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부 고해
그 날은 일요일 늦은 밤이었다. 나는 약속한 장소에 5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낡은 건물들 사이에 있어 누가 말해 주지 않는다면 거기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칠 작은 다방이었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의외로 넓은 공간이지만 손님은 역시 거의 없었다. 다방 제일 구석에서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그녀가 보였다.
나는 주먹을 다시 꽉 쥐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은희 어머님...”
그녀, 은희의 어머니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말없이 다시 자세를 단정히 했다. 굳이 우리 사이에 많은 말은 필요없을 듯했다. 나는 그녀 앞자리에 조심스럽게 가서 앉았다.
목이 타는지 은희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점원이 다가 와서 내 자리 앞에 물 한 잔과 메뉴판을 건네고는 돌아섰다.
“여기 오기 전에... 많이 생각했어요. 그리고 지금 선생님과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네, 이해합니다.”
은희의 어머니를 처음 만난 건 학기 초였다. 은희가 반장이 되고 으레 반장의 어머니로서 인사차 찾아온 것이 그녀와의 유일한 만남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너무나 차갑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녀는 다시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게 뭔지 아시나요”
나는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은희가... 은희가 상처 받지 않을까... 그거였어요.”
그 말을 마친 은희 어머니의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내 말 한마디에 내 인생은 끝장이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님.”
“죄송하다고요? 그게 다 인가요?”
은희 어머니의 목소리는 약간 높아졌다. 그녀도 그걸 의식했는지 손에 쥔 힘을 스르르 풀고는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그저 죄송하다는...”
은희 어머니는 테이블 위를 손으로 탁 쳤다. 올려 진 찻잔이 심하게 흔들렸다.
“저는 지금 선생님을 죽여 버리고 싶어요.”
은희 어머니는 차갑게 말했다.
“내 딸의 인생을... 아직 어리고 이제 곧 수능도 얼마 안 남았는데... 선생님, 그게 교육자로서 할 짓인가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교육자로서 이전에... 그게 남자로서 할 짓인가요?”
“...”
“당신은... 짐승이에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짐승보다 못해요. 짐승도 당신처럼 쾌락만을 ?지는 않아요.”
생물 선생인 내가 은희 어머니 앞에서 이런 말을 들어야한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다. 맞다. 나는 사랑이 쾌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나는 그녀의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난 그녀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은희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는 나를 마치 한 마리 벌레를 보는 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견디기가 너무나 괴로웠다.
“선생님 생각은... 제가 잘 알았어요.”
술에 취한 은희는 벌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말소리가 꼬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몇 잔의 술을 마셨는지 모른다. 하지만 은희가 지금 취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때 우리 엄마가... 무슨 생각이셨는지 아세요? 꼴깍.”
은희는 다시 술 한 잔을 마시려고 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술잔을 막았다.
“우리 엄마는요...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시는 분이셔요. 그 때 내가 우리 엄마한테 장담했죠. 꼴깍... 우리 선생님은, 그런 사람 아니라고요...”
술에 취한 은희는 과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그 분위기에 취한 나도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건 누구도 모르는 우리 둘 만의 이야기, 아니구나 적어도 혜영이와 은희 어머님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우리 선생님은 날 사랑한다고, 나도 선생님 없으면 안 된다고요! 그렇게 장담했어요.”
사랑한다고? 분명 나도 그 때 널 사랑했다. 하지만... 그 때는...
그 때는 나는 사랑이 인생의 최상의 목표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 사랑보다도 우선시했던 것이 있었다.
은희는 약간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고기 불판은 이미 빠졌고 식은 고기만이 지금 내 마음처럼 파 무침 위에 버무려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엄마가 내게 말했어요. 선생님이... 선생님이 널 버렸다고요. 그 날 선생님이 우리 엄마를 만난 그 날 말이에요.”
“우선은 가정학습을 신청하겠어요... 지금부터 수능이 끝날 때까지 한 달이에요. 이의 없으시죠? 행정적인 처리는 선생님이 알아서 해 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 은희... 수능은...”
은희 어머니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나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까 몹시 두려웠다.
“수술을 시키겠어요... 수술비는 당연히 선생님 몫이고요. 동의하시죠?”
나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은희에게는 단순히 낙태 수술이 아니에요. 그건... 휴...”
은희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는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녀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가 무서웠다. 그녀가 쥐고 있는 그 한 장의 패를 뒤집는 것이... 그것이 무엇일지 알지 못하는 것이...
“그리고 선생님은...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나도 이 일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어쨌든 우리 은희가 사랑한... 했던 사람이고. 또 이 일이 새어 나가봤자 상처 받는 건 우리 은희니까요.”
그 말에 나는 속에 꽉 막혀 있던 응어리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패가 악수는 아니었다. 그건 나도 살 수 있는 상생의 패였다.
