형님 뻘로 볼 수 있을 듯 했다.


“ 주희한테 말만 들었지 처음 뵙네요. 저희 누추한 가게를 자주 이용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

“ 하하 누추하다뇨…. 저 역시도 아끼는 가게 입니다. “

“ 말씀 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오늘 지인들과 가볍게 마실 곳을 찾다가 가게에 오게 되었네요.
원래 평일에는 오지 않는게 제 철칙인데 오늘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


병호보다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씨클로의 사장은 깎듯하게 예의를 지켜 주었다.

커다란 체격에 어울리는…. 잘생겼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호남형으로 생긴 얼굴 또한 호감가는 인상.
거기에 예의바른 행동은 나름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병호에게도 호감으로 다가왔다.


“ 저희 일행이 소란스러워 실례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

“ 아아~ 아닙니다. 그리 신경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는데…. 이해 할 수 있죠.“

“ 하하하~ 감사합니다. 제가 조금 봐달라는 의미로 오늘 보틀 하나 서비스로 드려도 될까요?
언제나 드시는 걸로 하나…. 아 지금 드시는 술, 오늘 오픈 하신 듯 한데 그건 제가 사겠습니다. “

“ 네? 아…. 그래도 될까요? “

“ 하하 그럼요 술집 주인이 술 밖에 남는게 더 있겠습니까? 하하하 “

“ 어머? 사장.. 님 그렇게 기분 내시면 장사를 어떻게 하라고…. “


어느덧 다가온 주희가 기분내는 사장의 옆에 서서 참견을 하고 있었다.


“ 하하. 주희 몰래 생색 내려고 했는데 들켰네요. 하지만 정말 드리는 것이니 부담 가지지 마시고
다음에도 편히 오시기 바랍니다. “

“ 호의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같이 한 잔 하시죠. “

“ 그럴까요? 하하 그럼 언제 한 번 느긋하게 마셔보시죠. “


사장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일행들에게 돌아가다가 주희에게 한 마디 했다.


“ 주희는 우리 신경쓰지 말고 단골손님 상대 좀 해드려라. “

“ 네? 그래도 될까요? 일행분들 계신데 필요하신 게…. “

“ 그건 내가 해도 되니 괜찮다. “

“ 그게…. “

“ 괜찮다. “


잠깐 스쳐가는 표정.

병호는 사장의 얼굴에 잠깐 스쳐가는 표정을 보았다.
아까까지 같이 웃던 그 사람과는 다른 무언가가 눈 뒤에서 쏘아진 듯 한 느낌.
흡사 차가운 물을 한 번 끼얹은 듯한 느낌이었다.


“ 네. 알겠습니다. “


주희의 대답을 들은 사장은 다시 한번 목례를 하곤 자리로 돌아갔다.


“ …. 멋지신 분이네…. “

“ …. 네.“

“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 명함도 못 드렸네. “

“ 장, 건자, 익자. 장건익 이셔요. “

“ 응 장사장님 이시구나. "


주희는 병호의 말에 대답은 하지만 멍한 모습이었다.
내려 깔은 눈의 흐리멍텅함은 무언가 생각에 잠겼음을 이야기 해주었다.

한데 부모님 함자를 말하듯….
연세야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장의 이름도 그렇게 말하나 ?


“ 이봐요~ 주희씨~! “


병호가 약간 톤을 높여 부르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는 주희.
눈을 마주치고 잠깐 당황하더니 생긋 웃으며 둥글게 모양짓는 눈꺼풀 뒤로 눈빛을 숨겼다.


“ 우리 사장님 처음 보셨죠? “

“ 응…? 흠…. 그렇네? 평일에 여기 오시지도 않는다며? “

“ 네 거의 안 오시는데 오늘처럼 어쩌다가 한번은 오셔요. 3~4 개월에 한번 정도. “

“ 주말은 언제나 계시고? “

“ 음…. 보통은 그러시죠.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 한번은 계셔요. “

“ 나름 규칙이신가봐 하하. “

“ 아무래도 물장산데 남자 사장 드나들면 손님들 싫어하신다고…. “

“ 킥킥 그러시기엔 여기가 그렇게 손님이 많은것도 아닌데? “

“ 호호호 그렇긴 하죠. “


병호는 술 한 모금을 넘기고 주희에게 물어본다.


