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7장 착각
첫 담임을 맡고 의욕에 넘쳤던 그 해. 나는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며 남는 시간에는 아이들의 생활기록부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번호 순서대로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정은희’라는 이름 앞에서 잠시 멈췄다. 이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은희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익숙함이었다.
분명 처음 만나는 아이. 게다가 이제 열아홉 살. 스물일곱 해를 살면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그녀에게서 나는 아주 오래전 잊고 있던 소꿉친구를 떠올렸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하지만 누구나 가슴 한 편에 간직하고 있는 아련한 추억 같은 것.
놀이터에 해가 지도록 소꿉놀이를 하던, 나는 아빠 그리고 너는 엄마,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는 엄마.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순이.
이제는 내 앞에 은희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그녀에게 나는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어린 소녀라서도 아니고 더군다나 내 반의 학생이라서도 아니었다. 그저 한 남자로서 한 여자에게 갖는 신비함 같은 거라고 할까?
나는 그녀의 신비를 한 꺼풀 벗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묘한 기대감으로 그녀의 이름을 클릭했다.
내신 2.7, 학교 안에서도 거의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학교생활... 여러 줄로 써 있는 행동발달사항 모두 고려하면 한마디로 모범생이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나 신임도 대단해서 임시 반장을 정하자는 말에 거의 압도적으로 은희가 추천을 받을 정도였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뻔한 실험을 눈으로 확인한 학생처럼 나는 허탈해하며 조용히 인터넷 창을 닫았다. 어쩌면 진짜 중요한 내용은 교과서에 없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잠시 바람도 좀 쐴 겸, 그리고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몰래 볼 겸 해서 교무실을 나왔다. 좀 있으면 야자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을 귀가시켜야 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3월 초, 복도의 밤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나는 복도 한 구석에서 불이 켜진 교실 안을 몰래 지켜보았다. 열심히 공부를 하는 아이도 있고 졸고 있는 아이도, 대놓고 자고 있는 아이도 있고 내가 보는지도 모르고 만화책을 펴 놓고 있는 아이도 있다.
그리고 교실 맨 앞줄. 밤색 단발머리의 은희가 앉아서 열심히 뭔가를 보고 있었다. 공부를 할 때는 안경을 쓰는지 검정색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 안에 큰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며 그 아래 책을 내리보고 있었다. 작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글씨도 쓰면서.
너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니? 누군가가 이렇게 너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문득 이런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런 건 호기심이 약간 지나친 것 이상은 아닐거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때, 띠리링~ 띠리링~~ 야자 시간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나는 은희를 몰래 바라보는 은밀한 재미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귀가시키기 위해 교실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자 아이들은 저마다 집에 가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별다른 말없이 빨리 보내주는 것이 좋겠지.
“자... 다들 오늘 하루도 열심히 했니?....”
몇 마디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몇이나 귀담아 들을까? 다만 맨 앞에 앉은 은희만은 꼿꼿하게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희는 아직 가방을 정리하다 말고 내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보통 애들은 선생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만 하는데... 이 애도 참 별나구나 싶었다.
나는 간단히 종례를 마친 후 아이들을 집에 돌려보냈다. 내 말이 끝나자 은희도 자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은희가 보고 있는 것은 국어영역 문제집이었다.
나는 괜히 은희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서 공부 얘기를 꺼냈다.
-모범생과 친해지려면 공부 이야기가 제일 좋지 않을까?
-그런데 왜 친해지려는 건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담임선생님이 반 학생과 친해지는 게 뭐가 이상해?
-응... 솔직히 이상해.
내 속에서 다투는 또 다른 나의 말소리와 상관없이 나는 입을 열었다.
“흠흠... 과학 문제집 보고 있었구나. 뭐 어려운 거 없니?”
내가 말을 하고도 진짜 어색했다. 나는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다. 은희는 가방을 싸다가 내 말을 듣고 어색하게 나를 보더니 웃었다.
“아... 네... 괜찮아요.”
그러고는 마저 짐을 싸는 것이었다.
나는 괜히 머쓱해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선생님이 학생과 공부를 이야기하는 게 이렇게나 어색한 것인지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은희가 문제집을 다시 꺼내더니 어딘가 표시한 부분을 펼쳤다.
“쌤... 저기, 여기 이 부분요... ”
“응?”
“음... 그러니까... 여기 이 문제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 이거? 어디 보자.”
나는 은희가 질문한 부분의 지문을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은희가 질문한 부분은 물리와 지구과학이 응용된 문제 같았다.
내 전공인 생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은희가 한 처음 질문인데 어떻게든 잘 설명해주고 싶었다.
은희의 기대하는 듯한 표정에 자신감을 가지고 문제를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그런데 창문 밖에서 누군가가 은희에게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은희야, 뭐해? 빨리 가자.”
“응, 나 오빠한테 뭐 좀 물어보고.”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내 눈 앞에는 얼굴이 빨개진 은희가 있었다.
“아... 저기... 그러니까... 쌤... 음음...”