은희 어머니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우리 다시 만날 일은 없겠죠?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생각을 잘 알았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나는 그저 멍하니 은희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당신은 남자로서 최악이에요.”
은희는 지금 울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선생님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예요. 선생님도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를요. 그런데... 그런데 선생님은. 흑흑흑.”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노부부가 우리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나는 소주를 한 잔 마셨다. 너무나 미적지근하고 씁쓸한 술이었다.
그 때 나는 어른이었지만 책임감이라고는 모르는 어린애였는지 모른다. 오히려 은희가 나보다 더 어른스러웠다.
어쩌면 은희를 사랑했던 것은 감정뿐이었을지도...
사랑은 감정에서 시작해서 육체로 이어지고 그것은 생명이라는 책임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 때 나는 그저 내가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뿐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은희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 사이에서 들리는 소문으로는 은희가 어떤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말뿐이었다.
담임인 내가 학생의 소식을 아이들 입을 통해서 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꼈지만 그건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내 잘못이었다.
우려했던 학교운영위원회의 호출 같은 것도 없었다. 그렇게 그 일은 누구도 모르게 내 인생을 비껴간다고 생각했다.
졸업식 날,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졸업장을 가지고 혹시나 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지만 결국은 오지 않았다. 대신 은희의 친구 소영이가 졸업장을 받으러 왔을 뿐.
우리는 고깃집에서 나왔다. 밖은 추웠다. 이제 제법 가을이 깊어가는 밤하늘은 맑았지만 우리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술기운만으로 한기를 이기기엔 무리였는지 은희는 얇은 겉옷 너머로 몸을 떨고 있었다. 내가... 안아 주고 싶었다. 그래도 될까?
물끄러미 은희를 바라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 술에 취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은희가 점점 내게 다가온다고 느꼈다.
아니면 내가 그녀에게 다가서는 것인지도...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은희를 안았다.
향긋한 체취가 찬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너무나도 부드러운 그녀의 몸, 내 가슴에 기대오는 작은 이마, 그리고 가만히 내 허리를 감싸오는 그녀의 두 팔.
“추워요... 선생님.”
나는 두 팔에 더욱 힘을 주어 은희를 끌어안았다. 내 품 속으로 더 깊숙이.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게 새로운 시련으로 다가오는 건지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 나는 내 품 안으로 추위를 피해 안겨온 이 작은 새를 꼭 품어주리라, 이번에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 날은 일요일 늦은 밤이었다. 나는 약속한 장소에 5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낡은 건물들 사이에 있어 누가 말해 주지 않는다면 거기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칠 작은 다방이었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의외로 넓은 공간이지만 손님은 역시 거의 없었다. 다방 제일 구석에서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그녀가 보였다.
나는 주먹을 다시 꽉 쥐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은희 어머님...”
그녀, 은희의 어머니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말없이 다시 자세를 단정히 했다. 굳이 우리 사이에 많은 말은 필요없을 듯했다. 나는 그녀 앞자리에 조심스럽게 가서 앉았다.
목이 타는지 은희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점원이 다가 와서 내 자리 앞에 물 한 잔과 메뉴판을 건네고는 돌아섰다.
“여기 오기 전에... 많이 생각했어요. 그리고 지금 선생님과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네, 이해합니다.”
은희의 어머니를 처음 만난 건 학기 초였다. 은희가 반장이 되고 으레 반장의 어머니로서 인사차 찾아온 것이 그녀와의 유일한 만남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너무나 차갑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녀는 다시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게 뭔지 아시나요”
나는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은희가... 은희가 상처 받지 않을까... 그거였어요.”
그 말을 마친 은희 어머니의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내 말 한마디에 내 인생은 끝장이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님.”
“죄송하다고요? 그게 다 인가요?”
은희 어머니의 목소리는 약간 높아졌다. 그녀도 그걸 의식했는지 손에 쥔 힘을 스르르 풀고는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그저 죄송하다는...”
은희 어머니는 테이블 위를 손으로 탁 쳤다. 올려 진 찻잔이 심하게 흔들렸다.
“저는 지금 선생님을 죽여 버리고 싶어요.”
은희 어머니는 차갑게 말했다.
“내 딸의 인생을... 아직 어리고 이제 곧 수능도 얼마 안 남았는데... 선생님, 그게 교육자로서 할 짓인가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교육자로서 이전에... 그게 남자로서 할 짓인가요?”
“...”
“당신은... 짐승이에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짐승보다 못해요. 짐승도 당신처럼 쾌락만을 ?지는 않아요.”
생물 선생인 내가 은희 어머니 앞에서 이런 말을 들어야한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다. 맞다. 나는 사랑이 쾌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나는 그녀의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난 그녀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은희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는 나를 마치 한 마리 벌레를 보는 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견디기가 너무나 괴로웠다.
