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대로
2부
여우인지 곰인지 (1)
-*-
학기 초에는 신입생이라는 것을 변명삼아 펜을 내려두고 대신 잔을 집어든 학생들도 있었지만,
1학년 1학기 학점으로 2010년 류현진의 방어율을 기록해버린 신입생들은, 2학기가 들어서자 대부분 심기일전해서 펜을 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런것만도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서 사람들이 꼬여드는 윤소영의 경우에는, 그런 못된 무리들에게(대부분 남자였다) 매일같이 시덥잖은 연락이나 부탁에 시달리고 있었다.
“ …. 나는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어서,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 하겠는데. ”
“ 응, 그냥 투정. 내가 너 없었을 때는, 어떻게 지냈는지 가르쳐주고 싶어서…. 귀찮기는 한데, 가끔 장점도 있어. 이렇게 술도 공짜로 마시고 좋잖아. ”
윤소영은 짠, 하며 생긋 웃었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윤소영과 잔을 부딪치며, 소줏잔에 담겨있던 쓰고 찰랑거리는 액체를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 그 동안 친구들 만나면서 놀았어? ”
“ 응. 그냥, 이런 식으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다보면 시간은 잘 갔거든. 본의 아니게 시간은 잘가서, 속은 상했지만. ”
하기사 윤소영이 방학동안 다녔다는 요리 학원보다는, 이런 술자리가 조금 덜 지루하기는 할 것 같다.
“ 그러면 그렇게 말하지. 나랑 있으면, 제대로 놀지도 못하잖아. 미리 빠져줬을텐데… ”
“ 이제 됐어. 너랑 매일 붙어다니면서, 귀찮게 하던 인간들 염장이나 지르고 다닐거야. 나 인기 엄청 많은거 알아? 의외지? ”
의외일리가 없었다.
“ 니가 인기 많은건 전혀 의외가 아닌데…. 아무튼, 그래도 다음부터는 거짓말하면 안 돼. 나쁜 의도로 거짓말하는거면 절대 내가 눈치 못 채게끔 하고… 이런건 그냥,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는 과정 중 하나잖아. 내가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설명은 좀 이상하겠지만…. ”
“ 하나도 안 이상해. ”
윤소영은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때처럼 경영대 아래에 있는 카페에 앉아서 윤소영과 노닥거리고 있는데, 그녀는 바쁘지 않으면 가볍게 반주나 하자고 나를 가라오케식 주점으로 데려왔다.
나는 신촌에 있는 한 가라오케식 주점으로 들어와서, 이 방에 도착하자마자 당황했다.
알고보니, 13학번 동기들이 모여서 회식을 하고 있는 곳이였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곳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듯한 느낌이다.
‘ 적응이 안 되네, 정말. ’
계속 이어지던 노래가 잠시 끝나고, 예약된 노래도 없자 아무래도 주위의 신경이 이 쪽으로 쏠리는듯한 느낌이였다.
내가 괜히 나와 윤소영의 잔에 소주를 한 잔씩 따르자, 윤소영은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면서 내게 속삭였다.
“ 불편해? ”
“ 글쎄, 별로 안 친하잖아. 거의 다 처음 인사해보는 사람들이니까…. 꽤 그렇긴 하네…. ”
2학기가 시작해서야 서로 인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
혹시나 윤소영이 이런 모습을 싫어할까봐, 자신감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데 누군가 이 쪽으로 마이크를 들고 다가왔다.
“ 너네 둘만 아까부터 한 곡도 안불렀어. 자, 얼른 한 곡 뽑아. ”
1학년 과대인가하는 남자애였는데, 이름이 뭐더라. 이..
하기사 얼굴 보고 연락할 사이도 아닌데, 이름같은걸 외워서 뭘 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 난 됐어. ”
“ 소영이 너는? ”
“ 나도 됐어. ”
윤소영은 별로 관심 없어, 라고 써있는 듯한 새침한 표정만큼이나 도도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는 윤소영의 다분히 심드렁한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여전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은근하게 제의하기 시작했다.
