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베를린의 헬램프 주식회사
강대리나 나나 하루쯤 잠을 푹 자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날 밤에 우리는 "늦잠 잘테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씌인 팻말을 문 밖에 걸어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화장실에 간다고 깬 적도 없이 계속 자버렸다.
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12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강대리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나보다 더 늦게 일어났다. 이렇게 자고 일어나니까 몸이 한결 개운해진 것 같다. 나는 베를린 전화번호부를 검색해서 강대리가 원하는 한국인 식당의 위치를 찾아 두고, 나중에 저녁 식사는 거기서 하기로 했다. 나는 또 김사장이 거래하는 램프 회사의 위치도 검색했다. 헬램프라는 회사인데, 지멘스 주식화사의 본사 근처에 있어서 찾기는 쉬울 것 같다.
우리는 호텔을 나서서,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 우선 헬램프로 가기로 했다. 꽤 알려진 회사인지, 택시 기사도 그 회사의 이름을 듣더니, 위치를 알고 있단다. 그는 지름길로 간다면서 골목길로 해서 북쪽으로 가는 것 같다. 속도는 느렸지만 신호등이 적어서 좋았다.
택시기 헬램프사 앞에서 멈춰섰다. 우리는 택시에서 내려서 그 회사의 정문에 있는 수위실 비슷한 곳으로 들어갔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인 수위에게 인사를 하고 가이슬러(Geissler)씨를 만나겠다고 했더니, 그는 모른다고 했다. 이 노인께서는 영어가 짧으시다. 나는 그 순간 뮌헨으로 갔어야 했는데, 베를린으로 온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나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물었다.
"혹시 중국에서 왔어요?"
"아니오. 한국에서 왔는데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그는 자기 테이블에 있는 표에서 누군가를 찾더니,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끝나자 그는 나에게 말했다.
"한국 여자가 와요."
잠시 후에 어떤 여자가 들어왔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했고, 그녀가 우리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베를린 공대 전자공학과에서 석사 과정에 있는데, 과제나 실험을 이 헬램프에서 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데 그녀도 내가 찾는 가이슬러씨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녀는 우리에게 커피를 주고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녀는 우리를 다른 방으로 보내주었다. 그 방에는 덩치가 꽤 있어보이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주는 인상은 매우 신경질적일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와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당신이 찾는 헤커 가이슬러씨가 베를린에서 근무하는 것은 맞아요.
그런데 그는 해외 영업부에서 일합니다.
그래서 그는 회사에 있는 시간이 얼마 없고, 주로 해외를 돌아다니거든요.
이렇게 오셨으니까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좋겠는데요."
나는 김사장이 사용하고있는 램프와 운영기계의 모델 번호를 말해주었다. 그는 컴퓨터에서 뭔가를 찾아서 한참을 들여다본다. 그의 직원인 듯한 여자가 우리에게 커피를 가져왔다.
"이 장비와 이 램프가. .. 무슨 말썽을 부립니까?"
"혹시 일본에서도 같은 종류의 램프가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예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는 가격 차이가 두 배가 나야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예?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우리는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 헬램프의 제품은 경쟁사의 제품보다 가격이 어느 정도 비쌀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특수램프라고 해도 두배의 가격차이는 말이 안됩니다.
제가 직접 담당하지 않기 때문에 뭐라고 드릴 말씀은 없어서 유감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는 자기 자리로 가더니, 여기 저기에 전화를 걸고 나서 우리에게로 왔다.
"그 램프 문제를 담당하는 직원이 데리러 올텐데,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문제가 해결 되기만 하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 램프를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집적회로의 기판을 만들기 위해서 마스크를 입힌 후에 그 램프의 빛으로 촬영합니다."
우리는 김사장이 생산하는 기판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는 나를 향하여 빙긋이 웃더니, 자기 자리에서 팜플렛을 가져왔다.
"조금 더 효율적인 작업을 하시려면 이 램프가 더 적합할 것 같은데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가격 차이는 절반 정도로 쌉니다.
그 마스크에 촬영하기 위해서는 이 램프의 파장 범위가 더 적합합니다.
지금 사용하시는 램프의 파장은 가시광선 영역 전체이거든요.
혹시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예. 우리가 다른 제품과 같이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검토하겠습니다."
