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부 배신
아주 오래간만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건 분명 기분 좋은 설렘이다. 하지만 약간 불안하기도 하다.
오늘 저녁에는 은희와 만나기로 했다. 같이 밥을 먹는 건 4년 만인가?
나는 어제 은희의 첫 수업 시연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밥을 사주고 싶다고 넌지시 말했고 그녀는 몹시 기뻐하며 흔쾌히 허락했다.
은희를 만나서 같이 밥을 먹는 건... 사실 다른 목적도 있었다. 첫 번째는 혜영이가 한 말을 확인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혜영이에게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물론 은희와 한 번 밥을 같이 먹는다고 그녀의 모든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 죄를 피하지 않고 직면한다는 점에서 내 나름 큰 용기를 낸 것이다.
백화점 입구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밝게 빛나는 백화점 전광등 아래 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만나고 또 헤어지고 있었다. 백화점은 그저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라 어쩌면 누군가를 위해 사고 또 누군가를 위해 파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에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가격과 함께 보이지 않는 감정이 묻어 있기 마련이듯.
손에 든 작은 선물 상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곳에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전에 도착해서 산 것이다. 안에는 은희에게 줄 핸드크림이 들어 있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애매한... 마치 지금 우리의 사이와 같다는생각이 들었다.
별로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그 시간은 아주 오래된 것 같았다. 나는 참다못해 담배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이내 내 등 뒤에서 은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불을 붙이지 못하고 다시 입에서 거두어야 했다.
“선생님!”
은희는 학교에서 입던 무거운 색깔의 정장이 아닌 밝고 따뜻한 느낌의 트렌치 자켓을 입고 있었다. 안에는 하얀 블라우스와 짧은 남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주말이라 그런지 길이 많이 막히더라고요.”
은희는 가볍게 내 팔을 안으며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삐죽였다. 순간 지나치는 많은 연인들처럼 우리도 한 쌍의 연인으로 보일까 싶었다.
“아니, 나도 조금 전에 왔어.”
“피, 거짓말... 제가 30분이나 늦었는데 그럼 선생님도 늦었단 말이에요?”
“그래, 나도 지하철이 많이 막히더라고.”
“뭐에요. 하하. 진짜 옛날 개그다.”
조금은 썰렁한 농담이 때로는 통할 때도 있는 법이다.
“우리 뭐 먹으러 갈까?”
하지만 차라리 썰렁한 농담을 하지 가능하면 이런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건 이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못한 사람이 늘 하는 실수다.
“글쎄요... 전 아무거나 좋아요.”
라고 말하며 은희는 나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예전에도 그랬다. 학생이면서 오히려 나와 만나고 있는 중에는 늘 나를 배려하는.
문득 백화점 유리문 너머 피자 광고가 보였다. 나는 눈이 시키는 대로 은희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 피자 먹으러 갈까? 너 옛날에도 피자 참 좋아했잖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피자라는 연결고리는 나와 은희를 과거로 연결시켜주었다. 나는 어쩌면 그녀로 하여금 과거 일을 떠올리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러웠지만 또한 그녀의 속내를 떠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음... 글쎄요...”
은희는 맹랑한 표정을 짓고는 갑자기 손바닥을 딱 쳤다.
“우리... 고기 먹으러 가요. 저, 고기 먹고 싶어요.”
은희의 뚱딴지 같은 말에 나는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그래. 고기가 먹고 싶니? 그럼 소고기?”
“아뇨, 돼지고기 삼겹살이요. 흐으음... 아까 집에서 나오는데 어디선가 고기 굽는 냄새가 나더라고요. 갑자기 어찌나 먹고 싶던지... 선생님 만나면 고기 먹으러 가자고 조를까 생각했어요.”
“그래? 이렇게 예쁘게 입고 왔는데 고기 냄새가 배면 어떻게 해?”
“호호, 그럼 자랑하면 되죠. 나 고기 먹었어요~ 하고요.”
지글지글 하고 단백질이 타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구수한 냄새가 가득했다.
“자, 선생님 아~ 하세요.”
은희는 한가득 상추 쌈을 싸서는 내 입에다 내밀었다. 나는 순간 주변을 의식하고는 멈칫했지만 은희는 손에 든 쌈을 더욱 들이밀었다.
“빨리요, 자~ 아~~~”
“이것 참.”
