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메이저리그 최고의 팀을 가리는 월드시리즈의 마지막 7차전.
9회말 1점차에 마운드에 서 있는 투수는 바로 한국인이다. 190cm에 가까운 훤칠한 키에 동양인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선명한 이목구비. 몸에서 풍겨져나오는 기운만으로도 타자를 압도하는 느낌. 모든 야구선수들이 선망한다는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의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고 있다.
"최성빈 선수, 이제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양키스의 우승을 확정짓습니다."
"이 아웃카운트 하나면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3경기 연속 완봉승의 위업을 달성하게 됩니다."
배터 박스에 들어선 타자는 다저스(Dodgers)의 4번 타자 곤잘레스.
"초구에 몸쪽 96마일 직구를 꽂는 최성빈!"
"곤잘레스 선수, 내색은 안하지만 최성빈 선수에게 질린것 같죠? 투구수가 120구를 돌파했지만 여전한 강속구입니다."
"다시 몸쪽 직구! 이번엔 98마일!"
"직구 2개로 가볍게 투스트라이크를 잡고 가네요."
"자, 다음 공이 마지막 1구가 될 수 있을까요?"
순간, 마운드 위의 최성빈이 타자를 보며 씨익 웃는다.
"저 웃음은 무슨 의미일까요?"
"글쎄요. 아마도 언제든지 제압할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 아닐까요?"
공이 최성빈의 오른손을 떠나자 방망이를 쥔 곤잘레스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야구공은 아름다운 스핀과 함께 포수의 미트에 강력하게 박혔다.
"헛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공 역시 몸쪽 직구! 마지막 타자를 탈삼진으로 잡으면서 양키스의 우승을 결정짓습니다!"
최성빈이 마운드에서 포효했고 모든 선수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세상의 지배자처럼 보였다.
최성빈, 아니, 성빈이를 티비를 통해 지켜보는 내 마음은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토토에 3만원 걸어서 만원 땄으니 기뻐야 하는데.
한때는 나도 야구선수였다. 고교시절 프로가 주목하는 유망주였고 믿기 힘들겠지만 성빈이와 라이벌이라는 이야기를 듣던 시절도 있었다.
몸관리를 잘 해야 했을 3학년 대회에서 어깨를 다쳤고 수술 후 재활에 시간을 허비해야했다.
그 시간동안 성빈이는 19살의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했고 이듬해 신인왕을 시작으로 20승 이상을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나는 부상경력에 프로구단의 외면을 받으며 어쩔 수 없이 대학에 진학했지만 구속이 130km도 나오지 않는 고장난 어깨를 되돌릴 수 없었다.
성빈이가 사이영상(메이저리그 최고 투수에게 주는 상)을 연속으로 받는 동안 나는 동사무소에서 공익근무를 했다.
성빈이가 헐리우드 여배우와 스캔들이 났을 때 나는 독수공방으로 방구석을 뒹굴었다.
성빈이가 4억 달러 계약을 바라볼때 나는 자취방 월세 40만원을 못내서 주인집 아줌마를 피해 쫓겨다니는 신세였다.
그 때 다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성빈이처럼 되는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내 꿈은 그저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것. 그것 뿐이었다.
다치지 않았다면 이룰 수 있었던 꿈이지만 이미 모든것을 잃었다.
야구를 그만두고 대학도 자퇴하고 2년을 폐인처럼 지냈다. 25살이 된 지금은 노가다판에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산다. 그마저도 아픈 어깨 때문에 꾸준히 나가지도 못한다.
부모님께도 2년째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연락할 엄두가 안난다고 해야겠지. 아버지는 아들을 야구선수로 키우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했지만 30년간 성실히 다니던 회사에서 퇴직권고를 받으면서 집안이 기울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 어깨마저 탈이 나서 수술비 마련을 위해 가족이 반지하로 이사를 가야 했다.
폐인이 된 아들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다. 그렇게라도 내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자취방에서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있다. 내가 주로 한끼를 떼우기 위해 가장 애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일용할 양식인 삼각김밥과 컵라면. 이런 것들만 먹다보니 풍족하게 먹지도 못하는데 운동하던 시절보다 살이 10kg은 더 불었다. 한창 운동할때는 날렵한 몸매에 꽤 쓸만한 얼굴로 여자들의 시선을 끌었었지만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다. 지금은 후덕한 몸과 지저분하게 수염을 기른,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 모습이다.