은희는 양손의 검지손가락을 맞대고 붙였다 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두 눈은 놀래서 더 커져 있었고 이제는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다만 은희의 탐스러운 밤색 머리카락만 어쩔 줄 모르고 흔들리고 있었다.
“아.. 응...”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나 역시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몰라 은희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주 짧은 순간, 하지만 시간은 정지되어버린 순간을 마주보고 서 있었다. 우리를 구해준 것은 밖에서 은희를 불렀던 친구였다. 소영이었나? 은희의 옆에 앉았던 아이.
“야, 너 뭐래? 하하하.”
소영이의 너털웃음에 우리 사이에 어색함은 씻겨 내려가 버렸다. 나는 그게 오히려 아쉬웠다.
“쌤보고 오빠가 뭐야. 너 담임쌤 좋아하냐? 하하하”
“아냐! 실수야. 아, 쌤... 정말 죄송해요...”
은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빙그레 웃었다. 저도 나처럼 이 순간을 벗어나게 되어 적잖게 다행인가 보다.
나도 애써서 사태를 수습하며 태연한 척, 그리고 너의 실수 같은 사소한 문제 따위는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웃었다.
“아, 뭐 어때? 쌤보다 오빠란 소리가 더 좋지.”
내 농담에 은희도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직 빨간 물이 채 가시지 않은 볼에 예쁜 보조개가 패이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그만 은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은희는 내 손이 머리에 닿자 약간 움찔하지만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빙그레 웃었다.
“쌤 저는 가봐야겠어요. 이 문제는 내일 다시 여쭤볼게요.”
“아, 그래. 내일 보자.”
“네.”
인사를 하고 짐을 챙기는 은희. 나는 못내 아쉬워서 한 마디 더 붙인다.
“조심해서 가고.”
“네, 쌤도 안녕히 가세요.”
은희는 주섬주섬 가방을 싸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에게 쏜살같이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오빠한테 뭐 좀 물어보고...
-오빠한테 뭐 좀...
-오빠한테...
-오빠...
그녀의 흔적과 말은 이 자리에서 시간과 함께 조금씩 사라졌다. 아무리 애써 기억해내려고 해도 찰나의 순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는 모두 가 버리고 아무도 없는 교실. 텅 빈 교실에 나 혼자 남아 있다. 내 앞에 은희의 잔상도 서서히 희미해졌다.
은희의 부드러운 머릿결 감촉을 애써 기억해내려고 손을 쥐었지만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그녀의 말, 오빠라는 한 단어만은 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내일은... 아마 오늘과는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 같았다.
첫 담임을 맡고 의욕에 넘쳤던 그 해. 나는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며 남는 시간에는 아이들의 생활기록부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번호 순서대로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정은희’라는 이름 앞에서 잠시 멈췄다. 이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은희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익숙함이었다.
분명 처음 만나는 아이. 게다가 이제 열아홉 살. 스물일곱 해를 살면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그녀에게서 나는 아주 오래전 잊고 있던 소꿉친구를 떠올렸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하지만 누구나 가슴 한 편에 간직하고 있는 아련한 추억 같은 것.
놀이터에 해가 지도록 소꿉놀이를 하던, 나는 아빠 그리고 너는 엄마,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는 엄마.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순이.
이제는 내 앞에 은희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그녀에게 나는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어린 소녀라서도 아니고 더군다나 내 반의 학생이라서도 아니었다. 그저 한 남자로서 한 여자에게 갖는 신비함 같은 거라고 할까?
나는 그녀의 신비를 한 꺼풀 벗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묘한 기대감으로 그녀의 이름을 클릭했다.
내신 2.7, 학교 안에서도 거의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학교생활... 여러 줄로 써 있는 행동발달사항 모두 고려하면 한마디로 모범생이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나 신임도 대단해서 임시 반장을 정하자는 말에 거의 압도적으로 은희가 추천을 받을 정도였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뻔한 실험을 눈으로 확인한 학생처럼 나는 허탈해하며 조용히 인터넷 창을 닫았다. 어쩌면 진짜 중요한 내용은 교과서에 없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잠시 바람도 좀 쐴 겸, 그리고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몰래 볼 겸 해서 교무실을 나왔다. 좀 있으면 야자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을 귀가시켜야 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3월 초, 복도의 밤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나는 복도 한 구석에서 불이 켜진 교실 안을 몰래 지켜보았다. 열심히 공부를 하는 아이도 있고 졸고 있는 아이도, 대놓고 자고 있는 아이도 있고 내가 보는지도 모르고 만화책을 펴 놓고 있는 아이도 있다.
그리고 교실 맨 앞줄. 밤색 단발머리의 은희가 앉아서 열심히 뭔가를 보고 있었다. 공부를 할 때는 안경을 쓰는지 검정색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 안에 큰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며 그 아래 책을 내리보고 있었다. 작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글씨도 쓰면서.