김사장은 처음에 램프에 대해서 자문을 잘 못 받은 것 같다. 예를 들어서, 그의 생산 라인에서는 빨간 빛만 필요하다고 하자. 그러면 빨간 빛을 내는 램프만 사용하면 된다. 가격도 싸고, 사용하기도 비교적 간편하다. 그런데 그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빛은 광범위하게 모든 파장의 빛을 만들어내고, 그는 그 모든 파장 중에서 빨간 빛만 추려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격도 훨씬 비싸고, 복잡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은 당연하다.
지금 이 사람이 추천하는 램프는 바로 적합한 그 빛만 내기 때문에, 가격도 싸고, 위험성도 적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 고객들도 비슷한 경우인데, 이 고객들이 하소연하는 다른 문제가 있거든요."
"그 문제를 저도 알 수 있을까요?"
"미세 전류를 컨트롤 하는 것이 잘 안됩니다."
"램프의 문제인가요? 빛의 양이 일정하지 않다든지 .."
"그런 문제는 기술적으로 우리 쪽에서 모두 해결 된 상태입니다.
우리 헬램프의 개발팀에서도 그 고객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까 그 한국인 여학생의 석사 논문에서 이 문제가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게, 제 생각으로는 .."
"혹시 아시는 바가 있읍니까?"
"작업 공정을 세분화한다면 어떨까요?"
"예? 어떻게 세분화를?"
"간단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삽을 들고 땅을 판다고 가정하십시오.
원하는 대로 파내기 위해서는 단 한번의 삽질로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예를 들어 광선을 비추는 시간이 10초이어야 한다면, 한꺼번에 10초 동안을 하지 말고, 6초씩 두번, 또는 3초씩 세번으로 나누어서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방법이 좋을 지에 대해서는 경험에 의한 방법 말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방법은 이미 검증된 방법입니까?"
"말씀하신 그 문제는 집적회로를 처음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있어온 문제입니다.
그런데 프랑스 7대학에서 이미 6년쯤 전에 이 방법을 제안했는데, 모르고 계셨습니까?"
"흐으음?"
"저도 파리에서 이 방법을 직접 사용한 적이 있거든요.
지금은 훨씬 더 잘 되도록 많이 개선됐겠지요."
"직접 파리에서 사용하신 방법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제가 직접 사용했어요.
그런데 연구소와는 달리, 공장의 생산라인에서는 이 방법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산 과정을 세분화하면 생산 시간이 지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더 좋은 방법이 없으면 이 방법이라도 .."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고객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매우 좋아할 것 같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가 원하는 방법에 대해서 직접 찾을 수 있는 져널을 소개해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한다.
"내가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했지?"
"한가지 유감인 것은 그 져널이 불어판 밖에 없습니다."
"제가 불어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그는 나에게 자기 명함을 준다. 그가 갑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일까? 그의 명함에는 개발팀장 뢰레(Roehre) 박사라고 적혀있다. 그가 나에게 내 명함을 달라고 하는 바람에 나도 그에게 내 명함을 주었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가 거의 막판에 갔을 때, 레나테 슈미트라는 여자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그녀는 강대리보다도 훨씬 어려보인다. 셀린이나 엠마만큼 예쁘지도 않고, 엄청 도도해 보인다. 베를린에 와서 보니까, 예쁜 여자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여자는 게르만족 보다 라틴족이 훨씬 더 예쁜 것 같다.
뢰레 박사는 이 여자와 한참 동안 이야기를 했다. 분위기가 엄청 심각하다. 그는 나를 보더니 그녀와 이야기를 끝내고 우리에게 왔다.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나와 계속해서 영어로 이야기를 했다.
"영신전자와의 거래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가이슬러씨 대신에 다른 직원이 다음달 초에 서울에 갈 것입니다.
생산하는 제품을 그 직원에게 보여주고, 자문을 정확하게 받으십시오.
앞으로는 원하시는 제품을 일본 제품의 절반 가격에 드리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또 일본이 제공하는 리베이트나 애프터 서비스를 두배 정도로 해드릴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거래가 잘못된 것을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지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일은 나와 레나테가 책임지고 끝까지 관철시키겠습니다."
"뢰레 박사님께서 그렇게만 해주시면 저에게도 선물이 있습니다.
저는 약 20여개의 동료 회사들을 헬렘프 제품으로 갈아타도록 유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혹시 오늘 저녁 식사 예약은 하셨습니까?"
"아직요."
"그럼 저희가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해도 되겠습니까?"
"업무에서 성과가 나온 것도 없는데, 식사 초대는 너무 빠르신 것 같습니다.
좋은 결과를 먼저 만들고 나서 식사에 초대하면 동의하겠습니다."
"불쾌한 기분으로 우리 회사를 방문하셨습니까?"
