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최은희와 해빙무드
[1]
다음날 아침에 지혜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안 일어나?"
"지금 몇 시지?"
"8시 넘었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니? 잠이 안 와?"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는데, 한수정언니가 전화했어. 언니 둘 다 한 시간 후에 호텔 로비에 도착하겠대."
"왜?"
"오로라 보러 가자고 하는데, 며칠 걸릴지는 모른대."
"오로라? 어디로 간다고 했지?"
"옐로 뭐라고 하던데. 까먹었어."
"엘로우나이프(Yellowknife)?"
"어. 맞다. 거기. 그런데, 언니가 오빠는 안 데리고 간대."
"어라? 나는 왜 왕따시키지?"
"오빠는 은희언니랑 다른 데 가야 한다는데? 오빠는 아무 것도 몰라?"
"전혀 모르는데."
"그럼 어제는 늦게까지 둘이 뭐했는데?"
"뭐하긴? 바에서 술 마셨지."
"진짜 해야 할 얘기는 안하고? 둘 다 정신을 다른 데에 제대로 팔고 있었군. 오랜 만에 만나서 그러나? 하하."
나도 지혜를 따라서 웃고 넘겼다. 옐로우나이프는 토론토나 벤쿠버 보다는 훨씬 북쪽에 있기 때문에, 지금쯤이면 가장 추울 때 이므로, 밤에 기온이 영하 40도 아래까지 내려갈지도 모른다. 내가 듣기로는, 밤에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티피(Teepee : 오로라 빌리지에 있는 텐트)에서 기다려야 하는데, 이 텐트가 아무리 난방 시설을 갖추고 있어도 이 정도 온도에서는 엄청 추울 것이다. 그런데 지혜는 지금 그런 추위에는 전혀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 한수정이 오늘 당장 출발하겠다는 말인지, 아니면 오늘은 준비만 하고, 다른 날에 가겠다는 것인지, 한수정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샤워를 하고, 한수정을 만날 준비를 했다.
[2]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수정이 다시 지혜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는 최은희와 함께 호텔에 도착하여 지금 1층 레스토랑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하아. .. 언니!"
"지혜. 잘 잤어?"
우리는 같이 빵, 커피, 쥬스 등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최은희는 한수정의 옆 자리에 앉아 있다. 어제 공항에서 본 최은희와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최은희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다. 어제는 차갑고 냉정한 여인이었지만, 오늘은 안타깝고 가슴 아픈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룻밤 사이에 최은희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변했을 것이다. 그것도 한수정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수정과 최은희는 지혜와는 이야기를 한다. 지혜는 이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지 수능 시험을 치던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두 여자는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한다. 같은 식탁에 앉아는 있지만, 나는 말 그대로 왕따이다.
이 답답한 상황을 정면돌파를 하는 방법이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오로라 여행에 대하여 묻기로 하고, 조심스럽게 한수정을 불렀다.
"수정아."
"어? 왜?"
"지혜랑 옐로우나이프(Yellowknife)에 간다며?"
"얘기 들었구나. 지혜가 캐나다에 왔는데, 오로라는 보고 가야지. 안 그래? 지난 번에 내가 병원에 있을 때는 지혜가 고생만 하고 갔으니까, 이번에 내가 미안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데리고 간다고."
"언니. 감사합니다. 헤헤."
"며칠이나 있을 생각인데?"
"글쎄. 거기 가서 있으면서 오로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3일에서 5일 정도? 1주일은 나도 머무를 수 없어. 그런데 지혜는 예쁘고, 마음도 착하니까,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아이 참. 언니도 .."
"오로라를 보려면, 밤에 티피(Teepee) 텐트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거든. 엄청 추울텐데. .."
"필요한 것은 거기 가면 다 빌릴 수 있거든요. 물론 기본적인 것들은 가져가야지. 나는 괜찮고, 지혜는 은희언니 것을 빌려가면 돼. 벌써 짐은 다 싸서, 차에 실어놨어. 너도 참 이상하다. 그런 걱정을 네가 왜 하는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지혜를 거기로 데려가서, 꽁꽁 얼게 하기라도 할까봐 걱정되니?"
"그게 아니라 .. 뭐라도 사야 하지 않을까 해서. 여기서 몇 시간이나 걸리지?"
"비행 시간만 8시간 이상? 여기서 캘거리(Calgary)는 여섯시간 정도, 캘거리(Calgary)에서는 두시간 정도를 더 가야 해. 우리는 캘거리(Calgary)에서 하루 밤 자고 갈 생각이야. 이제 됐지?"
"나는 왜 빼놓는데?"
"왜? 너도 가고 싶어? 그래서 삐쳤구나? 어이구우 이 삐돌아."
"아니. 삐친 것이 아니라 .."
"너는 은희언니랑 같이 해밀턴(Hamilton)에 가라. 지혜 아빠네 회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오라고. 언니는 오늘, 내일, 이틀 밖에 시간이 안 된대."