너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니? 누군가가 이렇게 너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문득 이런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런 건 호기심이 약간 지나친 것 이상은 아닐거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때, 띠리링~ 띠리링~~ 야자 시간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나는 은희를 몰래 바라보는 은밀한 재미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귀가시키기 위해 교실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자 아이들은 저마다 집에 가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별다른 말없이 빨리 보내주는 것이 좋겠지.
“자... 다들 오늘 하루도 열심히 했니?....”
몇 마디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몇이나 귀담아 들을까? 다만 맨 앞에 앉은 은희만은 꼿꼿하게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희는 아직 가방을 정리하다 말고 내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보통 애들은 선생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만 하는데... 이 애도 참 별나구나 싶었다.
나는 간단히 종례를 마친 후 아이들을 집에 돌려보냈다. 내 말이 끝나자 은희도 자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은희가 보고 있는 것은 국어영역 문제집이었다.
나는 괜히 은희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서 공부 얘기를 꺼냈다.
-모범생과 친해지려면 공부 이야기가 제일 좋지 않을까?
-그런데 왜 친해지려는 건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담임선생님이 반 학생과 친해지는 게 뭐가 이상해?
-응... 솔직히 이상해.
내 속에서 다투는 또 다른 나의 말소리와 상관없이 나는 입을 열었다.
“흠흠... 과학 문제집 보고 있었구나. 뭐 어려운 거 없니?”
내가 말을 하고도 진짜 어색했다. 나는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다. 은희는 가방을 싸다가 내 말을 듣고 어색하게 나를 보더니 웃었다.
“아... 네... 괜찮아요.”
그러고는 마저 짐을 싸는 것이었다.
나는 괜히 머쓱해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선생님이 학생과 공부를 이야기하는 게 이렇게나 어색한 것인지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은희가 문제집을 다시 꺼내더니 어딘가 표시한 부분을 펼쳤다.
“쌤... 저기, 여기 이 부분요... ”
“응?”
“음... 그러니까... 여기 이 문제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 이거? 어디 보자.”
나는 은희가 질문한 부분의 지문을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은희가 질문한 부분은 물리와 지구과학이 응용된 문제 같았다.
내 전공인 생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은희가 한 처음 질문인데 어떻게든 잘 설명해주고 싶었다.
은희의 기대하는 듯한 표정에 자신감을 가지고 문제를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그런데 창문 밖에서 누군가가 은희에게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은희야, 뭐해? 빨리 가자.”
“응, 나 오빠한테 뭐 좀 물어보고.”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내 눈 앞에는 얼굴이 빨개진 은희가 있었다.
“아... 저기... 그러니까... 쌤... 음음...”
은희는 양손의 검지손가락을 맞대고 붙였다 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두 눈은 놀래서 더 커져 있었고 이제는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다만 은희의 탐스러운 밤색 머리카락만 어쩔 줄 모르고 흔들리고 있었다.
“아.. 응...”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나 역시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몰라 은희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주 짧은 순간, 하지만 시간은 정지되어버린 순간을 마주보고 서 있었다. 우리를 구해준 것은 밖에서 은희를 불렀던 친구였다. 소영이었나? 은희의 옆에 앉았던 아이.
“야, 너 뭐래? 하하하.”
소영이의 너털웃음에 우리 사이에 어색함은 씻겨 내려가 버렸다. 나는 그게 오히려 아쉬웠다.
“쌤보고 오빠가 뭐야. 너 담임쌤 좋아하냐? 하하하”
“아냐! 실수야. 아, 쌤... 정말 죄송해요...”
은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빙그레 웃었다. 저도 나처럼 이 순간을 벗어나게 되어 적잖게 다행인가 보다.
나도 애써서 사태를 수습하며 태연한 척, 그리고 너의 실수 같은 사소한 문제 따위는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웃었다.
“아, 뭐 어때? 쌤보다 오빠란 소리가 더 좋지.”
내 농담에 은희도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직 빨간 물이 채 가시지 않은 볼에 예쁜 보조개가 패이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그만 은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은희는 내 손이 머리에 닿자 약간 움찔하지만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빙그레 웃었다.
“쌤 저는 가봐야겠어요. 이 문제는 내일 다시 여쭤볼게요.”
“아, 그래. 내일 보자.”
“네.”
인사를 하고 짐을 챙기는 은희. 나는 못내 아쉬워서 한 마디 더 붙인다.
“조심해서 가고.”
“네, 쌤도 안녕히 가세요.”
은희는 주섬주섬 가방을 싸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에게 쏜살같이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오빠한테 뭐 좀 물어보고...
-오빠한테 뭐 좀...
-오빠한테...
-오빠...
그녀의 흔적과 말은 이 자리에서 시간과 함께 조금씩 사라졌다. 아무리 애써 기억해내려고 해도 찰나의 순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는 모두 가 버리고 아무도 없는 교실. 텅 빈 교실에 나 혼자 남아 있다. 내 앞에 은희의 잔상도 서서히 희미해졌다.
은희의 부드러운 머릿결 감촉을 애써 기억해내려고 손을 쥐었지만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그녀의 말, 오빠라는 한 단어만은 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내일은... 아마 오늘과는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 같았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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