“선생님 생각은... 제가 잘 알았어요.”
술에 취한 은희는 벌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말소리가 꼬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몇 잔의 술을 마셨는지 모른다. 하지만 은희가 지금 취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때 우리 엄마가... 무슨 생각이셨는지 아세요? 꼴깍.”
은희는 다시 술 한 잔을 마시려고 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술잔을 막았다.
“우리 엄마는요...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시는 분이셔요. 그 때 내가 우리 엄마한테 장담했죠. 꼴깍... 우리 선생님은, 그런 사람 아니라고요...”
술에 취한 은희는 과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그 분위기에 취한 나도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건 누구도 모르는 우리 둘 만의 이야기, 아니구나 적어도 혜영이와 은희 어머님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우리 선생님은 날 사랑한다고, 나도 선생님 없으면 안 된다고요! 그렇게 장담했어요.”
사랑한다고? 분명 나도 그 때 널 사랑했다. 하지만... 그 때는...
그 때는 나는 사랑이 인생의 최상의 목표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 사랑보다도 우선시했던 것이 있었다.
은희는 약간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고기 불판은 이미 빠졌고 식은 고기만이 지금 내 마음처럼 파 무침 위에 버무려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엄마가 내게 말했어요. 선생님이... 선생님이 널 버렸다고요. 그 날 선생님이 우리 엄마를 만난 그 날 말이에요.”
“우선은 가정학습을 신청하겠어요... 지금부터 수능이 끝날 때까지 한 달이에요. 이의 없으시죠? 행정적인 처리는 선생님이 알아서 해 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 은희... 수능은...”
은희 어머니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나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까 몹시 두려웠다.
“수술을 시키겠어요... 수술비는 당연히 선생님 몫이고요. 동의하시죠?”
나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은희에게는 단순히 낙태 수술이 아니에요. 그건... 휴...”
은희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는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녀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가 무서웠다. 그녀가 쥐고 있는 그 한 장의 패를 뒤집는 것이... 그것이 무엇일지 알지 못하는 것이...
“그리고 선생님은...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나도 이 일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어쨌든 우리 은희가 사랑한... 했던 사람이고. 또 이 일이 새어 나가봤자 상처 받는 건 우리 은희니까요.”
그 말에 나는 속에 꽉 막혀 있던 응어리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패가 악수는 아니었다. 그건 나도 살 수 있는 상생의 패였다.
은희 어머니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우리 다시 만날 일은 없겠죠?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생각을 잘 알았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나는 그저 멍하니 은희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당신은 남자로서 최악이에요.”
은희는 지금 울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선생님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예요. 선생님도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를요. 그런데... 그런데 선생님은. 흑흑흑.”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노부부가 우리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나는 소주를 한 잔 마셨다. 너무나 미적지근하고 씁쓸한 술이었다.
그 때 나는 어른이었지만 책임감이라고는 모르는 어린애였는지 모른다. 오히려 은희가 나보다 더 어른스러웠다.
어쩌면 은희를 사랑했던 것은 감정뿐이었을지도...
사랑은 감정에서 시작해서 육체로 이어지고 그것은 생명이라는 책임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 때 나는 그저 내가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뿐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은희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 사이에서 들리는 소문으로는 은희가 어떤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말뿐이었다.
담임인 내가 학생의 소식을 아이들 입을 통해서 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꼈지만 그건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내 잘못이었다.
우려했던 학교운영위원회의 호출 같은 것도 없었다. 그렇게 그 일은 누구도 모르게 내 인생을 비껴간다고 생각했다.
졸업식 날,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졸업장을 가지고 혹시나 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지만 결국은 오지 않았다. 대신 은희의 친구 소영이가 졸업장을 받으러 왔을 뿐.
우리는 고깃집에서 나왔다. 밖은 추웠다. 이제 제법 가을이 깊어가는 밤하늘은 맑았지만 우리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술기운만으로 한기를 이기기엔 무리였는지 은희는 얇은 겉옷 너머로 몸을 떨고 있었다. 내가... 안아 주고 싶었다. 그래도 될까?
물끄러미 은희를 바라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 술에 취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은희가 점점 내게 다가온다고 느꼈다.
아니면 내가 그녀에게 다가서는 것인지도...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은희를 안았다.
향긋한 체취가 찬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너무나도 부드러운 그녀의 몸, 내 가슴에 기대오는 작은 이마, 그리고 가만히 내 허리를 감싸오는 그녀의 두 팔.
“추워요... 선생님.”
나는 두 팔에 더욱 힘을 주어 은희를 끌어안았다. 내 품 속으로 더 깊숙이.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게 새로운 시련으로 다가오는 건지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 나는 내 품 안으로 추위를 피해 안겨온 이 작은 새를 꼭 품어주리라, 이번에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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