“ 아, 왜? 한 곡만 불러. 너 노래 잘하잖아. ”
“ 남자친구가 지켜보고 계셔서 안 돼. 허락받아야 되거든. ”
“ 남자친구? ”
애초에, 나보다는 윤소영이 목적인 모양이였다.
나한테는 두 번을 물어보지도 않은 인간들이…
아무튼 그랬다.
“ …. ”
나와 눈이 마주친 윤소영은 생긋 웃어보이면서, 옆에 앉아있는 나와 가볍게 팔짱을 껴 보였다.
“ 여기. 내 남자친구. ”
“ 진짜? 둘이 사귄다고? ”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듯,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스스로도 아직 믿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한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잔을 들어 털어넣으려고 하자, 윤소영은 내 팔을 잡고 애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왜 혼자 마시는거야. 너도 내 허락받고 마셔. ”
‘ …. ‘
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가능하면 대충 둘러대고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 들었다.
이런 데에서까지 머리를 써야하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앉아 있기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담배 연기도 그렇고, 온통 모르는 얼굴 투성이인 것도 그렇고.
윤소영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가볍게 생긋 미소지었다.
“ 이제 갈까? 영화 시간 다 됐는데. ”
“ …. 아, 그러네. ”
“ 그런데 진짜 둘이 사귀는거야? 언제부터? ”
글쎄. 니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내 성격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나는 윤소영의 손목을 잡아 일으키면서, 조용하게 대답했다.
“ 2년인가, 3년인가. 그러면 바빠서 먼저 일어날게. ”
-*-
딱히 경영대에서 새로운 CC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아도, 특별히 나와 윤소영의 캠퍼스 생활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주변이 시끄러워지는 기이한 현상에, 태풍의 눈은 안 쪽으로 갈수록 청명하고 바람이 없는 고요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있는 윤소영을 흘끗 쳐다보면서,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노린거지? ”
“ 조금? 너도 나한테 이상한 남자들 꼬이면 짜증나잖아. ”
윤소영은 생긋 웃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여우라니까, 정말.
그녀는 내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멈칫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봤다.
“ 왜? ”
“ 너 방금 나한테 여우같은 기지배, 뭐 이런 생각하지 않았어? ”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집애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가만히 엷은 미소를 띄우고, 윤소영에게 대답해 주었다.
“ 그런 생각 안 했는데. ”
“ 거짓말 하지마. 너는 얼굴에 다 써 있거든? ”
나는 깜짝 놀라서 스스로 얼굴을 매만졌다.
윤소영은 그것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라고 중얼거리며 혀를 쯧쯧 찼다.
“ 진짜 여우가 여우처럼 구는거 봤어? 김지은한테 비하면 멀었지. 너도 그 여자 조심해야 돼. ”
“ 선생님은 여우는 절대 아닐걸. 토끼…, 곰같은 여자에 가깝지. 내가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기만 하는데. ”
김지은을 동물로 비유하자면 토끼에 가깝다. 그것도 아니면 곰.
영리하지만 외로움을 타고, 미련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신의 서운한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
윤소영은 내 말에 코웃음을 치더니, 내 뺨을 꼬집었다.
“ 흥. 그러니까 김지은이 구미호라는거야. 그런 초보 여우들이랑 같은줄 알아? 자기가 곰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거야. 거 봐, 너 아직도 이렇게 홀려 있잖아. 정신 좀 차려. ”
“ 홀리긴 무슨…. ”
“ 그 여자 구미호라니까? 어휴, 진짜. ”
윤소영과 티격태격하면서 중도 터널을 지나 공대 간이식당 부근을 지나고 있었는데,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이 학교 안에서 내가 익숙한 얼굴이라면, 윤소영을 제외하더라도 단 한 명밖에 없었다.
“ 어, 선배. 어디 가세요? ”
“ 교선 하나 드랍 못 했거든. 이왕 이렇게 된거, 맨 앞에라도 앉아서 학점이라도 잘 받아야지. 그런데, 소영이랑 너 사귄다면서? ”
희주 선배는 특유의 알듯말듯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김지은이 있는데, 너 지금 대놓고 바람 피우고 있냐는듯한 눈빛이였다.