“ 연락도 안하고 그래서 미안하네…. 이따가 마감하고 가볍게 야식이라도 할까? 어때? “

“ …. 후훗…. 안돼요. “

“ 이런…. 화 풀어~ “

“ 호호호. 아녀요. 화 난것 아녀요. “

“ 그러면 무슨 일이라도? “

“ 음…. 아마도 저기 사장님 일행이랑 같이 나갈 듯 해서요. “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아무래도 손님은 병호 외에는 없고하니 사장이 간만에 온 김에 회식이라도 할 모양이다.


“ 쩝…. 아쉽지만 별 수 없지 뭐. “

“ 원래는 미안해야 하는데 그동안 연락도 없으셔서 그런지 전혀 미안하지가 않네요. 호호. “

“ 훗. 벌 받는거네? “


그 뒤로도 주희는 병호의 자리와 사장 일행의 테이블을 오가며 서빙을 했다.
아르바이트 생이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주희가 해야 하는 것들은 어쩔 수 없으니….

평소 혼자 술을 마시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지만 오늘은 혼자 마시는 것이 아쉬운 병호였다.

시계를 보니 밤 9시.
같이 마실 만한 사람을 찾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하릴없이 술을 홀짝거리며 스마트폰의 연락처를 뒤적거리던 병호는 문득 아름의 전화번호에서 손가락은 멈추었다.

생각해보니 개인적인 이유로 전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업무관련 전화는 해왔지만 섹스를 한 이후에도 개인적인 전화나 메시지 조차 없었다니….
아마도 매일 회사에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병호는 아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박 차장님. 쉬시는데 미안합니다~ 잠깐 통화 가능하신가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병호는 일부러 업무상 보내는 듯한 어투로 메시지를 보낸다.

[ 띠리링~ ]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울리는 병호의 전화벨 소리.
발신자를 보니 역시 아름이다.


‘ 예 한병호입니다. ‘

‘ 네 부장님. 무슨 일이신가요? 급하신거예요? ‘

‘ 음…. 좀 그럴거 같은데요. 박차장님 나오실 수 있겠어요? ‘

‘ 네.. 뭐 나가는 데에는 문제 없을 듯 한데요…. ‘

‘ 남편분에게 괜히 미안하네요. 괜찮으시겠어요? ‘

‘ 네. 어차피 지금 없어요. 출장 갔더라구요. 철야 해야 하겠죠? ’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거뒀다.
슬쩍 보내본 메시지로 이런 횡재라니…. 병호는 표정이 풀리며 웃음을 베어물었다.


‘ 아~ 난 또 아름씨 남편분 들을까봐 조심조심 이야기 했네…. 하하하. ‘

‘ 네? 아…. ‘

‘ 혼자 뭐하고 있었어요? 저녁은 챙겼고? ’

‘ 뭐… 대충 먹었죠…. 근데 무슨 일이세요? 광고주가 수정해달래요? ’

‘ 하하하하. 그냥 아름씨 보고싶어서. ‘

‘ 네? ‘

‘ 그냥 아름씨 보고 싶어서 문자 했다구요. ‘

‘ …. 후훗…. 일 터진건 아니네요? ‘

‘ 응. 업무는 아닌데 내가 보고 싶은 거죠. 어차피 혼자 있으면 나와요. ‘

‘ 그게…. 지금 시간이면…. ‘

‘ 전에 같이 왔던 바 알죠? 씨클로. 나 거기 있으니까 그리로 와서 한 잔 하죠. ‘

‘ 네? 네네…. ‘

‘ 천천히 준비하고 와요. 시간 많으니까. 하하 ‘

‘ 그…. ‘


병호는 아름의 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름이 지금 정말 나올지 안 나올지는 병호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이야기하고 아름은 듣는다.
내가 말하고 너는 듣는다.

설령 이 전화로 아름이 안 나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안 나오면 아름은 병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것이고 미안한 사람은 어떻게든 그 미안함을 메꾸려 할 것이다.

일종의 빚을 지운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미안하지도 않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 하는 걸 싫어해서 무례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병호는 이제 아름을 안다.

