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정보원 까뜨린느 깐또나
[1]
김효원은 마지멜 영사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지금 출발한다는 것을 알렸다. 강대리는 나를 태우고 서대문 쪽으로 달렸다. 우리는 간신히 5시 전에 도착했다.
"끝나면 전화해."
"또 오려고?"
"우리 저녁도 먹어야지. 이 근처에서 쇼핑하면서 기다릴께."
"그럼 같이 들어가지 그래?"
"뭐. .. 있어 봐야 말 한마디 알아듣지도 못할텐데 .. 나중에 오빠 데리러 올게."
강대리는 정문 앞에 나를 내려주고 신촌 쪽으로 간다.
[2]
정문에서 나는 올리비에 마지멜 영사를 만나러 왔다고 이야기를 했다. 한참을 기다리니까 투피스 정장 차림의 젊은 프랑스 여자가 나에게 왔다.
"남상수씨?"
"예."
"멜라니 사니에 (Melanie Sagnier)입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녀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서 우리는 악수했다.
"마지멜 영사님께 안내하겠습니다. 나를 따라 오시십시오."
"기꺼이. 고마워요."
그녀는 나를 데리고 건물의 뒷문으로 갔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로 3층으로 올라갔다. 착한 인상이다. 키가 커서인지 몸매도 좋은 것 같다. 뽀얀 피부에 진한 갈색의 머리카락이다. 아직 30은 안됐을 것 같다.
가는 길에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지하철로 오셨어요?"
"아니오. 승용차로 왔어요."
"퇴근길인데, 도로에 차가 밀리지 않나요?"
"서울인데 그럴 리가 있어요? 파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아. .. 그래요. 이 시간에는 세계 어디나. .."
"파리에서 왔어요?"
"잠시 살았어요. 집은 깔레예요."
"깔레? 그 작고 아름다운 항구? 영국 가는 배 타는 곳 말이죠?"
"어머. 알고 계세요?"
"여름 휴가 2주를 보낸 적이 있어요."
"하하하."
"왜 웃죠?"
"프랑스어 억양이 특이해서요. 깔레를 아는 것도 신기하고."
"서울은 마음에 들어요?"
"내 취향은 아닙니다."
시골 출신이라서 그런지 말도 엄청 귀엽게 한다. 하얀 블라루스에 싸인 가슴이 숨 쉴 때마다 오르내린다. 아마도 몇년 전만 해도 분명 나는 작업을 걸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대화가 오고갔으면 벌써 작업은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밤에 와인만 같이 기울이면 작업은 마침표인데..
[3]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방문 옆에는 "318, 영사 올리비에 마지멜 (Consul Olivier Magimel)" 이라고 적힌 푯말이 붙어있다. 나를 데리고 간 그 여자는 노크도 하지 않고 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한 남자가 자기 자리에 앉아서 우리를 쳐다보고 서툰 한국말로 물었다.
"남상수씨?"
"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리에게 왔다. 그는 나와 악수를 했다. 실제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능글능글한 재수없는 눈빛. 술과 밤거리의 여자를 엄청 밝힐 타입이다. 변태같은 쉬퀴.
"반갑습니다. 올리비에 마지멜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우리는 소파에 앉았고, 나를 데려온 여자가 우리에게 커피를 내준다.
"남상수씨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3]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 때 나를 데리고 온 여자 멜라니가 다른 여자를 데리고 들어온다. 마지멜 영사가 그녀를 나에게 소개했다.
"까뜨린느 깐또나( Catherine Cantona)입니다. 파리 경찰청 국제부 소속입니다."
"남상수입니다."
그녀는 괘씸하게도 완전 차도녀 그 자체이다. 그녀가 그야말로 차가운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어서, 나는 그녀와 악수를 하면서 인사했다. 매우 짧은 시간 동안에 그녀는 나를 매서운 눈초리로 아래위로 훑어본다. 나도 지지않고 그녀를 스캔했다.
30대 초반.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 오만한 콧대. 푸른 눈. 검은 머리. 광대뼈 없음. 날카롭고 예리해 보이는 인상. 가슴 사이즈는 중반. 허리가 가늘고 배가 나오지 않았음. 운동을 엄청 하는 것 같음. 엉덩이는 제법 사이즈. 전체적으로는 찬 바람이 불고, 표독스러운 인상.
완전 고양이 같다. 귀여운 고양이가 아니라, 엄청 화가 나있는 고양이. 나에게 주는 것도 없이 완전 밉상이다. 그래도 기본 얼굴은 예쁘기는 예쁘다. 은근히 나를 자극한다.
"아휴. 저걸 그냥. 확!"