“ 잘 어울리네. 나, 이제 수업 들으러 가봐야 해. 조만간 또 모여서 맥주나 한 잔 하자. 시간 괜찮은 날 연락 줘. ”
“ 아, 네. 연락할게요. ”
희주 선배가 손을 흔들며 가버리자, 윤소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 너, 희주 언니랑 친했나? ”
“ 응…. 꽤 오래 됐는데. ”
“ 뭐야. 가뜩이나 인간관계 좁은 내 남자친구가 만나고 다니는 사람들을 내가 모를리가 없는데. 나 몰래 만나고 다녔던거야? ”
윤소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발끈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 뭘 만나. 진짜로 친한 선후배 사이야. ”
“ 여자친구도 둘이나 있는 인간이, 연락은 왜 하는데? ”
“ 아, 그건.. 희주 선배가 선생님이랑도 친해. 가끔 셋이 모여서, 맛있는거 먹으러 놀러다니거든…. ”
윤소영은 조금 토라진듯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모양인지, 말없이 그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 특유의 삐친듯 뾰로통하게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모습이나, 말없이 계속 걷기만 하는 태도만 보아도 잔뜩 탐탁치 않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 화났어? ”
“ 너한테 화낼게 뭐가 있어. 화 안 났는데. ”
“ 음…. 희주 선배랑 얘기하는게 싫은거야? 아니면…. ”
“ 너한테 화난거 아냐. 내가 모르는 게 있었다는걸 지금 알게되서 화난거야. ”
어쩐지 윤소영의 그런 대답은, 나를 달콤한 기분이 들게끔 만들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섭섭하다는듯 중얼거렸다.
“ 애초에 너 갑자기 사라졌을 때부터, 쭉 생각했어. 언젠가 돌아오면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
“ …. 너무 직설적인거 아냐? ”
“ 너는 말 안하면 모르잖아. 이렇게 일일히 말해줘야, 내가 소중한걸 알지. ”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생긋 웃어 보였다.
윤소영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그녀가 내게 하는 말은 어째 한 마디도 틀린 구석이 없다.
내가 직접 듣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거나 혼자 우울한 상상을 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라는건 어떻게 알아낸걸까.
2부
여우인지 곰인지 (1)
-*-
학기 초에는 신입생이라는 것을 변명삼아 펜을 내려두고 대신 잔을 집어든 학생들도 있었지만,
1학년 1학기 학점으로 2010년 류현진의 방어율을 기록해버린 신입생들은, 2학기가 들어서자 대부분 심기일전해서 펜을 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런것만도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서 사람들이 꼬여드는 윤소영의 경우에는, 그런 못된 무리들에게(대부분 남자였다) 매일같이 시덥잖은 연락이나 부탁에 시달리고 있었다.
“ …. 나는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어서,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 하겠는데. ”
“ 응, 그냥 투정. 내가 너 없었을 때는, 어떻게 지냈는지 가르쳐주고 싶어서…. 귀찮기는 한데, 가끔 장점도 있어. 이렇게 술도 공짜로 마시고 좋잖아. ”
윤소영은 짠, 하며 생긋 웃었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윤소영과 잔을 부딪치며, 소줏잔에 담겨있던 쓰고 찰랑거리는 액체를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 그 동안 친구들 만나면서 놀았어? ”
“ 응. 그냥, 이런 식으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다보면 시간은 잘 갔거든. 본의 아니게 시간은 잘가서, 속은 상했지만. ”
하기사 윤소영이 방학동안 다녔다는 요리 학원보다는, 이런 술자리가 조금 덜 지루하기는 할 것 같다.
“ 그러면 그렇게 말하지. 나랑 있으면, 제대로 놀지도 못하잖아. 미리 빠져줬을텐데… ”
“ 이제 됐어. 너랑 매일 붙어다니면서, 귀찮게 하던 인간들 염장이나 지르고 다닐거야. 나 인기 엄청 많은거 알아? 의외지? ”
의외일리가 없었다.