"안녕하세요~!"
편의점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웃으며 나를 반긴다. 스무살 남짓한 여학생으로 보이는 알바생은 주말 저녁에만 보이는 것으로 봐서 아마 근처에 학교를 다니면서 돈을 벌고 있는 것 같다. 나처럼 방구석을 뒹굴다가 돈이 궁하면 일을 찾아다니는 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는게 눈에 보였다. 볼때마다 쾌활하고 밝은 모습이 보는 사람까지 같이 기분좋게 만드는 여자였다.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하나씩 집어서 계산대 위에 올렸다.
"디플 한갑 드릴까요?"
"예?"
"라면이랑 담배랑 같이 사가시잖아요.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아.. 이제 담배 안펴요. 담배값 올라서 끊어보려고."
"하긴 이번에 오른거 때문에 끊는 사람 많다고 하긴 하던데."
이 정도의 젊은 미인과 대화를 한게 얼마만인가.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계산을 마치고 라면물을 받아 편의점 내의 테이블로 가져갔다. 집에 가서 먹으면 쓰레기만 생기고 청소도 귀찮아지기 때문에 여기서 먹고 들어가는게 낫다.
"근데 왜 김밥 안 데워 드세요? 15초 정도 데워 드시면 맛있는데."
오늘따라 유달리 계속 말을 거는 알바생. 가만보면 주변에서 쉽게 보기 힘들 정도로 예쁜 얼굴이다. 검고 긴 생머리에 한듯 안한듯 연한 화장을 한 청순한 스타일. 도톰하고 빨간 입술은 남자들로 하여금 키스를 유발하게 만드는 매력이 넘쳐 흐른다. 게다가 편의점 옷을 입고 있어서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날씬한 다리와 잘록한 허리라인이 보인다.
"김밥은 뜨거운 라면 국물에 찍어먹으면 맛있거든요. 데워먹는것 보다 그게 좋아서."
"아, 그러시구나! 왜 항상 안데워드시는지 궁금했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었다.
내가 먹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걸까? 괜히 쑥쓰러워지네.
라면과 김밥을 5분만에 해치우고 알바생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녀 역시 쾌활하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는 꼬시고 싶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어떤 여자와도 제대로 연애하지 못할것 같다. 한끼 먹고 살기도 벅찬데 연애는 무슨 연애. 그렇다고 내가 꼬신다고 저런 미인이 무조건 넘어오는것도 아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기는.
내 자취방은 자그마한 3층짜리 건물의 2층에 위치한 10평 남짓한 원룸이다. 딱히 불만없이 잘 쓰고 있지만 월세를 닦달하는 주인집 아줌마가 바로 옆집이라는게 유일한 단점이다.
"선웅씨가 젊은 나이에 그러고 있는게 불쌍해서 내가 이러는거지, 다른 사람이었어봐. 선웅씨는 진작에 쫓겨났어."
입맛이 쓴 이야기지만 아줌마 말이 맞다. 월세가 두달씩 밀리는게 예사인데도 쫓아내지 않는게 고맙다. 지난 몇년간 방을 5군데나 옮겨다닌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고마운 주인집 아줌마를 위해서라도 밀린 지난달 월세를 최대한 빨리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집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 트레이닝 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있는 여자. 170은 족히 넘어보이는 키에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눈에 띈다.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문 앞을 어슬렁거리다... 이윽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랑 눈망울과 오똑한 코, 갸름한 턱선을 지닌 그녀는 마치 연예인처럼 보였다. 아니, 기품은 그 이상이었다.
"여기 주인이야?"
"네.."
다짜고짜 내뱉는 반말에 나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하고 말았다.
"나 좀 들여보내줘. 배고파."
이런 막무가내가 또 어디있을까. 이런 억지 소리를 듣고도 전혀 고까운 생각이 안들고 오히려 분부대로 해주고 싶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말투다. 물론 그 아름다운 외모가 한몫을 했지만. 어떤 남자가 이런 여자를 마다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노숙자? 저 외모에?
"잠시만 기다려봐요."
그녀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10년 넘게 운동을 한 내가 이런 여자에게 신체적 위협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긴장감 없이 문을 열었다.