뭐 나온다면 더욱 좋고 말이다.


“ 뭐 좋은일이 생기셨나봐요? “


주희가 실실 웃고있는 병호를 보며 물었다.
병호는 씩 웃으며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 띠링~ ]

아름의 메시지.

‘ 지금 택시 탔는데 정확히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

병호는 다시 빙긋 웃으며 스마트폰을 들어 주희에게 흔들여 보였다.


“ 뭐예요…? 그… 아 흔들지 마셔요! 음…. 아 아름씨구나? “

“ 빙고~ “


병호는 아름에게 씨클로의 위치를 메시지로 보내기 시작했다.


“ 이 시간에 온다는 거 보면 되게 좋아하나 보네요? “

“ 에이 무슨…. 아직은 아냐 “

“ 뭘요. 할거 다 한 사이에. 킥킥 “

“ 킥킥킥. 아직 다 못했어. 아직 난 배고프다구. “

“ 둘이 잘 맞나봐요? 그 뒤로 얼마나 물고 빨고 하셨을까…. “

“ 그 때 이후로 바빠서 못했어. 진짜로 바빴다니까. “

“ 흠…. 옆에 여자가 있어서 내 생각도 안나나 싶었는데 정말 바빴나 보네요. 인정! “

“ …. 아직도 오해하고 있었냐? “

“ 흥~ 여자는 풀린 척 해도 오래간다구요. “


지금 시간 아름의 집에서 씨클로로 오는 길은 막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택시를 탔다니 늦어도 30분 내로는 올테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이렇게 즐거운 적은 오랜만이다.
어릴때 연애를 할 때나 그랬었는데….

그때는 서로가 휘두르는 감정에 다치고 다치게 하면서도 뭐가 그리 좋았을까.
연애라는 감정이 귀찮아진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나이였다.
하지만 서툴렀었기에 애틋한 마음도 있는 것이 사실.

미진과의 연애는 딱히 연애라기 보단 동질감이었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과 비슷한 성격과 비슷한 취향.
서로 투닥거리며 맞춰가는 과정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둘 사이였다.

그래서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동반자.

병호와 미진의 관계에서 둘은 동반자, 동료로서 결혼을 원했다.
물론 지금의 둘 사이는 그 목적의식에서 변함이 없이 잘 지내고 있는 중 이었고….

하지만 안정의 뒤에는 무료함이 숨어 있었다.

일상에 지쳐가는 심신에 무료함까지 더해지니 의욕도 없어지고 흥미도 잃어갔다.
뭔가 무료함을 떨칠 수 있는 것을 찾았지만….

역시 연애질 만한 게 없다.

아름과 관계를 가진 후 병호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어 안하던 운동을 하기도 하고
언제나 입던 옷 스타일을 바꾸기도 하고…. 머리는 단정하면 그만이라는 성격이 스타일링을 고민하기도 했다.

한동안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지 못한 삶이었는데 남을 사랑하니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 띵~! ]

엘리베이터 소리.

씨클로는 가장 윗 층을 사용하고 있기에 엘리베이터가 홀로 바로 연결이 되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은 아름이었다.

병호는 손을 들어 자신을 알렸다.

집에서 나온 아름은 오버사이즈의 니트를 입고 레깅스를 입은 간단한 차림이었다.
약간 흘러내린 한쪽 어께엔 안에 받쳐입은 나시의 끈이 달랑 올라가 있었고
머리를 틀어올려 목덜미를 시원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름이 병호의 옆으로 이동하는 동안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 공간에는 잠시 소음이 멈췄다.


“ 어머 오랜만이셔요. 박차장님 “

“ 네. 안녕하세요. “


병호의 자리 옆으로 앉는 아름에게 주희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직 자리가 낮선 아름은 얼굴은 살짝 굳어 있는 모습이었다.


“ 생각보다 일찍왔네요. “

“ 택시가…. 길이 막히지 않아서…. “

“ 자 한잔 하세요. “


병호는 아름의 잔에 호박색의 액체를 따른다.


“ 자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되셔요. 전 조금 바빠서….“


주희는 자리를 비켜주며 병호에게 슬쩍 눈인사를 하고 빠져나갔다.