첫눈에 보아도 마지멜이나 까뜨린느는 외교관은 아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콧대를 한껏 치켜들고 있다. 약간은 신경질적인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인들을 문화가 없는 미개인이라면서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
이런 부류의 재수없는 인간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있어야 한다는 것은 진짜 짜증나는 일이다. 까뜨린느에게 푸르고 깊은 눈과 검은 머리의 미모만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을 것이다.
파리 경찰청이라는 말은 거짓말인 것 같고, DGSE(Direction Generale de la Securite Exterieure)의 직원임에 틀림없다. 프랑스의 DGSE는 한국으로 말하자면 국정원 중에서도 해외에서 활동하는 부서이다. 그렇다면 올리비에 마지멜도 무관이거나, 아니면 그도 역시 DGSE의 멤버일 것이다. 갑자기 긴장된다.
그런데 내가 프랑스 정보부의 직원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마치 불꽃이 튀는 것처럼, 순식간에 내 머리에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제일 먼저 엠마의 아버지인 끌레망 비노쉬 박사에게로 초점이 모아진다. 그 사람 말고는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
생각이 여기에 도달하자, 나에게 숨막히던 긴장감이 풀린다.
[4]
그런데 갑자기 잠자던 나의 심술과 오기에 시동이 걸린다. 그녀가 말을 하기 전에, 선제 공격을 위하여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것도 불어가 아니라 영어로 이야기를 해버렸다. 고양이 정도쯤이야 나도 얼마든지 건드릴 수 있거든.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깐또나씨는 DGSE에서 근무하시는 분 같은데요? 아니라면 실례했습니다."
까뜨린느가 멈칫하며 놀란다.
"하아. .. 어쩔 수 없군요. 그 점은 내가 시인합니다."
내가 분명히 영어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불어로 이야기 한다. 고집을 한번 부려보겠다 이건가? 어떻게 하면 저 여자가 꼬리를 내리게 하지? 두 번째 공격이다.
"나한테 용무가 있으면 깐또나씨께서 내가 근무하는 회사로 직접 와도 됩니다. 우리 회사 앞에 까페가 있는데, 거기 까뻬오레가 약간 비싸기는 해도, 맛은 완전 예술이거든요. 만일 갖고 계신 돈이 부족하면 제가 지불할 용의도 있어요."
일은 이미 벌어졌다. 이 사태는 내가 주최한 것이므로 내가 수습해야 한다. 까뜨린느의 기분이 엄청 상했고, 나는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까뜨린느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잠시 스친다. 역시 내공이 장난이 아니다. 완전 고수이다.
까뜨린느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내게 물었다.
"내가 남상수씨를 이리로 오시게 해서 기분이 상하셨나요?"
"나는 프랑스 국민이 아닙니다.
나는 프랑스 정부나 정보부에 용무도 없고, 범죄를 저지른 적도 없습니다.
나에게도 근무하는 직장이 있는데, 업무를 중단하면서까지 여기에 왔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좋을 이유가 단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 인터뷰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끝냈으면 합니다."
"그 정도라면 미안합니다. 다음에는 내가 그 회사로 가겠습니다."
"진심이기를 기대합니다."
"진심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불편한 내 심기를 직설적으로 표현했고, 나는 그녀로부터 사과를 받아냈다. 물론 빈 말이겠지만.
끝까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삐딱선을 탄다면 큰 소리가 오고갔을 것이다. 갑자기 그녀가 꼬리를 내리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재빨리 사태 파악을 하고, 나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오고 싶을 때에는 언제든지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원래는 하는 것이 예의이다. 그 말을 하는 대신에 일부러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고양이가 너무 차갑지만, 그러나 너무 평온해한다. 자칫 잘못하여 실수하기 십상이다. 여기서 내가 재빨리 평정심을 찾기로 한다. 나는 심호흡을 깊이 하면서 일부러 긴장을 했다.
[5]
까뜨린느의 얼굴에 찌들어있는 차가운 표정이 풀리지 않는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더니 내게 물었다.
"끌레망 비노쉬 박사를 알고 계시죠?"
"예."
"그 분의 딸 엠마 비노쉬 박사님과 결혼을 앞두고 계시죠?"
"예."
내 예상이 적중했다. 그녀가 말한 사람은 바로 엠마의 아버지이다. 결혼 부분은 아직 너무 이르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파리에서 무슨 말들을 해두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시인해버린다.
그녀는 나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면서 말했다.
"끌레망 비노쉬 박사님이 두 분의 결혼 문제로 이번 성탄절에 서울에 온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계획을 막고 싶습니다. 이 일에 남상수씨께서 협조해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이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에 차가운 인상이 약간 풀린다.
"개인적인 만남인데, 그 것까지 정보부에서 간섭하는 이유를 먼저 말하는 것이 예의가 아닙니까?"
그녀가 드디어 얼굴에 웃음을 띤다.