"들어와요."
들어보내달라고 할때는 언제고 막상 열어주니까 주춤거린다.
"...이게 무슨 냄새야?"
"홀아비 냄새 처음 맡아봐요? 남자 혼자 사는 방인데 이정도 냄새는 감수해야지."
그녀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신발을 벗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방을 둘러본다.
"먹을거 없어? 나 먹을거 좀 줘."
"맡겨놨어요? 남에 집에 들어와서 뭐가 그렇게 당당한거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혀 밉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 당당한 태도가 너무 잘 어울리는 도도하고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겠지. "빵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고 했던 프랑스의 마리 앙뚜와네뜨가 한국인이었다면 아마 이렇게 생겼을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깐.
"그건 미안한데,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래."
"지금은 먹을게 없는데. 편의점 가서 사와야되요."
"그럼 좀 사와줘."
"뭐 좋아하는데요?"
"음... 구운 베이컨이나 샐러드?"
이 여자가 장난치나.
"그딴게 어딨어요."
"그럼 뭐가 있는데?"
"편의점도 안가봤어요? 라면이나 김밥, 도시락 같은거."
"도시락? 그거 사줘. 돈은 나중에 10배로 갚을게."
도시락은 비싸서 나도 잘 안사먹는건데.
"돈은 줄테니까 본인이 직접 가서 사와요."
"안돼. 지금은 못나가"
"그럼 내가 당신이 누구인줄 알고 집을 비워요. 다 털어가면 어쩌려고."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지금은 못나가니까 좀 사와줘."
"남에 집 앞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다짜고짜 들여보내달라는 행동 자체가 이상한거지."
그녀는 대화가 마음대로 안풀리자 기분이 상했는지 뾰루퉁해졌다. 남자를 자극하는 표정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는것 같은 표정이다. 그 표정을 보자 무엇이든 들어줘야 할 것같은 충동을 느낀다.
"아, 알았어요. 어차피 털어갈 것도 없고. 얌전하게 있어요. 사다 줄테니까."
내 앞에 나타난 모델보다 아름다운 노숙자(?). 저런 미인이 갑자기 눈 앞에 떨어졌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할까?
메이저리그 최고의 팀을 가리는 월드시리즈의 마지막 7차전.
9회말 1점차에 마운드에 서 있는 투수는 바로 한국인이다. 190cm에 가까운 훤칠한 키에 동양인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선명한 이목구비. 몸에서 풍겨져나오는 기운만으로도 타자를 압도하는 느낌. 모든 야구선수들이 선망한다는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의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고 있다.
"최성빈 선수, 이제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양키스의 우승을 확정짓습니다."
"이 아웃카운트 하나면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3경기 연속 완봉승의 위업을 달성하게 됩니다."
배터 박스에 들어선 타자는 다저스(Dodgers)의 4번 타자 곤잘레스.
"초구에 몸쪽 96마일 직구를 꽂는 최성빈!"
"곤잘레스 선수, 내색은 안하지만 최성빈 선수에게 질린것 같죠? 투구수가 120구를 돌파했지만 여전한 강속구입니다."
"다시 몸쪽 직구! 이번엔 98마일!"
"직구 2개로 가볍게 투스트라이크를 잡고 가네요."
"자, 다음 공이 마지막 1구가 될 수 있을까요?"
순간, 마운드 위의 최성빈이 타자를 보며 씨익 웃는다.
"저 웃음은 무슨 의미일까요?"
"글쎄요. 아마도 언제든지 제압할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 아닐까요?"
공이 최성빈의 오른손을 떠나자 방망이를 쥔 곤잘레스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야구공은 아름다운 스핀과 함께 포수의 미트에 강력하게 박혔다.
"헛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공 역시 몸쪽 직구! 마지막 타자를 탈삼진으로 잡으면서 양키스의 우승을 결정짓습니다!"
최성빈이 마운드에서 포효했고 모든 선수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세상의 지배자처럼 보였다.
최성빈, 아니, 성빈이를 티비를 통해 지켜보는 내 마음은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토토에 3만원 걸어서 만원 땄으니 기뻐야 하는데.
한때는 나도 야구선수였다. 고교시절 프로가 주목하는 유망주였고 믿기 힘들겠지만 성빈이와 라이벌이라는 이야기를 듣던 시절도 있었다.