"서울에서 베를린을 날아올 정도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해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죄송합니다. 그리고 직접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한국, 중국, 일본 지역을 위한 지사는 계획에 없으십니까?
여기까지 오느라고 시간이나 경비가 너무 들어가요."
"이제는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이런 착오가 안생길 것 같아요.
동남아시아를 위해서 싱가포르에 영업소가 있기는 있는데, 실적은 거의 없습니다."
"만일 지사를 서울로 정하신다면, 저희가 지사 설립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놀라운 제안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믿을 만한 파트너라면 그 정도야 당연하죠."
"이번 기회에 헬램프가 영신전자의 믿을만한 파트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기회는 이미 박사님 손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 전화기에서 진동음이 계속 울린다. 엠마에게서 온 전화다. 우리는 프랑스어로 통화를 했다.
"하이, 상수. 어디 있어? 나 지금 테겔 공항이야."
"비노쉬 박사가 벨를린에 왔다고? 도대체 왜 왔어?"
"너 아프다며? 의사가 환자한테 당연히 가야지. 나는 국경없는 의사이거든. 하하."
"나한테 부인과 의사가 곡 필요한 것은 아닌데."
"그래. 알았어. 택시 탈껀데, 어디로 갈까?"
"택시 기사에게 헬램프 주식회사라는 말을 하고, 정문에 와서 전화해."
"얼마나 걸려?"
"거기서 여기까지는 30분도 안걸린다."
"빨리 보고싶어. 곧 갈께."
레나테와 뢰레박사가 내가 불어로 통화하는 것을 듣더니 빙긋이 웃는다.
나는 수위실에 프랑스 여자가 도착하면 기다리게 해달라고 연락을 부탁했다. 그 일은 레나테가 맡는다.
"이제 일어서겠습니다.
파리에서 온 손님이 테겔 공항에서 이리로 오십니다."
"그 손님도 램프 회사 직원입니까? 하하"
"프랑스의 델라뼁 램프 아시죠?
나와 뢰레 박사님과 이야기가 잘 안되는 줄 알고 .. "
"은근히 긴장되는군요. 하하."
엠마가 필요한 시간에 전화를 해 준 것일까?
물론 효과가 있을지, 또 필요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엠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또 뻥을 쳤다.
엠마가 마치 뢰레 박사의 경쟁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
나는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마디를 덧붙여두었다.
"내가 여기서 한 이야기에는 앞으로 조금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합니다.
필요하시다면 문서로 작성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문서로 작성해 둘테니까, 내일이나 모레쯤 오셔서 사인하십시오."
"독일어는 내가 모르는데..."
"그럼 영어니 프랑스어로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친절한 배려에 감사합니다."
권상무가 부탁한 영신 전자의 일은 드디어 막을 내렸다. 강대리는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내 몸에서는 모든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다.
나는 누구와 만나서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할 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왔다. 내일 오려고 마음 먹고, 오늘은 구경이나 하자고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 성과면 잘 한 것이 아닐까?
오늘 이 미팅의 결과는 다음달 초면 나올 것이다. 김사장이 놀라는 일이 생기는 일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가이슬러씨가 오지 않고 다른 직원을 보낸다는 이 말은 무엇일까? 이들의 거래에서 무엇이 잘못됐다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내 판단으로는 가이슬러라는 인간이 몹쓸 짓을 한 것 같다. 김사장에게 비싸게 팔아서 돈을 챙긴 후에 본사에는 일부만을 준 것 같다. 이런 비리는 해외 영업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다.
나와 뢰레 박사는 다른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엠마가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는데, 강대리가 엄청 좋아한다.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어야 하는 이 자리가 강대리에게는 너무 지겨웠을 것이고, 엠마를 핑계로 한시바삐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뢰레 박사는 엘리베이터까지, 레나테라는 여자는 수위실까지 우리를 배웅했다. 우리는 다음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강대리는 궁금하다면서, 자기에게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도대체 그 많은 것을 어떻게 다 얘기해주냐?
내일 문서로 나오면 김효원한테 들고 가서 얘기해달라고 해."
"그럴까?"
그런데 오빠 지금 은근히 나 구박하는 거야?"
"강선미 대리를 내가 왜 구박해?
쳐다보기만 해도 예뻐 죽겠구만."
"저 것도 뻥같은데 .."
우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엠마가 수위실의 소파에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보인다.
"하이. 상수. 선미."
"하이 엠마. 헬로우."
강대리가 엠마에게 엄청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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