"남상수씨. 기분 푸십시오. 이제부터 비지니스입니다."
"알았습니다."
"뭐야? 그럼, 지금까지는 비지니스 아었으면? 혹시 연애질이라도 했었냐?"
[6]
까뜨린느는 내 눈을 보며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내년 연초에 베이징에서 중국과 프랑스의 두 정상이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도쿄나 서울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의 직원들 중에 상당수는 베이징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베이징에 있는 주중 프랑스 대사관의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DGSE 직원들은 거의 다 베이징으로 몰려든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그 시점에 엠마의 아버지인 끌레망 비노쉬 박사가 서울에 오면, 서울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에서는 그의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까뜨린느 깐또나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차라리 남상수씨께서 파리에 가셔서 그 분들과 이번 연말을 보내시면 안될까요?
그렇게 하시면 그 비용은 여기 대사관에서 부담할 것입니다."
"뭐라고요?"
진짜 어이없다.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정보부 사람들은 아예 기본 상식도 없단 말인가?
그렇지만 엠마의 아버지는 프랑스 정부에서 요주의 인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는 말이다. 그가 만일 러시아나 중국 또는 북한으로 망명을 한다고 생각하면, 프랑스 정부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타격일 것이다. 또 그런 일들은 저런 분야에서는 흔히 있는 이야기인데, 다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나도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귀국할 때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고 선서를 하고, 서류에 사인도 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나에게 비밀 유지비를 지급하고 있다. 까뜨린느 깐또네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순리대로 하자면 나는 까뜨린느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한다. 또 그런 정도는 나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호락호락 넘어갈 수는 없지. 이런 부탁을 할 거면 처음에는 왜 그렇게 딱딱거렸는데?
일단 나는 곤란하다는 식으로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핑계가 문제이다.
[7]
"그게 어디 비용의 문제입니까?
나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라서, 오랜 기간 동안을 회사를 떠나 있을 수가 없어서. .."
"저희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남상수씨는 직책이 상무이사인데,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습니까?"
"정말 불쾌한데요. 당신 혹시 개념을 상실했나요?
당신들은 나와 사전에 합의도 없이, 그런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갖고 있죠?"
"지금까지 모르고 계셨다면 말이 안됩니다.
남상수씨는 지난 번에 파리에 가서 끌레망 비노쉬 박사를 만나셨지요?
두 사람은 프랑스 전술무기 개발의 일급 비밀을 갖고 계신 분들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서울에 계신 남상수씨의 신변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뭐라고? 신변 보호를 한다는 사람들이 감시나 하고, 오라가라 하면 되는거요?
예의도 문화도 없는 야만인들과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변 보호 차원에서 의논할 일이 있어서 .."
"이게 의논이요? 나에게는 명령으로 들리거든요."
"하아. .. 남상수씨. 제발 기분을 풀으시라니까. .."
"내가 당신 고양이요? 당신이 나보고 기분 풀으라고 하면, 내가 풀어요?"
"하하하. 남상수씨. 오늘 저녁 디너를 저랑 하시는 것은 어때요?
파리에서 오신 후로 파리의 밀로(ParisMilian) 음식이 생각날 때도 됐을 것 같은데요."
"진짜 모르는 것이 없네."
"손바닥입니다."
고양이라는 말에 결국 그녀는 웃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나와 같이 저녁도 같이 먹자고 했다. 내가 이 달콤한 유혹을 어떻게 뿌리칠 수가 있는가? 그녀는 이제 차도녀의 가면도 벗었는데. 나도 예의를 아는 남자가 아닌가? 그런데 내가 말한 고양이의 의미와, 그녀가 알아들은 고양이의 의미가 같을까? 저거 완전 바보도 아니고 ..
"거절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갑시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까드린느는 마지멜에게 눈짓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가시죠."
"제가 뒤를 따르겠습니다."
물론 나도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들의 부탁을 거절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8]
나는 강대리에게 전화를 했다.
"끝났어?"
"그게 아니라, 대사관에서 저녁을 먹자고 하네. 먼저 들어가."
"뭐야아. 여지껏 기다리게 해놓고."
"미안. 내일 보자."
"그런데 냄새가 솔솔 나는데? 분명 오빠가 작업 걸었지?"
"내가 만날 그 사람이 남자 아니었니? 나는 남자한테는 절대 작업 안걸거든."
나는 강대리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다.
[9]
까뜨린느는 나를 자기 차에 태워서 신촌으로 간다. 그 곳에 있는 프랑스 식당이 자기가 다녀본 곳 중에서는 가장 먹을 만 하다는 것이다. 나도 한번 가본 적은 있는데, 나한테는 별로였던 기억이 난다. 그 식당에서 파리의 밀로(ParisMilian), 또 털보 브리옹 아저씨네의 음식 맛이 생각난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되는 소리다. 그런데 나는 까뜨린느가 하자는 대로 해보기로 한다. 그녀에게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그녀는 나에게 송이버섯을 넣은 크림소스가 곁들여진 스테이크를 주문해주었다. 매콤하고, 맛은 괜찮은 것 같다. 까드린느는 나에게 보르도산 와인이라면서 내 잔에 와인을 따른다.