“ 간만에 집에 들어가더니 저녁도 대충 때우고 뭐했어요? “

“ 그게 참…. 타이밍이 안맞았어요. “

“ 남편은 말도 없이 출장갔어요? “

“ 출장이야 자주 있는 일인데 제가 깜박했죠 뭐. “

“ 아 자주 나가시나보네…. “


병호가 슬쩍 잔을 들어보이자 아름이 가볍게 잔을 부딪혀 온다.
아직 술이 희석되지 않아 진할텐데 잘 마시는 아름이다.


“ 그동안 너무 신경 쓰지 못한 거 같아서 간만에 집에 들어가 저녁이라도 차릴까 했는데 집에 들어간 순간
출장 갔다는 게 생각이 났지 뭐에요. “

“ 뭐 정신 없었으니 그럴만도 하네. 일이 바빴잖아요. “

“ 좀 미안하더라구요. “

“ 흠…. 서로 자주 메시지나… 전화 같은 거 잘 안해요? “

“ 저희는 거의 안해요. 집에서 봐도 그다지 할 이야기도 없는데…. “

“ 하하…. 그나마 난 낫다고 해야하나…. 집 사람도 이쪽 계통이니 말귀는 알아 듣거든요. “


아름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넘긴다.
술을 넘기는 목선이 아까 낮에 병호의 정액을 삼키는 것을 연상되게 했다.


“ 하아~ 부럽네요. 말이 통하는 상대와 같이 산다는 게. “


술잔을 내려놓은 아름은 술기운을 입 밖으로 불어내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
병호는 아름의 빈 잔에 술을 다시 따라주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한다.
의아해하던 아름은 병호에게 가까이 갔다.


“ 하지만 섹스는 당신과 하는 걸? “


병호는 아름의 귀에 말을 흘려넣으며 입김도 불어넣었다.
흠칫하는 아름.

어이없다는 듯 병호를 바라보던 아름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핫! 그게 뭐에요…. “

“ 뭘? 정말로 그런데. “

“ 호호호!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아름의 웃음이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병호는 자신의 자리를 당겨 아름의 옆으로 바싹 앉았다.
그리고 다시 건배.

혼자인 술자리도 나쁘지 않지만 아름과 둘의 술자리는 더욱 좋다.

빙긋 웃던 병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들이 마셨다.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술과 좋아하는 가게, 담배, 그리고 옆에는 여자가 있다.

내 것인 여자가.


“ 한 부장님 “

“ 네 “


자신을 부르는 아름의 목소리에 아름을 바라보는 병호.
아름은 평소와 다르게 병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 하고 있었다.

가볍게 떨리는 눈동자.
그리고 역시 같이 달싹이는 입술.


“ 뭐에요? 편하게 이야기 해요. “

“ 우리…. 무슨 사이에요? “

“ …. “


갑자기 물어오는 아름의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언제나 사람의 관계에선 구분을 짓는게 사람이니까….

말이 필요없는 사이라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둘은 그렇지가 않다.

둘이 서로 끌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둘 다 가정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아마도 불안할테지….

물론 병호라고 해서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일을 누가 장담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둘 중 누군가는 결정을 지어 줘야 했다.
뻔히 알지만 말을 해주는게 좋다.

일종의 계약이니까.
그리고 그걸 결정지어 달라는 사람은 아름이고 결정 지을 사람은 병호다.


“ 우리…. 무슨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 …. 제가 질문 드렸잖아요. “


병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곤 아름의 손을 잡았다.


“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는게 좋겠죠? “

“ …. 네…. “


눈을 떨어뜨린 아름은 다시 병호를 바라본다.


“ 우린 말이죠. “

“ …. “

“ 불륜이지. 남들이 보면 불륜이라고. “

“ …. “

“ 그런말 있잖아요.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 알죠? “

“ … 네 “

“ 그거 말을 바꾸면 우린 로맨스에요. 연애, 사귀고 있는 거라고.
난 아름이란 사람이 좋아서 만나는 거고 섹스하고 있는거고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내 가까이 있어서 좋아.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고. 자고 싶고, 같이 있고 싶어. “

“ 하지만 우린… ! 이루어 질 수 없는 관계 잖아요. “


병호는 자신의 잔을 한 모금 들이켰다.
눈을 들어 아름을 바라보니 아름은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병호의 손에 잡힌 작은 손을 빼지는 않았다.