"지금 너한테는 이럴 시간은 있고? 바쁘다며?"
"나도 이번에 논문이 끝나는 것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미치겠거든. 그런데 먼저 검토할 자료들이 새로 발표된 것이 있어. 같이 일하는 애들한테 내가 그 자료를 넘겨줬으니까, 걔네들이 검토하고 정리하려면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걸려. 우선 그 작업이 빨리 해결되어야 한단 말이야. 이 틈에 나도 이번에 억지로 시간을 내는 거야."
"하이 .. 진짜 너무 고마워요. 진심이어요. 언니."
"이번에 지혜가 캐나다에 온 것이, 지혜한테 아주 오래 동안 두고두고 잊지 못할 여행이 되게 해야지. 진짜 좋은 추억이 될거야. 여기서 바로 갈거니까, 올라가서 짐 좀 챙기자."
한수정과 지혜는 방으로 올라갔다.
[3]
나와 최은희 둘만 남았다. 우리는 마주보고 앉아 있다. 나는 최은희를 쳐다보지만, 최은희는 고개를 숙이고 여전히 내 눈길을 피하고 있다. 어느새 우리는 정말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천근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우리 둘 사이를 막고 있다.
"누나. 너무 미안해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
"....."
"어제 수정이한테 다 들었어요. 내가 너무 경솔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네. 진짜 미안하고 죄송해요."
"......"
최은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자꾸 흔들린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 눈도 따라서 젖어 든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서서 화장실 쪽으로 갔다.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는 내 눈에 비친 최은희는 한없이 강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가냘프고 여린 모습이다. 그녀의 옆자리로 가서 와락 안고, 다독이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나는 어금니를 깨물면서 참았다.
한참 후에 최은희가 자리로 돌아왔다. 어색한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진짜 싫다. 쓰디 쓴 커피를 마시면서 혼미해지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해본다. 그런데 한수정이 최은희에게 나오라고 전화를 했다. 최은희는 일어나서 나를 쳐다본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최은희의 시선을 피하게 된다. 그녀를 똑바로 마주 쳐다볼 용기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레스토랑 출입문 쪽으로 저 만큼 나가자, 나도 계산대로 가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세 명의 여자들이 앞서가고, 나는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앞에서는 지혜와 한수정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최은희는 조용하다.
"언니는 완전 내 롤모델이고 멘토라니까요."
"지혜 너는 전에도 그런 소리를 하던데, 나라고해서 다 잘 하는 것은 아니거든. 특히 사랑만큼은 내가 하는 대로 따라서 하면 절대로 안 된다. 알았지?"
"그건 내가 봐도 쫌 그런 것 같아요. 나한테 남자 생기면, 나는 언니처럼 그 남자를 혼자 놔두지 않을 거예요. 그 남자를 꽉 붙잡아 놓고, 절대로 안 놔줄거예요."
"그럼 어쩌게? 스토킹이라도 하겠다는 말이니?"
"정 안되면, 그렇게라도 해야죠. 그러면 안 돼요?"
"누군가는 몰라도, 그 남자 아마 숨막혀 죽을 것 같다. 그런데 스토킹 할 때는 조심해서 해야 한다. 그거 한국에서는 완전 불법이래. 잘못하면 오히려 네가 쇠고랑을 차게 돼요."
"어머머. 세상에. 별게 다 불법이라네. 스토킹이 불법이면, 다른 여자한테 한눈 파는 것도 불법이라야죠. 안 그래요?"
우리는 주차장으로 가서 최은희의 차로 갔다. 최은희는 운전석으로 가고, 지혜는 뒤로 혼자 탄다. 한수정이 차에 타기 전에 나에게 묻는다.
"언니랑 얘기는 쫌 했어?"
"미안하다고 사과는 했지."
"그러니까 언니가 뭐래?"
"아무 말 없어. 그냥 그냥 울기만 해."
"언니도 참.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구만. 엎질러진 물을 울어서 뭘 어쩌겠다고."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가?"
"갔다 올게, 지혜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언니나 잘 부탁해."
"잘 갔다 와. 공항에 안나가도 되지?"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언니나 챙기라니까.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여기서 더 이상은 나도 못 해."
"알았어. 고마워.
한수정은 최은희의 옆자리로 탔다. 차의 문이 닫히고, 최은희의 차가 출발했다. 지혜가 한참 동안 나를 향하여 손을 흔든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보다가 방으로 올라갔다.
[4]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최은희를 생각하면 나 자신이 후회스럽고, 한심하다. 한수정을 생각하면 부럽고, 고맙기도 하다. 그리고 지혜를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혹시라도 지혜가 이 사건을 알게 될까봐 두렵다. 만일 여행 중에 혹시 한수정이 지혜에게 이 일을 이야기 한다면, 나는 진짜 말 그대로 끝장이다. 학교건, 회사건 다 집어치우고, 어딘가로 잠수라도 타버려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한참 있다가 최은희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짐 챙겨서 12시에 호텔 로비로 내려와요."