몸관리를 잘 해야 했을 3학년 대회에서 어깨를 다쳤고 수술 후 재활에 시간을 허비해야했다.
그 시간동안 성빈이는 19살의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했고 이듬해 신인왕을 시작으로 20승 이상을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나는 부상경력에 프로구단의 외면을 받으며 어쩔 수 없이 대학에 진학했지만 구속이 130km도 나오지 않는 고장난 어깨를 되돌릴 수 없었다.
성빈이가 사이영상(메이저리그 최고 투수에게 주는 상)을 연속으로 받는 동안 나는 동사무소에서 공익근무를 했다.
성빈이가 헐리우드 여배우와 스캔들이 났을 때 나는 독수공방으로 방구석을 뒹굴었다.
성빈이가 4억 달러 계약을 바라볼때 나는 자취방 월세 40만원을 못내서 주인집 아줌마를 피해 쫓겨다니는 신세였다.
그 때 다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성빈이처럼 되는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내 꿈은 그저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것. 그것 뿐이었다.
다치지 않았다면 이룰 수 있었던 꿈이지만 이미 모든것을 잃었다.
야구를 그만두고 대학도 자퇴하고 2년을 폐인처럼 지냈다. 25살이 된 지금은 노가다판에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산다. 그마저도 아픈 어깨 때문에 꾸준히 나가지도 못한다.
부모님께도 2년째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연락할 엄두가 안난다고 해야겠지. 아버지는 아들을 야구선수로 키우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했지만 30년간 성실히 다니던 회사에서 퇴직권고를 받으면서 집안이 기울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 어깨마저 탈이 나서 수술비 마련을 위해 가족이 반지하로 이사를 가야 했다.
폐인이 된 아들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다. 그렇게라도 내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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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에서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있다. 내가 주로 한끼를 떼우기 위해 가장 애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일용할 양식인 삼각김밥과 컵라면. 이런 것들만 먹다보니 풍족하게 먹지도 못하는데 운동하던 시절보다 살이 10kg은 더 불었다. 한창 운동할때는 날렵한 몸매에 꽤 쓸만한 얼굴로 여자들의 시선을 끌었었지만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다. 지금은 후덕한 몸과 지저분하게 수염을 기른,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 모습이다.
"안녕하세요~!"
편의점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웃으며 나를 반긴다. 스무살 남짓한 여학생으로 보이는 알바생은 주말 저녁에만 보이는 것으로 봐서 아마 근처에 학교를 다니면서 돈을 벌고 있는 것 같다. 나처럼 방구석을 뒹굴다가 돈이 궁하면 일을 찾아다니는 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는게 눈에 보였다. 볼때마다 쾌활하고 밝은 모습이 보는 사람까지 같이 기분좋게 만드는 여자였다.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하나씩 집어서 계산대 위에 올렸다.
"디플 한갑 드릴까요?"
"예?"
"라면이랑 담배랑 같이 사가시잖아요.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아.. 이제 담배 안펴요. 담배값 올라서 끊어보려고."
"하긴 이번에 오른거 때문에 끊는 사람 많다고 하긴 하던데."
이 정도의 젊은 미인과 대화를 한게 얼마만인가.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계산을 마치고 라면물을 받아 편의점 내의 테이블로 가져갔다. 집에 가서 먹으면 쓰레기만 생기고 청소도 귀찮아지기 때문에 여기서 먹고 들어가는게 낫다.
"근데 왜 김밥 안 데워 드세요? 15초 정도 데워 드시면 맛있는데."
오늘따라 유달리 계속 말을 거는 알바생. 가만보면 주변에서 쉽게 보기 힘들 정도로 예쁜 얼굴이다. 검고 긴 생머리에 한듯 안한듯 연한 화장을 한 청순한 스타일. 도톰하고 빨간 입술은 남자들로 하여금 키스를 유발하게 만드는 매력이 넘쳐 흐른다. 게다가 편의점 옷을 입고 있어서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날씬한 다리와 잘록한 허리라인이 보인다.
"김밥은 뜨거운 라면 국물에 찍어먹으면 맛있거든요. 데워먹는것 보다 그게 좋아서."
"아, 그러시구나! 왜 항상 안데워드시는지 궁금했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었다.
내가 먹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걸까? 괜히 쑥쓰러워지네.