“ 뭐가 이뤄지는 거죠? “

“ 네? “

“ 그 이루어 질 수 없는 관계의 최종이 뭐길래 이룰 수 없는 거냐고. “

“ 그… 게…. “

“ 결혼? 같이 사는 거? “


아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 결혼을 해보니 다 이뤄진 거 같던가요? “


아름은 말이 없었다.


“ 결혼을 해보니까 다 완성된 거 같아요? “


역시 말이 없다.


“ 결혼이란 거, 같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방법인거지….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과 하는 동업.
난 그렇게 생각해요. “

“ 하지만…. 부장님은 결혼 생활 문제 없잖아요. “

“ 맞아요 문제는 없지. 같이 동업자의 관계로서는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건 당신과 동업을 하자는 게 아니잖아.

난 당신과 사랑을 하고 싶어.
당신과 있으면 난 내가 어릴 때 처럼 가슴이 뛰어.
흑백같은 회사가 당신 때문에 화사해지고
당신과 있으면 내가 더 쓸만한 놈으로 생각돼.

난 당신과 연애를 하고 싶다고.
남들이 욕하건 말건. “

“ …. “

“ 후회되요? 그날 날 잡았던 날이? “

“ 아… 아니에요! “

“ … 그러면 우리만 좋자.
같이 있을 때는 다른 생각하지말고 당신과 나, 우리 한테만 충실하자. “


아름은 말이 없었다.

병호는 아름의 어깨를 감싸고 두드렸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아름의 어깨는 작았다.


“ 아름씨 우리 한가지만 해요. “

“ 뭘요…? “

“ 우리, 우리만 있을 때엔 서로에게만 충실 합시다. 그 이상은 서로 바라지 않아.
난 당신한테 활력소가 되고 싶어.
라면같은 남자. 밥같은 남자 말고. “


아름의 어깨는 병호가 감싼 손에 가느다란 떨림을 전했다.
감정이 북받치는 지…. 아름은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 풋!! “


갑자기 터지는 웃음.
아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뱉고 말았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가 울음을 참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병호는 벙찌고 말았다.


“ 아 라면 같은 남자가 뭐에요.~! 킥킥 “

“ 에…? “

“ 막 멋져지고 있는 참인데 라면 같은 남자라니…. 킥킥킥 “

“ …. 나름 생각난 단어가 그 따위라서 미안하게 됐네요. “

“ 킥킥킥킥~ “


아름은 한참을 웃다가 물을 한잔 들이켰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있을 정도였다.

머쓱해진 병호는 연거푸 담배를 피우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 고마와요. 그리고 감사해요. “

“ 뭐가요…? 내가 라면 같아서? “

“ 깔깔깔~! 아니에요~~!! “


다시 웃음이 터진 아름은 한동안 멈추지 못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진정이 된 아름은 다시 말했다.


“ 언제나 감사해요. “

“ 뭘요…. 감사 인사 받으려고 그러는 거 아닌데…. “

“ 병호씨. “


갑자기 병호의 이름을 부르는 아름.
아름에게서 듣는 낮선 단어에 약간 놀란 병호는 아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고마워요. 그러니까 나도 이제 아름이라고 불러주세요. “

“ …. 언제나 아름씨라고 부르잖아요. “

“ 아뇨…. 그렇게 말고. “

“ …. “

“ 안 불러주실 거에요? “

“ … 아름… 아. “

“ 네 병호씨. 저... 믿을게요. “

“ …. 아름아. “

“ 네.... 병호씨.“


아름의 뒤로 야경이 어지럽게 보였지만 이 순간 빛무리는 아름의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 15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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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간만에 글 올렸는데 쉬어가는 페이지 같아 왠지 죄송하네요... ㅎㅎ
하지만 앞으로 진행에 있어 나름 짚어 주고자 했던 부분이라 꼭 필요했습니다.

모든 분들 건강하시고요.

다음 편은 1주일 뒤에 올리겠습니다. 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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