"남상수씨. 내년 여름까지 프랑스로 복귀하시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 무슨 말이죠?"
"아마도 미국에서 남상수씨를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아요.
그 때에는 우리도 남상수씨의 안전을 보장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고, 만일 그렇게 되면 한국 정부는 가만히 있겠어요?"
"한국도 중성자탄을 개발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미국과는 승산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아직은 우리에게 협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한국의 경찰이나 정보부에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고, 협조를 요청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동의하기 전에는 한국 정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공개적인 사안이 아니라서, 그것은 더 이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해하시겠지요?"
혹시 이 말로 나에게 겁주려는 것이 아닐까?
[10]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까뜨린느에게 투덜거렸다.
"도대체 나를 갖고 왜 그런데?
나는 오래 전에 그런 일에서 손을 뗐고, 지금은 평범한 회사원이야. "
"내가 자세한 내막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내 입장도 이해해 주십시오.
아무튼 우리는 서울에 있는 인터폴에 남상수씨를 파리로 넘겨달라고 해야 하는 입장이고,
이 계획에는 한국 정부도 동의하게 되어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꾸미고 있죠?"
"끌레망 비노쉬 박사님께서 우리에게 의뢰하신 일입니다."
"도대체 파리가 이렇게까지 오바액션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
끌레망 비노쉬 박사님의 말씀에 따라서 남상수씨를 미국에 넘겨줄 수 없기 때문이죠."
"이건 뭐. 첩보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 전부 다 말도 안되는 황당한 얘기야. "
"남상수씨. 전혀 황당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아요. 엄청 쉽고 간단해요.
“왜?”
“엠마 비노쉬 박사님과의 결혼을 자꾸 늦추지만 않으면 된다니까요."
"참나. .."
그러니까 엠마와의 결혼이 문제였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국을 들먹거린 것은 까뜨린느가 뻥을 친 것 같다. 이 결혼을 위해서 정보부를 동원했다고? 아무래도 이것은 억측 같다. 아니면 정년 퇴직을 얼마 앞두고 있는 엠마의 아버지가 이 결혼을 통해서라도 자기 계획을 이루려는 것일까? 만일 나도 모르게 뒤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다면 엠마는 분명 나에게 정보를 흘려줄텐데 ..
[11]
식사가 끝나자 까뜨린느는 대리기사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녀는 기사에게 차의 키를 넘겨주고, 나와 함께 뒷좌석으로 탔다. 그녀는 기사에게 내 오피스텔로 가자고 하는데,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차는 한남대교를 건너기 위해 남산터널을 지나고 있다. 나는 까뜨린느에게 물었다.
"깐도나씨. 댁의 정체가 뭐죠?"
"내 이름은 까뜨린느 깐또나. .."
"그것도 거짓말 이름 아닌가?"
"아무렴 어때? 이름이니까 그냥 부르면 되지."
"까뜨린느는 나에 대해서 다 알고 있고, 나는 아무 것도 모르면 돼?"
"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마. 모르는 것이 좋아."
“협박하냐?”
“내 말은 사실이야.”
그녀는 고개를 창 밖으로 돌리고 얕은 한숨을 내쉰다.
"하아. .. "
지금 까뜨린느의 모습은 007 영화에 나오는 여자 스파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저럴 때는 꼭 착하고 순진한 여고생 같다. 이 여자는 기본이 이렇게 착하고 여려 보이는데, 어떻게 그런 거친 직업을 가졌을까?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쳐다 본다. 그녀가 나에게 기대오고, 그녀의 코바람이 내 목으로 쏟아진다.
"까뜨린느."
"어?"
"내가 엠마와 결혼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 맞지?"
"결혼하고 파리에 가서 살아야지."
"음 .. "
"이번에도 엠마의 아버지가 너에게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라고 했다며?"
"그랬어."
"그 말 거절하지 않는 것이 좋아."
"알았어."
"결혼. .. 할거지?"
"하도록 해볼께."
"하아. .. 진짜 얄밉다."
"뭐가?"
"아니야. 다 왔다. 여기가 너 사는 오피스텔이지?"
흔히 작별할 때에 인사하는 것처럼, 나는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댔다.
그러나 그녀는 내 목을 잡고 내 입술을 빨면서 키스했다.
"다음에는 내가 너네 회사로 갈께."
나는 그녀의 차에서 내렸고, 그녀의 차는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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