“ 니가 인기 많은건 전혀 의외가 아닌데…. 아무튼, 그래도 다음부터는 거짓말하면 안 돼. 나쁜 의도로 거짓말하는거면 절대 내가 눈치 못 채게끔 하고… 이런건 그냥,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는 과정 중 하나잖아. 내가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설명은 좀 이상하겠지만…. ”
“ 하나도 안 이상해. ”
윤소영은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때처럼 경영대 아래에 있는 카페에 앉아서 윤소영과 노닥거리고 있는데, 그녀는 바쁘지 않으면 가볍게 반주나 하자고 나를 가라오케식 주점으로 데려왔다.
나는 신촌에 있는 한 가라오케식 주점으로 들어와서, 이 방에 도착하자마자 당황했다.
알고보니, 13학번 동기들이 모여서 회식을 하고 있는 곳이였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곳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듯한 느낌이다.
‘ 적응이 안 되네, 정말. ’
계속 이어지던 노래가 잠시 끝나고, 예약된 노래도 없자 아무래도 주위의 신경이 이 쪽으로 쏠리는듯한 느낌이였다.
내가 괜히 나와 윤소영의 잔에 소주를 한 잔씩 따르자, 윤소영은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면서 내게 속삭였다.
“ 불편해? ”
“ 글쎄, 별로 안 친하잖아. 거의 다 처음 인사해보는 사람들이니까…. 꽤 그렇긴 하네…. ”
2학기가 시작해서야 서로 인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
혹시나 윤소영이 이런 모습을 싫어할까봐, 자신감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데 누군가 이 쪽으로 마이크를 들고 다가왔다.
“ 너네 둘만 아까부터 한 곡도 안불렀어. 자, 얼른 한 곡 뽑아. ”
1학년 과대인가하는 남자애였는데, 이름이 뭐더라. 이..
하기사 얼굴 보고 연락할 사이도 아닌데, 이름같은걸 외워서 뭘 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 난 됐어. ”
“ 소영이 너는? ”
“ 나도 됐어. ”
윤소영은 별로 관심 없어, 라고 써있는 듯한 새침한 표정만큼이나 도도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는 윤소영의 다분히 심드렁한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여전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은근하게 제의하기 시작했다.
“ 아, 왜? 한 곡만 불러. 너 노래 잘하잖아. ”
“ 남자친구가 지켜보고 계셔서 안 돼. 허락받아야 되거든. ”
“ 남자친구? ”
애초에, 나보다는 윤소영이 목적인 모양이였다.
나한테는 두 번을 물어보지도 않은 인간들이…
아무튼 그랬다.
“ …. ”
나와 눈이 마주친 윤소영은 생긋 웃어보이면서, 옆에 앉아있는 나와 가볍게 팔짱을 껴 보였다.
“ 여기. 내 남자친구. ”
“ 진짜? 둘이 사귄다고? ”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듯,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스스로도 아직 믿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한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잔을 들어 털어넣으려고 하자, 윤소영은 내 팔을 잡고 애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왜 혼자 마시는거야. 너도 내 허락받고 마셔. ”
‘ …. ‘
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가능하면 대충 둘러대고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 들었다.
이런 데에서까지 머리를 써야하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앉아 있기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담배 연기도 그렇고, 온통 모르는 얼굴 투성이인 것도 그렇고.
윤소영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가볍게 생긋 미소지었다.
“ 이제 갈까? 영화 시간 다 됐는데. ”
“ …. 아, 그러네. ”
“ 그런데 진짜 둘이 사귀는거야? 언제부터? ”
글쎄. 니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내 성격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나는 윤소영의 손목을 잡아 일으키면서, 조용하게 대답했다.
“ 2년인가, 3년인가. 그러면 바빠서 먼저 일어날게. ”
-*-
딱히 경영대에서 새로운 CC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아도, 특별히 나와 윤소영의 캠퍼스 생활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주변이 시끄러워지는 기이한 현상에, 태풍의 눈은 안 쪽으로 갈수록 청명하고 바람이 없는 고요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있는 윤소영을 흘끗 쳐다보면서,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노린거지? ”
“ 조금? 너도 나한테 이상한 남자들 꼬이면 짜증나잖아. ”
윤소영은 생긋 웃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여우라니까, 정말.
그녀는 내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멈칫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봤다.
“ 왜? ”
“ 너 방금 나한테 여우같은 기지배, 뭐 이런 생각하지 않았어? ”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집애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가만히 엷은 미소를 띄우고, 윤소영에게 대답해 주었다.