나는 입을 한껏 벌려 은희가 주는 쌈을 삼켰다. 은희는 흐뭇한 듯이 바라보다가 은근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선생님, 어때요? 맛있어요?”
“응? 음음음...”
나는 입에 가득한 쌈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 테이블에 앉아서 고기를 굽던 남자들이 은희를 훔쳐보고 있었다. 나는 괜스레 부끄럽기도 하고 우쭐하기도 했다.
약간 다르긴 하지만 예전에도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부담스러웠다. 고3이던 은희는 바쁜 일과 중에 옷을 갈아입을 틈이 없어 주로 교복을 입고 나와 데이트를 하곤 했었다.
그래서 음식점에서 밥을 먹을 때나 영화를 보기 위해 표를 예매할 때는 주변 시선이 제법 신경 쓰였다.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은희와 함께 먹는 식사도 여전히 내게는 약간 불편한 자리였다. 나는 갑자기 목이 타는 듯 했다. 그건 고기를 먹고 나서 느끼한 기름을 톡 쏘는 콜라로도 씻을 수 없는 갈중이었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요.”
나는 소주를 한 병 주문했다. 어차피 차도 가져오지 않았고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4년이란 긴 공백 속에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식당 아주머니가 소주를 한 병과 잔 두 개를 테이블 위에 놓고 갔다. 은희가 하나를 내 앞에 놓고 다른 하나는 자기 앞에 두며 말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응, 너 술도 마실 줄 아니?”
은희는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선생님은? 제가 아직 고등학생인 줄 아세요? 저 조금 있으면 대학 졸업반이에요.”
“하하, 그렇구나. 근데 어쩌지 선생님 눈에는 아직 여고생으로 보이는데.”
짧은 순간이었지만 은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4년 전 은희가 고등학교 시절이었을 때, 우리가 처음 사귀었을 그 때는 아직까지 우리 둘 사이에 꺼낼 수 없는 금기였기 때문이었다.
은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소주 뚜껑을 따고는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자, 선생님 한 잔 하세요.”
“그래...”
우리는 어색하게 첫 잔을 나누었다. 어색한 첫 잔은 지글지글 타오르는 고기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게 만들었다.
나는 참을 수 없어 다시 술잔을 채우고는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은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은희는 손에서 술잔을 놓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내 잔에 다시 술을 채우고 은희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우리 둘은 다시 술잔을 비웠다. 고기판에 고기는 진한 갈색으로 타고 있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니?”
나는 힘겨운... 아주 힘겨운 그 한 마디를 드디어 꺼냈다. 은희는 기다리고 있던 말을 마침내 듣게 되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시간이 빠르죠? 벌써 4년이나 지났어요.”
은희는 먹지도 않을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저는요... 잘 지냈어요. 선생님은 어때요?”
어떻게 지냈냐는 그 말은 외통수였다. 잘 지냈다고 하기에는 그녀가 없는 4년이 너무나 가혹했으며 잘 지내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아직 우리 둘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나는... ”
할 말을 찾지 못해 다시 술을 마셔야만 했다. 은희도 따라서 술을 마셨다. 4년이란 시간은 참 많은 것을 변하게 하는 구나. 그 순수하던 네가 이렇게 술을 마실 줄 알게 되다니.
은희는 술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은희의 하얀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물들었다. 은희는 웃으면서 어색함을 깨고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쩜 이렇게 그대로세요? 아직도 상화여고 꽃미남 하면 강현태 선생님이라고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도 여전하던데요.”
나는 그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어째서 내가 변하지 않았겠니? 너도 변했는데. 은희는 정지된 시간 속에 사는 듯 했다. 바로 내가 그녀를 배신하기 전 그 때 말이다.
갑자기 나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았다. 그건 술기운 때문이라고 변명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건 우리 둘 사이의 공백으로 인한 내 희석된 죄책감 때문이었다.
“널...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아니...”
은희는 눈을 내리깔고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널 잊으려고 했다는 말이 정확하겠지. 나는 언제나 새로운 사랑으로 빈자리를 채우려고 했어. 그건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내 죄가 잊혀질 거라 생각했던 거야.”
“선생님의 죄는 무엇인가요?”
은희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 않고 물었다.
“내 죄는...”
“너를 버린 거야.”