나는 급하게 짐을 꾸려서, 시간에 맞춰서 1층으로 내려갔다. 최은희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
"지금 해밀턴으로 바로 가요?"
"어."
"지금 출발하면 한 시간 정도 걸리나?"
"어."
그녀의 대답은 짧고, 작은 목소리여서 들릴락말락 한다. 그래도 최은희가 대답을 하기는 한다. 우리는 호텔을 나와서 주차장으로 갔다. 나는 뒷좌석으로 내 짐과 최은희의 짐을 실었다. 그런데 최은희가 내 차의 키를 달라고 한다.
"길 모르지? 운전 내가 할게."
드디어 최은희의 입에서 긴 말이 나왔다. 나는 너무 기뻐서 날기라도 할 기분이다. 우리는 차에 타고 안전벨트를 했다. 그녀는 시동을 걸기 전에 내게 말했다.
"여기서 거기까지는 70 킬로미터 정도로 계산하니까, 차가 밀리지 않을 때에는 양쪽 시내 구간을 합치면 한 시간보다 약간 더 걸려. 지금은 토요일이라서 훨씬 더 걸릴거야. 피곤하면 한숨 자도 돼."
"나, 하나도 안 졸려요."
"고속도로로 빨리 달릴까? 아니면 온타리오 호수(Lake Ontario)를 따라서 나 있는 길로 천천히 갈까? 그런데 도로 양쪽으로 나무들이 많고, 도로도 호수에서 약간 떨어져 있거든. 그래서 호수가 훤히 보이는 것은 아니야."
"누나. 급한 일 아니면, 호수 안 보여도 호수 옆길로 천천히 가요. 시간은 충분하지 않나요?"
"알았어. 지루하다고 졸지 마."
천만의 말씀. 지금 내가 졸릴 리가 없다. 최은희의 닫혔던 입이 열리고, 드디어 말문이 터진 것 같다. 그녀가 하는 말이 갈수록 길어진다. 혹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은희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온타리오 호수를 향하여 차를 몰았다.
"누나. 배 고프지 않아요?"
"벌써? 아침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나중에 중간에 먹을 만한 곳이 있으면 거기서 먹자."
"그래요. 지금은 나도 배 안 고프니까. .."
그런데 나는 지금 해밀턴에 무슨 일로 가는지를 전혀 모른다. 한수정이 무엇 때문에 가라고 했는지도 모르겠고, 또 관심도 없다. 내가 최은희와 같이 있으면서,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지금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아마도 최은희가 그 곳에 가야 하는데, 나보고는 최은희를 동행하라고 시킨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한수정은 우리 사이가 이 길을 오가면서 해빙무드로 전환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 같다.
우리는 중간에 다운타운으로 들어가서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군것질도 했다. 그러느라고 세시가 넘어서야 해밀턴시에 도착했다. 오는 데에만 거의 세시간 가까이 걸린 셈이다. 최은희는 내가 하는 농담도 받아주고, 같이 웃기도 했다. 얼음같이 차갑게 굳어있던 그녀의 얼굴에 예전처럼 웃음이 피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온몸에 짜릿한 전율까지 느낄 정도였다.
최은희는 제일 그룹의 캐나다 지사가 벌써 건물 공사를 모두 끝내고 업무를 시작했다면서, 나에게 구경을 시켜주었다. 그녀는 주말마다 하루나 이틀은 여기에 와서 일을 한다고 한다. 그녀도 은행 근무로 주말에는 쉬어야 하지만, 서전무와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한다. 한수정도 몇 번 같이 와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은 최은희가 너무 늦게 도착한 것 같아서, 오늘 토론토로 돌아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나는 최은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누나. 우리 오늘 토론토로 돌아갈 수 있어요?"
"거기 가면 뭐 할 일이라도 있어?"
"아뇨."
"그럼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일 마저 하고, 오후에 가자. 여기도 볼 만한 데 많거든."
최은희는 자기 일을 하겠다면서, 나보고는 혼자 나가서 시내 구경을 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 추운 겨울에 혼자 나가서 구경을 해야 할 정도로 내가 관광에 목마른 상태는 아니다. 나는 그녀의 사무실에 앉아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내가 버티고 있으면 일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면서, 나를 회사 정문까지 데리고 나와서 밖으로 쫓아냈다.
"딱 세 시간만 놀아. 일곱시쯤에 전화 할테니까 여기서 만나서 저녁 먹으러 가."
"잠은 어디서 자요?"
"당연히 호텔에 가야지."
"그럼 내가 방 얻어놓을까?"
"알아서 해. 요새가 시즌도 아닌데, 그럴 필요가 있어? 여행 왔으니까, 그냥 돌아다니면서 구경이나 하라니까?"
"알았어요. 이따 올게요."
나는 최은희가 다시 회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차에 올라서 시동을 걸었다. 네비게이션으로 지도를 보면서 우선 항구 쪽으로 출발했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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