“ 그런 생각 안 했는데. ”
“ 거짓말 하지마. 너는 얼굴에 다 써 있거든? ”
나는 깜짝 놀라서 스스로 얼굴을 매만졌다.
윤소영은 그것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라고 중얼거리며 혀를 쯧쯧 찼다.
“ 진짜 여우가 여우처럼 구는거 봤어? 김지은한테 비하면 멀었지. 너도 그 여자 조심해야 돼. ”
“ 선생님은 여우는 절대 아닐걸. 토끼…, 곰같은 여자에 가깝지. 내가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기만 하는데. ”
김지은을 동물로 비유하자면 토끼에 가깝다. 그것도 아니면 곰.
영리하지만 외로움을 타고, 미련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신의 서운한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
윤소영은 내 말에 코웃음을 치더니, 내 뺨을 꼬집었다.
“ 흥. 그러니까 김지은이 구미호라는거야. 그런 초보 여우들이랑 같은줄 알아? 자기가 곰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거야. 거 봐, 너 아직도 이렇게 홀려 있잖아. 정신 좀 차려. ”
“ 홀리긴 무슨…. ”
“ 그 여자 구미호라니까? 어휴, 진짜. ”
윤소영과 티격태격하면서 중도 터널을 지나 공대 간이식당 부근을 지나고 있었는데,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이 학교 안에서 내가 익숙한 얼굴이라면, 윤소영을 제외하더라도 단 한 명밖에 없었다.
“ 어, 선배. 어디 가세요? ”
“ 교선 하나 드랍 못 했거든. 이왕 이렇게 된거, 맨 앞에라도 앉아서 학점이라도 잘 받아야지. 그런데, 소영이랑 너 사귄다면서? ”
희주 선배는 특유의 알듯말듯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김지은이 있는데, 너 지금 대놓고 바람 피우고 있냐는듯한 눈빛이였다.
“ 잘 어울리네. 나, 이제 수업 들으러 가봐야 해. 조만간 또 모여서 맥주나 한 잔 하자. 시간 괜찮은 날 연락 줘. ”
“ 아, 네. 연락할게요. ”
희주 선배가 손을 흔들며 가버리자, 윤소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 너, 희주 언니랑 친했나? ”
“ 응…. 꽤 오래 됐는데. ”
“ 뭐야. 가뜩이나 인간관계 좁은 내 남자친구가 만나고 다니는 사람들을 내가 모를리가 없는데. 나 몰래 만나고 다녔던거야? ”
윤소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발끈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 뭘 만나. 진짜로 친한 선후배 사이야. ”
“ 여자친구도 둘이나 있는 인간이, 연락은 왜 하는데? ”
“ 아, 그건.. 희주 선배가 선생님이랑도 친해. 가끔 셋이 모여서, 맛있는거 먹으러 놀러다니거든…. ”
윤소영은 조금 토라진듯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모양인지, 말없이 그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 특유의 삐친듯 뾰로통하게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모습이나, 말없이 계속 걷기만 하는 태도만 보아도 잔뜩 탐탁치 않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 화났어? ”
“ 너한테 화낼게 뭐가 있어. 화 안 났는데. ”
“ 음…. 희주 선배랑 얘기하는게 싫은거야? 아니면…. ”
“ 너한테 화난거 아냐. 내가 모르는 게 있었다는걸 지금 알게되서 화난거야. ”
어쩐지 윤소영의 그런 대답은, 나를 달콤한 기분이 들게끔 만들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섭섭하다는듯 중얼거렸다.
“ 애초에 너 갑자기 사라졌을 때부터, 쭉 생각했어. 언젠가 돌아오면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
“ …. 너무 직설적인거 아냐? ”
“ 너는 말 안하면 모르잖아. 이렇게 일일히 말해줘야, 내가 소중한걸 알지. ”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생긋 웃어 보였다.
윤소영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그녀가 내게 하는 말은 어째 한 마디도 틀린 구석이 없다.
내가 직접 듣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거나 혼자 우울한 상상을 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라는건 어떻게 알아낸걸까.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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