은희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우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주 오래간만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건 분명 기분 좋은 설렘이다. 하지만 약간 불안하기도 하다.
오늘 저녁에는 은희와 만나기로 했다. 같이 밥을 먹는 건 4년 만인가?
나는 어제 은희의 첫 수업 시연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밥을 사주고 싶다고 넌지시 말했고 그녀는 몹시 기뻐하며 흔쾌히 허락했다.
은희를 만나서 같이 밥을 먹는 건... 사실 다른 목적도 있었다. 첫 번째는 혜영이가 한 말을 확인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혜영이에게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물론 은희와 한 번 밥을 같이 먹는다고 그녀의 모든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 죄를 피하지 않고 직면한다는 점에서 내 나름 큰 용기를 낸 것이다.
백화점 입구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밝게 빛나는 백화점 전광등 아래 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만나고 또 헤어지고 있었다. 백화점은 그저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라 어쩌면 누군가를 위해 사고 또 누군가를 위해 파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에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가격과 함께 보이지 않는 감정이 묻어 있기 마련이듯.
손에 든 작은 선물 상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곳에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전에 도착해서 산 것이다. 안에는 은희에게 줄 핸드크림이 들어 있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애매한... 마치 지금 우리의 사이와 같다는생각이 들었다.
별로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그 시간은 아주 오래된 것 같았다. 나는 참다못해 담배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이내 내 등 뒤에서 은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불을 붙이지 못하고 다시 입에서 거두어야 했다.
“선생님!”
은희는 학교에서 입던 무거운 색깔의 정장이 아닌 밝고 따뜻한 느낌의 트렌치 자켓을 입고 있었다. 안에는 하얀 블라우스와 짧은 남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주말이라 그런지 길이 많이 막히더라고요.”
은희는 가볍게 내 팔을 안으며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삐죽였다. 순간 지나치는 많은 연인들처럼 우리도 한 쌍의 연인으로 보일까 싶었다.
“아니, 나도 조금 전에 왔어.”
“피, 거짓말... 제가 30분이나 늦었는데 그럼 선생님도 늦었단 말이에요?”
“그래, 나도 지하철이 많이 막히더라고.”
“뭐에요. 하하. 진짜 옛날 개그다.”
조금은 썰렁한 농담이 때로는 통할 때도 있는 법이다.
“우리 뭐 먹으러 갈까?”
하지만 차라리 썰렁한 농담을 하지 가능하면 이런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건 이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못한 사람이 늘 하는 실수다.
“글쎄요... 전 아무거나 좋아요.”
라고 말하며 은희는 나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예전에도 그랬다. 학생이면서 오히려 나와 만나고 있는 중에는 늘 나를 배려하는.
문득 백화점 유리문 너머 피자 광고가 보였다. 나는 눈이 시키는 대로 은희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 피자 먹으러 갈까? 너 옛날에도 피자 참 좋아했잖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피자라는 연결고리는 나와 은희를 과거로 연결시켜주었다. 나는 어쩌면 그녀로 하여금 과거 일을 떠올리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러웠지만 또한 그녀의 속내를 떠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음... 글쎄요...”
은희는 맹랑한 표정을 짓고는 갑자기 손바닥을 딱 쳤다.
“우리... 고기 먹으러 가요. 저, 고기 먹고 싶어요.”
은희의 뚱딴지 같은 말에 나는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그래. 고기가 먹고 싶니? 그럼 소고기?”
“아뇨, 돼지고기 삼겹살이요. 흐으음... 아까 집에서 나오는데 어디선가 고기 굽는 냄새가 나더라고요. 갑자기 어찌나 먹고 싶던지... 선생님 만나면 고기 먹으러 가자고 조를까 생각했어요.”
“그래? 이렇게 예쁘게 입고 왔는데 고기 냄새가 배면 어떻게 해?”
“호호, 그럼 자랑하면 되죠. 나 고기 먹었어요~ 하고요.”
지글지글 하고 단백질이 타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구수한 냄새가 가득했다.
“자, 선생님 아~ 하세요.”
은희는 한가득 상추 쌈을 싸서는 내 입에다 내밀었다. 나는 순간 주변을 의식하고는 멈칫했지만 은희는 손에 든 쌈을 더욱 들이밀었다.
“빨리요, 자~ 아~~~”
“이것 참.”
