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강대리 ..
"팀장님! 강대리님!"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창 밖을 보니까 어느새 우리는 논현동 사거리를 지나고 있다. 강대리도 자고 이제 일어난 것 같다.
"강대리님은 비행기에서 주무시지 않았어요?"
"잤어.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자도 자도 졸려."
"이러시면 오늘 저녁에 곤란한데."
"걱정하지 마. 오늘 저녁은 마시고 죽을꺼니까. 하하."
"한잔 마시고 푹 자면 시차 적응하는 것도 그냥 지나가니까 좋아요. 하하."
"여기는 지금 금요일이니?"
"토요일인데요. 하하."
"상무님 지금 회사에 계셔?"
"그럼요. 회장님도 기다리고 계셔요.
파리에서는 어땠어요? 파리 좋죠?"
"파리도 베를린도 좋았지.
그런데 파리에서는 저 분 썸녀들이 말이야. .."
"예에? 그럼 파리지엔느?"
"아이. 나는 그런 말 뭔지 몰라.
옛날에 거기서 공부한다고 연애질만 했나봐. 하하."
"에이. 설마. 파리에 있는 대학은 공부 안하면 중간에 다 짤려요.
졸업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이거든요."
"그래? 아이. 몰라. 몰라.
그건 내 알바 아니고. 하여간에 하나 둘이 아니거든.
의사라는 여자는 베를린까지 쫓아온 것 있지?
울고 불고 하는데, 분위기 진짜 완전 쩔더라."
"예에에?"
강대리가 술을 마신다고는 하는 말을 듣자, 그녀의 술버릇이 떠오르면서 정신이 번쩍 든다. 차는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김효원은 차를 주차했고, 우리는 차에서 내려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강대리는 휴대전화기를 김효원의 손에 건네주고, 김효원은 사진을 구경하고 있다.
"어머. 이 여자 누구야?"
"묻지마. 생각만 해도 엄청 열 받거든."
"어머. 어머. 이 여자는 또 다른 여자네.
강대리님 파리에 아는 여자 있었어요?"
"걔네들 갖고 나한테 말 시키지 말라니까!"
두 여자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내가 서울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난다. 나와 김효원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지만 강대리는 더 올라간다.
"상무님 방에 들렀다가 갈께요."
김효원과 나는 기획팀 섹션으로 들어섰다. 이 큰 공간에 아무도 없고 텅 비어있다. 나는 곧바로 내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켜고 스트레칭을 했다. 온 몸이 뻐근하며, 사우나에 가서 담그고 싶다.
전화기를 켜고 조상현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안그러면 주말이 시끄러울 것 같아서이다.
"방금 회사에 도착."
김효원이 내 머그잔을 들고 들어온다. 전처럼 청바지가 아니라 검은 미니 스커트가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리고, 짙은 바다색 줄무늬가 두껍게 쳐진 브라우스가 몸에 딱 붙어있다. 유럽에 가기 전에는 어려 보였는데, 이제는 그 때와는 전혀 다른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다. 알맞은 크기의 가슴과 엉덩이, 그리고 늘씬한 두 다리를 보니까 셀린의 모습이 떠오른다. 물론 키는 셀린이 더 크다.
"팀장님. 커피 드세요."
"효원씨, 잘 있었어?"
"몰라요!"
김효원은 나를 쳐다도 보지않고 나가버린다. 이런 의외의 반응에 나는 깜짝 놀랐다. 책상 위에서 전화기가 울린다. 회장실 비서 채유리이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채비서 보고 싶어서 혼났다. 하하."
"히이잉. 지금 올라오실 수 있으십니까?"
"아직 정리가 안돼있는데."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나는 우리가 수입 물량을 조금밖에 받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샤네끄 박사와 합의한 사항을 간단하게 메모 형식으로 적었다. 결론은 우리 스스로 제품을 개발하여야 하며, 샤또이에사는 직원을 여기에 파견하여 기술지도를 할 계획이라는 것과 우리가 그들과 함께 중국이라는 시장을 개척할 것이라는 내용을 적었다.
또 전화기가 울린다. 이번에는 권상무이다.
"안올라오나?"
"지금 보고서 쓰느라고 .."
"안산 김사장이 오늘 저녁에 보자는데 .."
"그렇게 하시죠."
김효원이 겸연쩍어하는 표정으로 커피잔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강대리님이 안내려 오시네요."
쓸데없는 소리다. 나는 김효원을 불러서 내 자리에 앉게 하고, 지금까지 메모한 내용들로 보고서를 쓰라고 했다. 김효원은 워드파일을 연다.
"원래 강대리가 해야 하는데 ..
지금 여기에 없으니까 효원씨에게 부탁하는 수 밖에 없어."
"도착하자마자 하셔야 해요?
주말 지나서 월요일에 하시면 안돼요?"
"요새 치매가 오는 것 같아서."
"예에?"