라면과 김밥을 5분만에 해치우고 알바생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녀 역시 쾌활하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는 꼬시고 싶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어떤 여자와도 제대로 연애하지 못할것 같다. 한끼 먹고 살기도 벅찬데 연애는 무슨 연애. 그렇다고 내가 꼬신다고 저런 미인이 무조건 넘어오는것도 아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기는.
내 자취방은 자그마한 3층짜리 건물의 2층에 위치한 10평 남짓한 원룸이다. 딱히 불만없이 잘 쓰고 있지만 월세를 닦달하는 주인집 아줌마가 바로 옆집이라는게 유일한 단점이다.
"선웅씨가 젊은 나이에 그러고 있는게 불쌍해서 내가 이러는거지, 다른 사람이었어봐. 선웅씨는 진작에 쫓겨났어."
입맛이 쓴 이야기지만 아줌마 말이 맞다. 월세가 두달씩 밀리는게 예사인데도 쫓아내지 않는게 고맙다. 지난 몇년간 방을 5군데나 옮겨다닌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고마운 주인집 아줌마를 위해서라도 밀린 지난달 월세를 최대한 빨리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집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 트레이닝 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있는 여자. 170은 족히 넘어보이는 키에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눈에 띈다.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문 앞을 어슬렁거리다... 이윽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랑 눈망울과 오똑한 코, 갸름한 턱선을 지닌 그녀는 마치 연예인처럼 보였다. 아니, 기품은 그 이상이었다.
"여기 주인이야?"
"네.."
다짜고짜 내뱉는 반말에 나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하고 말았다.
"나 좀 들여보내줘. 배고파."
이런 막무가내가 또 어디있을까. 이런 억지 소리를 듣고도 전혀 고까운 생각이 안들고 오히려 분부대로 해주고 싶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말투다. 물론 그 아름다운 외모가 한몫을 했지만. 어떤 남자가 이런 여자를 마다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노숙자? 저 외모에?
"잠시만 기다려봐요."
그녀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10년 넘게 운동을 한 내가 이런 여자에게 신체적 위협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긴장감 없이 문을 열었다.
"들어와요."
들어보내달라고 할때는 언제고 막상 열어주니까 주춤거린다.
"...이게 무슨 냄새야?"
"홀아비 냄새 처음 맡아봐요? 남자 혼자 사는 방인데 이정도 냄새는 감수해야지."
그녀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신발을 벗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방을 둘러본다.
"먹을거 없어? 나 먹을거 좀 줘."
"맡겨놨어요? 남에 집에 들어와서 뭐가 그렇게 당당한거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혀 밉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 당당한 태도가 너무 잘 어울리는 도도하고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겠지. "빵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고 했던 프랑스의 마리 앙뚜와네뜨가 한국인이었다면 아마 이렇게 생겼을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깐.
"그건 미안한데,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래."
"지금은 먹을게 없는데. 편의점 가서 사와야되요."
"그럼 좀 사와줘."
"뭐 좋아하는데요?"
"음... 구운 베이컨이나 샐러드?"
이 여자가 장난치나.
"그딴게 어딨어요."
"그럼 뭐가 있는데?"
"편의점도 안가봤어요? 라면이나 김밥, 도시락 같은거."
"도시락? 그거 사줘. 돈은 나중에 10배로 갚을게."
도시락은 비싸서 나도 잘 안사먹는건데.
"돈은 줄테니까 본인이 직접 가서 사와요."
"안돼. 지금은 못나가"
"그럼 내가 당신이 누구인줄 알고 집을 비워요. 다 털어가면 어쩌려고."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지금은 못나가니까 좀 사와줘."
"남에 집 앞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다짜고짜 들여보내달라는 행동 자체가 이상한거지."
그녀는 대화가 마음대로 안풀리자 기분이 상했는지 뾰루퉁해졌다. 남자를 자극하는 표정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는것 같은 표정이다. 그 표정을 보자 무엇이든 들어줘야 할 것같은 충동을 느낀다.
"아, 알았어요. 어차피 털어갈 것도 없고. 얌전하게 있어요. 사다 줄테니까."
내 앞에 나타난 모델보다 아름다운 노숙자(?). 저런 미인이 갑자기 눈 앞에 떨어졌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할까?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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