나는 입을 한껏 벌려 은희가 주는 쌈을 삼켰다. 은희는 흐뭇한 듯이 바라보다가 은근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선생님, 어때요? 맛있어요?”
“응? 음음음...”
나는 입에 가득한 쌈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 테이블에 앉아서 고기를 굽던 남자들이 은희를 훔쳐보고 있었다. 나는 괜스레 부끄럽기도 하고 우쭐하기도 했다.
약간 다르긴 하지만 예전에도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부담스러웠다. 고3이던 은희는 바쁜 일과 중에 옷을 갈아입을 틈이 없어 주로 교복을 입고 나와 데이트를 하곤 했었다.
그래서 음식점에서 밥을 먹을 때나 영화를 보기 위해 표를 예매할 때는 주변 시선이 제법 신경 쓰였다.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은희와 함께 먹는 식사도 여전히 내게는 약간 불편한 자리였다. 나는 갑자기 목이 타는 듯 했다. 그건 고기를 먹고 나서 느끼한 기름을 톡 쏘는 콜라로도 씻을 수 없는 갈중이었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요.”
나는 소주를 한 병 주문했다. 어차피 차도 가져오지 않았고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4년이란 긴 공백 속에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식당 아주머니가 소주를 한 병과 잔 두 개를 테이블 위에 놓고 갔다. 은희가 하나를 내 앞에 놓고 다른 하나는 자기 앞에 두며 말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응, 너 술도 마실 줄 아니?”
은희는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선생님은? 제가 아직 고등학생인 줄 아세요? 저 조금 있으면 대학 졸업반이에요.”
“하하, 그렇구나. 근데 어쩌지 선생님 눈에는 아직 여고생으로 보이는데.”
짧은 순간이었지만 은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4년 전 은희가 고등학교 시절이었을 때, 우리가 처음 사귀었을 그 때는 아직까지 우리 둘 사이에 꺼낼 수 없는 금기였기 때문이었다.
은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소주 뚜껑을 따고는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자, 선생님 한 잔 하세요.”
“그래...”
우리는 어색하게 첫 잔을 나누었다. 어색한 첫 잔은 지글지글 타오르는 고기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게 만들었다.
나는 참을 수 없어 다시 술잔을 채우고는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은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은희는 손에서 술잔을 놓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내 잔에 다시 술을 채우고 은희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우리 둘은 다시 술잔을 비웠다. 고기판에 고기는 진한 갈색으로 타고 있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니?”
나는 힘겨운... 아주 힘겨운 그 한 마디를 드디어 꺼냈다. 은희는 기다리고 있던 말을 마침내 듣게 되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시간이 빠르죠? 벌써 4년이나 지났어요.”
은희는 먹지도 않을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저는요... 잘 지냈어요. 선생님은 어때요?”
어떻게 지냈냐는 그 말은 외통수였다. 잘 지냈다고 하기에는 그녀가 없는 4년이 너무나 가혹했으며 잘 지내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아직 우리 둘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나는... ”
할 말을 찾지 못해 다시 술을 마셔야만 했다. 은희도 따라서 술을 마셨다. 4년이란 시간은 참 많은 것을 변하게 하는 구나. 그 순수하던 네가 이렇게 술을 마실 줄 알게 되다니.
은희는 술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은희의 하얀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물들었다. 은희는 웃으면서 어색함을 깨고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쩜 이렇게 그대로세요? 아직도 상화여고 꽃미남 하면 강현태 선생님이라고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도 여전하던데요.”
나는 그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어째서 내가 변하지 않았겠니? 너도 변했는데. 은희는 정지된 시간 속에 사는 듯 했다. 바로 내가 그녀를 배신하기 전 그 때 말이다.
갑자기 나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았다. 그건 술기운 때문이라고 변명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건 우리 둘 사이의 공백으로 인한 내 희석된 죄책감 때문이었다.
“널...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아니...”
은희는 눈을 내리깔고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널 잊으려고 했다는 말이 정확하겠지. 나는 언제나 새로운 사랑으로 빈자리를 채우려고 했어. 그건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내 죄가 잊혀질 거라 생각했던 거야.”
“선생님의 죄는 무엇인가요?”
은희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 않고 물었다.
“내 죄는...”
“너를 버린 거야.”
은희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우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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