지금 회장이나 권상무가 얼마나 궁금해할까? 강대리가 올라갔지만, 그녀는 할 말이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치솔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거울을 보면서 양치를 하는데 마치 엠마가 내 등 뒤에 서있는 것 같다. 엠마의 조용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테겔 공항에서 엠마는 게이트를 빠져나가기 전에 나를 안고 키스했다.
"상수. 이제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가는구나."
"......"
"쿨한 척 하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실패네."
"......"
"우리 .. 돌아오지 못할 만큼 너무 멀리는 가지 말자.
아직은 연민도 남아있거든.
후회로 덮을 수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야.
더 이상은 내가 허락하지 않을꺼아."
"왔으면 가는 것이 맞고, 가면 또 오는 것이 아닐까?"
"그건 동양식이야.
우리는 보낼 사람은 보내고, 가서 안될 사람은 못 가게 붙잡아.
말로 안되면 꽁꽁 묶어서라도 옆에 두거든요.
그리고 나는 동양 여자가 아니야."
엠마의 두 뺨으로 눈물 방울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훔쳐주었다. 강대리는 엠마의 손에 티슈를 쥐어주었다. 엠마는 샤네끄 박사의 뒤를 따라서 게이트를 나갔다. 강대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정말 다행스럽다. 강대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투덜거렸다.
"아오오. 지인짜아. 보고 있는 내가 눈물이 난다."
"선미야. 미안해."
"모올라! 진짜 밥맛이고, 완전 밉상이야."
"누가?"
"둘 다!"
갑자기 화장실 밖에서 나를 부른다. 강대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팀장님!"
나는 서둘러서 입을 헹군다. 성질 급한 강대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이세요?"
"어? 강대리. 여기 남자 화장실 아닌가?"
"맞아요. 왜요?"
"나는 내가 여자 화장실로 잘못 들어온 줄 알았네.
무슨 일로 화장실까지 쫓아와?"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요. 하하."
"이러언."
"농담이야. 농담.
그게 아니고, 지금 회장님이랑 상무님 내려오셨어요."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오빠 방이지."
강대리는 화장실을 나갔다. 나도 마무리를 하고 서둘러서 내 방으로 갔다. 회장과 권상무가 보고서를 들여다 보고있다. 김효원과 채유리 비서는 원탁에 앉아있다. 아마도 김효원이 보고서 작성을 끝내서 출력한 것 같다. 강대리가 커피를 들고 들어온다. 나는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끝나는 대로 들고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
"궁금해서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강대리한테는 아무리 물어봐도 토옹 모른다고만 하고 .."
"제가 일을 너무 크게 벌린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글쎄 .. 팀장님이 상무님이랑 잘 의논해서 시작해봐요."
"회장님. 이렇게 되면 이 일은 제 권한 밖인 것 같은데요."
"상무님. 지금 권한 문제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나는 실속없는 정보통신에 손 대는 것 보다, 이 쪽이 훨씬 타당성이 있다고 보는데 .."
"회장님.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이 일은 남팀장이 차고 들어야 할 것 같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럼 남팀장을 이사로 승격시켜서 이 일을 추진시키자는 말인가요?"
"아무래도 .. 덩치가 너무 크니까 .."
"어쨌든 월요일에 이사회에서 얘기해봅시다."
회장은 생각해보자는 말을 남기고 채비서와 함께 자리를 떴다.
"야. 남팀장."
"예?"
"이제 나랑 맞먹을 날이 얼마 안남았네? 하하."
"상무님도 참. .. 내가 왜 상무님한테 맞먹어요?"
"내가 어떻게 양놈들이랑 손잡고 이 일을 하냐?"
"아니, 누가 상무님보고 그런 일 하래요?"
"나는 하고 싶어도 말이 안통해서 못해.
아무튼 다시 돌아와줘서 고맙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파리에 썸녀들이 있다며? 하하."
"예에?"
"다 들었어. 발뺌하지 말게."
"아니. 강대리 정말!"
"이제 나가자. 김사장 와서 기다릴꺼야."
권상무는 벌떡 일어서서 내 방을 나갔다. 나는 김효원에게 내 차의 키를 내주었다.
"강대리 데려다 주고, 내 짐도 내 오피스텔에 올려다 놔 줄래요?"
"나 오늘 효원씨랑 한잔 할껀데요?"
"오늘은 그냥 들어가서 쉬고, 내일 해요.
지금 잘못하면 병나."
"저는 팀장님 오피스텔 모르는데?"
"몰라. 둘이 알아서 해결 해. 나는 가야 해."
나는 뢰레 박사와 합의한 문서를 챙겨들고 권상무의 뒤를 따라나갔다. 우리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권상무의 차에 탔다.
권상무는 운전을 하고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 갔다. 내 전화기로 문자메시지가 들어오는데, 오미현이다.
"오빠, 왔다며?
유아랑한테 뭐라고 해?"
답장을 쓰려고 하는데 차가 멎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권상무의 차를 어딘가로 가져갔다. 권상무와 나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의 뒤를 따라서 계단으로 해서 건물의 지하로 내려갔다. 입구의 문이 열리고 우리가 들어서자 둥그런 홀에 두 줄로 사람들이 늘어서있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일제히 허리를 굽힌다.
"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우리는 그들 사이로 해서 복도로 갔다. 우리는 룸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그런데 이 술집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 룸에는 김사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 룸은 제법 크다. 디귿(ㄷ) 자로 된 큼직한 소파도 있다. 테이블도 엄청 크다. 나는 이 곳이 단란주점인지 룸살롱인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아직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못한다. 난생 처음으로 이런 곳에 와본다.
권상무가 자리에 앉으면서 나에게 앉으라고 한다.
"뭐해? 어서 앉아."
"여기가 .."
"처음이야?"
"예. 죄송하지만, 저는 나가고 싶은데 .."
"앉아. 피하지 말고 정면돌파 해.
우리 나라에서 일하려면 그러면 안돼.
이런 자리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지킬 줄 알아야 해."
그런데 문이 열리고, 웨이터 두 명이 수레를 밀고 들어와서 술과 술잔, 그리고 과일과 다른 안주들로 테이블을 세팅한다. 권상무는 그들의 손에 뭔가를 쥐어준다. 그들은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룸을 나간다.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드레스에 여유있는 하얀 가디건을 걸친 여자가 들어온다. 그녀는 가는 몸에 묵직한 가슴을 달고 있다. 물론 화장품을 잔뜩 뒤집어 쓰기는 했지만, 그녀의 미모는 수준급이다. 나이는 예측할 수 없지만 앳된 얼굴로 보아서 30대의 중반 어디쯤에 있을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정도일 것 같다. 한 마리 나비가 사뿐히 내려 앉듯이, 그녀는 권상무 옆자리로 앉는다.
"하하. 사장님 정말 오래 만에 오셨네요."
"사장님은 볼 때마다 젊어지네. 우리 같은 남자들 어떻게 살으라는 거야?"
"사장님은 갈수록 거짓말만 늘으시고. 하하.
그런데 이 젊은 오빠는 .. 오늘 처음이신 것 같은데요?"
"우리 남이사야. 처음 데려왔으니까 자네가 알아서 해."
"처음 뵙겠습니다. 남상수입니다."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홍가연입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나에게 젊다는 말을 하면서 계속해서 눈웃음을 친다. 물론 영업상 날리는 멘트이겠지만, 기분은 좋다. 그녀는 세 개의 잔에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따른다. 그녀는 우리에게 잔을 돌리고 우리는 건배를 했다.
"허어. 이봐요. 홍사장. 자꾸 눈독들이지 말고!"
"뭘 그러세요? 이런 영계 사장님을 뵐 기회가 날이면 날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하하.
오늘은 밴드를 넣을까요?"
"나중에 필요하면 부를께. 그 대신에, 알았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
"저 젊은 오빠 실망하면 진짜 곤란해."
"그럴 일 절대 없습니다.
물갈이 한 지가 얼마 안돼서 오늘은 기대하셔도 돼요."
"말로만 그러지 말고 .."
"그런데 저 오빠 눈높이가 보통은 아닐 것 같은데. ..
뭐. .. 저한테도 비장의 무기는 있으니까 기다려 보세요."
그녀와 권상무는 낮은 소리로 말을 주고 받는데,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일어서서 한 손으로 나에게 브이(V)자를 만들어서 흔들고, 윙크까지 던지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룸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권상무는 술잔을 들고 내게 말했다.
"남부장은 지금 술 생각이 별로지?"
"예. 그렇습니다."
"방금 전에 도착한 사람을 이런 자리로 불러내서 나도 미안하네.
그런데 우리 회장님이나 안산 그 김사장 생각은 그게 아닌가봐.
기왕에 왔으니까 오늘은 기분 풀고 들어가라고."
"예. 알겠습니다."
"이번에 강대리 따라가서 어땠어? 골치 아프게 안했어?"
"뭐. .. 별로. .. 그런데 강대리가 누구죠?"
"누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따라왔는지도 모르겠고 .."
"젊은 사람이 밖으로 돌다가 사고 친다고 회장님이 딸려 보내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회장님 딸이라도 돼요?"
"딸? 그렇기는 한데, 그게 .."
"예?"
"밖에서 낳았다는 말이 있고, 또 입양했다는 말도 있거든."
"어두운 히스토리가 있네요.
강영훈 회장님과 성씨가 같아서 혹시나 했는데 .."
"알려져서 좋은 얘기는 아니잖아?
그 분 첫 부인은 암으로 일찍 타계하셨고, 지금 두 번째 부인은 애가 없어요.
그래서 이사 부인들 사이에서 오가는 소문이 그렇고, 자세히는 아무도 몰라.
이 일에 대해서는 자네도 입 다물게."
"제가 뭘. .."
그런데 문이 열리고, 그 사장이라는 여자가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서 여자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
얘가 한국에 들아오니까 이렇네요. 참나. ... - Ja"d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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